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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육사 23기 기병과 출신 김광서(김일성)장군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일본육사 23기 기병과 출신 김광서(김일성)장군

CIA bear 허관(許灌) 2006. 7. 1. 23:55

1.일본 육군사관학교(日本陸軍士官學校)
일본 육군사관학교는 1874년 설립된 이래 1886년까지 제11기생까지 졸업하였으며 1887년에는 사관후보생제도가 되면서 1945년 제2차대전 종전때까지 제61기생까지 재학하였으며 졸업생은 5만 2,000명이었다
일본군부 및 정계의 거물을 수 없이 배출, 일본 근대사를 움직여 온 인물들을 양성해 낸 주요 교육기관의 하나이다
이들 졸업생 중 극동국제재판소에서 전범으로 교수형을 받은 7명 중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기무라 효타로(木村兵太郞).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부도 아키라(武藤章)등 6명이 이곳 출신이며 필리핀 지역 태평양전범으로 교수형 언도를 받고 죽은 한국인 출신 남방총군 병창감 겸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재직한 육군중장 홍사익도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그리고 종신형을 받은 16명 중 오지마 히로시(大島浩).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하타??로쿠(火田俊六). 우메즈 미지로(梅津美治郞). 미나미 지로(南次郞). 스즈키 사다이치(鈴木貞一). 사토 겐료(佐藤賢了). 하시모토 긴고로(橋本欣五郞)등 9명이 이곳 출신이다 이곳 출신 중에는 조선총독으로 악명을 남긴 미나미 지로(南次郞, 종신형 언도)와 고이소 구니아키(小藤國昭, 종신형 언도)도 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이 학교를 졸업한 한국인들은 8.15광복 후 군부의 형성과정에서 주도세력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5.16군사정변(군사혁명)을 통한 정치개입으로 한국 현대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학교와 인연을 맺은 한국인은 188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14명에 이른다
여기에 만주국 군관학교 예과 졸업자로서 이 학교 본과에 편입, 졸업한 27명을 추가하면 141명이 된다 양적으로는 이때까지의 이 학교의 졸업생 총수 5만 2000명의 0.3%에도 못 미치지만 이들이 한국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일본육사 23기 기병과 출신으로 일본군에 있다가 탈주병으로 그리고 항일운동가로 변신하여 이육사의 광야 시 주인공 김광서, 일제하에서 한국인에게 강요한 창씨개명을 끝내 않지 않었던 한국인 출신 일본육군 중장으로 필리핀군도 포로수용소 소장 홍사익, 일본군 중위로 근무 하다가 광복전후 한국광복군으로 귀순한 박정희등은 우리가 되새겨 보아야 할 인물들이다
일본의 한국 국권 침탈 이전에 이 학교를 졸업한 대표적 인물로는 우선 노백린(盧伯麟). 어담(魚潭). 윤치성(尹致成)등 11기생 21명을 꼽을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혁명일심회(革命一心會)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어지만 상당수가 무관학교의 교관을 지내며 대한제국 군부의 실력자로 부상 하였다 한편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박영철(朴永喆)등 15기생 8명은 러일전쟁 때 일본군을 따라 참전한 뒤 대한제국 군부의 중추를 이루어 군정 및 교육기관에서 활동 하였으나 일제의 강점 이후 이들의 활동 양상은 크게 두가지로 나타났다
우선 노백린.이갑. 유동열등은 국외로 망명, 독립군 양성에 주력함으로써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 하였고 나머지 대다수는 총독정치 체제 속에서 안주하며 일제의 충성스런 군인으로 활동 하였다 특히 박영철은 관직에 진출하여 도지사를 지내고 또 금융계의 실업계의 중진으로 활약하는 등 핵심적인 친일파로 변신 하였다
한편 일제의 국권침탈 이후 이 학교를 졸업한 인물로는 홍사익(洪思翊). 이응준(李應俊). 김정렬(金貞烈). 신태영(申泰榮)등 26기생과 김석원(金錫源). 정훈(鄭熏)등의 27기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실전에서도 명성을 날렸는데 특히 홍사익은 1944년 중장으로 진급, 한국인으로는 최고의 지위까지 올랐으며, 종전 뒤 필리핀 포로수용소 소장 재직시 포로들을 잔인하게 학대한 경력 때문에 전범자로서 처형되었다 또한 김석원은 중.일전쟁 당시 북중국에서 용명을 떨쳤으며, 정훈은 조선군사령부의 고위급 참모로서 한국인들의 동향을 감시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8.15광복이 되자 한국군 창설에 참여하여 장성의 지위에 올랐으며 국방부 장관(申泰榮), 체신부장관(李應俊)등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신생 대한민국 육군을 이끌어가기에는 고령이었고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에 실제 주역은 다음 세대의 사람들, 즉 계림회(鷄林會)그룹이었다
계림회는 1933년 이후 일본육사에 유학한 한국인들의 친목단체였다 이 단체는 일본이 패망할때까지 모두 72명의 회원을 갖게 되었는데 일본육사 유학생 총수의 꼭 반에 해당한다
26기. 27기생 배출이래 33년 49기생 입학 때까지 20여년 이상 한국인의 육사 입학은 단절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49기생 채병덕. 이종찬 이후 이용문. 이주일. 박정희. 이한림. 정내혁등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이승만정권기에 군부 핵심인물로 활동 하였고 특히 박정희는 5.16군사정변(군사혁명)으로 집권, 18년간 한국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다
(1)조선군 사령부(朝鮮軍 司令部)
1916년 일본 육군은 한반도에 상주할 2개사단(제19사단과 제20사단)의 병력을 편성하여 제19사단은 나남(羅南)을 근거지로 두고, 제20사단은 서울 용산에 두어 진해. 원산. 나진(羅津)에 둔 해군 요새사령부까기 관장하기 위해 용산에 조선군 총사령부를 두었다
(2)관동사령부(關東 士令部, 關東軍)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러시아와 맺은 포츠머스 조약에서 군 주둔권을 승인받고 러시아의 조차지(租借地)인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인수하여 관동주(關東州)를 만들고 관동도독부를 두었다
관동주와 남만주 철도의 경비를 위해 병력을 주둔시킨 것이 관동군의 시초이다
1919년 도독부가 폐지되고 그 밑에 있던 육군본부가 독립하여 일본천황 직속의 관동군사령부가 되었다 뤼순(旅順)에 관동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일본본토에서 교대로 파견되는 1개 사단. 만주독립 수비대. 뤼순요새 사령부. 관동헌병대를 그 아래에 두었다
관동군은 라오둥 반도 및 철도 연변을 지키게 되었고 일본의 대륙진출의 교두보로서 전략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 하였다 일본 왕의 직속이 된 관동군사령부는 중국을 침략하고 소련을 가상 적국으로 하는 일본의 국방방침에서 전위부대가 되어 있었다
1928년 장쭤린(張作霖)의 폭살사건을 일으키고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만주국의 건설을 주도했다 1931년에 사령부를 펑톈(奉川)으로 옮겼고 또 이듬해 신징(新京: 지금의 장춘)으로 옮기고 관동군사령관이 주만(駐滿) 특명전권대사. 관동장관(關東長官)을 겸하여 군(軍).정(政)의 실권을 장악, 실질적으로 만주를 지배 하였다
관동군의 병력도 대륙침략정책의 확대와 대(對) 중국전(中國戰). 대(對) 소전(蘇戰)에 대비하여 계속 증강되어 1933년 10만명이었던 병력이 1941년에는 70만명으로 늘어났다 관동군은 소련에 대해서 장고봉사건(張鼓峰事件,1938년), 노몬한 사건(Nomonhan사건,1939년)등 군사도발을 계속했고, 독일과 소련전쟁 개시전때에는 관동군 특별연습을 행하여 군사적 위협을 가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동북지방의 중국과 한국인의 항일무장세력의 암살에도 열중했다
1943년 제2차세계대전 중 전세가 악화 되자 대소(對蘇)방침을 전환 이른바 북방정밀책(北方靜謐策)을 취함으로써 관동군의 주력을 일본 본토 및 남방으로 이동시켜 세력이 약화 되었다 1945년 8월 9일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한 소련군의 참전으로 급속히 붕괴되었으며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의 무조건 항복으로 없어졌다
<일본은 소련이 일본과 전쟁을 회피할 것으로 내다보고 태평양전쟁을 시도했으며 관동군 주력부대를 남방으로 배치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요구를 수용한 스탈린이 일본과 전쟁을 선포함으로 만주국이 소련군과 중국연합군 그리고 한국광복군에게 점령 당하였다 소련군은 만주국을 점령한 후 중국인민군 동북3성 사령관 임표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 주었다 임표는 일본 관동군 무기와 군비로 중국내전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으며 1960년대 후반기에는 모택동 후계자로 중국지도부 2인자가 되었다 임표등의 동북3성 관동군 무기.군비와 조선의용대 병력으로로 남침을 강행하여 한국내전 유발로 세계전쟁까지 확대할 수 있을 만큼 위험했다 미국과 중국 수교이후 동북3성 소련군 주둔 세력 항미무장투쟁론자 임표등은 제거되었다>

