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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한국 대통령 별세..."탈냉전 외교, 남북관계 새 지평" 평가 본문

대한민국 전직대통령 자료

노태우 전 한국 대통령 별세..."탈냉전 외교, 남북관계 새 지평" 평가

CIA bear 허관(許灌) 2021. 10. 26. 17:37

1988년 9월 17일 서울종합경기장에서 열린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노태우 한국 대통령과 부인 김옥숙 여사가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노태우 전 한국 대통령이 26일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군사쿠데타의 주역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지만 동구권 몰락과 함께 한국의 탈냉전 외교와 남북관계에 새 지평을 연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김환용 기자가 보도합니다.

한국의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향년 89세를 일기로 26일 숨졌습니다.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온 노 전 대통령은 최근 병세 악화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의료진의 집중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습니다

1932년생으로 경북 달성군에서 태어난 노 전 대통령은 경북고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육군 9사단장이던 1979년 12월12일 육사 11기 동기생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하나회' 세력의 핵심으로서 군사쿠데타를 주도했습니다.

쿠데타 성공으로 신군부의 2인자로 떠오른 노 전 대통령은 수도경비사령관, 보안사령관을 거친 뒤 대장으로 예편해 정무2장관으로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이어 초대 체육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민주정의당 대표를 거치면서 군인 이미지를 벗고 정치인으로 변신했습니다.

5공화국 말기 전두환 전 대통령을 이을 정권 후계자로 부상해 1987년 6월10일 민주정의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됐습니다.

노태우 후보는 인권 탄압과 호헌 조치에 불복한 한국 국민들의 저항인 이른바 ‘6·10 민주항쟁’에 떠밀려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고, 전두환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직선제가 부활한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 김영삼 두 야당 후보 분열에 힘입어 당선돼 1988년부터 1993년까지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이 세계적인 탈냉전 시대와 겹치면서 외교와 대북 정책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2월 취임사에서 “이념과 체제가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은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 공동의 번영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같은 해 7월에는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인 7·7선언을 발표하고, 이후 공산권 국가와 수교를 추진해나갔습니다.

이른바 북방외교가 전개된 겁니다.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까지 동유럽 7개국과 관계를 정상화했습니다.

이듬해인 1990년 6월엔 당시 소련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9월 전격 수교했고, 1992년 8월에는 중국과도 국교를 정상화했습니다.

1991년 4월 20일 제주도에서 열린 한소정상회담 만찬에서 노태우 한국 대통령(오른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건배하고 있다.

이처럼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를 통해 만들어진 화해 분위기 속에서 남북관계에도 물꼬를 텄습니다.

1989년 9월 첫 남북 고위급 회담을 성사시킨 노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 재정립에 나섰고, 이는 1991년 말 남북 화해와 불가침을 선언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과 비핵화 공동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민간 연구기관인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신범철 외교안보센터장입니다.

[녹취: 신범철 센터장] “중국과 러시아라는 주변국을 움직이면서 북한을 대화로 견인함으로써 북한이 전향적인 자세로 나오게 했고 남북관계의 기본 장전이라고 할 수 있는 기본합의서를 만들어냈던 거죠. 기본합의서 내용을 보면 남북간 특수관계, 상호 존중, 불가침, 호혜적 협력 이런 원칙들이 잘 반영돼 있었거든요.”

노 전 대통령은 또 같은 해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라는 성과도 이끌어냈습니다.

당시 북한은 분단 고착화를 이유로 유엔 동시가입에 부정적 입장을 유지해왔지만 북한 편에 섰던 소련이 동시가입 지지로 입장을 바꿨고, 중국도 한국의 유엔 가입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북한도 동시가입을 받아들인 겁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은 성사됐지만 당시 북한의 미국과 일본 등 서방국가와의 국교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북한이 고립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녹취: 박원곤 교수] “고립으로 몰아 넣은 것이 교차승인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죠. 그래서 한국만 구소련, 러시아와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했고 북한은 미국과 일본 등 서구 국가와의 국교관계를 맺는 데 실패했죠.”

