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朴憲永) 생애(生涯)와 북한정부에 의하여 미국간첩으로 처형된 주요 자료 그리고 그의 처 주세죽(朱世竹)
박헌영(朴憲永)은 쌀장사를 하던 아버지 박현주(朴鉉柱)와 소실인 어머니 서산 이씨 사이에서 1900년 5월 1일 충남 예산군 신양면 신영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다 12세 되던 해인 1912년 예산군 대흥면 대흥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그해 그는 경성고등보통학교(現:경기고)에 입학하여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現: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계속 영어공부를 하는 한편 승동교회에 다니면서 미국유학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20년 9월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어 민족운동의 거점이었던 중국 상해(上海)로 갔다 상해에서도 조선중앙기독학교 청년회 부설강습소에 다니면서 영어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임원근(林元根, 허정숙의 남편)과 알게 되었다 이 당시 임원근. 김단야(金丹冶-고명자의 남편이자 나중에는 주세죽의 남편).최창식(崔昌植)등과 함께 김만겸의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에 입당 하였다 정식으로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프랑스조계에 위치한 사회과학연구소에서 공산주의 선전팜플렛을 번역하는 일에 열중하였으며 그해 고려공산 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1년에는 허정숙(許貞淑-허헌의 딸이며 임원근의 아내)의 소개로 뒤에 국내에서 결혼하게 되는 두살 아래의 주세죽(朱世竹-박헌영의 아내)을 만나 열애에 빠지게 하였다 1921년에는 늦가을 감단야. 임원근과 함께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키 위하여 모스크바로 가 다음해 1월 고려공산청년동맹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는 1922년 4월에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해 귀국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4년 1월 만기 출옥한 직 후 그해 2월 결성된 신흥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김찬(金燦). 신철(辛鐵)등과 청주. 대구등 전국 28개 도시를 순회하며 <청년의 사회적 지위> <식민지 청년운동>등의 주제로 강연을 하였고 기관지 <신흥청년>의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허헌(許憲)이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하였다 같은 시기에 국내 청년단체의 통일조직인 조선청년총동맹이 창립하자 한신교(韓愼敎). 주종건(朱鍾建). 최순탁(崔順鐸). 강제모(姜齊模)등과 함께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 9월 홍증식(洪增植)의 추천으로 <조선일보> 사회부로 자리를 옮겼으나 10월 15일 신일용(辛日鎔)의 <조선과 러시아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이 문제가 된 <조선일보> 제3차 정간사건으로 임원근. 김단야와 함께 해직되었다 1925년 4월 17일 김약수. 김재봉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열어 공산당을 조직했고 4월 18일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해 책임비서를 맡아 조직활동을 전개하다가 구속되었다 1927년 병보석으로 출감한 후 1928년 소련으로 탈출하였다 1928년 11월 국제레닌대학, 1929년 2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교육을 받은 후 1932년 12월 상하이로 돌아와 공산주의 운동에 전념하다 1933년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6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했다 1939년 출옥하여 조선공산당 제건운동의 한 조직인 "경성콤그룹"의 책임자로 추대되었다 1940-1941년 걸친 검거선풍으로 당 재건에 실패하자 전라남도 광주시 백운동에 있는 벽돌공장의 인부로 위장해 은신하던 중 8.15해방을 맞이했다 8.15해방직후 공산당 재건에 주력하여 장안파와 제건파를 통합하여 조선공산당 중앙기구를 구성 당 책임비서가 되었고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연합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미국에서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자 1945년 10월 23일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참여했으나 친일세력의 처리문제로 탈퇴했다 1946년 2월 남한 좌익세력의 결집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결성되자 여운형.허헌. 김원봉. 백남운등과 함께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1946년 5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의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자 1946년 9월 남한을 탈출, 입북하여 1946년 11월 남조신민당, 조선인민당을 조선공산당에 흡수 남조선노동당을 조직하였으며 남로당 위원장 허헌, 부위원장 박헌영으로 추대 되어 박헌영이가 실질적으로 남로당을 맡아 당을 지도하면서 금강정치학원에서 남파간첩(게릴라부대-이현상등 남부군 지휘부)을 양성했다
