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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88세 일기로 선종 본문
로마 가톨릭교회의 지도자이자 최초의 라틴 아메리카 출신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88세의 일기로 선종했다고 바티칸이 밝혔다.
케빈 패럴 추기경은 바티칸이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오늘 아침 7시 35분(현지시각)에 로마 주교 프란치스코께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그의 선종 소식은 전날인 일요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이 수천 명의 신자들에게 "행복한 부활절"을 전한 이후 전해졌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 교황(본명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은 지날달 감염으로 인한 이중 폐렴 치료를 위해 5주간 병원에 입원한 뒤 퇴원한 바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에 전 세계 지도자들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항상 가장 약한 이들의 편에 서 있었다"고 말했으며, 딕 스호프 네덜란드 총리는 교황을 "모든 면에서 민중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제 교황 선출 전까지 가톨릭교회의 운영은 최고위급 성직자인 추기경단이 맡게 된다. 현재 가톨릭 추기경은 총 252명이며, 이 중 138명이 차기 교황 선출 투표권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바티칸으로 소집되어 '콘클라베'라고 알려진 교황 선출 회의에 들어가게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근 몇 달 동안 건강 문제를 겪었으며, 이중 폐렴으로 병원에서 5주간 입원한 바 있다.
병원에 있는 동안, 그의 의사 중 한 명에 따르면 교황은 '생명이 위태로운 두 번의 매우 위급한 상황'을 겪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생 동안 여러 건강 문제를 겪었으며, 21세 때 폐의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 감염에 더욱 취약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 88세 일기로 선종 - BBC News 코리아
프란치스코 교황, 88세 일기로 선종 - BBC News 코리아
로마 가톨릭교회의 지도자이자 최초의 라틴 아메리카 출신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88세의 일기로 선종했다고 바티칸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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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가톨릭 교회를 바꿔놓은 최초의 비유럽 출신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의 재임 기간은 '최초'의 기록으로 가득했다. 그는 가톨릭 교회에 끊임없이 개혁을 도입하면서도 전통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 더 나아가 최초의 남반구 출신의 교황이다. 741년에 시리아 태생의 그레고리오 3세가 선종한 이후, 유럽 출신이 아닌 교황은 그가 처음이었다.
또한 그는 예수회 출신 첫 교황이다. 예수회는 역사적으로 로마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온 수도회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전임자 베네딕토 16세는 거의 600년 만에 자발적으로 퇴임한 첫 교황이었고, 그로 인해 거의 10년간 바티칸에는 두 명의 교황이 공존했다.
아르헨티나의 추기경이었던 그는 2013년 교황에 선출될 당시 이미 70대였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차기 교황이 더 젊은 인물이 될 것이라 예상했었다.
베르고글리오는 성 문제에 대한 보수적 입장으로 보수층에 호소력을 갖는 동시에, 사회 정의에 대한 진보적인 시각으로 개혁파들의 지지를 받으며 양측의 지지를 받는 후보로 자리매김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비전통적인 배경이 바티칸에 활기를 불어넣고, 교회의 거룩한 사명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부 개혁 시도는 바티칸 내부 관료주의 체제 내에서 저항에 부딪혔고, 여전히 전통주의자들 사이에선 2022년에 선종한 전임 베네딕토 교황의 인기가 높았다.

'변화'를 결심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출된 순간부터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임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교황의 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비형식적으로 추기경들을 맞이했다.
2013년 3월 13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을 내려다보는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
평범한 흰색 복장을 입고 나타난 그는 13세기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의 성인 성 프란치스코에게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따 자신의 교황명을 정했다.
그는 화려함과 위엄보다 겸손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교황 전용 리무진을 거부하고, 다른 추기경들과 함께 통근 버스를 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2억 명에 이르는 신자들에게 도덕적 사명을 제시했다.
"나는 가난한 교회,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를 원합니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는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다섯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파시즘의 악행을 피해 고국 이탈리아를 떠났다.
그는 탱고 춤을 즐겼으며, 지역 축구팀인 산 로렌소의 열성 팬이었다.
어릴 적 심각한 폐렴을 앓은 뒤 폐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그는 이로 인해 평생 감염에 취약한 삶을 살았다.
노년에는 오른 무릎 통증에 시달렸는데, 그는 이를 "신체적 굴욕"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베르고글리오는 나이트클럽 경비원과 바닥 청소부로 일했으며, 이후 화학자가 되어 학교를 졸업했다.
또 그는 지역 공장에서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에 맞서 싸운 에스테르 바예스트리노와 함께 일했다. 바예스트리노는 고문을 당했고,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베르고글리오는 예수회에 입회했고, 철학을 공부하며 문학과 심리학을 가르쳤다. 10년 뒤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빠르게 성장해 1973년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 주교가 되었다.

