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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 별세...향년 90세 본문
대한민국 11대, 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별세했다. 향년 90세다.
그동안 지병을 앓아온 전 전 대통령은 23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뒤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은 이날 오전 10시 50분쯤 전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살아생전 작성한 유서에서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뿌려달라'라고 했다"며 사망 소식을 알렸다.
민 전 비서관은 또 "장례는 가족장으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치러질 것"이라면서 현재 정확한 사인은 조사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전 전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뵌지 열흘 정도 됐다"라면서 "그때만 해도 거동에 불편은 없었다"라고 덧붙였다.
전 전 대통령은 193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육사 신군부 출신으로 대통령에 올랐다.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에 띄어 국가 재건 최고 회의에 참여했다.
이후 하나회를 만들어 정치군인의 길로 들어선 뒤,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를 거쳐 박정희 정권 말인 1979년엔 국군 보안사령관에 임명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된 이후 12·12 쿠데타 통해 군의 일인자로 떠올랐고, 1980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선거 단일 후보로 나서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1년 2월 개정된 새 헌법에 따라 1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80년 5월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신군부의 군사 독재 연장 시도에 맞선 시위가 이어지자 계엄령을 전국에 선포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했다.
전 전 대통령은 사망 직전까지 5.18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재임 시절 '고성장 저물가'를 유지하며 처음으로 무역흑자 시대를 여는 등 경제 성장을 이끌기도 했다.
앞서 육사 11기 동기이자 하나회 12·12쿠데타를 함께 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지난달 26일 별세했다.
韓国の全斗煥元大統領が死去 国家元首として初来日
1980年代に韓国の軍事独裁政権を率い、同国の国家元首として初来日した全斗煥(チョン・ドゥファン)元大統領が23日午前、ソウル市内の自宅で死去した。90歳だった。血液がんの一種である多発性骨髄腫などの持病を抱えていた。
全氏は陸軍士官学校卒。1979年、当時の朴正熙(パク・チョンヒ)大統領が暗殺された後、粛軍クーデターを主導し軍の実権を掌握した。戒厳令に反発した南西部光州(クァンジュ)のデモ隊に軍が一斉銃撃を浴びせ多数の死者を出した80年5月の「光州事件」などを経て、同年9月に大統領に就任した。
大統領在任中は88年ソウル五輪の誘致に成功。民主化運動を弾圧する一方、経済成長を軌道に乗せた。83年には当時の中曽根康弘首相が日本の首相として戦後初めて韓国を公式訪問し、翌84年に全氏が国家元首として初来日するなど、日韓関係の改善が進んだ。
大統領退任後の95年、クーデターと光州事件を主導したとして内乱罪などで起訴され、1審死刑判決を経て97年に無期懲役が確定。同年、特赦を受けて出所していた。
한국 언론, 쿠데타로 정권 장악한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 보도
한국의 복수 매체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약 7년 반에 걸쳐 대통령을 지내며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한 강권적인 개발독재 정치를 행한 전두환 씨가 23일, 자택에서 90세로 사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전두환 씨는 1979년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뒤의 국내의 혼란 속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이 사이에, 한국 광주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등을 군이 무력으로 탄압한 광주민주화운동, 일명 ‘광주사건’이 있었습니다.
전 씨는 약 7년 반에 걸쳐 개발독재형 강권정치를 행했고,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했습니다.
퇴임 후에는 쿠데타와 광주민주화운동 탄압과 관련해 신랄한 비판을 받아, 1995년에 체포돼 재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고, 이후 사면됐습니다.