1992년 1월 6일 서울에서 노태우 한국 대통령(오른쪽)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미한정상회담에 이어 공동 기자회견을 했다.

1991년 12월 발표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통해선 핵무기의 시험과 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사용 금지,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 보유 금지 등을 합의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 내 주한미군 기지에 배치됐던 전술핵도 모두 철수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공동선언을 어기고 핵 개발을 지속한 끝에 지금은 스스로 핵 보유국임을 선포한 상태입니다.

신범철 센터장입니다.

[녹취: 신범철 센터장] “북한이 고립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국제사회 요구를 수용했던 것인데 그 이후 북한이 핵을 계속해서 만든 것은 동구권의 연이은 붕괴로 인해서 자칫하면 자신들이 한국에 끌려갈 경우 체제 존립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한편으론 비핵화 공동선언을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것을 위반하면서 핵 개발에 몰입한 거죠.”

한국에선 노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 펼친 북방외교와 남북관계 개선 노력이 이후 남북간 교류협력에 초석이 됐고 중국과의 광범위한 교류 증진에도 발판이 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VOA뉴스 김환용입니다

 

12·12 반란과 6·29 선언 주역…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

1988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거행된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선서하고 있다./조선일보DB

노태우(89) 전 대통령이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지병으로 오랜 병상 생활을 해온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건강이 악화돼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이송돼 집중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김영삼 민주당 총재(왼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오른쪽)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을 갖고 3당 합당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1932년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에서 태어난 노 전 대통령은 육사 11기로 임관했다. 1979년 육사동기인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12·12 군사반란에 성공했다. 1987년 6·10 민주항쟁으로 분출된 민주화 요구를 대폭 수용, 직선제 개헌 등이 골자인 6·29선언을 발표했다.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를 물리치고 제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던 유세는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성공적인 슬로건으로 평가 받는다.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 부인 김옥숙 여사와 함께 참석한 노태우 전 대통령. /연합뉴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수용외에 ‘북방 외교’도 업적으로 꼽힌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고, 소련·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하면서 외교의 지평을 확장했다. 그의 재임시절 새로 수교한 나라가 45개국에 달했다. 1991년엔 남북이 공동으로 유엔회원국으로 동시에 가입했다. 북한과도 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에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채택했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대한 풍자도 처음으로 허용했다. 권위주의적 질서를 타파하려는 이런 노력을 두고 일각에서는 ‘물태우’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동시에 흉악범죄·조직범죄 소탕을 내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인물도 노 전 대통령이다. 참자, 용서하자, 기다리자는 의미의 ‘참.용.기’가 그의 좌우명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12월 14일 옛 소련 크레믈린궁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

하지만 신군부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은 그의 이력에서 그림자로 남아 있다. 퇴임 이후인 1997년 뇌물수수와 내란·반란혐의로 징역 17년을 선고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옥숙 여사와 딸 소영(60)씨, 아들 재헌(56)씨 등 1남 1녀가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연표

1932년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에서 출생

1951년 경북고 졸업

1955년 육사졸업(11기)

1979년 수도경비사령관

1981년 전역(육군 대장), 제2정무장관

1985년 민정당 대표위원

1987년 6·29선언 발표, 민정당 대통령 후보

1988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취임

1990년 소련과 수교, 3당 합당-민자당 창당

1991년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남북 공동 유엔가입

1992년 한·중 수교

1993년 대통령 퇴임

1995년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

1996년 12·12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추가 기소

1997년 특별사면복권

2011년 회고록 출간

2013년 추징금 2628억9600만원 완납

2021년 10월26일 사망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 - 조선일보 (chosun.com)

 

[속보]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

속보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

www.chosun.com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향년 89세

노태우 전 대통령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숨졌다. 향년 89세.

노 전 대통령은 지병으로 오랜 기간 병상 생활을 해왔다.

최근 병세가 악화돼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의료진의 집중 치료를 받아 온 것으로 알려졌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누구?

1932년 8월 17일 대구에서 태어난 노 전 대통령은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노 전 대통령은 육사 11기 모임인 '하나회'를 통해 군인에서 정치인으로 변모했다.