고발
일각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헨티나의 잔혹한 군사 정권에 맞서 충분한 행동을 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르헨티나의 군부의 '더러운 전쟁'(1976~1983)의 기간 동안 예수회 사제 2명이군에 의해 납치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다. 당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고문당하거나 살해되었고, 실종되었다.
납치된 두 사제는 심각한 고문을 받았으나, 살아서 발견됐다. 발견 당시 그들은 진정제를 과도하게 맞은 상태였고 반쯤 발가벗겨져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베르고글리오는 이 사제들이 교회의 승인을 받고 빈민가에서 활동했던 것임을 당국에 알리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사제들을 군부에 끌려가도록 방치한 셈이 된다. 다만 그는 이 같은 의혹을 단호히 부인하며, 오히려 사제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물밑에서 활동했다고 주장했다.
왜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당시 36세였던 그는, 노련한 지도자조차도 버거울 혼란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는 당시 해외로 탈출하려는 이들을 돕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해방 신학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예수회 내 동료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해방 신학은 기독교 사상과 마르크스 사회학을 결합해 사회의 불의를 타파하려는 이론이다. 베르고글리오는 이보다는 온건한 방식의 사목적 지원을 선호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동료들과의 관계는 때로 단절 직전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가 2005년 처음 교황직에 도전했을 당시, 일부 예수회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검소한 취향의 교황
베르고글리오는 1992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보좌 주교로 임명되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 안토니오 콰라시노 추기경에 의해 주교 수품을 받았다. 이후 1997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로 임명됐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1년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했고, 그는 교황청 내 행정조직인 쿠리아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다.
그는 검소한 삶을 지향하는 인물로 명성을 쌓았다. 고위 성직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피하고, 주로 이코노미 클래스를 이용했으며, 추기경의 상징인 붉은색이나 보라색 복장 대신 평범한 검은 사제복을 입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설교에서 사회적 포용을 강조하며,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는 정부를 비판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가장 많이 성장했지만, 고통은 가장 적게 줄었습니다."
교황이 된 이후 그는 천년 동안 이어져 온 동방 정교회와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노력으로 1054년 대분열 이후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새 로마 교황의 즉위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 등과도 협력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통령을 바티칸으로 초청해 평화를 위한 공동 기도회를 열기도 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공격 이후 그는 이슬람을 폭력과 동일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슬람 폭력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가톨릭 폭력도 함께 이야기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아르헨티나 정부의 포클랜드 제도(말비나스 제도) 영유권 주장에 동조했다. 한 미사에서 그는 "우리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떠났던 조국의 아들들, 이 땅이 자기 나라라고 믿고 싸운 이들을 위해 기도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으로서, 그는 미국과 쿠바가 역사적 화해를 모색하던 시기에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유럽 출신 교황이 이처럼 중대한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전통주의자
교회의 많은 교리에 있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통주의자였다.
그와 함께 신학교를 다닌 오스발도 무스토 몬시뇰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존엄사, 사형, 낙태, 생명권, 인권, 사제 독신제에 있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만큼이나 단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적 지향과 관계없이 사람들을 교회가 환영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동성 커플의 입양은 아동에 대한 차별의 형태라고 주장했다.
동성 커플을 위한 어떤 형태의 법적 결합에 대해서는 따뜻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프란치스코는 이를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반대했다. 그는 이것이 "하느님의 계획을 파괴하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2013년 교황에 즉위한 직후, 그는 로마에서 열린 낙태 반대 행진에 참여하며 태아는 "잉태 순간부터 권리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부인과 의사들에게 양심에 따라 행동하라고 촉구했고, 낙태에 관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있던 아일랜드 국민에게는 "연약한 생명을 보호해 달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그는 여성 사제 안수에도 반대 입장을 고수했으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이미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했다고 선언했다.
또한, 처음에는 질병 예방을 위한 피임을 어느 정도 허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결국 그는 바오로 6세 교황의 교리를 따랐다. 이 교리는 피임이 여성을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2015년 필리핀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피임이 "아이를 갖지 않으려는 선택을 통해 가족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진정한 문제는 아이가 없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아이를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인간의 결단이었다.

