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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표 최고위원 싱가폴 리콴유 고문장관 면담 주요 내용(보도자료) 본문

-미국 언론-/아시아뉴스

박근혜 대표 최고위원 싱가폴 리콴유 고문장관 면담 주요 내용(보도자료)

CIA bear 허관(許灌) 2006. 5. 20. 22:47

박근혜 대표최고위원의 리콴유 싱가포르 고문장관 면담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o 박근혜 대표최고위원은 5월 20일(토) 오전 리콴유 장관을 면담했다. 분위기가 아주 우호적이었다. 리 장관은 박 대표를 옛날에 한번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1979년도 10. 26 이전인 10월 16일 총리할 때 한번 만났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만나신 마지막 국가원수였다고 한다. 그 때 행사에서 만났고 통역도 했다고 하면서 리콴유 고문장관이 굉장히 반가와 했다.

 

- 박근혜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싱가폴도 다민족 국가이어서 많은 문제가 있는데도 통합해서 상당한 일류국가로 만드신 것에 대해 여러가지 많이 배우고 싶다" 고 말했다.

 

- 리콴유 장관은 "국가 지도자의 자질로, 국가 지도자가 첫째는 국민들이 지도자를 잘 뽑아 국가가 통합되고 단결되야 선진화로 나갈 수 있고 한국도 보니 여러가지 지역 감정도 있고, 남북으로도 분단돼 있는 나라라서 앞으로도 한국이 더 발전해 나가야 할 길이 많은데 좋은 지도자를 잘 뽑아야 겠다"고 회담 내내 강조했다.

 

- 박근혜 대표는 "21세기 들어와서 맞는 리더십이란 어떤 것 있겠는가" 라고 했다.

 

- 이에 리콴유 장관은 "첫째는 국민들이 전부, 아 저 사람이 우리를 위해 일하는 지도자라는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는 그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세번째는 사감, 사리사욕이 아니라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말하자면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하면 국민들이 따라 줄 것이고 그런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다. 한국도 내년에 큰 선거가 있는데 젊은 세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캐치를 하고, 젊은 세대들이 표출하는 요구를 잘 알아듣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또 하나 절대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지도자가 부패하면 안된다. 부패하지 않은 지도자, 그 지도자와 함께 일하는 엘리트 그룹들이 다 같이 부패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 이어 박근혜 대표는 "한국도 여러가지 지역감정이 있고, 남북분단이 있었지만 지역감정에 있어서는 서로가 많이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효과가 좀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지도자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있다. 국민들이 지도자를 잘 뽑으면 국가가 한 방향으로 아주 발전할 수 있고 안되면 참 힘든것 아니냐. 대표로서는 헌법에 명시된 국가이념에 따라 우리나라를 제대로 잘 좋은 나라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들도 계속 좋은 지도자를 만나 그 지도자가 신뢰를 얻고 교육,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잘살기 위해 사심없이 노력하는 지도자가 나오면 우리나라도 크게 더 잘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젊은 세대들도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대북정책이라든지 또는 여러가지 외교안보정책 등을 정말로 잘 설명하면 컨센서스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저는 하여튼 우리 헌법에 명시된 이념대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사실 한국이 많이 힘들고 어렵다. 저와 한나라당은 경제, 교육 등 여러 분야의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내년 대선에 이기기 위해 최선 다하겠다"고 말했다.

 

- 리콴유 장관은 "21세기에 서든 체인지, 갑작스러운 변화, 빅뱅. 러시아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많은 변화가 오고 있는데 반드시 국가에 따라 중국처럼 성공적인데도 있고 아닌데도 있다. 한국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데 좀 사회가 안정되지 않고 극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 아니냐, 이럴 때 일수록 좋은 지도자를 뽑아야 국가가 통합되고 선진화로 나갈 수 있다”고 했다.

 

o 리콴유 장관이 1979년 서울 왔을 때 리콴유 부인이 같이 국빈방문을 했는데 박근혜 대표를 기억해서, 잠깐 만나고 싶어했다. 리콴유 장관과의 면담이 끝나고 박 대표와 부인은 옆방에서 25분 정도 환담했다. 부인은 박 대표에게 선거유세를 다니면 목아프다고 하면서 싱가포르 산 목캔디를 건네기도 했다.

 

 

2006.   5.   20
한 나 라 당  대 변 인 실

 
리콴유[李光耀, Lee Kuan Yew]
 

1923. 9. 16 싱가포르~.

싱가포르의 총리(1959~90).

리콴유
그의 통치 아래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최고의 경제번영을 이룩했다. 리콴유는 19세기 이래 싱가포르에 정착한 부유한 중국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처음 배운 언어는 영어였으며 정치에 입문하고서야 말레이어와 타밀어뿐만 아니라 중국어를 습득했다. 싱가포르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마친 리콴유는 장학생으로 래플스 대학에서 수학한 뒤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 입학했다. 케임브리지의 법과대학에서는 2과목에서 모두 수석을 차지하여 은전 방명록의 서두를 장식하는 영예를 얻었다. 리는 그무렵 사회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1950년에 그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으며 역시 케임브리지에 유학온 말레이 여성 콰격추와 결혼했다. 리콴유는 변호사 개업을 그만두고 싱가포르로 돌아왔다. 우편연합의 법률고문으로 임명된 그는 우편관계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위한 협상에 참가했고 뒤이어 다른 노동조합들을 위해서도 비슷한 일을 했다.

