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타:신간회 회장 허헌(許憲)과 큰 딸 허정숙(許貞淑) 여사 자료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동아시아 알(I=intelligence)센타:신간회 회장 허헌(許憲)과 큰 딸 허정숙(許貞淑) 여사 자료

CIA Bear 허관(許灌) 2006. 8. 8. 16:23
1.허헌(許憲, 1885-1951)
허헌은 지주계급의 아들로 19885년 함경북도 명천(明川)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와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공부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생활을 하다가 관직을 그만두고 변호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한국인 변호에 힘썼는데 특히 3.1운동의 민족대표자 33인 공판정에 불기소리(不起訴受理)를 제출한 일은 유명하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중앙집행위원장(회장)이 되었으며 민족단일당(民族單一黨)을 결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일대 민중운동으로 확산시키려다 투옥되었으며 변호사 자격도 박탈당하였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 좌익세력 결집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결성되자 수석의장에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창당된 남조선노동당의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
북한정권 수립기인 1948년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의장 곧이어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이 되었고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의장을 지냈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경 죽었다
*신간회(新幹會)
신간회는 1927년 민주주의를 표방한 좌우익 합작에 의해 성립된 민족운동단체이다
1926년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학생들의 애국운동에 자극되어 이루어진 국내의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 공산주의자간의 타협과 이에 결사를 허가해줌으로써 독립운동가의 동태를 파악하여 그들을 체포하려는 일제의 가장된 유화정책의 소산으로 탄생되었다
발기인은 신석우(申錫雨) 이상재(李商在) 안재홍(安在鴻)등 조선일보사계가 중심이 된 34명이었으며 활동 강령은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단결을 공고히 함,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등이었다
창립 당시 중앙본부의 회장단을 거의 민족주의 진영에서 독점해 사회. 공산주의계의 불만이 있었다 신간회에서는 민족. 자주.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국내외에 지회를 설치하기로 하여 1927년 5월 도쿄지회(東京支會)를, 7월에는 서울지회등을 설립, 1928년 말에는 국내외에 143개 지회와 3만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대규모의 전체대회는 개최하지 못하고 1929년 7월 전국복대표자대회를 소집하여 전체대회를 대행했다 이 대회에 사회.공산주의 진영이 회칙을 개정하고 대거 참여하여 그 결과 허헌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서울지회장에 선출된 조병옥(趙炳玉)이 허헌(許憲)의 취임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광주.목포등의 지회가 이에 가세하였다(전라도 지지를 받은 조병옥과 경상도 지지를 받은 허헌의 대결구도) 신간회는 좌우익간의 갈등 대립으로 분란을 계속하다가 좌익계가 부산지회를 통해 해소론을 제기 1931년 5월 16일 77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대회를 열고 해산 하였다
-남로당과 북로당 통합을 지휘한 사람은 소련군정 정치담당 고문 허가이었다 허가이는 소련공산당 출신으로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었고 북한 초기정부 실무자 중 한사람이었다
허가이는 박헌영의 보증인이었고 그들은 평화공존 흐루시초프 세력을 믿고 김일성 제거 작업을 추진하다가 미국과 남한정부 스파이로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한국의 사회주의: 인물(3) /김단야(金丹冶) 기억 저 편에서 드 높고 허망한
http://educate.jinju.or.kr/cgi-bin/read.cgi?board=history&y_number=360&nnew=1
허정숙의 아버지 허헌을 찾아갔다
신간회 회장은 하던 변호사 허헌은 역시 통이 큰 사람이었다
허헌은 단야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자기 집에 있는 것이 제일 안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단야는 허헌 집으로 옮겼다

2.허정숙(許貞淑, 1902-1991.6.5)