2.일본육군사관학교 주요 인물
(1)남방총군병참총감 홍사익(洪思翊)--한국인 출신 중 태평양전쟁 1급 전범 교수형 언도 육군중장 출신
홍사익은 경기도 안성출생이며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1905년 15세의 나이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09년 무관학교가 폐쇄되어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 일본 육군 중앙 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26기)에 이어 일본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1926년 일본육군 소좌(少佐)로 진급되고 보병학교 교관으로 근무 중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만주 중앙육군훈련처 교관으로 전출되었다 이어 관동군 참모부에 전임되고,1938년 대좌가 되어 흥아원(興亞院) 조사관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었으며 1941년 육군소장에 승진되어 북지(北支) 파견군 여단장등을 역임 하였다
일본의 패전을 1년 앞둔 1944년 남방총군(南方總軍) 병참감 겸 포로수용소소장으로 필리핀 전선에 부임하고 뒤이어 중장으로 진급되어 종전을 맞았다
전후, 포로수용소의 지휘관으로서 연합군측 포로에 대한 부하들의 잔학행위에 책임을 지고 연합국의 전범법정에 섰으나 자신에 대한 변명은 시종 침묵으로 일관, 한국인으로는 태평양전쟁의 전범으로 교수형을 언도 받고 필리핀 현지에서 죽었다 그는 일제하의 한국인에게 강요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끝내 하지 않았다 당시 국내에서는 일부 인사가 맥아더 사령부에 진정서를 내는 등 구명운동을 폈고 일본에서도 패전직전에 작전권이 없는 보급지휘관으로서의 그가 A급전�으로 처단된데에 부정적인 여론도 있었다
ㄱ.홍사익장군이 일제말기에 창씨개명을 마지막까지 거부함으로 그가 항일운동가와 관계가 있었는지 논의해 볼 수도 있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 중에 항일운동가 상당수 있다
ㄴ.일본정부가 자치정부 수립방안으로 홍사익장군을 한반도 자치정부 임시위원장으로 추대하려고 했는데 그 과정도 추적해보야 할 부분이다
일본정부는 한국인들의 강제로 징병과 징용 추진한 주장 중 하나가 연합군과 전쟁에서 승리하면 조선을 자치정부로 승인하고 독립시켜 주겠다는 입장이었다 관동군과 조선군사령부 한국인 일본군인들이 강제로 미국과 소련군 총알받이로 최전선에 투입되었다
ㄷ.제2차세계대전 이전에 일본육사 26기 홍사익과 일본육사 27기 김석원등이 한국출신 중심으로 조직한 전의회(全誼會)와 전의회 회보 전의(全誼)이 한국인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중 일본군에서 탈주한 사람들과 정보교류와 탈주장교의 남은 가족들의 돕기들 구제노력을 했다는 자료가 있다
<김부인(탈주해 시베리아로 간 육사 23기의 김일성=김광서의 처)은 몇 년전의 부채와 생활란에 시달려 작년 겨울 살던 가옥을 매각, 부채를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 생계를 꾸려 가면서도 지(지청천 장군)부인의 비참한 경우를 동정, 가옥매각 때 일금 100엔을 지부인(지청천 장군 부인)에게 지부 하였다 한다 그 의거 장렬하다 말할 것이다..전의 1926년 1월 17일 全誼 거재된 글>

