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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렉서스 고급세단 또 포착돼” 본문
조선중앙TV가 지난해 12월 8일 보도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양덕온천문화휴양지 준공식 영상에서 김 위원장 뒤로 렉서스 고유의 'L'자 엠블럼을 단 검정 스포츠유틸리티차(SUV)가 포착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대북 금수품인 일본산 고급 렉서스 승용차를 이용한 모습이 또 다시 포착됐습니다.
북한 관영매체가 이달 방영한 기록물에 김 위원장이 지난 2018년 7월 원산 갈마 일대 강원도 수목원 현장지도를 나섰을 당시 일본 도요타사의 고급 승용차인 렉서스를 사용한 모습이 포착됐다고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 ‘NK뉴스’가 18일 보도했습니다.
이번에 포착된 차량은 2007~2012년형 렉서스 460L을 기반으로, 김 위원장의 경호 목적을 위해 방탄장치가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고 이 매체는 전했습니다.
지난 2013년 3월 북한의 3차 핵실험 직후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094호는 고급 승용차 등 사치품의 대북 반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도요타 대변인은 “우리는 북한에 대해 차량 수출 및 생산을 하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할 계획이 없다”며 “도요타는 관련 외화거래법, 관련 미국법, 유엔 결의, 그리고 각국 및 역내 법을 준수하고 있다”고 이 매체에 전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북한 관영매체가 보도한 양덕온천문화휴양지 준공식 방문 영상에서도 렉서스 고유의 ‘L’자가 부착된 검정색 스포츠유틸리티 차량(SUV)과 함께 포착됐습니다.
한편,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단은 지난해 9월 공개한 반기 보고서에서 하노이 2차 미북 정상회담 당시 김 위원장이 사용한 독일제 고급 승용차인 메르세데스 마이바흐 S600를 거론하며, 북한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치품을 구매하고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미국 민간 연구기관인 선진국방연구센터(C4ADS)는 앞서 지난해 7월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메르세데스 마이바흐 S600 2대가 여러 국가를 거쳐 북한에 밀수입돼 김 위원장의 전용차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김정은 호화사치 생활
지난 3월에 이어 9월 이렇게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한 로드먼은 17일(현지시간) 영국 일간지 더 선(The SUN)과 가진 인터뷰에서 김정은과 섬에서 음주 파티와 제트스키, 승마 등을 즐기며 보냈다고 털어놨습니다.
구체적인 섬의 이름과 위치를 밝히지 않았지만, 원산부근으로 추정됩니다. 로드먼은 이 섬안에 호화요트와 수상오토바이, 승마용 말들이 있었다면서 세계의 부자들이 놀랄 정도로 사치품이 넘쳐났다고 말했습니다.
거기에 “길이 60m의 대형 요트와 수십 대의 제트스키, 마구간에 가득한 말 등 부족한 게 없었다”고 공개했는데, “김정은의 호화생활은 최고갑부도 놀랄 것”이라고 로드먼은 혀를 찼습니다.
김정은이 소유한 영국제 호화 요트인 '프린세스 95MY'.
지난 5월 28일 북한 중앙통신이 배포한 사진에 잠깐 비쳤는데 당시 김 제1비서가 동해안 일대를 현장지도 했다고 보도한 사진 오른쪽에 거대한 흰색 요트가 부두에 정박해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당시 이 요트를 정밀 분석한 외국 언론은 영국 요트 회사가 만든 ‘프린세스 95MY’라고 밝혔습니다. 프린세스 95MY는 길이가 29m로, 내부장식이 매우 호화스러워 가격만해도 450만 파운드, 미화로 800만 달러에 달합니다. 그런데 이 요트 제조사에서는 자기네 요트가 어떻게 김정은의 손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다면서 의심했는데요, 아마 북한이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해 사들인 것 같다고 추정했습니다.
그런데 로드먼이 말한 김정은의 요트 길이가 60미터짜리였다고 하면 앞서 말한 프린세스 95MY요트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그 영국제 요트 내부를 보면 굉장히 화려합니다. 넓게 트인 요트 위에서 술을 마시면서 주변을 감상할 수 있고요, 또 선실에 들어가면 고급 소파에서 담소도 나눌 수 있고, 침대도 있고, 또 요트 안에는 실내 수영장도 있습니다
로드먼은 방북 기간에 김정은의 옆자리에 앉아 요트를 탔으며, 함께 승마도 하고 북한 농구 경기도 관전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노동신문이 9월 7일 공개한 사진에는 이런 호화요트 사진은 없고, 호화스런 별장 내부 장식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로드먼은 또한 김정은의 섬 전용별장도 공개했는데요, 로드먼은 “바닥에 오물이나 벽에 긁힌 흔적조차 없을 정도로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었으며 모든 시설이 7성급이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세계 최고의 갑부도 김정은의 생활을 본다면 놀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7성급 호텔에 대해 알아보니까, 원래 호텔의 급수를 정할 때 별로 정합니다. 별이 3개면 3성급 호텔, 별이 5개면 5성급 호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7성급 호텔이면 최상중의 최상, 정말 더 급수를 주지 못해서 붙이는 호텔등급입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7성급 호텔은 약 두 곳으로 알려졌는데요,
중동의 아랍에미리트라는 나라가 있는데, 거기에 버즈 알 아랍이라는 호텔인데요, 호텔 방 가격은 침대 하나짜리 방 가격은 3천달러, 방이 두 개짜리는 5천 달러 가량 됩니다.
로드먼이 말한 김정은의 바다섬 별장 수준이 7성급이라면 하룻밤 자는데 가격으로 치면 5천~6천 달러는 될 거 같습니다
로드먼은 “김 제1위원장은 어떤 술이든 최고급을 갖춰놓고 있었다”며 “김정은은 양주와 과즙, 얼음을 섞은 칵테일을 늘 즐긴다”고 전했습니다.
북한은 원래 비밀스런 왕족국가이기 때문에 김정은은 그 안에서 호화스러운 생활하면서도 그걸 남이 알아주지 않으니 속상한 거지요, 그래서 로드먼을 불러다 그냥 섬에 들어가서 며칠 동안 나오지 않고 먹고 마시면서 수상스키도 타고, 요트도 타고, 말도 타면서 자기 자랑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 주민 3분에 2가 굶주리고 있는데, 김정은의 호화생활은 권력자, 독재자의 속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김정은 소유 평양 용정관저 이외 평양 4개 저택 그리고 원산과 영흥등지 고급 빌라 33개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빌라 지역은 평방 미터, 주파수 바다 쪽 또는 언덕의 수십만 있다. 빌라 당 운전 범위 내에서 연회장, 다오, 승마와 사냥터등으로 구역돼 있다. 또한, 고급 빌라 연간 유지 보수는 3천5백만달러 비용이 지출(소요)되고 있다. 김정은 전용 비행기와 전용 호화 요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최근 영국 일간 신문인 텔레그래프는 김정은이 자란 평양 중심부의 16호 관저가 그의 전용관저로 새롭게 꾸며지고 있으며 지방에도 김정은의 호화별장이 여러 곳에 건설되고 있는데 여기에 1억 파운드(약 1억5천 7백만 달러) 이상이 지출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평양의 김정은 관저 건물은 원래 그의 생모 고영희가 거주한 곳으로서 바로 옆 건물에는 김정일의 집무실이 있어, 두 건물이 지하터널로 연결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 온천으로 유명한 함경북도에 김정은 별장이 건설되고 있으며 별장으로 통하는 인근 철도와 도로를 닦는 데 주민들을 강제 동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산의 송도원에도 대형 건축물이 들어서고 있으며 그 건물구조는 함흥에 있는 김정일 별장 서호초대소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서호초대소는 100m 아래 바닷속 생물을 볼 수 있는 해저관람실까지 갖춘 호화판 시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유엔 북한인권 조사위원회’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김정은이 집권이후 2012년 한 해 사치품 수입에 6억 4,580만 달러(남한돈 6,870억원)를 썼다며 이는 김정일 집권 때 사치품 수입비인 한해 평균 3억달러의 두 배나 되는 금액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돈은 김정은 전용 영화관 건립을 비롯해 벤츠 차량, 최신 음악기기, 최고급 피아노, 호화 요트 등 최고급 사치품을 외국으로부터 구입하는데 쓰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국 프로농구 선수 출신으로 북한을 네 번 다녀온 데니스 로드먼은 최근 ‘김정은의 초호화 전용섬에서 파티와 제트스키, 승마를 즐겼다.’며 ‘그가 누리는 호화생활은 세계 최고 갑부도 놀랄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전용기를 타고 공군부대인 1016 군부대를 시찰했다고 노동신문이 9일 보도했다. 전용기에서 내린 김정은을 부대 관계자들이 맞이하고 있다. 김정은 뒤로 전용기의 모습이 보인다
김정은의 전용기는 러시아산 일류신 62형(IL-62) 계열의 비행기 중 하나를 개조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비행기 애호가들은 김정은 전용기를 1985년 제작된 P-618 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비행기에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라는 표기를 하고 꼬리 부분에 왕별을 부각시켜 전용기 임을 나타냈습니다.
비행기 동체 길이는 53미터, 폭은 43미터, 높이는 12미터로 알려졌고요, 최대 시속은 900킬로미터이고 최고 200명까지 탈수 있다고 합니다. 이 비행기는 1962년에 처음 제작되어 1994년에 기종이 단종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그러니까 더는 생산되지 않는 비행기입니다. 비행기의 수명이 다 되어서 중국 공항에서조차 자기네 공항에 들어오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에도 이 기종은 두 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김정은은 이 중 한대를 개조해서 전용기로 만든 것 같습니다.
평안북도 창성군,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별장 인근에 만들어진 전용활주로. 약 550m 길이의 잘 포장된 활주로, 격납고 등이 보인다. 현재까지 9개의 전용활주로가 확인됐다. 지금까지 건설된 전용 활주로 9개의 위치를 보면 창성 외 평양 대성구역, 미림, 평북 묘향산, 평남 은산, 강동, 황해도 신천, 강원도 갈마, 송도원에 있습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집무실(사진)
김일성때부터 이어져 온 호화사치 생활은 단연 비난의 대상이 되며, 그러면서도 인민들의 의식주를 생각하지 않는다 하여 "인민을 굶겨죽이는 지도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의 2011년 1월 1일자 보도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보기관 분석결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총 1억 파운드(약 1734억 원) 이상을 들여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남 김정은을 위한 호화주택을 잇달아 건설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건물에는 요트 선착장과 사설 기차역 등이 설치될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밖에도 함경북도에서 김정은을 위한 것으로 보이는 주택이 건설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메르세데스 - 마이 바흐 S 600 모델 김정은 승용차
Kim Jong Un seen with new Mercedes-Maybach S 600 in recent appearance.
Mercedes-Maybach S 600 Guard | Photo: KCTV (left), Daimler (right)
Picture on left: reversed detail from Top Speed Mercedes Maybach S600 video | Picture on right: zoomed detail from KCTV footage
CTV video shows Kim Jong Un adjacent to the vehicle on January 31 | Picture: KCTV
Video published by RT in May 2018 showed a Mercedes S 600 in the background | Picture: RT (Youtube screenshot)
유엔 대북제재위원회 보고서에 담긴 번호판 없이 운행 중인 김정은의 벤츠 차량.
김정은은 즉흥적인 성격이다[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 여러 면에서 비판이 존재한다]
[왕후립 리비아 중국주재 전임 대사는 카다피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카다피는 42년동안 정권을 장악했고 리비아인민들이 부유한 생활을 누리게 했으며 "중동신화"를 창조했습니다. 그는 반미의 기치를 견지해 "반미영웅","사막의 사자"로 불리웠습니다. 다른 한편 그는 독재정치를 했고 자고자대했으며 정책에 변화가 많았습니다. 특히 록크비공중조난사건후 서방 나라들이 리비아에 다년간에 걸친 경제제재를 가했고 이로 하여 리비아국민들의 생활이 곤경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독재자 카다피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왕후립 전임 대사는 카다피는 인민들이 직접 관리하는 국가체계를 구축하려 했고 총인민대회와 총인민위원회라는 입법과 행정기관을 만들었으나 이런 국가기구들은 인민이 국가의 주인공이 되거나 직접 국가를 관리하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외 카다피 가족의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된 독재통치도 대중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에 대해 왕후립 전임대사는 "지도자들의 공적과 과오는 리비아 국민들이 평가해야 하고 력사가 최종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작년 4월 6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이 미·중 회담을 마치고 만찬장에 마주 앉았다. 트럼프 외손주가 나와 중국 민요 '모리화'를 불렀다. 이어 웨이터들이 캘리포니아산 포도주와 최고급 스테이크를 테이블마다 날랐다.
시 주석은 흐뭇한 얼굴로 스테이크를 썰었지만, 트럼프는 노리는 게 있었다. 미·중 회담 전, CIA가 트럼프에게 시 주석의 표정과 몸짓을 토대로 성격을 분석한 보고서를 트럼프에게 냈다. "매우 신중한 성격으로, 무슨 일이건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고, 실수도 적다. 그 대신 예상을 뛰어넘는 돌발적인 일에 약하다"는 내용이었다
트럼프는 정보를 십분 활용했다. 스테이크를 다 먹고 초콜릿 케이크가 나왔을 때, 트럼프가 시 주석에게 "할 말이 있다"며 "방금 시리아 공격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허를 찔린 시 주석은 10여 초간 침묵하다 "어린이에게 가스를 사용한 사람(아사드)이라면 공격해도 된다"고 했다. 평소 '내정 불간섭'을 주장해왔는데, 엉겁결에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공격을 승인한 것이다. 트럼프는 이걸 두고두고 써먹었다. 본인이 직접 폭스TV에 출연해 "시 주석이 괜찮다고 했다"고 몇 번씩 강조했다.
트럼프의 '한 방'은 CIA 심리 분석 덕에 가능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20일 보도했다. 심리 분석은 상대의 언행을 정밀하게 분석해 성격과 심리상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CIA는 시 주석을 분석할 때, 일명 '페이셜 프로파일링(facial profiling)'을 활용했다. 수사관들이 범죄 현장을 보고 범인을 짐작하듯, 심리학자가 나서서 얼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과 몸짓을 분석하는 기법이다.
CIA의 심리 분석 기법이 새삼 관심을 모으는 건 남북 회담과 미·북 회담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일은 그간 공개된 김정은의 표정과 몸짓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김정은의 성격·심리상태·건강상태를 파악해 외교에 활용하기 위해서다.
미국은 2차대전 때부터 심리 분석을 활용했다. CIA의 전신인 미 전략사무국(OSS)이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 '종국에는 미치거나 자살할 가능성이 높은데, 자살할 경우엔 최후에 가장 드라마틱한 방법을 택할 것'이라고 예측한 게 대표적이다(1943년 보고서).
페이셜 프로파일링은 냉전의 무기로도 활용됐다. CIA는 1961년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거친 촌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힘을 숨기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다'는 보고서를 케네디 대통령에게 올렸다. 쿠바 지도자 카스트로에 대해선 '비판받으면 감정적으로 불안정해지며, 에고이즘(자기중심주의)이 아킬레스건'이라고 썼다.
페이셜 프로파일링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건 1970년대 들어서다.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감정과 표정은 보편적·자동적이라는 게 근거다. 화를 내는 이유는 달라도 화났다는 감정은 똑같고, 화난 걸 드러내는 얼굴 근육도 같다. 뇌가 '감정을 숨기라'고 명령해도 뇌의 명령이 닿기 전에 근육이 자동으로 반응한다. 따라서 훈련된 눈으로 얼굴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을 관찰하고, 몸짓 분석까지 보태면, 심리 파악이 가능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 기법의 최강국으로 꼽힌다. CIA는 1990년 사담 후세인에 대해 '본인의 운명이 곧 이라크의 운명이라고 여기며, 양심 때문에 갈등하는 일이 전혀 없다. 불타는 벙커에서도 출구만 있으면 마지막까지 버틸 사람'이라고 했다.
