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중국민항기 前납치범 탁장인(卓長仁)-강홍군(姜洪軍) 사형집행 본문

Guide Ear&Bird's Eye/대만정부-中華民國(中國)

중국민항기 前납치범 탁장인(卓長仁)-강홍군(姜洪軍) 사형집행

CIA bear 허관(許灌) 2018. 5. 12. 22:58


지난 83년 5월 중국 민항기를 한국으로 납치한 뒤 대만으로 건너가 반공의사(反共義士)의 영웅 대접을 받았던 줘창런(卓長仁)과 장훙쥔(姜洪軍)에 대한 사형이 10일 집행됐다고 중국시보가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작년 9월 살인혐의로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줘와 장이 이날 밤 10시(한국시간 11시) 처형됐다.

두사람은 오후 9시15분쯤 타이베이 교도소 형장으로 옮겨졌으며 도중 줘는 4차례나 '중화민국 만세'를 외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사행 집행후 줘와 장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각막과 신장을 기증하기 위해 병원으로 이송됐다.

줘와 장 등 6명은 양안간 긴장이 고조되던 당시 중국 민항기를 공중납치해 서울을 거쳐 대만으로 망명했다. 대만 당국은 이들을 '반공 6의사'로 영웅 대접하면서 각각 3백만 달러(당시환율로 약 9억원)의 포상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이들은 사업 실패로 포상금을 날려 버리자, 납치범 출신으로 이번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스샤오닝(施小寧)과 함께 금품 탈취를 목적으로 왕쥔제(王俊傑)라는 사업가를 유괴해 살해했다.

살인 혐의로 체포된 줘와 장 등은 재판 끝에 92년 6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들의 신분을 중시한 최고법원이 4차례나 고등법원에 파기환송, 결국 8년여만인 지난달 22일 최고법원의 확정 판결이 내려졌다.



                                                                       살인혐의로  처형된 중국민항기 前납치범 탁장인(卓長仁) 모습
줘와 장은 새로운 삶을 찾아가기 위해 목숨까지 내건 항공기 납치에 성공,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자본주의 사회 적응에 실패하면서 종국에는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들의 민항기 납치는 한국과 중국이 사건 처리를 위해 처음 공식 접촉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장경국 전 총통과 중국 민항기를 한국으로 납치한 뒤 대만으로 건너가 반공의사(反共義士)들 모습[사진]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中國民航機不時着事件)198355일 오후 2, 춘천의 미군 헬기 비행장인 '캠프 페이지'(CAMP PAGE)에 승객 96(납치범 6명 제외), 승무원 9명을 태운 중국민용항공총국'(중국민항) 소속 여객기 한 대가 불시착한 사건을 말한다. 중화인민공화국 본토를 출발한 비행기가 대한민국에 착륙하기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처음이었다. 당시에는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미수교 상태였기 때문에 외교적,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간의 한국 전쟁 이후, 첫 번째 공식외교접촉이 성사되었다.

1.불시착

이 여객기는 55일 오전 11(한국 시각) 랴오닝 성 선양의 선양동탑공항(瀋陽東塔空港)을 떠나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으로 가던 중이었다. 탁장인(卓章仁) 6명의 납치범들은 기내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기수를 대한민국으로 돌릴 것을 요구하였다. 승무원이 거부 의사를 밝히자, 무장 납치범들은 총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해 승무원 2명이 부상당한채 춘천 '캠프 페이지'(CAMP PAGE) 주한 미합중국 육군 항공 기지에 불시착했다. 납치범들은 중화민국 대사 면담과 중화민국으로의 정치적 망명 허용을 요청하였다. 이 때, 대한민국 정부는 요구 조건을 수용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고, 결국 무장납치범들은 무장을 해제했다.

 

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중국 정부는 기존의 소극적이고 제한적인 접촉에서 직접적인 교섭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에는 한중 직접교섭을 위한 미국과 일본의 지원과 알선이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초기 간접교섭방법을 통해 항공기와 승무원의 송환을 협상하려 했으나 사건 발생 3일만에 중국민항총국장 선투(沈圖) 33명의 관리와 승무원이 직접 서울을 방문하여 당시 공로명 외무부차관보와 직접 협상을 벌였다. 9개 항에 걸친 외교각서가 서명되었으며 처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대한민국"이라는 양국의 정식국호가 사용되었다. 양국은 납치범을 대한민국 법에 의해 재판할 것과 향후 유사한 사건이 발생될 때 긴밀히 협조할 것을 합의했다.

 

2.서울 이동

19835521, 승객과 승무원들은 비행기에서 내려 춘천에서 1박 후 서울로 이동했다. 납치범들은 별도로 수용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승객과 승무원들을 최고급 워커힐 호텔에 투숙시킨 뒤, 여의도와 자연농원 관광을 시켜주었고, 출국 시에 컬러 TV를 선물하는 등 한중관계개선의 지렛대 역할로 이 사건을 활용하려고 노력했다. 납치범 6명은 1년간의 구속 수감 후, 추방형식으로 중화민국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허용하였다.

 

3.중화인민공화국과의 외교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납치범들에 대해 외교합의문서에서 '형사범'이란 표현을 기록으로 남길 것을 주장했으나, 대한민국 정부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병연 당시 외무부 아주국장은 "이번 각서에서 구체적으로 양국이 국호를 정식으로 밝힌 것은 큰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4.사건의 영향

19838, 중화인민공화국 민항기가 대한민국의 비행정보구역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또한, 체육, 문화, 관광 등의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간의 교류를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7] 공식 외교 접촉의 영향을 받아, 19842월에 열린 데이비스컵 테니스 대회에 대한민국 선수가 최초로 참가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19843, 친척 상호 교류를 허용하였고, 이로써, 19844, 중화인민공화국 농구 선수단이 최초로 대한민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전반적인 대한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관계가 호전돼 1992년 수교로까지 이어졌다.

대한민국 측 협상 수석 대표는 당시 외무부 제1차관보였던, 공로명 전 외무장관이었다.

당시, 안기부 박세직 해외 담당 제2차장이 대책반장을 맡아 납치범들을 기내에서 직접 만났다.

이 사건의 실무 담당자 중 한명은 당시 법무부 출입국 관리국장을 맡고 있었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었다.

납치범 중 일부는 망명이후 중화민국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몸값을 위한 유괴, 살해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