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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미국, 대만에 해병대 경비병력 파견 가능성 본문

Guide Ear&Bird's Eye/대만정부-中華民國(中國)

미국, 대만에 해병대 경비병력 파견 가능성

CIA bear 허관(許灌) 2018. 3. 31. 15:49


미국과 대만 간 고위급 상호왕래를 허용한 '대만여행법'이 시행에 들어가면서 중국의 거센 반발을 사는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대만에 해병대 경비 병력을 주둔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환구시보(環球時報)가 22일 경고했다.

신문은 미국의 대만 주재 대사관격인 미국재대협회 타이베이 대표부(AIT)가 올여름 타이베이 시내 다안(大安)구에서 네이후(內湖)구에 신축한 청사로 이전한다면서 이같이 전했다.

환구시보는 스티븐 영 전 AIT 대표를 인용해 미국 정부가 네이후구의 새 청사 경호를 위해 해병대 병력을 파견할 것이라고 밝혔다.

스티븐 영 전 대표는 해병대 파병이 대만 측에 대한 약속이자 대만에 주재하는 미국 공관원이 응당히 받아야 할 대우라고 지적했다.

또한 스티븐 영 전 대표는 "미국이 세계 각국에 두고 있는 외교공관에는 해병대 주둔 시설을 두었으며 대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은 대만과 단교한 이래 AIT에 해병대를 배치하지 않았고 대만과는 '비공식 관계'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환구시보는 미국이 AIT 신 청사에 해병대를 보낼 경우 AIT를 정식 외교공관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미국과 대만 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상징한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2005년부터 무관을 AIT에 주재시켰지만 중국을 의식해 군복을 입지 않고 활동도 조용히 하는 등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이와 관련, 옌더푸(嚴德發) 국방부장은 21일 미군 해병대 대만 파병에 관해 아직 별다른 얘기가 없지만 외교부 규정에 의거해 협조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야당 국민당 라이스바오(賴士葆) 입법위원은 AIT 새 청사가 미국의 아시아 정보수집 센터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며 중국의 보복 조치에 직면할 공산이 농후하다고 우려했다.

미국이 전 세계 148개국에 주재한 해외공관 경비를 맡기고 있는 해병대를 대만에도 보낼 경우 미국과 대만 관계가 정식 수교한 수준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점에서 '하나의 중국' 정책을 고수하는 중국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한 갈등을 빚을 전망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Shinjang Uyghur aptonom rayoni (新疆維吾爾自治區,신장 위구르 자치구)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위구르족(후이족=회족, 신장),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이다 

중국의 반체제 인사 일함 토티 전 베이징중앙민족대 교수가 최근 노벨 인권상으로 불리는 마틴 에널스 인권상을 수상했습니다. 신장 위구르족 출신인 토티 교수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을 비난하다가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입니다. 위구르족은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중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추진하면서 역사적으로 중국 정부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어왔습니다

“위구르족의 기원”

위구르족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민족으로 현재 중국의 서북쪽에 위치한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주로 거주하고 있습니다.

위구르족의 조상은 알타이계 유목민족인 가오처족인데요, 가오처라는 이름은 천막을 옮기기 위해 소가 끄는 수레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가오처족은 이후 돌궐제국과 수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세력이 약해졌고, 일시적으로 당나라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돌궐제국이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744년 오르콘 위구르 제국을 건설하면서 카스피 해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국가 건설 뒤에 유목민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정착 농경사회로 탈바꿈하면서 군사력이 약해져 840년 또 다른 투르크계 민족인 키르키즈에 의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들의 나라를 갖지 못한 위구르족”

위구르 제국이 멸망하면서 위구르인은 원 거주지인 몽골지방에서 중국 북서부와 동투르키스탄으로 대이주를 시작합니다.

이때 현지의 인도 유럽어 계통 백인들과의 결합이 이루어지면서 현재 투르크계 위구르족의 민족적 특성이 완성되었는데요.

특히 불교를 믿고 있던 대부분의 위구르족은 다른 투르크계와 마찬가지로 11세기경부터 이슬람교를 믿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뚜렷한 민족적 특성을 지켜온 위구르족이지만 이후에도 여러 작은 나라들이 난립하면서 제대로 된 강한 국가를 갖지 못했는데요.

1759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건륭제에 의해 침략 당하면서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20세기 초에 잠시 독립을 선언한 일이 있습니다만, 18세기 중반 이후 위구르족은 계속 중국의 일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위구르족의 전통 음악을 듣고 계신데요, 음악만 들어봐도 중국보다는 인도나 터키 쪽과 문화적으로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위구르족은 민족, 사회, 종교적으로 중국의 한족이나 지배계층인 만주족과는 너무 달라 지금까지도 저항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청나라가 지배하는 동안에만 42차례의 반란과 봉기가 있었고, 결국 1949년 중국 공산당에 병합돼 다시 중국의 자치구로 전락한 이후로도 분리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저항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경제, 무역의 요충지 - 신장 자치구”

현재 위구르족이 거주하는 신장 지역은 고대 중국인들이 서역이라고 부르던 이른바 비단길, 즉 실크로드가 지나던 지역으로 무역의 요지로서 그 중요성이 높았는데요.