'내가 곧 내 나라'라는 사고방식은 김정은도 마찬가지라는 게 CIA의 분석이다. CIA는 지난해 트럼프에게 "김정은은 자기애가 강하고, 모욕에 독하게 반응하며, 본인과 북한을 따로 떼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보고서를 올리고, "김정은 개인을 공개적으로 지목해 모욕하지 않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로켓맨' '매드맨' 같은 별명을 붙이지 말라는 얘기였다. 트럼프는 듣지 않았다.
일본도 2010년부터 심리 분석을 외교에 활용 중이다. 일본 총리가 주요국 정상과 정상회담을 하기 전, 전문가 2~3명에게 의뢰해 종합적인 성격 리포트를 받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아베가 트럼프와 인간관계 맺는 데 이 보고서가 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푸틴와 김정은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북한식 사회주의 국가 코흘리개(어린애) 군주 김정은과 민주공화국 연방제 러시아연방공화국 KGB 중령 군인출신 지도자 푸틴 대통령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출신 김일성과 김정숙
1943년 10월 5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제88독립저격여단(국제여단, 각 민족 빨치산 부대) 대원 사진. 제1열 좌로부터:바탈린( N. S. Batalin, 巴达林, 소련),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李兆麟, 일명 張壽籛[张寿篯], 중국), 왕일지(王一知, 주보중 부인), 여단장 주보중(周保中, 중국), 김일성(金日成, 제1영장, 조선), 부여단장 시린스키(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 1904~?)。제2열:장광적(张光迪, 중국), 풍중운(冯仲云, 중국), 왕효명(王效明, 중국), 왕명귀(王明贵, 중국), 팽시로(彭施鲁, 중국)。제3열:양청해(杨清海, 중국), 서철(徐哲, 조선), 강신태(姜信泰, 강건, 조선), 김광협(金光侠, 조선), 수장청(隋长青, 중국)。제4열 : 안길(安吉, 조선), 박덕산(朴德山, 조선), 최용진(崔勇进, 조선), 도우봉(陶雨峰, 중국), 김경석(金京石, 조선)[사진: 소련 제88국제여단 소속원 - 중국 길림성 도서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 만들어진 항일 빨치산 조직(소련군의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성격)으로 지금까지 만주에서 활동하던 공산당계의 조선인, 중국인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문호를 넓혀 우파 항일 무장단체를 받아 들여 1936년부터 개편되어 갔다.
주보중이나 김일성 등 중국인과 조선인의 유명한 파르티잔(Partizan, 빨치산) 소속으로 나중에 소련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조직으로 개편하여 그 구성원 중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 권력의 중추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다)
1.성립
1930년대 초반에서 만주국(満州国, 1932년 3월 1일 건국일)에서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조선인, 중국인의 항일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편성되어 있었지만, 조선인 대원 400명 이상이 친일 스파이로 의심 받고 숙청된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 등으로 탈출도 잇따라 조직이 효과적으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한편,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통일 인민전선(統一人民戦線)의 결성을 호소되면서 중국 공산당도 8월 테제를 발표하고 제2차 국공합작(第2次国共合作)을 호소했다. 이에 따라 만주에서도 “항일 반만(抗日反満)” 구호로 내세우면서, 국민당 계열의 독립 무장단체를 포함한 모든 단체와 합작하여 흡수를 목표로 정책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이미 1934년경부터 국민당계열의 마적(馬賊, 말 타고 다니는 소수 무장단원의 군벌)이나 의용군(義勇軍)도 공산당의 지도하에 정리하려고 시도했던 것이지만, 토착 무장단체는 주로 부농(富農), 부호(富豪)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해 공산주의 색깔(노동자 계급 령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을 싫어하여 국가자본주의(국가사회주의) 일만측(日満側, 일본과 만주국)에 돌아는 경우가 많았다. 최대한 공산주의 색깔을 엷게 하여(통일전선 구축) 존속하고 있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소규모 마적과 독립 무장단체를 흡수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재편되어 갔다.
그러나 통화성(通化省)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계열의 최대의 항일 무장단체 왕봉각(王鳳閣)
의 반만항일군(大刀会, 대도회)과 만주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조선인 민족주의자 무장단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우파는 공투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집단의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큰 세력이 될 수 없었다.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제1. 2군이 남만주, 제4. 5. 7. 8. 10군이 동만주, 제3. 6. 9. 11군이 북만주로 확장했다
1936년 우선 남만주군(南満)이 제1로군(第一路軍)이 되고, 이것이 두고 두고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주력부대인 것으로 계속되어 나가게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거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간도는 민생단 사건이 꼬리를 이어 내분이 계속되고 좀처럼 재편은 부진했지만 1937년에는 동만주군 제2로군(東満軍 第二路軍)이 되었고, 1939년 북만주군 제3로군(北満軍 第三路軍) 것으로, 일단의 재편을 하게 되었다[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제1군으로부터 제11군까지 존재했으며, 제1군, 제2군이 남만주에서, 제4, 5, 7, 8, 10군이 동만주, 제3, 6, 9, 11군이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후에 남만주의 군은 제1로군으로 동만주의 군은 제2로군으로 북만주의 군은 제3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2. 편성
편성 당시의 제1로군(第1路軍)의 인원은 중국 공산당측 자료 "中共延辺党組織活動年代記(중공연초당조직활동연대기)“ ”동북항일연군투쟁사(東北抗日聯軍闘争史)“ 등 6,000여명 추측되고 일본측의 ”만주공산 비적의 연구(満州共産匪研究)“에 따르면 1,630명 정도에서 상당한 차이가있다.
또한 동북항일연군 아래의 인물은 사사키 하루타카(佐々木春隆) "한국전쟁 이전의 한국 독립운동 연구“와 강재언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라했다.
서대숙 "김일성 사상과 정치 체제“가 자세 하지만, 동북인민혁명군 시대(東北人民革命軍時代)에 전사 한 인물이 실리는 등 착오가 보여 자료로 피했다.
해방 이후 최현(崔賢),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강건(姜健), 최용진(崔勇進). 김일(金一), 이영호(李永鎬)은 살아남아 나중에 북한의 요직을 차지한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으며 제88독립저격여단을 소련군으로 지칭하고 있다]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부총사령 왕덕태 [副総司令-王徳泰]
정치위원 위증민[政治委員・魏拯民]
제 1로군 군단장 양정우[ 第一軍 軍長-楊靖宇]
제1사단 사단장 정빈[第一師 師長-程斌]
· 제3여단 정치부 주임 이질수[第3団 政治部主任-李鉄秀]
제4여단 단장 수상태 [第4団 団長-隋祥太]
제6여단 단장 유인봉[第6団 団長-劉仁鳳]
제2사단 사단장 조국안[第二師 師長-曹国安]
제8여단[第8団]
제3사단 사단장 왕인재[第三師 師長-王仁斎]
제5여단[第5団]
제7여단[第7団]
제2로군 군단장 왕덕태[第二軍 軍長-王徳泰]
정치주임 오성륜(前),이청(後)[政治主任-呉成崙. 季青]
제4사단 사단장 안봉학[第四師 師長-安鳳学]
제1여단 단장 최현[第1団 団長-崔賢]
제2여단[第2団]
제3여단[第3団]
제5사단 사단장 진한장[第五師 師長-陳翰章]
제4여단[第4団]
제5여단[第5団]
제6여단[第6団]
제6사단 사단장 김일성[第六師 師長-金日成]
제7여단 단장 김주현[第7団 団長-金周賢]
제8여단 정치위원 박덕산(김일)[第8団 政治委員・朴徳山(金一)]
제9여단[第9団]
제10여단[第10団]
독립여단 여단장 방진성[独立旅 旅長-方振声]
제1여단 단장 최춘국[第1団 団長-崔春国]
제2여단[第2団]
교도여단[教導団]
제2로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주보중[第二路軍 総司令兼政治委員-周保中]
참모장 최용건(최석천)[参謀長-崔庸健(崔石泉)]
제4군 군단장 이연평[第四軍 軍長-李延平]
부군단당 왕광우[副軍長-王光宇]
제1사단 사단장 관서범[第一師 師長-関書範]
제1여단[第1団]
제2여단[第2団]
제3여단[第3団]
제2사단[第二師]
제2사단 정치위원 도정비[第二師 政治委員-陶浄非]
제4사단 정치위원 김광협[第4団 政治委員-金光侠]
제5여단 정치위원 박동화[第5団 政治委員-朴東和]
제6여단[第6団]
제3사단 사단장 이문빈[第三師 師長-李文彬]
제8여단[第8団]
제9여단 정치위원 강신태(강건)[第9団 政治委員・姜信泰(姜健)]
제7군 군단장 이학복[第七軍 軍長-李学福]
군단장 대리 최석천(최용건), 경낙정[軍長代理-崔石泉,景楽亭]
정치주임 정로암, 포림(政治部主任-鄭魯岩,鮑林)
제1사단 사단장 왕여기[第一師 師長-王汝起]
정치부 주임 팽시노[政治部主任-彭施魯]
제1여단 여단장 최용진[第一団団長-崔勇進]
제2사단 사단장 유기창[第二師 師長-鄒其昌]
제7여단 정치위원 이영호[第七団政治委員-李永鎬]
제3사단 사단장 경낙정,운학영, 수장청[第三師 師長-景楽亭,雲鶴英、隋長青
제8군 군단장 사문동[第八軍 軍長-謝文東]
제10군 군단장 왕악신[第十軍 軍長-汪雅臣]
구국군[救国軍]
의용군[義勇軍]
제3로군 총사령관 장수전(이조린)[第三路軍 総司令-張寿籛(李兆麟)]
참모장 허형식[参謀長-許亨植]
정치위원 빙중운, 김책[政治委員-馮仲雲, 金策]
제3군 군단장 허형식[第三軍 軍長-許亨植]
제6군 군단장 장수전[第六軍 軍長・張寿籛]
제7군 군단장 이화당[第九軍 軍長・李華堂]
제11군 군단장 기치중[第十一軍 軍長・祁致中]
정치부 주임 김정국[政治部主任・金正国]
1932년 3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만주국 지도]
3.활동 상황
(1)제1일로군 제1군(一路軍第一軍)의 서쪽정벌
1936년 남만주에서 제1일로군(第一路軍)이 성립한 당시 중국 공산당은 소위 장정(長征) 한창이었지만, "항일동정(抗日東征)“ 깃발을 들고 산서성(山西省)에서 하북성(河北省)에 진출하여 동쪽으로 향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제1일로군 1군(第一路軍第一軍)의 첫 번째 활동은 이에 잇따라 움직을 하여 서쪽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제1차 서쪽 정벌은 제1사단(第一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6년 6월 하순, 번시(本渓,본계-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동부의 중공업도시)와 안동성 봉성현(安東省鳳城県)의 경계에 있는 화상 모자산(和尚帽子山)을 출발하여 요양(遼陽)에서 남만주 철도와 요하(遼河)를 넘어 요서(遼西)에서 열하(熱河)로 나아 가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 요녕성 수암현(岫岩縣)의 산악 지대에서 만주국군(満州国軍)에 포위되어 뚫고 탈출했지만, 다수의 도망자, 전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제2차의 서쪽정벌은 제3사단(第三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전원이 기마대(騎馬隊)가 되어 결행(決行) 하게 되었고, 1936년 11월 하순 싱징현(흥경현,興京県) 경계에서 기마로 출발하여 만주국군(満州国軍)의 추격을 받으면서 청원(清原)에서 철령(鉄嶺)을 넘어 요하(遼河)유역에 도달 하였다
그러나 따뜻한 겨울을 위한 요하(遼河)가 결빙(氷結, 물 따위가 얼어붙음) 되지 않고, 한달의 행군으로 피폐 결국 되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 400명의 대원이 백 수십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3사단(第三師)의 대원 수가 400명이었다고 한다면, 6개사단(6個師) 모든 동일 숫자라고 하는 단순 계산으로 제1일로군 전체(第一路軍全体)는 2400명 정도가 6000여명으로 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과대 포장되었다고 알 수 있다
이듬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1로군 제1군(一路軍第一軍)은 서쪽 정벌에 실패하면서도 또한 팔로군(八路軍)과의 연계를 지향 일본군의 후방을 위협하는 목적으로 제3사단(第三師)의 생존을 중심으로 청원(清原), 서풍(西豊), 개원(開原) 일대로 활동을 계속하였고 별동대가 심양(瀋陽), 무순(撫順) 일대에 진출하는 등 소모(消耗)를 거듭했다.
(2)김일성 부대에 의한 보천보 습격
한편, 1936년 제1로군의 제2군(第一路軍 第二軍)은 장백지구(長白地区)에 근거지를 만들려고했다. 제4사단 사단장(第四師 師長) 안봉학(安鳳学)체포되어 투항하였고 제2군 군단장(第二軍軍長) 왕덕태(王徳泰)이가 만주국군에 포위되어 전사하는 등 상당한 희생하면서 우선 김일성이가 사단장을 맡고 있는 제6사단(第六師)의 근거지 개척에 성공하여 1937년에는 제1로군(一路軍)의 제1군 제2사단(第一軍第二師)과 제2군 제4사단(第二軍 第四師)이 장백(長白)에 근거지를 옮기고 있었다.
원래 1932년에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을 시작한 것은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반석현위원회(中国共産党満州省委磐石県委)이었지만, 그 당시부터 고참 조선인 멤버에 오성륜(呉成崙) [全光, 전광]], 이상준(李相俊)[이동광(李東光)]이가 있었다.
오성륜(呉成崙) 제2군(第二軍)의 정치주임이었고 이상준(李相俊)도 제2군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보여지지만, 그들은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의 반성에 따라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의 지지를 얻고 조선인의 민족의식에 호소하기 위하여 재만주지역 조선인 조국광복회(祖国光復会)를 조직하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장백(長白) 침공은 이에 따른 것으로 제6사단(第六師)의 지지기반 구축 공작을 시작하고 그 일환으로 압록강 유역의 조선반도 내부 함경남도 (현재 양강도) 갑산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박금철(朴金喆), 박달(朴達) 등 공산주의 단체 (후에 조선 노동당 갑산파)와 연락을 하게 되었다.
1937년 6월 제6사단(第六師)은 압록강을 건너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甲山郡普天面保田里)[보천보(普天堡)]의 습격(보천보 전투)에 성공했지만, 이것은 갑산그룹 안내와 참가해서 성공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조선뿐만 아니라 조선반도를 단속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일본측에서도 공비[共産党匪賊(공산당 비적)]으로 거물시 되는 것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권력을 독점 하는데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이 전년(前年) 제6사단(第六師)의 장백(長白, 백두산) 근거지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수 십명 규모의 소대 김일성 부대를 자칭 무송(撫松)과 장백(長白)에 출몰하여 약탈을 반복 만주군 수비대와 충돌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한이 해(年)에 들어서는 갑산 그룹의 활동도 활발해 지고 조선인 부호(朝鮮人富豪)에서 금품을 갈취 등의 사건도 있었다. 또한, 최현를 단장으로하는 제4사단 제1여단(第四師第一団)이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 무산(茂山)에 진입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미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을 전년(前年) 조선반도의 신문은 ‘김일성 부대’의 동향을 전했다. 1936년 9월 11일자 매일신보는 "혜산 건너 편에 출몰하는 적단(賊団, 도적 단체)는 150 - 160명으로, 3분의 1이 만주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이고 ... 관헌과 같은 복장으로 소련식 중국식의 소권총, 강한 기병2정(軽機二丁), 대포1문(大砲一門)을 가지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계(東北抗日聯軍系)에서 장백현(長白県) 방면에 파견된 이 부대의 수령(首領) 김일성이라고 한다. 이들은 15-20 명씩 소대 약탈반을 꾸어 조선인 부락에서 식량을 약탈하였다"와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고 정보를 싣고 있다. 참고로 뒤를이었다 경성일보 기사에서는 "비수(匪首, 도덕의 두목) 김일성 일당“이 있고, 제6사단(第六師)가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1937년 5월, 최현 부대(崔賢部隊)가 무산(茂山)에서 남하(南下) 하여 혜산 경찰서 관내(恵山署関内),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태리 상흥경수(上興慶水) 부락 고뢰조재목작업소(高瀬組材木作業所,)을 습격했다
금품 많은 것을 약탈 한 후, 주 임무인 일본인 1명, 조선인 5명, 중국인 30명을 납치해 강유역으로 도망친 후 몸값을 요구했다.