(2)고이소 구니아키(小磁國昭)
고이소 구니아키(小磁國昭)는 우쓰노미야(宇都宮) 출생이며 1900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러일전쟁에 종군 하였다
1916년 참모본부 부원, 1932년 육군차관을 거쳐 육군대장. 조선군사령관. 조선총독등을 지냈다 1944년 도조히데키(東條英機)내각이 붕괴한 뒤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제2차세계대전을 이끌었으며 1945년 전쟁에서 패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직 하였다
전쟁 후에 국제전쟁재판에 회부되어 A급 전범자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사망 하였다 그는 조선총독부 총독 재임기간 중인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을 조작하여 독립지사를 검거하는 한편, 조선청년특별연성령(朝鮮靑年特別練成令)을 공포 17세--21세의 청년에게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1943년 8월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여 수많은 한국인 청년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붙잡아 갔다
이것도 부족하여 그는 1943년 학도병 지원제를 실시하여 많은 학생들을 학도병으로 끌어갔을 뿐만 아니라 1944년 8월에는 학도동원본부 규정을 공포하고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4학년 이상에서 대학생까지 동원체제를 확립한 한국민에게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안겨 준 장본인이다 고아소 구니아키 총독때 우리 말과 글을 배우지 못하고 일본어로 사용하게 하여 많은 초등학생들이 일본어만 배웠다