이뿐만 아니라 소금이나 탄산수, 금, 옥, 석탄 등의 생산지로 유명해 경제적으로 그 가치가 높은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신장이 위치한 중앙아시아 지역이 석유와 가스 매장량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관련 산업이 호황을 이루고 있는데요.

이곳에서 추출된 석유와 가스는 동서 송유관을 통해 상하이와 직접 연결되고 있고, 지역 경제의 60% 정도를 관련 산업이 담당하고 있을 정도 입니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 지역을 영향권에 두기 위한 각 나라의 각축전이 치열하게 벌어졌고, 원래 이 지역에 살던 위구르인들은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자신들의 독립된 나라를 갖기가 어려웠습니다.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위구르와 독립운동”

위구르족은 현재 중국의 지배가 흔들릴 경우, 가장 먼저 독립운동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 민족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 위구르족의 자치구인 신장은 한족들을 정착시켜 위구르족의 독립의지를 희석시키려는 중국의 이주 정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요, 그 결과 현재 신장의 인구 구성은 위구르인과 한족이 각각 절반씩 거주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의 대규모 독립시위가 발생할 때마다 강경하게 진압하고 있는데요, 2009년 7월에 발생한 시위 때는 무려 1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위구르족의 독립투쟁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과 결합하는 형태를 띠고 있는데요.

특히 2014년 3월에는 중국 윈난성 쿤밍역에서 위구르족 무장단체에 의한 칼부림 사건이 발생하면서 29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72명의 사상자가 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 당국은 위구르족의 이슬람교 활동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요.

중국 당국이 위구르족의 이슬람 신성 의식인 라마단 참여를 금지시켰다는 내용의 VOA 보도 들어보셨는데요. 중국은 이 일로 주변 이슬람 국가와 국제 사회로부터 비난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미국에 거주하는 위구르족 독립운동 지지자들과 국제활동가들이 워싱턴 DC 중국대사관 앞에서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자료사진)

 

같은 해 7월에는 저명한 위구르족 경제학자인 일함 토티 당시 중국 베이징중앙민족대 교수가 국가 분열죄 위반 혐의로 중국 당국에 의해 기소되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이 사건으로 토티 교수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국제 인권단체는 토티 교수에게 노벨 인권상이라고 불리는 마틴 에널스상 수상자로 선정함으로써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과 인권 상황에 대해 우려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소수민족을 향한 중국의 가혹한 정책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 위구르족의 독립투쟁과 인권 신장은 앞으로도 국제정세에 중요한 화두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습니다

 

                          일함 토티 전 베이징중앙민족대 교수가 중국법원에서 ‘국가분열죄’로 종신형을 받고 수감되기 1년전인 지난 2013년 외신과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Shinjang Uyghur aptonom rayoni (新疆維吾爾自治區,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1933년 11월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이 처음으로 건국되었으나 3개월 만에 소멸되었고, 1944년 다시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에 병합되었고, 1955년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되었습니다

-위구르족[투르크계 위구르족의 민족적 특성]:알타이계 유목민족인 가오처족과 인도 유럽어 계통 백인들과의 결합(혼인)

-지역:신장 위구르 자치구

-종교:이슬람교

-종족성향:이슬람권 종족(원주민과 인도 유럽어 계통 백인 혼인)

1998년 유엔에서 실시한 통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실 아랍인은 전 세계 무슬림(이슬람교)의 20%가 채 못된다

세계 각국 이슬람교 분포는 1위 인도네시아, 2위 파키스탄, 3위 중국, 4위 인도, 5위 방글라데시등의 순위이고 아프리카 북부지역에 이슬람교가 많으며 아프리카 전체 인구 35%가 이슬람교이다

세계 각국 이슬람교 분포 3위 중국은 1억 3,813만 명 이슬람교인이 있다

 


*티베트...20세기 이후

 

                                                                         Bod-rang-skyong-ljongs( 西藏自治區):티베트(티벳)

1912년부터 1950년까지 현재의 티베트 자치구(우창 지방과 서부 캄 지방)는 달라이 라마가 수장으로 있는 티베트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중국은 한족, 만주족(동북3성), 몽골족(내몽골), 후이족(회족, 신강), 티베트족(티벳) 등 5개 큰 민족과 50개 소수민족으로 건국한 연합국가이다 

 

[일지] 티베트...20세기 이후

1904년 8월 3일 = 티베트 불교 최대 종파의 수장이며 티베트의 제1인자인 달라이 라마 13세 영국군이 침공하자 몽골을 거쳐 중국 청나라로 망명.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티베트를 완충국으로 하려 하였고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13세는 무력해진 청나라를 대신하여 러시아를 끌어드리려 한데서 비롯한 갈등이 침공의 발발 원인이었다.

영국 침공으로 이해 9월7일 영국과(영국 인도 정청) 티베트 간 양측 교역시장 설치와 외국에 영토 불양도 등 티베트를 영국의 세력 범위로 하고 영국군 주둔을 허용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라싸조약이 체결됏다.

현재 티베트 망명정부는 라싸조약 체결을 근거로 티베트가 독립 국가였다고 주장한다.

