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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도시 겔젠키르헨에 레닌의 동상이 세워져 논란을 빚고 있다 본문

중부 유럽 지역/독일[獨逸,德意志國=德國]

독일 도시 겔젠키르헨에 레닌의 동상이 세워져 논란을 빚고 있다

CIA bear 허관(許灌) 2020. 6. 24. 08:07

문제의 동상은 '반공산주의에게 기회를 주지 마라'는 포스터 옆에서 제막식을 가졌다

독일의 극좌 정당이 공산주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의 동상을 세워 논란을 빚고 있다.

소수정당인 독일마르스크레닌당(MLPD)은 독일 서부의 도시 겔젠키르헨의 당사 앞에 레닌의 동상을 세웠다.

시 당국은 레닌 동상이 세워지는 걸 막으려 했다.

그러나 법원은 당국의 가처분 신청을 거부했고 20일 동상의 제막식이 열렸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였고 1924년 죽을 때까지 러시아를 이끌었다. 이후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의 뒤를 이었다. 사후에도 세계 곳곳에서 지지자는 물론이고 소비에트연방에서 벌어진 각종 인권 유린을 기억하는 이들도 레닌을 공산주의의 상징으로 여긴다.

독일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수십년간 공산주의 동독과 서독이 분단돼 있었다.

195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만들어진 겔젠키르헨의 레닌상을 둘러싼 논쟁에서 찬반 양측은 모두 최근 반인종주의 집회에서 노예제도와 연관된 동상들이 철거되던 일들과 이를 연관지었다.

"우린 세계 여러 나라들이 동상에 대해 반추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프랑크 바라노프스키 시장은 레닌상에 반대하는 유튜브 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20세기의 독재자가 다시 추앙받고 동상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어렵습니다. 안타깝게도 법원은 달리 판결을 내렸고 우리는 이를 받아들어야 하겠지만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한편 MLPD의 가비 페흐트너 의장은 레닌을 두고 "시대를 앞서간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상가이자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투사"라 말했다고 AFP통신은 전한다[BBC 뉴스 코리아]

블라디미르 레닌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러시아어: 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문화어: 울라지미르 일리이츠 레닌, 1870422(구력 410) ~ 1924121)은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혁명가, 정치경제학자, 정치철학자, 정치인, 노동운동가로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다. 공산주의자이면서도 특별히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레닌주의 이념의 창시자이다. 알려진 니콜라이 레닌이라는 이름은 혁명가로서 그가 사용하던 가명이다.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Улья́нов)이다.

그는 1917315일부터 191833일까지 러시아 임시정부 국가원수로 재임하였고, 191833일부터 19221230일까지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가원수를 지냈으며 19221230일부터 1924121일까지 소비에트 연방 국가원수를 지내는 등 1917315일부터 1923430일까지는 6년간 레닌 시대를 펼치며 6년간의 최고권력자로 실권하였지만 잔병치레를 하면서 1923430일을 기하여 스탈린에게 국정 관련 실권을 전격 부여하는 등 국정 관련 실권을 스스로 기권 후 상징적인 소련 국가원수 직책으로 전향하여 1923430일부터 1924121일을 기하여 향년 54세로 병사할 때까지 이오시프 스탈린이 1년간 국정 관련 실권을 잡았다.

 

1924121일 니콜라이 레닌 그가 향년 54세로 병사 후 그의 실질 성향 후계자 스탈린은 1924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의 최고 국정 관련 실권자로, 그리고 1941년부터 1953년까지 소련의 국가원수 겸 최고 국정 관련 실권자로 군림하는 등 1923430(레닌이 아직 사망하기 9개월 전)부터 195335(스탈린이 사망한 일자)까지 어언 30년간을 스탈린 시대로 군림하였다.

 

학생 때 혁명 운동에 가담하고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오랫동안 제정(帝政)의 관헌에서 탄압을 받으며 이론적·실천적 활동을 계속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스위스에 망명하여 1916제국주의론를 저술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제국주의 단계에 적응시키려 했다. 3월 혁명이 시작되자 4월에 적국인 독일을 경유하여 귀국하고 노동자와 병사에게 발표한 소위 ‘4월 테제로 시민 민주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을 투쟁 방침으로 제시하여 혁명을 이끌었다. 7월 사건 뒤에 재차 망명했으나, 11월 혁명으로 볼셰비키의 권력 획득을 지도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했다. 1918년 제2회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인민위원회 주석에 선출되고, 좌우 기회주의와 싸우면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네프에서 보여주는 현실적응정책을 취하여 러시아 공산화에 주역이 되었다.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혁명이론에 충실한 국가를 건설하려 했고, 국영화, 국유화 및 사상적 단결을 통해 국론통일을 지향했다. 이오시프 스탈린, 호치민, 마오쩌둥, 요시프 브로즈 티토, 피델 카스트로, 김일성 등이 그의 공산주의 국가 모델의 영향을 받았다.

1.생애

(1)출생과 유년시절

레닌의 가족들

레닌은 1870422(러시아력 410), 볼가 강 연안의 심비르스크(현 울랴놉스크)에서 6명의 자녀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교육 수준이 높고 교양이 있었으며, 아버지 일리야 니콜라예비치 울리야노프는 농노의 아들로 교사이자 장학사를 지냈었고 어머니 마리아는 독일인이자 의사의 딸이었다. 어머니 마리아의 아버지, 즉 레닌의 외할아버지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며 내과의사였다.

18861월에 레닌의 아버지가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냈고, 별다른 소득이 없어 아르바이트로 생계에 뛰어들기도 했다.

 

(2)학창 시절

1887년때 레닌

대학시절 나로드니키 운동에 가담했던 맏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가 제정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 계획 혐의에 연루되어 1887년 처형당하자, 당시 17세였던 레닌은 형의 죽음에 충격에 빠지게 된다. 평소에 형을 잘 따랐던 그는 형의 죽음을 계기로 이때부터 마르크스주의와 반차르 운동, 혁명주의 세력에 관심을 갖게 되고 마르크스의 저작을 연구하고 심취하기 시작한다.

1887년 가을, 레닌은 카잔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이해 12월에 불법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대학교에서 제적되어 쫓겨난다. 당시 레닌은 불법집회의 주동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측은 단지 '죽은 레닌의 형이 과거에 알렉산드르 3세 암살계획에 가담한 자'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다.

이후 다음해 레닌은 카잔에서 돌아왔으나 대학교 재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같은 뜻을 가진 혁명세력가들과 마르크스주의를 깊이 연구하고, 어울리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탐독하였고 이어 정식으로 마르크스 원전과 자본론 등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 18891월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3)청년 시절

1890,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과에 정식 수강생은 아니나 청강생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189111, 청강생으로 사법시험을 치를 수 있는 허가를 얻은 레닌은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고 189112월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는 가족이 살던 사마라에서 1893년까지 변호사로 일했다. 당시 토지 소유권 분쟁에 관한 일을 주로 맡았는데, 이를 계기로 농민들과 지주들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고 한다.

 

레닌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독서광이기도 했던 레닌은 이론연구를 위해 밤을 새는 일도 잦았고, 당시 마르크스 해석의 1인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를 우상처럼 떠받들었는데, 플레하노프를 비롯한 러시아 망명가들을 만나기 위해 1895년 서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레닌은 파리 시, 제네바, 취리히, 베를린 등을 방문하면서 플레하노프, 악셀로트 등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깊이있게 토론하였고 마르크스의 사위로서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폴 라파르그를 찾아가기도 했다. 한편 그는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주와 마름에 의해 탄압받는 노동자와 농민의 참상을 목격한 그는 무료변론도 스스럼없이 해 주었다. 동시에 그는 "신을 믿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신이란 없다는 생각을 굳혀나가게 되었는데, 이는 교회가 지배계급과 결탁하여 신의 이름으로 민중들을 비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베른슈타인의 의회 진출 역시 접하였으나 그에게 매력을 주지는 못하였고, 그는 부조리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무력으로 혁명을 달성해야 된다는 신념을 갖고 이를 공고화하게 되었다. 그밖에 니체의 무신론, 헤겔, 다윈의 진화론과 적자생존론 등 폭넓은 부분을 독서하고 소화시켰다.

 

(4)혁명 활동과 망명

a.1차 망명

선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교류 경험을 가진 레닌은 18959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국한다. 귀국하자마자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온건파인 멘셰비키의 리더 율리우스 L. 마르토프 등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조직했다. 그는 파업중인 공장노동자들이 읽을 전단을 작성하거나 체포된 노동자들을 적극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이러한 활동 탓에 189512월에 '반차르운동'에 연루되어 제정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어 1년간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1895년 재판에서 시베리아 유배형을 선고받은 레닌은 시베리아 가운데에 위치한 크라스노야르스크를 거쳐 슈센스케에서 5년간 유배 생활을 한다. 같은 동맹 회원이며 약혼녀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는 레닌의 유배지까지 그를 따라왔다.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그는 유배생활의 고독을 이겨낼 수 있었고, 감기 등의 잔병치레도 바로 이겨냈다. 1898년 유배지에서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와 결혼했으며, 그곳에서 주요 저작이 된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집필했다. 발간 당시에 책은 18988, '블라디미르 일린'이란 가명으로 출판되었다.

레닌의 부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19001, 서른 살이 된 레닌은 5년 유배 생활을 마치고 석방된다. 곧 모스크바 남쪽에 있는 포돌스크로 갔다. 그는 러시아 내에서 반차르 운동을 하다가 19005월에 서유럽으로 떠나면서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a)망명지 생활중 활동

서유럽으로 망명한 그는 독일 뮌헨에서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등과 함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기관지인 '이스크라(Iskra, 불꽃)'를 같은 해 12월 말 창간하여 편집자로 활동한다. 마르크스주의 최초의 정치신문인 '이스크라'는 러시아 지식인을 혁명운동으로 포섭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규합해 사회민주노동당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 190112월부터는 레나 강에서 이름을 딴 필명인 '레닌'을 사용했다.

 

이 시기에 레닌은 팸플릿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써서 1902년 발표했다. 이 글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이로 인해 레닌은 혁명가 그룹에서 문제적 인물로 부각됐다. 그로 인해 '이스크라' 편집진 사이에서도 노선 갈등이 시작됐다.

