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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기억연대 기부금 논란: ‘안성 쉼터’에 이어 윤미향 전 대표의 아파트 구입 자금도 의혹 본문
정의기억연대 기부금 논란: ‘안성 쉼터’에 이어 윤미향 전 대표의 아파트 구입 자금도 의혹
CIA Bear 허관(許灌) 2020. 5. 20. 13:01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의 기부금 사용에 대한 의혹이 추가로 이어지고 있다.
단체의 기부금 사용 내역과 회계 처리에 대한 의혹은 이 단체들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단체에서의 활동 경력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당선된 윤미향 씨 개인의 재산 형성에 대한 의혹으로 이어졌다.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92) 할머니는 지난 7일 기자회견에서 단체의 기부금 사용 내역이 불투명하다고 처음으로 의혹을 제기했다.
이후 주된 논란이 되고 있는 사항들에 대해 정리했다.
7억에 사서 4억에 판 '쉼터'
정의기억연대(정의연)가 '위안부 피해자 쉼터' 목적으로 구입했다가 최근 매각한 '평화와 치유가 만나는 집'은 이 할머니가 기부금 사용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이후 가장 큰 논란의 대상이 됐다.
정의연의 전신에 해당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은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이 단독주택을 7억5000만원에 매입했다. 이 비용은 한 대기업이 쉼터 사업에 지정 기부한 10억원에서 나왔다.
그러나 현지 공인중개사들은 2013년 당시 해당 지역에서 비슷한 규모의 단독주택 시세는 높게 잡아도 4억원가량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허위로 매입 가격을 부풀렸을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정대협은 쉼터 사업에 추가해 인테리어 비용으로 1억원, 운영비로 3000만원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영수증 등의 증빙 서류를 전혀 제출하지 않아 사업을 관리하던 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부터 시정 요청을 받았다.
정대협은 지난달 이 주택을 4억2000만원에 매각했다.
2억6000만원이 빠진 회계 공시 자료
정의연과 정대협의 회계 부실 의혹도 추가로 제기됐다.
시민단체 경제민주주의21의 김경율 대표(회계사)는 정대협이 국고보조금과 기부금을 받아 사업에 사용하고 실제로 남은 금액이 공시 자료에 금융자산으로 기재한 금액보다 2억6000만원가량 더 많았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단순 기재 오류로 보기엔 석연치 않은 정황이 감지된다. 횡령을 포함한 범법 가능성도 감안할 수밖에 없다"고 조선일보에 말했다.
정의연과 정대협은 공시 자료에 기부금 수혜 인원을 99명, 999명, 9999명 등으로 기재하는 등 회계 처리를 부실하게 처리했다는 의혹도 받는다.
담보대출 없이 2억 아파트 구입한 전 이사장
정대협 대표와 정의연 이사장을 역임한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자는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30년 가까이 정대협을 거의 혼자서 운영해왔기 때문이다.
쉼터 매입과 회계 처리에 관한 의혹은 윤 당선자 개인의 재산 형성 과정에 대한 의혹으로도 이어졌다.
처음 논란이 된 것은 그가 2012년 4월 수원의 한 아파트를 2억2600만원에 매입하면서 주택담보대출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수억원에 달하는 부동산을 매입하는 경우 이 만큼의 현금을 보유하는 경우는 드물어 담보대출을 받는 게 일반적이다.
김성태 미래통합당 의원은 윤 당선자가 보유했던 주택 등기부등본들을 분석해 3종의 주택을 보유하고 매각하는 동안 전혀 담보대출을 받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자금 출처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당초 윤 당선자는 2012년 수원의 아파트를 구입하면서 기존에 살던 아파트를 팔았다고 해명했으나 이후 수원 아파트의 매입이 기존 아파트 매각 9개월 전에 이뤄졌다는 게 알려진 후 "적금 등을 해지하고 가족에게 빌린 돈으로 샀다"고 해명을 바꿨다.[BBC 뉴스 코리아]
한국의 위안부지원단체, 불투명 운영 사죄
한국의 위안부였던 여성을 지원하는 단체의 운영이 불투명하다는 지적이 나온 문제와 관련해, 이 단체가 소유 시설의 관리를 전 이사장의 부친에게 맡기고, 일본엔으로 약 650만 엔을 지불했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에서는1992년부터 서울 주재 일본대사관 주변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항의집회를 개최해 온 지원단체에 대해 위안부였던 이용수 할머니가 최근 기부금 사용 내역 등 운영이 불투명하다며 이례적으로 비판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에 단체 측은 ‘횡령이나 불법 유용은 없었다’고 부인하고, 서울 근교에 소유하는 위안부였던 여성과 젊은이들의 교류시설에 관해서는 2014년 1월부터 지난달까지 전 이사장이었던 윤미향 씨의 부친에게 시설 관리를 맡겨 일본엔으로 약 650만 엔을 지불한 사실을 16일자 문서에서 밝혔습니다.
그리고 전 이사장의 친족을 시설 관리인으로 지정한 것은 생각이 부족했다며 사죄했습니다.
한국 언론은 검찰에 횡령과 사기 등 의혹이 있다는 고발장이 제출돼 수사에 착수했다고 보도했습니다.[NHK]
윤미향(尹美香, 1964년 10월 23일 ~, 경상남도 남해출신 )은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이다. 1992년 이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 간사, 사무국장, 사무총장 등을 역임하고 2008년부터 정대협 상임대표를 거쳐 일본군성노예제해결 정의기억연대의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위안부를 내세워 모금한 돈으로 자신의 정치세력을 지원했다. 2020년 4월 15일 21대 총선에서 더불어 시민당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2020년 5월 7일 30년동안 함께 했던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에서 "할머니를 내세워 모금한 돈을 할머니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며 그동안 정대협 운영에 대한 문제를 말하면서 "국회의원 가지 말고 정의연에 남아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했으나 할머니의 기자회견에 동석한 최용상 가자평화인권당 대표가 "더불어민주당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탈당한 이후 악감정을 가지고 이간질을 한다"고 하거나 회계처리에 있어 오해라며 해명했으나 도덕적 타격을 넘어 횡령 논란으로 번졌으나 5월 18일 라디오에 출연해 "사퇴는 없다"며 "의정활동으로 보여주겠다"고 밝혔다
1.생애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나온 후.여자대학교 대학원 기독교학과를 석사 수료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한국기독교장로회 간사가 되고, 1992년부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 간사, 사무국장,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고 2008년부터 상임대표를 맡았다.