1906년 4월 27일 = 청나라 정부 베이징 조약에서 라싸조약을 인정한 외에 개방 지역에서 영국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군대 추가 주둔 허용. 영국은 티베트 영토를 점유하지 않으며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며 청의 종주권 인정.

1907년 = 라싸조약 폐기

1910년 2월 12일 = 달라이 라마 13세 종주권 강화를 위해 1909년 티베트에 진입한 청나라 군대가 수도 라싸를 점령하자 인도로 망명.

1911년 =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군대 철수하고 인도에서 귀국한 달라이 라마 13세 티베트 독립 선언.

1921년 12월 23일 = 중화민국 정부 티베트에 관한 신 정부의 입장을 묻는 영국에 대해 티베트의 주권은 중국에 있다고 선언.

1914년 3월 = 중화민국과 영국의 인도정청 간에 인도와 티베트의 경계선을 정한 시믈라 협정 체결. 이 경계선을 인도정청 외무장관의 이름을 따서 '맥마흔 라인'으로 부른다.

1940년 2월 22일 = 달라이 라마 14세 5세 나이로 즉위.

1949년 8월 10일 = 티베트 불교 두 번째 유력 종파의 수장이며 티베트 불교 2인자 판첸 라마 10세 즉위식. 즉위식에는 당시 국민정부의 멍짱(蒙藏) 위원회 위원장과 칭하이성 주석이 참석했다.

1950년 8월 24일 = 중국 인민해방군 즉 공산 중국군 티베트 진입.

1950년 10월 11일 = 인민해방군 티베트 본격 장악 시작하여 5일만인 같은 달 10월 16일에 티베트 전역 군사 점령 완료.

1951년 5월 23일= 중화인민공화국과 티베트 간에 협정 체결로 1911년 이래 유지되어 왔던 티베트의 독립 상태 종식.

1951년 5월 27일 = 중국 티베트 해방 선언

1954년 4월 29일 = 중국과 인도가‘티베트(시장西藏지구와 인도 간 통상 및 교통에 관한 주민 협정을 체결. 이 첫 머리에 평화 5원칙이 삽입됐다. 이 원칙은 상호영토주권 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 불간섭, 평등호혜, 평화공존 등이다.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 지침으로 견지되는 이 원칙을 저우언라이(周恩來) 5원칙'이라고도 부른다.

1956년 4월 22일 = 중국 달라이 라마를 티베트 자치위원회 위원장에 임명.

1959년 3월 10일 = 티베트 중국에 대해 무장 독립 항쟁 봉기. 이달 22일 인민해방군 라싸 점령 무력 진압.

1959년 3월 28일 = 중국 국무원이 시짱(티베트) 군구에 티베트의 반공봉기를 완전 진압하도록 명령하고 판첸 라마로 하여금 달라이 라마의 직무를 대행하게 하였다.

1959년 4월 1일 = 달라이라마 1만여 명 추종자와 함께 인도 망명. 2인자 판첸 라마는 중국 전인대 상무위 부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이후 베이징에서 머무르면서 사실상 억류 생활

1962년 10월 20일 = 중국 인도 침공. 국경 문제가 원인이라지만 배경은 인도에 망명한 달라이 라마의 망명 정부수립이다.

1964년 4월 3일 = 달라이 라마 유엔 본부 소재 뉴욕에 티베트연락 사무소 설치.

1965년 = 중국 티베트를 자치구의 하나로 편입시키고 시짱 자치구로 명명.

1970년 = 판첸 라마 홍위병들에 의한 티베트 문화 파괴활동에 항의하는 7만자 상서 제출하여 마오쩌둥의 심기를 건드려 이후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됨.

1979년 = 판첸 라마 연금 상태에서 풀려나 정협 부주석에 선출 복권됨.

1980년 = 판첸 라마 전인대 부위원장에 다시 선출.

1981년 =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 對티베트 5개조 화해방침을 밝히고 달라이 라마의 귀환을 요청. 5개조는 망명 이전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에서 누렸던 정치, 경제적 특권을 인정하겠다는 내용이었으나 달라이 라마가 베이징에 주로 머무르면서 정기적으로 티베트를 방문하는 조건으로 인해 달라이 라마의 귀환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측과 중국과의 대화의 물꼬를 트는 계기만큼은 마련했다.

1982년 2월 = 달라이 라마 후야오방 총서기 재선에 축하 전문을 보냄.

1980년 5월 22일 = 후야오방 총서기, 완리(萬里) 부총리와 함께 티베트 방문. 공산 중국 성립 이후 중국 최고위급 지도자로서 첫 티베트 방문.

후야오방의 티베트 방문은 문화대혁명의상처 치유 일환이었다. 문화대혁명 시기( 1966 ~ 1976 ) 티베트의 피해는 참혹했다.

1959년 달라이 라마가 망명할 때 6259개의 사찰이 있었는데 1979년 당시에는 겨우 8좌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폐허가 되었다. 59만명의 승려 가운데 11만명이 박해받아 죽고 25만은 강제로 환속되었다.