 

1902년부터 1903년 사이에 '이스크라' 본부는 경찰의 감시를 피해서 뮌헨에서 런던으로, 그리고 스위스 제네바로 수차례 옮겨 다녀야만 했다. 이 기간에 '이스크라'를 통해 협력했던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트로츠키 등도 레닌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결국 런던과 제네바에서 두 차례에 걸쳐 열린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2차 당 대회에서 율리우스 마르토프와 논쟁을 벌이는데, 이는 편집진 문제에 대한 이견 차이와 당의 규약에 대한 대립 등으로 인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비밀경찰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직업혁명가들이 지도하는 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마르토프는 '서유럽의 공산주의 정당처럼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정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거치며 자파를 마르토프를 비롯한 '멘셰비키(당시 다수파)'와 구별해 '볼셰비키(당시 소수파)'라고 불리면서 양분되어 서로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서게 된다.

 

한편 러시아의 공산주의 정파의 지도자인 플레하노프는 산업발전의 추세를 들어 러시아가 이미 자본주의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규정했다. 레닌은 그의 이론을 대체로 수긍하면서 여기에 독자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1899년 유배지에서 집필한 저서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 Development of Capitalism in Russia에서 자본주의가 농민공동체를 급속히 와해시켜가고 있으며, 농민계급은 사실상 농촌 부르주아와 중산농민, 그리고 지방의 농노로 계층구조화되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농민의 절반 가량에 해당하는 농민층을 소수에 불과한 노동자 계층의 제휴세력으로 판단했다.

(b)폭력혁명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주류는 주로 플레하노프가 초기에 설정했던 대로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2단계 과정을 거쳐 사회주의 혁명이 완성된다고 전망하였다. 여기에 서구 유학파 출신으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및 의회진출론을 신봉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레닌은 이들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 멘셰비키의 입장이었는데,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넘어가야 되며, 의회 진출을 통해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고 말하는 온건론조차 비판하였다.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단계를 생략하고 곧장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해야 하며, 혁명의 방법은 무력으로 달성해야 되고 그 주도세력은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 하고 믿을 수 있는 동맹자는 오직 농민과 노동자들 뿐이라고 주장했다. 온건론자들은 그의 과격함을 지적하며. 부르주아 층까지 적으로 돌리면 혁명의 실패를 가져온다고 비판하였다.

 

뒤에 1917년 출간된 '제국주의,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Imperialism, the Highest Stage of Capitalism)에서 레닌은 전쟁의 실질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개량주의자(지금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왜 전쟁을 지원했으며, 왜 폭력혁명만이 정당하고 민주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역설하였다.

 

b.귀국과 2차 망명

(a)귀국과 혁명 활동

서유럽으로 망명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과의 격렬한 논쟁과 분쟁 동안 러시아에서는 1905'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면서 혁명의 열기가 일기 시작한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란 1905년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정교회 성직자인 가퐁 신부가 주도한 노동자들의 평화적인 길거리 시위를 했는데 러시아 제국 당국이 이 시위대에 발포하고 잔혹하게 진압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던 사건을 일컫는다. 이 사건은 전국에 걸쳐 커다란 항의사태를 불러 일으켰는데, 모스크바, 리가, 바르샤바, 티플리스 등 주요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파업하기 시작했다.

 

이때 레닌은 1차 망명을 끝내고 러시아로 귀국한다.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는 러시아 제국에서 레닌은 '즉각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본격적인 혁명조직을 만들어 감과 동시에 온건파 멘셰비키파와 격렬한 분쟁과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그러나 1907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누그러들 즈음 러시아에서 친위 쿠데타가 일어나 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이 시작된다. 이에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파 세력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숨어야 했고, 레닌은 다시 해외 망명길에 오른다.

(b)2차 망명

이로써 레닌의 두 번째 망명은 1917년까지 이어진다. 레닌은 망명기간 내내 멘셰비키의 비판˙공격과 볼셰비키 내부 진영의 도전에 시달리고,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깊은 회의감에 빠지곤 했다. 레닌은 기회주의자들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비판할 의도로 '유물론과 경험론'(1908)을 발표하였는데, 이 책을 통해 레닌은 세계관 및 인식론에 주목하여 부르주아 철학의 배후에 은폐되어 있는 스콜라주의를 폭로하고, 관념론적 철학과 그 창시자들을 근본적으로 평가함으로써 변증법적 유물론을 옹호하는 주장을 했다. 1912년에는 프라하에서 볼셰비키만의 당 대회를 소집하면서 멘셰비키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고 볼셰비키당을 독립된 당으로 만들었다.

 

이 무렵 레닌은 1912년 폴란드 지방의 크라코프로 이주했고, 거기서 볼셰비키 신문 '프라우다'의 작업을 지도했다.

 

1914년 이전부터 일체의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했던 레닌은 제1차세계대전 전시 동안 제2인터내셔널에 소속된 유럽의 공산주의 정당들이 전쟁전의 결의사항을 무시한 채 제각기 제국주의 전쟁에 가담한 자국 정부를 지원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서 레닌은 국제인터내셔널 대신 진실로 혁명적인 공산주의 정당들이 모여 새로운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만들 것을 호소했다. 스위스에서 전쟁과 평화, 그리고 혁명의 문제에 대한 당의 이론과 전술을 마련했다.

 

그는 모든 색깔의 국수주의자 등에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제국주의 전쟁을 자국 내 착취자에 맞서는 내전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했다. 1915년 짐머발트, 1916, 키엔탈에서 열린 국제 공산주의자 총회에서 레닌은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을 짐머발트 좌익으로 한데 모았다. 이 시기의 제국주의 연구는 '자본주의 최고단계로서의 제국주의'(1916)로 결실을 보였다. 그는 이 연구를 통해 전쟁의 실질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왜 전쟁을 지원했으며, 왜 혁명만이 정당하고 민주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설명했다.

 

(5)2월혁명과 10월혁명, 볼셰비키 정권 수립

a.2월혁명이후 귀국과 핀란드 망명

19172, 굶주림과 추위와 전쟁에 지친 러시아 민중은 수도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곧이어 노동자와 군인들이 시위대 편으로 합류하여 니콜라이 2세 황제를 몰아냈는데, 이를 2월 혁명이라 부른다. 2월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면서 케렌스키를 내각수반으로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임시 정부가 재편되었다. 반면, 당시 스위스 취리히에 망명 생활 중이던 레닌은 이때만 해도 혁명이 일어났으리라는 사실을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레닌을 비롯한 32명의 러시아 혁명 망명자들은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아 '봉인 열차'를 타고 191743일 늦은 밤에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다.

 

페트로그라드에는 각 공장에서 선출된 노동자 대표 위원회와 멘셰비키, 사회 혁명당(SR) 등이 중심이 되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구성되어 있었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자마자 볼셰비키 당사에 들어갔다. 그는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SR), 농민당 당원들이 중심이 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2월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지도자들이 새 정부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볼셰비키는 이때만 해도 여전히 소수파에 불과했다. 이에 레닌은 2차 망명을 마치면서 준비한 10개항의 ‘4월 테제를 발표하는데, 이는 자신의 향후 구상을 발표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4월 테제'의 주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혁명의 첫 번째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이제는 두 번째 단계로 도약할 때가 왔습니다. 2월혁명으로 수립된 공화국은 우리의 공화국이 아닙니다. 이 정부가 수행하고 있는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자유주의 국가'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 이외에 그 어떤 정부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무산층)독재'뿐입니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부르주아적인 것들은 일체 거부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막중한 임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필코 국제 혁명을 시작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4월 테제' 주장은 다른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심지어 볼셰비키 내부에서조차 '정신나간 아나키스트적인 헛소리'로 여겨졌다.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라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레닌이 갑자기 나타나 '곧바로 공산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멘셰비키를 비롯한 사회주의 세력과 대립한 것이다.

 

이어서 레닌의 ‘4월 테제임시 정부 타도와 모든 권력은 무산층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되어야 한다라는 슬로건 기치를 내걸게 된다. 그는 '전쟁 중단과 평화, 토지 분배를 원하는 노동자, 농민, 병사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는 것은 반()혁명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케렌스키 임시 정부가 아닌 오직 소비에트 정부 즉 노동자, 농민, 병사들의 프롤레타리아(무산층 계층)들의 직접 독재 지배뿐'이라고 주장하며 케렌스키 정부를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무산층)혁명 운동을 선동했다. 처음에는 비현실적으로 들리던 그의 '4월 테제'5월이 되면서 차츰 볼셰비키 당원들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초여름에 접어들면서 러시아 내부의 위기는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많은 공장주들이 공장 문을 닫으면서 실업자들이 늘어나고 화폐 가치가 폭락하고 파업이 끊이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핀란드 망명 생활했을때 변장한 레닌.

191773일에 있었던 볼셰비키의 무력시위가 케렌스키 임시 정부에 의해 진압된 후, 레닌은 '독일 제국의 스파이'로 수배범으로 몰린다. 이에 레닌은 변장을 하고 'Vilén'이라는 가명으로 잠시 핀란드로 도피 망명한다. 그리고 망명 은신처인 핀란드에서 '국가와 혁명'을 집필하면서 망명 생활 동안 마르크스 이론을 러시아의 현실에 맞추어 이론화하고자 했는데, 그는 '자본주의의 발달이 더딘 러시아에서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소수의 직업적 혁명가인 전위당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레닌은 핀란드에서 망명 생활하는 동시에 치밀하게 무장봉기를 준비했다.

b.10월 혁명과 볼셰비키 정권 수립

이 시기에 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파격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서구식 제도를 도입하는 등 급진적으로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그 당시 민중들은 전쟁에 진저리가 쳐졌기에 우선 전쟁이 끝나길 바라는 열망이 무척 컸다. 그러나,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이러한 민중들의 열망을 무시한 채 6월에 대공세를 펼쳤으나 역시 자멸적인 패배와 실패로 곧 한계를 드러낸다. 동시에 국내의 경제사정이 파탄으로 치달으면서 민중들의 지지기반을 잃어 갔고 민심은 극도로 동요되어 갔다.