영국의 직할식민지이며 극동 해국기지인 싱가포르는 총독이 입법참사회의 도움을 받아서 통치했다. 입법참사회의 대의원은 주로 중국계 실업인들로 구성되었는데 대부분이 선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식민당국에 의하여 임명되었다. 1950년대초 영국의 다른 식민지들과 마찬가지로 헌법개정의 분위기가 감돌았을 때 리콴유는 입법참사회의 실업가 세력에 도전하기 위하여 정계 신참자인 변호사 데이비드 솔 마셜및 노동조합주의자 림유혹과 동맹을 형성했다. 그러나 곧이어 보다 급진적인 노선을 취하여 두 동지와 결별하고 인민행동당(PAP)을 조직, 총서기가 되었다. 인민행동당에는 몇 명의 공산주의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전 몇 해 동안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온 때문이었다.

1955년 새로운 헌법이 채택되어 입법참사회의 선출직 의석이 총 32석 가운데 25석으로 늘었다. 선거 결과 과거 동지들에 의해 창설된 노동전선이 13석을 획득한 반면 PAP는 3석을 얻는 데 그쳤다. 리콴유는 중국계 빈민거주지역에서 출마하여 참사회에 진출했다.

이듬해 리콴유는 자치권 획득을 위한 대표단의 일원으로 런던에 파견되었으나 대표단 교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소요가 잇달았고 그 와중에 다수의 PAP 지도자가 투옥되었다. 1957년 런던 협상이 재개되고 리콴유는 다시 대표단에 참가하였다. 자치권 행사의 범위에 관한 협정이 타결된 후, 리는 보궐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곧이어 PAP 내의 세력에 의하여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8월에 리는 좌파세력에 의하여 총서기직에서 축출되었으나 10월이 되자 직위를 되찾았다. 그는 이듬해 런던에서 싱가포르가 영연방 내 자치국의 지위를 얻기 위한 협상을 도왔다. 1959년 5월 신헌법 하에 총선이 실시되자 리콴유는 반식민주의·반공산주의의 토대 위에서 사회개혁 및 마라야와의 연방구성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PAP는 총 51석 가운데 43석을 차지하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리콴유는 영국 당국이 1956년 구속한 좌파 당원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며 조각을 거부했다. 당원들이 석방되자 1959년 6월 5일 리콴유는 싱가포르 자치령의 총리로 취임했고 내각을 구성했다. 신임 총리는 산업화, 슬럼 철거, 국민주택건설, 여성해방, 교육의 확대에 역점을 두고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1961년 당의 좌익계 파벌들이 PAP에서 이탈하여 바리산 소시알리스(사회주의 전선)를 결성했다. 총리는 곧 공산주의 세력과 관계를 단절했고 이후 PAP의 온건세력이 싱가포르 정치를 지배하게 된다.

1963년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새로 창설된 말레이시아 연방에 편입시켰으나 이듬해 당원의 75%가 중국계인 PAP를 말레이시아 총선에 참여시키는 실수를 범했다. 중국계와 말레이계 주민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마침내 싱가포르 자치주에서 인종폭동이 일어났다. 1965년 8월 연방정부 내의 말레이시아인 동료들은 싱가포르를 연방으로부터 탈퇴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충고를 해왔다. 리콴유는 연방이 표상하는 다인종주의에 강렬한 애착을 느꼈지만 연방으로부터의 탈퇴는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싱가포르는 리콴유를 초대 총리로 하는 별개의 주권국가가 되었다.

리콴유의 제1목표는 신생국의 물리적인 생존을 확보하고 인종간의 관용을 특징으로 하는 전통을 바탕으로 국민적 동질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싱가포르 공화국은 중국·인도네시아 등 보다 강대한 국가들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영연방군의 즉각적인 철수는 강요하지 않고 대신에 단계적인 철군과, 그 자리를 이스라엘의 방식에 따라 훈련받고 편성된 자국군으로 대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리가 싱가포르의 주권독립을 위하여 경제발전의 필요성을 인식했다는 점이며, 이에 따라 싱가포르를 산업화하여 세계 굴지의 완제품 수출국으로 변모시키려는 야심찬 계획이 입안되었다. 외국 자본이 유치되고 노동조합과 경영자 사이에는 합의가 도출되어 산업평화와 생활수준의 향상이 이루어졌다. 보건·사회복지사업의 개선을 도모하는 가운데 총리는 일반 국민의 입장에 서서 협력과 규율·검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66년 이후 제1야당인 바리산 소시알리스가 장외투쟁으로 일관하면서 PAP의 집권은 더욱 용이해졌다. 1968년 총선에서 PAP는 의회 내 모든 의석을 독점하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성공은 1972, 1976년, 1980년에도 계속되었다. 정부의 정책구도에 대한 좌익의 비난에 대응하여 총리는 때때로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도 했다.

리콴유는 다소 권위주의적인 통치방식을 고수함으로써 가끔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기도 했지만 특유의 결단력과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행정의 효율성을 기하고 눈부신 경제적 번영을 이룩해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은 일본에 이어 동아시아 제2위의 수준에 올랐으며 동남아시아 최대의 금융중심지로 위상을 굳혔다.

PAP가 1984년과 1988년의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고 리콴유의 재임기간이 연장되는 가운데 1980년대를 통하여 정권교체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리콴유는 1990년 11월 후계자 선정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게 된 직후 총리직에서 사퇴했으나 PAP의 총서기로서 아직도 싱가포르 정치를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