후야오방의 티베트 방문은 새로 성립된 신지도부가 문화대혁명 기간중 티베트인을 포함한 소수민족에 대해 가한 탄압을 반성함과 아울러 마오쩌둥시절의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를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 행보였다.

후야오방은 티베트에 파견되었던 한족 관료 80%를 철수시켰다. 그리고 티베트족 간부에게 한 지역을 책임지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티베트 방문 직후 서기를 런룽(任榮)에서 인민해방군 지휘관으로 티베트에 오랫동안 근무, 티베트어와 현지 사정에 정통한 인파탕(陰法唐)으로 교체하였다.

그러나 인파탕 역시 자신의 정책을 제대로 추진하지 않자 1984년 쓰촨(四川)성 몐닝(冕寧)의 소수민족 이족(彛族) 출신의 우징화(伍精華)를 새로 임명하였다.

우징화는 공산당 유격대원 출신으로 당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제1부주임으로 있던 인물이었다. 중앙에서 소수민족 업무를 담당하던 그는 권력이양, 경제원조, 종교 자유화 확대 등 민족
자치 정책을 충실히 수행, 티베트족에게서 '라마(Lama) 서기'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후야오방은 모든 소수민족에 대한 유화 정책을 편 가운데 특히 티베트족에 대해 각별한 배려를 했다. 이 때문에 후야오방 집권 시기( 1981년 6월 ~ 1987년 1월 )를 티베트족은 '황금 시절'로 불렀다.
..
1989년 1월 = 판첸 라마 베이징 억류 30년 만에 티베트에 귀환했으나 1월 28일 갑작스레 입적.

1989년 2월 = 후진타오 시장 자치구 신임 서기로 부임. 그는 414명의 한족 간부를 대동했다. 14개 성-시와 3개 중앙 부서에서 선발한 인원이었다. 이러한 중앙정부 조치는 후야오방 노선을 뒤엎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후진타오는 2002~2012년 당 총서기를 지냈다(국가주석을 겸임했는데 재임 기간은 2003~2013년이다).

1989년 3월 5일 = 라싸 독립 무장 항쟁 봉기 30주년을 닷새 앞두고 대규모 독립 시위.

1989년 3월 7일 = 리펑(李鵬) 총리가 시짱자치구(西藏自治區 : 티베트)에 계엄령 실시를 명령했다.

이는 잇따른 티베트 독립주의자의 대규모 시위에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공식적으로는 8일 발표되었다.

리펑 총리는 중국 헌법 89조 16항 규정에 근거하여 계엄령을 발동한다고 말했다. 총서기는 자오쯔양이었다. 후진타오는 후야오방이 발탁하고 키운 인물이었지만 티베트족의 독립 시위를 단호하게 진압하였다.

이후 중앙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은 자치 위주에서 동화정책 강화로 변화하였다. 한족의 이민을 장려, 소수민족을 소수민족 주 거주지역에서조차 '소수'의 위치로 내몰았다.

1989년 12월 = 망명 달라이 라마 노벨평화상 수상

1990년 7월 20일 = 장쩌민 총서기 시짱 자치구 시찰. 경제 발전 지원 약속과'분리주의자' 겨냥하며 사회 안정 강조.

1994년 8월 2일 = 중국 각 성과 국무원에서 선발한 389 명 교사 시짱에 파견.

1995년 5월 = 달라이 라마 11대 판첸 라마 지명. 달라이 라마 지명 판첸 라마 중국 당국에 의해 억류됨.

1995년 11월 29일 = 중국 정부 11대 판첸 라마 지명.

2001년 3월 11일 = 달라이 라마 대만 방문. 당시 대만 총통은 대만 독립을 강령으로 한 민진당의 천수이볜이었다.

2011년 8월 9일 = 티베트 망명 정부의 선출 초대 총리 롭상 상가이 취임. 달라이 라마가 자신이 죽은 뒤 판첸 라마처럼 중국이 자신의 후게자를 지명할 것을 우려 망명 정부의 총리를 인도를 포함한 전세계 망명 티베트인 유권자로 하여 선거로 선출토록 하고 선출 총리에게 정치 권력을 인계,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기로 함에 따라 티베트 역사상 처음으로 선출 총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티베트 불교의 종파 수장인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등은 사망한 뒤 후계자는 티베트 내 환생자로 판단되는 아이를 찾아내 지명되는데 중국은 판첸 라마 후임 지명에서 이 전통을 이용한 것이다.

총리 선출 선거는 전 세계 망명 티베트인 유권자 8만3400 명을 상대로 실시되었고 결선투표를 거쳐 이해 4월 27일에 발표됐다.

2016년 4월 27일 = 롭상 상가이 총리 재선 성공.

*티베트

티베트(西藏)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티베트 고원의 지역으로, 토착 티베트인들의 고향이다. 평균 고도는 약 4,900m이며, 지구상의 육지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린다. 티베트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해발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 산이다.

행정 구역 상 티베트의 서부와 중부는 티베트 자치구(시짱 자치구), 동부는 쓰촨 성과 칭하이 성 등의 민족자치주로 나뉜다.