 

9월로 들어서자 평화와 토지와 빵을 요구하는 볼셰비키가 호응을 얻기 시작했는데, 수도 페트로그라드는 물론이고 전국 주요 도시별로 각 시내에서는 소비에트가 전국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볼셰비키 세력이 다수파세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해 10, 핀란드에서 망명생활 중이던 레닌은 비밀리에 페트로그라드에 잠입하여 '지금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켜 국가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확립할 시기'라고 소비에트 중앙위원들에게 주장하고, 나아가 '당장 무장봉기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소비에트당 중앙위원회는 그의 무모한 전략에 완강히 저항했다. 레닌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중앙위원들을 설득하고, 의장인 트로츠키의 협력을 얻어 적위대를 조직하는 데 성공한다.

 

1917117(러시아력 1025) 10시 볼셰비키 1,000여명의 적위대의 급습으로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한다. 여기에서 당시 민심은 볼셰비키를 향한 지지도는 어느 정도 있었어도 케렌스키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지지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 좌파, 우파 등 그 누구도 임시정부를 지지하지 않았고, 정부는 공허 속에 있었다. 그렇게 됨으로써 볼셰비키의 적위대가 주도한 혁명은 무혈혁명으로 성공을 거뒀다. 이어서 레닌은 '모든 권세가 소비에트로 넘어왔음'을 선포함으로써 10월 혁명이 이루어진다.

 

1917118(러시아력 1026), 새로운 소비에트 정부인 소브나르콤(인민위원평의회)이 평의회의 갈채 속에 탄생하면서 10월 혁명 직후 열린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를 열었다. 많은 군중들의 갈채 속에서 레닌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연설하는 레닌

볼셰비키가 그 필요성에 대해서 항상 얘기해 왔던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이 실현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공산주의 체제 건설의 첫걸음을 내딛었습니다. 1024, 1025일의 혁명은 공산주의 혁명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노동운동은 평화와 공산주의 이름 아래 승리할 것이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각종 포고령을 읽어 나갔다. 레닌의 포고령에 대한 투표는 군중들로부터 지지를 받아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로써 레닌은 새로운 정부인 인민위원 소비에트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1918, 그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했다.

 

(6)소비에트 연방 정부수반

  레닌과 함께 한 스탈린  (1919 년 )

a.1차 세계대전 종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소비에트가 탄생하자, 연합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191710월 혁명 이후, 신생 소비에트 정권을 살리기 위해 19183, 레닌은 주위에 반대여론을 물리치고 독일제국과 비밀리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을 끝낸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주요 내용은 우크라이나, 발트3, 핀란드 등을 독일제국에게 양도하고 독일제국의 위협으로부터 러시아가 벗어나고 연합국에서 탈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조약 내용의 지역들은 당시 러시아 주요 산업지역들이어서 이 지역들을 넘기는 것은 곧 러시아(소비에트)에게 있어 치명적이었다.

 

레닌은 밖으로 우환을 없애고자 내부적으로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완전한 민주 선거를 통하여 자신이 집권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민중은 레닌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여 레닌의 볼셰비키는 선거에 참패하였다. 이에 레닌은 두마(의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b.숙청 작업

쫓겨난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와 황족들에 대한 처형을 지시했고, 일부 황족들은 레닌의 탄압을 피해 인접국으로 피신했다. 인접국은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으로서 그들을 받아들였고, 망명객들은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무역 중단과 제재까지도 그들에게 요청하였다. 기독교 교회에 대한 탄압을 시도하여 선교, 포교가 중지되고 선교사들은 추방당했으며 성직자들은 강제로 환속당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의 포교까지 완전히 박멸할 수 없었다.

 

은행의 금리를 동결하고 부유층과 부르주아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도로와 철도 등 국가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선포하였다.

c.러시아 내전

이와 동시에 러시아에서는 1918년에 구체제 출신 장군들과 귀족들 세력으로 구성된 백군과 트로츠키가 지휘하는 볼셰비키 적군간의 내전이 벌어져 소비에트 연방 정권은 심각하게 위협 받았다. 부유층과 왕족 외에 일부 지식인들까지 이들의 움직임에 동조했다. 특히 체코 군단(의용군)의 공세와 시베리아 지역의 콜차크제독이 이끄는 백군은 볼셰비키 정권을 심각하게 위협하였고 서구 열강세력들은 구체제 중심으로 이루어진 백군을 지원함으로써 러시아 내 볼셰비키 정권은 혼란 그 자체였다.

 

그러나 백군은 뚜렷한 제도나 정책 등 없이 단순히 '구체제'로 돌아가는 것만을 목표로 했다. 이 때문에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백군에 등을 돌려 볼셰비키 적군에 가담하였다. 이어서 레닌은 전시 공산주의를 실행하여 토지개혁과 공장, 은행, 철도의 국유화 등 공산주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내전기에 볼셰비키 세력들은 그의 지도하에 국내외의 반혁명세력이 가담한 백군에 맞서 싸워 소비에트 국가를 지켜냈다.

d.폴란드-소비에트 연방 전쟁

19192월부터 19213월까지 신생 독립국가인 폴란드와 소비에트간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리가에서 평화조약을 맺었고, 리가 조약을 통해 소련은 영토가 줄어들고 폴란드는 서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얻었다.

e.신경제 정책 추진

폴란드와의 전쟁과 적백내전이 끝나자 소비에트 정권 내부는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에 볼셰비키 정권과 당은 레닌의 지도하에 인민경제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레닌은 전국 전기화 계획을 발기하여 비상조치로서 '전시공산주의'라는 국유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공산주의'라는 국유화 정책은 현실적인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파생시켰다. 먼저, 당 조직의 관료화 경향이 나타나면서 대중과 유리되고 민주주의와의 거리가 멀어졌다는 점이다. 더욱 문제가 되었던 것은 생산의 전 영역이 소비에트로 귀속되었지만 중앙의 통제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생산과 분배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특히 공산품을 적시에 공급받지 못한 농민들이 농산물 교부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전시공산주의는 급격한 공산화 정책들로 인해 경제적 혼란만 가중시켜 소련의 경제는 붕괴상태에 이르렀다. 레닌은 이를 해결하고자 공산화 정책을 완화하고 자본주의적인 생산방법을 일부 인정, 경제 개발을 위해 시장 경제를 제한적으로 도입한 신경제정책(NEP)을 추진했다. 신경제정책(NEP)은 전시 공산주의로 파괴된 러시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며, 공산주의에 시장경제를 넣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신경제 정책과 더붙어 토지 자유 거래와 민영회사의 설립과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되어 신경제정책이 추진되는 기간 동안 농업 산출량은 10월 혁명 이전의 상태를 회복함은 물론, 훨씬 증대되어 갔다. 제정 시대의 봉건적인 토지 소유 구조가 해체되었으며, 시장을 통해 농업 잉여를 거래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소련의 농업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 후 1928년 곡물 파동을 계기로 신경제정책(NEP)는 폐지되고 모든 산업에 대한 국가 통제가 재확립되었다.

 

반면에 내전의 상처를 겪은 공업 분야의 회복과 발전은 상대적으로 더디어졌고 공업 발전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짐에 따라 공업 상품의 가격은 높이 뛰었다. 이러한 물가 상승이 계속되면서 일부 농민층들도 무작정 싼 값에 식량을 도시에 팔지 않게 되었고, 이는 다시 도시민들의 불만을 가져왔다. 볼셰비키 정부는 이에 개입하여 기업들의 독점행위 규제, 핵심 공산품 가격 규제 등의 정책을 통해 물가 상승율을 안정시키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레닌의 창도로 192212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세워졌다.

 블라디미르 레닌과 이오시프 스탈린

f.체카

체카는 공안기관으로 19171220, 레닌의 명령에 의해 설립되었다. 체카의 설립목적은 볼셰비키 정권의 체제수호와 공안을 책임지는 주된 무력이었다. 1921년 체카의 산하부대인 "공화국 국내 수비대"200,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1922년 체카는 '국가정치부'(GPU)로 이름을 바꾸고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의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산하조직으로 편입되었다

g.코민테른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때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자국의 전쟁을 지지함에 따라 '2인터내셔널'이 붕괴되었다. 그러자 레닌은 '전쟁을 혁명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새로운 '3인터내셔널' 창설을 목표로 활동했다. 19193, 레닌은 30여 국의 대표가 모스크바에 모인 자리에서 코민테른을 결성하였다. 코민테른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지원을 위해 결성되어 코민테른을 통해 당시 약소국 식민지국가들의 무장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1회 코민테른 대회에서는 실제 창립 선언만으로 그쳤다. 하지만 1년 후의 제2회 코민테른 대회(19207)에서는 '프롤레타리아(무산층) 독재'를 선언하고, 비합법 조직의 병행, 군대·농촌·노동자 조직, 의회에서의 활동, 식민지 독립, 민주적 집권주의 확립, 각당의 중앙위원회는 코민테른 대회와 집행 위원회의 결정에 무조건 복종할 것 따위의 구체적 가입 조건을 규정하고, '세계 혁명'을 목표로 운동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이 코민테른은 뒷날, 1943년에 스탈린에 의해 해산된다.

 

(7)암살미수와 말년

1923년의 레닌

a.암살미수와 숙청

그는 1918년 사회혁명당(SR)좌익세력 봉기가 한창이었을 적에 사회혁명당(SR)당원이던 파니 카플란이란 여자가 쏜 총에 턱과 팔을 맞아 크게 중상을 입었다. 그 총상에 의한 부상 후유증 때문에 이후 그는 제대로 활동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밖에 폐질환 등의 질병들 역시 그의 운신을 불편하게 했다.

b.말년

저격당하여 크게 중상을 입은 레닌은 말년에 총상 후유증과 누적된 과로를 겪으면서 몸져 누워 있었다. 기독교 근본주의 성향 학자들은 레닌이 질병으로 몸져 누워 있던 원인이 매독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 설은 신빙성이 없는 설이다. 최근에는 독살설 등 다른 설들도 주장되고 있다. 그는 1922년 고혈압을 일으켜 점점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나다가 마지막 1년은 실어증까지 겹쳐 병상에 지내다 1924121일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한편에서는 소련에 적대적이던 주변의 제1세계에서 암살설이 대두되었다. 한편 레닌 자신은 스탈린이나 트로츠키가 집권할 경우 초래될 위기상황에 대해 깊은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죽기 전에 스탈린을 제1서기의 지위에서 박탈할 것을 명령했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해임을 촉구하는 레닌의 유언은 당 중앙위원회에서만 낭독되었을 뿐 출판되지 않았다

 레닌 장례식 때 스탈린

(8)사후

레닌 묘의 내부.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멘세비키와 볼셰베키로 나눠진 1903년 시점부터 레닌이 병상에 눕게 된 1923년까지 시종일관 레닌의 주장에 대항하였다고 공격했다. 분당 초기부터 레닌과 함께 활동을 해왔던 고참 볼셰비키들은 트로츠키가 당, 경제 운영 문제로 레닌과 수시로 다퉜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특히 트로츠키가 혁명기에 반() 레닌 전선(8월 블록 사건)을 조직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볼세비키는 스탈린을 지지하게 되었다. 또한 대다수의 볼셰비키는 트로츠키가 오랜 시간 멘셰비키로 활동하였으며, 10월 혁명 직전에 볼셰비키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트로츠키가 레닌을 이을 정통성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이론이 레닌이 주장했던 것을 계승한 입장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스탈린의 주장이 타락한 관료주의 발로이며, 곧 혁명의 퇴조를 불러올 것이라고 공격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이론이 멘셰비키의 조잡한 이론에 기초한 멘셰비키적 극좌 모험주의라고 반격하였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볼셰비키 간부의 지지가 스탈린에게 쏠리면서 결국 트로츠키는 당내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게 된다.