아동학대 문제에 대한 대응
그러나 그의 교황직에 있어 가장 커다란 어려움은 두 가지로 꼽힌다. 하나는 아동 성학대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이었고, 다른 하나는 보수적 비평가들로부터 신앙을 희석시킨다는 비난이었다. 특히, 이들은 교황이 이혼 후 재혼한 가톨릭 신자들에게 영성체를 허용하려 했던 시도를 문제 삼았다.
보수파들은 아동 성학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기도 했다.
2018년 8월, 미국 주재 교황청 대사를 지낸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는11쪽에 달하는 '선전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는 전직 추기경인 토머스 매캐릭의 행동에 대해 바티칸에 수차례 경고를 전달했었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공개했다.
매캐릭은 성인과 미성년자를 모두 상습적으로 학대한 인물로 알려졌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의 부패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믿을만한 조언자"로 삼았다는 게 비가노 대주교의 주장이다. 비가노 대주교는 명확한 해법도 제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임해야 한다."
그는 또 "이 동성애 네트워크는 비밀과 거짓의 은폐 속에서 문어의 촉수처럼 힘을 행사하며 교회를 목 졸라 죽이고 있다"고도 덧붙였다.
이후 벌어진 갈등은 교회를 집어 삼킬 듯 커졌다. 매캐릭은 결국 바티칸 조사를 거쳐 2019년 2월 파문당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의 정기 연설을 취소했다. 또한, 도덕적 리더십의 선례로 그는 백신 접종을 "보편적인 의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2022년, 프란치스코는 95세로 선종한 베네딕토 16세의 장례를 치렀다. 이는 100년 만의 일이었다.
이 무렵 프란치스코 본인도 건강이 악화되어 여러 차례 입원했지만, 그는 세계 평화와 종교 간 대화를 촉진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2023년, 그는 남수단을 순례하며 그 나라 지도자들에게 내전을 끝내 달라고 호소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불합리하고 잔혹한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호소했으나, 러시아의 침공이 도발에 의한 것이라는 러시아의 선전을 수용한 듯한 발언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 뒤, 그는 4개국, 2개 대륙에 걸친 야심찬 순방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싱가포르에 들리기도 했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는 변화시키겠다는 결심을 안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왕좌에 올랐다.
누군가는 더 진보적인 지도자를 원했을 수도 있고, 일부 비판자들은 그가 성직자 성학대 문제에 대해 단호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분명히 바꾸었다.
그는 유럽 외 국가 출신의 추기경 140명 이상을 임명했으며, 후계자에게 훨씬 더 세계적인 시각을 가진 교회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실용주의적 자세를 보이며, 시스틴 성당이 딸린 바티칸 사도궁 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손님용으로 지은 인근 현대식 건물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그는 그것 외의 선택은 허영이라 여겼다.
"공작새를 보세요. 앞에서 보면 아름답지만, 뒤에서 보면 진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또한 교회 내부의 갈등을 줄이고 가난한 이들에게 집중하며, 교회를 다시 사람들에게 돌려주겠다는 목표로 제도 자체를 개혁하고자 했다.
선출 직후 그는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는 교회의 영적 병을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거리로 나서는 상처 입은 교회와, 자기 안에만 갇혀 병든 교회 중에서 선택하라면, 저는 전자를 택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가톨릭 교회를 바꿔놓은 최초의 비유럽 출신 교황 - BBC News 코리아
'최초'의 기록으로 가득 채운 프란치스코 교황이 21일 88세의 일기로 선종했다. 다만 재임 기간 동안 일부는 그의 리더십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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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
10년 넘게 로마 가톨릭교회를 이끈 프란치스코 교황이 향년 88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교황은 지난 20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서 수천 명의 신자들에게 "행복한 부활절"을 기원하며 마지막으로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휠체어를 탄 교황은 발코니 아래 성 베드로 광장의 환호하는 군중에게 손을 흔들었다.