1.개요

티베트는 중국과 인도의 사이에 위치해 있으나 히말라야 산맥과 티베트 고원에 둘러싸여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히말라야 산맥의 북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역의 평균 고도가 4900m가 넘어,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진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고립된 지역이다

2.티베트 신화

티베트 신화는 진화론과 과거 티베트 지역의 상당부분이 바다였음을 알고 있었던 듯한, 신비로운 성격을 띠고 있다

"먼 옛날 이 설역 고원은 바다였다. 바람이 일고 파도가 치니 거품이 일어나고 이 거품들이 쌓이고 쌓이자 육지를 형성하였다 …(중략)… 시간이 또 흘러 남해 바닷가 보따낙가산 관음보살은 변종으로 나타난 원숭이를 보고 그를 대륙으로 보내어 살게 했다. 원숭이는 불도를 지키며 얄룽 계곡의 한 동굴에 살게 되었는데, 수컷 원숭이는 '투' 였고, 암컷 원숭이는 '초' 였다. … 그 후 나찰녀와 원숭이 사이에서 서로 다른 성격과 외모를 가진 여섯 자식을 낳았다. 그 후손들은 점차 털이 줄고 꼬리가 짧아지면서 일어나 사람처럼 변하였고, 결국 사람이 되었다."

3.티베트 역사

(1)선사시대

1만여 년 전부터 티베트 지역에서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다. 고대 티베트 미얀마어군은 티베트인들은 유목 생활을 하고. 티베트인들은 약 500년경에 미얀마와 분리되었다.

철기시대의 구릉지 마을과 매장지가 티베트 고원에서 발굴되었는데, 티베트의 고대 문서를 따라 샹슝(象雄 Zhang Zhung)문화로 명명되었다. 이들은 뵌(Bön) 지역 문화의 기원으로 알려졌다..

(2)티베트 왕조(토번)

티베트의 기록된 역사는 7세기초에 남리루쩬(囊日論贊)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냈음이 확인된다(중국 사서로 보면, 「신당서」엔 4세기 첸뽀(贊普, 토번 왕을 이르는 명칭) 라토토리넨쩬(拉托托日年贊)이 '줘떠투두' 로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2세기에 티베트에 여러 국가가 등장하였으나 티베트 최초의 통일 국가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왕국으로서 다스린 송첸캄포(松贊干布, 581 ~ 649년)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663년 수도를 라싸로 정하고 티베트 왕조를 열었고 당 태종의 조카인 문성공주(文成公主, 625~680)와 네팔의 공주인 브리쿠티 데비와 혼인하였다. 티베트의 군대는 663년 ~ 672년에는 동북방의 칭하이와 간쑤 지방의 토욕혼 왕국을 점령하였다.

670년 ~ 692년에는 당과 대비천 전투(669년)를 통해 타림 분지와 인접한 신장과 카슈가르시를 점령하고, 승풍령 전투(678년)에 승리해 지위를 확고히 하였으나 692년 중국 왕조 당나라의 장수 왕효걸이 이끄는 군대에 서역을 빼앗겼다. 당은 이 기세를 몰아 토번을 압박하고자 했으나 토번 최고의 명장으로 일컬어지는 가르친링(대비천, 승풍령 전투 승리시의 지휘관)에 의해 소라한산에서 패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티베트인들은 아랍, 동부 투르크와 동맹을 맺었다. 747년에는 당나라의 장군인 고선지의 원정으로 중앙아시아에 대한 티베트의 영향력이 약해졌다. 750년까지 티베트인들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거의 대부분 잃었다. 고선지는 751년 탈라스 강 전투에서 아바스 왕조와 칼룩스의 연합군에 패하였고, 중국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줄어들고 티베트의 세력이 회복되었다. 티베트는 북부 인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고, 763년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가 혼란한 것을 틈타 당시의 첸뽀 치쏭데쩬(赤松德贊)이 다짜뤼공(達札樂宮)을 동정원수로 임명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도읍인 장안을 잠시 점령하기도 하였다

821년 또는 822년에는 티베트와 중국은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두 나라의 국경에 대한 설명과 함께 양국 언어로 기록된 이 조약은 라싸의 조캉사원 앞의 돌기둥에 새겨져 있다. 티베트는 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왕국을 유지했다. 이 시기의 티베트는 토번(吐蕃)이라 불렸고, 티베트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3세기 동안 9대의 왕이 다스렸다

 

(3)몽골과 청나라

이후 티베트는 13 ~ 14세기에는 원나라의 간접적 지배를 받기도 하였으며, 1750년에는 청나라 건륭제의 팽창 정책으로 보호령이 되었다.

(4)티베트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티베트의 13대 달라이 라마는 중화민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다. 하지만 중화민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1913년 몽골과 양측이 독립 국가로 국제적인 승인을 받기 위해 협력한다는 내용으로 몽장 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시 몽골에는 러시아, 티베트에는 영국이 무기, 차관을 제공하는 등 외부의 지원이 있었으나, 영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당시의 제국주의 열강 속에서 몽골과 티베트를 독립국으로서 인정하는 나라는 없었다.