 

1927년이 되자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당에서 추방하고 레닌을 우상화해 그의 후계자인 자신이 정당한 지도자라는 것을 확고히 했다. 레닌의 시체는 보존처리가 되어 현재에도 붉은광장에서 극히 제한된 시간 동안 전시된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매년 422, 레닌의 생일날에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레닌을 기리는 대규모 집회를 하곤 한다. 그의 저서는 제국주의론,국가와 혁명등이 있다.

2.저서

(1)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Development of Capitalism in Russia)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Развитие капитализма в России. Процесс образования внутреннего рынка для крупной промышленности)은 레닌이 1899년에 출판한 책이다. 189512월에 반차르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14개월간 옥중생활을 한 후, 유형지 슈센스코에에서 완성한 이 책은 마르크스의 재생산론(再生産論)을 현실의 자본주의 분석에 적용한 것이다. 레닌은 나로드니키주의와 합법 마르크스주의(Legal Marxism)와의 2면적인 투쟁과 지양을 통해 전체성(全體性) 논리로서의 유물사관을 주장한다. 그는 유물론적 견해를 옹호하여 러시아에서의 자본주의 발달 검증이라는 구체적인 분석 작업과 결부시켰다.

(2)유물론과 경험비판론(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유물론과 경험비판론(Материализм и эмпириокритицизм. Критические заметки об одной реакционной философии)은 레닌이 1909년에 출판한 책이다. 혁명에 대한 탄압은 극렬하여 볼셰비키 대열내에서 조차 많은 동요가 야기되고 이러한 동요의 철학적 표현으로 유물론에 대해 마흐주의를 옹호하려는 경향, 사회주의와 종교를 절충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 때에 레닌이 철학적 유물론의 옹호를 위해 철학 문제를 다룬 것이 이 책이다. 레닌의 철학 저서로서는 이 책과 사후에 공표된 <철학 노트>가 유명하지만, 레닌의 변증법은 전문적인 철학적 저술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저술에 더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여러 종류의 절충주의적 경향으로부터 유물론적 견해를 지킨다는 의미는 갖고 있었으나, 현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엄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 섰다고 할 수 없는 면도 있으며, 특히 속류반영론(俗流反映論)에 빠진 설명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고, 또한 진리론의 오류도 지적되고 있다.

(3)제국주의,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Imperialism, the Highest Stage of Capitalism)

제국주의론(帝國主義論), 원제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러시아어: Имперіализмъ, какъ новѣйшій этапъ капитализма)1916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저작하고 1917년에 출간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서적이다.

1914, 1차 세계대전 발발시 당시 멘셰비키와 개량주의자들을 포함한 다수의 각국 사회주의자들은 조국방위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지지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레닌을 주축으로한 볼셰비키는 이 전쟁을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므로 제국주의론이라는 소책자는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간의 불가분 관계, 자본주의의 모순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경제학을 기점으로 연구하기위해 저술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칼 카우츠키의 기회주의적 발상도 비판했다.

이런 특징을 가진 제국주의론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에 필요한 필독서이며, 아직까지도 자본주의와 신제국주의를 연구할 때 이 제국주의론이라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저서가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4)국가와 혁명(The State and Revolution)

국가와 혁명은 레닌이 1917년 출판한 책이다. 19174월 레닌은 러시아에 귀국하여 혁명의 방향을 명확하게 사회주의 혁명으로 정립하는 4월 테제를 제안한 후,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쟁취 싸움이 가까워졌다고 보고 이 책을 집필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대변자 역할로서 '고타강령비판'등을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반대 의견에 대해 반박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국가의 관계를 논하고, 더 나아가 장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 국가의 사멸까지 다루고 있다. 레닌은 이 책에서, 특히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적 국가학설을 비판했다.

(5)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

(6)파리 코뮨의 교훈(The Lessons of the Paris Commune)

 

3.평가

그는 러시아 혁명으로 차르와 소수 귀족계급에 의해 대다수의 민중들이 탄압을 받던 러시아(피의 일요일)에 평화와 평등을 주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처음 실현시켰다는 것과 전 세계 약소국 식민국가들과 유럽 각 국가들에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국가 지도자 입장에서 최초로 약소국의 완전한 해방을 주장했고, 적극적으로 민족해방세력을 지원했다는 것은 20세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향과 의의를 갖는다.

 

독서를 즐겨하여 학문적 소양도 폭넓었고 토론과 협상의 명수였다고도 한다. 탈레스,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픽테토스 등을 포함한 고대 그리스 철학과 계몽주의 철학, 셸링, 트렌델렌부르크, 헤겔, 포이어바하, 마르크스, 엥겔스, 카우츠키, 플레하노프의 서적과 루이 파스퇴르의 생물속생설, 윌리엄 베이트슨의 기초유전학, 찰스 다윈의 진화론까지 두루 꿰고 있을 만큼 자연과학 이론과 사상에 정통하였다. 레닌주의라고 불리는 그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에 창조적 발전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될 만큼 공산주의 이론에 정통한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면도 있어서 마침내 공산주의 혁명의 완성이라는 필생의 목표를 달성했다

(1)금욕주의

레닌은 스스로 철저한 금욕적 삶을 실천하였고, 죽을 때까지 정열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그는 당시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도덕적 허무주의에 빠졌던 것을 죄악으로 여겼고, 이러한 경향을 부르주아적 타락이라고 여겼다. 레닌은 급진적인 혁명가였지만 도덕 문제에 있어서는 오히려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으며, 당시 유럽의 진보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여러 예술 사조(표현주의, 미래파 예술, 입체파 예술)퇴폐주의 사조’, ‘쓰레기 잡동사니라고 비판했다. 그는 공산주의 혁명가라면 무조건 금욕적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사학자 드미트리 볼코고노프는 위와 같은 레닌의 태도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광신과 연결이 되어있다고 분석하였다. 그에 따르면, 레닌은 혁명 활동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이 광신적 단계에 이른 상태였다. 실제로 레닌은 혁명을 위해서는 인간의 욕구는 얼마든지 강력히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인간의 욕구가 제도적으로 얼마나 통제될 수 있고, 그것이 인간 개개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얼마나 억제되느냐에 따라 문명의 수준이 결정된다는 스토아 학파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레닌은 혁명가로서 맑은 정신을 갖추기 위해선 지속적인 신체 단련과 소식(小食)이 필요하다고 봤기에, 운동을 자주 하였고 식탐을 멀리했다. 그는 발전된 인간의 삶의 양식을 이른바 스파르타식 생활 양식이라고 여길 정도였고, 실제 스파르타식 생활 양식을 꾸준히 따랐다. 레닌의 금욕주의 및 통제적 사고에 질린 레프 트로츠키는 그를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독재자인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de Robespierre)라고 비판한 적도 있다. 볼코고노프는 이러한 레닌의 금욕주의에 대해 레닌은 평생 관념론과 형이상학에 대항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레닌 자신이 철저한 관념론자이자 형이상학자라는 것을 스스로의 인생을 통해 증명하였다.”라고 평가하였다.

(2)정예주의

레닌은 볼셰비키 간부를 추천할 때 엄격한 기준에 따라 정하였다. 그는 혁명가라면 혁명에 헌신할 수 있어야 하고, 인민대중과 함께 고락을 나눠야 하며, 노선 고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만약 인민대중 다수가 굶고 있다면, 혁명가도 같이 굶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레닌 주위에 포진해있던 볼셰비키 간부들은 대부분 뛰어난 헌신성을 갖추고 있었고, 대중과 유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러시아 제국 시기에 활동했던 대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못 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 반면, 레닌은 언행이 일치된 삶을 중시하였고 실제로 그러하였다. 그는 볼셰비키 간부에게도 언행일치의 삶을 필생의 신조로 삼을 것을 요구하였으며, 특히 무지(無知)를 절대악이라고 여겼기에, 자체적인 학습을 강조하였다.