그에 이은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이다. 보천보 300호 남짓의 마을에서 일본인 26호, 중국인 2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이다. 그래서 무차별 적으로 금품을 강탈하고 동사무소 나 소방 회관, 우체국, 초등학교 등에 방화하고 도망한 것은 충격을 받은 단속측 조선총독부는 김일성과 최현에 거액의 상금을 걸고 수배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크게 보도했다. 이 신문의 논조는 그들을 비적(匪賊)으로 비난하고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동정(同情)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이 시기의 조선에서는 관헌 (조선 총독부)에 의한 검열을 위해 항일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곤란이기도 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중국 공산당과의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소련의 원조도 얻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물자 보급을 위해 종종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의 구별없이 금품강탈이나 몸값 목적의 유괴 등 폭력적인 약탈 행위도 했다. 또한 몸값 목적 외에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주민을 납치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불어 넣어 인원 충당하고 있었다. 물자와 인력의 공급 수단에 있어서는 비적(匪賊)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하는 연구자도 있다
보천보전투 양강도는 중국 장백산과 한국 백두산으로 접경을 두고 있으며 두만강, 압록강이 양국으로 접경하고 있다
(3)혜산사건과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
김일성부대의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에서 추격한 혜산경찰서의 경찰부대는 매복을 받아 32 명 중 7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상에 급히 함흥 보병 제74연대 김인욱(金仁旭) 소좌(소령)이 혜산 수비대장으로 임명 되었다.
이 혜산 수비대가 경찰부대와 협력하여 최현 부대와 합류하고 있는 김일성 부대를 급습하여 타격을 주었다. 이는 김일성 부대가 다시 국경을 넘어 조선에 침공하는 것은 없어졌지만, 갑산 그룹의 활동은 운흥면(雲興面) 금광을 습격하여 사금(砂金)을 강탈 하였다. 도적단이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는 삐라를 뿌리고 있던 것으로부터, 동조(同調) 갑산 그룹의 존재가 드러나고, 갑산측에서 162명, 장백현에서 59명이 검거됐다. 혜산사건의 시작이다 .박금철도 이 때 검거 되었다.
혜산사건(恵山事件) 제1차 검거의 자백도 이듬해 1938년에는 박달을 포함한 279명이 검거 돼 만주국 주재 조선인 조국광복회(在満韓人祖国光復会)와 거기에 기담한 갑산그룹이 괴멸했다.
한편, 1938년 초에 제1로군(第一路軍) 주력군은 주로 집안현(輯安県)의 삼림 지대에 있었다. 중국인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와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은 팔로군과 연락을 고집해 여러 번 서쪽 정벌을 계획했다.
그런데 그 중에 제1사단(第一師)의 사단장 정빈(程斌)과 그의 부대가 일만토벌부대(日満討伐部隊)에 투항했다. 일만측(日満側)은 투항자를 처형하지 않고 상금이나 직장을 보장하는 귀순 전략을 취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한 것이다. 따라서 서쪽 정벌은 중지(中止)가 다음과 같이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이 이루어졌다.
인원의 숫자는 강재언(姜在彦)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른다.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 정치위원 위증민, 군수처장 오성륜, 총서령부경위여 여장 방진성 (500 명)[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政治委員・魏拯民 軍需処長・呉成崙 総司令部警衛旅 旅長・方振声 (500人]
제1방면군 지휘 조아범(250명)[第一方面軍 指揮・曹亜范 (250人)]
제2방면군 지휘 김일성(350명)[第二方面軍 指揮・金日成 (350人)]
제3방면군 지휘 진한장(300여명)[第三方面軍 指揮・陳翰章 (300人余)]
이 중 제2방면군(第二方面軍), 제3방면군(第三方面軍)은 기존 제2로군(第二路軍)의 활동 범위로 되어 있던 동만주의 화룡(和竜), 안도(安図), 연길(延吉), 왕청(汪清), 혼춘(琿春) 등 조선인이 많이 사는 지역 이 활동 구역으로 통합 되었다.
(4)제1로군(第一路軍)의 괴멸
중일전쟁이 발발했던 1937년 소련은 만주국, 조선과 접하는 국경을 경계하여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조선인) 모두 친일세력으로 간주하고,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렇게 한 것은스탈린의 대숙청에 처음부터 관계 당국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에 있었다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 겐리후 류시코후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몸이 위태로워 것을 헤아려 1938년 6월 연해주에서 국경선을 넘어 만주국로 망명했다. 류시코후는 혼춘( 琿春)헌병대에 연행 된 후 도쿄의 참모 본부에 보내 망명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 망명 사건에서만 아침의 국경은 극도로 긴장하여 소련군과 일본군 수비대가 충돌하는 장고봉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이듬해 1939년 노몬한 사건이 일어나 일단 휴전은 되었지만, 일본측의 경계가 높아져 관동군에 의해 만주 국내 항일세력에 대한 철저한 단속이 시작 되었다. 제2 독립수비대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에 만주국군(満州国軍) 7개여단, 경찰대 30개 대대가 배속되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하여 대적 하게 되었다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작전은 군, 경찰, 행정기관, 민간조직의 연락을 긴밀히하여 그물망을 잘게 치고 게릴라 활동을 봉쇄 민중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즉, 일반 주민에게 토벌대와 게릴라 부대가 교대로 나타나는 상황에서 신변안전을 위해 쌍방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토벌대가 게릴라 부대를 몰아 약탈과 납치 위협을 완전히 봉쇄하여 치안을 유지한다면 게릴라 부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적극적으로 토벌대에 협력하게 된다. 결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사람이 없는 삼림 지대에 몰려 식량과 의류의 확보도 곤란해 질 것이다
토벌대 중에서도 가장 유능하게 움직인 것은 정빈(程斌) 등 투항한 전(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구성하고 있는 경찰부대였다. 그들의 활약으로 제1로군(第一路軍)은 점차 멀리 분산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40년 초에는 경위여장(警衛旅長) 방진성(方振声) 체포되어 처형, 투항들도 잇 따랐다. 그 투항자 때문에 총사령관 양정우의 동정(動静)이 알려져 단신 행동을 강요 될 때까지 되었다. 양정우는 몽강현(濛江縣)[현재는 양정우을 따서 정우현으로 개명 됨]에서 산 일에 들어간 주민과 접촉하여 통보돼 투항을 거부 사살 되었다. 토벌대는 최후의 절개에 흠모하여 불교행사를 영위하고 영혼을 달랬다.
양정우 사후, 제1로군(第一路軍) 지도자로 추대된 위증민(魏拯民)은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주력 부대를 북상시키기 위해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남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그 직후 지휘관 조아범(曹亜范)이가 대원에 의하여 살해 되었고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내분에 의해 해체 되었다.
그런 중에도 김일성이가 이끄는 제2 방면군(第二方面軍)은 100 ~ 300명 정도의 집단 활동을 유지하고 습격, 약탈, 납치를 성공시키고 있었다. 1940년 3월에는 안도현(安図県) 대마록구(大馬鹿溝) 산림 경찰대(森林警察隊)를 습격하여 사상자 각 2명의 피해를 주고 금품 2만 3천엔을 약탈하고 대충 약 140명을 납치했다. 이틀 뒤 피랍자 중 25명(일본인 1명, 조선족 13명, 만주족 9명, 백계 러시아인 2명)을 석방. 나머지 납치 인질 70여명과 함께 도망을 계속했기 때문에 만주 경찰과 마에다군단(前田隊)의 쫓는 곳이 되었지만, 제2 방면군(第二方面軍)의 매복으로 마에다대(前田隊) 140명 중 일본측 문서 전사자 수 58명, 전상자 27명, 실종자 9명이라는 엄청난 타격을 주고 건재함 인상을 남겼다.
이 가을에서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활동은 다시 활발해지면서 제2 방면군을 주요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김일성 부대도 소수 부대에 분산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의식(衣食)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제1로군 중추의 위증민도 연락이 취하지 못하고 김일성을 포함한 수십명은 8월에서 10월경에 자신의 판단으로 소련령으로 도망쳤다. 소련 측과의 연락도 없이 갑자기 입소였기 때문에 김일성은 억류 돼 한때 투옥 되었다.
제3 방면군(第三方面軍)은 1939년 제2로군 제5군(第二路軍第五軍)과 대규모 공동 작전에서 한때 안도현 대사하진(安図県大沙河鎮)을 점령하는 등의 활약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해 겨울부터 군 단위(軍単位)의 활동은 불가능하므로, 전사, 전상(戦傷), 도망, 투항자가 이어 괴멸 상태가 되었다. 1940년말 지휘관의 진한장은 추격에 의하여 전사한다.
그러나 활동을 계속 되어 김일성 부대 입소 이후 소수 인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소련에 입국했다. 제13여단(十三団)을 이끌던 최현도 그 안에 포함돼 있다.
제1로군 총사령부(第一路軍総司令部)도 괴멸 상태였지만, 1940년 11월경에는 군의관 처장 서철(徐哲)도 경위대 살아남은 몇 명을 데려 입소했다. 만주에 남은 제1로군 수뇌부에 관해서는 1941년 1월에 오성륜(呉成崙) 투항 귀순. 3월 질병에 시달리고 고립되어 있던 위증민이 토벌대에서 발견되어 전사 혹은 병몰 후 발견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제1로군의 만주에서의 활동은 거의 끝났다.
1939年秋,魏拯民(左二)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指戰員在一起。
(5)제2로군(第二路軍), 제3로군(第三路軍)과 소련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원래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재편 된 것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있었지만, 소련의 극동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한 대응은 상황에 따라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제1로군(第一路軍)의 활동 범위는 소련 국경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원래 지원을 받을 수도 적었지만 국경 근처의 동만주나 북만주에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제3로군(第三路軍) 밀접하게 소련과 염려 했다.
국경선이 긴장하고 있던 1938년 말에는 개편 이전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제6군5사(第六軍五師)가 일본군에 쫓겨 부대마다 월경했지만 사단장(師長)이 체포 될 뿐만 아니라 전원이 신장성(新疆省)으로 보내졌다.
제2로군(第二路軍), 제3로군(第三路軍)은 함께 대규모 내분을 안고 있었지만, 그 조정(調整)에 지도력을 발휘하고 양군 통해의 중심이 되어 있던 것은 제2로군(第二路軍) 총사령관 겸 정치 위원 주보중(周保中)이었다. 1940년의 1월 그가 중심이 되어 소련 극동당국과 1차 하바롭스크 회의를 받고 중국 공산당 중앙과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상황 소련 극동당 조직과 극동 방면 군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임시 지도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합의가 성립했다.
1940년 11월 주보중과 참모장 최용건은 사전에 소련측의 연락을 받고 부대마다 입소하고 살아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다른 대원도 그 뒤를 이었다. 투옥되어 있던 김일성의 신원을 보증한 것은 주보 중이다.
제3로군(第三路軍)은 총사령관 이조린(李兆麟) 등의 간부는 입소했지만, 소련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있고, 참모장의 허형식(許亨植)의 지휘 아래 부대의 절반이 북만주에 남아 싸움 계속했다
.허형식(許亨植)은 1942년 경안현 청봉령(慶安県青峰嶺)에서 장렬한 전사를 이루었다. 일단 입소했던 정치 위원의 김책은 허형식(許亨植)의 의지를 이어 1943년 연말까지 입소를 거부하고, 봉산현(鳳山県)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1941년의 시점에서 제1로군에서 입소한 인원은 88명 정도 제2로군에서 110명 정도로, 총 200여명이 소련령에 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동북항일연군 김일성 (뒷줄 중앙)
1939년 김일성(앞줄 좌로부터 네번째)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지휘부 전투지휘자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
[金日成(前左四)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部指戰員攝於1939年。金日成於1932年春到安圖創建游擊隊。先後擔任汪清反日游擊大隊政委,東北人民革命軍第二軍獨立師第三團政委、第二軍第三團政委,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三師(後改為第六師)師長、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
東北抗日聯軍第第一路軍女戰士。左三為金貞淑。
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警衛旅部分指戰員攝於1939年夏
3.그 후
소련에 망명한 구성원은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제88독립저격여단)에 편입 되었다. 이 여단은 소련군에 흡수된 형태였지만, 소련 사람을 섞으면서 그 구성원이나 직책 등 주보중이 여단장되는 등 대체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조직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중국 공산당은 이 여단을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이라고도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대원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 분리 된 소련군 정보국 직속되어 만주국에 침투해 공작에 종사했다. 위험한 임무에 종사한 그들이었지만, 숙청과 일본군의 스파이로 간주 형을 받은 사람도 있다.
또한 김일성은 스스로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에 편입 된 것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출판)"로 인정하지만 소련군과는 연계된 것만으로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제88독립저격여단)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소련군이 조선반도의 해방군이 되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인 대원은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38 도선 이북의 조선)에 돌려 보내 북한 인민위원회와 조선 공산당 (이후 조선 로동당) 및 조선 인민군의 요직에 올랐다.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후 동북항일연군 출신은 만주파 (파르티잔파, 빨치산파)라는 파벌이 되어 남로당파 (남조선 노동당 출신), 연안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중국에서 귀국 한 자, 조선의용군) 소련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소련에서 파견 된 자. 소련군 출신이나 행정,기술관료 출신), 갑산파(보천보 전투 등으로 동북항일연군과 공동 투쟁 한 자)을 잇따라 숙청하고 북한 권력을 독점했다. 조선 로동당에서 정적을 제거하고 구축한 만주파는 1967년에 당의 지도 이념으로 유일사상 체계를 채택하고 이후 북한은 주체 사상에 기초한 독자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걸어 가게 된다.
김일성은 만주국(만주지역 조선족 자치정부) 조선 공산당 활동가에서 소련군 예하 각 민족 빨치산부대로 그리고 2차대전 때는 소련측(좌파진영) 연합군 조선인(한국인) 부대로 활동했다
김일성은 민족주의자보다는 철저한 마스-레닌주의 노선 공산주의자이며 스탈린 추종세력이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스탈린을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후에 그는 바트당(아랍 사회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북한의 주체사상 김일성, 리비아의 카다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련 공산당 스탈린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독일 노동자당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이론 비슷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국영 자본체제) 이론이다 소련 공산당은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과 소련 공산노동당 그룹이 있다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이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라면 공산노동당 그룹이 교조주의자들이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사회주의 공화국(사회주의 국가) 세력은 국가자본주의 일본제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수립할 때 민족해방과 왕권신수설 전체주의 군주, 지주계급이나 매판 자본가를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혁명 체제 사회주의 국가 승리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개인 우상화, 신격화로 1인 장기집권으로 왕권신수설에 도취되고 있다
만주국을 승인한 국가
중국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역, 교통, 통신을 위해서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33년 국제연맹이 리튼 보고서(Lytton Report)를 채택하여 만주가 중국의 일부임을 선언하자 일본은 연맹에서 탈퇴한다. 미국은 만주국이 건립하자 무력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 관계의 변화를 거부하는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을 선언한다.
