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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よど号事件50年】「闘いは間違っていた」「拉致は無関係」北在住メンバー 본문

Guide Ear&Bird's Eye/국가안보 위해사범(NLPDR) 자료

【よど号事件50年】「闘いは間違っていた」「拉致は無関係」北在住メンバー

CIA bear 허관(許灌) 2020. 3. 30. 15:27


                                                         乗客を乗せたまま給油する日航「よど号」=昭和45年3月、福岡空港

昭和45(1970)年3月、共産主義者同盟赤軍派の学生ら9人が日航機を乗っ取り、北朝鮮へ渡った「よど号」事件から50年を前に、よど号グループが産経新聞の取材に応じた。「ハイジャックを含め赤軍派の戦いは間違っていた」と総括する一方、メンバーが国際手配されている欧州での日本人拉致は「無関係だ」と主張。日本への帰国は「拉致の疑惑が晴れない限り不可能だ」とした。北朝鮮・平壌の「日本人村」で共同生活するメンバーを代表して若林盛亮(もりあき)容疑者(73)が電話取材に答えた。

 若林容疑者は「理念のためなら、他人の命や犠牲はやむを得ないという考えは、絶対的に間違っていた」と振り返った。一方で北朝鮮での50年間について「アジアから見た日本を知れた。無駄ではなかったと思いたい」とした。
 ウェブサイトや会員制交流サイト(SNS)でメッセージを発信、20代の若者らから批判を含めた投稿もあるが、「若者は政治に無関心で、学生運動もなくなったが、私たちの責任を考えれば批判できる立場ではない」。
 欧州での日本人拉致事件は改めて関与を否定。今年2月、有本恵子さん(60)=拉致当時(23)=の母、嘉代子さんが94歳で亡くなったことについて「ご家族の心中を察するに余りあるが、本当に関与していない」と話した。
 一方、1980年代に多くの日本人の北朝鮮渡航を斡旋(あっせん)したと明かし「通常の手続きで入国できない市民運動家などの依頼に応じた。多くの人が訪朝し、無理に連れ去る拉致の必要はなかった」と強調した。
 拉致問題の最終的な解決には「全容解明」が不可欠だとし、相互の検証などが課題になるが、「日本側がどのように事実を受け入れるかが焦点になるのではないか」と述べた。
 日本への帰国では「ハイジャックの裁判を受ける覚悟はある」としながらも、日朝関係の混迷で実現は困難だと指摘。メンバーは高齢で、帰国したとしても活動には限界があるとした。
 近況については2月、新型コロナウイルスの世界的流行を受け、居留地を離れてはならないと指示されたという。最近になり緩和され、平壌市内へ買い物などに出かけた。マスクを着けた人が目立つが商店や食堂は通常通り営業し、日本人村近くの川を運搬船が往来するなど、生産活動も停滞していないとした。
[19703월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의 학생 등 9명이 일본 항공기를 탈취하여 북한으로 건너간 요도호 사건 50년을 앞두고 요도호 그룹이 산케이신문 취재에 응했다.

납치 등을 포함한 적군파 투쟁은 잘못됐다고 총괄하는 한편 회원(요도호 사건 구성원)들이 국제수배 중인 유럽에서의 일본인 납치는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일본 귀국은 납치 의혹이 밝혀지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했다.

북한 평양의 '일본인 마을'에서 공동 생활하는 회원을 대표하여 와카바야시 모리아키(若林盛亮, 1947년생 당시 23) 용의자(73)가 전화 취재에 답했다.

와카바야시 모리아키(若林盛亮) 씨는 "이념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과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은 절대적으로 잘못됐다"고 회고했다.

한편 북한에서의 50년간에 대해 아시아에서 본 일본을 알았다.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다고 했다.

웹사이트나 회원제 교류 사이트(SNS) 메시지를 발신, 20 대 젊은이들로부터 비판을 포함한 게시물도 있지만, “젊은이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학생 운동도 없어졌지만 우리의 책임을 생각하면 비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유럽에서의 일본인 납치 사건은 다시 한 번 연루를 부인했다.

올해 2월 유모토 게이코(有本恵子, 60)씨 납치 당시(23)의 어머니 가대코(嘉代子)씨가 94세에 숨진 데 대해 가족의 심중을 살피는데 너무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편 1980년대 많은 일본인의 북한여행을 알선했다고 밝히며 통상적인 절차로 입국할 수 없는 시민운동가 등의 의뢰에 응했다 많은 사람들이 방북하고 무리하게 데려가는 납치의 필요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납치문제의 최종 해결은 완전하게 해명이 필요하다고하고 상호 검증 등이 과제가되지만,"일본 측이 어떻게 사실을 받아들이는지가 초점이 될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

일본의 귀국에 대해서는 납치 재판을 받을 각오가 있다고 하면서도 북일관계 혼미(混迷)로 실현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멤버(요도호 납치사건 구성원)들은 고령으로 귀국했다고 해도 활동에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요즈음에 대해서는 2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유행을 받아 거류지를 떠나서는 안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최근 들어서야 완화되어 평양 시내로 쇼핑을 나갔다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눈에 띄지만 상점이나 식당은 정상대로 영업하며 일본인 마을 인근 강을 운반선이 왕래하는 등 생산활동도 정체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


【よど号事件50年】事件はなぜ起きた よど号グループの顛末


昭和45(1970)年3月、共産主義者同盟赤軍派の学生ら9人が日航機を乗っ取り、北朝鮮へ渡った「よど号」事件から31日で50年となる。事件はどのようにおき、そしてどういった展開をたどったのか。

 よど号グループの母体である「赤軍派」は、日本共産党を離党した学生党員らが組織した過激派「共産主義者同盟(共産同)」の最武闘派によって昭和44年9月に結成された。
 東大安田講堂事件の敗北で暴力的な政治運動が支持を失う中、塩見孝也赤軍派議長は、労働者に先立って先鋭化した運動家が武力革命を行うべきだとする「前段階武装蜂起論」を掲げた。
 赤軍派はこの指導方針に導かれて武装強化し、警察当局から厳しい監視下に置かれるようになったが、44年11月、山梨・大菩薩峠で実施した軍事訓練でおよそ50人が逮捕されるなどして勢力を失い、破綻。
 この反省から塩見議長は海外の社会主義国に渡って軍事拠点とし、訓練を受け、日本革命を目指す「国際根拠地論」を打ち出した。よど号事件はこの理論に基づく「軍事作戦」の第1弾だった。
 しかし、よど号グループは北朝鮮で「主体思想」を受け入れて現地に適応。その後、対外工作が強化されると、「対応し、日本国内に極秘潜入するなどして海外での活動を積極化させるようになり、その動向は各国の治安機関から警戒されるようになっていった」(警察幹部)。
 警察当局は、欧州での日本人拉致に関与したとしてメンバーとその妻の計3人を国際手配している。
 石岡亨さん(62)=拉致当時(22)=と松木薫さん(66)=同(26)=は語学留学などでスペインに滞在していた55年5月ごろ、拉致された。いずれもメンバーの妻、森順子容疑者、若林(旧姓・黒田)佐喜子容疑者が関与したとされ、石岡さんについては両容疑者とバルセロナの動物園で一緒に撮影された写真が見つかっている。
 一方、英国留学中に失踪した有本恵子さん(60)=同(23)=は58年7月ごろ、別のメンバーの元妻に虚偽のアルバイト話を持ちかけられてデンマークに誘い出された。
 有本さんは同国でメンバーの魚本(旧姓・安部)公博容疑者や北朝鮮工作員の男と落ち合ったとみられている。有本さん拉致をめぐっては、元妻が自身の関与を含め、当時の経緯を日本の裁判で証言している

 [19703월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학생 등 9명이 일본 항공기를 타고 북한으로 건너간 요도호 사건이 2020331일로 50년이 된다

사건은 어떻게 진행 되었고, 어떻게 전개 되었는가.

요도호 그룹의 모체인 적군파는 일본 공산당을 탈당한 학생당원들이 조직한 극단주의 공산주의자동맹(공산동)의 최대 무장투쟁파에 의해 19699월 결성됐다.

도쿄대학 야스다 사건(東大安田講堂事件의 패배로 폭력적인 정치 운동이 지지를 잃은 가운데

시오미 다카야(塩見孝也) 적군파 의장은 노동자에 앞서 첨예화된 운동가들이 무력혁명(武力革命)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는 '전단계 무장 봉기론(前段階武装蜂起論)'을 내걸었다.

적군파는 이 지도 방침 전단계 무장 봉기론(前段階武装蜂起論)’에 이끌려 무장을 강화하였고 경찰 당국으로부터 엄격한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196911월 야마나시(山梨) 대보살고개(大菩薩峠) 에서 실시한 군사훈련에서 무려 50명이 체포되는 등 세력을 잃고 파탄(破綻) 되었다

이 반성에서 시오미 다카야(塩見孝也) 적군파 의장은 해외 사회주의 국가에 걸쳐 군사 거점으로 삼고 훈련을 받아 일본혁명을 지향하는 '국제 근거지론(国際根拠地論)'을 내세웠다

요도호 사건은 이 이론에 근거한 '군사 작전'의 제 1 탄이었다.