허정숙은 1908년 허헌의 큰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本名)은 허정자(許貞子)이다 허정숙은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간사이학원, 상하이 외국어 학교를 졸업한 뒤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하였다
1924년 5월 사회주의계 여성해방이론의 영향을 받아 결성된 조선여성동우회에 적극 참가했고 에성문제 이론화에 관심을 두어 <동아일보>에 수가이(秀嘉伊)라는 필명으로 <여성해방은 경제적 독립이 근본>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1925년 1월 주세죽(박헌영의 첫째 부인).김조이등과 함께 무산계급 여자청년들을 조직하려는 목적으로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했다 1926년부터 1년 6개월 동안 미국에 유학하여 여성해방이론과 사회주의 이론을공부하고 1927년 말에 본국으로 귀국했다
1927년 근우회에 적극 참가해 중앙집행위원, 상무위원, 서무부장, 출판부장등의 임무를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시위 사건이 1930년초 경성(서울)지방 학생시위운동으로 확산되자 그녀는 근우회 서무부장으로 있던 그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여학생과 함께 학생시위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아버지 허헌과 딸 허정숙은 감옥생활을 했다
허헌은 출옥 후 변호사 자격증을 박탈당 하였고 허정숙은 1931년 6월 사회주의 운동 혐의로 재수감되었다가 1934년경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김원봉의 의열단을 중심으로 중국관내의 5개 단체가 결집해 있던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으며 조선청년전위동맹 부대표로 활동하다가 1938년 중국 공산당 활동지구인 연안(延安)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항일군정대학 정치군사학과를 졸업한 뒤 팔로군 120사단의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조선민족해방을 위한 통일전선체인 화북조선독립동맹에 김두봉. 최창익등과 함께 가담하여 중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 조선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독립동맹 지부활동을 전개했고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 교육과장이 되었다
광북 후 조선독맹독립 지도부가 평양으로 입성했고 허정숙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서울로 왔다가 새로 개편한 독립동맹의 집행위원이 되어 월북했다
이후 1947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부장, 1948년 3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같은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같은 해 9월 문화선전상, 194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1957년 대외문화연락위원회 위원장, 1957년 사법상, 1959년 최고재판소장, 1958년 평화옹호 전국민족위원회 중앙위 상무위원등을 지냈다
이후 1960년대에는 공식적 요직에서 숙청되었다가 그 이후 다시 정치로 돌아왔으나 실권이 없는 상징적 자리만 맡았다 1965년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1972년 최고인민회의 부의장등을 역임했으여 1970년 대 이후 다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과 관련한 활동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대남활동과 대외활동을 벌였다
그녀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의 서기국장, 제6. 7.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민주여성동맹 대표단장등을 역임했다
*근우회(槿友會)
근우회는 신간회의 자매단체로 1927년 5월 27일 창립되어 여성 항일구국운동 및 여성 지위향상운동단체이다
여성의 굳은 단결과 지위 향상을 위하여 허정숙. 김활란. 유영준. 유각경. 정칠성. 홍애시덕등을 미국유학생 출신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조선여자의 단결을 공고화하고 조선여자의 지위향상을 도모함을 강령으로 했으며 a.여성에 대한 사회적 법률적 차별의 철폐 b.모든 봉건적인 인습과 미신타파 c.조혼방지 및 결혼의 자유 d.인신매매 및 공창의 폐지 e.농촌부인의 경제적 이익옹호 f.부인노동의 임금 차별 철폐 및 산전 산후 임금 지불 g. 부인 및 소년공의 위험노동 및 야업폐지를 행동강령으로 하였다 회의 운영은 서무. 선전조직.교양. 조사등 4부로 위원제에 의하여 운영 되었고 1928년에는 40여 개의 지회, 제4회 정기대회 때는 70여개의 지회와 북간도. 도쿄(동경). 오사카등 외국지회가 설립되었다 1931년 신간회 해체의 영향으로 1년 뒤 자연 해체되었다