국제 연맹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만주국은 엘살바도르(1934년 3월 3일)와 도미니카 공화국(1934년), 소비에트 연방(사실상 1935년 3월 23일, 법률상 1941년 4월 13일), 이탈리아(1937년 11월 29일), 스페인(1937년 12월 2일), 독일(1938년 5월 12일), 헝가리 (1939년 1월 9일)에 승인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개전 이후, 만주국은 일본의 동맹국 독일의 지배를 받거나 영향하에 있던 국가인 슬로바키아(1940년 6월 1일), 프랑스(1940년 7월 12일), 루마니아(1940년 12월 1일), 불가리아(1941년 5월 10일), 핀란드(1941년 7월 18일), 덴마크(1941년 8월), 크로아티아 독립국(1941년 8월 2일)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영향하에 있던 중국 왕징웨이 정권(1940년 11월 30일), 태국(1941년 8월 5일), 필리핀도 만주국을 승인했다
만주국 인구와 오족협화
만주인(한족·만주족·한민족) 30,190,000명 97.8%
일본인 590,760명 1.9%
타인종(러시아인·몽골인 등) 98,431명 0.3%
-1932년 3월 1일 만주국 건국이후 만주지역 항일운동은 만주국 협화회(의회) 조선족 협화회(만주국 의회 조선족 의원, 조선족 자치조직)를 파악해야 잘 이해할 수 있다
만주국 협회(만주국 의회)는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일족(야마토 민족의 연합정부 오족협화를 의미한다
만주국은 강덕제를 원수로 하는 국가로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조선족), 야마토 민족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에 의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에 둔 국민국가를 표방했다. 그러나 실제 통치는 관동군이 주도하였다.
김일성(김성주)은 만주국 건국 이후 남만주나 동만주 지역에서 반일이나 반만주국(반만국) 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의 동생 김영주는 관동군 헌병 보조원[만주군 통역 ]으로 생활했다
만주국과 조선총독부는 다른 성격이다
만주국은 자치를 보장된 위성국가이며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직할지역이다
만주국 협화회에 가담한 조선족 자치조직이 만주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가 조선족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종일전쟁 때 중화민국 지원국과 일본제국 괴뢰국
중화민국 지원국:
미국 (1941-)
소련 (1937-1941, 1944-)
영국 (1942-)
나치 독일 (1933-41)
공동 교전국
몽골 몽골 인민공화국 (1945)
비시 프랑스 비시 프랑스 (1940)
일본제국 괴뢰국가:
만주국 (1932-)
몽강연합자치정부 (1936-)
왕징웨이 정권 (1940-)
둥방공자치정부 (-1938)
중화민국 임시정부 (-1940)
중화민국 유신정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쇼 인민전선론'이 채택되면서 유럽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여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기조가 일어나자, 당시 만주에 존재하던 공산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에 의해 '인민전선론'이 대두됐다
조국광복회 간부들은 대부분이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간부들로 채워졌으며, 군사활동뿐 아니라 국내 정치활동에도 주력, 기관지 <3·1월간>을 발간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성향을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자·천도교·지주까지 참가시켰다[조국 광복회와 보천보 전투]
북한 공산주의자 김일성, 김책, 강건 등 은 만주지역에서 만주국 조선 공산당 항일 운동이 소련정부의 대일정책에 따라 움직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이 중일전쟁때 중화민국 지원국일때 1937년부터 1941년까지는 활동이 대단했고 소련이 공식적으로 만주국을 승인할 시기에는 1941년 부터는 만주국 내부에서 공산당 활동이 침체되었고 협력자들이 등장했다 1944년 경부터 소련이 연합군으로 가담하여 반일투쟁을 주도할때는 만주국 내부 공산당 세력들이 반만주국 반일 투쟁 활동과 만주국 점령 군사훈련을 주도했다
만주 전략공세작전은 제1전선 구축 소련군 주도, 제2전선 구축 소련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한 극동지역 공산주의자 주축으로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만주국 오족협화] 소련 제1극동전선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연합으로 추진 되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과 소련의 만주국 승인 그리고 만주국 협화회 조선족 자치협화회 등을 정리될 때 정확하게 만주지역 조선족 좌파(소련 원조 공산당)나 우파(중국 장개석정부) 항일운동을 재정리할 수 있다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
남한(대한민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길림 연변조선족 자치정부 등 한민족(조선족)의 3개 정부입니다. 중국에 한국어(조선어)를 사용하는 조선족이 약192만명에서 약 200만명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위구르족(후이족=회족, 신장),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입니다
만국(만주국)은 한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일족(일본족, 야마토민족) 등 5개 종족 연합국이었습니다
만주국의 국기에는 노란색(만주족) 바탕 왼쪽 상단에 네 가지 색[빨간색(일본 민족), 파란색(한족), 하얀색(몽골족), 검정색(조선인)]의 가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족협화의 이념을 뜻합니다
조선족이 만주국에서도 조선족 자치정부로 참여하여 상류층으로 생활했습니다
동북3성 다수민족 한족,만주족과 소수민족 조선족, 거란족, 몽골족 자치정부
*파르티잔(Partizan, 빨치산)
1943년, 소비에트 유격대.
파르티잔(러시아어: партизан, 영어: partisan)은 무장한 전사로서 정규부대의 정식부대원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파르티잔을 음차한 빨치산이라는 단어로도 부른다. 제복이나 계급장 등도 없기 때문에 인식 내지 판별이 어렵다. 파르티잔 전투는 거의 예외 없이 침략군 내지 정복군, 점령군, 식민주의자 등에 대한 방어 전쟁을 수행한다. 또한 내전이나 기타 국가 내부의 분쟁에서도 볼 수 있다. 파르티잔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국민의 해방 요구에 응하여 전투 등을 수행한다. [소련군 제2극동전선군 제88독립저격여단이 각 민족 지역 빨치산부대이다]
단체
-소련 유격대
-조선인민유격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빨치산파
유사 단어
-시민군
-의병
-레지스탕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여 점령한 것은 1941년 4월이었지만, 그 해 6월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된 뒤에야 유고슬라비아의 공산당원들이 파르티잔 분대를 조직화하여 추축국의 점령에 대한 민중 봉기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1941년 9월까지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걸친 넓은 지역이 파르티잔과 체트니크에 의해 해방되었지만 이 두 운동단체가 주로 체트니크의 도발로 이내 내전에 휘말렸으며, 1941년 11월 독일군이 두 저항군 세력을 세르비아에서 모두 축출했다. 그 후 2년 동안 파르티잔은 독일군을 상대로 군사적으로 힘든 싸움을 벌였는데 체트니크가 기반을 잃은 반면 파르티잔은 수적으로 세력이 불어났다.
이것은 침략 추축군에 대한 통일된 저항정책으로 모든 인종의 유고슬라비아인을 흡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체트니크들은 세르비아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기본적으로 독일군과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다.
1943년말까지 연합군이 보기에 파르티잔은 독일군에게 맹렬히 저항하는 반면 체트니크는 상당수가 사실상 독일군과 협력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연합군측의 정부들은 체트니크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고 티토를 유고슬라비아 저항군의 지도자로 인정했다. 그때부터 영국과 미국의 무기와 장비가 파르티잔에게 계속 증량·공급되어 파르티잔들의 병력이 증강되었다.
1943년말까지 파르티잔이 약 30만 병력으로 늘어나 독일군 20개 사단을 물리칠 수 있었다. 파르티잔은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7차례 유도하여 다수의 적군이 다른 연합군 전선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1944년 여름에는 파르티잔이 유고슬라비아의 산악지방을 대부분 장악했으며, 10월에는 소련 적군(赤軍)의 베오그라드 해방전에 파르티잔 부대가 참가했다. 대전중에 파르티잔은 2차례의 정치회담(1942년 11월의 비하치 회담과 1943년 11월의 자즈체 회담)을 개최하여 그들이 해방시킨 지역들 내에 지방과 연방의 임시정부들을 수립했다. 파르티잔이 장악한 이 지방정부망은 공산당이 전후에 정치적 성공을 거두는 데 기여했다. 1945년까지 티토의 공산당은 정치적·군사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대전중 파르티잔 사이에 형성된 티토에 대한 충성심과 국민적인 감정이 1948년 티토가 스탈린의 정치적 공격에 저항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 파르티잔의 발음이 전와되어 빨치산이 되었다.→ 빨치산
제88독립 저격여단
제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는 소련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한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의 1개이다
제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제88독립 저격여단은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이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은 동 여단 제 1 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의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와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의 제88독립 저격여단 사실은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이 부대를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의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는 1939년경부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의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가 등장했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당국에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등 남은 자들도 물자의 부족으로 인해 활동의 계속이 곤란해 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동북 항일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 이 야영지에 따라 제88 독립 저격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나 나아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의 편성은 동북 항일연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의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의 대부분은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10%에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에 들어간 부대도 합류해, 제88독립저격여단의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은 소련의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을 받은 적군의 계급을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의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었고, 부지휘 관직에 붉은 군대(소련군)의 장교가 임명 되었다. 병사는 적군의 군복을 착용했다.
1944 년 4 월 현재의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중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과 - 스 메르시
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제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제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제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소총 대대
무선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각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각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년 9 월 ~ 1943 년 7 월 현재)은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정,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양.
제 88 여단의 병사는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과 파괴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그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의 주보중 1940 년 ~ 1943 년 사이에 총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독립저격여단 제 1 독립 저격 대대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고 소련군과 함께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인 수행과 이 때 발휘 된 용기"에 김일성에게는 적기 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독립저격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제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은 1945년 10월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령 제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이 사진은 김일성이 토벌군에 쫓기다가 소련으로 도주했을 당시 오케얀스카야에서 좌로부터 김철호(최현의 부인), 리영숙(안영의 부인), 김정숙(김일성의 부인), 황순희(류경수의 부인 조선혁명박물관장)의 모습이다.
1941년 동북항일연군 전투지휘자들이 소련 남부 야영 훈련장에서 촬영한 사진
[在南野營整訓的部分東北抗日聯軍指戰員攝於1941年。
前右金日成
一排右李英淑(第七軍戰士)、右三金貞淑(第二軍戰士)、右四黃順姬(第二軍戰士)、右五金哲鎬(第二軍戰士)。
二排右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
三排右一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三排右一柴世榮、右二季青。]
제88 독립저격여단 시절 사진. 좌로부터 김일성(金日成), 계청(季青, 중국인), 최현(崔贤), 안길(安吉)
제88독립 저격여단 소부대 활동시기 촬영한 사진[在小部隊活動時期的合影]。
金日成,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營長。
季青,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四營政治副營長。
崔賢,曾任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一師(後改為第四師)第一團團長、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三團團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第一連連長。
安吉,曾任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四團政委、第三方面軍參謀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政治副營長。
동북항일연군 지도여단의 일부[東北抗日聯軍教導旅部分乾部]
일렬(一列):심태산(沈泰山)、최명석(崔明錫)、김경석(金京石)、서철(徐哲)、장광적(張光迪)。
두렬(二列):바슈코비츠(瓦什科維茨,와십과유자)、최춘국(崔春國)、강신태(姜信泰)、양청민(楊清海)、도우봉(陶雨峰)、주암봉(周岩峰)。
삼렬(三列):장석창(張錫昌)、유철석(劉鐵石)、범덕림(范德林)、고만유(高萬有)、교수귀(喬樹貴)、유안래(劉雁來)、진덕산(陳德山) [1945年7月的合影(1945년 7월 촬영)]
1947년 5월, 왕효명. 팽시로, 왕일지 등 동북항일연군 관계자는 조선인 출신 동북항일연군 인사를 조선인민군 총사령부에서 만났습니다
[1947年5月,王效明、彭施魯、王一知分另受有關部門委派先後赴朝鮮平壤。圖為他們與原東北抗日聯軍的朝鮮戰友在朝鮮人民軍總司令部合影留念]。
앞열(前排):김일(金一)、주위(周偉)、왕일지(王一知)、왕효명(王效明)、안길(安吉)、팽시로(彭施魯)。
가운데열(中排):이영호(李永鎬)、최광(崔光)、김광협(金光俠)、심태산(沈泰山)、최춘국(崔春國)、유창권(柳昌權)、이을설(李乙雪)。
뒷열(後排):박우섭(樸禹燮)、김려중(金麗重)、최용진(崔勇進)、강상호(姜尚鎬)、유경주(柳京珠)、오진우(吳振宇)、김창봉(金昌鳳)、오백룡(吳伯龍)、전문섭(全文燮).
소련군을 환영하는 김두봉 북한 초대 국가수반과 북한지역 지도부들
高容姫(고용희)
高容姫 コ・ヨンヒ、朝鮮語: 고용희、1952年6月26日 - 2004年8月13日[注 1]は、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以下北朝鮮)の人物。同国の最高指導者金正日の愛人の一人であった。金正日からは日本風に「あゆみ(아유미)」と呼ばれ、最も寵愛を受けていたとされる。金正哲・金正恩・金与正の実母である。
[고용희(아유미)는 1952년 6월 26일 - 2004년 8월 13일, 북한의 인물. 국가의 최고 지도자 김정일의 애인(부인) 중 하나였다. 김정일은 일본 이름으로 "아유미"라고 가장 총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철 · 김정은 · 김여정의 생모이다.]
1.経歴(경력)
大阪生まれの在日朝鮮人二世。平壌芸術大学卒業後、1971年頃、万寿台芸術団に入り、舞踊家として活動。喜び組の接待役の1人となった。そこで金正日に見初められて、彼の「3番目の妻」となった。1973年の万寿台芸術団訪日時には、芸術団の一員として、柳日淑(リュ・イルスク、류일숙)の芸名で訪日している。
[고용희는 오사카 태생의 재일 조선인 2세이며 평양 예술대학 졸업 후 1971년경 만수대 예술단에 들어가 무용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기쁨조의 접대역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래서 김정일이 그녀를 보고 눈에 반하게 되어 그의 '세 번째 아내'가 되었다.
1973년 만수대 예술단 방일(訪日)때에는 예술단의 일원으로 유일숙(柳日淑)의 가명으로 방일했다.]
1977年ごろ、金正日と同居を始め、1981年に金正哲、1984年に金正恩、1988年に金與正をもうけた。1998年ごろ乳癌の診断を受け、片方の乳房の切除も検討されたが、乳房切除で自身の金正日の妻としての地位が危うくなると判断。医療陣の引き止めにもかかわらず、切除の代替案として抗がん治療を選択した。これが結局、5年後に再発した。
[1977년경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 1981년 김정철, 1984년에 김정은, 1988년에는 김여정을 출산했다. 1998년경 유방암의 진단을 받아 한쪽 유방 절제(乳房切除)도 검토 되었지만, 유방 절제로 자신이 김정일의 아내로서의 지위가 위태로워 질 것으로 판단. 의료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술의 대안으로 항암 치료를 선택했다. 이것이 결국 5년 후 재발했다.
