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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인도에서도 8월 15일에 독립을 기념한다. 75년 전 인도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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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인도에서도 8월 15일에 독립을 기념한다. 75년 전 인도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CIA bear 허관(許灌) 2022. 8. 15. 19:04

1959년 이후 매일 저녁 인도군과 파키스탄군은 암리차르 인근 와가 국경 교차로에서 함께 깃발을 내렸다

인도 제국은 지난 1858년부터 1947년까지 89년간 영국의 식민지였다. 독립일은 한국과 같은 8월 15일이다.

영국은 17세기 초 동인도회사를 통해 무굴 제국과 교역을 시작으며 이후 1858년 인도 제국을 설립하면서 인도를 직접 지배했다. 당시 영국령 인도 제국은 인도뿐 아니라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부탄, 몰디브, 미얀마 등을 포함하는 광활한 영토였다.

인도의 독립 이슈는 영국이 당시 1-2차 세계대전 중 자치권 확대, 독립 등을 내걸고 인도군을 동원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자와할랄 네루 등 인도의 독립 운동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인도는 1947년 독립을 이뤄냈다. 한국이 일본에서 해방된지 2년 뒤의 일이다.

영국이 인도를 떠난 후 이 지역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되었고, 분할은 큰 고통을 남겼다.

왜 영국령 인도는 분할되었는가?

75년 전 영국이 인도를 독립시켰을 때, 영국이 지배했던 영토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새로운 주(나중에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가 됨)로 나뉘거나 분할됐다.

이로 인해 약 15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고 약 100만 명이 사망했다.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은 지금까지도 라이벌로 남아 있다.

분리 분할 후 인도. 영국이 지배했던 영토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새로운 주로 나뉘거나 분할됐다

1946년 영국은 인도를 독립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더 이상 나라를 관리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하루빨리 분할시키기를 원했다.

마지막 총독인 마운트배튼 경은 1947년 8월 15일로 날짜를 정했다.

당시 인도는 인구의 약 25%가 무슬림이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힌두교이지만 시크교, 불교 등 기타 종교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도의 독립운동가 자와할랄 네루와 모하다스 간디는 모든 신앙을 포용하는 인도를 원했다

런던대학교 SOAS의 예술인문학 연구위원회 나브테즈 푸레왈 교수는 "영국은 인도에서 사람들을 분류하는 방법으로 종교를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지방 선거를 위한 별도의 무슬림과 힌두교 유권자 명단을 만들었습니다."

"무슬림 정치인들을 위한 좌석과 힌두교도들을 위한 좌석들이 있었습니다."

영국에 본부를 둔 채텀하우스 외교정책연구소의 가레스 프라이스 박사는 "인도의 독립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많은 이슬람교도 인도인들은 힌두교 다수파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사는 데 대해 걱정했다"고 설명했다.

1940년경 제안된 파키스탄 영토 지도. 많은 이슬람교도 및 영국령 인도 지역을 보여준다

"그들은 압도당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분리된 이슬람 조국을 위해 캠페인을 벌이는 정치 지도자들을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의회당 독립운동 지도자 모한다스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는 모든 신앙을 포용하는 통일된 인도를 원했다.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독립 문제를 놓고 간디와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러나 전인도 무슬림 연맹의 지도자인 무하마드 알리 진나는 독립 정착의 일환으로 분할을 요구했다.

프라이스 박사는 "통합된 인도가 어떻게 작동할지에 대한 합의를 얻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독립은 빠르고 간단한 해결책처럼 보였습니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거리에서 싸웠던 1946년 캘커타 학살로 2000명 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분할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고통이 발생했는가?

영국의 공무원인 시릴 래드클리프는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을 정했다.

그러나 힌두교와 이슬람교 공동체는 영국령 인도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따라서 약 1500만 명의 사람들이 새로운 국경을 넘으려고 수백 마일을 여행했다.

그리고 1946년 캘커타 살인사건으로 2000명 가량이 사망하면서 많은 이들이 집단폭력에 의해 거주지에서 쫓겨났다.

런던대학교 SOAS의 남아시아 역사 수석 강사 엘리너 뉴비긴 박사는 "이슬람 동맹은 민병대를 결성했고 우파 힌두교 단체도 결성했다"고 말했다.

"테러 단체들은 자신들의 편에서 더 많은 통제력을 얻기 위해 마을 밖으로 사람들을 쫓아냈습니다."

시크교도 난민들이 암리차르 구호 캠프에서 무료 음식을 먹는 모습. 1947년부터 1948년까지 120~200만 명의 사람들이 분할로 집을 떠나야 했다

20만 명에서 최대 100만 명의 사람들이 난민촌에서 질병으로 죽거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를 막론하고 수만 명의 여성들이 강간, 유괴, 폭행 등을 당했다.

독립의 결과는?

분할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지역을 누가 지배하느냐를 놓고 반복적으로 싸워왔다.

이들은 두 차례의 전쟁(1947~8년과 1965년)을 치렀고 1999년 카길 위기에서 충돌한 이후 현재는 다른 부분을 관리하고 있다.

지역 간 통제선과 실질 통제선을 보여주는 지도

인도는 1971년 동파키스탄에 대한 독립 전쟁에도 개입했다.

현재 파키스탄 인구의 2% 미만이 힌두교도다.

프라이스 박사는 "파키스탄은 점점 더 이슬람적이 되었다"고 말한다.

"현재 그곳의 많은 인구가 이슬람교도이고 남아있는 힌두교도들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도는 이제 힌두 민족주의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습니다."

1947년 폭동 때 암리차르의 일부가 잔해로 전락했다. 이슬람교도들은 그곳이 파키스탄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지만 힌두교도들은 그것이 인도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

뉴비긴 박사는 "독립의 유산은 고통스럽다"고 밝혔다.

"그것은 두 나라 모두에서 강력한 종교적 다수파를 만들어냈고 소수자들은 더 취약해졌다."

푸레왈 교수는 "통일된 인도를 만드는 것은 1947년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슬람교도들이 다수인 주를 포함해 자유롭고 매여있지 않은 연방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간디와 네루 모두 중앙에서 통제 가능한 통일된 국가를 만들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국가 내에서 어떻게 무슬림 소수자들이 살 수 있을지에 대해 진정으로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광복절: 인도에서도 8월 15일에 독립을 기념한다. 75년 전 인도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 BBC News 코리아

 

인도에서도 8월 15일은 광복절? - BBC News 코리아

인도의 '광복절'은 한국과 날짜가 같다. 하지만 독립 이후 인도는 아직도 고통을 받고 있다

www.bb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