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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터: 자오쯔양(趙紫陽) 전(前) 중국 공산당 총서기 생애(生涯)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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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터: 자오쯔양(趙紫陽) 전(前) 중국 공산당 총서기 생애(生涯)

CIA bear 허관(許灌) 2006. 8. 29. 18:24
자오쯔양(趙紫陽)은 1919년 10월 18일 중국 허난성(河南省) 화현(滑縣)의 부유한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혁명운동에 관심이 컸던 자오쯔양(趙紫陽)은 중학교를 중퇴하고13세였던 1932년 중국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으며 19세인 1938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중국 인민해방군 모체 팔로군(八路軍)의 근거지가 된 고향에서 항일 게릴라에 참여했고 화현당위원회(滑縣黨委員會)의 서기를 지냈다
젊은 시절 고향 인근 지역당에서 활동하던 자오쯔양(趙紫陽)은 일본군의 팔로군 토벌작전 당시 탈출하였고 국공내전 중인 1947년 류보청(劉伯承)과 덩샤오핑(鄧小平) 군대가 다볘산(大別山)에 진출했을 때 1948년 퉁바이산(桐栢山) 위어환 지구 구당위원회(區黨委員會) 부서기로서 토지개혁을 위해 활동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뒤 1951년 광둥성(廣東省)정부 토지개혁위원회 부주임, 1953년 당화남국(黨華南局) 농촌공작부장, 1955년 광둥성당위원회(廣東省黨委員會) 부서기로서 농촌합작화를 추진하였고 1956년 중국 공산당 광둥성위원회 서기 겸 광둥성 군구(軍區) 제1 정치위원을 역임했다
1958년 인민공사를 만들 때 마오쩌둥(毛澤東)을 절대 지지하였고 1965년 타오주(陶鑄) 중남국 (中南局) 서기를 지낼때 광둥성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그러나 자오쯔양(趙紫陽)의 출세가도는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시련을 겪게 됐다 1967년 당시 중국 좌파들은 남부 중국의 대표적 당권파인 타오주(陶鑄) 공격하면서 실각하자 자오쯔양도 실각했다가 문화혁명이 수습되면서 1971년 내몽골자치구당위원회 서기에 복직했다
1972년 광둥성혁명위원회 부주임, 1973년 당중앙위원, 1975년 쓰촨성(四川省) 당위원회 제1서기, 1976년 쓰촨성(四川省)혁명위원회 겸 청두부대(成都部隊) 제1정치위원등을 지냈고 <4인방> 추방 직후 쓰촨성(四川省)에서 농업증산과 공업자유화 정책을 추진하여 경제책임제의 선구자가 되었다
1977년 덩샤오핑(鄧小平)파로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후보가 되었다
1979년 정치국원, 1980년 2월 정치국상무위원, 같은 해 4월 부총리가 되었다
그해 9월 화궈펑(華國鋒)의 뒤를 이어 총리에 취임하였고 1981년 6월 당부주석, 1982년 9월 정치국 상무위원, 1983년 총리등을 지낸 뒤 1987년 11월 총서기가 되었다
1989년 4월 급진 개혁주의자 후야오방(胡耀邦) 전(前) 총서기의 사망으로 베이징대학 학생들의 보수주의 비난 및 민주화요구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톈안먼(天安門)사태가 발생 , 같은 해 6월 총서기직에서 실각했다
그 후 자오쯔양(趙紫陽)은 그간 베이징 시내 중심 왕푸징(王府井) 부근의 푸창후퉁(富强胡同) 자택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생활해왔으며 병원에 간간이 입원해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자오쯔양(趙紫陽) 전(前)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2005년 1월 17일 베이징(北京) 시내의 한 병원에서 지병인 호흡기와 혈관 질환으로 사망했다고 관영 신화통신이 보도했다 향년 85세..
자오쯔양은 덩샤오핑 계열로 그는 자산계급출신이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를 추구한 분이지만 학력이 중학교 중퇴등으로 국제적 정세 파악 능력부족이나 서구화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등을 몸소 익히지 못했고 중국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여 실각했다 중국의 미래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공존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중국 자국 경제우선 정책으로 소비가 투자라는 경제원칙을 추구하고 있다 중국 사회의 민주화가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NLPDR)노선로 나아갈때는 중국지역의 각 종족(민족)의 분열로 하나의 중국이 무너질 수 있다 동북아 학생운동이 극단주의 운동 한 갈래가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이론이다

[자오쯔양(趙紫陽) 前 중국 총서기가 서거한데 따른 중국정치에 대한 영향은 지금으로서는 적을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에서는 급속한 경제발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학생의 정치에 대한 관심도 희박해져 자오쯔양(趙紫陽)씨의 사망으로 학생에 의한 민주화 운동이 재연될 가능성등은 지금 현재 적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런 한편 중국에서는 지금 급속한 경제발전의 영향으로 생겨난 빈부의 격차문제와 당간부에 의한 심각한 오직문제등 잘못 대처하면 공산당 정권을 동요시킬지도 모르는 다수의 불씨를 안고 있다
후진타오(호금도) 지도부는 앞으로도 계속해 산적돼 있는 문제의 해결을 꾀함으로써 공산당 정권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 사회안정을 유지해 갈 것으로 보인다 NHK 보도내용]


-1919년 10월 18일 중국 허난성(河南省) 화현(滑縣) 출생
-1932년 중학교 중퇴 후 13세때 공산주의 청년단(共靑團) 가입
-1938년 19세때 중국 공산당 입당
-1948년 퉁바이산 구당위원회 부서기 역임
-1951년 광둥성(廣東省) 인민정부 토지개혁위원회 부주임으로 토지개혁 주도
-1955년 광둥성(廣東省) 당 위원회 부서기로 농촌합작화를 추진
-1956년 중국 공산당 광둥성위원회 서기 겸 광둥성 군구(軍區) 제1정치위원
-1965년 광둥성위원회 제1서기 겸 당 중앙 중남국 서기
-1967년 문화대혁명으로 비판, 숙청
-1971년 복권
-1975년 쓰촨성(四川省) 당위원회 제1서기, 혁명위원회 주임, 청두(成都)부대 제1정치위원으로 농업진흥과 기업자주권 확대에 현저한 성과 거둠
-1980년 당 중앙정치국 상임위원 및 국무원 총리 피선
-1987년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 선임되고 이듬해 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됨
-1989년 6.4 톈안먼(천안문) 사태때 시위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숙청돼 공직을 박탈당한 채 연금조치 (덩샤오핑의 무력진압 결정에 반대한 자오쯔양은 덩샤오핑과 8명의 당원로들에게 일시에모든 궎란을 박탈당하고 무기한 연금상태로 유폐됨)
천안문 사태와 방조, 동조행위로 제거됨(소영웅주의 행동으로 제거됨)
-2005년 1월 17일 지병으로 향년 85세 사망
*滑--어지러울 골(滑)
*陶--질그릇 도(陶)
*鑄--쇠 부어 만들 주(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