1948년 9월 9일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했다 그리고 1950년 4월 남북노동당이 합쳐 조선노동당으로 발족되어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당과 군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북한정부 서열 2인자가 되었다 그러나 1950년 남조선노동당의 핵심인물인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되어 활동이 현저히 약화되자 운동의 주도권을 북조선노동당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결국 남로당게열 숙청작업으로 남로당 보증인 허가이가 음독자살되면서 1953년 김일성에 의해 강동정치학원 책임자 이승엽등이 체포,기소되고 이후 주도권이 완전히 상실한 채 1953년 8월 3일 체포 되었다 그 후 평안북도 철산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다가 1955년 12월 5일 <미제의 스파이> 죄목과 반당. 종파분자. 간첩방조. 정부 전복음모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사형되었다 "박헌영은 일제시대 누구보다도 항일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지만 남쪽에서는 빨갱이로 북쪽에서는 미제의 앞잡이로 몰려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으며 아직도 남북 어느 정부에서 복권되지 않고 있는 민족운동가이다 그도 공산주의자보다는 민족주의자로 생활했기 때문에 일제식민지에서 살아남았고 소련이나 중국 그리고 미국이나 이승만, 김일성 어느 세력과도 연합하여 독립해방과 조국통일을 해보려고 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자 혁명가 한 분이었다."
월북 당시 모습
1.성(姓)과 이름, 생년월일 박헌영(朴憲永)은 1900년 5월 1일 충남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에서 영해(寧海) 박씨(朴氏) 부친(父親) 박현주와 서산 출신의 모친(母親) 이씨(李氏) 부인 사이에서 소실(첩)의 아들로 태어났다 (1)성(姓)---본관:영해(寧海) 박씨---경북(慶北) 영해(寧海) 박씨(朴氏) (2)이름-----헌영(憲永) (3)생년월일--1900년 5월 1일생 2.출신--충남 예산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태생 3.학력 -한문학교 공부 -1912(12세) 대흥보통학교 입학과 1915년 대흥보통학교 졸업 -1919년 경성고보(현: 경기고등학교) 졸업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영어반 수료 -1928년 11월 국제레닌대학 -1929년 2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 4.경력 -1921년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하이 지부 입당 이르크파 고려공산당은 이동휘선생이 창립한 단체로 노령정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이동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부통령을 지냈다 -1921년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 -1922년 4월 국내공산당 조직 활동을 하기 위하여 국내 귀국하다가 일본경찰 체포 그리고 징역 1년 6개월의 선고 받고 복역 -1924년 1월 만기출옥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 가입과 상무위원으로 활동 -1924년 4월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 당시 동아일보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허헌(許憲)선생의 도움으로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 -1924년 중순 조선청년총동맹 중앙검사위원 -1924년 9월 홍증식(洪增植)의 추천으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자리 이동 -1924년 10월 15일 신일용(辛日鎔)의 <조선과 러시아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문제로 <조선일보> 제3차 정간사건으로 임원근. 김단야등과 함께 해직 -1925년 4월 17일 김약수. 