한국에서는 지난달, 전 씨가 주도한 쿠데타에 참가했고, 후임 대통령으로 정권을 넘겨받은 노태우 씨가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언론, 쿠데타로 정권 장악한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 보도 | NHK WORLD-JAPAN News
쿠데타 집권 전두환 한국 전 대통령 별세…집권 기간 남북한 체제경쟁 극심
1980년 군부 쿠데타로 집권했던 전두환 전 한국 대통령이 오늘(23일) 아흔살을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전 전 대통령은 집권 기간 북한과 극심한 체제경쟁을 벌이며 깊은 악연을 맺었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한국의 제11대와 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씨가 23일 향년 아흔살을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지난 8월 혈액암을 진단받는 등 지병을 앓아온 전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8시 40분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쓰러져 경찰에 신고됐고, 경찰은 오전 9시 12분쯤 사망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지난달 26일 12·12 군사쿠데타 동지 관계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한 뒤 28일 만에 세상을 떠난 겁니다.
1931년 1월 23일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난 전 전 대통령은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직업군인으로서 출세 가도를 달렸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 전 대통령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사건 수사를 담당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12일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과 함께 정권 찬탈을 위한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를 통해 정국을 장악한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했습니다.
같은 해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를 통해 11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이듬해인 1981년 대통령선거인단 간접선거를 통해 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집권 기간 동안 독재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받으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에 대한 거센 요구에 직면했지만 1987년 4·13 호헌 조치를 통해 민의를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이 조치로 한국 전역에서의 호헌 철폐 시위가 촉발돼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졌고, 전 전 대통령은 결국 항복 선언을 하고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직선제 개헌을 명시한 6·29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전 전 대통령은 퇴임 뒤 수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1988년 재산 헌납을 선언하고 백담사에 칩거했지만 재산 헌납은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1996년엔 내란, 내란목적 살인죄, 뇌물수수 등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추징금 2천205억원, 미화로 약 1억8천500만 달러가 선고됐습니다.
수감 2년 만인 1997년 12월 22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됐고 추징금 완납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전 전 대통령은 집권 기간 중 통치자금 명목으로 대기업들로부터 천문학적인 재산을 끌어모은 데 대한 국민적 비난을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다만 전 전 대통령의 집권 기간 동안 물가안정 등 경제성장 기조가 유지되고 1988년 서울하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국력 면에서 한국이 북한을 확실하게 앞지르게 됐다는 평가입니다.
한국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 조한범 박사는 전두환 정권 시대는 동서 냉전구도 속에서 남북 간 체제경쟁이 치열했던 시기였다고 설명했습니다.
[녹취: 조한범 박사] “전두환 시대는 체제경쟁이 극심했던 박정희 시대의 연장선상이고요, 그리고 사실상 전두환 시대를 계기로 한국이 북한보다 명백하게 종합 국력이 우월을 점하는 시기가 됩니다. 그런 점에선 과도기지만 확실하게 북한에 우위를 점하는 그런 전환기로서의 의미는 지니고 있지만 정권 자체의 뚜렷한 대북정책이나 평화정책 면에서 특성은 없다고 봐야죠.”
적대적 체제경쟁이 극명하게 표출된 사건은 1983년 10월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 암살 폭발 사건이었습니다.
북한이 전 전 대통령의 목숨을 노리고 저지른 이 사건으로 한국의 서석준 당시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수행 공무원 등 17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14명이 다쳤습니다.
그로부터 약 두 달 뒤인 12월3일에는 부산 다대포 해안에 북한 간첩이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북한은 전 전 대통령 임기 말인 1987년 11월엔 바그다드발 서울행 대한항공 KAL858 여객기 공중폭발 사건을 일으켜 승무원과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1984년 남북경제회담과 한국전쟁 이후 첫 남북한 물자 교류, 1985년 서울과 평양에서의 사상 첫 이산가족 상봉 행사 등 일부 유화 국면도 있었지만 전 전 대통령 집권기간은 전반적으로 북한과의 적대적 긴장이 팽팽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전 전 대통령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에 대한 사과를 끝내하지 않고 사망한 탓에 국민들의 비난여론이 여전히 높고 이에 따라 국가장 예우도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관측입니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에게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면서도 “진정성 있는 사과가 없었던 점에 대해서 유감을 표한다”고 말했습니다.