*유방절제(乳房切除): 유방암을 치료하거나 예방하기 위하여 유방을 수술적으로 잘라 내는 일. ]
2004年の夏、フランス・パリのジョルジュ・ポンピドゥー欧州病院(英語版)で乳癌により死去。遺体は、豪華な棺に入れられて特別機で北朝鮮まで搬送された[1]。北朝鮮政府は国交のないフランスでの「国母」の死亡に困惑した。当時の韓国政府が遺体収拾と、平壌へ運ぶ過程を助けたことが報道されている。英姫の訃報に接し、夫である正日は泣き崩れたといわれる。
[2004년 여름 프랑스 파리의 조르주 퐁피두 유럽병원에서 유방암에 의해 사망하였다
시신은 호화로운 관에 넣어져 특별기로 북한까지 이송됐다
북한 정부는 국교가 없는 프랑스에서 '국모(國母)'의 사망에 당황했다. 당시 한국 정부가 시신 수습과 평양에 운반 과정을 도운 것이 보도 되고 있다. 고용희의 부고(訃報, 사망 통지)를 접하고 남편인 김정일은 울음을 터뜨렸다고 알려지고 있다]
偶像崇拝と中止(우상숭배의 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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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年頃から金正日は後継と見なしていた金正恩の生母として「共和国の敬愛なる母」として偶像化を推進。父親が日本の軍隊の武器を製造する工場の幹部と、朝鮮総連を通じて北朝鮮国内に広まることが危惧されたため中断された
[2002년경부터 김정일은 후계자로 간주했던 김정은의 생모(生母)로 ‘공화국의 경애하는 어머니’로 우상화를 추진하였다
고용희의 부친(父親)이 일제시대 일본 군대의 무기를 제조하는 공장의 긴부였다는 사실이 조총련을 통해 북한 국내로 확산될 것으로 우려돼 중단됐다 ]
2.前歴(전력)
すでに2006年に韓国の国家情報院は公式に(高春行説を)否定していたが、英姫は高太文の娘「高春行」であるという説が、これまで検証されることなく日本では通説とされていた。しかし2011年、デイリーNKの高英起(現在はデイリーNKジャパン編集長)が、日本の公式記録や北朝鮮の公式資料を基に、詳細に調査して週刊文春にスクープ記事を発表すると、この記事をきっかけに日本でも「高春行」説は見直され、「高ヨンジャ」説が有力とされるようになった。その後の、高英起やデイリーNKの綿密な取材に基づいた続報によって高英姫=高ヨンジャ同一人物説は、完璧に立証されて現在に至る.
[이미 2006년에 한국의 국가 정보원은 공식적으로 (고춘행 설을) 부정하고 있었지만, 고용희(고영희)는 고태문의 딸 ‘고춘행(高春行)‘이라는 설이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일본에서는 통설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2011년 데일리NK 고영기(高英起, 현재는 데일리 NK 편집장)가 일본의 공식기록과 북한의 공식 자료를 바탕으로 상세하게 조사하고 주간 문춘(週刊文春)에 특종 기사를 발표하면서 이 기사를 계기로 일본에서도 '고춘행‘설은 검토이 되었고 ’고영자‘ 설이 유력하게 여겨지게 됐다.
그 이후의 고영기(高英起) 데일리 NK의 면밀한 취재에 근거한 속보에 의해 ‘고영희=고영자’ 동일 인물설은 완벽하게 입증되어 현재에 이른다. ]
(1)高ヨンジャ説(고영자 설)
英姫の日本での登録名は高姫勲(コ・フィフン、朝: 고희훈、Ko Hŭihun / Go Huihun)で、後に改名した高ヨンジャであるとする現在の説。
デイリーNKによると、彼女は1952年6月26日生まれで、父親は現在の済州市朝天邑(朝鮮語版)出身、済州高氏の高京澤(1913年生誕〜1999年死亡)で、母親は李孟仁。高京澤の父高永玉は朝鮮王朝に仕える下級文官(従仕郎)であり、当時経済水準の低かった済州島において比較的裕福な暮らしができたという[7]。京澤は、1929年に日本に渡り、大阪の廣田裁工所[8]に勤務。廣田裁工所は民間のカッターシャツなどを製造していたが、1938年に陸軍管轄となり軍需被服や天幕を製造していた。京澤の勤務期間や役職は不明だが、上級管理職を務めていたと考えられている[9]。戦後、密航船を運営していたが逮捕され、1962年10月に強制退去となり第99次帰還船で北朝鮮に帰国した[10]。北朝鮮では咸鏡北道にあるミョンガン化学工場の労働者として働いていたという。家族には、金策工業大学に通う長男、商業高校を卒業し販売員となった長女、高等中学校を卒業した次男、咸興薬学大学に通う三女ヨンスクがいる。高ヨンジャは次女で、朝鮮では名前をヨンジャに変え、無料で奨学金まで受けながら音楽舞踊大を卒業し、「功勲俳優」となり、「金日成主席の配慮によって国家授勲の栄誉をにない、表彰までされた」という.
妹のヨンスクは、2001年10月アメリカへ亡命した高英淑と符合する。日帝残滓として子の付いた日本風の女性名「ヨンジャ」から「ヨンヒ」に改名したのではないかとされる。
デイリーNKは、「高英姫」のハングル表記が「고용희」であり、「英(ヨン)」の部分が一般的に使用されている「英(영:ヨン)」ではない可能性が高いと2012年から指摘していたが[14]、同年6月前後に明らかになった彼女の墓標には「고용희」と記されていることが明らかになり、この説も立証された。なお、当時の北朝鮮では漢字を使用していなかったため、漢字名は不明であるが、高英起は「踊る姫」をイメージして「踊姫(용희)」の可能性が高いと主張している。
[고영희의 일본에서의 등록 이름은 고희훈(高姫勲, Ko Hŭihun / Go Huihun)에서 나중에 개명한 고영자라고 하는 설(設)이다.
데일리 NK에 따르면, 그녀는 1952년 6월 26일 태생으로 그녀의 부친(父親)은 현재 제주시 조천읍(済州市 朝天邑) 출신으로 고경택(高京澤(1913년 탄생 ~ 1999년 사망)이고 그녀의 모친(母親)은 이맹인(李孟仁)이다
고경택의 부친 고영옥(高永玉)은 조선왕조를 섬기는 하급문관(종사랑,従仕郎)이었으며 당시 경제수준이 낮았던 제주도에서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경택은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육군성이 비밀로 지정한 오사카(大阪)의 '히로타 군복공장(廣田裁工所)'에서 근무했다
'히로타 군복공장(廣田裁工所)은 민간 커터셔츠 등을 제조하고 있었으나 1938년에 육군 관할이 되었고 군수 피복과 천막을 제조하고 있었다
고경택의 근무 기간이나 직책은 불분명 하지만, 고위 관리를 맡고 있었다고 생각 되고 있다
전쟁 후 밀항선을 운영하다가 체포되어 1962년 10월에 강제 퇴거가 되었고 제99차 귀환선으로 북한으로 귀국했다
북한에서는 함경북도에 있는 명강화학공장의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족으로는 김책공업대학에 다니는 장남,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판매원이 된 장녀,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차남, 함흥약학대학에 다니는 셋째 딸 영숙이었다.
조선에서는 이름을 고영자로 바꾸고 무료로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음악무용대를 졸업하고 '공훈 배우'가 되었고, ‘김일성 주석의 배려로 국가수훈의 영예를 얻지 못했지만 표창까지 받았다’고 한다.
여동생 영숙은 2001년 10월 미국으로 망명한 고영숙(高英淑)와 부합(符合, 일치)한다. 일제 잔재로서 아이가 있는 일본풍의 여자 이름 '영자'에서 '영희'로 개명한 것이 아닐까 한다.
데일리NK는 "고영희(高英姫)"의 한글 표기가 '고용희‘이며, ‘영(英)’ 부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英(영)"이 아닌 가능성이 높으면 2012년부터 지적했지만, 같은 해 6월 전후에 밝혀진 그녀의 묘비에는 '고용희'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이 설도 입증 되었다.
또한 당시 북한에서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자 이름은 불명이지만, 고영기(高英起)은 "踊る姫(춤추는 공주.용, 희)의 이미지로 "踊姫(용희,무용공주) "의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 있다.]
家族構成[가족구성]
父: 高京澤(コ・ギョンテク)(1913年8月14日生)※強制退去により1962年北朝鮮へ帰国[부친 : 고경택 (1913년 8월 14일 출생), 강제 퇴각 1962년 북한으로 귀국]
母: 李孟仁(1913年8月3日生)※帰国前に梁明女から改名 姉: ?[모친: 이맹인(1913년 8월 3일 출생) ,※ 귀국 전에 양명녀로부터 개명, 언니:?]
兄: 高相勲(コ・サンフン)(1951年2月12日生)※北朝鮮では高ドンフンに改名[형: 고상훈(1951년 2월 12일생) ※ 북한에서는 고동훈으로 개명]
弟: ?
妹: 高恵勲(コ・ヘフン)(日本名:高田恵美 1955年1月17日生)※米国に亡命した高ヨンスク[동생 : 고혜훈 (일본어 이름 : 가오다 미, 1955년 1월 17일 출생) ● 미국으로 망명한 고영숙.]
(2)高春行説[고춘행설]
英姫の本名は高春行(コ・チュネン〈チュンヘン〉、朝: 고춘행、Ko Ch'unhaeng / Go Chunhaeng)で、1950年3月11日に生まれ、本貫は済州高氏とした説で、日本では従来定説だった。しかし、デイリーNKの高英起は、春行の生年月日(1950年3月11日)が、英姫とはまったくちがうことを日本の公式資料から明らかにした。さらに春行が同じ帰国者男性と結婚して二人の子どもがいる記事が、北朝鮮公式メディアに二度にわたって掲載されていることを突き止めた。これによって、春行と英姫は別人であることが明確になった。
春行は、日本の大阪市生野区鶴橋のコリア・タウンで生まれた。家は父と母親、兄と2人の弟、妹の7人家族だった。北鶴橋小学校在学中の1961年11歳の時、5月に家族全員とともに北朝鮮に渡った。父の高太文は北朝鮮国内で柔道の指導者となり、同国の柔道の発展に力を尽くした。毎日新聞編集委員の鈴木琢磨は、『金正日と高英姫』のなかで「高英姫こそ高春行」と主張していたが、英起の新説が発表されると「特集ワイド:北朝鮮後継者・金正恩氏の母の軌跡朝鮮画報に定説覆す情報」(『毎日新聞』夕刊2011年6月23日号記事)のなかで「高ヨンジャこそ高英姫」だと自説を覆している。
[고영희(英姫)의 본명은 고춘행(高春行, Ko Ch'unhaeng / Go Chunhaeng)으로 1950년 3월 11일 출생이다
본관(本貫)은 제주 고씨(済州高氏)라고 한 설로 일본에서는 종전 정설(従来定説)이었다
그러나 데일리 NK의 고영기는 춘행의 생년월일(1950년 3월 11일)이 영희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일본의 공식 자료에서 밝혔다.
또한 춘행(春行)이 동일한 귀국자 남성과 결혼하여 2명의 자녀가 있는 기사가 북한 공식 매체에 두 차례에 걸쳐 게재 되는 것을 밝혀냈다. 이는 춘행(春行)와 영희(英姫)은 다른 사람임이 명확 해졌다.
춘행(春行, 하루유키)는 일본 오사카시(大阪市) 이쿠노구(生野区) 츠루하시(鶴橋)의 코리아 타운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2 명의 남동생, 여동생의 7 명의 가족이었다. 북쪽 츠루하시 초등학교 재학 중인 1961년 11세 때 5월에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 갔다.
그녀의 부친인 고태문(高太文)은 북한 내에서 유도의 지도자가 되어 나라의 유도의 발전에 힘썼다.
마이니치신문 편집위원(毎日新聞編集委員) 스즈키 타쿠마는 "김정일과 고영희"속에서 "고영희이야 말로 고춘행"이라고 주장했지만, 고영 기의 학설이 발표되자 '특집 와이드 : 북한 후계자 김정은의 어머니의 궤적 조선 화보에 정설 뒤집는 정보 "( 「마이니치 신문」석간 2011년 6월 23일자 기사) 속에서 "고영자이야 말로 고영희 "이라고 자설(自説)을 뒤엎고 있다 .]
a.家族構成[가족구성]
父: 高太文(コ・テムン) - 柔道家、プロレスラー[아버지: 고태문 - 유도가, 프로 레슬러]
母: ? 兄: 高勝恩(コ・スンオン) - 北朝鮮国家体育委員会柔道指導員[어머니:? 형 고승은-북한 국가체육위원회 유도지도원]
弟: 高勝方(コ・スンバン) - 平壌演劇映画大学映画技術教員[동생 고승방-평양연극영화대학 영화기술교원]
弟: 高勝海(コ・スンヘ)[동생:고승해]
妹: 高淑煕(コ・スクヒ)[여동생:고숙희]
b.父・大同山[부친 대동산]
春行の父、高太文(コ・テムン、朝: 고태문、Ko T'aemun / Go Taemun)は、1920年1月10日生まれの柔道家(講道館六段とされる)で、後に大阪でプロレスラーとなった。日本通名で高山州弘、リングネームは大同山又道と言った。日本のプロレス草創期、1956年(昭和31年)2月に新団体「東亜プロレスリング協会」を旗揚げしたことでプロレス史に名を残した。
大同山は当初より朝鮮民族であることを自ら誇っていた[注 2]。しかし、日本タイトルを賭けて行われた同年10月15日から10月24日のウエート別統一日本選手権大会において芳しい成績を収められなかった[20]。この試合で戦績を残せたのは力道山率いる日本プロレスだけで、敗退した他団体(東亜プロレス含む)は翌年までに活動停止・消滅してしまう。彼は自団体と命運を共にし、プロレスそのものから廃業した。
[고춘행의 부친인 고태문(高太文, Ko T'aemun / Go Taemun)은 1920년 1월 10일 태생의 유도가(柔道家, 유도 6단) 출신으로 오사카에서 프로 레슬러 선수가 되었다.
일본 통명(通名)으로 高山州弘(다카야마 주 히로시), 링 네임은 대동산(大同山) 또는 도(道)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프로 레슬링 초창기 1956년(쇼와 31년) 2월에 새로운 단체 "동아 프로레슬링 협회 '를 출범함으로써 프로 레슬링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대동산(大同山)은 당초부터 조선 민족임을 스스로 자랑했다
그러나 일본 타이틀을 걸고 진행된 같은 해 10월 15일부터 10월 24일의 비중 다른 통일 일본 선수권 대회에서 향기로운 성적을 거둘 수 없었다 이 경기에서 전적을 남길 것은 역도산이 이끄는 일본 프로 레슬링만으로 탈락한 다른 단체(동아 레슬링 포함)은 다음 해까지 활동 정지, 소멸해 버린다. 그는 자기 단체와 운명을 함께하고 프로 레슬링 자체에서 폐업했다.]
3.その他[기타]
英姫を指す花としてクロフネツツジが使われている。金正恩の母親として偶像化を図る際にも使われている。[21]
藤本健二が北朝鮮から脱出する際、便宜を図ったとされる。2012年6月30日放送のJNN系の報道番組『報道特集』で、英姫の肉声が流れた際、藤本が涙ながらに証言している。
[영희를 가리키는 꽃으로 철쭉이 사용되고 있다. 김정은의 어머니로 우상화를 도모 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후지모토 겐지가 북한에서 탈출 할 때 편의를 도모했다고 한다. 2012년 6월 30일 방송 JNN 계열의 보도 프로그램 '보도 특집'에서 영희(英姫)의 육성이 흘러 나왔을 때 후지모토가 눈물로 증언하고 있다]
生誕:1952年6月26日
死没:2004年8月13日(52歳没)
政党:朝鮮労働党
1989년 혁명과 국영자본체제 붕괴[동유럽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모습, 독일 재통일의 시초이자 1989년 혁명의 대표적인 사례다
1989년 혁명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 초까지 발생한 혁명의 물결의 일부로 동유럽과 기타 지역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게 된 결과를 낳았다. 이 혁명은 국가들의 가을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1848년 혁명을 언급할 때 때때로 사용되는 국가들의 봄이라는 용어에 초점을 둔 것이다.
