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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고난의 행군’ 북에 손을 내밀다 본문
“남북관계는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 정착에 토대를 두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남북문제 해결의 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1991년 12월13일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선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의 교환을 제의합니다.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1998년 2월25일 15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에 담긴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관계 구상이다. 취임사(5748자)의 13.4%(770자)가 남북관계에 할애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대북 3원칙’도 발표했다. “첫째, 어떠한 무력도발도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습니다. 셋째,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을 가능한 분야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갈 것입니다.” 북을 “고장 난 비행기”에 비유하던 전임 김영삼 대통령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접근법이다. 한 문장으로 줄이면, 남북기본합의서의 원칙대로 상호불가침을 전제로 화해·협력의 물꼬를 트자는 제안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발짝 더 나아가 “정경분리에 입각한 경제교류”를 제안했다. 정치·군사 상황이 나빠지더라도 그를 빌미로 경제교류를 중단하는 행태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대북 요구다. ‘고난의 행군’ 중이던 북에 “식량도 정부와 민간이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 지원하는 데 인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아울러 “새 정부는 (IMF 외환위기라는) 현재와 같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북한의 경수로 건설과 관련한 약속을 이행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무엇보다 “남북 간에 교류협력이 이루어질 경우 우리는 북한이 미국·일본 등 우리의 우방국가나 국제기구와 교류협력을 추진해도 이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사회주의 협력 체제의 와해에 경제·식량·에너지난이라는 ‘3중 재난’이 겹쳐 적어도 수십만명이 굶어 죽을 정도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고립무원의 북을 향해 ‘농성을 풀고 화해협력으로 공존공생의 길을 도모하자’고 손을 내민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선거를 통한 첫 정권교체의 역사적 무게만큼이나 중대한 대북정책의 방향 전환 선언이다. 다만 김대중 대통령은 전임 김영삼 정부의 ‘북한 붕괴론’에 기댄 대북 대결 정책과 결별하는 정책 전환의 역사적 근거를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찾음으로써 이 방향 전환이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초당파적 합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애써 강조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정세현 통일부 차관과 전금철 정무원 책임참사가 중국 베이징에서 만났다. ‘대북 비료 지원’과 ‘이산가족상봉’을 핵심 안건으로 일주일간 협상(1998년 4월11~17일)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김영삼 정부 5년간 쌓인 불신의 벽이 두터웠다.
김대중 정부는 교류협력의 숨구멍을 대폭 넓혔다. 베이징 차관급 회담 결렬 직후인 1998년 4월30일, ‘500만달러’로 묶여 있던 민간기업의 대북 투자 상한선을 없앤 게 대표적이다. 굴레가 벗겨지자 가장 먼저 치고 나간 이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1989년 김일성 주석과 합의했으나 대북 강경파의 반발로 무산된 금강산관광 사업을 되살리겠다고 나선 것이다. 1998년 6월16일 500마리의 ‘통일소’를 끌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군사분계선을 넘어 방북한 정주영은 금강산관광 사업을 포함한 ‘경제협력합의서’를 북쪽과 새로 썼다. 그해 11월18일 강원도 동해항에서 1418명을 태운 첫 금강산관광선 현대금강호가 출항했다. 분단사 최대·최장 교류협력 사업인 금강산관광의 시작이다.