김재봉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립 -1925년 4월 18일 고려공산청년회 결성과 책임비서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 구속 -1927년 병보석으로 출감 -1928년 소련으로 탈출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대학과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교육 받음 -1932년 12월 상하이 공산주의 운동 -1933년 상하이 일본 경찰 검거 그리고 국내로 압송, 6년 형 복역 -1939년 출옥과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콤그룹> 책임 비서 -1940년-1941년 조선공산당 재건활동 좌절 -1941년-1945년 8월 15일 해방직후 전라남도 광주시 백운동에 있는 벽돌공장의 인부로 위장해 은신하던 중 8.15해방 맞이함 -1945년 8월 20일 박헌영 중심으로 여운형. 허헌. 김원봉. 한빈. 이주하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 -1945년 10월 23일 이승만선생이 귀국하여 결성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자 10월 23일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참여했으나 친일세력의 처리문제로 탈퇴 -1946년 9월 남한좌익세력의 결집체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과 여운형. 허헌. 김원봉. 백남운등과 함께 의장단 선출 -1946년 5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미국군정에 의하여 조선공산당 간부 체포령 -1946년 9월 소련제 잠수함을 타고 해주근해로 북한으로 입북 -1946년 12월 조선공산당 주축으로 조선신민당(김두봉),조선인민당(여운형)등을 흡수하여 남조선노동당 창당 남조선노동당 위원장 허헌, 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박헌영. -1946년 11월 남로당 창당과 함께 금강정치학원에서 남파간첩(게릴라) 양성소 설립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부수상 겸 외상 취임
사진 1949년 박헌영의 공개 결혼식에 참석한 김일성(왼쪽)이 환하게 웃으며 축하해 주고 있다.(박헌영은 두번 비밀공작 동거생활을 했지만 공개결혼 처음이었다)
-1950년 4월 조선노동당 창당, 남조선노동당과 북조선노동당 합당 조선노동당 위원장 김일성, 조선노동당 부위원장 박헌영 그리고 남조선노동당의 핵심인물인 김삼룡과 이주하등의 박헌영 핵심세력이 체포되어 활동이 현저히 약화되자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의 혁명) 운동의 주도권을 북조선노동당에게 넘주었고 남북 노동당이 합당 되었다 -1950년 4월 남북노동당 합당 이후 박헌영의 지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군사위원회 위원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남침과 함께 이승엽등 서울 방문 -1953년 8월 3일 반당. 종파분자. 간첩방조. 정부전복음모등의 7가지 죄목으로 체포 그리고 평안북도 철산에 감금, 고문 -1955년 12월 5일 사형 5.1955년 12월 5일 반당. 종파분자. 간첩방조. 정부전복음모등 7가지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됨---미국간첩과 남한정부 스파이로 처형 (1)반당과 종파분자 ㄱ.1950년 4월 남조선노동당과 북조선노동당 합당으로 조선노동당 창립 전후 주도권 싸움으로에 남조선 노동당 핵심 인물인 김삼룡과 이주하등을 팔아먹었다는 죄명 그리고 한국전쟁 전후 남로당 극좌모험주의 무장 폭동노선으로 남로당이 와해되었다는 죄명 ㄴ.1950년 4월 남북노동당 합당 이후에도 종파분자로 남로당 당수로 활동해왔다는 점 (2)간첩방조--미국간첩과 남한정부 스파이 죄명 ㄱ.미국 간첩행위 박헌영을 위하하여 이승엽. 임화 이강국등이 정권을 전복음모를 꾀하고 미국 제국주의들을 위한 간첩행위를 해왔다는 것이다 http://nk.chosun.com/board/read.php3?table=bbs_dong&forum_id=3&no=1925 이화여대 출신 이중간첩 김수임(미8군 헌병대장의 애처)는 박헌영. 이강국과 C.I.A사이의 연결선일 것이다 김수임과 미국 헌병대장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독일유학파 이강국은 김수임과 동거하다가 북한으로 넘어가 최대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박헌영과 함께 숙청당했다 일제시대에 박헌영은 아펜젤러나 미국선교사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C.I.A가 박헌영을 이용할때 일제때 친분이 있던 선교사를 이용했고 중간역할을 김수임이 했어요 김수임은 오제도 검사에게 체포되어 1950년 6월 24일 간첩죄로 사형당했구요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도 일제때부터 박헌영과 친한 사이였죠 -박헌영은 미국에서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자 1946년 10월 23일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참여했으나 친일세력의 처리문제로 탈퇴했다 -박헌영 재판 자료 일부 "박헌영은 1948년 6월 하지에게 간첩 연락으로 파견하였던 서득은을 통하여 1920년도 상해생활에서 조선민족으로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신자이던 현애리스를 자기의 첫 애인으로 하였고 제2차대전 후 미국이 남반부에 상륙하였을 때 상면하였던 씨씨아이지케(CCIGK)에서 미국군대로 비밀공작하던 현애리스를 비롯한 몇 사람의 미국 정보원을 구라파를 통하여 북반부에 