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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對馬島) 개요(槪要)와 군사적 가치 그리고 주요 자료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대마도(對馬島) 개요(槪要)와 군사적 가치 그리고 주요 자료

CIA Bear 허관(許灌) 2006. 8. 5. 10:24
1.대마도 개요(槪要)
대마도는 한반도와 일본 규수(九州) 사이의 바다에 있는 섬이다
대마도의 면적은 706.43평방km이고 인구는 4만 5,000명(1993년)이다
대마도는 6개의 유인도와 70여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행정상 나가사키현(長崎縣)에 속하며 주로 사암(砂岩)으로 구성된 완만한 산지로 섬 중앙부의 아소만을 기준으로 남쪽을 우에시마(上島), 북쪽을 시타시마(下島)라고 한다
중세 이후 소씨(宗氏)의 지배지였던 이즈하라(嚴原)는 소씨의 성곽을 중심으로 발달한 소도읍으로서 한국과의 무역항이었으며 동해의 출입구로서 대륙과의 교통. 군사상 중요지점이었다
제2차대전 때에는 이 섬 전체가 요새지대였으며 특히 러.일전쟁 때의 쓰시마해전은 유명하다 동해안에서는 오징어잡이, 아소만에서는 진주양식이 활발하다
농업은 자급적 성격이 강하고 논은 대부분 간척지이다
일찍이 목탄. 납. 아연등을 생산했으나 지금은 조림과 표고버섯재배를 하고 있다
중심 취락지는 우에시마의 이즈하라와 시타시마의 히타카쓰(比田勝)이며, 하카다(博多)와 고쿠라(小倉) 사이에 각각 정기 여객선이 취항하고 있다
미쓰섬(美津島)에는 공항이 있어 후쿠오카(福岡)와 나가사키를 연결하고 있다 또한 아소만 연안과 북부 해안들은 이키쓰시마국정공원(壹岐對馬國定公園)에 속하며 특히 아소만연안에는 경승지가 많다