김대중 정부 출범 첫해인 1998년에만 민간인 3317명이 북에 다녀왔다. 정부 사전 승인을 전제로 민간인 방북이 허용된 1989~1997년 9년간 방북 민간인 2059명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그렇게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첫해부터 임동원 외교안보수석과 함께 남북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을 뚫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허리를 가른 냉전의 빙벽에 평화의 봄바람길을 내는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너희가 진정 평화와 정상회담을 바라느냐’고 되묻듯 난제와 악재가 줄을 이었다. ‘3년 전쟁’을 치른 남과 북 사이의 첫 정상회담은 로또처럼 어쩌다 손에 쥔 횡재가 아니다. 어떤 난관에도 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은 경이로운 뚝심과 일관성의 열매다. 신뢰는 말이 아닌 실천의 자식이다. 심장에 새겨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1998년 8월31일 북이 장거리 로켓 ‘대포동 1호’를 일본 하늘을 가로질러 태평양 쪽으로 쏘아 올렸다. 북은 “공화국 창건 50돌을 즈음하여 다단계 운반 로케트로 첫 인공지구위성을 발사해 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조선중앙통신>으로 발표했다. 동북아 주변국이 뒤집어졌다. ‘인공위성’ 발사 로켓이라는 북의 주장이 사실이든 아니든, ‘탄도미사일’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와 전략적 의미가 다르지 않아서다. 그 한달여 전 ‘북의 장거리 미사일이 애리조나 등 미국 서부 지역을 타격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1998년 7월15일)한 도널드 럼스펠드 등 미국의 대북 강경파들이 ‘봐라, 우리 말이 맞지 않냐’고 환호작약했다. 더구나 그해 8월2일 시사 주간지 <타임>과 8월17일 <뉴욕 타임스>가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 기사를 내보낸 터였다. 북이 영변 말고 금창리의 지하 동굴에서도 핵 활동을 하는 정황이 있다는 것이다. 첩보의 신빙성을 문제 삼은 중앙정보국(CIA)을 따돌리고 국방정보국(DIA)이 ‘작업’한 기사였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미국의 강경세력이 ‘북한발 안보 위기’를 띄우려 행동에 나선 바로 그 시점에 ‘대포동 1호’가 일본 하늘을 가른 것이다. ‘대포동 1호’ 발사는 북으로선 김일성 주석 사망 뒤 지속되던 ‘3년 유훈통치’를 끝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대’를 공식 선포하는 ‘축포’이자, 북 특유의 ‘힘에는 힘으로’ 식 맞대응이었다. 워싱턴에서 ‘북한’의 우선순위가 높아졌고, 북-미 사이 팽팽한 긴장과 함께 한반도에 짙은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그에 앞서 6월22일엔 동해 속초에서 북의 잠수정이 그물에 걸린 채 발견됐다. 한국의 대북 여론이 나빠졌음은 물론이다.
안팎의 어려움에도 ‘김대중-임동원’ 짝은 첫 금강산관광선을 띄웠다. “금융위기에 안보위기까지 겹친 이중적 도전”에 맞서 “한반도 긴장 완화와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를 마련하고 “남과 북이 모두 경제 회생의 전기”를 열려는 “일종의 모험”이었다고 임동원은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적었다.
‘김대중-임동원’ 짝은 남과 북 사이엔 신뢰를 쌓으려, 미국을 상대론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공동 목표로 삼으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서해교전’(1999년 6월15일)과 북의 금강산관광객 억류 사건(1999년 6월20일)에도 ‘햇볕정책’의 기조를 바꾸지 않았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임명한 초대 대북정책조정관인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설득해 “포괄적이고 통합된 접근”을 핵심으로 한 ‘페리 보고서’(1999년 10월12일 미 상원 제출)를 이끌어냈다. 1994년 영변 핵시설 폭격 계획의 입안자인 페리를 설득해 김대중 정부의 ‘대북화해협력정책’(한반도 냉전구조 해체 전략)과 사실상 같은 인식이 미국의 대북정책에 담기도록 한 것이다. 페리는 1999년 5월25~28일 방북해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회담했고, 그에 앞서 미국 정부 조사단이 ‘지하 핵 의혹 시설’로 지목된 금창리 지하동굴을 방문(1999년 5월20~22일)해 ‘핵 활동’과 무관함을 확인했다.
그렇게 남·북·미 사이에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염두에 둔 북-미 적대관계 해소와 비핵화, 남북화해협력 추진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말싸움과 무력시위를 앞세운 위기의 격화라는 익숙한 과거에서 벗어나 협상과 실천을 통한 위기 해소라는 낯선 경험을 쌓아가게 된 것이다. “냉전적 남북관계는 하루빨리 청산돼야 합니다”라며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 정착”을 강조한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사가 비수를 감춘 거짓 미소가 아님을, ‘두려움과 의심’에서라면 지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북이 믿어볼 만한 상황 전개였다.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제안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답’을 할 환경이 무르익어갔다
김대중, ‘고난의 행군’ 북에 손을 내밀다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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