2013년 3월,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의 삶을 기려 민족화해와 통일에 이바지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늦봄 통일상' 18회 수상자로 선정됐다. '늦봄 통일상' 심사위원회(위원장 양길승)는 수상자 선정과 관련하여 "2011년 1000회째를 쉬지 않고 이어온 수요시위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만들어 냈고 꾸준한 남북연대 사업을 전개해 민족화해에 기여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라고 밝혔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첫 위안부 피해 증언이 나온 뒤 30년 동안 윤미향은 척박한 위안부 문제 운동을 이끌면서 “나도 위안부였다”는 신고전화가 들어오면 두메산골이라도 찾아가 증언을 녹음하고, 단체의 열악한 살림을 메꾸려 자신이 받은 강연료까지 털어가며 운영하면서 정대협을 1인 체제로 운영하며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사람과 직접 관계하여 소통 부족 논란이 있었으며 이에 대해 정의연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윤미향 대표의 1인체제는 20년 넘게 지속됐다. 다른 이들을 잘 신뢰하지 않고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 자원봉사자들도 보안각서를 쓴 적도 있다. 그러니 실무자들이 내용을 잘 몰랐을 것이다”라고 전했다. 또 일부에선 윤미향의 남편 김삼석 <수원시민신문> 대표가 과거 보수 정권에서 공안당국의 감시에 시달린 탓에 윤미향이 극도의 보안의식을 갖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결국 "위안부 할머니 이름으로 기부받은 돈을 할머니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며 정대협 정의기억연대 해체를 말한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으로 인해 단체 운영에 있어 도덕성에 타격을 받았다.
2.학력
1983년 ~ 1987년: 한신대학교 신학과 학사
1987년 ~ 1989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기독교학 석사과정 수료
2005년 ~ 2007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3.경력
1989년 1월: 한국기독교장로회 간사
~ 1991년 11월: 여신도회 전국연합회 간사
1992년 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간사
~ 1997년 12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국장
1999년 8월 ~ 1997년 12월: 한국여성재단 사무처장
2002년 2월 ~ 2005년 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총장
2005년 2월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2012년 5월 ~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관장
4.상훈
2007년 제3회 이우정평화상
2012년 제9회 서울특별시여성상 대상
2013년 제18회 늦봄 통일상, 제20회 한신상
2015년 제9회 의암주논개상
5.논란
딸이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해서 전액 장학금을 주는 ucla대학에서 진학했으나 "외국인에게 전액 장학금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남편의 재심사건에서 일부 무죄판결받아 국가로부터 받은 형사보상금으로 부담했다고 밝혔다.
주택 등기부등본에 의하면 1995년 1월 수원 소재 한 빌라를 구입한 이후 1999년 10월 A아파트를 구입하여 1가구 2주택을 유지하다 2002년 2월 빌라를 매각하고, A아파트를 유지한 채 2012년 4월 경매를 통해 B아파트를 2억2600만원에 낙찰받고 이후 2013년 1월 A아파트를 1억8950만원에 매각했다. 두 차례 부동산 매매 과정에서 대출을 받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자 윤미향 측은 "본인이 30여년간 일하면서 모은 예금과 적금을 깨서 지급을 하고 모자란 금액을 가족한테 빌린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앞서 C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 아파트를 사기 위해서 살던 아파트를 팔았다"고 밝힌 것과 다르다
2014년 4월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책임사업인 '우물 파주기' 프로젝트 기부금을 모집한다면서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본인 명의 계좌를 공개하여 총 1757만원의 기부금이 모였지만, 1200만원을 베트남 측에 전달하고 차액의 사용처를 밝히지 않았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재야출신 정치인은 깨끗한 삶으로 살아야 한다
위안부 기부금 논란 3분 정리...이용수 할머니 '소모적 논쟁 지양해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92)가 위안부 관련 단체 후원금 사용이 투명하지 않다고 폭로하면서 정의기억연대(정의연)와 이 할머니 측의 주장이 진실공방으로 치닫고 있다.
이와 관련해 엇갈린 주장을 내놓고 있는 당사자들의 말을 정리해봤다.
'30년 간 속았다'
이용수 할머니는 지난 7일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의 기부금 사용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정의연이 기부금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았으며 피해자 할머니를 뒷전에 두었다고 폭로했다.
"자기들과 함께하는 할머니는 피해자라며 챙기지만, 단체에 없으면 피해 할머니라도 신경 안 쓰는 걸 봤습니다. 30년간 속을 만큼 속았고 이용당할 만큼 당했어요."
"한일 합의 당시 10억 엔이 일본에서 들어오는데 윤 대표(윤미향 당선인)만 알고 있었어요."
'41% 피해자 지원 사업에 썼다'
이에 정의연 전 대표이자 더불어시민당 윤미향 국회의원 당선자는 8일 "정의기억연대의 활동과 회계 등은 정말 철저하게 관리하고 감사받고 보고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모금 목적에 맞게 사업도 집행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또 11일 기자회견을 열어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 총 일반 기부 수입 금액의 41%를 피해자 지원 사업에 사용했다"고 밝혔다.