근우회와 같은 목적 같은 이념의 운동을 추진하는 신간회의 제반 움직임은 근우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930년 1월 항일민족주의적 학생운동에 근우회간부가 조직 지도에 관련되었다 하여 허정숙 정칠성 박호진 박차정등이 체포 구금되었으며 강정회등도 공산주의 재건 운동에 관련되어 체포 구금되었다
http://home.kidp.or.kr/1999/k9628366/main/sub02/sub05/main09.htm
-허정숙도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 사회주의자로 생활했으며 그녀는 남한 출신답게 독립운동과 조국통일에 전념하다가 죽었다
http://preview.britannica.co.kr/spotlights/nkorea/person/b25h0215a.html
-노여류 혁명가 허정숙 여사를 추모하며
http://www.minjok.com/article/index.php3?type=nkdata&code=1170
부모님을 따라 월북한 두 자녀는 한국전쟁 때 허정숙은 북한에 남고 여동생 허근욱은 남쪽으로 월남했다
남한에 살고 있는 허정숙의 친여동생 허근욱씨가 쓴 소설책 <내가 설 땅은 어디냐>
-박정애와 허정숙
http://news.media.daum.net/politics/north/200412/27/donga/v8019451.html
북한 여성 정치가 박정애(본명: 최베라)와 허정숙(본명: 허정자) 이후에 북한 고위급으로 진출한 여성들은 김일성의 처인 김성애와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등 모두 김일성 가족들이다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 (삼천리 191년 7월 호)
"나이 삼십이전에 애인을 세번 가졌고 가졌을 적마다 옥동자를 얻었던 자유주의자 허정숙의 행실을 비꼬는 목소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http://www.personweb.com/sub5/sin_y_s/2004_10_08/01.html
허정숙의 첫째 남편 임원근이 구속 중이던 26년 북풍회의 송동우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화제가 됐던 허정숙은 훗날 연안파의 거두가 된 최창익과 세번째 결혼을 하고 중국 망명길에 오른다
-발굴, 김관호의 잊혀진 삶(東愚 金觀鎬, 1889-1958)
허정숙의 주선으로 화가 김관호와 김일성의 만남
http://www.wolganmisool.com/200112/02_artist/artist_06.htm
그들은 당시 선전상 허정숙에게 김관호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같이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였고 이를 허정숙은 김일성에 보고하여 마침 김관호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박헌영의 장녀가 추는 몽고식 무용 관람하며
http://nk.chosun.com/news/news.html?ACT=detail&res_id=4076&page=1
김일성을 대표로 한 북한 초대 각료들은 1949년 2월 소련을 방문, 경제와 문화분야 전반의 협력관계를 구축한다 부수상 홍명희. 박헌영, 문화선전상 허정숙등이 포함됐다
일행은 차이코프스키 음악당에서 소련국립무용단의 공연을 보고 그날 밤에는 박헌영의 장녀가 추는 몽고식 무용을 즐기기도 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최고 밀월기라고 할만 했다
-오! 하나님
http://user.chol.com/~songwoo/lbsjk105.htm
만경대 산기슭에는 <천석식당>이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강양욱 중앙위원장이 베푸는 오찬이 있었다 50여세로 보이는 허헌의 딸인 허정숙이 인사를 겸한 연설을 했다
허정숙은 기독교학교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이며 미국 유학생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었다
-민족과 운명(民族-運命)
김정일의 지도로 창작되고 있는 북한 최대의 다부작(多部作) 예술영화
http://preview.britannica.co.kr/spotlights/nkorea/arts/b08m2155n0.html
처음에는 남한 출신의 월북자나 친북 성향의 사람을 소재로 삼았지만 이후에는 북한의 혁명가, 노동자, 카프작가등을 그리고 있다
최덕신을 모델로 한 최현덕편(제1-4부), 최홍희와 그의 아내를 모델로 한 차홍기. 홍영자편(제6-10부), 이인모를 모델로 한 이정모편(제11-13부), 윤이상을 모델로 한 윤상민편(제5, 14-16부), 허정숙을 모델로 한 허정순편(제17-18부), 귀화 일본인 여성을 그린 임은정편(제19-24부), 강태관 일가를 다룬 노동계급편(제25부 이후), 김일성과 연계되지 못한 카프의 비극을 그린 카프작가편 등이 제작되었다
-서른, 잔치는 끝나고(1930년대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의 후일담)
http://www.personweb.com/sub4/interview/weman55/t1.html
1924년에 창립된 <조선여성동우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적 여성해방론을 주장한 여성단체다 사실 이 단체는 조금 앞서 창립된 조선청년총동맹(김사국과 박헌영이 손잡은 사회주의 운동단체)의 사주를 받았다
경성여자청년동맹은 주세숙과 허정숙등이 주도한 단체로 박헌영의 계보었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사회의 온건적 진보진영의 지도자는 허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