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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김일성 장군 유족에 건국훈장 수여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전설의 김일성 장군 유족에 건국훈장 수여

CIA bear 허관(許灌) 2006. 7. 1. 23:22

전설의 김일성 장군 유족에 건국훈장 수여
(옥포誌 2000년 1월호
)

정    백  

  한인들 사이에 전해져 온 김일성장군에 관한 전설은 한인들이 그저 알고 있기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약탈하던 그 때부터 '김일성 장군'이란 용맹한 항일전사가 있어서 오랜 세월을 두고 韓滿국경 혹은 露滿국경에서 일본의 군경과 숱한 전투를 백전백승으로 치루어 낸 특출한 군략가이며 애국자였다는 이야기였다. 구전으로 퍼져 와 그야말로 전설적이었던 까닭에 주인공 '김일성'의 이름자가 金日成인지 아니면 金一成인지 또 아니면 金一星 또는 金日星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이러한 전설이 생겨날 만한 사실상의 근거가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金一成 장군'이란 항일투사와 또 한 사람, 같은 발음의 '金日成 장군'이라는 항일투사 두 사람의 투쟁사에 얽힌 이야기였었다. 그 전설적 김일성장군 그 중의 한 사람인 김경천 장군의 혈육이 8·15 50주년을 맞아 지난 98년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게 되었다고 하니 후손 된 우리로서 심히 민망스러워 몸둘 곳을 모르겠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작년 8·15 50돌 기념식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독립군 장령 김일성장군(金一成. 1888년 함남태생) 즉 김경천 장군에 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백마를 타고 번개같이 날아다녔다는 김경천 장군의 본명은 '김광서'로서 함경남도 북청출신이며 1911년 일본 육사 23기생으로 기병과를 졸업하고 도쿄 기병 제1연대에 근무한 바 있고, 1917년 1월에서 9월까지는 육군기병실시학교에서 용병법과 기마술을 교육받은 바 있으며 일본육사출신 한인 친목 모임인 "전의회"의 회장으로서 그 회원 중에는 일본 육사 26기 흥사익, 이응준, 27기 김석원, 김인욱 등 34명이 있었다. 앨범에 적힌 김경천(본명 김광서)의 생일은 1887년이나, 종로구청 호적계의 제적서고에 있는 그의 호적등본에는 1888년 6월 5일로 되어있으며, 1919년 6월 망명이전까지의 주소는 사직동 166번지인데 1912년 12월 2일 본인 출원에 의한 취적 등록이라 되어있고 본적도 이곳으로 옮겨져 있고, 본관도 김해에서 시흥으로 되어 있는데 본인 출원에 의한 정정이라 기록되어 있다. 동향인의 증언에 의하면 북청군 해안의 승평태생임이 틀림없다고 한다. 육사 재학 중에 이름을 김광서로 개명했고 그 이전의 이름은 김현충이며 김경천, 윤경천 등의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父 김정우는 구한말 포병부령까지 지낸 자로서 1857년생이며 1894년 5월 38세의 나이로 일본 경응의숙보통과에 입학하였다. 그의 반에는 윤치성(윤치영의 형) 노백린 등이 함께 했는데, 이들은 육사 11기로 1899년에 졸업하게 되고 김정우는 동경고등공업학교를 거쳐 포병공작창에서 총탄제조법을 익힌 후에 돌아와서는 군기창장을 지낸 바 있으며 1906년에는 윤치성과 함께 부령으로 승진된 바 있는 사람이다.