또 12일에는 기부금 중 10% 가량인 3300만원이 한 맥줏집에서 사용됐다는 의혹에 반박했다.
정의연은 "3300만원은 50개 지급처에 지급된 모금사업비 지출 총액"이라며 "사업비 지출금액이 가장 큰 '후원의 밤' 사업비용 지급처인 디오브루잉주식회사를 (대표) 지급처명으로 입력한 것"이라고 밝혔다.
국세청은 이것이 탈세나 분식회계 목적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면서도 회계 오류가 분명하며 이를 수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세청 지침상 100만원 이상의 지출은 단체명과 지급 목적, 수혜 인원, 금액 등을 별도로 적어야 한다.
2015년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당시 10억 엔이 들어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내용에 관련해서도 반박했다.
윤 당선인은 "음해이자 가짜뉴스"이며 "할머니의 기억이 달라져 있다"고 해명했다.
자신이 상임대표로 있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현 정의기억연대)에 모인 기부금과 성금 약 49억원 중 9억원만 피해자에 지급했다는 논란과 관련해서는 "직접지원은 피해자 운동을 위한 사업 중 일부"라고 설명했다.
이용수 할머니: '소모적 논쟁 그만하자'
이용수 할머니는 13일 경향신문에 한 시민단체를 통해 보낸 입장문에서 '30년 활동성과 폄훼하는 소모적 논쟁 지양해야한다'며 일본의 공식적인 범죄 인정과 사죄, 진상규명과 법적 배상, 책임자 공식 처벌과 재발을 막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을 촉구했다.
이 할머니는 "지난 30년간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정의기억연대와 더불어 많은 활동을 했다"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주의를 환기하고 공감과 참여, 행동을 이끌어 낸 성과에 대한 폄훼와 소모적인 논쟁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또 "가해국 책임과는 별도로 직접 당사자인 한일 국민 간 건전한 교류 관계 구축을 위한 미래 역사를 준비하는 관점이 필요하다"며 "양국 학생들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30여년간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나타난 사업 방식의 오류나 잘못을 극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누군가를 비난하는 과정이 아니라 현시대에 맞는 사업방식과 책임 있는 집행 과정, 그리고 투명한 공개를 통해 국민 누구나 공감하는 과정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밝혔다. [BBC 뉴스 코리아]
'나눔의 집'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야기
'나도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고 김화선(1926~2012) 할머니는 16세에 싱가포르에 끌려가 위안부가 됐다. 해방 후 무사히 한국에 돌아왔지만,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수치심과 자책감에 결혼도 포기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어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던 그는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2012년 6월. 86세 나이로 숨을 거뒀다.
2016년 고인이 된 위안부 피해자 박숙이 할머니는 생존 당시"아기를 갖고 싶었다. 너무 외로워서 애들을 데려다 키웠다"며 또 "너무너무 외로워서" 아이를 입양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여러 증언과 영화, 책, 자료 등을 통해 일본군 위안소의 운영 실태와 피해자들이 받은 고통에 대해선 잘 알려졌다.
반면 이들이 전쟁 후에도 겪은 아픔. 특히 여성으로서 개개인들이 받은 상처는 위안부란 이슈에 가려져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91년 8월 지금은 고인이 된 김학순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통해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당시 김 할머니의 공개증언은 위안부 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총 239명의 여성이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한국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재됐다. 이 가운데 2018년 2월 8일 현재 남아있는 피해 생존자는 31명.
그러나 실제로 더 많은 피해자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위안부 사실을 감추고 살다 떠났거나, 아직도 숨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잊혀진다는 것
지난 2018년 1월 12일 찾아간 경기도 광주시'나눔의 집'. 이곳에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 중 단일시설로는 가장 많은 9명이 거주하고 있다.
나눔의 집 입구에는 이곳을 거쳐간 피해자 17명의 동상이 있다. 할머니들의 생활시설 뒤에는 돌아가신 분들이 남긴 유품전시관도 마련돼 있다.
유품전시관 한쪽에는 이들이 남긴 글과 그림도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고 김화선 할머니의 그림도 있다. 그림속에는 평소 바람처럼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의 모습이 있다.
김 할머니 사진 옆에는 "나도 여자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라고 그가 생전에 남긴 문구가 적혀있다.
유품전시관에는 할머니들이 간직했던 편지도 볼 수 있다. 가족이 없어 홀로 외롭게 지내야 했던 이들은 방문자들이 남긴 편지 한통도 소중히 보관했다.
"눈물이 나..몰러 눈물이 나"
위안부 피해 생존자 중 최고령자인 정복수(103) 할머니도 이곳 나눔의 집에 거주하고 있다. 현재 그는 노환과 치매로 인해 대화가 힘든 상태.
이름을 묻는 질문에 그는 "몰러…눈물이 나"라는 말만 반복했다.
1916년생인 정 할머니는 1943년 남양군도 야스시마로 연행되어 위안부가 됐다. 전쟁 후 부산에서 홀로 지내던 그는 지난 2013년 나눔의 집에 정착했다.
나눔의 집 허정아 간사는 "정 할머니에게 양아들이 있는데 이제 그분도 연세가 있어 찾아오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나눔의 집에서 만난 또 다른 피해자 박옥선(94) 할머니는 중국 헤이룽 장성의 '위안소'에서 4년동안 일본군의 위안부 피해를 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치매로 인해 당시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잊고 싶은 아픈 기억뿐만 아니라 간직하고 싶은 가족, 친구, 고향에 대한 기억도 함께 잃어버린 듯 했다.
한·일 위안부 합의안
나눔의 집을 방문했던 당시 한국 정부는 한·일 위안부 합의안 처리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앞서 외교부의 민간 TF 조사팀은 한·일 양국간 위안부 합의 내용을 공개하며, 2015년 12월 28일 맺은 합의안은 '내용상, 절차상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밝혔다.