파견하였으니 그들의 입국과 간첩활동을 보장하라는 하지의 지령을 받고 있던 차 추방당한 진보적 인사로 은폐하여 입국을 보장하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애리스를 중앙통신사로 또는 외무성에 리사민(이경선)을 조국전선의 주요한 직위에 배치시켜 주면서 이들의 간첩활동을 백방으로 보장하여 주었던 것입니다"(북한정부는 1920년부터 미국을 위한 간첩행위를 해온 박헌영이 하지의 밀명으로 현애리스와 이경선등의 간첩활동을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이경선은 1899년 평안남도 순천군 후측면 합포리에서 태어났으며 1942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 이후 이경선은 사회주의에 경도되었으며 그것이 해방 이후 새롭게 건설될 국가건설으로 이어졌다 해방직전 그는 미군 OSS(CIA)의 국내침투작전의 요원으로 미군에 입대하여 중국을 다녀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본주의의 죄악을 목도하고 공산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 같다 이름을 바꾸고 목사직을 버리고 나아가 기독교 신앙도 버렸다 그리고 미국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친북한적인 정치활동을 적극 나섰다 그 결과 그는 1949년 말 동유럽을 거쳐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국전선(남조선혁명전략기구)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과거 OSS(CIA) 요원 현애리스와 이경선(리사민)등이 북한 망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의심하였으며 고향도 주장과는 달리 북한이 아니었고 북한에 들어온지 5개월 내지 6개월 뒤부터 수상한 행동이 포착되어 감시가 강화되었다고 북한전직 고위관리는 증언했다 뿐만 아니라 1950년 3월 이들이 유럽여행을 요청하자 내무성에서는 허가를 내주지 않았는데 박헌영의 외무성측에서 출국사증을 내주어 출국하자 모스크바공항에서 이들의 몸과 짐을 수색하니 군대 관련 비밀자료등이 다시 발견되어 강제로 북한에 귀환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이들이 미국간첩임을 밝혀졌지만 박헌영 사건이 터진 이후에 이 사건이 다시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1920년부터 미국을 위한 간첩행위를 해온 박헌영이 하지의 밀명으로 현애리스와 이경선등의 간첩활동을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북한당국은 사건을 1920년에 박헌영의 애인이었다고 몰고 간 현애리스를 중심으로 진행시켰고 이경선은 부차적인 존제였다 http://user.chollian.net/~ikch0102/n-61.htm
-이강국과 임화는 미군방첩대 스파이였나(남로당 핵심 간부들이 주한 미군방첩대(CIC) 요원으로 활동)
해방 직후 결성된 조선공산당의 당수인 박헌영 직계인 이강국(초대 북한 외무성 부상).임화(작가) 등 남로당의 일부 핵심간부들이 주한 미군방첩대(CIC) 요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4일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 박사가 미 정부측에 비밀해제를 요구, 공개된 미육군 정보국 문서파일과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던 `베어드 조사보고서` 에서 드러났다. 이강국은 6.25 직전 간첩혐의로 체포된 이화여전 출신 김수임과 연인 사이였다. 李는 당시 미군정의 실력자였던 베어드(미8군 사령부 헌병감.대한민국 경찰 최고고문)대령과 동거하던 金을 이용해 남한의 경찰 및 군의 고급기밀, 정부의 1급비밀을 빼냈던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미 육군부가 1950년 8월부터 3개월에 걸친 조사 뒤 작성한 2백여쪽에 이르는 베어드 조사보고서는 이에 대해 대부분 `증거 불충분` 으로 결론짓고 있다. 李가 金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미군에게 불명예를 안겼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의도적이건, 부주의 때문이건 간첩 이적행위에 관련된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강국이 김수임을 통해 남한 정보를 수집해간 것이 아니라 거꾸로 베어드 대령이 金과 연결된 李를 통해 북측 정보를 수집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CIC가 49년 작성한 또 다른 비밀문서에는 이강국이 CIC 요원이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어 그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 문서에는 또 임화와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남로당 선전부장 등이 CIC와 연계돼 있어 CIC가 좌익조직에 광범위하게 정보원을 침투시킨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한편 국편위는 4일, 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CIC 요원이었으며 安에게 암살을 지시한 인물은 극우 테러리스트 집단인 백의사(白衣社) 단장 염응택(일명 염동진)이었다는 자료를 공개했다.