  1919년 2월 20일 김경천은 병가를 얻어 귀국하여서는 6월에 일본육사 3년 후배인 이청천(지대형)과 함께 만주로 탈출 신흥무관학교에 찾아가 독립군 교육부터 담당했다. 이 소식에 고무되어 열혈청년이 600여명이나 신흥학교에 몰려들었다 한다. 이 때에 구한국군 정위(대위) 신팔균도 함께 교관으로 있었는데 세 사람이 합심단결하여 조국광복을 쟁취하자는 뜻에서 天자 돌림 별호를 쓰기로 하여 신동천, 김경천(또는 윤경천, 母가 윤씨), 지청천(이청천, 母가 이씨)으로 서로 불렀는데 한인 사회에서는 이들을 남만삼천(南滿三天)이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이 남만 3천에 열혈 청년장교가 한 사람이 더 끼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철기(鐵騎)란 별호를 가진 이범석(李範奭)이었다. 그는 그해 봄에 중국의 운남성에 있는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장교로 배치되었는데 남만의 신흥무관학교가 독립군의 집결지라는 소문을 듣고 그해 여름에 그리로 찾아와서 남만 3천과 합세했다. 이들 4사람의 장교들은 당면 목표를 다음해(즉1920년) 3월 1일을 기해 국경을 넘어 조선 땅으로 진격함으로써 3·1민족봉기를 재현시키는 일대 계기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범석씨(1900-1972) 증언에 따르면, 1920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내로 진격하기 위한 거사 계획의 일환으로 김경천은 1919년 초겨울에 무기구입차 소련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때 시베리아에는 볼셰비키 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해 일본군이 출병해 있었는데 일본군의 한인 독립운동 근거지에 대한 공격 때문에 김경천은 독립군을 규합하여 日軍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원리에 따라 赤軍(볼셰비키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또는 白軍(反볼셰비키군)과 싸웠는데 이때에 그는 김일성이란 또 하나의 별호를 쓰게 되었다. 1920년대 전반의 독립운동 소식으로는 김경천에 관한 기사가 가장 으뜸으로써 그에 관한 기사내용이 허다하나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빙설에 쌓인 서백리아(西伯利亞)에서 홍백전쟁을 한 실지 경험담'이란 장문의 인터뷰 기사가 유명하다. 오늘날 누구나 읽어 볼 수가 있다. 전설의 김일성 장군 즉 김경천 장군은 매우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그 인터뷰기사 말미에는 그가 읊은 '시베리아의 별'이란 시가 실려 있는데 옮겨본다.

뜬구름도 방황하는 시베리아 별
칼을 짚고 출로 서서 흰뫼 저편을 바라보니
사랑하던 무궁화는 희미하고

자유에 목마른 사람이 이천만 애처롭다
뜻이 열 곳이 없으므로
흑룡수에 눈물 뿌려 다시 맹세하노라

  그러나 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 김경천에게도 불행은 닥쳐왔다. 동맹이었던 볼셰비키의 배신으로 독립전쟁의 꿈이 수포로 돌아갔다.

  1922년 가을, 일군이 시베리아로부터 철수하자 볼셰비키는 의리부동하게도 한인 독립군부대들에 대해서 赤軍에의 편입, 영외로의 추방 무장해제 등등의 조치를 취했던 바 "약소민족 해방" 구호에 고무되어 赤軍의 편에 섰던 김경천으로서는 그들의 배신과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부하대원들을 소만 국경으로 이동시켜 둔전병제를 실시하려고 간도방면으로부터 많은 대원들을 모집하여 병력이 일천여명에 이르게 되었고 구로지꼬 부근에 무관학교까지 설립할 계획까지 세웠으니 볼셰비키들의 의도와는 정반대 되는 입장에 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25년 4월 28일자 매일신보'에는 '김광서가 독립노선 문제 때문에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였다'는 보도가 실려있고 '1925년 6월 21일자 동아일보'에는 '김광서가 1924년 3월에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지부롤 니콜스크에 두고 제2차 국민회의를 조직하려는 등 그 활동이 매우 컸으며 초지를 관철하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여 대대적인 활동을 개시하고자 한다'라고 전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소식은 두절되었다. 그후 '1925년 7월호 '전의회'의 회보에 '김광서의 부인이 세 딸을 데리고 한국을 떠나 어디로 사라졌다'는 소식이 실려있는데 김경천(본명 김광서)에 관한 마지막 소식이었다.

  김경천과 시베리아에서 얼마 동안 활동을 같이 한 적 있는 "김 마트웨이"라는 사람(소련거주한인)이 20여년 전에 그의 회고록에서 밝힌 김경천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김경천은 그 후 소련의 여러 군사기관에서 군사지도원 또는 원동조선사범대학의 군사교관으로 있은 적이 있고 1933년부터 1936년까지는 소련당국에 의하여 투옥되었는데 그 원인은 밝혀진 바 없었으나 스탈린의 민족주의 말살정책의 일환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석방된 이듬해인 1937년에 다른 한인들과 함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는 비운을 맞게 되고 그곳의 한 협동농장의 작업반장으로서 노동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1939년 2차로 체포된 다음 그 후의 소식은 알 길이 없으나 풍문에 의하면 독소전쟁 발발후 서부 전선의 로고스프스키 장군 밑에서 대령계급으로 사단을 지휘하다가 1945년 초에 전사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런데 금번에 찾은 혈육으로부터 그분이 감옥에서 심장질환으로 병사했다는 사실과 소련정부가 그의 사망 17년만인 59년에 복권시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