이후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당하자 노 전 대통령은 전두환과 함께 군부를 장악한다.

이후 1980년 8월 6일에 전두환이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자 이후 전두환의 후임으로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 직을 역임했다.

1991년 유엔헌장 의무 준수 선언서에 서명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모습(행정안전부 제공)

이후 1987년부터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었으며, 1988년의 대통령 선거에 근소한 표차로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직선제가 부활한 뒤 처음 당선된 대통령이기도 했다.

재임시절엔 88서울올림픽 개최와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북방외교의 성과를 냈다.

1993년 퇴임 후 1995년 비자금 사건 연루,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강제 진압과 12·12 군사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00억여 원을 선고받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95년 비자금 사건 연루 등으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복역중 1997년 12월 22일 퇴임을 앞둔 김영삼 전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다.

2002년 암 수술을 받으면서 건강이 악화됐고, 희소병인 소뇌위축증과 천식 등을 앓으면서 여러 차례 병원을 오가며 고비를 넘겨오다 생을 마감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향년 89세 - BBC News 코리아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 - BBC News 코리아

노 전 대통령은 지병으로 오랜 기간 치료를 받았다.

www.bbc.com

盧泰愚・韓国元大統領が死去 民主化宣言、中ソと国交

盧泰愚元大統領

韓国の軍人出身で、1987年に民主化宣言をした盧泰愚(ノ・テウ)元大統領が26日、入院中のソウル市内の病院で死去した。88歳だった。韓国メディアが一斉に報じた。

民主化宣言後の大統領選で当選し、88年のソウル五輪を成功させたほか、共産圏との関係改善を進める「北方外交」を展開し、旧ソ連や中国との国交正常化を実現させた。91年には北朝鮮とともに国連への同時加盟を果たした。

一方で、退任後の95年に政治資金の隠匿が発覚。軍が民主化デモを弾圧した80年の光州事件などへの関与を追及され、懲役刑を受けたが、97年に特赦された。

미 국무부 "노태우 전 한국 대통령 별세 깊이 애도"

1992년 1월 6일 노태우 한국 대통령(가운데)이 청와대를 방문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왼쪽)을 환영식장으로 안내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 27일 대변인 명의로 성명을 내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별세에 대해 한국민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습니다.

[국무부 성명] “We send our deepest condolences to the people of the Republic of Korea for the passing of former President Roh Tae-woo. While former President Roh leaves a complicated legacy, his tenure included solidification of the ROK’s democratic tradition, its entry into the United Nations, and a strong commitment to th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국무부는 “노 전 대통령이 복잡한 유산을 남겼지만, 그의 임기 동안 한국의 민주적 전통이 강화됐고 유엔에 가입했으며, 한반도 비핵화에 강한 공약이 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국무부 성명] “For over 70 years, the U.S.-ROK Alliance has continued strive toward our shared commitments of strengthening the 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 and multilateral institutions, and promoting peace, security, and prosperity on the Korean Peninsula, the Indo-Pacific and beyond.”

국무부는 “70년 이상 미-한 동맹은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와 다자 기구 강화와 한반도와 인도태평양 지역과 그 이상의 평화와 안보, 번영 증진이라는 공유된 약속을 위해 계속 노력해 왔다”고 밝혔습니다.

VOA 뉴스 조은정입니다.

 

中 외교부, 노태우 한국 전 대통령 타계에 깊은 애도 표해

노태우 한국 전 대통령이 26일 별세했다고 한국 언론이 보도했다. 이날 자오리젠(趙立堅)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노 전 대통령은 중국에 우호적이었고 중한수교와 양국 관계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중국 측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망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하며 그의 가족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표한다”고 전했다

 

 

-노태우 전대통령은 교조주의자 보다는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로 개혁개방과 민주화, 북방정책과 남측 입장에서 강력한 평화통일정책, 3당합당 등을 추진했지만  5.18민주화운동 미해결과 권력층의 부정부패등으로 대남 무장세력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혁당(새세대, 1990년 1월) 창당으로 국내 혼란을 야기하는데 원인 제공을 하였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불명예의 전당: 전두환부터 박근혜까지

청와대 세종실에 걸려있는 역대 대통령 초상화

대통령이라는 최고 정치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건만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은 임기 이후에도 그 영예를 지킨 경우가 극히 드물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된 것은 그 일례일 따름이다.