그러나 요도호 그룹은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받아들여 현지에 적응했다

그 후 대외공작이 강화되자 "대응해 일본 국내에 극비 잠입하는 등 해외 활동을 적극화시키게 되면서 그 동향은 각국 치안기관에서 경계받게 됐다“(경찰간부 증언).

경찰 당국은 유럽에서 일본인 납치에 연루됐다며 적군파 회원과 그 아내 등 총 3명을 국제수배하고 있다.

이시오카 이시오카(62, 납치 당시 22)와 마쓰키 가오루(66, 납치 당시 26)은 어학 유학 등으로 스페인에 체류하고 있던 19805월경 납치됐다.

모두 멤버의 아내 모리 준코 씨, 와카바야시(일본성씨: 구로다) 사키코 씨가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시오카 씨에 대해서는 두 용의자와 바르셀로나 동물원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발견됐다

한편 영국 유학 중 실종된 유모토 게이코 씨(60세 납치당시 23)19837월경 다른 멤버 전 부인에게 허위 아르바이트 제의를 받고 덴마크로 끌려갔다.

유모토 게이코 씨(60세 납치당시 23)씨는 덴마크에서 멤버인 우오모토 (아베) 키미히로 (魚本 (安部) 公博) 용의자, 북한 공작원 남자와  맞선 것으로 알려졌다

유모토 게이코 씨(60세 납치당시 23)씨를 납치한 혐의로 전 부인이 자신의 연루를 포함해 당시 경위를 일본 재판에서 증언하고 있다 ]


【よど号事件50年】直前にメンバーに接触の元公安捜査官、後悔の独白「防げたかも…」

                                                 インタビューに応じる元警視庁警視=東京都千代田区(松井英幸撮影


昭和45(1970)年3月、共産主義者同盟赤軍派の学生ら9人が日航機を乗っ取り、北朝鮮へ渡った「よど号」事件から31日で50年を迎える。当時、警視庁公安部の捜査官だった男性(76)=警視で退職=が産経新聞の取材に応じ、犯行計画が決定される前日の45年3月13日、よど号グループの魚本(旧姓・安部)公博容疑者(72)に接触していたと証言した。元警視はハイジャックという重大犯罪の実行犯と事前接触しながら情報を引き出せず犯行も阻止できなかったことを、事件から50年となる現在も後悔しているという。

 ■再会

 魚本容疑者は44年1月、学生運動家らが東京大学本郷キャンパスの安田講堂を占拠し、多数の検挙者がでた東大安田講堂事件で逮捕され、警視庁牛込署で元警視の取り調べを受けていた。共に20代と同世代だったこともあり、元警視は取り調べの最終日に「何かあったら連絡を」と自宅の電話番号を伝えた。

 元警視は45年3月13日の夕方、西武線中村橋駅に近い喫茶店で魚本容疑者と待ち合わせた。1年ぶりの再会。池袋の焼き鳥店に移動し、取り調べ中の思い出や仲間・家族との関係、将来のことなどを話し込んだ。

 「魚本容疑者は東大事件後、一時、故郷の大分へ帰ったものの厳格な両親との関係がうまく築けず再び東京へ戻ってきたと打ち明け、悩んでいる様子でした」。元警視は過激派生活ときっぱり縁を切って学業へ復帰するよう強く勧めた。

 再会から3時間がたったころ、元警視の気持ちに変化が起きる。「時計が8時になっているのを見たら、突然前年の秋に生まれた長女の顔が頭から離れなくなってしまったのです」

[19703월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학생 등 9명이 일본 항공기를 타고 북한으로 건너간 요도호 사건이 2020331일로 50년이 된다

당시 경시청 공안부의 수사관이었던 남성(76, 교육감 퇴직)이 산케이 신문의 취재에 따라 범행 계획이 결정되는 전날의 1970313, 요도호 사건 그룹의 우오모토(아베) 키미히로 (魚本 (安部) 公博)용의자(72)를 접촉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경시청 공안부의 전직 수사관은 납치라는 중대한 범죄의 실행범과 사전 접촉하면서 정보를 끌어 낼 수 없고 범행을 저지하지 못했음을 사건에서 50년이 되는 현재도 후회하고 있다고 한다.

우오모토 키미히로 (魚本公博) 용의자는 19691, 학생운동가들이 도쿄대 본부 캠퍼스의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면서 다수의 검거가 나왔고 도쿄대학 야스다 사건(東大安田講堂事件)으로 체포되어 경시청 우시고메 경찰서(警視庁牛込署)에서 경시청 공안부의 전직 수사관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모두 20대와 같은 세대가 된 적도 있고 전직 경시청 수사관은 조사 마지막 날에 뭔가 있으면 연락을 하겠다고 집 전화번호를 전했다

경시청 공안부의 전직 수사관은 1970313일 저녁 세이부 선 나카무라 바시역(西武線中村橋駅) 근처 다방에서 우오모토 키미히로 (魚本公博) 용의자와 약속했다. 1 년만의 재회. 이케부쿠로의 닭 꼬치 가게에 가서 조사 중인 추억과 동료·가족과의 관계, 미래의 일 등을 이야기했다.

"우오모토 키미히로 (魚本公博) 용의자는 도쿄 사건 이후 한때 고향 오이타에 돌아했지만 엄격한 부모와의 관계가 잘 쌓아 올릴 수없이 다시 도쿄로 돌아 왔다고 털어 놓고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전직 경시청 수사관은 극단 생활과 단호히 인연을 끊고 학업에 복귀하도록 촉구했다.

재회에서 3 시간이 지났을 전직 경시청 수사관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 “시계가 8시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갑자기 작년 가을에 태어난 장녀의 얼굴이 머리에서 떨어져 없어져 버렸어요."]



요도호 납치사건이란

북한과 일본이 11~12일 중국 베이징에서 국교정상화를 위한 실무그룹회의를 열어 일본인 납북자 문제에 대한 재조사와 함께 요도호 관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키로 함으로써 이 사건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사건은 다미야 다카마로(田宮高磨) 9명의 일본 적군파(赤軍派)1970330일 도쿄발 후쿠오카행 일본항공(JAL)의 요도호를 공중 납치한 사건으로, 당시 요도호에는 승무원 7명과 승객 등 129명이 타고 있었고 적군파는 기장을 권총으로 위협해 평양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적군파는 자국내 경찰서 습격사건 등으로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범인들은 북한으로 가던 중 331일 김포공항에 비상착륙한 뒤 승무원과 승객을 인질로 잡고 북한까지 안전한 비행 보장을 요구했다.

 

결국 김포공항에서 범인들은 탑승객 전원을 석방하는 대신 야마무라 신지로(山村新治郎) 당시 운수성 정무차관을 인질로 잡고 79시간 만에 북한으로 떠났다.

 

43일 평양으로 들어간 이들은 북한당국에 망명을 요청해 그곳에 눌러 앉았다. 그후 주모자 등 3명이 사망하고 당시 16세였던 한명의 요원은 1988년 일본에 잠입해 지하활동을 벌이다 유일하게 체포돼 형기를 마치고 석방됐다.

 

또 다른 한명은 20006월 태국에서 달러위조 혐의로 체포되어 일본으로 송환돼 재판을 받았다.

 

현재 북한에는 나머지 4명의 범인과 일본인 처, 20여명의 자식들이 살고있는 것으로 일본 공안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이들이 납치범(테러리스트)이므로 인도해 줄 것을 북한에 꾸준히 요구해 왔으나 북한측은 이를 거부해 왔다.

 

그러나 2001년부터 북한은 요도호 납치범 가족의 귀국을 허용, 몇차례 귀국이 이뤄지기도 했다.

 

200452차 방북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평양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요도호 납치범을 일본에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었다.

 

북한은 20047월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요도호 문제는 어디까지나 일본 정부측과 이전의 적군파 구성원들 사이에 직접 협의해서 해결해야 할, 일본사람들 자체의 내부문제"라며 "우리는 그들이 자기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데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적군파 문제는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잔류시키는 것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연계된 문제로, 최근 미국은 북한의 핵신고서 제출과 상응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는 것과 관련해 적군파 요원은 물론 북한에 남아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일본인들에 대한 긍정적인 조치를 촉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북한은 13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최근 북한과 일본간 국교정상화를 위한 실무그룹회의에서 일본인 납치문제를 재조사하고 요도호 관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키로 했다고 밝혔다.