(3)도조 히데기(東條英機)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도교출생이며 일본육군대학을 졸업한 후 관동군 헌병사령관.관동군 참모진. 육군차관등을 역임 하였다
1940년 제2차 고노에(近衛)내각의 육군대신이 되어 중국침략 확대를 주장하고 1941년 제3차 고노에 내각을 개전론으로 무너뜨렸다
같은 해 10월 후계내각을 조각(組閣)하여 육군.내무대신도 겸임하고 12월 8일 하와이의 새벽 진주만(眞珠灣)에 있는 미국함대기지를 기습공격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도조히데기 일당의 일본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군부주도로 세계전쟁을 주도한 군부쿠데타로 표현한다)
개전(開戰) 후 독재를 강화하여 1943년 문부(文部). 상공.군수(軍需)장관도 겸임하고 한국에서는 징병제와 학도병 지원제를 실시하였으며 1944년에는 참모총장까지 겸임 하였다
그러나 전황이 전면적 파국으로 빠져들자 일본 청년장교단 주도의 군부쿠데타 실패와 함께 1944년 7월 총사퇴 하였다
종전 후 자살을 기도하였으며 미수에 그치고 A급 전쟁범죄자로 극동국군사재판소에 회부되어 1948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4)미나미 지로(南次郞)
미나미 지로(南次郞)은 오이타현(大分縣)에서 출생 하였다
1903년 육군대학을 졸업 후 육군대학 교관. 기병연대장. 육군성 과장. 중국주둔군 사령관. 육군사관학교장. 제16사단장. 조선군 사령관을 역임 하였다
1930년 육군대장. 1931년 육군대신. 1934년 관동군사령관. 1936년 예편과 함께 조선총독이 되었고 그 후 추밀원 고문.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중국 침략전쟁의 공동모의 및 실시 책임으로 종신금고형을 받았으나 가출소 후 사망하였다
조선총독으로 재임한 6년 동안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표방하여 일본어 상용. 창씨개명. 지원병제도 실시등으로 한민족문화 말살정책을 강행 하였다
(5)한국인 출신 중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들
ㄱ.일본육군사관학교 23기 기병과 김광서(金光瑞)장군--항일운동가 김일성장군 동일 인물
(ㄱ)조선군사령부(대명사. 지음 古野直也. 옮김 김해경) 김광서(김일성) 내용
a.북조선 지도자의 김일성도 젊었을때는 항일 게릴라의 일원이었다는데 1935년을 전후로 하여 활약했던 이육사의 광야 시 주인공 김광서 즉 김일성일까?
그가 항일전에 참가 했던 사실은 없는 것 같다 이 거짓을 발견한 북조선정부의 고관은 살해되려던 직전 소비에트로 도망쳤다 하지만 김일성의 옛 동료들은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진상은 불명 그대로이다
일본 육사 23기생으로 일본 육군을 탈주한 김광서(金光瑞)가 김일성이라는 의명(儀名)으로 항일 게릴라를 하여 조선의 전설적 영웅이었기에 인기 높은 이 이름을 차용해 속임수 이름 (김일성)을 자칭했다고 생각된다
800km가 넘은 압록강이니 야간에 강을 건너와 부락을 불지르고 도망치는 정도라면 현대의 과격파 학생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북한 김일성이 1937년 6월에 함경남도 갑산군의 보천보 마을 공격해 김일성은 항일영웅이 되었다는데 사실은 일본인 순사 한 명이 당직하고 있는 파출소를 불태운 것 뿐이다<문예춘추사의 제군 1990년 9월호 게재 글. 북조선 내무차관 출신 강상호씨의 증언>
b.김부인(탈주해 시베리아로 간 육사 23기 김일성=김광서의 처)은 몇 년전의 부채와 생활난에 시달려 작년 겨울 살던 가옥을 매각, 부채를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 생계를 꾸려 가면서도 지부인(지청천 장군 부인)의 비참한 경우를 동정 가옥매각 때 일금 100엔을 지 부인(지청천 장군 부인)에게 기부하였다 <전의회 회보 全誼 1926년 1월 17일 게제 된 글>
c.일본정부 극비자료가 조선군사령부 책자에 많은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다
(ㄴ)신흥무관학교(교육과학사. 지음 안천)
a.김광서(金光瑞)
김광서은 일본육군사관학교 23기 기병과를 나와 일본군 장교였는데 탈출하여 신흥무관학교 달려간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역사상 극비 신비의 인물이다 비슷한 출신에다가 동시에 비슷한 길을 간 이청천(지청천)의 모든 것이 알려진 바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이 가려져 있다
그는 너무나 위장을 많이 해서 성은 물론 본관까지 바꾼 특이한 인물이다 그는 원래 이름이 김현충(金顯忠)이었다 그런데 일본육사를 다니면서 김광서(金光瑞,일본육사23기 기병과)로 바꾼다 김광서장군이 육사23기생이며 이청천이나 홍사익장군이 육사 26기이며 김석원장군이 육사27기생이었다 그리고 박정희장군이 육사57기생이다
그리고는 호적을 바꾸면서 김해(金海) 김씨를 시흥(始興) 김씨로 바꾼다
그러나 그는 경기도 시흥(始興)과는 전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물이고 <본인이 시작하고 일으켜 흥하게 한다=始興>는 단호한 의지를 본관으로 쓴 듯하다 그러니 그는 시흥 김씨 시조인데 그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었다 그렇다면 그 딸들이 현재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다는데 시흥 김씨는 대가 끊긴 것이라고 보아야 할 듯 하다 그 딸에 양자라도 이어야 옳지 않을지? 김해 김씨 가문에서라도 나서야 옳지 않을까?
그러나 김광서는 일본군을 탈출하면서 이름을 또 바꿔서 위장하면서 김경천(金敬天)으로 불렀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청천 같이 모친의 성을 따서 윤경천으로 쓰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때부터 역사 속에 별안간 사라진다 그가 바로 원조(元祖)의 진짜 김일성이란 학설이 날로 강해지고 있다 그가 다시 그의 이름을 김일성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당시 독립지사들은 흔히 가명을 쓰고 있었으며 동지라 할지라도 피차 자기 정채를 알리지도 묻지도 못했던 때였다 이것은 그들의 불문율이었다>