ㄴ.남한 간첩행위 (ㄱ)박헌영이가 남한 민주당 신익희. 조병옥선생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도움 요청행위 (ㄴ)다시 쓰는 독립운동 열전(列傳): 통일운동가 박진목 선생 "독립운동 목적 통일 달성 못해" http://news.media.daum.net/society/affair/200505/09/khan/v9038148.html 해방 후 한때 남로당에서 활동한 박진목선생은 6.25가 나자 서울에 온 북한 내무상 이승엽을 만나 동족간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또 북한에 가서 전쟁을 끝내는 소위 <종전운동>을 벌이다 남북으로부터 간첩과 미군 스파이로 각각 몰려 감옥에 가기도 했다 북한 김일성은 1953년 12월 바로 이 만남을 박헌영. 이승엽등 남로당 출신을 숙청하는 빌미로 삼았다 (3)정부 전복음모 ㄱ.북한정부 군사위원 위원 겸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며 북한정부 2인자로 실질적 실권자 박헌영 부수상이 6.25직후 중국에 방문하여 "김일성 축출 제의" http://news.media.daum.net/foreign/others/200504/26/munhwa/v8934326.html 북한 초대 정권의 내각 부수상 겸 외상을 지낸 박헌영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9월말쯤 방중(防中) 중국 지원하의 반김일성 군사무장혁명(반김일성 군사쿠데타)을 일으켜 자신을 수반으로 하는 친중국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고 베이징(北京)의 정통한 소식통이 2005년 4월 26일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이 소식통을 그러나 박헌영의 이 같은 계획은 당(黨).정(政).군(軍)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던 마오쩌둥(모택동)주석의 지원반대와 적극 만류로 무산됐다면서 모택동 주석의 군사지원만 약속받은 채 귀국했다고 덧붙였다 이 소식통은 모택동주석이 미군 주도하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직후인 당시 박일우 내무상을 대동한 채 중국을 찾은 박헌영의 계획을 전쟁기간 중이라 적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김일성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생각에 거절한 것으로 안다면서 이와 관련해 박헌영과 모택동의 대화록이 현재 비밀이 해제되지 않은 중국 외교부의 1급 비밀문서에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소식통은 이어 이 내용은 모택동주석의 최측근이었던 스쩌(師哲) 전(前) 당 비서실 주임도 사석에 중언한 적이 있다고 밝히고 미국의 한국전쟁 전문 연구가인 중국계 미국인 천젠(陳健)교수가 자신의 저서와 논문등에서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박헌영은 이로 인해 결국 김일성의 격노를 사 나중에 미국의 간첩으로 몰리는 횡액을 입게 된다면서 그렇지 않았으면 실각하더라도 생명은 유지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와 관련 또 다른 소식통은 박헌영의 쿠데타 기도설(군사무장혁명)은 중국에서는 거의 확실한 근거를 가지는 학설이라고 전제하고 중국 외교부의 한국전쟁 관련문서의 비밀이 대거 해제되면 진실이 입증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ㄴ.박헌영 보증인 허가이가 소련정부 도움 요청등과 함께 이승엽등의 강동정치학원 중심으로 무장혁명을 시도했다는 죄명 ㄷ.박헌영이가 남로당 당원을 팔아먹고 미국과 연합으로 한국전쟁을 획책하여 북한을 공격했다는 죄
6.가족관계
박헌영과 주세죽 부부