2013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후임으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 선출됐을 때만 해도 그는 일종의 외부인에 가까웠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라틴아메리카 출신이자 예수회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를 이끌게 된 획기적인 인물이었다.
교황의 생애를 대표하는 여러 장의 사진을 정리해봤다.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 뿌리를 가진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자라며 소박함과 신앙에 대한 깊은 헌신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69년 사제 서품을 받은 베르고글리오는 예수회 내에서 빠르게 성장해 1973년 아르헨티나 예수회 관구장이 됐다.

1998년 베르고글리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가 됐다.

그는 신자들을 돌보고, 겸손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그는 고위직의 과시적인 요소를 거부하고 소박한 아파트에 살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지역사회와 직접 소통하는 삶을 택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1년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했고, 그는 교황청 내 행정조직인 쿠리아에서 직책을 맡았다.

2013년 3월 13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 베드로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흰색 옷을 입은 교황은 환경과 동물, 새의 수호성인인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게 경의를 표하는 새로운 이름을 취했고, 자비와 겸손, 사회 정의를 강조하는 교황직의 기조를 세웠다.

시리아 태생의 그레고리 3세가 741년에 서거한 이후 비유럽인 출신 로마 주교는 없었다.
새로운 교황의 정통적이지 않은 배경이 바티칸에 활력을 불어넣고 거룩한 사명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처음부터 자신의 교황직이 단순함과 섬김에 초점을 맞출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오, 나는 가난한 교회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원한다"라는 유명한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교황으로서 그는 동방 정교회와의 천 년 동안의 균열을 치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프란치스코는 성공회, 루터교, 감리교와 협력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통령을 설득해 평화를 위한 기도에 동참하도록 했다.

교황직을 수행하는 동안 어려움도 있었다. 교황은 그가 전통적인 교리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한 교회 내 보수파의 저항에 부딪혔다.
교황 취임 초기에 동성애자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교황은 이렇게 답해 화제를 모았다. "내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교황직에 있어 가장 큰 도전은 그가 아동 학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난에서 비롯됐다.

교황은 성직자들에게 의심되는 학대 사례를 상급자에게 보고하도록 의무화했으며, 내부 고발자들이 위협받지 않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를 전 세계적으로 일관되게 적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교황은 2015년 12월 8일 자비의 특별 희년을 선포했다.
이 기간 동안 성 베드로 성당을 비롯한 로마 내 주요 성당의 성문이 개방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4년 세계 최대 경제국 정상들이 모이는 G7 정상회의에 참석한 최초의 교황이 됐다.

이탈리아에서 열린 포럼에서 교황은 인류가 직면한 심각한 위험, 특히 우크라이나와 가자 지구에서 계속되고 있는 전쟁과 같은 분쟁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인공지능(AI)이 윤리와 인권에 미치는 위험성을 경고하며 전 세계적인 규제를 촉구했다.

교황은 회고록 '나의 인생'에서 건강 문제로 인해 사임할 것이라는 추측에도 불구하고 사임할 위험이 "전혀 없다"라고 말했다.

2025년 2월 14일, 그는 기관지염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추가적인 임상적 우려로 인해 추가 치료를 위해 입원 기간이 연장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와 겸손, 사회 정의의 비전으로 전 세계 12억 가톨릭 신자들을 이끌며 교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더라도 섬김과 단순함의 삶이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으로 보는 그의 삶 - BBC News 코리아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으로 보는 그의 삶 - BBC News 코리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집안의 아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로 태어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기까지. 사진을 통해 그의 삶을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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