(1)위치
한반도와 일본 규슈(九州)사이의 바다에 있는 섬
대마도는 동경 129도, 북위 34도 규슈본상(구주본상)에서는 132km, 부산에서는 불과 45km의 위치하고 있는 섬으로 위치상으로는 한국 땅이면서도 언어상으로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는 규수(九州) 최북단의 국경의 섬이다
부산에서 선박으로 40분 거리에 위치한 섬으로 근대이전에는 한반도의 민족 거주지
(2)면적
706.43(709)평방 km로 제주도보다는 작고 거제도 보다는 넓은 섬들
6개의 유인도와 70여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3)인구
4만 6,000명(2002년), 대마도의 수도인 이즈히라는 17,00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4)행정상 구분
나가사키현(長崎縣)에 속해 있으며 크게 상도와 하도로 구분 6개의 주로 나누어져 있으며 중심지는 모원주이다
(5)모국어--일본어
(6)대마도의 역사
대마도는 고대로부터 한반도와 일본을 이어주는 고리의 역할을 해왔다 심지어 일본이 쇄국정책을 쓰고 있을때도 이곳을 통하여 학술과 문화가 활발하게 전파되었다 그 중에도 아메노모리호쑤는 쓰시마(대마도)에서 활약한 유학자로서 한일교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교린수지라는 불리우는 당시의 한국어 입문서를 만들었으며 <서로 싸우지 말고 속이지 말며 진실을 갖고 교류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학술과 문화 뿐만 아니라 불교도 전래 되었으며 유명한 미키와치, 하사미 도자기도 이곳을 통하여 한반도로부터 전해졌다
1993년에는 <나가사키현 서울사무소>가 개설되어 더욱 깊은 우호관계에 있다
ㄱ.대마도 8월초 열리는 아리랑 축제
대마도 8월초 열리는 아리랑 축제를 볼때 대마도 원주민들이 가야족 중 아리나(허씨족)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리(阿里)-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ㄴ.조선통신사의 비
토요토미의 조선침략 임진왜란 후 쓰시마번(대마도) 국교회복을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그 결과 토쿠가와 막부시대 200년간 통신사가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였다 통신사의 방문으로 이루어진 활발했던 교류와 우호적인 관계를 21세기 한일우호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이즈하라에는 조선통신사의 비가 세워져 있다
ㄷ.고려문
ㄹ.최익현 선생의 순국비
ㅁ.동상여래 좌상
9세기경 통일신락시대에 제작된 귀중한 불상으로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ㅂ.바이린지 절
538년 백제 성왕에 의해 일본에 불상과 경전이 전파되었고 그 최초로 불교가 전파된 연고로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고찰이다 남북조시대의 오래된 경전과 8세기경에 제작되었다는 난생불이 있다
ㅅ.아메노모리 호슈
아메노모리 호슈는 17세기 당시의 일본의 한국어 담당 외교관으로 국가간의 교류에 있어 중요한 것은 진실된 믿음이라고 주창하고 선린외교를 몸소 실천한 위대한 국제인이었다 그가 저술한 교린수지는 일본 최초의 한국어 교재로 메이지시대까지 사용되었다
ㅇ.성신교린의 비
호슈선생이 주창한 외교정신을 새긴 성진교린의 비
(7)대마도의 특징
대마본섬을 외에 109의 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사람이 사는 곳은 5곳이고 전 섬의 89%가 산악이고 원시림에는 본토에 볼 수 없는 많은 대륙계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산해진이 또한 풍부하고 인정이 많으며 특히 옛부터 대륙(한반도)과의 인적, 물적 교류의 창구로서 많은 사적등 문화유산이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는 역사의 섬이기도 하다
-한반도와 일본열도 길 목(대마도를 어느 나라가 소유하는냐에 따라 태평양지역과 일본열도 지역 해상장악)
-태평양에서 동해의 출입구로서 대륙과의 교통. 군사상 중요지점(러일전쟁때의 쓰시마해전과 제2차대전 때에는 이 섬 전체가 요새지대로 사용함)
(8)대마도의 생산품
ㄱ.농업--쌀 농사(간척지 논으로 쌀생산이 잘 되지 않아 엣부터 쌀 수입을 대부분로 한반도에서 했다)
ㄴ.어업--동해안(오징어잡이), 아소만(진주양식)
ㄷ.산림과 광물--목탄, 납, 아연등을 생산했으나 요즘은 조림과 표고버섯재배를 하고 있다
(9)대마도 향토음식---회와 흑돼지 음식

2.대마도의 군사적 가치
(1)대마도의 군사적 가치
-대마도는 고대로부터 한반도와 일본을 이어주는 고리의 지위와 역할을 해왔다 대마도는 한국과의 무역항이었으며 동해의 출입구로서 대륙과의 교통. 군사상 중요한 지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때에는 이 섬 전체가 요새지대였으며 특히 러.일전쟁 때의 쓰시마해전 전투지역이다
-일본정부의 한반도 군사적 행동의 기지었다 그리고 한반도(조선반도)정부의 일본 열도 군사적 행동의 기지이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45km이고 규슈본상(구주본상)에서는 132km이다 일본과 대한민국 정부간의 해상전쟁에서 승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섬이다
-대마도 사람들은 대부분 대륙계 한반도 주민이면서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다