b.사라진 김광서(金光瑞) 편
청산리 대첩이 있기 얼마 전에 신흥무관학교의 핵심 인물 하나가 홀연히 사라진다
그가 사라진 것은 3.1만세 항쟁이 사그러 들면서 국내가 조용해질 무렵이니 1919년 초겨울의 어느날이었다
신흥무관학교의 맹장들은 꺼져가는 3,1운동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1920년 3월 1일의 제1회 삼일절에 해당할 날에 제2차 3.1운동을 일으킬 방안을 골똘히 궁리하게 된다 그렇게 되려면 국내로 진입하여 국내 봉기를 유발시켜야 하겠고 그러려면 당연히 무기가 필요했다
무기 구입의 중대한 임무를 띠고서 무기 구입 비밀통로를 개척하기 위해서 김광서는 용기 있게 삼원포를 떠났다 삭풍이 몰아쳐 오면서 새로운 겨울에 접어드는 합니하 강변을 떠난 김광서! 그는 그후 시베리아의 소만(蘇滿) 국경지대를 넘나들며 항일 전투를 벌이는 새로운 길을 간다 그리하여 김광서는 신흥무관학교의 맹장이면서 청산리 대첩에는 참여치 못하는 핵심 인사가 된다
그러나! 김광서의 위치는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것으로서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시베리아등으로 끌어내며 분산 작전을 펴는 등의 중대한 일을 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김광서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려고 할 무렵에는 불행히도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고 말았으니 그는 시베리아를 넘나드는 항일전투의 길에 정면으로 나섰을 것이라 생각된다 김광서는 몇 가지 재미 있는 특징이 있다
첫째로 김경천(金敬天)이라는 이름으로 곳곳에 출몰하여 일본 정보문서에는 김경천(金敬天)이란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두목이 곳곳에서 부하를 규합하여 무장투쟁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예전에 많은 동포들과 독립군이 있던 소만(蘇滿)국경지역이 일본군에 의해 폐허가 되면서 수 많은 동포들이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을 보면서 곳곳의 침략군을 응징했고 신출귀몰하는 전법으로 일본군을 괴롭히며 동포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러다가 일본 정보문서에는 훗날 그가 김광서(金光瑞)라는 것이 밝혀진다
둘째로 그는 신문기자들에게 당당하게 본인의 전투내용을 떳떳이 알린 듯하다 신문에 알릴때는 김광서(金光瑞)라는 본명으로 알려줬기에 독립군 대장으로 신문에 인터뷰한 기사가 상당히 많아 남아 있다
동아일보에는 당시의 김광서장군이 나폴레옹에 본인을 비유하는 대담한 지휘자였음을 말한 내용까지 실려 있을 정도이다 그가 일본육사 23기 기병과를 나왔고 탁월한 지휘자임이 상세히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아마도 신문기자들에게 독립운동의 꿈이요 태양과 같은 존재로 보였던 듯 하다 독립군 대장으로 인터뷰 기사가 나간 사례는 거의 독보적인 사례에 해당할 정도의 용기 있는 행위였다
그런데! 그는 결정적인 데에서는 동포들에게 본인을 김일성(金日成)이라고 말하고 떠난 듯하다 그는 흡사 의적 일지매나 임꺽정같은 행동도 하고 백마를 타고 홀연히 나타나 일본군을 단호히 혼내 주고는 동포를 도와준 뒤에 귀신같은 사라지는 멋진 행위를 만주동포들에게 서서히 신화 같은 인물로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가며 날로 신비성을 증폭시키는 가운데 <김일성 신화>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불행한 영웅이었던 듯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의 적(敵)인 공산 소련군과 손을 잡기도 하며 공동작전을 펴는 등의 전투를 하다가 서서히 소련군에 잡혀 버리는 길을 가고 끝내 그들에게 이용당하며 인생을 마친 듯하다
어떻든 <김일성 신화>는 그가 사라졌어도 만주 땅에 강력히 남았었고 그것이 이어지며 말기에는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김광서 장군)을 빌려쓰면서 6.25동족상잔을 일으켜 <김일성 신화>에 흙칠을 하고 마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내래 어렸을 때는 진짜 옛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수다래. 부친이 늘 우리 형제에게 너희들도 그런 훌륭한 분처럼 되라고 애기하여 주었수다래. 성주형님은 만주에 있는 우리 독립군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리고 전투를 잘했기 때문에 진짜 김일성 장군이 이름을 물려준 거야요. 형님에게 이름을 물려 준 김일성장군도 역시 그 전대의 진짜 장군으로부터 이름을 물려 받은 거야요>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가진 엄청난 공백이다 몰라서 만들어진 공백? 사회주의라는 이유에 의한 공백! 소련군과 연합으로 전투하였다고 공백! 스탈린에 무참히 끌려간 홍범도나 공산당에 잡혀 가시밭길을 간 김광서를 오랫동안 버려둔 공백! 일본 경찰의 문서조작에 의한 공백! 일본정부의 독립군 분야 비밀문서 미공개 공백!등 수 없는 공백이 있다
신흥무관학교 10년사가 토대가 된 청산리 신화도 현재로서 많은 연구가 되어 있으나 아직도 수 많은 공백이 있을 것이다 그런 공백의 대표적 사례에 해당할 것이 위대한 영웅이며 백전백승의 명장이며 불세출의 지도력을 가졌던 민족의 태양인 진짜 김일성 장군의 실종이 아닐까?
(ㄷ)전설의 김일성 장군 유족에 건국훈장 수여 (옥포誌 2000년 1월호) 정 현 백 자료
한인들 사이에 전해져 온 김일성장군에 관한 전설은 한인들이 그저 알고 있기로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약탈하던 그 때부터 '김일성 장군'이란 용맹한 항일전사가 있어서 오랜 세월을 두고 韓滿국경 혹은 露滿국경에서 일본의 군경과 숱한 전투를 백전백승으로 치루어 낸 특출한 군략가이며 애국자였다는 이야기였다. 구전으로 퍼져 와 그야말로 전설적이었던 까닭에 주인공 '김일성'의 이름자가 金日成인지 아니면 金一成인지 또 아니면 金一星 또는 金日星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이러한 전설이 생겨날 만한 사실상의 근거가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는데 그것은 '金一成 장군'이란 항일투사와 또 한 사람, 같은 발음의 '金日成 장군'이라는 항일투사 두 사람의 투쟁사에 얽힌 이야기였었다. 그 전설적 김일성장군 그 중의 한 사람인 김경천 장군의 혈육이 8·15 50주년을 맞아 지난 98년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게 되었다고 하니 후손 된 우리로서 심히 민망스러워 몸둘 곳을 모르겠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작년 8·15 50돌 기념식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독립군 장령 김일성장군(金一成. 1888년 함남태생) 즉 김경천 장군에 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백마를 타고 번개같이 날아다녔다는 김경천 장군의 본명은 '김광서'로서 함경남도 북청출신이며 1911년 일본 육사 23기생으로 기병과를 졸업하고 도쿄 기병 제1연대에 근무한 바 있고, 1917년 1월에서 9월까지는 육군기병실시학교에서 용병법과 기마술을 교육받은 바 있으며 일본육사출신 한인 친목 모임인 "전의회"의 회장으로서 그 회원 중에는 일본 육사 26기 흥사익, 이응준, 27기 김석원, 김인욱 등 34명이 있었다. 앨범에 적힌 김경천(본명 김광서)의 생일은 1887년이나, 종로구청 호적계의 제적서고에 있는 그의 호적등본에는 1888년 6월 5일로 되어있으며, 1919년 6월 망명이전까지의 주소는 사직동 166번지인데 1912년 12월 2일 본인 출원에 의한 취적 등록이라 되어있고 본적도 이곳으로 옮겨져 있고, 본관도 김해에서 시흥으로 되어 있는데 본인 출원에 의한 정정이라 기록되어 있다. 동향인의 증언에 의하면 북청군 해안의 승평태생임이 틀림없다고 한다. 육사 재학 중에 이름을 김광서로 개명했고 그 이전의 이름은 김현충이며 김경천, 윤경천 등의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父 김정우는 구한말 포병부령까지 지낸 자로서 1857년생이며 1894년 5월 38세의 나이로 일본 경응의숙보통과에 입학하였다. 그의 반에는 윤치성(윤치영의 형) 노백린 등이 함께 했는데, 이들은 육사 11기로 1899년에 졸업하게 되고 김정우는 동경고등공업학교를 거쳐 포병공작창에서 총탄제조법을 익힌 후에 돌아와서는 군기창장을 지낸 바 있으며 1906년에는 윤치성과 함께 부령으로 승진된 바 있는 사람이다.