법원은 22일 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구속영장 요청을 승인했고 이 전 대통령은 23일 새벽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서울동부구치소에 수감됐다.

검찰은 향후 뇌물수수, 횡령, 직권남용, 조세포탈 등의 혐의에 대해 이 전 대통령을 조사한 후 기소할 방침이다.

이로써 17대(이명박), 18대(박근혜) 대통령이 모두 구치소에 수감되는 이례적인 상황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이전의 대통령들도 퇴임 이후가 그리 아름답지는 못했다. 역대 대통령들이 퇴임 이후 어떠한 불행을 겪었는지를 정리했다.

박근혜: 사상 최초로 현직에서 파면 당한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이 인용돼 파면된 대통령으로 역사에 족적을 남겼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재임 당시 국회의 탄핵소추를 받아 직무가 정지된 바 있으나 헌법재판소가 이를 기각함에 따라 다시 직무에 복귀하여 임기를 정상적으로 마쳤다.

현재 박근혜 전 대통령은 '비선 실세' 최순실과 공모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원사들에게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774억 원을 출연하도록 강요하고(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강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으로부터 최씨의 딸 정유라씨의 승마 지원금으로 수백억 원을 요구했다는 혐의(뇌물수수) 등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은 지난 2월말 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30년과 벌금 1200억여 원을 구형했다.

이명박: 선거 당시부터 따라다니던 의혹에 결국 붙잡히다

선거 당시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을 따라다녔던 의혹들이 결국은 퇴임 후에도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영장이 발부된 후 23일 새벽 구치소로 향하는 호송차에 탑승하고 있다

BBK를 비롯한 일련의 금융, 투자회사들이 연루된 주가조작 사건의 배후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있다는 의혹은 선거 기간 내내 제기됐다가 특검이 임명돼 당선인 신분으로 특검 조사를 받는 진풍경을 빚기도 했다. 특검은 당선인에게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같은 보수파였던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를 채 마치지도 못하고 파면되고 진보파인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의혹은 새로운 의혹과 함께 증폭되기 시작했다.

중견 자동차 부품 제조기업인 다스는 BBK에 거금을 투자한 전력으로 이전부터 꾸준한 의혹의 대상이었는데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재개된 검찰 조사에서 이 전 대통령이 다스의 실소유주라는 증언들이 추가로 확보됐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삼성과 현대자동차가 다스의 BBK 투자금 회수를 위한 해외 소송비용으로 150억원이 넘는 금액을 제공했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이 전 대통령의 비리 의혹은 새로운 차원으로 확대됐다.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은 검찰 조사에서 이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소송비를 대납했으며 그 대가로 당시 탈세, 배임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특별사면해줬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직 대통령 신분이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전격 구속이 결정됨에 따라 이 전 대통령이 실형을 피하기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노무현: 퇴임 후의 삶이 가장 비극적이었던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이후 겪은 불행은 이후 한국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노무현 정부의 임기가 끝난 후 정치와는 연을 끊었던 문재인 전 대통령비서실장을 다시 정치의 길로 인도한 것도, 진보파를 다시 결집시키는 계기가 된 것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었기 때문.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으며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문재인은 이후 대한민국의 19대 대통령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퇴임한 지 1년여만에 검찰에 출석하여 조사를 받았다.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 받은 13억 원이 노 전 대통령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느냐가 당시 쟁점이었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직접 요청했다는 박 회장의 증언을 바탕으로 노 전 대통령을 소환 조사했다.

당시 검찰은 수사 내용을 꾸준히 언론에 흘리고 소환 조사를 한 이후에도 3주 넘게 구속영장 청구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이던 원세훈이 수장을 맡고 있던 국가정보원은 이때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고가의 명품 시계를 선물로 받았다는 루머를 퍼뜨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계속되는 여론의 관심에 부담을 느낀 노무현 대통령은 2009년 5월 23일 사저 인근의 산에서 투신 자살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노 대통령 재임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한 최측근이었으나 노 대통령 퇴임 이후 정치와는 선을 긋고 살아왔던 문재인 변호사를 다시 정치로 뛰어들게 만들었다.