1989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붕괴되면서 전체적인 혁명의 사건들이 발생했다. 이는 헝가리 인민공화국, 동독,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도 혁명이 발생했다. 이러한 혁명의 전개 과정 중 거의 대부분의 사건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시민 저항운동의 광범위한 사용으로, 일당제의 지속에 대해 대중적인 반대여론을 형성하고, 변화의 요구를 거세게 주장하는데 기여했다. 루마니아는 동구권 국가 중 공산정권이 폭력적으로 붕괴된 유일한 국가였으며, 루마니아와 몇몇 다른 국가들의 정권은 대중에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은 중국에서 주요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했지만, 시위 동안 용기 있는 저항들의 모습은 전세계의 다른 지역에 또다른 시위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날인 6월 4일, 폴란드의 연대자유노조는 부분자유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어 1989년 여름 평화로운 정권 이양에 성공했다. 헝가리는 물리적인 철의 장막을 걷어내어 동독의 난민들이 헝가리로 이주하게 되었고, 이는 동독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는 라이프치히를 비롯한 동독 내 여러 도시의 대규모 시위와 베를린 장벽 철거의 계기가 되었고, 1990년 독일 재통일의 상징적 길잡이 역할을 했다.
1991년 말 소련의 해체로 조지아,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몰도바,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11개국이 그 해 동안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발트 3국은 독립을 인정받았다. 나머지 소련의 영토는 1991년 12월 러시아로 재탄생되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산주의가 폐지되었다. 1992년 유고슬라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슬로베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국명을 고쳤고, 이 국가 역시 2006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분리되었다. 2008년 세르비아는 다시 세르비아와 코소보로 분리되었지만, 코소보는 현재 미승인 국가로 남은 상태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당 통치를 폐지한지 3년 후인 1992년 해체되어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도 이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에티오피아 인민민주주의공화국, 남예멘, 몽골 인민공화국이 1990년대 후반까지 공산주의를 폐지했다. 공산주의의 폐지로 냉전도 종결되었다.
시장경제의 다양한 형식을 채택한 이후, 구 동구권 및 공산주의 국가들은 초기에 삶의 질이 일반적으로 쇠퇴했다. 정치적 개혁도 동반되어 공산당이 일당체제를 유지하는 국가는 중국, 쿠바, 라오스, 베트남이다. 북한의 경우 헌법 개정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가 아님을 밝혔지만 사실상 이들의 통치 체계는 스탈린주의에 가깝다. 서구의 많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조직은 사회민주주의의 원칙을 견지하며 기본 이념을 바꾸었다. 이탈리아와 산마리노의 공산당은 타격을 입었고, 마니 풀리테는 1990년대 초 이탈리아 전체를 휩쓸었다. 그러나 분홍색 물결은 1999년 베네수엘라에서 시작된 이래 1990년대 말 남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고, 2000년대 초까지 이 지역을 휩쓸었다. 유럽의 정치 구조도 크게 개편되어 동구권 국가 다수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유럽 연합에 가입해 더욱 강한 경제 및 사회적 통합을 이룩했다.
1. 혁명 전조
1980년 말 발트 3국과 캅카스 산맥의 국민들은 모스크바의 정부에 자치를 요구했고,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의 몇몇 지역과 정당에서 통제권을 잃고 있었다. 1988년 11월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자치를 선언했고, 이는 소비에트 연방 내의 다른 공화국들의 자치 선언에도 영향을 미쳤다.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1989년 혁명의 주된 원인 또는 부분적인 원인이 될 정도로 소비에트 연방 내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낳았다. 정치적으로 재앙적인 결과가 나온 또다른 이유는 소련의 새로운 정책인 글라스노스트가 채택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경제적인 피해는 추산하기 어렵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따르면 소련은 180억 루블을 오염 및 정화에 사용했고, 결정적으로 이것이 소련의 파산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2. 개요
혁명의 역사적인 순간은 1989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혁명은 헝가리 인민공화국, 동독,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등 다른 동유럽 국가들로 퍼졌다. 이러한 혁명의 공통점은 시위가 거대한 봉기로 이어졌고, 일당 정치의 지속에 대한 민중의 반대와 변화의 압력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혁명 중 루마니아만이 유일하게 유럽 동구권에서 공산 정권이 폭력에 의해 몰락한 국가였다. 루마니아 정권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민중에 폭력이 가해진 사건이 여럿 있었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변화를 유도하지는 못했지만, 세계 곳곳의 다른 민중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같은 날인 6월 4일, 폴란드의 부분적 자유 선거에서 폴란드 자유 노조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1989년 여름 폴란드의 공산 정권은 평화적으로 몰락했다. 헝가리는 철의 장벽을 해제하여 동독 주민들이 헝가리로 이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는 결국 동독 지역의 불안정화를 야기했다. 이는 라이프치히와 같은 대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것의 한 원인이 되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에 따라 1990년 독일의 재통일이 이뤄지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 말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가 이루어짐에 따라 14개국이 독립했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조지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990년과 1991년 사이에 독립을 선포했고, 나머지 영토는 신생 공화국인 러시아 연방에게 1991년 12월 넘어갔다. 1990년부터 1992년 사이에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도 공산주의를 폐지했다. 1992년 유고슬라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슬로베니아,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으로 분리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국명을 변경했다. 이후 2006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분리되었고, 2008년 세르비아는 다시 코소보와 세르비아로 분열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89년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로 1992년 평화롭게 분리되었다. 기타 사회주의 국가에게도 혁명은 영향을 미쳤다.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주의공화국, 남예멘이 공산주의를 버렸고, 몽골 인민 공화국에서는 혁명이 발생해 공산주의의 일당 체제가 붕괴되었다. 소련과 사회주의의 붕괴는 냉전의 공식적인 종식을 알렸다.
다양한 형태의 시장 경제를 채택하는 동안 생필품의 가격이 일반적인 수준으로 낮춰졌다. 정치적 개혁은 여러 지역에서 다양화되었지만, 중국, 쿠바, 라오스, 베트남, 북한은 전세계에서 일당 체제를 유지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서구의 수많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단체가 그들의 이념을 사회 민주주의로 변경하였다. 이탈리아와 산마리노의 공산당은 이탈리아 정치 개혁으로 1990년 위기를 맞이했다. 유럽의 정치도 상당히 바뀌었는데, 과거의 동구권 국가들이 북대서양 조약 기구, 유럽 연합 등에 가입하여 유럽 대륙 간의 경제적, 사회적 통합이 강화되었다.
3. 동구권 외부의 세계
1986년 2월 필리핀에서는 독재 정권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피플 파워 혁명을 통해 몰아내고 새로운 대통령으로 코리 아퀴노를 선출했다. 1989년 혁명의 도미노 효과로 세계 각국의 다른 정권들도 영향을 받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헤이트 정권과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은 1990년대부터 서구의 자금 및 정치적 지원이 미약해지자 서서히 약화되었으며, 대한민국, 수리남, 중화민국, 니카라과, 인도네시아, 가나, 북예멘, 남예멘을 비롯한 여러 정부에서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1991년 인도 정부는 사회주의 노선을 버리고 신자유주의를 채택했다.
4. 배경
(1)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침공하고 점령했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이후 독일은 폴란드를 병합했지만, 이후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을 침공했다. 소련은 이후 미국과 더불어 연합국에 가담하여 독일군과 맞서 싸웠고, 폴란드와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오스트리아 등으로 진격하며 독일군을 압박했다. 1945년 4월 29일, 소련군은 나치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에 입성했고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소련에 항복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나치 독일이 반공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에 동유럽 곳곳에서 나치 독일은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고, 이 결과 반나치 저항 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후 테헤란 회담과 얄타 회담에서 연합국은 중부 및 동부 유럽에서 소련의 지위를 인정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은 미국에 맞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부터 스탈린은 중국 내 공산당을 지원하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데 기여했고, 1950년 한국 전쟁에서 북한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소련은 아프리카 및 중동 지역에 개입해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아랍 국가들을 지원하고 앙골라 내전과 모잠비크 내전, 에티오피아 내전 등에 개입했다. 아시아 지역에서도 베트남과 라오스, 캄푸치아 민주 전선을 지지하고 미국과 동맹을 맺은 파키스탄을 견제하기 위해 이란 및 인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동유럽을 비롯한 각국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반대 운동이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소련에 무력으로 점령당한 발트 3국은 1956년까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글 작전을 비롯한 각종 게릴라 전쟁을 수행했다. 동독에서도 스탈린의 죽음 이후 지나치게 전개되었던 스탈린화에 반대해 동독 노동자들이 1953년 6월 16일부터 파업 시위를 벌였지만 소련군과 동독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같은 해 체코슬로바키아의 플젠에서도 공산당의 화폐 개혁 및 정치에 반대하여 봉기가 일어났다. 더 큰 규모의 봉기가 1956년부터 발생했다. 1956년 3월 조지아의 트빌리시에서는 탈스탈린화에 힘입어 학생들과 국민들은 소비에트 정부의 변화와 조지아의 독립을 요구했다. 사태는 6일 만에 진정되었지만 조지아 정부와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56년 6월 폴란드 포즈난에서 시민 봉기가 일어나 정부의 정책 변화를 촉구했고 같은 해 10월 폴란드 당국은 국민들에게 사회주의의 새로운 길을 약속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은 소련의 동유럽 정책에 위기를 가져왔다. 새로 집권한 임레 너지는 공산주의 채택 이후 헝가리의 경제 악화 및 스탈린의 죽음으로 소련 중심의 정책에서 탈피하고자 했고, 미국의 지지로 봉기를 일으켰다. 헝가리에서는 범국민적인 반소 운동이 제기되었고, 병사들과 무장한 시민들이 헝가리 정부에 맞섰다. 그러나 소련군의 개입으로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헝가리 혁명 이후 소련에 대한 반대 운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1960년 중후반부터 다시 반소 운동이 재개되었다. 아르메니아에서 1965년 아르메니아 집단학살에 대한 신원 복구 및 서아르메니아 합병을 소련 측에 요구했지만 이것이 묵살되자 봉기가 일어난 것이었다. 이후 소련 정부는 이를 일부 수용해 치체르나카베르드를 건립했다. 더 큰 규모의 반소 운동은 1968년 프라하에서 발생했다. 이것이 프라하의 봄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정부의 민주화 및 탈스탈린화를 요구했지만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의 침공으로 민주화 운동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반소 운동은 이후 폴란드, 소련 등지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이후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소련의 중앙집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2)폴란드 자유 노조 수립
1980년대 폴란드에서 노동자 조합이 독립적인 노조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는 1980년 9월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자유노조의 설립으로 이어졌으며 이 노조는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81년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수장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연대자유노조를 약화시키고 폴란드에 계엄령을 선포해 노조를 탄압했다. 노동조합의 모든 인원들이 투옥되었지만 공산주의 역사상 노동 조합이 국가의 기능을 반영하지 않고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했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3)고르바초프의 등장
몇몇 동구권 국가들의 개혁적 정책이 무산되었지만, 1950년대부터 제한적으로 정치 및 경제면에서 개혁이 시작되었다. 뒤이어 1985년 집권한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부분적 개혁에서 전반적인 개혁을 생각하고 있었고, 조금 더 거대한 자유화를 향한 동향을 나타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의 젊은 지식인들인 아파라트치크 계층이 고르바초프의 주도 하에 브레즈네프 침체기 동안 일어났던 여러 문제들을 되돌리기 위해 기능적 개혁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심각한 경제적 후퇴에 직면했고, 이를 되돌리기 위해 서구권의 기술과 신용이 필요했다. 소련을 유지하는 군대의 비용은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기에 소련의 위성국들에게 맡겨졌다.
주요 개혁의 첫 신호는 1986년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추진하고, 페레스트로이카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등장했다. 글라스노스트는 개방을, 페레스트로이카는 경제 구조의 재편을 의미한다. 1989년 봄이 되면서 소련은 언론의 자유화를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다당제 후보제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소련인민대표대회를 개최했다. 글라스노스트가 개방과 정치적 비판을 지지했지만.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입장과 궤를 같이 하여 허용된 것이었기에 여전히 제한은 많았다. 동구권의 다른 국가들은 여전히 비밀 경찰과 정치적 압력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모스크바 정부의 가장 큰 장애물은 서방 국가들을 철의 장막으로부터 차단하면서도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이었다. 소련의 군사적 개입이 중앙 유럽이나 동유럽 일대에서 시작될 것처럼 보였지만 모스크바 정부가 국가의 개편을 위해 서방 국가의 경제적 지지를 얻는 것은 어려워보였다. 고르바초프는 중앙 유럽 및 동유럽의 위성국가 정부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따라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헝가리와 폴란드의 개혁주의자들은 동에서 서로 확산되는 자유화의 물결에 의해 지나치게 고무되었고, 다른 동유럽 국가들은 회의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개혁의 혐오감을 주장했다. 과거 경험 상 소련의 개혁은 통제가 가능했지만 기타 국가에서 변화에 대한 압력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이러한 정권은 소련의 군대와 그들의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소련식 권위주의를 통해 정권을 유지시켰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실패로 끝날 것처럼 보였는데, 그 이유는 정통 공산주의자들인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불가리아의 토도르 지프코프, 체코슬로바키아의 구스타우 후사크, 그리고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정권을 유지하며 변화에 대한 요구를 묵살했기 때문이다.[28] 이는 동독의 중앙위원회 중 한 사람이 "만약 당신의 이웃이 새로운 벽지를 붙일 때, 당신도 그렇게 할 필요는 없죠."라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5.공산국가의 변화
(1)중화인민공화국: 톈안먼 시위
베이징대 학생들은 '민주살롱(Democracy Salon)'이라는 동아리를 조직하고 중국민주의 앞날에 대해 열렬한 토론을 벌리곤 했다. 6.4민주운동의 주역 왕단(王丹)이 이날 모임에서 발언하고 있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 서거
Students on Tiananmen Square 23 years ago were dispersed with tanks and bullets
1982년부터 집권한 중국의 새 지도자 덩샤오핑은 1984년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발달시켜 지역 시장주의를 도입하였지만, 정치적 변화는 정지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중국 학생들의 첫 시위가 1986년 12월 헤페이에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해외 유학의 기회 제공 및 캠퍼스 내에서의 선거, 그리고 서구 팝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접근 허용을 요구했다. 그들의 시위는 정치적 분위기가 완화되고 개혁의 국면이 지연될 시기를 이용한 것이었다. 의장이자 덩샤오핑의 피보호자, 그리고 개혁지지자였던 후야오방은 시위에 대한 책임으로 중국 공산당에서 1987년 1월 사임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톈안먼 시위는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후의 국장 당시 10만 명의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그것을 지켜보기 위해 모였다. 그러나 대강당에서 어떠한 지도자들도 나오지 않았다. 운동은 7주 동안 지속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시위 중 3월 15일 중국을 방문할 당시, 많은 해외 언론 기자들이 베이징에 있었고, 그들은 시위자들의 생생한 모습을 담으며 유럽에서 있었던 자유의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소련보다 먼저 급진적 경제 개혁을 시작한 중국의 지도자들과 그리고 공산당의 국무위원인 자오지양은 정치적 개혁을 추구하겠다고 밝혔으며 색깔 혁명처럼 무질서를 유발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은 시도하지 않았다. 1989년 6월 4일 전차가 톈안먼 광장에 진입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베이징에서 시위에 대한 군사적 진압은 많은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사상자는 여러 통계치에 따라 달랐기에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2)폴란드
폴란드를 방문한 부시 대통령과 회담을 하는 레흐 바웬사 폴란드 대통령
1988년 4월과 5월, 폴란드에서는 전국적으로 파업이 벌어졌다. 이후 두 번째 파업이 8월 15일부터 시작되었다. 8월의 며칠 동안 17개의 광산이 파업에 들어갔고, 이후 8월 22일부터는 그단스크 정박항의 노동자들을 비롯한 각지의 정박항 노동자들도 파업을 시작했다. 이는 1980년대 초 불법이었던 연대자유노조에 대해 노동자들이 다시 합법 노조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한 것이 발단이었다. 1988년 8월 31일 연대자유노조의 지도자 레흐 바웬사는 공산주의 당국의 초청으로 바르샤바로 가서 그들과 회담을 했다. 1989년 1월 18일 제10차 폴란드 연합노동당에서 울프리히 자루젤스키 의장은 합법화를 위해 연대자유노조와의 공식적인 협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이 좌절될 경우, 모든 당 지도부가 사퇴할 것을 압력받았을 때 달성될 수 있었다. 1989년 2월 6일 공식적인 회담이 바르샤바 대회의실에서 시작되었고 4월 4일, 역사적인 폴란드 원탁회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서 연대자유노조는 합법성을 인정받았고, 1989년 6월 4일까지 폴란드 자유 의회 선거에 대해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연대자유노조는 폴란드의 모든 선거에 압승을 거두었고, 이들은 대통령 직을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1989년, 공산당의 두 동맹체였던 폴란드 연합인민당과 폴란드 민주당은 폴란드 연합노동당과의 동맹을 깨뜨리고 연대자유노조에 대한 지지를 선포했다. 폴란드의 마지막 공산당 총리였던, 체스와프 키슈차크는 비 공산당 계열이 행정부를 편성할 수 있도록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노조자유연대가 정부를 만들 유일한 정치적 집단이 되자, 노조자유연대에서 총리가 나올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1989년 8월 19일, 반공주의 편집자이자 노조자유연대의 지지자인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가 폴란드의 총리로 임명되었고, 1968년의 프라하의 예처럼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개입해야 한다는 요청에도 소련은 어떠한 반대 의사도 나타내지 않았다. 1989년 8월 24일 폴란드의 의회는 40년 동안 이어진 일당제를 폐지시켰다. 의회에서 마조비에츠키는 378표의 찬성과 4표의 반대, 그리고 41표의 불참으로 총리 직을 인정받았다. 1989년 9월 13일, 새로운 비공산당계 정부가 의회의 승인을 받았고, 이는 유럽 동구권 역사상 처음으로 수립된 민주정부였다. 1989년 11월 17일, 체카의 설립자이자 공산주의 탄압의 상징이었던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동상이 바르샤바 은행 광장에서 철거되었다. 1989년 12월 29일 폴란드는 국가의 명칭을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 폴란드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공산주의 단체인 폴란드 연합노동당은 1990년 1월 29일 해산한 후 사회민주주의 단체로 개편되었다.