1919년 2월 20일 김경천은 병가를 얻어 귀국하여서는 6월에 일본육사 3년 후배인 이청천(지대형)과 함께 만주로 탈출 신흥무관학교에 찾아가 독립군 교육부터 담당했다. 이 소식에 고무되어 열혈청년이 600여명이나 신흥학교에 몰려들었다 한다. 이 때에 구한국군 정위(대위) 신팔균도 함께 교관으로 있었는데 세 사람이 합심단결하여 조국광복을 쟁취하자는 뜻에서 天자 돌림 별호를 쓰기로 하여 신동천, 김경천(또는 윤경천, 母가 윤씨), 지청천(이청천, 母가 이씨)으로 서로 불렀는데 한인 사회에서는 이들을 남만삼천(南滿三天)이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이 남만 3천에 열혈 청년장교가 한 사람이 더 끼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철기(鐵騎)란 별호를 가진 이범석(李範奭)이었다. 그는 그해 봄에 중국의 운남성에 있는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장교로 배치되었는데 남만의 신흥무관학교가 독립군의 집결지라는 소문을 듣고 그해 여름에 그리로 찾아와서 남만 3천과 합세했다. 이들 4사람의 장교들은 당면 목표를 다음해(즉1920년) 3월 1일을 기해 국경을 넘어 조선 땅으로 진격함으로써 3·1민족봉기를 재현시키는 일대 계기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범석씨(1900-1972) 증언에 따르면, 1920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내로 진격하기 위한 거사 계획의 일환으로 김경천은 1919년 초겨울에 무기구입차 소련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때 시베리아에는 볼셰비키 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해 일본군이 출병해 있었는데 일본군의 한인 독립운동 근거지에 대한 공격 때문에 김경천은 독립군을 규합하여 日軍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의 적은 동지라는 원리에 따라 赤軍(볼셰비키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또는 白軍(反볼셰비키군)과 싸웠는데 이때에 그는 김일성이란 또 하나의 별호를 쓰게 되었다. 1920년대 전반의 독립운동 소식으로는 김경천에 관한 기사가 가장 으뜸으로써 그에 관한 기사내용이 허다하나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빙설에 쌓인 서백리아(西伯利亞)에서 홍백전쟁을 한 실지 경험담'이란 장문의 인터뷰 기사가 유명하다. 오늘날 누구나 읽어 볼 수가 있다. 전설의 김일성 장군 즉 김경천 장군은 매우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그 인터뷰기사 말미에는 그가 읊은 '시베리아의 별'이란 시가 실려 있는데 옮겨본다.