TF 팀이 제기한 합의안의 문제에는 정작 위안부 피해 당사자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또 일본 정부로 받은 10억엔 (약 100억원)의 보상금이 피해자들에게 지급되는 과정에서 당사자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당시 위로금을 받은 피해자 중에는 보호자가 대리 서명했다는 지적이다.
또 본인이 동의한 경우에도 치매 등으로 인해 정확한 의사표시를 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2019년 1월 기준 현재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25명. 대부분 노인성 질환 등으로 인해 거동과 의사표시가 어려운 분들이 많다.
실제 이날 경기도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9명의 피해 생존자 중에서 이옥선(92) 할머니만이 인터뷰가 가능했다. 그도 처음에는"기자를 만나도 이제 소용이 없다"며 취재를 거부했다.
또 "나이 이렇게 먹도록 기자들하고 얘기를 했는데 성과가 하나도 없잖아요. 아무리 말해봐야"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몇 시간 뒤 마음을 바꿔 다시 인터뷰에 응하며, "우리는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에 말 한마디라도 할 수 있지만 먼저 간 할머니들은 원한을 얼마나 품고 갔겠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 몫까지 우리가 다 해야 됩니다"라고 했다.
생존자들은 무엇을 바랄까?
1927년 부산에서 태어난 이옥선 할머니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13살에 울산에 있는 한 여관에서 일을 시작했다.
2년 뒤인 1942년 일본인에게 이끌려 중국 연길로 들어간 그는 그곳에서 위안부 피해자가 됐다.
전쟁 후에도 할머니는 위안소가 있던 연변에 남아 있다가, 지난 2000년 나눔의 집의 도움으로 58년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하지만 당시 그는 이미 사망신고로 국적이 말소된 상태였다. 1년 반에 걸친 법정소송을 통해 어렵게 국적을 회복했고, 이후 그는 직접 일본에 건너가 사과 요구를 하는 등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활동해 왔다.
앞서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을 대변해야 한다고 말했던 그는 하지만 "이제는 나이 이렇게 먹도로 얘기를 했는데 성과가 하나도 없다"며 안타까움을 호소했다.
"지금 할머니들이 하나하나 돌아가시는데 매일 죽죠. 이제는 나이가 있으니까. 할머니들 하나씩 죽을 때 우리 마음이 어떨지 생각해 보세요."
그는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는 것은 사죄"라며 일본의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을 받아내는 것이 자신과 남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원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위안부 할머니들이 하나도 없이 다 죽어도 이 문제는 꼭 해결되야 한다"고 밝혔다.[BBC 뉴스 코리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외교부 법적 다툼의 시작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관련 헌법 소원에 대해, 외교부가 해당 합의는 헌법소원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헌법소원이란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로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되는 경우에 국민이 헌법재판소에 자신의 기본권을 구제하여 줄 것을 청구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일보의 5일 보도에 따르면 피청구인인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올해 6월 헌법재판소에 "청구인들의 기본권이 침해될 가능성 자체가 인정되지 않는다"면서 "심판 청구를 각하해달라"는 취지의 답변서를 제출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외교부의 법적 다툼이 주목되는 이유는 불과 일주일 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13년 만에 승소했기 때문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2015년 위안부 합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며 "헌법소원의 법리적·절차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라고 설명했다한
법적 다툼의 시작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유족들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통해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은 2016년 3월 27일이다.
당시 한일 외교장관이었던 윤병세 외교부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발표한 지 4개월 후다.
헌법소원 절차에 따라 현재 해당 소송의 피청구인 자격은 강경화 장관에 있다.
이와 별도로 피해자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도 냈지만 서울중앙지법은 "외교적 행위는 국가 간 관계에서 폭넓은 재량권이 허용되는 영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원고들의 주장처럼 국가가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고 볼 수 없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라며 기각했다. 피해자들은 항소했고 다음 재판 일정이 12월 13일로 잡혔다고 민변은 전했다.
위헌인가 아닌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유족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한 핵심 근거는 2015년 합의가 할머니들의 재산권과 알 권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등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민변은 "정부가 이번 합의에서 당사자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배제했고, 합의 이후에도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했는지의 여부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며 "이는 헌법에 명시된 절차적 참여권과 알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위헌 소지가 크다"고 밝혔다.
이어 "합의는 일본 정부가 청구인들로부터 향후 개인적인 손해배상청구를 당할 경우 '이미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할 근거를 제공했다"며 "정부가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을 실현시킬 헌법적 의무를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의 소송대리를 맡은 이상희 변호사는 BBC 코리아에 "외교부는 해당 합의가 조약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공권력 행사가 아니라는 입장인데, 조약이 아니면 재협상을 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라며 "(외교부 의견서에 대한) 의견서를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많은 문제가 있다'
외교부는 의견서에서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적 합의인 위안부 합의는 조약이 아니기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라고 보기 힘들며, 따라서 피해자들의 기본권을 직접적으로 침해한 것으로 보기는 곤란하다는 취지로 지난 6월 각하 의견을 담은 답변서를 냈다"고 전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어 "답변서에서도 외교부는 위안부 합의 및 발표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으며 피해자들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는 등 절차와 내용상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외교부가 위안부 피해자들과 법정으로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소송 각하를 주장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 정부의 책임?
아울러 지난달 30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 결과에도 정부가 구체적인 후속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일본 고노 다로 외무상은 4일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한국인에 대한 보상은 한국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고 NHK가 전했다. 이에 관해 한국 정부는 아직 입장 표명이 없는 상태다.