(3)완고한 비타협심과 자존감

사학자 루이 피셔에 따르면 레닌은 타협을 혐오하였고, 논쟁에서의 패배를 죽음보다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상대가 완전히 패배 선언을 할 때까지 논쟁을 진행했으며, 이러한 끝까지 논쟁을 하려는 성격 덕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도 레프 트로츠키와 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와 함께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레닌의 강한 성격은 혁명에 대한 강한 확신과 겹쳐지면서 혁명 활동에서 그가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사학자 로버트 서비스는 레닌이 폭력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보이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거시적인 도덕 기준에서 이러한 판단이 혁명에 득이 되는가 방해가 되는가?”로 귀결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레닌은 혁명을 위해서 때론 살인도 가능하다고 봤으며, 혁명 과정 중에 일어난 인명 살상 사태에 대해서 별다른 도덕적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그는 수구적인 자본가와 우익을 인류 진보의 암적 존재로 봤기에 그들이 진보의 과정에서 죽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레닌은 그가 가진 완고한 성격으로 인해 개인적인 의미에서의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레닌은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우정(友情)이나 사랑을 저급한 정열로 취급했으며, 진정한 사랑이란 오로지 혁명적 동지애(同志愛)라고 봤다

 

4.조선 독립운동 세력과의 관계

1921년과 1922년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한 한국인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면담하기도 했다. 1921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한국인 공산주의자 한형권, 김립 등을 면담하였는데, 레닌은 그들에게 조선인들은 공산주의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민족주의 운동부터 한 다음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거쳐 공산주의 혁명을 이룩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레닌은 한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자금지원을 약속했고 필요한 자금의 액수를 묻자,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은 40만 달러라고 말했다. 적은 액수라며 호쾌하게 웃던 그는 한인 공산주의자들에게 200만 루블(당시 기준으로 약 80만 달러, 지금 기준으로 약 1000만 달러)을 지불했다. 이 돈은 상하이 공산당의 이동휘가 보낸 한형권과 김립에 의해 30만 루블씩 분할 운송되었는데, 자금의 분배 과정에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에게는 지불되지 않아 논란을 일으켰다. 상해파 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간의 자금 갈등은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입수되었고, 임시정부의 김구는 이들이 레닌에게 지원받은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면직·노종균을 보내 김립을 사살하였다. 1922년 모스크바에 간 여운형은 국제 코민테른 대회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만나 조선 독립 운동에 대한 대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소련)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발적 협회의 기초 위에서 형성된 연방국가이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The Russian Soviet Federated Socialist Republic)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Ukrai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벨라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Byeloruss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Azerbaidjan Soviet Socialist Republic)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Georg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Arme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Turkmen Soviet Socialist Republic)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Uzbek Soviet Socialist Republic)

타지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Tadjik Soviet Socialist Republic)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azakh Soviet Socialist Republic)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irghiz Soviet Socialist Republic)

카렐로-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Karelo-Finnish Soviet Socialist Republic)

몰다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Molda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Lithua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Latv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he Eston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1.아르메니아 2.아제르바이잔 3.벨로루시 4.에스토니아 5.그루지야 6.카자흐 7.키르기스 8.라트비아 9.리투아니아 10.몰도바 11.러시아 12.타지크 13.투르크멘 14.우크라이나 15.우즈베크..

 

소비에트(сове́т)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농민·인민들의 민주적 자치 기구이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 1905 10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창설되었으며 이후에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자주적인 소비에트가 설립되었다.

1917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 당시에는 노동자 소비에트와 농민 소비에트 간의 연합 세력이 형성되었고 혁명 이후에 탄생한 러시아 임시 정부에서 소비에트가 실권을 잡았다. 1917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이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은 소비에트 러시아가 되었고 1922년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했다.

 

1.2월 혁명 전의 소비에트

최초의 노농평의회는 러시아 왕정이 평화적 시위를 무력으로 짓밟은 피의 일요일 이후 1905 5월에 왕정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노동자와 농민, 인민들이 이바노보를 기점으로 모스크바 북부에 민주적으로 결성한 지역평의회이다. 원래 이러한 지역평의회 결성은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것은 아니었고, 러시아 인민주의자들(민주공화국파)과 사회적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형태였다. 러일 전쟁으로 러시아가 전시 체제에 들어가자 다수의 노동자들은 이에 파업으로 대처했고, 그 결과 수많은 공산주의자들도 노농평의회를 결성하여 이바노보와 유사한 정치 결성체를 만들었다.

 

1917 2월 혁명이 진행될 당시에도 러시아 제국 내엔 이미 수많은 노농평의회가 결성된 상태였다. 이들은 명목상 자유주의 혁명인 2월 혁명에 관여하여, 혁명의 실질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

 

2. 러시아 임시정부 시기

2월 혁명으로 멘셰비키(러시아 사회민주 노동당) 주도의 임시 정부가 들어섰지만, 전쟁은 멈추지 않았고 자본가들의 탄압은 다를 바 없었다. 이 당시 노농평의회에 속한 노동자, 농민은 갖가지 노동, 농민 쟁의를 일으켰으며, 케렌스키 정부에 대항했다. 케렌스키 임시 정부의 무능한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의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차르 체제로의 회복'을 주장한 러시아 군대 내 왕당파(반동주의자)들이 주가 되어 쿠데타가 일어나자 케렌스키 정부는 볼셰비키에게 이들을 진압해줄 것을 부탁했으며, 이 응답에 승락하여 노농평의회는 자치적인 무장 능력을 통해 '붉은 군대'가 되었다.

*멘셰비키 [Men’sheviki]: 지도자 중심의 엄격한 당을 만들자는 주장에 반대하여 개인적 활동의 자유와 점진적인 혁명을 주장하였던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자유주의적 온건파

*볼셰비키[Bol’sheviki]: 다수파라는 뜻으로,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에서 레닌을 지지한 세력

 

3.소비에트 연방 성립 이후

1917 10월 혁명 이후 내전을 통해 승리를 한 레닌 주도의 볼셰비키가 정권을 확실히 잡게 되자, 정치적 권리는 일부 제한이 되었고, 기존의 자치, 생산 업무에서 조금 더 분화된 임무를 맡았다. 볼셰비키는 거대하게 불어난 생산수단과 토지를 관리할 수 있는 체계, 그리고 더 많은 수의 인민들의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 또는 직접 민주주의적 체제를 대변하는 임무를 노농평의회의 본 임무로 상정했다.

 

이후 노농평의회는 '지역평의회'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주로 한 도시 내의 자치 행정에 관한 업무를 맡았다. 지방 분권 사회에서의 '지방 자치제도'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권한은 미세하게 다르다. 노농평의회는 정식적인 입법권이 없지만, 한 지역의 생산 방향 결정, 행정 단위 내 인민의 요구 견지, 공산당 견제 등의 추가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공산당이 또다른 엘리트 세력으로서 비당원 인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정책을 강요할 것을 염려해서 만든 민주적 시스템이었다. 공산당 지역당 위원들은 이들과 의견 대립을 통해 정책을 결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9년 지역평의회를 해체할 때 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몇몇 시기에는 지역평의회가 사실상 공산당 관료 조직의 하부 조직 역할을 맡았던 적이 있다. 보통 현실공산주의 국가에선 이들은 공산당과 노동조합과 더불어 3대 권력기관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소비에트(сове́т)는 러시아 제국의 노동자·농민·인민들의 민주적 자치 기구이다.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한다. 1905 10월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창설되었으며 이후에 러시아 제국 각지에서 자주적인 소비에트가 설립되었다. [노농평의회(지역평의회)]

 1.회의제 정부(의회정부제) 특징

a.민선의회에 권력이 집중

b.집행부는 의회에 예속 종속됨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하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하지 못한다

2.인민 회의제(인민 회의정부론, 인민민주주의)

PDR(인민민주주의 혁명)은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이다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는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

소련헌법은 인민회의제(인민민주주의) 헌법으로 명목상 국가원수 소비에트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이고 실권자는 소련공산당 지도자 당 서기장과 내각 수장 총리(수상)이다 소련헌법은 소련 공산당 일당 독재를 인정함으로 소련 연방 최고회의(최고 의회)는 공산당이 장악하게 되었고 내각도 소련 공산당에 예속 종속돼 왔다

 인민 의회정부론(인민 회의정부론)이 의회보다 지도자론(영도론)으로 나아갈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1인 전체주의 정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최고지도자)의 임기제한을 해야 인민회의정부(인민의회정부)가 될 수 있다. 중국 등소평헌법이나 쿠바 신헌법은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하고 있다 베트남도 형식상 국가주석 4년 중임제이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주의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 3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69

 

1.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社會勞動民主黨)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社會勞動民主黨, Российская социал-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рабочая партия, 1898 ~ 1918)은 러시아에서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선택한 혁명당이었다. 1898 3 14일 민스크에서 개최된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 전러시아 대회에서 기초가 마련되고, 1903년의 브뤼셀, 런던의 사회민주노동당 제2회 대회에서 확립되었다. 사회혁명당과 더불어 노동운동을 지도하였는데, 사회혁명당이 나로드니키[인민주의-인민의 속으로 (브 나로드)]의 후계자임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서 계급투쟁에 의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 했다. 2회 대회에서 레닌에 의해 기초된 강령이 채택되고, 당의 규약, 중앙위원회, 중앙기관지 이스크라 및 평의회가 성립되었는데 동시에 당은 레닌이 인솔하는 볼셰비키와 마르토프 등의 멘셰비키로 분열하였고, 런던에서의 제3회 당대회에는 멘셰비키가 참가하지 않았다. 1906년의 스톡홀름 대회에서 양파의 결합이 시도되었으나, 멘셰비키는 카데트와의 제휴를 주창하고 대립, 1907년 제5회 대회에서 결정적으로 분열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멘셰비키 세력들은 대거 탈당하여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멘셰비키)를 창당하면서, 남은 볼셰비키 세력들은 1918년 부터 당명을 소련 공산당으로 변경하였다.

이후 남은 멘셰비키 세력들이 창당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불법 조직이 되어 지하정당으로서 소련에 저항하였다.

 

상징색: 빨강

이념: 마르크스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내부 정파:볼셰비키. 멘셰비키

*멘셰비키 [Men’sheviki]: 지도자 중심의 엄격한 당을 만들자는 주장에 반대하여 개인적 활동의 자유와 점진적인 혁명을 주장하였던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자유주의적 온건파

*볼셰비키[Bol’sheviki]: 다수파라는 뜻으로,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에서 레닌을 지지한 세력

스펙트럼: 중도좌익 ~ 극좌

 

 

2.볼셰비키(большеви́к)

볼셰비키(большеви́к)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인솔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분파이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2차 전당대회에서 다수파인 볼셰비키와 소수파인 멘셰비키가 분열함으로써 탄생하였다. 폭력에 의한 혁명, 철저한 중앙집권에 의한 조직 통제를 주장하였다. 이 특징은, 그대로 후신인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소련 공산당) 으로 인계되었다. 러시아 내전 종전 후에도 소련을 포함한 유럽 내에서 실질적·형식적으로 꾸준히 공산당 지지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으며, 스탈린 사후부터 이 명칭은 소련 내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1)역사

1903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분열돼 나온 다수파(多數派)이다. 분열의 원인은 당원 자격문제인데, 레닌 등은 당원은 당의 일정한 기관에 속하고 언제나 당의 지휘 명령에 복종하며 노동 계급의 전위(前衛)인 자에 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06년 스톡홀름에서 연합대회가 열리고, 1907년에 런던 대회가 개최되었으나, 국회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멘셰비키와 분열된 후 1912년 독립적인 당()임을 선언하였다.