뜬구름도 방황하는 시베리아 별
칼을 짚고 출로 서서 흰뫼 저편을 바라보니
사랑하던 무궁화는 희미하고

자유에 목마른 사람이 이천만 애처롭다
뜻이 열 곳이 없으므로
흑룡수에 눈물 뿌려 다시 맹세하노라


그러나 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 김경천에게도 불행은 닥쳐왔다. 동맹이었던 볼셰비키의 배신으로 독립전쟁의 꿈이 수포로 돌아갔다.

1922년 가을, 일군이 시베리아로부터 철수하자 볼셰비키는 의리부동하게도 한인 독립군부대들에 대해서 赤軍에의 편입, 영외로의 추방 무장해제 등등의 조치를 취했던 바 "약소민족 해방" 구호에 고무되어 赤軍의 편에 섰던 김경천으로서는 그들의 배신과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부하대원들을 소만 국경으로 이동시켜 둔전병제를 실시하려고 간도방면으로부터 많은 대원들을 모집하여 병력이 일천여명에 이르게 되었고 구로지꼬 부근에 무관학교까지 설립할 계획까지 세웠으니 볼셰비키들의 의도와는 정반대 되는 입장에 서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925년 4월 28일자 매일신보'에는 '김광서가 독립노선 문제 때문에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였다'는 보도가 실려있고 '1925년 6월 21일자 동아일보'에는 '김광서가 1924년 3월에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지부롤 니콜스크에 두고 제2차 국민회의를 조직하려는 등 그 활동이 매우 컸으며 초지를 관철하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여 대대적인 활동을 개시하고자 한다'라고 전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소식은 두절되었다. 그후 '1925년 7월호 '전의회'의 회보에 '김광서의 부인이 세 딸을 데리고 한국을 떠나 어디로 사라졌다'는 소식이 실려있는데 김경천(본명 김광서)에 관한 마지막 소식이었다.

김경천과 시베리아에서 얼마 동안 활동을 같이 한 적 있는 "김 마트웨이"라는 사람(소련거주한인)이 20여년 전에 그의 회고록에서 밝힌 김경천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김경천은 그 후 소련의 여러 군사기관에서 군사지도원 또는 원동조선사범대학의 군사교관으로 있은 적이 있고 1933년부터 1936년까지는 소련당국에 의하여 투옥되었는데 그 원인은 밝혀진 바 없었으나 스탈린의 민족주의 말살정책의 일환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석방된 이듬해인 1937년에 다른 한인들과 함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는 비운을 맞게 되고 그곳의 한 협동농장의 작업반장으로서 노동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1939년 2차로 체포된 다음 그 후의 소식은 알 길이 없으나 풍문에 의하면 독소전쟁 발발후 서부 전선의 로고스프스키 장군 밑에서 대령계급으로 사단을 지휘하다가 1945년 초에 전사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런데 금번에 찾은 혈육으로부터 그분이 감옥에서 심장질환으로 병사했다는 사실과 소련정부가 그의 사망 17년만인 59년에 복권시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김광서장군 ‘노령견문기’

조선의 유지청년이 노령에 수천수만이 출입하였으나 김장군 같이 위대한 공적을

성취한 사람은 없나이다. 김군이 노령에 들어오면서 경천이라 개명하였으므로

노령에서는 김광서(金光瑞)라는 본명은 알지 못하고 경천 김장군이라면

내외국인이 별로 모르는 이가 없나이다.

 

-나경석(羅景錫)이 1922년 1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연재한 ‘노령견문기’ 중에서-

 

“빙설(氷雪) 쌓인 시베리아[西伯利亞]에서 홍백전쟁(紅白戰爭) 한 실지 경험담(實地 經驗談)”

선생의 간단한 이력과 러시아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벌인 일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김경천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현역 일본군 장교로서 후에 광복군 총사령관이 되는

이청천과 함께 3·1운동이후 만주로 망명한 인물이다.  만주로 망명한 이후 서간도지역에


위치한 대한독립청년단의 회원 및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이청천, 신동천) 등

3인과 함께 남만주 삼천(三天)으로서 만주지역 항일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러시아에서 창해청년단 수청고려의병대,

고려혁명군등에서 활동하는 등 러시아지역 항일투쟁을 선도하였다.