독립 이후 중화민국의 역대정권과 군사적인 긴장상태가 유지되었으며, 티베트 달라이 라마 정부의 실효적 지배 영역 내에서는 어떠한 중국의 기관도 설치가 승인되지 않았다. 1918년과 1930년에는 티베트 영내로 침입한 중국 군대를 격퇴하는 등 사실상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향유했다. 그러나, 1940년 달라이 라마 14세의 즉위식에 참석한 중화민국은 행정원몽장위원회을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의식 후에도 귀국하지 않았고 1948년에 강제로 퇴거되기까지 '중화민국 행정원 몽장위원회 주 티베트 대표처'라는 이름으로 라사에 계속 머물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고, 영국령 인도로부터 이주해 온 영국군에 의해 갼세, 라싸와 카무 지방 각지에 통신기지가 건설되었다. 이 기지들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티베트를 무력 점령할때까지 영국군의 무선기사에 의해 운영되었다.

(5)중국의 지배

청나라의 멸망 이후, 중화민국의 역대정권은 독립국으로서 존재한 티베트를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였으나, 북경정권의 시대에는 군벌의 혼전, 남경국민정부 시대에는 대일전쟁으로 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에 대하여 압력은 행사하였으나 본격적인 군사적 침략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게되면서 중국은 티베트와 타이완을 포함한 중국의 옛 영토를 회복하겠다고 발표한다. 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은 티베트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하지만 중국은 티베트의 평화적인 해방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 1951년 5월 23일 티베트와 십칠조협의를 체결하여 강제 합병하였다. 이로써 티베트는 최초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많은 티베트인들이 정치적인 이유 또는 탄압을 피해 인도로 망명했다.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인에 대한 고문과 학살로써 티베트를 지배하였고, 1960년대에는 중국 전역을 강타한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3,700개나 되던 사찰은 13개만 남고 모조리 파괴되었다.

이후 시짱자치구(서장자치구, 西藏自治區)가 설립되어 티베트인의 자치를 허용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한족이 통치를 유지하였다. 티베트의 중국 귀속 이후로 망명을 떠난 티베트인들의 일부는 동화정책에 따라 티베트로 돌아와서 살고 있다. 한족의 이민을 실시하여 한족의 인구 비율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최근 중국 정부는 포탈라 궁을 보수하는 공사를 시행하였고, 2005년에는 티베트로 연결되는 철도가 완공되었다.

(6)1959년 티베트 봉기

1959년 티베트 봉기는 1959년 3월 10일 중국공산당의 강압적인 티베트 통치에 반발한 티베트인에 의하여 일어난 반중국, 반공산주의 봉기이다. 봉기가 일어난 날인 3월 10일은 매년 티베트 망명 정부 등 티베트 독립 운동 단체들이 티베트 민족 봉기 기념일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하고 있다

1959년 티베트의 캄 지방과 암도 지방에서 티베트인에 의한 무장 반란이 시작되어 티베트 동부 지역에 인민해방군이 증파되었다. 티베트에 진주한 인민해방군은 티베트의 마을이나 사원에 대해서 공격을 강화하였다. 인민해방군 사령관은 티베트 게릴라 부대를 굴복 시키기 위해, 포탈라 궁과 달라이 라마를 폭격하겠다고 위협했다.

한편 3월 1일 라사 교외에 있는 인민해방군 사령부에서 달라이 라마에게 연극 관람을 제안하였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그 제안을 미뤘지만, 최종적으로는 3월 10일에 연극을 관람하기로 합의하였다.

3월 9일 약속 하루 전 인민해방군 장교들이 전통에는 어긋나는 것이지만 달라이 라마가 연극관람을 할때 무장 경비대를 동행시키지 않는 조건과 포탈라 궁에서 인민해방군 주둔지로 이동할 때에 어떠한 공식적인 의식을 실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이 요구가 라사에 있는 티베트 사람들에게도 퍼져 중공 당국이 달라이 라마 14세의 납치를 꾀하고 있다고 생각한 티베트 사람에게 공포감을 조성하였다.

다음 날인 3월 10일에 티베트인 약 30만 명이 인민해방군 측이 달라이 라마를 포탈라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궁전을 둘러쌌다. 3월 12일에는 라사에 모인 항의자들이 티베트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라사의 큰 길에는 바리케이트가 만들어지고 티베트독립군과 인민해방군은 충돌에 대비해 각각 라사 내외에 거점을 요새화하기 시작하였다.

3월 15일 상황이 악화되자 달라이 라마 의 피난 준비가 시작 되었는데 3월 17일에 달라이 라마의 궁전 근처에 인민해방군이 발사한 2발의 포탄이 명중해, 이것이 그의 인도 망명행과 망명정부 수립의 방아쇠를 당기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가 라사를 탈출하고 난 뒤인 3월 19일에는 라사의 주요 사원에 대한 포격을 포함한 전투가 시작했다. 티베트군은 인민해방군에 비해 숫자와 무장이 빈약해, 이 전투는 이틀만에 종료되었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추정치에 의하면 1959년 봉기때 티베트인 약 86,000명이 인민해방군에 의해 사망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 주장에 반대 하고 있다.