(1)첫 부인--주세죽 주세죽은 박헌영의 부인이자 뒷날 김단야의 부인이기도 했다 주세죽은 박헌영과 1922년에 결혼했고 김단야와는 1934년에 결혼했다 주세죽(朱世竹)은 1921년 4월 상해에 와서 안정씨여학교(晏鼎氏女學校)에 입학하여 영어와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던 그 당시 김단야와 처음 알게 되었으며 허정숙의 소개로 뒤에 국내에서 결혼하게 되는 두살 윗 박헌영을 만나 열애에 빠지기도 하였다 상하이에서 국내로 들어 온 주세죽은 1925년 1월 허정숙과 함께 무산계급 여자 청년들을 조직하려는 목적으로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했으며 1925년 4월 18일 "고려공산청년회" 첵임비서 박헌영, 조사부장 김단야 그리고 주세죽은 후보위원으로 활동했다 <신만청년회>의 엉뚱한 폭행사건이 계기가 되어 조선공산당의 활동이 발각된 이른바 <신의주사건>으로 조선공산당과 공산청년동맹 집행위원회가 거의 모두가 체포되었다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 임원근과 그의 부인 허정숙등도 이때 검거되었다 고려청년동맹 지도부인 김단야. 박헌영. 임원근의 관계 못지 않게 그들의 부인이었던 고명자(김단야 부인), 주세죽(박헌영 부인), 허정숙(임원근 부인)의 관계도 긴밀했다 이 "붉은 여인" 셋이 청계천에서 흰발을 드러내놓고 "탁족"을 하며 다정하게 찍은 사진도 있다 1925년 11월에 체포된 박헌영은 엄청난 고문을 받은 탓에 "감옥에 정신까지 잃었고" 1927년 10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은 남편과 함께 체포되어 1개월 가량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된 뒤 6.10만세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되어 3주 동안 투옥되었다 주세죽은 3.1운동 때 함흥경찰에 체포되어 1개월 동안 유치장 생활 한 것까지 더하면 세 번째 감옥이었다
박헌영과 주세죽 그리고 딸 박 비비아나 박헌영은 첫 애 낳을 때가 되어 양수가 터지는 산모 부인 주세죽과 함께 1928년 8월 블라디스톡으로 탈출하였다 모스크바에서는 주세죽은 김단야를 또 다시 만나게 되었다 1928년 11월 모스크바에 온 박헌영은 딸 박 비비아의 아버지가 되어 "정치망명가들을 위한 집"에 머물면서 국제레닌대학의 문을 두드린다 이때 김단야는 국제레닌대학의 선배이자 소련공산당원으로서 박헌영의 신원증명을 했다 박헌영은 "매우 실천적이고 유능하며" "최상의 근면성을 발휘하면서" 국제레닌대학에서 공부하였고 그는 1929년 2월 소련공산당에 입당했다 주세죽은 그해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입학했다 박헌영은 모스크바에 살면서 김단야에게 글을 보냈으며 코민테른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렇게 둘은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역할을 나누어 함께 운동했다 박헌영과 주세죽은 국제레닌대학과 모스크바공산대학을 마치자 마자 1933년 1월 상해로 건너와 김단야와 함께 살며 본격적인 지하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7월 상하이에서 박헌영이 또 다시 체포된 것이다(김단야는 박헌영이 1933년 6월에 상해에서 일제경찰에 체포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주세죽은 1933년 7월로 기억하고 있으며 러시아 국방성 공식문서에도 7월로 적혀 있다) 박헌영은 정치적으로는 <콤뮤니스트>에 글을 싣고 출판하는 일을 했으며 조직적으로는 점 조직(조직과 조직으로 연락선이 아닌 사람과 사람으로 연락선)을 통해 상해와 국내를 연결하는 일을 했었다 기관지는 밀수품으로 위장하여 바로 나르기로 했다 이 일을 하려고 박헌영은 이재희라는 여자와 어떤 선원을 점 조직으로 활옹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임신하여 중간 연락 임무를 할 수 없게 되자 박헌영이 직접 선원을 만나게 되면서 불길한 징조가 시작되었다 박헌영은 끝내 일제경찰에 잡혔고 그가 시간을 끄는 사이에 김단야와 주세죽은 도망쳤다
앞줄 왼쪽에서 2번째, 김단야, 세번째 박헌영, 두번째 줄 오른쪽 3번째 주세죽
모스크바에 온 김단야와 주세죽은 1934년에 결혼했다 세 번째 체포된 박헌영이 죽게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주변상황이 그들을 결혼하게 만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들은 상해에서 지하운동을 하던 때보다는 훨씬 안정된 생활을 했다 김단야는 1936년까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조선과장을 했으며 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5개월 남짓 공부한 뒤에 외국인 노동자 출판부 조선과에서 교정원을 했다 비록 모스크바일지라도 이들은 조선혁명사업에 어떻게든 관계 맺고 있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1933년 