박 대변인은 “청와대 차원의 조화와 조문 계획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전 전 대통령 유족들은 고인의 장례를 가족장으로 치를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은 전 전 대통령의 서울 자택 앞에서 기자들을 만나 전 전 대통령이 2017년 출간한 회고록에 남긴 유언에 따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 민정기 전 비서관] “유언은 북녘 땅이 보이는 전방고지에 백골로 남아있고 싶다고 하셨는데 장지가 결정될 때까지는 일단 화장한 후에 연희동에 모시다가 장지가 결정되면 그 때 그리로 모셔야죠.”
전 전 대통령은 회고록 중 ‘글을 마치며’라는 소제가 달린 대목에서 “반민족적, 반역사적, 반문명적 집단인 김일성 왕조가 무너지고 조국이 통일되는 그 날의 감격을 맞이하는 일. 그날이 가까이 왔음을 느낀다”며 “그 전에 내 생이 끝난다면 북녘땅이 보이는 전방의 어느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있으면서 기어이 통일의 그 날을 맞고 싶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
미 언론들 "전두환, 한국에서 가장 비난 받는 군부 독재자...부정적 유산으로 빛 바래"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전두환 전 한국 대통령의 별세 소식을 전하면서 그가 잔인하며, 한국에서 가장 비난 받는 군부 독재자라고 평가했습니다. 또 재임 시절 이룬 경제성장이 그의 부정적 유산으로 빛을 바랬다고 지적했습니다. 조은정 기자가 전해 드립니다.
`뉴욕타임스' 신문은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한국에서 가장 비난 받는 군부 독재자로,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고 1980년대 한국을 철권통치 했으며, 공수부대를 동원해 수 백명의 민주화 시위대를 살육했다”고 전했습니다.
이 신문은 전 전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 당시 국군보안사령관이었으며, 경남 출신의 육군 친구들과 함께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하고 군사 반란에 성공했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계엄령을 선포했고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군을 투입해 몽둥이와 총검을 휘두르게 하고, 발포도 했다고 전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191명이 사망했다고 공식 집계됐지만, 희생자 유가족들은 사망자 수가 훨씬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고 이 신문은 지적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데이비드 스트로브 전 국무부 한국과장의 책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Anti-Americanism in Democratizing South Korea)를 인용해 광주의 사건은 “한국의 젊은 세대의 사고에 깊은 영향을 준 잔학 행위이자 비극이었고, 이들 대다수는 미국에 극도로 비판적이게 됐다”고 전했습니다.
스트로브 전 한국과장은 “젊은 한국인들은 미국이 ‘광주 학살’을 막지 못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배신의 증거라고 받아 들였다”고 분석했습니다.
또 “레이건 전 대통령이 전 씨의 인권 유린에 대해 ‘조용한 외교’를 펼치자 미국이 한국인들의 고통을 외면한다는 그들의 생각이 굳어졌다”고 덧붙였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정부도 전 씨의 쿠데타를 예상치 못하고 당황했으며, 당시 광주에 파견된 군인들 중 미국 당국자들의 통제를 받는 이들은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당시 정부의 통제를 받는 한국 언론이 전 씨가 광주에 군을 투입한 데 대해 ‘미국의 승인을 받았다’고 보도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스트로브 전 과장은 이에 대해 전 씨가 “한국 대중뿐 아니라 미국도 조종했다”고 밝혔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습니다.
신문은 또 “전 씨가 재임 중 ‘사회정화 정책’으로 야권 인사, 학생운동가, 언론인들을 대거 고문실로 쓸어 넣었다”며 ‘잔인한 재교육’으로 수 백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습니다.