1990년 야루젤스키가 폴란드 대통령에서 사임하고 대통령직은 1990년 대선에 승리한 레흐 바웬사에게 넘어갔다. 바웬사의 대통령 취임은 1990년 12월 21일로, 이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식적인 종식과 현대의 폴란드의 시작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1991년 10월 27일 폴란드 의회 선거는 1945년 이후 처음으로 전면 자유제로 실시되었다. 이것은 폴란드의 공산주의 체제가 서구식 민주주의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소련군은 단계적으로 철수를 시작했지만 1991년 러시아 연방 수립 이후에도 러시아군은 주둔해 있었고 마지막 러시아 군대는 1993년 9월 18일 폴란드에서 철수했다
(3)
헝가리
Hungary's role in the 1989 revolutions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는 달리 헝가리는 1980년대 지속적으로 경제적 개혁을 추구해 성과를 얻었고, 제한적이었지만 정치적 자유를 허용했다. 그러나 주요 개혁은 1988년 5월 23일 공산당 총서기가 카다르 야노시에서 그로츠 카를로시로 바뀐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1988년 11월 24일, 네메트 미클로시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이후 1989년 1월 12일 의회는 "민주주의 패키지"를 채택했다. 민주주의 패키지에는 무역 다원주의,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헌법의 적극적 개정, 새로운 선거 제도 등을 포함되었다. 1989년 1월 29일, 헝가리 공산당이 30년 동안 주장했던 역사의 공식적인 관점과는 모순되게 중앙위원회 의장 포츠게이 임레는 헝가리의 1956년 반란이 반혁명을 위한 외국 사주의 시도보다는 인민 봉기임을 선언했다. 대규모 시위가 3월 15일 국경일에 발생해 공산당 정권과 비공산당 정치 세력의 협상을 요구했다. 헝가리 원탁회의가 4월 22일 시작되어 9월 18일 협상은 성공리에 종결되었다. 회담에서는 공산당을 비롯해 새로 등장한 피데스,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동맹, 헝가리 민주주의 포럼, 헝가리 인민당, 헝가리 기독교 민주주의 인민당 등이 초청되었다. 이 회담에서는 헝가리의 미래 정치적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대표적인 예로 소욤 라슬로, 안탈 요제프, 오르반 빅토르 등이 있었다.
Taking down Hungary's border fence was to have far-reaching consequences
1989년 5월 2일 철의 장막의 실질적인 첫 해제가 헝가리 인민공화국이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펜스를 철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수 만명의 시민들이 여름부터 가을까지 불법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을 넘어 서방 국가들로 이주하면서 두 정부의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989년 1월 1일, 공산당은 옛 총리인 너지 임레를 사면하였다. 이는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혁명의 책임으로 짧은 재판 이후 그를 불법적으로 처형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1989년 6월 16일 너지 임레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부다페스트의 광장에서 국장을 받았다
1989년 9월 18일의 원탁 회의의 내용은 6가지 법 조항에 반영되었다. 이는 헝가리 헌법의 전반적 개정, 헝가리 입헌 의회의 설립, 정당의 기능과 통제, 선거에서의 다당제 도입, 국가 원수와 의회의 분립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거 제도 또한 협정의 내용에 포함되었다. 절반 이상의 당원들은 비례제로, 나머지 절반은 다수결로 선출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권한도 약화시키기로 결정되었지만, 누가 대통령에 선출되어야 할 지와 언제 선거를 치를 지는 합의되지 않았다. 1989년 10월 7일, 공산당은 스스로 대규모의 의회를 재소집해 헝가리 사회주의 정당을 설립했다. 198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의회에서 다당제 선거와 직접선거를 채택했고, 1990년 3월 24일 헝가리에서 첫 민주적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후 헝가리는 인민공화국에서 헝가리 공화국으로 변경되었고, 정부는 인간의 존엄성 및 민권을 보장하고 삼권 분립의 실현을 위해 법적 제도를 마련했다.[54] 헝가리를 점령했던 소련군도 1991년 6월 19일 헝가리에서 철수했다.
(4)동독
베를린 장벽 중 브란덴부르크 문 구간에서 찍은 사진. 1989년 11월 10일
1989년 5월 2일,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철거하기 시작하자, 철의 장막 일대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동독 주민들은 이 구멍을 통해 서방 국가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1989년 9월 말에는 3만 명 이상의 동독 주민이 서방 국가로 도주했고, 이후 동독 정부는 헝가리 여행을 금지했다. 이러한 조치에 동독 주민들은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동독 주민들 수천 명은 중부 유럽과 동유럽 수도에 산재한 서독의 행정 기관을 통해 서쪽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특히 헝가리 대사관과 프라하 대사관의 독일의 정치적 개혁을 기다리는 수천 명의 독일인들이 8월부터 11월까지 대사관에서 캠프를 치고 대기했다. 독일 민주공화국 정부는 10월 3일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폐쇄했고, 이로 인해 동독은 이웃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말았다. 도주의 마지막 기회가 차단되자 더 많은 동독 주민들이 11월 4일 라이프치히에서 발생한 동독 월요 시위에 참여했다.
10월 2일 라이프치히의 동독 월요 시위는 1만 명의 시위자들이 참여해 성공리에 끝났다. 그러나 동독의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이자 동독 총리인 에리히 호네커는 동독 군대에 시위자들의 사살을 명령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대규모 경찰과 군대, 동독 국가보안부, 그리고 노동 전투군을 주둔시켰고, 10월 9일에는 톈안먼 광장 식의 학살이 계획되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했다.
1989년 10월 6일부터 7일까지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독일 민주 공화국 수립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동독을 방문했다. 그는 동독 지도자들에게 개혁의 수용을 요구했다. 그는 독일어로 "Wer zu spät kommt, den bestraft das Leben" (너무 늦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는 유명한 속담을 인용했다. 그러나 호네커는 내부 개혁에 반대하였고, 그의 정권은 소련 출판물을 체제 전복용이라 판단하고 판매를 금지했다. 공산주의자들의 대량 학살이 유언비어로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10월 9일 7만 명의 시민이 라이프치히에 모여 시위를 했다. 이들은 정부 당국에 발포를 금지했다. 10월 16일에는 12만 명의 시민이 라이프치히에 모여 시위했다.
에리히 호네커는 소련군이 동독으로 진입하고,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지지로 공산 정부를 복귀시키고 시민들의 시위를 탄압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1990년 이것은 실행하기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다. 소련 정부의 시나트라 독트린에 의해 소련은 동구권에서의 영향력을 종식시키겠다고 선언했고, 동독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서 소련은 중립을 유지했다. 계속되는 시민들의 봉기 및 시위로 동독 공산당은 10월 18일 호네커를 축출하고 그를 대신해 에곤 크렌츠를 서기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시위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10월 23일 월요일에 라이프치히의 시위 참가자는 30만 명이 되었다. 11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개방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모든 동독 주민들의 서독 이주를 아무런 제재 없이 허락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지역 내의 철의 장막을 11월 3일 철거하기 시작했다. 11월 4일 동독 정부는 베를린 시위를 재가하기로 결정했고, 베를린 시민들은 최대 규모의 시위에서 자유를 요구하며 수도를 퍼위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한 피난민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기에 동독 정부는 1989년 11월 9일 시민들에게 서독으로 직접 여행하는 것을 허용했다. 귄터 샤보브스키가 TV 회담에서 정부의 계획 중인 변화는 지연 없이 즉각적으로 실현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서베를린으로 이동할 수 있게 요구해달라며 국경으로 집결하는 원인이 되었다. 국경 보위대는 무력을 사용하지 못한 채 주민들을 서베를린으로 이주시켰다. 이후 베를린 장벽이 시민들에 의해 붕괴되었다.
11월 13일 동독 총리 빌리 슈토프와의 그의 내각은 전격 사임했다. 새로운 정부는 더욱 온건한 공산주의자인 한스 모드로프의 주도 하에 개혁을 진행했다. 12월 1일 동독 인민의회는 독일 민주공화국의 체제에서 공산당의 주요 역할을 제거했다. 12월 3일 크렌츠는 공산당 서기장에서 사임했고, 3일 후 국가 수반 직에서도 사퇴했다. 12월 7일 공산당과 다른 정당 사이에 원탁 회의가 개최되었고, 1989년 12월 16일 동독에서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해체된후 독일 민주사회당으로 개편했다.
1990년 1월 15일 동독 국가보안부의 수장은 시위자들로 붐볐다. 모드로프는 1990년 3월 18일 자유 선거가 이루어질 때까지 사실 상의 동독 지도자가 되었다. 이는 1933년 이래 처음으로 동독 지역에서 이루어진 자유 선거였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패배했고, 동독 기독교 민주연합의 로타르 더 메치에어가 1990년 4월 4일 총리가 되어 서독과의 통일 절차에 속력을 내었다. 동독과 서독은 1990년 10월 3일 재통일되었다. 옛 동독 지역에 주둔하던 러시아군은 1994년 9월 1일 완전 철수했다.
(5)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의 시위, 19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은 지역 공산주의 정부 타도 혁명 중 비폭력 혁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89년 11월 17일 금요일, 프라하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의경이 진압했다. 여기서 사상자가 발생했는 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이 사건으로 1989년 11월 19일부터 12월 말까지 범국민적인 시위가 연속으로 발생하였다. 11월 20일, 평화 시위자 20만 명이 프라하에 집결했고, 다음 날에는 50만 명이 집결했다. 5일 후 레트나 광장에는 80만 명의 시위자들이 집결했다. 11월 24일, 미클로시 자케시를 포함한 공산당의 모든 지도자들이 사임했다. 11월 27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서 2시간 동안의 파업이 성공리에 끝났다.
다른 공산 정부의 붕괴 이후 거리 시위가 증가했고, 이에 호응해 11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일당제를 종식하고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했다. 서독과 오스트리아에 있던 국경이 12월 초에 철거되었다. 12월 10일 구스타프 후자크 대통령이 1948년 이후 처음으로 비공산 정부의 수반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사임했다.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12월 28일 연방 의회의 대변인으로 선출되었도 1989년 12월 29일 바츨라프 하벨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0년 체코슬로바키아는 1946년 이후 첫 민주 선거를 진행했고, 1991년 6월 27일 마지막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철수했다.
(6)불가리아
1989년 10월부터 11월까지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는 시위자들이 정치적 개혁 및 생태학적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이 시위는 탄압되었지만, 1989년 11월 10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지 3일 후, 불가리아의 오랜 독재자인 토도르 지프코프가 위원회에 의해 축출되었다. 비교적 온건한 공산주의자이자 이전 외교부 장관이었던 페타르 믈라데노프가 그의 권력을 승계받았다. 소련은 지프코프가 고르바초프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지도부의 변화에 명백히 지지했다. 새로운 정부는 자유 연설과 집회에 가해진 제제를 즉각적으로 완화했고, 이는 11월 17일의 대규모 집회로 이어진다. 이후 불가리아에는 반공 단체도 드장하기 시작했다. 이들 대다수는 12월 7일 불가리아 민주주의 연합에 참여했다.[59] 불가리아 민주주의 연합은 지프코프의 축출에 만족하지 않고 추가적인 민주적 개혁과 불가리아 공산당의 일당제 종식을 요구했다.
믈라데노프는 1989년 12월 11일 공산당의 일당제 종식 및 다음 해의 다당제 선거를 선언했다. 1990년 2월 불가리아 행정부는 공산당의 독점적 역할에 대한 헌법 조항을 삭제했다. 1990년 폴란드식 원탁 회의가 개최되기로 결정했고, 1990년 6월 자유 선거가 예정되었다. 1990년 1월 3일부터 5월 14일까지 원탁 회의가 진행되어 민주주의로의 전환이라는 합의가 도출되었다. 1990년 4월 불가리아 공산당은 불가리아 사회주의당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렸다. 1931년 이후 최초의 민주 선거가 1990년 6월 이루어져 사회주의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7)루마니아
1989년 12월 루마니아 자유화 민주화 혁명군 모습(사진)
현재 전해지는 영상에는 사형 판결 직후 차우셰스쿠 부부를 결박하는 장면과 건물 벽을 배경으로 하여 사격이 끝나가는 때, 그리고 사형된 두 사람의 모습과 사망을 확인하고 후처리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찍혀있다. 정작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은 당시 사용 중인 비디오 카메라의 전원이 끊어지는 바람에 촬영되지 못했다.
당시 처형 순간을 보도한 영상. 차우셰스쿠의 나이는 71세였고 엘레나의 나이는 73세였다.[사진]
1987년 브라초프 반란에서 살아남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의 지도자로 1989년 11월 재선출되어 5년간 집권할 수 있게되었다. 이 무렵 다른 유럽 지역을 휩쓰는 반공 봉기를 보고 그는 이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차우셰스쿠가 이란으로 국빈 방문을 준비하는 동안 그의 비서는 헝가리 개혁교회 목사인 토케스 라츨로 목사를 12월 16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라츨로는 포위되었지만 곧 봉기가 곳곳에서 시작되었다. 티미쇼아라가 12월 16일 첫 봉기를 시작했고 이는 5일 간 지속되었다. 이란에서 돌아온 이후 차우셰스쿠는 12월 21일 부쿠레슈티에 있는 루마니아 공산당 본부에서 그의 지지자들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충격적으로 시민들은 야유를 퍼부으며 그를 조롱했다. 이는 루마니아 시민들이 그에게 오랫동안 실망했음을 보여주는 예였다.