6월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된 뒷 국내로 압송되어 6년형을 받고 감옥에 있었으며 1939년에 대전형무소에서 나온다 1937년에 접어들면서 김단야는 당재건운동에 뛰어들 기회를 다시 맞은 듯 했다 코민테른이이 김단야를 조선에 파견하여 "당사업"에 나세게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언간 일이 틀어지고 있었다 소련정보기관은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자료에 따르면 당 사업을 위해 그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은 권고할만한 일이 아니다"라고 통보했다 그리고 1937년 11월 5일 소련 내무인민부는 김단야를 느닷없이 체포해 버렸다 그때부터 김단야는 당재건운동가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내몰렸다 마침내 소련 최고 인민재판소 군사법정은 김단야에게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 폭동과 반혁명 테러활동을 목적으로 한 조직의 지도자로서 1급 범죄자"라는 판결을 내리고 1938년 처형했다 주세죽은 1938년 3월 15일 김단야의 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으로 위험한 분자"가 되어버린 주세죽은 "젖먹이 아이가 있는 점을 고려하여 모스크바시 경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주세죽에게는 백일이 갓 지난 사내아이 비딸리이가 있었다 김단야의 아이였다 아홉살 난 딸 박 비비아나는 이바노바시에 있는 국제유아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박헌영의 아이였다 그해 5월 22일 스탈린정권은 주세죽을 카자흐스탄으로 5년 동안 유배시켰다 주세죽은 1938년 9월부터 꼬박 2년 동안 피혁공장에서 개찰원으로 일했고 1940년 9월부터 1946년까지 까르마끄치구역 협동조합에서 근무했다 1946년 주세죽은 열여덟 살이 된 딸에게 <프라우다>지(紙)에 실린 기사를 오려 보냈다 신문기사 가운데는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주세죽은 박헌영이라는 이름 밑에 밑줄을 긋고 그가 아버지임을 딸에게 처음 알렸다 그리고 스탈린에게는 다음과 같은 청원서을 올렸다 "1937년 11월 5일 김단야가 체포되었고 그 뒤를 이어 저는 까자흐스딴으로 5년 동안 추방되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1943년에 유배형기를 마쳤습니다 한편 저는 12년 동안 제 남편 박헌영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상황은 저로 하여금 김단야와 함께 살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올해 1월에 <프라우다>신문을 통해 제 남편 박헌영이 살아 있으며 감옥에서 석방되어 다시 혁명활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친애하는 스딸린 동지! 제 남편 박헌영을 통해 저에 대해 확인하셔서 제가 조선에서 다시 혁명활동에 종사하게끔 저를 조선으로 파견해 주실 것을 간청하는 바입니다 저는 진정 출충실하게 일할 것이며 제 남편을 이전과 같이 보필 할 것입니다 제 요청을 받아들여 주시기를 간곡히 빕니다 만일 제가 조선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제가 모스크바에서 살며 제 딸을 양육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실 것을 빕니다 제 딸 박 비비아나는 지금 제136학교에서 제9학년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제 요청을 거절하시지 말 것을 간절히 빕니다 1946년 5월 5일 한베라(주세죽)" 이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주세죽은 박헌영의 부인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아들 비딸리이는 이미 죽었고 "엄마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라난" 딸을 만나지도 못했다 주세죽은 1946년 7월부터 봉제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다 그리고 1950년 중엽 사망햇을 것으로 추정된다 첫번째 남편인 박헌영마저 1952년말 "미(美) 제국주의 간첩" 혐의로 숙청되었으며 1956년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을까 주세죽은 소련에서 1989년 3월 복권되었다