 

요도호 납치사건이 38년만에 해결국면으로 접어든 셈이다.

lwt@yna.co.kr

 

요도 호 사건(よど号事件 요도고 지켄[*])1970331일 일본에서 적군파(일본적군의 전신) 요원 9명이 하네다 공항에서 이타즈케 공항(板付空港, 현 후쿠오카 공항)로 향하던 일본 항공(JAL) 351편 여객기를 납치해 승객 129명을 태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하 북한)으로 도주한 항공기 공중 납치 사건을 말한다. 요도 호 하이재킹 사건(よどハイジャック事件)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사고기

(1)기체

기종 : 일본 항공 소속 보잉 727-89

기체 기호 : JA8315

당시 일본 항공의 B727에는 일본의 강을 딴 이름을 붙여놓고 있었고, 사고기에는 요도 강을 따서 요도 호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2)승무원

기장 : 이시다 신지(石田 真二)

부기장 : 에자키 데이이치(江崎 悌一)

항공기관사 : 아이하라 도시오(相原 利夫)

객실승무원 : 가미키 히로미(神木 広美), 구보타 준코(久保田 順子), 오키무네 요코(沖宗 陽子), 우에무라 하쓰코(植村 初子)

 

2.범인 그룹

(1)실행범 : 요도 호 그룹이라고도 불린다.

다미야 다카마로(田宮高麿, 1943-1995) 당시 27

고니시 다카히로(小西隆裕, 1944-) 당시 26

오카모토 다케시(岡本武, 1945-1988?) 당시 25, 로드 공항 사건의 범인 중의 하나인 오카모토 코조(岡本公三)의 형

다나카 요시미(田中義三, 1948-2007) 당시 22

우오모토 기미히로(魚本公博, 1948-) 당시 22

와카바야시 모리아키(若林盛亮, 1947-) 당시 23

아카기 시로(赤木志郎, 1947-) 당시 23

요시다 긴타로(吉田金太郎, 1950-1985?) 당시 20

시바타 야스히로(柴田泰弘, 1953-2011) 당시 17

 

(2)지원 그룹 : 범행을 배후 지원한 적군파의 간부들로 모두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시오미 다카야(塩見孝也)

마에다 유이치(前田祐一)

다카하라 히로유키(高原浩之)

가와시마 히로시(川島宏)

우에하라 아쓰오(上原敦男)

 

3.납치실행

1970331일 오전 733분경 도쿄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여 후쿠오카 이타즈케 공항 행 일본항공 351편이 후지 산 상공을 비행중에 일본도와 권총, 폭탄 등의 무기를 가진 괴한들에 의해 납치되었다. 범인들은 남성객을 창가에 이동시킨 다음 가지고 온 로프로 이동시킨 승객들을 묶고 일부는 조종실에 들어가 항공기관사를 인질로 하여 기장과 부기장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인 평양으로 향하도록 지시했다.

 

4.이타즈케 공항 착륙

하지만 기장은 "이 노선은 국내선인지라 북한에 가기 위한 연료가 충분하지 않다"고 하며 범인들을 설득했다(실제로는 예비 연료가 있어 충분히 평양까지 갈 수 있었다). 그 후 납치된 항공기는 오전 859분에 급유를 위해 이타즈케 공항에 착륙했다. 경찰은 국외 도주를 차단하기 위해 항공 자위대 항공기가 고장을 가장하여 활주로를 차지하도록 하는 등의 공작을 펼쳤지만 오히려 범인들을 자극하였고 초조해진 범인들은 서둘러 이륙할 것 요구했지만 기장의 설득으로 오후 135분에 여성, 어린이, 환자, 고령자 등 인질 23명이 우선 풀려났다.

 

5.북한행

오후 159분 요도 호는 이타즈케 공항을 이륙하였다. 기장이 후쿠오카에서 받은 지도는 중학생 용 지도의 복사본으로 대단히 허술한 것이었다. 단지 이 지도의 구석에는 '121.5 MC를 감청하라'(MC와는 메가 사이클의 약어이며 현재의 메가헤르츠와 같다. 민간 항공 긴급용 주파수)라고 쓰여져 있어 기장은 이것에 따라서 비행했다.

 

요도 호는 한반도의 동쪽을 북상하면서 비행을 계속해 오후 240분 진로를 서쪽으로 변경했다. 그 직후 갑자기 요도 호의 오른쪽에 국적을 숨긴 전투기가 나타나 전투기의 조종사는 기장을 향해 엄지를 내리고 강하에 들어가라는 지시를 내리고 날아가 버렸다(국적을 숨기지 않고, 대한민국 공군의 표식을 한 전투기가 나타났다는 설도 있다).

 

요도 호는 북위 38도선을 넘어갔으나 휴전선은 38도선과 일치하지 않기에 아직은 한국 영공에 있는 상태였다. 또한 전술한 바로 미루어 볼때 요도 호는 이 당시 강원도 상공을 날고 있었다. 북한 영공에 들어왔다고 생각한 부기장은 지시받은 주파수로 맞춰놓고 영어로 "여기는 JAL 351" 이라고 무전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그 후 요도 호에 대해 "여기는 평양이며 진입 관제를 실시한다"라고 하는 무선이 들어왔다. 해당 무선은 주파수를 134.1MC로 바꿀 것을 지시한 다음 왼쪽으로 선회하여 북위 38도선을 넘어 남하하도록 유도했다. 이것은 한국 당국에 의한 것으로, 기체를 북한으로 향하지 않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범인들은 북한의 공용어인 조선어(문화어)는 커녕 영어도 잘 몰랐기 때문에 한국으로 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6.김포공항 착륙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착륙한 것은 오후 316분이었다. 소수의 대한민국 국군은 조선인민군 병사의 복장을 하고, 평양 도착 환영의 현수막을 내거는 등의 위장 공작을 실시했다. 그러나 범인들 중 한 명이 김포공항 내에 미국 노스웨스트 항공의 여객기 등이 주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해 여기가 평양이 아닌 서울임을 알게 되었다(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이상하게 생각한 범인들은 비행기에 접근해 온 사람에게 이곳이 평양이냐고 묻자 그 사람은 평양이라고 답했지만 범인들이 재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천리마 운동에 대해 묻자 상대는 답하지 못했고, 이를 수상히 여긴 범인들이 김일성의 큼직한 사진을 가져올 것을 요구하여 간파당하고 말았다(이 역시 여러가지 설이 있다).

 

7.한국 정부와의 교섭

대한민국 정부와 범인들은 영어로 교섭을 개시했지만, 범인들이 대부분 영어에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어를 통한 교섭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야마무라 신지로(山村新治郎, ja)운수성 정무 차관 등 일본 정부 관계자와 일본 항공 사원이 일본 항공 특별기 편으로 41일 서울에 도착해 한국의 정래혁 국방부 장관, 백선엽 교통부 장관 등과 함께 교섭하게 되었다.

 

8.교착 상태

요도 호의 부조종사가 범인들의 틈을 보고 기내에 있는 범인의 수와 장소, 범인들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내 외부에 알렸다. 대한민국 군 당국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특수부대를 투입해 진압을 검토했지만, 승객의 안전을 우려한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단념하였다.

 

한편 일본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과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 요도 호가 인질과 함께 북한으로 향했을 때의 보호를 북한 정부에 요청했다. 이에 대해 북한 당국은 '인도주의에 근거해, 만약 기체가 북한 국내에 착륙했을 경우 승무원 및 승객은 즉시 돌려 보내겠다' 고 발표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전년에 발생한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과 마찬가지로 요도 호의 승무원과 승객이 풀려나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요도 호를 북한으로 향하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일본측은 범인들이 승객, 승무원을 풀어줄 경우 북한으로 갈 수 있게 해 줄 것을 한국측에 강하게 요구했고, 한국측은 이를 받아들였다. 특히 요도 호에는 미국인 승객이 2명 있어 북한으로 가게 될 경우 적대국의 국민인 이들이 일본인들에 비해 가혹한 대우를 받을 우려가 커, 미국 정부의 압력도 있었다.

 

9.그 후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운수 대신도 1일 오후에 서울에 도착해 가네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주한 특명전권대사와 함께 대한민국 당국과의 조정에 임했다. 43일에는 일본에서 대한민국으로 건너가 교섭을 실시하고 있던 야마무라 신지로 운수 정무 차관이 승객 대신에 인질이 되는 것으로 합의하고 차관이 탑승하는 동안 승객들을 해방하였으며 마지막 승객 1명이 트랩상에서 바뀌는 형태로 해방이 행해졌다. 승무원 중 객실 승무원도 해방되었고 풀려난 사람들은 역시 일본 항공 소속의 B727인 히다 호(기체기호 JA8040)를 타고 귀국했다.

 

10.북한으로

43일 오후 65분에 요도 호는 김포 국제 공항을 이륙, 휴전선을 넘어 북한 영공에 들어갔다. 기장은 이 시점에서도 자세한 지도가 없었으며 북한 영공에 들어가도 무선의 응답이나 북한 공군기에 의한 요격 발진도 없었다. 평양 부근에 도착했을 때 해가 지고 있었지만 기장은 태평양 전쟁 중에 야간 특공대의 교관을 했던 경험을 살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던 작은 활주로를 이용하여 오후 721분에 착륙했다. 이 활주로는 평양 교외에 있는 한국 전쟁 당시에 사용되었던 미림비행장 철거지였다고 한다.

 

북한측은 범인들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여 범인들은 가지고 있던 무기를 비행기 밖으로 버렸는데 모두가 장난감이나 모조품 등이었음이 밝혀졌고, 범인 9명과 승무원 3, 야마무라 차관 등 총 13명의 신병은 북한측에 확보되었다.