2015년 12월 28일 윤병세 외교부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며 위안부 문제를 합의했다.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보상을 위해 일본 정부 예산 10억 엔을 출연해 재단을 설립한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화해·치유 재단은 실제로 이듬해 7월 출범했지만, 2017년 12월 민간 이사진이 전원 사퇴했고 아울러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 아베 신조 총리를 만나 화해·치유재단을 사실상 해산하겠다고 통보한 바 있다.[BBC 뉴스 코리아]
위안부 TF '한일 합의, 비공개 내용 있다'... 궁금한 점 3가지
외교부 '한·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는 27일 박근혜 정부 시절 이뤄진 한일위안부 합의가 "시종일관 비밀협상으로 진행됐고, 알려진 합의 내용 이외에 한국 쪽 부담이 될 수 있는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TF는 2015년 12월 28일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맺은 '위안부 문제 합의'를 7월부터 검토해왔다.
TF가 이날 공개한 31쪽 분량의 보고서에는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고, 일반적인 외교 현안처럼 주고받기 협상으로 합의가 이뤄졌다"며 또 외교부가 합의 발표문 내용 일부를 삭제 요청했지만, 청와대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비공개 부분은?
비공개 부분에 대해 TF 보고서는 일본 측이 피해자 관련 단체가 합의에 불만을 제기할 경우 한국 정부가 설득하라고 요청했다고 말한다. TF는 일본 측의 이 같은 요청을 한국 정부가 수용했다고 주장했다.
또 일본은 해외에 소녀상과 같은 기림비를 설치할 때 한국 정부가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으려 했고, 이를 한국이 합의문의 비공개 부분에 명시하는 것에 동의했다고 했다.
또 TF는 한국이 '위안부' 관련 명칭에 있어서도 일본 측 요구를 수용한 것을 비공개 부분에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일본이 한국에 '성노예' 표현을 사용하지 말 것을 원했고, 한국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TF 보고서가 주장한 한일 위안부 합의 '비공개 부분'
- 피해자 관련 단체 설득은 한국 정부가 맡는다
- 해외에 위안부 기림비 설치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지원하지 않는다
- '성노예'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공식 명칭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뿐이다
-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 이전 문제는 한국 정부가 '적절히 해결한다
누구를 위한 합의였나?
TF 보고서는 "한국 정부는 피해자들이 한 명이라고 더 살아 있는 동안 문제를 풀어야 한다"면서 협의에 임했지만 결과적으로 "피해자 중심, 국민 중심이 아니라 정부 중심으로 합의를 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 할머니들과 시민사회단체도 동의했다.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에서 생활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91) 할머니는 이날 발표를 듣고 "당연히 합의는 잘못된 합의다. (앞으로 재합의를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말했다.
또 TF는 합의문에 포함된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는 부분에서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표현을 외교부가 삭제 요청했으나 청와대가 묵살했다고 덧붙였다.
일본의 반응은?
한국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이날 발표에 대해 "정부로서는 이번 TF 검토 결과를 진지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며 "한일관계에 미칠 영향도 감안하면서 위안부 합의에 대한 정부 입장을 신중히 수립해 나가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예상대로 일본은 즉각 반응했다.
일본의 고노 다로 외무상은 27일 한일 간 2015년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합의 변경 요구가 있어도 결코 수용할 수 없다"며 "한국 정부가 합의를 변경하려 한다면 한일관계가 관리 불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했다.[BBC 뉴스 코리아]
한일 위안부 합의: 헌재, '위헌심판 대상 아니다' 각하
헌법재판소는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체결한 한일 위안부 합의는 "위헌심판 대상이 아니다"라는 각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각하 결정에 "해당 합의는 정치적 합의이며 이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정치의 영역에 속한다"라고 설명했다.
이번 판결은 한일 위안부 합의가 타결된 지 4년여 만에 나왔다. 각하는 헌법소원 청구가 헌재의 심판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할 때 본안 심리를 하지 않고 내리는 처분이다.
2019년 12월 현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 생존자는 20명이다.
헌재의 각하 결정 발표 직후, 위안부 피해자 쪽 변호인 이동준 변호사는 "어르신들이 받으셨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는데, 그 부분을 헌재가 다 못 해준 것 아닌가 싶다"라며 아쉬움이 남는 결정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헌재의 두 번째 결정
앞서 2011년 헌재는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것에 위헌 결정을 한 바 있다.
헌재의 이런 결정에 외교부는 일본 정부와 위안부 협의를 시작했고, 박근혜 정부는 2015년 12월 2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를 타결했다.
당시 합의문에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한국 정부가 설립하는 지원재단에 예산 10억 엔을 출연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러나 합의문에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이라는 표현이 포함돼 한국 사회에서 큰 논란이 됐다.
2016년 3월 27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유족들은 협약 타결 4개월 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을 통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입장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유족들이 헌법소원을 제기한 핵심 근거는 2015년 합의가 할머니들의 재산권과 알 권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등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민변은 "정부가 이번 합의에서 당사자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배제했고, 합의 이후에도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했는지의 여부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며 "이는 헌법에 명시된 절차적 참여권과 알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위헌 소지가 크다"고 밝혔다.
이어 "합의는 일본 정부가 청구인들로부터 향후 개인적인 손해배상청구를 당할 경우 '이미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할 근거를 제공했다"며 "정부가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을 실현할 헌법적 의무를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의 소송대리를 맡은 이상희 변호사는 2018년 BBC 코리아의 인터뷰에서 "외교부는 해당 합의가 조약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공권력 행사가 아니라는 입장인데, 조약이 아니면 재협상을 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교부의 입장
헌법소원 절차에 따라 현재 해당 소송의 피청구인 자격은 강경화 장관에게 있다.
외교부는 2018년 6월, 한일 위안부 합의가 헌법소원 대상이 아니라며 심판 청구를 각하해달라는 의견서를 냈다.