자료제공:김단야(金丹冶), 기억 저 편에서 드높고 허망한--러시아연방공화국 국방성 문서보관소 김단야. 박헌영. 주세죽등의 자료 http://educate.jinju.or.kr/cgi-bin/read.cgi?board=history&y_number=385&nnew=1
(2)둘째 부인--정순년 박헌영의 둘째 부인 정순년은 1922년 2월 11일 충북 영동군 학산면 도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조선공산당 <경성콤그룹>의 구성원이자 8.15해방 후 <해방일보> 주필을 지낸 정태식의 5촌 당숙이었다 정순년은 열여덟 살 난 1939년에 당숙 정태식의 권유로 신학문을 배울 목적으로 서울에 올라갔다 그 후 조선공산당 <경성콤그룹> 책임비서 역할을 하면서 지하운동을 하는 박헌영의 잠행생활을 도왔다 청주와 서울에서 함께 기거하던 중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41년 3월에는 남자 아이 박병삼(월경스님)을 낳았다 하지만 정순년의 부모는 성례를 올리지 않은 딸의 임신에 분노했다 그해 여름 정순년은 어린 핏덩이를 버려 둔 채 부모의 손에 이끌려 귀향해야 했다 그때부터 정순년이 박헌영과 맺었던 인연은 끊겼다 물론 어린이 박병삼(원경 스님)을 친할머니 손에 맡기고 생이별을 해야 했다 그녀는 부모의 강압적인 권유로 1944년 인근 마을의 유능한 목수와 재가 결혼했다 두번째 남편이 한국전쟁 중에 죽은 뒤 원경 스님과 재회 1979년부터 함께 살았으며 1995년부터 원경스님이 주지로 있는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 만기사에서 지내왔다가 82세 나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7.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은 1953년 박헌영과 리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계열의 거물 북조선 정치인들이 미국의 간첩으로서 정부 전복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최고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정식 명칭은 미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이다.
이 사건의 피의자 13명 가운데 박헌영을 제외한 12명은 1953년 7월 30일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재판은 재빨리 진행되어 8월 6일 판결이 내려졌다. 박헌영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재판이 미루어지다가 2년 후인 1955년 12월 3일 기소되어 12월 15일에 판결을 받았다.
재판 결과는 피의자 전원 유죄 판결로,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원조와 윤순달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피의자들은 간첩 혐의와 반혁명적 모략, 무장 폭동 기도 혐의 등을 법정에서 전부 시인했다. 예를 들어 최후 진술에서 박헌영은 자신을 매국역적이라고 부르면서 그 죄악을 더 널리 알려달라고 말했으며, 리승엽은 생명이 둘이 있어 둘다 바친다 하더라도 사죄에는 모자란다는 표현을 썼다.
이 사건은 한국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동시에 당시 금강정치학원을 기반으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남로당 계열을 일거에 제거하기 위한 김일성 계열의 모략이라는 평가와, 이들이 미국의 간첩이었으며 김일성 축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여 처단된 것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있다
박헌영 리승엽 간첩 사건 피의자
박헌영 · 리승엽 · 조일명 · 임화 · 박승원 · 이강국 · 배철 · 윤순달 · 이원조 · 백형복 · 조용복 · 맹종호 · 설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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