 

44일 북한은 '인도적 관점에서 승무원 3명과 야마무라 차관, 비행기는 일본으로 돌려보내되, 비행기를 납치한 9명에 대해서는 조사를 할 필요가 있다'는 형식의 발표를 통해 납치범들의 망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우회적으로 표명했다.

 

11.망명 후 북한에서의 생활

다미야 다카마로를 비롯한 사건의 범인들은 북한 망명 후 세계혁명을 위해 자신들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실행할 것을 당국에 요청하였으나 거절되었다. 이들은 북에 거주하면서 주체사상을 받아들였는데 다미야 다카마로가 과거의 적군파 생활을 반성하고 주체사상으로 전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우리 사상의 혁명>이라는 저서는 국내에도 발간되어 주체사상을 지지하는 젊은이들에게 폭넓게 읽히기도 했다.

 

12.인질 석방

45일 요도 호는 세 승무원과 야마무라 운수성 정무차관을 태우고 귀환하였다.


타미야 다카마로(田宮高麿), わが思想革命ピョンヤン18手記(한국어판 우리 사상의혁명, 논장, 1989)

이들은 북에 거주하면서 주체사상을 받아들였는데 다미야 다카마로가 과거의 적군파 생활을 반성하고 주체사상으로 전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우리 사상의 혁명>이라는 저서는 국내에도 발간되어 주체사상을 지지하는 젊은이들에게 폭넓게 읽히기도 했다.

혁명은 인민을 위한 것이고, 각 지역 나라 혁명은 그 나라 인민에 의해 수행된다는 진리이며 특히나 교조를 극복하고 시대에 맞는 운동을 고민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그 원칙과 혁신지점을 주장하는 자국 사회주의 이론 김일성주의 주체사상이다


1970년 도쿄 하네다발 후쿠오카행 요도 호를 하이재킹 해 평양으로 간 일본 적군파의 리더 타미야 다카마로(田宮高磨)가 지은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6공화국 때 금서로 지정되었다.

 

이 책은 내가 새내기 편집자가 되어 처음 만든 책이다.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역자후기까지 썼고 표지 디자인까지 했다. 편집부 집단 번역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또 당시의 출판사에서는 편집과 편집디자인 업무가 명확하게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편집자가 표지 디자인까지 도맡는 일이 심심찮았다. 집단 번역(여럿이 나누어 번역)이거나 옮긴이 사정으로 역자후기를 쓸 수 없을 때 종종 편집자가 역자후기를 쓰는 일이 있다.

 

글이 날것처럼 거칠고, 얕은 공부와 어설픈 견강부회가 얼룩져 부끄럽지만, 어쨌든 내 영혼의 자식 중 하나이므로 후회하지는 않는다.

 

청년은세계의 비밀, 그 문을 여는 순간부터 반란을 시작한다. 그런데그것은 한낱 성()의 비밀을 알고 나서부터 유년시절부터가르침 받아온 동화와 도덕 또는 끊임없이 설교되어 온그 무엇무엇들에 반란하여 몽환과 유희의 흐드러진 세계로 몸과 영혼을 던지는 일 따위와는 다르다. 엄청난비밀, 당통(Danton)의 말을 빌리면 진실, 고통스러운 진실허위, 기만, 억압, 착취. 계급투쟁!

 

반동 지배계급, 방만한 이념 혐오자들이 지옥문이라 비아냥거리는그러나그것은 단순한 비아냥거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체포, 고문, 투옥, 처형이 있다그 문을 통하여 그들은 말 그대로 명()을 바꾸는() 피와 불의 항쟁 속으로 들어간다. 순응의 길과 반역의 길, 다른 길이 있는가? 물론 있다. 그러나 위대한 사회적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사상의 이름으로, 또한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이 목숨으로 증명한 명제, ‘중립은 배신이다.’

 

17세의 타미야 다카마로는 1960년 안보투쟁의 순교자 가바 미치코의 죽음을 보았다. 그 죽음은 타미야에게 있어서 목가(牧歌)와 화음(和音)이라는 위장된 세계를 때려 부수는 쇠망치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듣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나왔다. 엉뚱한 짓을 하는 정부, 경찰에 끝없는 분노를 느꼈다. 즉시 데모에 나가 경찰관을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1967108 하네다 투쟁 이래 1969년 동경대 야스다 강당 공방전으로 고양된 투쟁은 끊임없는 가두투쟁을 통한 거대한 정치적 위기의 조성(‘혁명의 기폭제’)으로 70년 안보결전을 수행하려는 타미야를 비롯한 전공투운동 참여자들에게 한편으로 하나의 두터운 벽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18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8천 명에 이르는 기동대에 의해 1만 발 이상의 최루탄 사격, 지상과 공중으로부터의 가스총 발사 그리고 80명의 사격대원까지 동원된전면적 투쟁압살공격을 해방강당에서 맞이하였다.”

 

이어서 야스다 투쟁에서의 최후 메시지는 그러나 끝까지 투쟁한다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후에 적군파로 모이게 되는 타미야를 비롯한 참여자들은 그 말의 뒤끝에 드리워진 무력감, 패배감에 주목하였다. 타미야는쓰고 있다.

 

이제까지의 방법으로는 결국, 마지막에는 기동대에 의해 진압될 뿐이다.”

 

투쟁수단의 질적인 비약을 선언하고 무장봉기의 관철을 슬로건으로 내걸은 적군파는 소위 그들의 돌출된 투쟁으로 인한 사면초가의 상황, 국제근거지론 등에 의거하여 요도 호를 공중 납치한다. 타미야는 전술좌익, 행동좌익으로서의 자신들의 행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단지 행동할 뿐이었다. 적군파까지,조선까지 질주해온 느낌이다.”

 

이 책은 적군파 노선이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라고 반성한다.1960년대 이래의 선진국의 신좌익 혁명운동에 있어서 정치적 입지라는 면에서 혁명적 정당의 개량화,그 다른 반향으로서 테러리즘으로의 길이라는 역사적 유물을 제대로 평가하려고 한다면 보다 정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건전한 상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사상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타미야는 시시콜콜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낱낱이 총괄한다. 일거수일투족, 생각의 마디마디에 대한 자기검증, 자기비판, 상호비판의 투철함이 엿보인다. 순수하고 이상주의적 반항에서부터 초과격 행동파로의 직선적 진행이 어떤 한 체계적인 사상을 기점으로 철저한 내연(內燃)이라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들은 주체사상의 몇 가지 핵심적 테제를 중심으로 총괄을 진행하고 있다. 주체철학의 기초범주들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면서, 일찍이 타미야 자신이 겪어온 사학동(社學同), 공산동(共産同), 적군파에서의 조직생활과 전략전술 등을 하나하나 총괄해 가고 있다. 철학적 기본원칙에서부터 스스로를 재교육하는 타미야와 그의 동지들의 이러한 총괄은 일본 신좌익의 혼란스러운 종파성과 철학의 빈곤, 사실상 건강한 혁명운동의 파탄인 극좌폭동주의, 테러리즘적 경향 등소부르주아 급진주의를 청산하는 데 상당한 성과를 획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로서는 이러한 적군파 노선에서 주체사상으로의 사상적 총괄 자체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데,이것은 매우 중요하고도 민감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주체사상의 중심 테제를 사상적 기조로 하여 소부르주아 급진주의 청산에 일정한 의의를 획득했다는 데서 더 나아가 우리로서는 그들이 받아들인 주체사상의 정당성 문제가 더불어 제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튄 이 논쟁적인 불똥을 이 지면에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책에서 타미야는 거의 교과서적인 주체사상의 원리들을 구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단 타미야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서 자신들의 총괄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에 국한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한편 20년 가까이 되는 세월 동안의 집중적인 사상교양을 일단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기회에, 보다 구체적인 내용들(그들은, 말하자면 일본 혁명노선에 있어서 주사파인 셈인데, 따라서 그에 입각한 일본의 사회성격이라든가 일본 혁명의 방향이라든가 하는)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 의아하게 생각되기도 한다.그들의 다른 글을 통해 이러한 문제가 보다 자세하게 파악되어야 하겠지만 아직은 알 수 없다.

 

적군파는 요도 호 사건 이후 최근까지도 활동했다고 한다. 외신을 통해 간헐적으로 전해진 그들의 활동은 국제적인 테러 활동의 동조 및 지원, 일본 국내에서 로켓포에 의한 공항 포격 등이었다. 여행자들에 의하면 주요 대도시에 그들의 선전 및 공격 목표를 제시하는 대자보, 유인물이 눈에 띄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

                                                                                           납치 전인 196881,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찍힌 사진.


1.개요

요도 호 사건 혹은 요도 호 납치 사건이라고도 한다. 1970년 일본 공산주의 동맹 적군파(赤軍派)라 칭하는 요원 9명이 승객 등 129명을 태우고 하네다 국제공항을 출발, 후쿠오카 공항(福岡)으로 향하던 일본항공(JAL) 소속 보잉 727 여객기를 납치해 북한에 망명한 일본 최초의 항공기 공중 납치 사건이다.