외교부는 의견서에서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적 합의인 위안부 합의는 조약이 아니기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라고 보기 힘들며, 따라서 피해자들의 기본권을 직접적으로 침해한 것으로 보기는 곤란하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어 "답변서에서도 외교부는 위안부 합의 및 발표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으며 피해자들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는 등 절차와 내용상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는 점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있다"라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외교부가 위안부 피해자들과 법정에서 마주하기를 피하고자 소송 각하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
일본 아베 신조 총리는 합의란 국가 간 약속이며, 그것을 지키는 것이 국제적, 보편적 원칙이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11월 위안부 합의에 따라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을 사실상 해산했다. 합의에 따라 지급받았던 10억 엔 또한 처리 방안을 고심 중이다. 이런 까닭에 헌재의 판결이 정부 정책의 방향을 크게 바꾸지는 않으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13년 만에 피해자 손을 들어줬다.
반면 일본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이런 갈등으로 일본 정부는 올해 여름부터 한국에 수출 규제를 가했고, 양국은 강경 대치 국면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은 한국 법원의 강제노역 배상 판결에 일본이 보복 조치를 했다고 보고 있지만, 일본은 '수출 관리를 둘러싼 부적절한 사안'이 무엇인지 함구했다.[BBC 뉴스 코리아]
2차대전때 일본군 위안부(慰安婦) 일본인 출신 모습
2차대전때 일본군 위안부(慰安婦) 숫자는 일본인 출신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 조선인(한국인), 그 다음은 중국인등으로 분포돼 있었다 일본군은 위안부로 초기에는 일본 국내에서 비밀경찰 기녀나 위생병으로 모집하였고 전쟁확대와 위안부 수요 증가로 빈민층 출신 일본인 자녀를 강제로 위안부로 모집했고 상류층 자녀들은 애국심 운동으로 위안부로 자원하게 했다[위안부는 요즘 용어로는 위생병이다 전쟁 위생병으로 모집한 것이 위안부이다]
2차대전 모든 젊은 일본인 여성들이 군대나 군수공장등에 강제동원 됐다
일본 패권 군국주의 군사정부노선이 세계전쟁 원인이었다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는 2차대전 때 한국, 중국, 동남아지역 여성들을 강제 동원하여 위안부로 고용했고 각 전쟁 지역사령부 마다 배치돼 위안부 숫자도 70만명에 달했다
오래된 사진 일본 서적(書籍)이 밝히는 '위안부'의 진실
일본의 「고지엔(広辞苑, 광사원)」'위안부'에 대한 주석에 "전쟁터의 장병을 위안하는 여자(위생병)"라고 쓰여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위안부'에 대한 정의는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강요 받고 일본군에 봉사하고 성 노예가 된 여성 일본군의 독점 성 노예라는 것 있다.
이 사진은 일본 서적에 게재 된 '위안부'의 진짜 모습이다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 여군이다[위안부는 요즘 용어로는 위생병이다 전쟁 위생병으로 모집한 것이 위안부이다]
일본군은 위안부로 초기에는 일본 국내에서 기녀나 위생병으로 모집 하였고 중일전쟁과 2차대전때 징병제 도입과 여성 전쟁동원으로 빈민층 출신 일본인 자녀를 강제로 위안부로 모집했고 상류층 자녀들은 애국심 운동으로 위안부로 자원하게 했다
일본군 위안부는 쥐를 잡는 고양이(비밀경찰)로 활동했고 적국지역에서는 비밀요정(비밀술집) 스파이로 활동했다
그러나 전쟁확대와 패전 위기로 일본군 위안부는 군부의 돈 벌이용으로 성 노예나 마약 보급처로 활용돼 전쟁 패망 원인 부패와 기회주의 안식처(위안소)가 되었다
1945년 8월 8일 버마 랑군 에서 연합군 장교와 인터뷰 중인 중국인 위안부의 모습
“ | 위안부지급대모집 (위안부를 급히 대모집)
|
” |
— 경성일보 1944년 7월 26일자에 보도된 위안부 모집 광고 |
“ | 『군』위안부 급구
|
” |
— 매일신보에 보도된 위안부 모집 기사 |
*군국주의 대일본제국 헌법 전문과 평화주의 입헌군주제 일본국 헌법 전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4623
제2장 신민권리의무
제18조 일본신민의 요건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른다.
제19조 일본신민은 법률과 명령이 정하는 바의 자격에 따라 균등하게 문무관에 임명되며 또한 기타의 공무에 취임할 수 있다.
제20조 일본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병역의 의무를 진다.
제21조 일본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납세의 의무를 진다.
제22조 일본신민은 법률의 범위 내에서 거주와 이전의 자유를 가진다.
제23조 일본신민은 법률에 따르지 않은 체포나 감금, 심문 및 처벌을 받지 아니한다.
제24조 일본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재판관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제25조 일본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 허락 없이 주소(住所)의 침입을 받거나 또는 수색을 받지 아니한다.
제26조 일본신민은 법률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신서(信書)의 비밀을 침해당하지 아니한다.
제27조 ① 일본신민은 그 소유권을 침해당하지 아니한다.
② 공익을 위하여 필요한 처분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른다.
제28조 일본신민은 안녕질서를 방해하지 아니하고 신민으로서의 의무에 위배되는 한에서 신교(信教)의 자유를 가진다.
제29조 일본신민은 법률의 범위 안에서 언론과 저작, 인행(印行) 및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제30조 일본국민은 상당한 경례(敬禮)를 지켜 따로 정하는 바의 규정에 좇아 청원을 할 수 있다.