 

1차 세계 대전 때는 멘셰비키가 조국 방위를 주창했음에 대해 볼셰비키는 전쟁을 하기보다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과 공산주의 혁명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하기 위하여 자본가와의 타협과 기회주의를 배격하고 국제적으로 수정공산주의(修正共産主義)와도 대립했다.

 

1917 2월 혁명 당시에는 소비에트내에서 극소수(極少數)에 속했으나, 4월 레닌의 귀국과 더불어 세력이 증대하였다. 7월에 수도 페트로그라드를 중심으로 일어난 무력시위에 애초에는 반대했으나 시위가 시작되자 참가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볼셰비키가 유혈사태를 막아 때이른 봉기로 수도가 고립되고 혁명이 실패할 것을 막았다고 평가한다. 이후 대대적인 반()볼셰비키 캠페인으로 일시 열세(劣勢)로 떨어졌으나, 8월말 코르닐로프 반란을 전기(轉機)로 하여 10월에는 20만 명의 당원으로 팽창하여 정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1918 3월 급진공산주의파(急進共産主義派)를 눌러 독일과 단독강화(單獨講和)를 맺고 당명(黨名)을 러시아 공산당이라 했다. 그 후 국내전(國內戰)시대에는 혁명의 성과를 지키는 데 노력하는 한편, 밖으로는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을 조직하여 공산주의의 수출을 시도하였다. 1921년에는 네프(신경제정책)를 실시했다. 1926년에 전연방공산당(全聯邦共産黨), 1952년 소비에트연방공산당으로 개명하였다.

(2)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a.상징색: 빨강 

b.이념: 공산주의, 레닌주의, 혁명주의, 중앙집권

c.스펙트럼: 극좌

d.준군사조직: 노동자적위대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러시아어: Рабоче-Крестьянская Красная Армия) 약칭 붉은 군대(러시아어: Красная Армия 크라스나야 아르미야 또는 노농 적군(勞農赤軍) 그리고 소비에트 공산주의 노동자 군대 또는 공산주의 노동자 군대는 1946 2 25일 이전 소련의 정식 군대이다. 1946 225일 소비에트군(蘇聯軍)으로 개칭되었다.

e.분파[교조주의-마스 레닌주의 노선]

스탈린주의, 마오쩌둥 사상, 호치민 사상, 티토주의, 주체사상, 호자주의, 게바라주의, 카스트로주의, 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주의

-흐루시초프나 등소평, 고르바초프, 옐친 등은 수정주의 노선이다

    

3.소련 공산당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공산당(蘇聯邦 共産黨)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유일한 합법 정당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주의 조직이었다. 이 당은 1917 10월 혁명을 이끌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한데 이어 인류 역사상 최대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수립했으며, 이후 74년 가까이 반대당(야당)을 허용하지 않는 유일 집권당의 지위를 가졌다.

그러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공산당은 1991 8월 쿠데타 실패 이후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과 함께 소련의 공화국을 이루었던 나라들의 공산당의 전신이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통치체는 1~5년마다 열리는 전당(全黨)대회였으나, 1939년부터 1952년 사이 13년이나 열리지 않은 적도 있었다. 최후의 전당대회는 1990 7 2일부터 11일간 열렸던 제28차 전당대회였다. 전당대회는 중앙위원회 위원을 선출하고, 또 그들 중에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을 선출했다. 또한 그 산하에 기관지 프라우다, 청년 조직으로 콤소몰, 아동 조직으로 피오네르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 한편 당원의 수는 1986년 당시 1900만 명이 넘었다.

(1)역사

1889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러시아어: Росси́́йская Социал-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Рабо́чая Па́ртия, РСДРП이 민스크에서 창당)

1912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뉨. 볼셰비키는 1918년 당명을 러시아 공산당(러시아어: Росси́йская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большевико́в), РКП(б)로 바꿈.

1925 : 전연방 공산당 (볼셰비키)로 당명을 바꿈. (러시아어: Всесою́зная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большевико́в), ВКП(б)

1952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으로 당명을 바꿈.

1991 8 24 : 8월 쿠데타 실패.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당 서기장직 사임 및 소련 공산당 해체를 발표.

a.창당

1912 1 1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

1918 3 (러시아 공산당 다수파)

1925 12 (전연방 공산당)

1952 10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b.해산

1991 8 29

 

(2)소련 공산당의 후신

러시아 연방 공산당

우크라이나 공산당

카자흐스탄 공산당

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

몰도바 공화국 공산주의자당

그루지야 통일 공산당

투르크메니스탄 공산당

아르메니아 공산당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4.러시아 연방 공산당

 

러시아 연방 공산당(러시아어: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은 러시아 연방의 정당이다.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후계자로 여겨지고 있다. 1993 2 14일 러시아의 2차 의회에서 설립되었다. 소상공인계층과 지방노농계급을 중심으로 러시아의 '새로운 공산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러시아 연방에서 두 번째로 큰 정당이다.

(1)역사

러시아 연방 공산당은 예고르 리가체프와 아나톨리 루카노프에 의해 공동 설립되었고, 이후 겐나디 쥬가노프에 의해 주도된다. 주가노프는 소련의 붕괴 이후 좌파민족주의 계열인 '러시아 애국운동'의 국가 구원 전선의 회장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연방 공산당이 공산주의 외에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러시아 연방 공산당은 푸틴의 독재에 염증을 느낀 많은 유권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2011년 두마 선거에서 단 92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이는 러시아 연방 공산당의 역대 최다 의석수이기도 하다. 2011 12 18 2011년 두마 선거 결과를 부정선거라 주장하며, 전국적 집회를 열었고 많은 지지자들이 참석하였다.

 

2008, 겐나디 주가노프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으나 패배하였고, 2012년에 또한 겐나디 쥬가노프를 다시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018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2018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공산당의 후보 파벨 그루디닌의 지지율이 73%로 나와 1위를 기록하였다. 이로 인해 몇몇 러시아 매체에서는 이번에 러시아 공산당이 세대교체를 할수 있을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하였으나, 결과적으로 11%를 득표하며 낙선하였다

 

(2)이념

겐다니 쥬가노프는 과거 "오늘날의 주요한 투쟁은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서가 아니라 서방에 의존적인 자유주의자들과, 자주권을 지키려는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라고 천명한 바 있다. 이것은 과거와 다른 시대정세 하에서 계급문제는 뒤로 물러나고 민족문제가 부상했음을 시사하는 표현이다. 러시아공산당은 스스로를 서구의 매판 자본주의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세력으로 규정하며 노동자의 복지를 증진시키되, 노사협력을 통해 서방세계에 대항해야 한다는 반제국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표어: 러시아! 노동! 인민의 힘! 사회주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상징색: 빨간색

이념: 공산주의, 소비에트 민족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사회민주주의(수정주의, 2018년 대통령 선거때 도입)

스펙트럼: 중도좌익-극좌

 

 

5.마르크스-레닌-마오쩌둥주의[MLM, 중국 공산당 내부 교조주의 노선(모택동 계열)]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MarxismLeninismMaoism, MLM)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을 결합한 정치 사상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2세대 노선이라고 할 수 있으며, 2000년대 후반부터 정통 공산주의자들의 새로운 이념으로 주목받고 있다.  

(1)개요

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는 1993년에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더욱 더 프롤레타리아 혁명적인 노선으로서 창시되었으며 현재에는 국제혁명운동이라는 대표적 마오쩌둥 사상 단체가 이를 추구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인도 공산당이 이 이념을 추종하고 있다. 여기에 프라찬다 노선과는 구별된다.

 

a.군중노선

기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당 중앙위원회 '사회주의 국가에서 '간부회'의 역할을 했던 모든 종류의 중앙 집행 기관'의 활동을 중점으로 사회주의 건설, 그리고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에로의 투쟁을 서술하였지만, MLM 노선은 사회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혁명 과정에서 당과 인민 사이의 강력한 연대, 대규모 군중 직접 행동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노선은 혁명당  흔히 '공산당'이라 불리는  이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강력한 전위력을 갖춘 전위당의 역할을 급진적으로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과 이어진다. 이러한 군중 노선으로 당은 인민의 의지를 투쟁 과정에 적절히 반영할 수 있으며, 인민은 당의 영도권에서 이반하지 않을 수 있다.

 

b.신민주주의

MLM 노선은 기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반제국주의 노선을 강화하여 반제 투쟁의 한 예외적 계급인 '민족부르주아'(national-bourgeois)의 역할과 통제에 대해 심도있게 논하고 있다. 민족부르주아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화에 저항할 수 있으며, 통일전선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계급이지만, 본질적으로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이므로 생산 관계의 모순을 청산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통일전선을 꾀할 때 이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통제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며, 이는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오늘날 공산주의 진영이 쇠퇴한 시점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이들(넓게는 자유주의자들)과 언제든지 협력하고, 협력한 상태에서 다변화된 전략을 구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MLM 노선이 시사하는 바이다.

 

역사적으론 중국 국민당과 연합을 했던 중국 공산당의 예를 들 수 있으며, 블라디미르 레닌이 잠시 도입했던 신경제정책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2차 세계 대전 시기 유럽에서 광범위하게 성립된 인민전선도 통일전선의 한 예로 들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천두슈 주도의 중국 공산당은 민족부르주아 세력인 중국 국민당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으며, 이에 대한 무지는 상하이 쿠데타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무참히 학살된 것과 관련이 크다. 마오쩌둥은 제2차 국공합작에서 이 민족부르주아들을 통제하고 자신들의 혁명 전략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지식을 갖춘 상태였으며 결과적으로 그는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민족부르주아와의 부분적인 타협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MLM 노선은 현대 공산주의 운동이 퇴조한 시점에서 수많은 개발도상국(왜냐하면 선진자본주의 정체에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의하는 '민족부르주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의 혁명을 지도하는 이념으로, 새로운 통일노선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c.문화대혁명

1990년대 중반에 구체화된 MLM 노선은 과거 존재하던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 현상에 대해 분석해야 했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은 당의 수정주의화, 관료주의였다. 그들은 이러한 것의 원인을 대규모 대중 운동을 배제하고 중앙위원회에 모든 것을 맡기는 기존의 현실사회주의의 특유의 제도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으며, 당의 수정주의화를 막기 위해 일정한 기간마다 전체적인 문화대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군중 노선에 근거해야 한다.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공산주의로의 투쟁 과정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 내부의 반동 공작 문제보단 외부적 문제에 모든 것을 쏟았다면, MLM 노선은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통제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하부 구조의 변형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상부 구조 변형을 급진적으로 진행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이를 '계속혁명론'(繼續革命論)이라고 부른다.