봉기가 확산되자 보안군은 차우셰스쿠의 명령에 따라 시위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그러나 12월 22일 아침 루마니아군은 편을 갑자기 바꾸었다. 이는 국방부 장관 바실 밀레아가 반역자로 누명을 쓴 이후 자살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는 것 때문이었다. 밀레아 장관이 사실상 사살되었다고 판단한 군은 혁명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군 전차는 중앙위원회 건물을 향해 진격했다. 시위자들은 중앙위원회 문을 열고 차우셰스쿠 부부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들은 건물에 대기 중인 헬리콥터를 타고 도주하였다. 다른 지역의 공산당과는 달리 루마니아 공산당은 바로 해체되었고, 현재까지도 루마니아에는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차우셰스쿠의 도주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만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12월 25일, 루마니아 텔레비전에서는 차우셰스쿠의 처형식을 공격했다. 이후 이온 일레스쿠가 이끄는 국가민주주의 전선 의회가 정권을 이양받아 1990년 4월 자유 선거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들은 1990년 5월 20일 선거를 미루었다.
(8)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해체와 내전 그리고 각 민족 자치정부 독자국가 수립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회원국은 아니었지만 요지프 브로즈 티토의 주도 하에 티토주의에 입각한 정치를 폈다. 이것은 티토가 형제애와 통일이라는 구호 아래 유지할 수 있는 다민족 국가의 개념과 부합했다. 그러나 1970년부터 1971년까지 일어난 크로아티아의 봄 이후 민족 간의 긴장이 증대되었다. 크로아티아는 이 때 더 많은 자치를 중앙 정부에 요구했지만 이는 묵살되었다. 1974년 헌법이 변화되고 1974년 유고슬라비아 헌법이 연방 정부의 권력을 자치 공화국과 주들에게 어느 정도 이양했다 1980년 티토의 죽음으로 민족 간 분쟁은 다시 격화되었고, 1981년 알바니아계 주민이 다수였던 코소보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84년 이래로 점진적인 자유화 정책을 추구해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모델을 따라하려고 했다. 이는 슬로베니아 공산당 연맹과 중앙 정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으로부터 긴장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 말 수많은 시민 사회 집단이 민주화를 진척시켰고, 문화적 다양성을 위한 공간을 확장하고자 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시민 사회 집단과 공산 정권 사이에 충돌이 빈번이 발생했고, 이 중 대표적인 예가 슬로베니아의 봄이었다. 1989년 초 몇몇 반공 정당이 기능을 수행하여 슬로베니아 공산주의자의 영향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1990년 1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연맹은 헌법 내 정당 사의 분쟁을 막기 위해 소집되었다. 수에서 밀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공산당은 1990년 1월 23일 당 연맹에서 탕퇴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종식을 가져왔다. 양당은 다당제 자유 선거를 실시하고자 했다. 1990년 4월 8일 민주주의 및 반유고슬라비아 정당 DEMOS 동맹이 슬로베니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990년 4월 24일에는 프라뇨 투지만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크로아티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마케도니아에서 이뤄진 1990년 11월 선거에서 공산당과 민족주의 정당이 비슷한 표를 확보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지도부는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할 준비를 마쳤고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로그 혁명을 통해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1990년 12월 23일 슬로베니아 독립 선거에서 88.5%의 주민들이 독립에 찬성했다. 1991년 5월 2일, 크로아티아 독립 선거에서도 93.24%의 주민이 독립에 찬성했다.
(9)알바니아
1991년 2월 20일 알바니아의 수도인 티라나에서 스탈린주의자인 노동당 총서기이며 알바니아인민공화국 건국자 엔베르 호자의 동상을 무너뜨리는 시위대 모습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의 지도자인 엔베르 호자는 40여년 간 알바니아를 통치하고 1985년 4월 11일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라미즈 알리아가 정권을 서서히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9년 쉬코르다에서 첫 봉기가 시작되었고, 이는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에 알리 정부는 자유화를 허용해 1990년부터 해외 여행의 자유를 제공하는 등 각종 조치를 취했으며, 헬싱키 협정에 참여해 알바니아 내 인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65] 이러한 조치로 1923년 이래 최초로 알바니아의 자유 선거였던 1991년 3월,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집권했지만, 파업과 시민들의 반발로, 비공산당 계열을 포함한 내각이 열리게 되었다. 이후 1992년 알바니아는 완전히 공산주의에서 벗어나 민주적 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6. 몰타 회담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조지 H. W. 부시가 몰타 자유항에 정박한 소련 순양함 막심 고르키에서 회동하고 있다. 이 회담은 냉전 종식의 주요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와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몰타에서 1989년 12월 2일부터 12월 3일까지 회담을 가졌다. 이 때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며칠이 안 된 때였다. 몇몇 언론은[66] 몰타 회담을 얄타 회담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이 회담을 언급했다. 얄타 회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럽에 대해 영국의 윈스턴 처칠,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논의한 것이다.
7.소련의 해체
소련군부는 소련공산당 보수파(교조주의) 입장보다 개혁파(수정주의) 입장을 지지했다[소련군인들이 시민혁명을 지지했다]
1991년 7월 1일,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이 프라하에서 회담을 가진 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같은 달, 고르바초프와 부시는 미국-소련 간의 전략적 협력을 다짐하였다. 실제로 1990년부터 발발한 걸프 전쟁 당시 미국 주도의 다국적 연합군에 소련은 지지를 보냈고, 이라크에 대한 국제 연합의 제재에서 소련은 미국과 함께 찬성에 투표했다.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역에서 소련이 단계적으로 철수하자 1989년에 일어났던 혁명의 여파가 소련 전체에 반향을 일으켰다. 자치 국가 내부의 동요가 리투아니아에서 시작되었고, 발트 3국 전체와 아르메니아가 독립을 선포하는 것에 이른다. 그러나 소련 중앙 정부는 독립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군사 행동 및 경제 제재를 통해 독립 선포 국가들을 위협했다. 1991년 1월, 소련군이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진입하면서 분리운동을 탄압하려고 했지만, 소련군은 이후 철수했다. 이 외에도 조지아나 아제르바이잔 같은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들은 중앙집권적 통치에 맞선 약속들을 제시하라는 요구와 더불어 급속한 민심 이탈이 발생했다.
글라스노스트는 다국적 국가였던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 공화국들 내부에서 오랫동안 압력을 받던 민족주의적 요소들을 분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은 소련의 경제가 급속히 악화됨에 따라 더욱 가속되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경제를 증진시키지 못함으로써 실패했고, 구식 소련의 계획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에 구성 공화국들은 자신들만의 경제 체계를 구축하고 소련 중심의 헌법을 지역 중심적 헌법으로 변경했다. 1990년 공산당은 70여년 간의 일당체제를 포기하는데 합의했다. 이는 소련 최고 위원회가 소련 헌법 조항에서 독재적 권위를 보장하는 내용을 폐지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공산당이 언론을 장악하는 것에 실패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는 소련의 과거 역사적 세부사항이 공개되는 것에 영향을 미쳤고, 시민들과 자치 공화국의 지도자들은 구체제를 불신하며 더욱 많은 자치 또는 실질적인 독립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소비에트 연방 내부의 회의에서 소련을 존속시키되, 조금 더 느슨한 형태의 연합으로 구성하자는 방침이 나오자 소련의 강경파들은 부통령인 겐나디 야나예프를 중심으로 1991년 8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쿠데타에 맞서 더 많은 군대를 보내 이들의 노력을 붕괴시켰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복권되었지만, 그의 귄위는 실추했다.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이후 공산당 서기장에서 사임했고, 소련 최고위원회는 당을 해산시킨 후 모든 공산주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1991년 9월 6일, 소련 정부는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8월 쿠데타 이후 수많은 구성 공화국들이 독립을 주장했다. 이 무렵 새로 들어선 러시아 정부가 소비에트 정부의 권력을 하나씩 승계함에 따라 소련 정부는 쓸모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투표에서 찬성파가 압승을 거두면서 소련의 연방 제도가 위기를 맞았다. 이는 소련의 통일적 요소를 유지하려는 현실적인 움직임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 12월 8일 옐친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지도자들을 만나 벨라베자 조약에 서명하면서 소련의 존재성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를 불법이라고 주장했으나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1991년 12월 21일, 소련을 구성하고 있던 12개의 국가 중 조지아를 제외한 11개국이 알마-알타 협정을 체결하여 소련의 해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후, 독립국가연합이라는 자발적인 협의체로 이를 대체하기로 했다. 고르바초프는 12월 25일 소련 대통령 직을 사임했고 12월 26일 소비에트 최고위원회는 벨라베자 조약을 합법이라 인정한 후 스스로 해산했다. 1991년 말 러시아로 이양되지 않은 몇몇 소련의 기구들이 해체되었고,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1993년, 소련을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체제 위기로 확산되었지만, 러시아 정부가 이를 해결하고 지역 내 잔재한 소비에트 기구들을 완전히 해체함으로써 러시아는 완전한 민주 국가로 들어서게 되었다.
(1)발트 3국
발트의 길은 발트 3국에서 시작된 혁명으로 200만 명의 사람들이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한 사건이었다
발트 3국은 정치의 민주적 개혁을 실행하고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한 첫 국가였다. 이러한 독립의 과정을 노래 혁명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포함한다. 이는 에스토니아의 민족주의자이자 예술가인 하인츠 발크가 1988년 6월 10부터 11일까지 탈린 노래 축전에서 벌어진 대규모 야간 시위에 대해 기사를 쓴 것에서 시작되었다. 에스토니아는 1988년 11월 16일 자치를 주장했고, 리투아니아는 1989년 5월 18일, 라트비아는 1989년 7월 28일 자치를 주장했다. 리투아니아가 1990년 3월 11일 독립을 선언했고, 19일 후인 3월 30일에는 에스토니아가 독립으로의 변환기에 들어섰다고 선언했다. 라트비아는 1990년 5월 4일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 선언은 소련이 거부하면서 마찰이 빚어졌다. 1991년 초 라트비아에서 바리케이드 사건이라 불리는 공산주의 세력의 탄압 운동, 그리고 리투아니아의 1월 사건 등이 대표적 예였다. 그러나 8월 쿠데타 이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완전 독립을 주장했고, 더 이상 통합되지 못한 소련군은 1991년 9월 6일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2)카프카스 지역
1989년 4월 9일 트비리시 학살의 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조지아와 북캅카스 지역은 민족 갈등과 분리주의 운동으로 오랫동안 신음했다. 1989년 4월 9일 소련군은 트비리시의 시위자들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1989년 11월 조지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21년 러시아의 침공과 지속되는 대량학살식 점령을 공식적으로 비난했다. 1991년부터 약 1년간 민주주의 활동가였던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가 대통령으로 복무했다. 그는 조지아의 독립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러시아는 조지아의 독립 주장 국가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아를 지지하였고, 러시아는 제1차 체첸 전쟁에서 조지아가 체첸 반군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조지아를 비난했다. 이후 쿠데타로 공산주의자인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대통령으로 집권했지만 2003년 장미 혁명으로 그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아르메니아에서는 독립 투쟁이 폭력을 동반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서로 맞섰다. 아르메니아는 이후 군사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아르메니아에서 이루어진 선거는 논란이 되어 정부의 부패가 드러나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의 독립은 1991년 12월 21일 이루어졌지만 이후에도 호르자반의 부패는 이어졌고, 세르지 사르키샨이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아르메니아의 군대의 발전에 기여했고, 아르메니아에 민주주의적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친서구적 성향을 지닌 아제르바이잔 인민당의 엘치베이가 첫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엘치베이가 아제르바이잔 원유 생산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고 터키 및 유럽에 더욱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러시아와 이란이 지원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는 축출되었다.[70] 무탈리보프가 권력의 핵심인물로 떠올랐으나 그는 부패,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패배, 그리고 정치 구조의 미완성으로 축출되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다음 대통령으로 집권해 2003년 아들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견고한 동맹국으로 남은 아르메니아와는 달리 2008년 조지아 전쟁 이후 아들 일함 알리예프는 터키와 서유럽 국가들, 그리고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며 러시아와의 유대는 약화시키고 있다
(3)체첸
1994년 12월 체첸 그로즈니에서 기도 중인 여성들
1차 체첸 전쟁[1994년 12월 11일 ~ 1996년 8월 31일]
체첸의 조하르 두다예프 장군은 발트 3국의 방식을 차용해 반공주의 정당을 결집시켜 체첸의 민주화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이후 체첸 공화국은 공산당이 선출하는 대통령제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1991년 11월 체첸 대선에서 조하르 두다예프는 압승을 거두어 체첸 대통령이 되었고, 그는 같은 해 체첸-잉구샤 지역을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독립을 주장했다. 잉구샤 공화국은 체첸과 결별하기를 원했고,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은 이를 허용했다. 그러나 체첸이 원유 사업에서 러시아를 배제시키려고 하자 보리스 옐친은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쿠데타를 지원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에 러시아는 체첸을 침공해 제1차 체첸 전쟁을 일으켜 1994년 12월 체첸을 포위하려고 했으나, 체첸군은 무기와 병력 몇에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산악 지역에서의 게릴라전과 뛰어난 습격전을 통해 러시아군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결국 1996년 보리스 옐친 정부는 체첸과의 휴전협정에 들어가 1997년 러시아-체첸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군의 피해는 공식적으로 5,732명이지만 다른 총계치는 3,500명에서 7,500명에 이르고 가장 높은 수치는 14,000명에 이른다
8. 기타 세계의 변화
(1)아프리카
아프리카 지역에 남아있던 공산국가들에는 앙골라, 모잠비크 등이 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1990년부터 1991년 사이에 민주화를 실현했지만, 앙골라와 소말리아, 모잠비크 지역에서는 내전이 발발했다. 앙골라의 경우 1991년 비세세 협정을 통해 다당제 선거 도입을 약속했지만[ 1992년 선거에 불복해 2002년까지 내전이 지속되었다. 모잠비크의 경우에도 1992년 로마 평화 협정을 체결해 공산주의와 비공산당 계열의 연립 정부 수립을 합의했다.
(2)오세아니아
오세아니아의 바누아투는 소련, 리비아를 비롯하여 사회주의 국가들과 친한 친사회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었던 월터 리니의 통치를 받았으나, 1991년에 물러나면서 월터 리니의 독재가 종식되었다.
1989년 혁명과 국영자본체제 붕괴[동유럽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날짜:
1989년 6월 4일 - 1991년 12월 26일
지역:
유럽 및 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
원인: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 체제), 권위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부정부패, 소련의 군사 점령, 경제 붕괴, 집단살해, 철의 장막, 종교 박해, 권력 남용, 강제노동, 숙청, 가난, 테러 등
목적:
경제적 자유와 민영자본체제, 유럽 통합, 자유 선거, 자본주의, 언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권, 노동권, 민주주의 등
종류:
시위 등 다양함
결과:
동구권의 몰락 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평화적 정권 교체.
냉전의 종결
독일의 재통일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유혈 혁명이 됨
소련의 해체
소련의 초강대국 지위 몰락
1991년 인도 국민 회의가 신자유주의를 채택
러시아 연방이 탄생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
유고슬라비아 해체 및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중국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1989년 톈안먼 사건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해산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회의론 대두
유럽 통합의 진전
성별 선택 낙태로 동유럽의 성비 변화
동구권에 인터넷이 확산됨
동구권에서 소비자 운동이 대두함
예멘의 통일
발트 3국의 재독립
몽골, 아프가니스탄, 베냉, 예멘, 모잠비크, 앙골라, 콩고 공화국, 소말리아에서 공산주의 붕괴
북한의 고난의 행군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 종결
미국의 문화가 동구권 국가에 전파됨
NATO와 EU에 동구권 국가 가입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의 시장 경제 도입
미국이 전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발돋움
신세계 질서
소비에트 전후 충돌의 첫 발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종결
Red stars are removed as communism relinquishes its grip in central Europe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a.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b.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聯邦共和國).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미합중국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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