“한국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대”
`월스트리트저널' 신문도 “잔인한 한국의 전 독재자가 별세하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한국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또 그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정치활동을 규제했다는 비난을 받는다고 전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 신문은 “전 전 대통령의 유산은 대체로 그의 무자비한 행동으로 규정된다”며 “한국이 번영한 민주국가가 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과거의 행위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며, 부인하고, 전혀 후회를 나타내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그의 가장 악명높은 행동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군부의 폭력적인 억압이었다며, 그의 지시를 받은 군인들은 학생들과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쏴 수 백 명이 사망했다고 지적했습니다.
`LA타임스'는 미국이 당시에 개입하지 않고 전 씨의 통치를 암묵적으로 용인하면서 반미주의 정서와 시위가 퍼졌고, 아직까지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신문은 전 씨의 재임 중 그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거리시위와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열기를 더해 갔다고 평가했습니다. 결국 전 씨는 국민들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따랐고, 한국의 민주화가 분수령을 맞았다고 덧붙였습니다.
한국의 대통령리더십연구소의 최진 소장은 `LA타임스'에 “그는 어떤 대통령보다도 불법과 폭력으로 통치했다”며 “마지막까지 정치적 혹은 사적인 사죄를 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상자가 났지만 후회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AP' 통신은 전 전 대통령이 군부 독재자로 197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민주화 운동가들을 잔인하게 탄압했으며, 재임 중 비위로 수감됐었다고 전했습니다.
또 1980년대 그의 재임 기간 수 백 명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목숨을 잃고, 수 만 명이 수감됐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수 년간의 권위주의적 통치 뒤 일부 자유화를 허락했고, 한국 역사상 첫 대통령 직선제를 허용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한국을 아시아 호랑이로...부정적 유산으로 빛 바래”
미국 언론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 한국이 이룬 경제성장도 비중 있게 전했습니다.
`뉴욕타임스' 신문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3명의 장성들이 32년간 통치하는 동안 한국은 경쟁국인 북한을 제치고 아시아의 호랑이가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특히 전 전 대통령 당시에는 한국이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고,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10%대 성장률을 기록했다고 전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그럼에도 전 전 대통령은 독재자로 기억된다며 “그의 긍정적인 성과는 부정적 유산에 훨씬 못 미친다”는 최진 소장의 말을 전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정치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는 경제적 번영으로 특징지어진다”고 평가했습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을 개최하고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권을 땄다는 것입니다.
이 신문은 특히 올림픽은 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국제 행사로 여겨지며, 한국의 사기를 높이고 경제성장에 기여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또 한국이 1980년대 연간 평균 경제성장률 10%를 기록했다고 전했습니다.
`LA타임스'는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에 “눈부신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이뤘으며, 수출이 증대됐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권위주의적 통치 아래 야권 인사들과 학생 민주화 운동가들이 납치되고 고문 받았으며 실종됐다”고 지적했습니다.
`AP' 통신은 전 전 대통령이 “북한과 화해를 추구하기도 했다”며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을 추진했다”고 전했습니다. 또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허용하고, 한국의 수해에 대한 북한의 지원도 받았다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전 대통령 재임 기간 한국에 거듭 도전을 제기했으며, 1983년에는 북한이 그의 미얀마 방문 중 폭탄 공격을 시도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전 전 대통령은 가까스로 공격을 피했지만 그의 각료 등 21명이 사망했습니다.
또 1987년에는 북한이 대한항공기를 폭파해 한국인 115명이 사망했다고 전했습니다.
한편 `월스트리트저널'은 전 전 대통령을 둘러싼 한국 내 논란도 전했습니다.
그의 별세가 알려진 23일 한국 언론 중 일부는 ‘전 전 대통령’이라고 보도했지만 나머지는 단지 ‘전 씨’로 지칭했다고 전했습니다.
VOA 뉴스 조은정입니다.
미 언론들 "전두환, 한국에서 가장 비난 받는 군부 독재자...부정적 유산으로 빛 바래" (voakorea.com)
북한매체, 전두환 사망에 "저승길서도 남녘 저주 받은 역도"
북한의 선전매체가 지난 23일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저승길에 올라서도 남녘민심의 저주와 비난을 받은 역도"라고 비난했다.