   

2.과정[편집]

(1)공중 납치 실행

1970331일 오전 733분경 타미야 타카마로(田宮高磨) 등 일본 공산주의 동맹 적군 파(赤軍派) 요원 9명이 도쿄발 후쿠오카행 일본항공 351편 요도호(기체 등록번호: JA8315)를 공중 납치했다. 극좌 조직이던 적군파는 납치 사건을 벌이기 전() 경찰서 습격사건 등으로 일본 정부의 수사를 받으며 조직이 와해되는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요도 호에는 승무원 7명과 승객 등 129명이 타고 있었다. 납치범들은 일본도와 권총, 폭탄 등의 무기를 들고 승객들을 창가로 몰아세운 뒤 로프로 포박, 기장을 위협하여 북한의 평양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2)이타즈케 공항으로

                                                                                            비행기에서 풀려나는 인질들

이 요구에 기장은 "이 비행기는 국내선이라 북한까지 갈 연료가 없다"고 범인들을 설득했고(실제로는 북한까지도 갈 수 있는 연료가 충분했다), 연료의 보충을 위해 오전 858분 경 이타즈케 공항(현 후쿠오카 공항)에 비행기를 주기 시켰다. 일본 경찰은 범인들이 국외로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위대를 보내 활주로를 막는 등의 공작을 펼치지만, 오히려 범인들을 더욱 자극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장은 범인들을 설득시킨 끝에 여성, 노인, 어린이, 환자를 포함한 인질 23명을 풀어주고 다시 평양으로 갈 것을 요구하며 이항했다. 대한해협을 지나는 도중 범인 그룹들은 승객들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들을 읽고 싶으면 빌려주겠다."고 얘기하였는데 그 책들은 적군파의 기관지 '적군(赤軍)', 레닌 전집, 김일성 전기,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등이었으나 승객들 중 책을 빌린 사람은 후에 나오는 의사 히노하라 시게아키뿐이었다고 한다.

(3)김포국제공항 도착

                                                                                 김포국제공항에 주기중인 요도호를 감시 중인 국군

요도호는 실제로 38도선은 넘었다. 그러나 휴전선이 완전히 38도 선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행기는 아직 대한민국 영공에 있었다. 하지만 38도선을 넘자 북한에 도착했다고 생각한 기장은, 영어로 "여기는 JAL351"이라 신호를 보냈으나 응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여기는 평양 진입 관제"라는 수신이 들어와 지시대로 남쪽으로 회항하였는데 이것은 범인 그룹들을 속이기 위해 한국 측에서 기지를 쓴 것이었다. 망명을 원하면서 정작 북한과 같은 말을 쓰는 한국어조차 전혀 모르던 범인 그룹들은 아무 의심을 가지지 않았고, 인천 앞바다를 거쳐 331일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비상 착륙했다. 추후 범인들은 그들이 착륙한 곳이 평양이 아님을 안 후, 승무원과 승객을 인질로 잡고 북한까지 안전한 비행 보장을 요구했다.



 

당시 이 적군파들의 목적은 북한의 체제를 지지해서가 아닌 "일본을 혁명하기 위한 배후지"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북한을 자신들의 군사 기지로 만들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북한을 뒤집어 엎어서 자기네 땅으로 만든다는 게 아니라, 김일성이 북한 정권을 발족하면서 민주 기지론을 내세웠듯이 일본에서 혁명을 하기 위해 북한을 전진 기지로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매우 비현실적이었으며 실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래저래 국제 현실을 물렁하게 본 것. 이들의 범행 선언 중에 "우리들은 내일의 죠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 문구는 최근에 주범들이 개설하여 함께 갱신하고 있는 트위터 프로필 문구에도 쓰여져 있는데, 나이가 노년에 들어도 아직까지 철이 덜 든 듯 하다(...).

 

이들은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해서도 한참 동안 속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매우 철저한 위장을 했기 때문에 북한 인민군 복장도 준비하고, '환영 평양 도착' 식의 플래카드까지 걸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적군파 대원들이 북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에는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먼저 간단한 한국어도 못하는 그들이 한국측 요원에게 어느 말로 했을지(...)부터가 의문이다. 설령 요원과 일본어, 혹은 영어로 대화했다면 요원 측에서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라 잘 못 알아들은 척 얼버무리면 저런 해프닝은 간단하게 막을 수 있기 때문. 아래 후술되지만 테러범들은 영어도 잘 못했으며, 그래서 결국 일본어로 교섭에 나섰다는 이야기가 있다.

 

때문에 김포공항에 주기 중이던 미국 항공사 노스웨스트 항공의 민항기를 보고 알아차렸다든가, 흑인인 미군 병사를 보고 의심을 했다든가 하는 의견이 있다. , '긴 닛세이(김일성)의 커다란 사진을 가지고 오라'라는 요구에 북한과 적대국이던 한국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기에 위조 공작이라는 걸 알아챘다는 말도 있다. 일단 위에 사진 속 군인이 칼빈을 들고 있다

 

한편 범인 그룹들이 인질을 살해하는 등의 최악의 상황으로 진행할 경우 한국 군경측에서는 특전사 및 전투경찰, 헌병부대를 요도호에 투입해 진압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당시에는 전세계적으로 전문적인 대테러부대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고, 이런 항공기 인질극 상황에 대한 준비와 대응 매뉴얼조차 없던 때라서 만약 무작정 투입됐다면 범인들뿐 아니라 다수의 인질들도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수 있다. 한국의 전문 대 테러 부대인 특전사 707특임대나 경찰특공대는 1980년대에 창설되었다. 707특임대 이전에도 특전사에 606부대(1975년 창설된 대 테러 및 청와대 경호 부대)27 특공 부대(1979년에 창설된 청와대 경호 부대)가 있었지만 이 사건이 발생한 1970년도엔 이들 부대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때다. 그리고 1970년에는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대 테러 부대라는 개념조차 거의 없었던 시절이다. 현대 특수부대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영국의 SASIRA와 교전을 벌이면서 막 대테러 전술을 연구하기 시작할 때로, 최고의 군사 선진국인 미국에서 조차도 전문 대테러 부대는 아직 없었다. 당장 요도호 사건 2년 뒤인 1972년에 벌어진 뮌헨 올림픽 참사를 겪은 뒤에야, 전문 대 테러 부대의 필요성을 깨닫고 세계 각국에서 부랴부랴 대테러 전술 개발 및 부대 창설에 나섰다.

(4)교섭

한국 당국은 범인 그룹과 영어로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범인 그룹들은 영어조차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대화가 성립되지 않아 결국 일본어로 교섭을 시도하였다. 범인들은 다시 바로 평양으로 떠날 것을 요구했는데 멈춘 엔진을 재가동 시키기 위해선 보조 시동기가 필요했지만 한국 측에선 보급을 거부하여 그대로 서울에서 교착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나온 범인들이었으나 곧 교섭에 응하여 식사등을 넣어주었다.

 

31일 저녁 일본항공 특별기가 야마무라 신지로(山村新治郎) 운수성 정무차관 등 일본 정부 관계자와 일본항공 직원을 태우고 도쿄 하네다 공항을 이륙하여 1일 새벽 서울에 도착했다. 이어 1일 오후 하시모토 도미사부로(橋本 登美三郎) 운수성 장관 및 가네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주한특명전권대사가 서울에 도착했다.

 

우리 정부에서는 정래혁 국방부 장관, 백선엽 교통부 장관, 박경원 내무부 장관이 협상에 참여했다.

 

사흘에 걸친 협상 끝에 범인들은 탑승객 전원을 석방하는 대신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을 인질로 맞교환했다. 79시간 만인 43일 오후 65, 범인 그룹 9명과 조종사 3, 그리고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 등 13명이 탑승한 요도호는 김포공항을 이륙하여 1시간 반 후 북한 미림 비행장에 도착했고, 범인 그룹은 북한에 망명하였다.

 

3.평양 도착

오후 720분경 요도호는 평양의 미림 비행장에 착륙했다. 이미 해가 진 후였는데, 미림 비행장에 유도등 등 야간 항공등화시설이 없어서 요도호 기장이 예전 2차 세계대전 당시 야간 특공 항공대 경험을 살려 육안으로 야간 착륙을 시도했다고 한다.

 

착륙 후 북한 측은 무기 등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여 범인들은 무기들을 놓고 비행기를 내렸는데, 범인들이 소지한 일본도, 권총, 폭탄 등은 전부 장난감이었다는 것이 후에 알려졌다

 

요도호에 타고 있던 범인 그룹 9, 승무원 3, 인질인 야마무라 차관, 13명은 북한 당국에 의해 신원이 확보되었다.