라사의 주요 사원과 절은 중국군의 폭격에 의해서 심한 손상을 입었고 약탈, 파괴되었다. 그리고 라사에 남은 달라이 라마 14세의 무장경비원과 무기를 숨기고 있었던 티베트인들은 무장 해제가 되어 공개처형이 되었다.

(7)2008년 티베트 소요 사태

2008년 3월 10일 1959년 티베트 독립운동 49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티베트 승려(수도승) 600여명의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로 시작되어 2008년 3월 14일 티베트 독립운동 시위대가 중국 경찰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로 번지게 되었고, 중국 정부의 무력진압으로 사태가 격화되었다.

 

2008년 티베트 소요 사태는 1959년 티베트 독립운동 49주년이 되는 2008년 3월 10일 티베트 승려(수도승) 등 600여 명이 중화인민공화국 중앙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로 시작하여 3월 15일쯤 라사 도심 라모기아 사원 인근에서 몇명의 티베트 반정부 시위대가 중화인민공화국 공안과 충돌하면서 유혈사태로 번지게 되었다.

그 후 불어나기 시작한 시위대는 도로변에 있는 건물과 경찰 차량, 정부 청사 등에 투석과 방화 등을 감행했고,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행인들을 공격하며 도시의 치안은 큰 혼란에 빠졌다.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정부가 발표한 시위대로 인한 공식 사망자 수는 13명(3월 17일 현재)이었으나, 인도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는 시위 과정에서 8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다.

3월 15일 밤, 인민해방군이 탱크와 장갑차로 라사 시내에 진입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당국은 공안 2000여명을 투입해 최루탄을 쏘며 강제 해산했고 60여명을 연행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당국은 지난 며칠간 소수의 승려들이 라사에서 어느 정도의 소요를 일으켰으며 지방 정부와 사원의 노력으로 상황이 안정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2008년 8월 8일에 개최된 베이징 올림픽까지 위협하는 이번 소요 사태에 대해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정부는 질서 회복을 위해 '인민 전쟁'을 선언하는 한편 티베트 망명정부 실질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지지 세력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이런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정부의 대응에 대하여 인권 단체들은 이번 시위가 1989년 대대적인 중앙정부에 대한 항거 이후 가장 큰 규모라고 전했다.[2]

한편,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정부가 라사 일원에 계엄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계엄상태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이로 인해 외국인 관광객들은 라사로 들어갈 수 없었으나 현재는 외국 기자는 물론 관광객까지 라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4.지리와 생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티베트 고원에 위치하고 있다. 네팔과의 국경에는 에베레스트 산이 있다. 수도(중심지)는 라싸(Lhasa, 拉薩)이다. 다른 지역으로부터 고립되었다는 특성 때문에 희귀한 동식물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 한족의 유입에 따른 지역 경제의 성장으로 티베트 특유의 환경은 위협받고 있다. 티베트의 70%는 초원이어서 주요 산업으로는 농업이 차지하고 있다. 면적은 122만8400㎢이며 인구는 274만명이다.

5.기후

고산 기후의 특징을 띠고 있다.

6.주민

대체로 티베트인이 거주하고 있으나, 동화정책으로 인하여 한족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7.종교

종교는 티베트인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존중되는 문화의 한부분이다. 티베트의 주요 종교는 불교이다. 17세기 포르투갈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티베트를 서구 사람들에게 알렸다.

티베트 불교는 인도로부터 전래되어 7세기에 국교의 자리로 차지하였다. 이 불교가 티베트의 특유의 문화인 티베트 불교로 발전한다. 티베트 불교는 바하라야나(Varjrayana)의 독특한 형식을 따른다. 티베트의 불교는 티베트에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몽골, 네팔, 부탄, 라다크 등의 국가들에서도 행해진다. 티베트인들은 부처의 가르침에 아주 작은 의문조차 품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통치 이후 열렬한 종교 활동에 의문을 품은 중국 정부에 의해 불교는 정치화되었다.

8.언어

티베트인들이 쓰는 언어는 티베트 문자로 되어 있는 티베트어이다. 티베트 문자는 부탄의 공용어인 종카어에서도 사용된다. 티베트어는 티베트 고원과 부탄에서도 사용되고, 종카어의 일부와 인도 북부의 시킴 지역에서도 사용된다. 티베트어는 일반적으로 시노-티베트어족(Sino-Tibetan)의 티베트 미얀마어군에 분류된다. 티베트말에는 다양한 방언이 있으며,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티베트와 다른 히말라야의 언어들은 종종 불분명하다. 티베트어의 다양한 방언을 고려하면, 티베트어족은 티베트 고원에 걸쳐 약 6백만 명이 사용하며, 약 15만 명의 망명자들이 사용하고 있다.

티베트 문자는 인도의 데바나가리 문자에 기원한다.

9.음식.

티베트는 고산지대이기 때문에 식물이 별로 자라지 않아 주로 야크를 이용하는데, 특히 야크의 젖으로는 우유, 치즈 등을 만들 수 있다.