북한의 대외용 주간지 통일신보는 27일자 단평 '지옥에 가서도 저주를 면치 못할 극악한 대결광'에서 "그는 남조선에서 12·12숙군쿠데타로 권력을 강탈하고 온 광주시를 피바다에 잠그었던 극악무도한 살인마"라며 전 전 대통령 사망소식을 전했다. 그의 사망에 대한 북한 매체의 첫 보도다.
매체는 "두 손을 인민들의 피로 물들이고 권력을 강탈하고 민주를 교살한 도저히 용서 못 할 치 떨리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그는 저세상에 가는 날까지 남조선 인민들에게 사죄를 표명하지 않았다"며 "인두겁을 쓴 살인마, 독재광, 철면피한"이라고 비난했다.
이어 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서에 대해 "저승에 가서도 '흡수통일'이 되는 그날을 보겠다는 넉두리이다. 얼마나 동족대결에 미친 반통일분자인가"라고 비난했다.
전 전 대통령은 2017년 출간한 회고록에 사실상의 유서를 남겼는데 "김일성 왕조가 무너지고 조국이 통일되는 감격을 맞이하는 일. 그날이 가까이 왔음을 느낀다", "그 전에 내 생이 끝난다면, 북녘땅이 보이는 전방의 어느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있으면서 기어이 통일의 그 날을 맞고 싶다"는 대목이 있다. 북한의 정권 붕괴에 따른 흡수통일을 희망한 것이다.
통일신보는 "역도가 전방 고지에 백골로 남아 '흡수통일'의 그날을 보겠다고 줴쳤지만 그런 개꿈은 백년이 가도, 천년이 가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bluekey@yna.co.kr
제45조 대통령의 임기는 7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대한민국 제5공화국 헌법]
제70조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대한민국 제6공화국 헌법]
"世界潮流浩浩 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中華民國 建國과 孫中山 先生 思想(3.1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사상)]
1980년대부터 민국(民國,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소련, 중국이나 북한등 사회주의 국가 내부 교조주의 노선 지도자는 버려야 할 세력이며 수정주의 노선 지도자는 대화할 세력이 돼야 경제대국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교조주의는 일국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사회주의 공화국) 노선으로 마스-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주의이며 수정주의는 실용주의 노선으로 등소평이나 고르빈 정책으로 친미,친서방 자본주의를 인정하는 세력입니다
등소평은 권력이 집중한 모택동 시대의 반성에서 국가주석 3선 금지를 함으로 중국 모든 기관이나 단체의 장 임기를 사실상 3선 금지를 했습니다[국가기관 수장의 임기를 제한했습니다]
민주정의당 출신 전두환, 노태우전대통령을 중국 공산당 내부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 민주파 중국 등소평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전두환정부의 자유화 개방화 조치 이후 자본주의 정부로 평가하고 있으며 대통령의 임기제한 단임제는 민주주의 첫 걸음이 되었습니다
어느 나라에도 국가 지도자의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정책으로 나아갈 때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http://blog.daum.net/007nis/15875575
大韓民國은 民主共和國이다
大韓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
국호(國號)는 삼한정통설(三韓正統說)으로 건국한 대한제국을 계승하여 대한(大韓)으로 하며 국정(國政)은 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民主共和國)를 원칙으로 한다[국정(國政)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
단군왕검 이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종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국가)입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입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지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인정합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입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정부입니다. 민주국가는 대부분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습니다
[미합중국 헌법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민주국가의 경제토대는 민영자본체제(민간 자본주의)이며 정치토대는 병정통합주의 노선 의회민주주의입니다
독재국가의 경제토대는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 국가사회주의이며 정치토대는 병정분리주의 노선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입니다
민주국가의 경제 토대는 자본주의이며 정치 토대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국가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민주주의 세력)와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세력) 연합정부입니다
"平和大忍, 信望愛.
大韓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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