 

한편 서울 김포공항에서 해방된 99명의 승객들은 일본항공 특별기 DC-8 -62(JA8040)를 타고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NHK가 오후 7시반에 내보낸 특별 방송 '요도호 승객들 돌아오다'40%가 넘는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애초에 북한은 "인도주의적 차원에 따라 범인 그룹들을 뺀 승무원과 기체는 돌려보내겠다."고 했으나, 요도호가 도착하자 곧 말을 바꾸어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승무원과 기체의 빠른 송환은 보장할 수 없다."고 발표하여 일본 측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았다. 결국 한 발 물러나 꼬리를 내린 북한은 다시 "인도주의적 관점에 따라 승무원과 기체의 송환을 행하겠다."고 입장을 번복했다

 

다음날 범인들을 제외하고 조종사 3명과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은 요도호를 타고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십 년이 흐른 1980년대에 주모자 등 3명이 사망하고 당시 16세였던 1명은 1988년 일본에 잠입해 지하활동을 벌이다 유일하게 체포돼 형기를 마치고 석방됐다. 1명은 20006월 태국에서 달러위조 혐의로 체포되어 일본으로 송환돼 재판을 받았다.

 

일본 공안당국은 현재 북한에는 나머지 4명의 범인과 일본인 처, 20여명의 자식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이들이 납치범(테러리스트)이므로 인도해 줄 것을 북한에 꾸준히 요구해 왔으나 북한측은 이를 거부해 왔다. 그러나 2001년부터 북한은 요도호 납치범 가족의 귀국을 허용하여, 몇 차례 귀국이 이루어졌으며, 20047월 북한은 요도호 문제는 일본 정부측과 이전의 적군파 구성원들 사이의 문제라며, 납치범을 일본으로 보낼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한국 정부는 수년 전 만경봉호를 통해 북한으로 수많은 재일 동포를 북송시킨 것에 대해 일본정부를 마음놓고 깔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은 한국과의 외교 교섭에서 커다란 빚을 지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결국 대부분의 인질을 구출한 곳은 한국 김포공항이다.

 

그뿐만 아니라 테러범들에 대한 한국 측의 대처는 당시 일본의 큰 호감을 샀다. 일제 패망 이후 일본은 대학생들에게 '지도에서 한국을 찾아보라' 하니 대다수가 위치를 몰라 애먹을 정도로 아예 한국에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나마 6.25로 특수를 누린 일본이기에 그 정도는 인식하고 있는 정도 때문에 테러범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일본에서는 "휴전 중인 나라에다 군사정변도 있었다니 그냥 다 쏴 죽이지 않을까?"하는 우려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은 간단한 방법으로 테러범을 속이려 들었고, 그것이 먹히지 않았을 때도 무차별 무력진압이라는 카드를 꺼내지도 않았다. 결국 일본 측이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승무원을 제외한 인질 전원이 한국에서 풀려나게 되어 이것이 일본 측의 호감을 사게 된다. 이 점은 이후 한일간 외교교섭들에서도 한국 측에 유리하게 작용되었다고 한다.

 

당시 요도호 탑승자 중의 한 명인 의사 히노하라 시게아키(日野原重明)1911년생으로 일본에서는 최근까지도 요도호 사건 관련의 방송에서 이 히노하라가 당시 피랍된 기내의 상황 설명에 증언자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2017718일 만 105세로 별세[성인병 전문가로 일본에서는 나름 유명한 인물이었으며, 책도 많이 쓰고 감투도 많이 썼다. 84세 때인 1995년 자신이 원장으로 있던 성누가병원을 옴진리교 가스테러 사건때에 개방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사건 당시 인질로 북한에 갔던 야마무라 신지로 차관은 일본으로 귀국하자마자 평생 까임방지권을 얻게 되었다. 목숨까지 희생될 가능성은 적었지만 미수교국인 북한과의 협상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적어도 수 개월간 인질 생활을 감수해야할 가능성이 높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에 영구 억류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은 처음에 야마무라 차관과 조종사들을 북한에 억류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야마무라 신지로는 나중에 농림수산성 장관을 지내는데이후 중의원 당선도 되고 잘나가다가 1992년 외교사절로 재방북을 하루 앞둔 때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차녀의 칼에 찔려 사망하게 된다.


4.북한으로 망명한 적군파 조직원


타미야 타카마로

코니시 타카히로 (小西隆裕) - 현재도 북한 거주중. 국제지명수배중이다. 타미야 사망 뒤 멤버들의 리더격인 듯 하다.

오카모토 타케시

타나카 요시미 (田中義三) - 북한을 벗어나 태국 등에서 범죄에 가담하다가 2000년 일본에 송환되어 수감 중 2007년 병으로 사망했다.잘 뒈졌다

우오모토 (아베) 키미히로 (魚本 (安部) 公博) - 현재도 북한 거주 중. 일본인들을 북한으로 납치하는 북한 공작원 활동에도 관여하여 인터폴에서 국제지명수배 중이다.

와카바야시 모리아키 (若林盛亮) - 북한 거주 중. 2010년 일본의 어느 사이트에 'ポンさん'[7] 이라고 불리는 드러머의 추모글을 올렸다. 부인은 유럽에서 일어난 일본인 납북 사건의 용의자로 국제 지명수배 중이다.

아카기 시로 (赤木志郎) - 북한 거주 중. 현재 인터폴에서 국제지명수배 중이다.

요시다 킨타로 (吉田金太郎) - 1985년에 병으로 죽었다는 설이 있지만, 상세한 것은 불명이다. 북한의 악명높은 정치범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설도 있다.

시바타 야스히로 (柴田泰弘) - 사건 당시 16(2)로 나이가 제일 어린 멤버였으며 85년 타미야 타카마로에게 일본으로 건너가 돈과 사람을 모집하라는 지령을 받고 극비 귀국, 타인으로 변장하여 공작원 활동을 펼쳤으나 85년 위조여권 혐의로 체포. 복역 뒤 오사카에 살고 있었지만 2011년 사망했다. 자녀들은 한참 후인 2004년 경 일본으로 귀국했다.

 

북한에서 낳은 범인들의 자녀들은 현재 전부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5.적군파 주범들의 근황

                                                                                 트위터 프로필 사진에 있는 최근 모습.

최근 적군파 범인들이 북한에서 트위터를 개설한 사실이 알려졌는데, 북한 내에서 인터넷에 활발히 접속할 정도로 매우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위터 글에 의하면 일본의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도 자유롭게 듣고 보고있으며 미국 등의 외국 영화와 매체 또한 자유로이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직접 업로드가 아닌 그들의 지원자라는 인물에게 메일로 올릴 글을 보내고 다른 이들의 답글이나 질문도 메일을 통해 송신하는 방식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원자 시이노 노리타니(椎野礼仁)2015년 현 리더인 코니시 타카히로가 NHK 뉴스를 통해 아랍의 민주화 운동에 트위터가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을 보고 '트위터를 해보고싶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트위터 프로필에는 "1970年赤軍派によるyodoハイジャック。「々は明日のジョーである!」北朝鮮って40数年yobo yobo[9]拉致容疑yobo yoboでもyodoyodo! でもいてってくださいでもえます拉致疑惑帰国朝鮮での生活あれこれ日本のことでもありでいきます라는 어딘가 정신나간 문구가 쓰여져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에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다. 트위터는 생존해있는 요도호 멤버들과 국제지명수배된 그들의 부인들이 돌아가면서 글을 올리고있고, 글 마지막 문단엔 글쓴 본인의 이름을 써넣는다.

 

2016415일자 트윗으로 분명히 하이잭 사건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소중한 건 교훈이다. (중략) 하지만 지금이니까 말할 수 있어. '낙원'따윈 모르지만 북한에 온 것은 정답이었다.라는 글을 올려 충격과 공포를 주고있는 중.

 

또한 "당신들이 북한에서 골칫거리 취급 받는 건 알고 있나요? 목숨이 남았을 때 귀국하는 게 어떨까요"라는 일본인의 질문에 북한에 민폐만 끼쳐 죄송할 따름이다. 한국과 일본에게 이용당할 대로 이용당한 요도호 사건의 재평가를 하루라도 빨리 실현하기 위해 귀국하고 싶다 라는 글을 올리거나 "북한에선 의료와 교육이 우리 망명 외국인에게도 모두 무료라 감사하다", "매스컴은 20년전 비참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 정보만 계속 내보내고 있다"라는 등 북한에서의 생활을 찬양하는 트윗을 올리면서 일본인들에게 각종 어그로를 끌고있는 중이다.

 

'안락한 망명객으로 (북한에서) 평생 살 생각은 없으며 귀국하는 게 목표'라는 글을 보아 일본으로 되돌아 가고 싶어하는 것 같긴 하다. 일본의 반응은 "돌아오지 말라"며 매우 싸늘한 분위기다. 현재 살고 있는 곳은 평양의 '일본인 마을'이라고 적혀있으며, 납북 일본인들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사실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와는 별개로 그들이 "여기 온 것은 실수였다""북한의 대우는 엉망이다"라고 제대로 발언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다름 아닌 북한이라서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목숨이 날아갈 테니 말이다. 아니면 드레스녹처럼 실제로 제법 호의호식하고 있을 수도 있다.

6.기타

(1)범인들에겐 평양에 가는 것만이 목적이었고 인질들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어 빨리 풀어주었다 보니 하이잭 사건 치고는 비판이 덜 가는 편이다. 사실 같은 적군파 출신자가 일으킨 여러 사건들에 비하면 굉장히 무난하게 끝난 것이기도 하다.