 

d.적대적 모순/비적대적 모순

마오쩌둥 사상은 기본적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반하며, 스탈린의 공산주의 정립을 정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오쩌둥 사상은 중국 현실에 맞는 발전된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우고 있기에 일부 이론에서 스탈린의 이론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특히, 모순론(생산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변증법적 모순에 대한 이론) 1920년대 데보린 학파에 의해 전개된 유물변증법과 더불어 이오시프 스탈린이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에서 밝힌 모순론과 비교되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순과 사회주의 사회에서 그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모순의 본질은 제반경제투쟁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일치하며, 그것은 어떻게 하든 현실에서 계급 투쟁(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의 형태로 발생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지도되는 사회주의 정체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반면, 마오쩌둥은 모순을 적대적 모순(敵對的矛盾, Antagonistic contradiction)과 비적대적 모순(非敵對的矛盾)으로 나눈 다음, 전자의 모순은 처음부터 끝의 과정까지 모순의 과정을 관통하며,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순, 즉 본질적 모순에 해당하고, 후자는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모순이라고 하였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에 따르면, 전자의 경우는 계급 전쟁에서 최일선에 해당하는 모순인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모순이므로, 서로의 계급 전쟁에서 나름대로의 전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또한, 갖가지 양태를 갖고 있는 모순으로 변화하게 된다.

예를 들면, 그것은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의 싸움이 될 수 있으며, 제국주의자와 반제국주의자, 남성 권위주의자들과 여성 사이의 투쟁, 심지어 노동자와 농민 및 빈곤노동자 사이의 투쟁으로도 양태화될 수 있다. 마오쩌둥은 이것들이 본질적인 모순에 해당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구분하기 위해서는 결국 매개 모순의 특수성, , 모순의 진행도를 인식하고 그것을 정합(整合)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모순의 진행도가 제각각인 것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연변증법(Dialektik der Natur)에서 논한 자연물 사이에서의 모순을 포함하여 모든 본질적인 모순이 가진 보편적인 것(보편성)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주요 모순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에 따르면, 주요 모순은 모순성의 특수성을 정합성에 따라 인식한 후에 판단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상황에 따라 또 유동적으로 변한다. 이러한 입장은 혁명에 현실성을 부여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정식을 받아들인 기존의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양태를 갖고 있는 모든 본질적 문제를 단적인 경제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투쟁으로 환원시키고 그것들의 속성을 근시안적으로 바라보는 경험주의적 단견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수많은 본질적 분쟁인 사건을 비본질적 분쟁으로 취급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의 비판 대상인 교조적인 공산주의자들은 농민은 소부르주아이기에 본질적인 혁명 동력이 없다고 봤으며,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양분적 대립 등을 비본질적 모순으로 보아 그것들의 중요성을 무시했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기조가 본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취지에 어긋나며, 교조주의자들의 입장을 '혁명에서의 소극주의 경향'으로 규정하고 단죄하였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계급 투쟁 관계를 단순히 무산자-임금노동자와 유산자-사업가의 싸움으로 표시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그것의 본질은 사실 무산자와 유산자 사이라는 간극보다는 혁명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세력과, 반동으로 나가는 세력 사이의 간극이라고 본 것이다.

마오쩌둥이 혁명의 시기인 1920년대에서 1940년대 사이에 농촌에 기반한 농민운동에 중점을 둔 것도 바로 위와 같은 철학적 지론에서 나온 것이다.

 

MLM 노선은 기존의 교조적 계급론으로 모든 사회 현상을 쉽게 설명하기 힘들며, 대중에게도 와닿지 않으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마오쩌둥의 모순론을 새로운 혁명론적 모순관으로 채택하였다. 이 새로운 형태의 변증법적 견해에 따르면, 공산주의 운동은 반식민주의 투쟁·반인종주의 투쟁·여성해방투쟁에 보다 유연하게 동행할 수 있을 것이다.

 

e.반수정주의

기본적으로 MLM 노선은 반수정주의를 지향한다. 이들은 공산주의 운동 쇠퇴의 원인을 수정주의로 보고 있다. 비록, 스탈린의 DIAMAT 원리에 마오쩌둥의 모순론을 첨가하여 새로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혁명 노선에 있어서 볼셰비키당의 유산을 간직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MLM 노선을 지지하는 당 또는 단체는 국제공산주의운동에서 강력한 반수정주의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와 흐루쇼프 이후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도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2)마오쩌둥주의와의 차이

MLM 노선은 마오쩌둥주의에 크게 영향받았으나, 기본적으로 공업 사회에 적용하기 위해 형성된 혁명 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MLM 노선 자체도 마오쩌둥주의의 특수성보단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성을 추구하고 있다. , 마오쩌둥주의는 혁명 전의 중국 상황과 유사한 국가들에서 '특수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 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MLM 노선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이 노선이 공업 사회, 농업 사회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는 수정주의 노선으로 나아가야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수정주의 노선은 국영자본체제와 노농조합(지역 지방 의회) 도입 그리고 노동계급이 령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프롤레타리아독재체제)와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의 임기제한 등이다

국영기업이나 농장이 노농조합(지역 의회)에 의한 운영과 함께 개인의 사유재산, 이윤추구, 시장경쟁원리의 자본주의 3원칙을 인정하고 상업적 공농(工農) 생산품을 생산하여 판매하여 그 수익으로 세금과 경영 비용, 노동자나 농민들에게 임금으로  분배하는 것이다

국영기업이나 농장의 부패와 관료주의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노농조합(지역의회)애 의한 책임자 선출과 임기제한 그리고 사업 의결권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인민 의회정부론(인민 회의정부론)이 의회보다 지도자론(영도론)으로 나아갈 때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1인 전체주의 정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국가주석이나 대통령(최고지도자)의 임기제한을 해야 인민회의정부(인민의회정부)가 될 수 있다. 중국 등소평헌법이나 쿠바 신헌법은 국가주석 임기를 제한하고 있다. 베트남도 형식상 국가주석 4년 중임제이다

당이나 노농조합(지역의회) 독재나 우위는 인정하지만 국가주석이나 대통령, 농장 책임자나 국영기업 책임자 개인의 독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노농조합이나 지역의회 그리고 연방의회(중앙의회)에서 선출된 국영기업(농장) 책임자나 국가주석(대통령)의 임기는 제한이 돼야 세습화나 부패를 척결할 수 있다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3485

 

민주공화국 형태 연방제 러시아연방공화국 [민주국가]

국정(國政)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개인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이를 준수하며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국민투표와 자유선거는 국민에 의한 최고의 직접적인 권력행사이다.

러시아연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이 허용된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국가이념이나 의무적 이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
러시아 연방에서는 정치적 다양성과 복수정당이 허용된다.
모든 사회단체들은 법앞에 평등하다. [러시아연방 헌법]"

 

민주국가(민주공화국, 입헌군주국)와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 인민공화국) 이론

1. 우파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 이론[民營資本體制]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 [일본국 헌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 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상기의 원리들과 각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보편적 이념에 입각하고 그들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 평등· 박애를 국시로 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원칙으로 한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개인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이를 준수하며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국민투표와 자유선거는 국민에 의한 최고의 직접적인 권력행사이다.

러시아연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이 허용된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국가이념이나 의무적 이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

러시아 연방에서는 정치적 다양성과 복수정당이 허용된다.

모든 사회단체들은 법앞에 평등하다. [러시아연방 헌법]

*미합중국 헌법[민주국가 헌법]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http://blog.daum.net/007nis/15876066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전문

http://blog.daum.net/007nis/15871495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독일 바이마르 헌법(1919)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로부터 해방법률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독일 통일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048

*군국주의 대일본제국 헌법 전문과 평화주의 입헌군주제 일본국 헌법 전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4623

*러시아 연방 헌법[Конститу́ция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72

*中華民國 憲法(중화민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57658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http://blog.daum.net/007nis/15875575

*몽골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1736

 

2.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 인민공화국) 이론[國營資本體制]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라오스 그리고 쿠바 등 5개국에 불과하다.[노동계급의 노농동맹(공산당) 령도(領導, 지도) 인민의회정부론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 국가](많은 분들은 노동자 국가를 지향ㄹ하고 있는 이탈리아 파시즘이나 독일 나찌즘을 극우라고 표현하지만 좌익 파시즘으로 표현하고도 있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 3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69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3485

*베트남 헌법(2013년 개정)[민주공화국 형태 사회주의 헌법]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는 인민에 의한(民治), 인민을 위한(民享) 인민의(民有) 사회주의 법치국가이다-

http://blog.daum.net/007nis/15876070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3공화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476

 

1957년 10월 15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중공중앙)이 ‘우파분자 분류 표준에 관한 통지’를 발표하였다.[모택동주의 노선 중국 공산당이 분류한 자본주의민주주의 세력(수정주의자) 우파와 극우세력 동향]
이에 따른 우파는 다음과 같다.
1) 사회주의 제도를 반대하는 자 .
2) 무산계급의 독재와 민주집중제를 반대하는 자 .
3) 공산당의 국가 정치생활 중의 영도적 지위를 반대하는 자 .
4) 사회주의와 공산당을 반대함으로써 인민의 단결을 분열시키려는 자 .
5)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공산당을 반대하는 소집단을 조직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 일부 분야 혹은 일부 계층 단위에서의 공산당의 영도를 뒤엎으려는 자 공산당과 인민정부를 반대하는 소란을 선동하는 자.
6) 앞에서 규정한 우파분자의 범죄활동을 지지하고, 관계를 맺으며 또 통신하여 혁명조직의 기밀을 보고하는 자.