김경천은 러시아 내전이 끝난 다음에 상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창조파(創造派)의

일원으로 참석하는 한편 이에 실망하여 블라디보스톡에 돌아온 이후에는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고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 국내에 진공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경천장군 일기 ‘경천아일록’ 중   몇 구절 ...


하루는 동경 근교에서 대항연습을 하노라니 이등박문 암살이라는 호외가 나돌며 동경시가 부서지게 떠든다. 나는 가슴이 덜렁한다..... 아! 위대하다. 우리도 사람이 있구나! (1909. 10.)

 

동대문안 부인병원 앞으로 청년단이 가서 만세를 부르니 그 간호부들이 모두 울면서 만세로 응답함은 나의 마음을 더욱 분하게 한다... 청년회관에 있을 때에도 아는 벗들이 나더러 ‘칼을 빼시오 인제는 별 수 없으니 칼을 빼시오’ 하며 여럿이 권한다. (1919. 3. 1.)


북도(北道), 남도(南道), 서도(西道), 서울... 자기들끼리도 당파가 있다.

아아! 이것이 대한이 망한 이유가 아닌가? (1919. 9.)


북조선왕조성립비사(北朝鮮王朝成立秘史): 김일성정전(金日成正傳)』 그의 말년 행적이

일부 알려짐으로써 김경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증대되었으나 연구차원으로 연결되지

못하였다. 그후 1998년 8월 15일 김경천이 독립유공자로서 대통령장을 포상받게 됨


” 정부에서 김경천을, ‘북 김일성 가짜론’의 논거로 사용한 다음 폐기시켜 버렸다

동아일보 원본

 

                                                                             항일영웅 김경천 장군



ㄴ.한국인 출신 중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의 인맥자료
(ㄱ)일본 육군사관학교 11기생---노백린(盧伯麟). 어담(魚潭). 윤치성(尹致成)등 21명 한국인
(ㄴ)일본 육군사관학교 15기생---이갑(李甲, 러시아령으로 탈출한 항일운동가). 유동열(柳東說). 박영철(朴永喆)등 8명 한국인
(ㄷ)일본 육군사관학교 23기 기병과 출신----김광서(金光瑞, 본명 金顯忠, 김경천.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진 인물)
(ㄹ)일본 육군사관학교 26기생---홍사익(洪思翊). 이응준(李應俊,체신부장관 역임). 김정렬(金貞烈). 신태영(申泰榮,국방부장관 역임). 이청천(池晴天,이청천이 일본군을 탈출하여 조국 땅과 결별을 고할 장소인 압록강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였다고 표현한 것이 바로 晴天이다)등
(ㅁ)일본 육군사관학교 27기생---김석원(金錫源). 정훈(鄭薰)등
(ㅂ)일본 육군사관학교 49기생---채병덕(菜秉德). 이종찬(李鍾贊)등
(ㅅ)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생--박정희(朴正熙,한국 대통령 역임).이용문(李龍文). 이주일(李周一). 이한림(李翰林). 정내혁(丁來爀)등

ㄷ.일본육군사관학교 57기 박정희(朴正熙)장군
박정희장군도 다른 일본육사 한국인 출신들처럼 한국 근대화와 자립만이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의지로 일본군에 참여했다고 본다 한국인 출신 육사 모임 전의회 회보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박정희장군은 대구사범시절에 개벽을 탐독했으며 일본항복전후에 광복군에 참가했다 1970년대 모든 공무원이 민주화를 거부한 세력은 아닌다

*나의 부친도 징병1기 일본군인었다
대동아 전쟁때 징병 1기생으로 대구에서 6개월간 조선군사령부 교육장에서 공군방위 훈련을 받고 집에 왔어 1일주간 휴가를 받고 고향에 왔다가 일본 남단 섬에서 일본본토방위군으로 연합군과 전쟁을 시도했지만 미국등의 연합군을 원자폭탄 폭하로 한국인으로 미국 포로가 되었고 일본정부의 일본지역 거주를 요청했지만 한반도 가족들 때문에 일본인을 거부하고 한국 땅으로 1946년 말 조국 한반도로 귀국하여 농민으로 생활하다가 2002년도 세상을 떠나셨다
자(字)는 춘부(春夫)이며 성은 김해 허씨(金海 許氏), 이름은 종영(許宗榮)이다 그 분도 미국을 좋아했다

어쩌면 미국이 일본 본토를 원자폭탄을 폭하하지 않고 지상군 무력으로 전쟁을 추진했다면 나의 아버지도 죽었다고 말했다 미국이 원자탄으로 전쟁을 종결하려는 강경정책과 그에 대한 일본본토만을 지키겠다는 일본국왕의 협상능력으로 일본본토는 전쟁으로 정복되지 않고 평화협정으로 정복되었기 때문에 한반도처럼 공산주의 소련군이 들어오지 않았으며 미국과 영국축으로 세력이 개편되어 많은 한국인과 일본인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