(2)이 때 만약 대한민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했다면 사건이 해결됐을거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애초에 테러리스트가 장난감 무기를 들고 있을거라는 걸 예상하지도 못했고, 무엇보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 일본 정부가 무력 진압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무력진압하려 했으면 후쿠오카 공항에 착륙했을 때 진압했을 것이다.

 

   

-우파 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 이론[民營資本體制]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 [일본국 헌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 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상기의 원리들과 각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보편적 이념에 입각하고 그들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 평등· 박애를 국시로 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원칙으로 한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개인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이를 준수하며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국민투표와 자유선거는 국민에 의한 최고의 직접적인 권력행사이다.

러시아연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이 허용된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국가이념이나 의무적 이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

러시아 연방에서는 정치적 다양성과 복수정당이 허용된다.

모든 사회단체들은 법앞에 평등하다. [러시아연방 헌법]

*미합중국 헌법[민주국가 헌법]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http://blog.daum.net/007nis/15876066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전문

http://blog.daum.net/007nis/15871495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독일 바이마르 헌법(1919)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로부터 해방법률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독일 통일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048

*군국주의 대일본제국 헌법 전문과 평화주의 입헌군주제 일본국 헌법 전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4623

*러시아 연방 헌법[Конститу́ция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72

*中華民國 憲法(중화민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57658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http://blog.daum.net/007nis/15875575

*몽골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1736


-좌파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 이론[國營資本體制]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라오스 그리고 쿠바 등 5개국에 불과하다.[노동계급의 노농동맹(공산당) 령도(領導, 지도) 인민의회정부론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 국가](많은 분들은 노동자 국가를 지향ㄹ하고 있는 이탈리아 파시즘이나 독일 나찌즘을 극우라고 표현하지만 좌익 파시즘으로 표현하고도 있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3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69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3485

*베트남 헌법(2013년 개정)[민주공화국 형태 사회주의 헌법]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는 인민에 의한(民治), 인민을 위한(民享) 인민의(民有) 사회주의 법치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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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3공화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476


1957년 10월 15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중공중앙)이 ‘우파분자 분류 표준에 관한 통지’를 발표하였다.[모택동주의 노선 중국 공산당이 분류한 자본주의민주주의 세력(수정주의자) 우파와 극우세력 동향]
이에 따른 우파는 다음과 같다.
1) 사회주의 제도를 반대하는 자 .
2) 무산계급의 독재와 민주집중제를 반대하는 자 .
3) 공산당의 국가 정치생활 중의 영도적 지위를 반대하는 자 .
4) 사회주의와 공산당을 반대함으로써 인민의 단결을 분열시키려는 자 .
5)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공산당을 반대하는 소집단을 조직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 일부 분야 혹은 일부 계층 단위에서의 공산당의 영도를 뒤엎으려는 자 공산당과 인민정부를 반대하는 소란을 선동하는 자.
6) 앞에서 규정한 우파분자의 범죄활동을 지지하고, 관계를 맺으며 또 통신하여 혁명조직의 기밀을 보고하는 자.

통지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극우분자로 분류했다.
1) 우파활동 중의 야심가, 지도분자, 주모분자와 핵심 분자.
2) 공산당과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강령성 의견을 제출하고 이 같은 의견을 적극적으로 고취한 자.
3) 사회주의 반대활동에 특별히 악랄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한 분자.
4)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반공산당, 반 인민 활동을 전개해 왔으며 최근의 우파활동 전개 시에 적극적으로 반동활동을 한 자.


중공중앙의 이 통지는 반우파 투쟁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건국 후사회주의 개조과정에서 후펑(胡風본명은 장광런張光人) 비판 등의 부르주아사상 비판 캠페인으로 위축되어 있었던 지식인의 활동을 적극화시키기 위해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운동을 제창했다.
중국문화가 꽃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자유로운 언론활동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마오쩌둥(毛澤東)이 명명했고, 1956년 5월 중국공산당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가 '백화제방·백가쟁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지식인의 자유로운 발언을 호소했다.
당초 지식인의 반응은 매우 소극적이었으나 1957년 5월 '언자무죄(言者無罪 : 무엇을 말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라는 방침에 고무, 일제히 발언하기 시작,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속출했다.
마오의 생각은 이 운동을 통해 이왕의 사회주의 건설을 정당화하고 강화하자는 것이었으나 순식간에 체제를 부정하는 단계로까지 치닫자 자신이 고무한 이들의 발언을 "'우파' 분자에 의한 반당·반사회주의적 '독초'"라고 매도하고, 같은 해 6월 '반우파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의 모순을 비판했던 공산당원들 다수가 반우파 분자로 몰려 숙청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였다. 29세이던 1957년 당적박탈과 강등 조치를 당한 주룽지는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이 ‘우파분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5년 동안 노동개조를 받기도 했다. 그는 마오쩌둥이 사망한 2년 뒤인 1978년 당적을 회복하고 사회과학원 공업경제연구실 주임에 임명되면서 ‘개혁 총리’로서의 미래를 예비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일본 공산당 "2단계 민주연합정부론과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

http://blog.daum.net/007nis/15875883

일본 공산당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당의 기본 방침으로 한다

일본 공산당은 2단계 혁명이론 NLPDR노선으로 우선 대미 종속과 대기업의 지배에 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로 한다

1단계로는 반미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며 2단계로는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다

1단계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革命)

20041월 제 2 차 당대회 개정 강령에서 일본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社會主義 革命)이 아니며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 革命)과 민주연합정부(民主聯合政府)'의 목표로 내세웠다

대기업 재계와 대미 종속 세력으로부터 일본 국민(日本 國民)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에 권력 이양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이라고 평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대기업 재계와 대미 종속 세력에서 일본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으로의 권력 이양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 공산당은 현재 일본 사회가 요구하는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다음의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하였다

.국가의 독립 · 안보 · 외교 분야(分野)

대미 종속을 타파하고 미일안전보장조약(日米安全保障条約)의 폐기(廃棄)와 비동맹(非同盟중립(中立)의 일본을 실현한다. 미국과 대등 평등(対等平等)

의 우호 조약(友好条約)을 맺는다 등등

.헌법(憲法)과 민주주의(民主主義) 분야(分野)

()헌법 전문을 포함한 모든 내용을 지키고, 특히 평화적 민주적 조항(平和的民主的諸条項)의 완전한 이행을 목표로 한다.

()의회 민주주의의 체제 반대 당을 포함한 복수 정당제 선거에서 다수를 얻은 정당 또는 정당 연합이 집권하는 정권 교대(政権交代)는 당연히 견지한다.

()18세 선거권을 실현한다.

()일본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억압하는 모든 시도를 제거한다. 남녀평등(男女平等)의 권리(權利)를 모든 분야에서 옹호하고 지킨다.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고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에 철저를 도모한다. 등등

.경제적 민주주의(経済的民主主義)의 분야(分野)

()장시간 노동과 일방적 해고 규제를 포함해 유럽 주요 자본주의 국가와 국제조약 등의 도달점도 근거로 '규칙 있는 경제사회'를 실현한다.

()대기업(독점 자본)에 대한 다양한 민주적 규제(民主的規制)와 군축(軍縮), 불필요한 공공 사업의 중지, 대기업 · 재벌 우대 세제의 재검토를 재원으로 한 사회보장의 충실 등등.

 

이상(以上)의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革命)에 의해 일본은 미국의 사실상의 종속국의 지위에서 벗어나 진정한 주권을 회복하고, 국내적으로도 국민이 처음으로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 또한 일본은 군사적 긴장의 근원임을 멈추고 평화의 견고한 초석으로 바뀐다.

 

이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 革命)에 대한 입장 1961년 강령에서는 ""일본의 당면한 혁명은 미국 제국주의와 일본의 독점 자본의 지배, 두 적()에 반대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 인민민주주의 혁명(人民 民主主義 革命)이다"라고 되어 있고, 1994년의 강령까지 거의 동일한 표현을 했다

2004년 강령 개정 당시에는 '다수자 혁명'이나 '의회의 다수를 얻어 혁명의 노선'이라는 설명이 이루어졌다

 

민주주의 혁명의 과정: 통일전선에 근거한 민주연합정부(民主連合政府) 구상(構想)

일본 공산당은 일본 공산당(日本共産党)과 통일전선(統一戦線)의 세력이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 국회에서 안정된 과반수를 차지한다면 통일전선(統一戰線)의 정부(政府) 즉 민주연합(民主聯合) 정부(政府)를 만들 수 있다는 입장으로 단독 정권(単独政権)이 아닌 통일전선(統一戦線)에 기반한 연합정권(連合政権)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회를 명실상부한 최고기관으로 하는 의회제 민주주의 체제(議会制民主主義 体制)

, 반대당(反対党)을 포함한 복수정당제, 선거에서 다수를 얻은 정당 또는 정당연합이 정권을 담당하는 정권교대제(政権交代制, 정권교체)는 당연히 견지한다.