통지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극우분자로 분류했다.
1) 우파활동 중의 야심가, 지도분자, 주모분자와 핵심 분자.
2) 공산당과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강령성 의견을 제출하고 이 같은 의견을 적극적으로 고취한 자.
3) 사회주의 반대활동에 특별히 악랄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한 분자.
4)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반공산당, 반 인민 활동을 전개해 왔으며 최근의 우파활동 전개 시에 적극적으로 반동활동을 한 자.

 

중공중앙의 이 통지는 반우파 투쟁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건국 후사회주의 개조과정에서 후펑(胡風본명은 장광런張光人) 비판 등의 부르주아사상 비판 캠페인으로 위축되어 있었던 지식인의 활동을 적극화시키기 위해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운동을 제창했다.
중국문화가 꽃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자유로운 언론활동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마오쩌둥(毛澤東)이 명명했고, 1956년 5월 중국공산당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가 '백화제방·백가쟁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지식인의 자유로운 발언을 호소했다.
당초 지식인의 반응은 매우 소극적이었으나 1957년 5월 '언자무죄(言者無罪 : 무엇을 말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라는 방침에 고무, 일제히 발언하기 시작,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속출했다.
마오의 생각은 이 운동을 통해 이왕의 사회주의 건설을 정당화하고 강화하자는 것이었으나 순식간에 체제를 부정하는 단계로까지 치닫자 자신이 고무한 이들의 발언을 "'우파' 분자에 의한 반당·반사회주의적 '독초'"라고 매도하고, 같은 해 6월 '반우파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의 모순을 비판했던 공산당원들 다수가 반우파 분자로 몰려 숙청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였다. 29세이던 1957년 당적박탈과 강등 조치를 당한 주룽지는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이 ‘우파분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5년 동안 노동개조를 받기도 했다. 그는 마오쩌둥이 사망한 2년 뒤인 1978년 당적을 회복하고 사회과학원 공업경제연구실 주임에 임명되면서 ‘개혁 총리’로서의 미래를 예비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일본 공산당 "2단계 민주연합정부론과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

http://blog.daum.net/007nis/15875883

일본 공산당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당의 기본 방침으로 한다

일본 공산당은 2단계 혁명이론 NLPDR노선으로 우선 대미 종속과 대기업의 지배에 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로 한다

1단계로는 반미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며 2단계로는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다

1단계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革命)

2004 1월 제 2 차 당대회 개정 강령에서 일본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社會主義 革命)이 아니며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 革命)과 민주연합정부(民主聯合政府)'의 목표로 내세웠다

대기업 재계와 대미 종속 세력으로부터 일본 국민(日本 國民)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에 권력 이양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이라고 평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대기업 재계와 대미 종속 세력에서 일본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으로의 권력 이양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 공산당은 현재 일본 사회가 요구하는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다음의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하였다

.국가의 독립 · 안보 · 외교 분야(分野)

대미 종속을 타파하고 미일안전보장조약(日米安全保障条約)의 폐기(廃棄)와 비동맹(非同盟 중립(中立)의 일본을 실현한다. 미국과 대등 평등(対等平等)

의 우호 조약(友好条約)을 맺는다 등등

.헌법(憲法)과 민주주의(民主主義) 분야(分野)

()헌법 전문을 포함한 모든 내용을 지키고, 특히 평화적 민주적 조항(平和的民主的諸条項)의 완전한 이행을 목표로 한다.

()의회 민주주의의 체제 반대 당을 포함한 복수 정당제 선거에서 다수를 얻은 정당 또는 정당 연합이 집권하는 정권 교대(政権交代)는 당연히 견지한다.

()18세 선거권을 실현한다.

()일본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억압하는 모든 시도를 제거한다. 남녀평등(男女平等)의 권리(權利)를 모든 분야에서 옹호하고 지킨다.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고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에 철저를 도모한다. 등등

.경제적 민주주의(経済的民主主義)의 분야(分野)

()장시간 노동과 일방적 해고 규제를 포함해 유럽 주요 자본주의 국가와 국제조약 등의 도달점도 근거로 '규칙 있는 경제사회'를 실현한다.

()대기업(독점 자본)에 대한 다양한 민주적 규제(民主的規制)와 군축(軍縮), 불필요한 공공 사업의 중지, 대기업 · 재벌 우대 세제의 재검토를 재원으로 한 사회보장의 충실 등등.

 

이상(以上)의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革命)에 의해 일본은 미국의 사실상의 종속국의 지위에서 벗어나 진정한 주권을 회복하고, 국내적으로도 국민이 처음으로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 또한 일본은 군사적 긴장의 근원임을 멈추고 평화의 견고한 초석으로 바뀐다.

 

이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 革命)에 대한 입장 1961년 강령에서는 ""일본의 당면한 혁명은 미국 제국주의와 일본의 독점 자본의 지배, 두 적()에 반대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 인민민주주의 혁명(人民 民主主義 革命)이다"라고 되어 있고, 1994년의 강령까지 거의 동일한 표현을 했다

2004년 강령 개정 당시에는 '다수자 혁명'이나 '의회의 다수를 얻어 혁명의 노선'이라는 설명이 이루어졌다

 

민주주의 혁명의 과정: 통일전선에 근거한 민주연합정부(民主連合政府) 구상(構想)

일본 공산당은 일본 공산당(日本共産党)과 통일전선(統一戦線)의 세력이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 국회에서 안정된 과반수를 차지한다면 통일전선(統一戰線)의 정부(政府) 즉 민주연합(民主聯合) 정부(政府)를 만들 수 있다는 입장으로 단독 정권(単独政権)이 아닌 통일전선(統一戦線)에 기반한 연합정권(連合政権)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회를 명실상부한 최고기관으로 하는 의회제 민주주의 체제(議会制民主主義 体制)

, 반대당(反対党)을 포함한 복수정당제, 선거에서 다수를 얻은 정당 또는 정당연합이 정권을 담당하는 정권교대제(政権交代制, 정권교체)는 당연히 견지한다.

 

 '통일전선(統一戦線)'은 역사적으로 1945년의 강령에서는 모든 민주주의 세력의 결집에 의한 인민전선(人民戰線)의 결성 올바른 실천적 목표 아래 협동할 수 있는 모든 단체 및 세력과 통일전선(統一戰線)의 결성한다고 되어 있다

1947년의 강령에서는 광범위한 민주전선으로 1961년부터 2004년까지 강령에서는 '민족 민주 통일전선(民族民主統一戦線, NLPDR)'으로 표현 되었다

 '민족민주통일전선 정부(民族民主統一戦線政府)' '혁명정부(革命政府)'로 전환한다고 하고 있었지만, 2004년 강령 개정에서는 이 규정은 삭제 되었다.

 

2단계 사회주의적 변혁(社会主義的変革)

일본 공산당은 즉각 민주주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의 합의를 전제로 국회의 안정된 과반수를 얻어 사회주의를 위한 권력을 만들고 다음의 사회주의적 변혁(社会主義的変革, 사회주의 국가)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극복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社會)로의 진전(進展)을 도모(圖謀)

.주요 생산 수단의 소유, 관리, 운영을 사회의 손에 옮기는 생산수단(生産手段)의 사회화(社会化)

.민주주의와 자유의 성과(成果),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 있는 성과(成果)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발전시킨다

.사상 신앙의 자유, 반대 정당을 포함한 정치 활동의 자유를 엄격하게 지킨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사상 신조의 자유, 반대 정당을 포함한 정치 활동의 자유는 엄격하게 보장된다."며 일당 독재(一党独裁制)와 지도 정당제(指導政党制)는 채택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또한 소련형 사회주의(連型社会主義)의 관료주의·전제(専制)의 잘못은 반복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언"에 더 자세히 설명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이념적인 내용이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헌법(憲法), 정부(政府), 군비(軍備), 의회(議会), 사유 재산제(私有財産制)의 범위 등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일본 공산당은 이러한 미래 세대가 창조적으로 해결 과제이며, 지금부터 고정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가 고도로 발전하면 착취와 억압을 모르는 미래 세대는 "원칙적으로 일체의 강제가 없는 국가 권력 자체가 불필요하게 되는 사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도 없고 억압도 전쟁도 없는 진정한 평등 자유로운 인간 관계로 이루어진 공동 사회에 대한 전망이 열린다고 한다.

또한 이 사회주의적 변혁' 1961년 강령에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표현이었다는 것으로, 1994년에 사회주의적 변혁이라는 표현으로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의 낮은 단계이다라고 하는 두 단계 발전론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정설이었으나 마르크스, 엥겔스 자신은 그런 구별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두 단계 발전론을 그만두고 2004년 강령 개정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라는 표현으로 변경되었다 .

 1989 년까지의 동유럽내 공산권 국가

1989년 혁명과 국영자본체제 붕괴[동유럽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동상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붉은 별도 제거해야 합니다

날짜:

1989 6 4 - 1991 12 26

지역:

유럽 및 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

원인: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 체제), 권위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부정부패, 소련의 군사 점령, 경제 붕괴, 집단살해, 철의 장막, 종교 박해, 권력 남용, 강제노동, 숙청, 가난, 테러 등

목적:

경제적 자유와 민영자본체제, 유럽 통합, 자유 선거, 자본주의, 언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권, 노동권, 민주주의 등

 

종류:

시위 등 다양함

 

결과:

동구권의 몰락 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평화적 정권 교체.

냉전의 종결

독일의 재통일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유혈 혁명이 됨

소련의 해체

소련의 초강대국 지위 몰락

1991년 인도 국민 회의가 신자유주의를 채택

러시아 연방이 탄생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

유고슬라비아 해체 및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중국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1989년 톈안먼 사건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해산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회의론 대두

유럽 통합의 진전

성별 선택 낙태로 동유럽의 성비 변화

동구권에 인터넷이 확산됨

동구권에서 소비자 운동이 대두함

예멘의 통일

발트 3국의 재독립

몽골, 아프가니스탄, 베냉, 예멘, 모잠비크, 앙골라, 콩고 공화국, 소말리아에서 공산주의 붕괴

북한의 고난의 행군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 종결

미국의 문화가 동구권 국가에 전파됨

NATO EU에 동구권 국가 가입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의 시장 경제 도입

미국이 전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발돋움

신세계 질서

소비에트 전후 충돌의 첫 발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종결

   

 

 

Red stars are removed as communism relinquishes its grip in central Europe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a.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b.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국민의(民有,Of the people), 국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국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聯邦共和國).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미합중국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