(2)한반도(조선반도)의 대마도 정벌
대마도 정벌은 고려말, 조선초에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세 차례에 걸쳐 대마도를 정벌한 일이다
왜구는 13-16세기 한반도와 중국연안에서 활동한 일본인의 해적집단을 총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주로 대마도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 하였다
대마도(對馬島) 도주(島主) 종씨(宗氏, 일본어 무네씨 또는 소씨)로서 이들이 대대로 대마도를 관리하며 살았는데 대마도는 인구가 적고 농토가 척박하여 농사에 적합하지 않아 기근을 면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더구나 당시 일본은 국내의 내환으로 식량의 구입이 어려운 상태였고 빈민이 증가하여 비상수단에 의한 물자의 공급이 요청되었기 때문에 중국과 한반도에서 왜구의 창궐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추진된 대마도 정벌은 수군의 확충과 화기의 발달이 뒷받침해 주었다 즉 고려는 초기부터 수군을 양성하였고 현종 때에는 도부서를 설치하여 전함을 건조하는 등 조직과 군비를 강화하였으며 말기에는 수군을 제정비하였다
화기는 1377년(우왕 3년)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20여 종을 제조하였고 후에 화포를 전함에 배치하여 왜구를 섬멸하였다
한편 최초의 대마도정벌은 1389년(창왕 1년) 박위에 의해서였다 박위의 정벌은 특히 우왕 재위 14년간 378회나 침입한 왜구 소굴이 대마도이기 때문인데 그는 1만의 군대를 이끌고 대마도에 도착하여 왜선 300여 척과 관사. 민가를 불태웠다
조선의 대마도 정벌은 1396년 조선태조와 태종 그리고 1419년 세종 1년도 있었다
태조는 조선초에 5도의 병선을 모아 대마도를 정벌하였는데 이 때 많은 왜구들이 투항하였다
왜구를 근절시키고 이들을 평화적 내왕자로 만든 것이 1419년의 기해동정(己亥東征)이었다 기해동정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비인현(庇仁縣)의 도두음곶(都豆音串)의 침탈이었다 이에 태종은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로 임명하고 중군을 거느려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 결과 대규모의 왜구가 없어지고 나아가 왜구가 평화적 내왕자로 변하게 되었다
1419년 세종 1년때에는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하고 일본열도정부의 항복을 받았으며 그 이후 대마도 도주를 조선정부에서 임명하였다 세종은 북진정책과 남진정책으로 국토를 회복하고 삼한의 후예로 구주지역까지 점령하려고 했지만 왜구의 저항과 일본 열도 정부의 항복으로 그만두었고 백두산과 두만강지역을 회복했다

-1389년 고려 창왕때와 우왕때 박위장군에 의하여 대마도 정벌
-1396년 조선 태조 5년때 대마도정벌
-1419년 세종 1년 대마도정벌과 조선정부 인사로 대마도주(총독) 임명
1419년 세종 1년 이종무 장군이 왜군을 추격하여 대마도를 정벌하고 일본본토의 항복을 받았던 곳이고 그 이후 조선정부 소국으로 다스렸다
-1945년 해방 후에는 해양대학교 초대 학장이셨던 정문기 박사가 이승만대통령에게 이곳을 한국 영토로 포함시킬 것을 권유하였으나 최남단을 울릉도(독도), 제주도, 거문도를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대한민국 영토에서 제외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마도(對馬島)의 뜻은 마산(馬山)를 마주보는 섬(島)이라는 뜻이다
조선초기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해 마산포를 출발하였다
*對-마주설 대(對) *馬--말 마(馬) *島--섬 도(島)
(3)<대마도 신라 속지> 해외 역사서 존재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3/005000000200503240654031.html
대마도는 신라의 속지였으며 토지가 척박해 연례적으로 신라의 원조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기록한 해외 역사자료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돼 독도분란 해법과 관련해 주목된다
특히 이 사료를 공개한 일본인 교수는 최근 악화되고 있는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감정적 대웅 보다는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분란을 해소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충고해 양국 국민사이의 공감대 형성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2005년 3월 24일 서울대 이현복 명예교수에 따르면 미국 출신의 선교사이자 한국사 전문가인 H. Hulbert(헐버트)씨가 1905년 출간한 "한국 역사(History of Korea)"에 대마도와 신라의 관계를 보여주는 내용들이 실려있다
35쪽 분량의 이 책에는 "It is important to notice that the island of Tsushima, whether actually conquered by Sil-la or not, became a dependency of that Kingdom"(대마도<쓰시마>가 신라에 정복됐든 아니든 그 왕국<신라>의 속지<屬地>가 됐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기술돼 있다
이 책은 일본 구마모토대의 시미즈 기요시 교수(언어학)가 "최근 독도분란이 한일관계의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한국 학자와 국민이 이 사실을 알기 바란다"는 내용의 e-Mail(이 메일)을 이현복 교수에게 보내면서 공개됐다
시미즈 교수는 <최근 독도문제로 한일관계가 나빠지고 있는데서 서로 싸우지만 말고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때가 때인지라 우리 모두 알아야 할 내용을 한국민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현복 교수는 <일본이 독도에 대해 터무니없는 주장을 일삼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감정적 대응보다는 역사적 근거와 기록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는 것이다 조선이나 고려가 아닌 삼국시대에 신라가 대마도에 대해 실질적 지배를 해왔다는 점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며 독도분란의 해법을 제시했다
이 책의 저자 헐버트는 1986년 미국에서 태어나 뉴 햄프셔주(州) 다트먼트대학을 졸업한 뒤 1886년(고종 23년)에 소학교 교사로 초청받아 한국에 입구간 것을 계기로 한반도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을사늑약 체결 후 고종의 밀서를 들고 미국 대통령과 면담을 시도하고 1907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대표단의 호소문을 세계에 알리는 등 한국의 국권 회복운동에 적극 나섰으며 1949년에는 국빈으로 내한했다 병으로 숨져서 서울 마포구 양화진의 외국인 묘지에묻혔다