제31조 본장에 있는 조규는 전시또는 국가사변의 경우에 따라 천황대권이 시행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제32조 본장에 있는 조규는 육해군의 법령 또는 기율에 저촉되지 않는 한도에서 군인에게 준용한다.[군국주의 대일본제국 헌법 전문 중 신민권리의무]
-구소련군에 처음으로 여성의 전투부대가 등장한 것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1942 년 여성의 대량 동원이 3회 열렸다. 첫 번째 동원은 10만명의 여성이 대공방위(対空防衛)임무를 할당했다. 두 번째 동원은 3만명의 여성이 전선에 보내졌다. 이것은 통신부대의 임무 수행을 위한 것이었다. 세 번째 동원은 공군의 남자병사과 교체를 위해 4만명의 여성이 소집되었다.
동원 된 여성의 일부는 1개월 반에서 2개월의 훈련이 실시된 후 전선에 파견 되었다. 다른 여성들은 위생병등의 봉사대(奉仕隊)에 배정되었고 소집 후 즉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남성은 거의 모두가 소집된 반면, 여성은 연령(18-25세)과 교육(필수 조건은 중등교육 졸업) 등의 제한이 마련 되었고, 마지막으로 여성 동원에서는 자녀와 가족이 없는 것이 조건으로 여겨졌다.
전쟁 중 전선에서 여성은 기본적으로 간호사나 위생병 군사 의료기관과 통신 부문에 80%를 배치되었고 그리고 도로 건설 등을 실시하는 부대 (사실상 인원의 절반)에 배속되었다. 또한 그것과는 다른 부류의 부대에 파견 된 여성도 있었다.
'병역의무' 법에 따라 1939년 9월 1일부터 의학이나 수의학 지식 또한 특수 능력을 가진 여성은 제2차 대전 개전(開戦)부터 군 복무 의무화했다.
전선과 후방에서 20만명 이상의 의사와 50만명의 일반 의료진이 종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절반이 여성이었고 1000만명 이상의 부상자 간호도 그녀들의 손에 맡길 수 있었다. 의료 대대와 최전방 야전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의 근무는 몇 밤낮 걸치는 일도 많았다. 의료진들은 밤에도 잠들지 않고 수술을 하고 또 사망자와 부상당한 병사를 전장에서 업고 데려 오는 사람도 있었다.
위생병의 마리아 세루바첸코의 수기에는 이런 설명이 있다. "전선 의료진의 상황은 어떠한 경우 전장보다 엄격했다. 병사는 참호에서 전투를 하고 한편 위생병들은 포탄이 터지고 총알이 난무하는 가운데 참호에서 참호에 달려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여성이 직접 군사행동에 참여한 국가는 세계에서 소련 뿐이었다. 전쟁 초기에 막대한 수의 소련 병사가 전사했고(공식 통계에서 약 2700 만명), 조국이 어려움에 빠진 것을 알게 된 여성들은 자원해서 군의 행동에 참여하고 전선에 가서 남자처럼 싸웠다.
여성들은 인원 부족 의용군이나 게릴라 부대를 보충하고 육상과 해상, 공중에서 남성을 대신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싸웠다.
1.여성의 동원(動員)
구소련군에 처음으로 여성의 전투부대가 등장한 것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1942 년 여성의 대량 동원이 3회 열렸다. 첫 번째 동원은 10만명의 여성이 대공방위(対空防衛)임무를 할당했다. 두 번째 동원은 3만명의 여성이 전선에 보내졌다. 이것은 통신부대의 임무 수행을 위한 것이었다. 세 번째 동원은 공군의 남자병사과 교체를 위해 4만명의 여성이 소집되었다.
동원 된 여성의 일부는 1개월 반에서 2개월의 훈련이 실시된 후 전선에 파견 되었다. 다른 여성들은 봉사대(奉仕隊)에 배정되었고 소집 후 즉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남성은 거의 모두가 소집된 반면, 여성은 연령(18-25세)과 교육(필수 조건은 중등교육 졸업) 등의 제한이 마련 되었고, 마지막으로 여성 동원에서는 자녀와 가족이 없는 것이 조건으로 여겨졌다.
전쟁 중 전선에서 여성은 기본적으로 군사 의료기관과 통신 부문에 80%를 배치되었고 그리고 도로 건설 등을 실시하는 부대 (사실상 인원의 절반)에 배속되었다. 또한 그것과는 다른 부류의 부대에 파견 된 여성도 있었다.
2.전차병(戦車兵)
실제로는 전시 중에 전차병으로 근무 여성이 20명 가까이 있었으면, 그 개개인이 영화나 책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활약을 하고 있던 것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알렉산드라 라슈프키나는 구소련판 뮬란(노병의 아버지를 대신해 남장하고 종군 활약한 딸 이야기)이라고 했다. 라슈뿌키나는 구소련 우즈베키스탄에서 여성 으로서는 처음으로 전차의 조종을 완벽하게 습득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간절히 부탁해도 전선에 파견 희망은 받아주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는 성공적인 수단을 썼다. 머리를 짧게 깎고 남자의 옷을 입고 군사 위원 부에 갔던 것이다. 그 당시(1942년), 전국적으로 서류 처리에 혼란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원병”의 서류에 대한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라슈뿌키나 남성으로 전선에 보내지게 되었다.
라슈뿌키나는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 종군하고 또한 바르샤바 봉기에도 참전했다. 3년 동안 전차 탑승자(승무원)와 같은 연대의 다른 동료 중 누구도 라슈뿌키나(Rashpkina)가 실제로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 비밀이 밝혀진 것은 1945년 2월경 라슈뿌키나가 조종하고 있던 T-34 전차가 공격을 받아 화염에서 그녀는 타박상, 넓적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 입원 중에 라슈뿌키나가 여성이었다는 정보가 사령부에까지 알려져 큰 문제가 되었다.