 

'통일전선(統一戦線)'은 역사적으로 1945년의 강령에서는 모든 민주주의 세력의 결집에 의한 인민전선(人民戰線)의 결성올바른 실천적 목표 아래 협동할 수 있는 모든 단체 및 세력과 통일전선(統一戰線)의 결성한다고 되어 있다

1947년의 강령에서는 광범위한 민주전선으로 1961년부터 2004년까지 강령에서는 '민족 민주 통일전선(民族民主統一戦線, NLPDR)'으로 표현 되었다

'민족민주통일전선 정부(民族民主統一戦線政府)''혁명정부(革命政府)'로 전환한다고 하고 있었지만, 2004년 강령 개정에서는 이 규정은 삭제 되었다.


2단계 사회주의적 변혁(社会主義的変革)

일본 공산당은 즉각 민주주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의 합의를 전제로 국회의 안정된 과반수를 얻어 사회주의를 위한 권력을 만들고 다음의 사회주의적 변혁(社会主義的変革, 사회주의 국가)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극복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社會)로의 진전(進展)을 도모(圖謀)

.주요 생산 수단의 소유, 관리, 운영을 사회의 손에 옮기는 생산수단(生産手段)의 사회화(社会化)

.민주주의와 자유의 성과(成果),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 있는 성과(成果)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발전시킨다

.사상 신앙의 자유, 반대 정당을 포함한 정치 활동의 자유를 엄격하게 지킨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사상 신조의 자유, 반대 정당을 포함한 정치 활동의 자유는 엄격하게 보장된다."며 일당 독재(一党独裁制)와 지도 정당제(指導政党制)는 채택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또한 소련형 사회주의(連型社会主義)의 관료주의·전제(専制)의 잘못은 반복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언"에 더 자세히 설명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이념적인 내용이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헌법(憲法), 정부(政府), 군비(軍備), 의회(議会), 사유 재산제(私有財産制)의 범위 등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일본 공산당은 이러한 미래 세대가 창조적으로 해결 과제이며, 지금부터 고정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가 고도로 발전하면 착취와 억압을 모르는 미래 세대는 "원칙적으로 일체의 강제가 없는 국가 권력 자체가 불필요하게 되는 사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도 없고 억압도 전쟁도 없는 진정한 평등 자유로운 인간 관계로 이루어진 공동 사회에 대한 전망이 열린다고 한다.

또한 이 사회주의적 변혁'1961년 강령에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표현이었다는 것으로, 1994년에 사회주의적 변혁이라는 표현으로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의 낮은 단계이다라고 하는 두 단계 발전론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정설이었으나 마르크스, 엥겔스 자신은 그런 구별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두 단계 발전론을 그만두고 2004년 강령 개정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라는 표현으로 변경되었다 .



                                                                                                일본 마오(모택동)주의자 적군(赤軍, 붉은군) 모습

 

일본 적군(日本赤軍,영어: Japanese Red Army, JRA)은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1969년 조직된 일본의 공산주의 무장단체였다.

1969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일본적군은 경찰에 의해 대부분의 멤버들이 검거되었으며, 설립자인 시노미 다카야는 1970년 검거되었다. 적군파는 200명의 조직원을 잃었으며, 극소수는 19717월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주석의 사상을 표방하며 연합 적군을 결성하였다

 적군은 1972년 겨울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유명해졌는데, 사건 당시 수백 명의 경찰이 일주일간 포위하였다. 사건이 해결된 후 경찰에 의해 아사마 산장 사건 시 대치상황 가운데 사상단결을 목적으로 29명의 적군파 대원중 14명의 적군파 대원을 잔혹하게 살인한 것이 드러나면서 일본 내의 광범위하게 걸쳐있었던 적군파 일원들은 회의감에 사로잡혀 대부분 전향하거나 적군파 관련 작업을 그만 두었으며 일본 적군파가 해산된 제일 큰 원인이 되었다. 그 후 시게노부 후사코가 열성적인 멤버들만을 데리고 일본을 떠났다. 그녀는 40여 명의 지도부와 로드 공항 공격을 감행하였는데, 이는 세계적인 과격 좌파 집단의 무장중 하나로 가장 유명하다. 1971년부터 일본 적군파는 팔레스타인 자유 민중 전선과 긴밀한 유대를 가졌으며, 연합 적군은 1972년 사라졌다. 시게노부 그룹은 팔레스타인 전선(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의 지원을 받았다.

 일본적군파의 공산주의 이념은 각 대원에 따라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랐으며, 자본주의 체제의 입헌군주제인 일본 정부를 전복시키고 사회주의 체제의 공화제 정부를 세운다는 세계적인 혁명을 실천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반제국 국제 동맹, 성전 동맹, 반전쟁 민주 전선 으로도 알려져있다. 20014, 시게노부는 검거 상태에서 적군파의 해산을 선언함으로 이슈화되었었다

 

-일본은 빨간색 1960 년대 일본, 중국은 파도가 아시아, 일본 청소년의 시간이 좌회전 선택해 아프리카 독립 운동, 베트남에 군사 행동에 미국에 없는 외국인에 급증, 적조의 라운드를 출발했다.

 의식의 일본 마스터 스트림 - 오에 겐자부로 많은 소설, 다음 일본어 좌파 운동 설명의 전면과 측면이 있다. 그들이 수집 할 때 손을 어깨에 손을 옆 어깨, 사람, 그리고 흥분 도쿄, 교토, 오사카, 오키나와 거리에서 걷고, 반미 구호를 외치는 모습.

     그 당시 텔레비전, 라디오, 자주 중국으로 중국의 문화 혁명 운동에 보고 된 신문, 이 보고서는 반복적으로 혁명적 열정 일본 청소년의 그 20 년 된 충동과 열정, 그리고 자기 희생을 자극했다. 일본의 공산당 "모택동(마오)" 많은 수의 "최상위"과 문화 혁명의 다른 문학, 촉매이 열정을 인쇄 할 수있는 기회를 했다, 중국이 젊은 사람들의 흥분은 일본에서 그 꿈을 스포츠로 복사된다. 물론, 또한 일본 당국이 또 다시 충돌을 생성한다. 청소년의 불만은 점차 힌트를 구입하는 미래에, 충돌시 더 과감한 행동을 증가했다. 붉은 군대는 그 시대에 태어났다.

1960 년대의 학생 운동이 점차 퇴조로 이동 한 후, 1960 년대 후반과 1970 년대 초반은 일본 적군은 역사의 무대를 시작했다. 붉은 군대의 구성원은 학생 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회원이었다. 억압 당국, 그리고 나중에 어떤 사람들은 무장 극단의 길을 갔다하기 때문에, 적군 파 조직과 태어났다 "항일 무장 동쪽 전면을."

후자의 일본 기획 폭발, "興亞觀音像"(일본군에 의한 난징 대학살 난징 명령 사령관 마쓰이가 내장 점유하는 경우) "7 명 순교 기념비"를 포함하여 일련의 폭발에 구현 (동부 도조 등 A 급 전범 영적인 편안함 기념물), MHI 폭탄 테러의 구현 (그들은 큰 사업 군인의 선발대의 제국 주의적 약탈의 구현 생각), 쇼와 천황 열차 폭발 (실패)의 암살을 계획. 붉은 군대는 국내 억압의 경우, 해외에 의존 된 세계에서 혁명 기본 영역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북한에 1970 년에 납치되어, 1971 년 어떤 사람들은 지역의 게릴라 전투와 함께, 중동에 갔다.

 


    

일본의 신좌파

1.기초개념

사회주의,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 트로츠키주의, 마오주의, 무정부주의, 좌파공산주의, 반레닌주의, 반스탈린주의, 구조개혁, 기성우익, 신좌파, 극좌

2.주요 당파·단체

(1)혁공동계

4인터내셔널, RCL, 전국협의회파, 혁마르파, 중핵파, 중핵 관서파

(2)공산동(분트)

사학동, 전기파, 봉화파, 반기파, 통일위, 사노당, 동지회, ML, 마르청동, 혁기파, 노공당 혁명좌파, 적군파, 연합적군, 일본적군, 무브먼트 운동

(3)사청동(혁노협)

해방파, 현대사파, 적채사파, 전협

(4)구조개혁파계

소련계공노당, 프론트, 일본의 소리, MDS, 통일공산동맹

(5)중국계

모택동사상연구회, 일공좌파, 일공ML, 녹색당 (삼교파)

(6)아나혁련계

아나키스트 사회혁명전선, 무정부공산주의자동맹

(7)급진적 무당파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경대 빨치산

3.역사

스탈린 비판, 안보투쟁, 육전협, 전학련, 전공투, 산리즈카 투쟁, 총괄, 안게바, 신주쿠 소란 사건, 요도 호 사건, 산악베이스 사건, 아사마 산장 사건

4.정치사상

반요요기파, 일본제국주의, 선구성이론, 층으로서의 학생운동론, 게릴라 투쟁, 혁명적 패배주의, 혁명적 의회주의, 자기부정론, 반제국주의, 반제국-반스탈린주의, 전단계 무장봉기론, 국제근거지론, 반황실투쟁, 반차별투쟁, 장애자 해방투쟁, 궁민혁명론, 월년투쟁, 아이누 혁명론, 반일망국론, 일제 본국인, 넘어서 논리, 권력모략론, 이중대치혁명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