(4)일본열도의 대마도 군사기지로 러일전쟁 승리 그리고 한반도. 중국등 침략기지
일본과 중국 한국등이 안보적으로 경쟁적이고 대결구도일때는 대마도는 한반도와 중국 대륙 침략기지이기 때문에 한국정부의 해군력으로 제압하거나 섬을 해체(폭파)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일본, 중국, 한국등이 협력과 평화적 공존으로 군사적으로 동맹군이 될때는 대마도는 일본과 한국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양국(兩國)의 지원으로 고도소비사회 문화 자유항구로 지정하여 독자적인 경제 사회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고 본다
대마도와 부산은 45km로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협조가 필요하다

3.대마도의 주요 자료
(1)(주)대마도 투어(對馬島 TOUR)
http://www.thusima.com
(2)대마도 정보
http://my.netian.com/~dblue1/f-1.html
(3)대마도(대마도 재발견>--독도역사찾기운동본부
http://www.dokdocenter.org
(4)한국, 샌프란시스코 조약때 대마도 영유권 공식 요구
http://script.imnews.com/world/article.asp?SeqNo=322089&CntsCode=A010000&CateCode=B040000

대마도는 부산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경제적 경체적 문화적으로 부산 김해에 종속되어왔다 그러나 대마도는 정치적으로 일본열도 지배를 받아왔고 모국어는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다 부산과 대마도 거리는 45km이고 구주와 대마도 거리는 132km이다
대마도가 경제적 문화적으로 풍부한 고도소비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유항으로 부산과 구주의 자유왕래 지역으로 규정화 할 필요가 있다

-마산시 의회, <대마도의 날> 조례 제정
경남 마산시 의회는 2005년 3월 18일 일본 시마네현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에 대응해 <대마도의 날> 조례를 제정했다 시의회는 이날 오후 109회 임시회를 열고 <대마도의 날 조례>안을 긴급 상정해 30명의 의원 가운데 출석 의원(29명) 전원 찬성으로 가결했다
이날 제정된 조례는 대마도가 우리 영토임을 대내외에 각인시켜 영유권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 조선조 초기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해 마산포를 출발한 6월 19일을 대마도의 날로 정한다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시의회는 당초 이날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폐기 촉구결의안을 논의하다 공격적으로 하자는 분위기가 강해 <대마도의 날> 조례 제정을 추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