용감한 탱크병을 벌하지 않기 위해 라슈뿌키나의 지휘관이었던 바실리 추이 코프 원수 스스로가 옹호를 벌이게 되었다
3.비행기 조종사
비행사 마리나 라스코봐는 개전 이전 단계에서 이미 비행 기록 수립에 성공했다. 라스코봐는 1937년 비행단의 일원으로서 원거리 비행 세계기록을 세웠다.
1938년 이후로 그 기록은 더욱 갱신 되었고 같은 해에 약 6500킬로미터의 기록이 세워졌다. 모스크바에서 극동까지의 횡단비행. 비행 끝에 그녀는 비행기에서 비상 탈출을 피할 수 없게되어 외동 하나없는 타이의 오지(奥地)로 내려섰다. 10일 후 앙상한 모습으로 발견 된 그녀가 탈출시 생길 수 있는 음식은 초콜릿 뿐이었다
개전과 함께 라스코봐에는 일반여성 비행연대를 창설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여러 번 기록을 세웠다 라스코봐을 정점으로 3대(2개의 폭격대와 1개의 전투부대)로 구성된 비행단이 창설 되었다.
라스코봐 여성비행연대(제46근위 야간 폭격항공대)에서 활약한 이들의 에피소드는 비슷하다. 그 사람이 비행대에 철저히 매료되어 개전 초기부터 전선에 나가는 것을 지향하고 있었다.
라스코봐 자신은 1943년 1월에 전사했지만, 그녀의 항공대는 전쟁 4년간 약 1000회 출격하고 적의 기지에 수십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그 때, 이들이 사용한 것은 군용기가 아닌 나무의 복엽 비행기 Po-2이었지만, 이것은 독일의 방공군(防空軍)은 거의 대응하지 못했다
원래 여성 비행사의 에후게니아 지구렌코는 회고록에 이렇게 쓰고 있다. "독일군은 우리를 '밤(夜)의 마녀(魔女)들'이라고 불렀습니다.하지만 그 마녀들은 15세에서 27세의 젊은 나이였습니다."
4.저격병(狙撃兵)
저격수들에게는 그들만의 장점이 있었다. 병사들과 함께 공격에 참여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상대에서 발견되지 않도록 엎드려 숨어 적의 빈틈을 파고 드는. 단지 하나의 큰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포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저격수는 다른 군인과는 달리 생명의 위험에 노출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적에게는 첫번째로 표적이 된다. 처음에 총에 맞아 죽는 건 저격병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저격병은 류드밀라 빠부리첸코이다. 그녀는 전쟁이 시작되기까지 사격교육을 받고 있으며, 1941년에 지원해 전선에 다녀왔다. 중상을 입은 빠부리첸코은 전선에서 임무를 제외하고 1942년 9월 미국의 국제학생회의(아마 여행은 동맹국에 의한 두 번째 전선의 강행 돌파에 관련)에 참가했다. 그녀의 방문은 백악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빠부리첸코은 백악관을 방문한 최초의 구소련 국민이 되었다. 그녀는 당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면회했다. 빠부리첸코는 엘리너 루스벨트의 초대를 받아 자신의 전쟁터에서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시카고 회의에서 빠부리첸코는 유명한 연설을 하고있다. "나는 25세입니다. 전선에서 나는 309명의 적군 병사들과 장교의 저격에 성공했습니다. 신사 여러분, 내 뒤에 숨어 계실 시간, 좀 너무 오래 있지 않습니까?"
5.간호사(看護師)와 위생병(衛生兵)
'병역의무' 법에 따라 1939년 9월 1일부터 의학이나 수의학 지식 또한 특수 능력을 가진 여성은 제2차 대전 개전(開戦)부터 군 복무 의무화했다.
전선과 후방에서 20만명 이상의 의사와 50만명의 일반 의료진이 종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절반이 여성이었고 1000만명 이상의 부상자 간호도 그녀들의 손에 맡길 수 있었다. 의료 대대와 최전방 야전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의 근무는 몇 밤낮 걸치는 일도 많았다. 의료진들은 밤에도 잠들지 않고 수술을 하고 또 사망자와 부상당한 병사를 전장에서 업고 데려 오는 사람도 있었다.
위생병의 마리아 세루바첸코의 수기에는 이런 설명이 있다. "전선 의료진의 상황은 어떠한 경우 전장보다 엄격했다. 병사는 참호에서 전투를 하고 한편 위생병들은 포탄이 터지고 총알이 난무하는 가운데 참호에서 참호에 달려야 했다"
1943년 세루바첸코는 드네프르 강 전투시에 10일 동안 전쟁터에서 부상자를 나르고 112명의 부상병에 응급조치를 실시했다. 그 용기와 업적에 대해 그녀는 소련 영웅 칭호가 주어졌다.
제122조 소련 여성은 경제, 신분, 문화, 사회 및 정치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일할 권리, 휴식, 여가, 사회 보험 및 교육, 어머니와 자녀의 이익에 대한 국가의 보호, 산부인과 및 출산 휴가와 같은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여성에게 보장된다 임산부 가정, 보육원 및 유치원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제공한다.[스탈린 헌법]
제130조 소련 사회주의 공화국의 헌법을 준수하고, 법을 준수하고, 노동 규율을 유지하고, 정직하게 공무를 수행하고, 사회주의 사귐의 규칙을 존중하는 것은 모든 소련 시민의 의무이다[스탈린 헌법]
제132조 보편적인 병역법은 법률이다. 노동자 및 농민의 적군 군대에 대한 군 복무는 소련 시민의 영예로운 의무이다.[스탈린 헌법]
제133조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소련에 대한 모든 시민의 신성한 의무가 있다 충성의 맹세를 위반하고, 적에게 탈영하며, 국가의 군사력을 약화 시키며, 간첩 행위는 모든 심각성으로 가장 혹독한 범죄 행위 법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스탈린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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