 

                                                                       3월 1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벌어진 티베트 반중국 시위

 

                                                                                                         티베트 포탈라 궁

*내몽골자치연합정부(일본 괴뢰정권)

몽강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  Měngjiāng Liánhé Zìzhì Zhèngfǔ) 또는 몽강국은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내몽골 자치구 일대에 있던 나라이다. 몽강국은 당시 만주국 챠하 주와 수이유엔 주를 통치 범위로 했으며, 수도는 장자커우였다

내몽골 독립 운동가인 뎀치그돈로프(德穆楚克棟魯普, 덕왕)에 의해 1936년 5월 12일 몽골군 정부(蒙古軍政府)로써 수립되었고, 1937년 10월에 몽골연합자치정부(蒙古聯盟自治政府)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뒤에 1939년 9월 1일에 다시 몽강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로 개칭한다. 그러나 뎀치그돈로프(덕왕)는 일본 제국에 협력하던 인물로, 몽강국은 만주국의 영향 아래 있던 일본 괴뢰국이였다.

그 결과, 이 지역은 일본의 괴뢰정권으로 전락하였으며, 결국 덕왕은 만주국의 푸이처럼 단지 꼭두각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몽골군과 소련군의 합동작전인 8월의 폭풍 작전으로 멸망, 현재 내몽골 자치구로 이어지고 있다.

몽강연합자치정부는, 약간의 대포와 군대를 갖추고 있었지만, 전차나 비행기는 단 한 대도 없었고 소총 등의 총류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마민족인 만큼 기병대가 많이 있었다

 

                                                                                      중국 내몽골 자치구

 

*동북3성 독립



1932년 2월 28일 시챠(熙洽,희흡), 마잔산(馬占山, 마점산), 장징휘(張景惠,장경혜)등 중국 동북지구의 소수 군벌들이 동북행정위원회를 조직하고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이는 일본이 괴뢰국 만주국을 건국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1911년 신해 혁명이 일어나자 중국의 각 성이 독립을 선언하고 중화민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상당수가 군벌로 독립적 지위를 유지했다.

1928년 국민정부의 북벌로 주요 군벌이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투항했으나 영국 영향 하의 티베트와 소련 세력 하의 외몽골 지역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에 복속을 거부하고 독립 상태를 강하게 견지했다. 일본은 영국과 소련의 본을 따 만주 지역을 독립 상태로 만들어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려 했던 것이다.

소수 민족인 키베트 족과 몽골족은 청나라 이전 각각 티베트와 몽골 초원 지대에서 중국 중앙 권력과 구별되는 독립적 국가로 상당 기간 있었고 특히 몽골족은 중국 전역을 지배한 적도 있었다.

만주족도 소수 민족으로 몽골족의 원나라와 마찬가지로 정복 왕조인 청나라를 세우기 전 명나라 시기 만주 지역에서 중앙 정부 지배를 받았으나 자치적 지위를 누렸고 그 이전에는 금(金)나라와 같은 중국 중앙의 왕조와 구별되는 독립적인 왕조 국가를 유지하며 대립했었다. .

1931년 9월 18일 일본 군부 중앙 지도부와 관동군( 일본의 중국 파견군으로 산해관 이동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를 통칭하여 이같이 불렀다)은 류탸오거우(柳條溝)에서 일본이 관할하고 있는 만철(滿鐵) 선로 폭파사건을 일으켜 중국 동북 3성에 대한 전면 침략에 나섰다. 이것이 바로 만주 사변이다.

공산군 토벌에 일단 전념 하겠다는 장제스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만주 전 지역을 군사적으로 손쉽게 장악한 일본은 1928년 부친을 폭사시킨 이유로 반일로 돌아서 국민혁명군에 투항한 장쉐량(張學良)과 달리 국민혁명에 부정적이었던 시챠, 장징후이(張景惠), 짱스이(臧式毅), 장하이펑(張海鵬), 간즈산(干芷山), 마잔산 등 소규모 군벌들을 강요하여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성 등 동북 3성의 독립을 선언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앞서 이해 2월 16일 '대동(大同)'이란 연호의 괴뢰국-즉 만주국-수립을 선포한 후의 후속조치였다.

이 해 3월 1일에는 이들이 조직한 동북행정위원회에 의한 만주국 건국선언을 발표시켜 중국인 자신에 의한 독립이라는 형식을 갖추었다.

일본은 같은 해 3월 9일에는 1924년 11월 5일 자금성에서 축출되어 1925년부터 톈진에서 은거하고 있던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비밀리에 만주로 유인하여 집정(執政)에 취임시켰다가 1934년 만주국 황제(康德帝)에 등극하게 했다.

 



                                                                    오족협회(5종족 연합) 만주국 국기(사진)

만국(만주국)은 한족,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일족(일본족, 야마토민족) 등 5개 종족 연합국이다

만주국의 국기에는 노란색(만주족) 바탕 왼쪽 상단에 네 가지 색(빨간색(일본 민족), 파란색(한족), 하얀색(몽골족), 검정색(조선인))의 가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오족협화의 이념을 뜻한다

조선족이 만주국에서도 자치정부로 참여하여 상류층으로 생활했다

 





                      1931년 3월 1일부터 1945년 8월 18일까지 동북아 한반도(일본 식민지 조선총독부)와 만주(일본 자치 괴뢰정부 만주국)지도만주국을 세운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