정계 진출을 준비하던 2012년 인터뷰에서 문재인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지 않았다면 정치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대중(15대): 모든 아들이 비리에 연루되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한국 민주화 운동의 거목인 김대중 대통령은 슬하의 아들 셋이 모두 권력형 비리에 얽히는 오점을 남겼다.

장남인 김홍일씨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인사청탁 뇌물을 받은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2006년 의원식을 상실했다.

차남인 김홍업씨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현대와 삼성으로부터 약 25억 원을 받은 혐의로 징역형을 받았다.

삼남인 김홍걸씨도 스포츠토토 사업자선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김영삼(14대): 경제위기로 검찰 조사를 받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독특하게도 가족, 측근 비리가 아닌 경제위기 문제로 대통령 재임 중 검찰 조사를 받았다.

한국은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에 휩쓸리면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검찰이 1998년 4월 정부 관료들을 상대로 상황을 이렇게 방치한 책임(직무유기)을 묻기 시작하면서 김영삼 대통령도 참고인으로 서면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이 가족 측근 비리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차남 김현철씨는 아버지 재임 기간인 1997년 한보 특혜 대출 비리에 연루되어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노태우(13대), 전두환(12대): 처음으로 구속, 사형 선고까지 받다

1979년 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당한 직후 혼란 속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정치인인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구속 및 수감을 겪었다. 전 전 대통령은 비록 1심이었지만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불명예의 전당: 전두환부터 박근혜까지 - BBC News 코리아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불명예의 전당: 전두환부터 박근혜까지 - BBC News 코리아

한국 전직 대통령은 늘 퇴임 이후 갖은 불명예에 연루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구속은 그저 최근의 사례에 불과하다.

www.bbc.com

권위주의 대통령은 잘못된 과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제6공화국 직선제 대통령은 검증된 지도자의 도덕성과 정책의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머리소리함 Guide Ear로 태어날때부터 생존 당시까지 뇌 검증으로 하고 있다. 

대한민국 역대 헌법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daum.net)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대한민국 헌법 Ⅰ.제1공화국[제헌헌법] 4281년 7월 12일 제정 1948년 7월 17일 공포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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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 民主共和國이다

大韓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

국호(國號)는 삼한정통설(三韓正統說)으로 건국한 대한제국을 계승하여 대한(大韓)으로 하며 국정(國政)은 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民主共和國)를 원칙으로 한다[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입니다]

단군왕검 이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다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3공화국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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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제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제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제3공화국 헌법)- Ⅰ.북한 제1공화국 헌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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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소속단체이며 대남공작단체는 재중총련, 재일총련, 재한총련(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서울)이란

한국 내부 북한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사회주의 국가(김일성 김정일주의)를 지지하는 동포들이 결성한 단체가  반제민전 중앙위원회(재한총련)이다. 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재한총련) 는 지하조직으로 실질적 친북단체이며 명목상(의례적) 친북 합법조직은 범민련(범청학련)이나 민중당 내부 NLPDR계열 단체들이다.

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재한총련)는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의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주의)를 지지하고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전선 소속단체이며 대남공작기구[ 통일전선부 산하기관인 제225부(구 대외연락부)]이다. 대표적인 단체는 통일혁명당과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이다

재한총련(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서울)도 재중총련 조직처럼 범민련 조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재일총련처럼 남한정부 대표부(북한 통일전선부 대화창구) 성격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소속단체이며 대남공작단체는 재중총련, 재일총련, 재한총련(반제민족민주전선 중앙위원회) (daum.net)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소속단체이며 대남공작단체는 재중총련, 재일총련, 재한총련(반제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소속단체이며 대남공작기구[ 통일전선부 산하기관인 제225부(구 대외연락부)]는 재중총련, 재일총련, 재한총련(반제민족민주전선) 등이다 이들 단체는 북한정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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