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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중국-베트남 전쟁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중국-베트남 전쟁

CIA Bear 허관(許灌) 2017. 1. 8. 14:27

 

중국 등소평(덩샤오핑)정부는 1979년 2월 17일에 베트남 침공을 감행했다.

1979년 2월 17일 중국군이 윈난(雲南)성과 광시(廣西)자치구 양 방면을 통해 베트남 북부에 침공했다.

1965년 2월 9일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중국을 침략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베트남을 지원하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거역할 수 없는 의무”라는 성명을 발표했던 중국이 14년 9일 후에는 도리어 베트남을 침공한 것이다. 국제정치상의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라는 말을 실감케 하는 사태였다.

공산 중국이 1949년 건국이후 외국과 전쟁한 것은 베트남 침공이 네 번째였다. 1950년 10월 압록강을 도하하여 한국과 미국 등과 맞섰고 1962년 10월에는 인도를 침공했다. 1969년 3월에는 소련과 국경충돌을 벌였다. 동(東, 한반도), 서(西, 인도), 북(北,소련)에서 각각 한 차례씩 전쟁을 벌인 뒤 남(南) 쪽의 베트남을 침공한 것이다.

첫 번재 전쟁을 제외하고는 모두 동맹국이거나 우방국이었다가 적대국으로 돌변했다,.

베트남 침공 후 2016년 현재까지 37년 동안 중국은 단 한 차례도 전쟁을 벌인 바 없다.

동서남북 전쟁의 성격도 공통점과 함께 각각의 차이점도 갖고 있었다. 네 전쟁 모두 중국의 세계 전략적 고려가 작용된 전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차이를 들자면 한국전쟁은 냉전의 속성이 다른 어떤 전쟁 보다도 강했다. 인도 및 소련과의 국경충돌은 제국주의적 유산이 불러일으킨 갈등에서 비롯됐지만 후자에서는 인종 간 대립이 그 배경에 드리워 있다는 점에서 전자와 구별된다. 베트남 침공는 변경지역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전통적 군사개입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아시아 내 사회주의 국가끼리의 최초의 본격적 전쟁인 베트남의 크메르 침공의 여파로 일어난 이 전쟁에 양국은 모두 3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중국은 베트남 북부의 주요 도시인 랑손(Lang Son), 카오방(Cao Bang), 라오카이(Lao Cai) 등을 점령했으나 미군과의 전쟁을 통해 현대전에 익숙한 베트남 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중국은 침공 한 달을 하루 남긴 이 해 3월 16일 자진 철수했다. 인도 침공 당시에는 군사적 승리를 거둔 뒤의 철수였으나 베트남 침공의 경우에는 사실상의 패전 뒤의 철수였다.양 측에서 수만 명의 사상자가 났으며 중국 측의 피해가 심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 침공은 중국 지도부에 수만 많은 인민해방군의 실체를 냉정하게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덩샤오핑의 과감한 병력감축으로 이어지는 한 배경이 되었다.

중국은 침공한 이유를 베트남군의 잦은 국경침범에 대한 ‘자위적 반격’이고 ‘징벌과 제재’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단지 구실일 뿐이었다.

영토문제가 한 원인이기는 했지만 베트남 전쟁 때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이 통일 후 소련에 미군이 사용하던 남부 지역에 해군기지를 제공하는 등 소련의 대 중국 포위망 구축에 동참한 것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침공의 보다 직접적 계기는 1978년 12월 베트남군이 친 베트남의 헹삼린 세력을 앞세우고 캄보디아를 침공, 친 중국적인 크메르 루즈 정권을 프놈펜으로부터 축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의 베트남 침공은 세계전략적 차원에서 대중 포위망 구축에 대한 응전이란 측면도 갖고 있다. 인도와의 국경충돌, 진보도(珍寶島 : 전바오다오)사건 즉 중소 국경충돌 등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또한 국경지역의 친중 정권 붕괴가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전 참전과도 성격상의 유사성이 있다.

침공 당시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은 덩샤오핑(鄧小平)이 겸임하고 있었고 덩샤오핑은 침공이 있기 두 달 전인 1978년 12월 중국 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화궈펑(華國鋒) 세력을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마오의 극복을 주장한 덩이었지만 세계전략적 사고에서는 마오의 관점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베트남이 소련에 접근한 이유는 베트남 전쟁 말기부터 중국의 급속한 대미 접근과 대국주의적 정책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프랑스 식민지였던 국가들을 통합, 인도차이나 연방을 수립하려는 패권주의적 속셈도 소련에 대한 접근을 가속화한 요인이었다.

베트남의 중국에 대한 경계감은 대내적으로는 베트남 거주 화교를 대거 추방으로, 대외적으로는 친중적인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 정권 축출로 구체화하였다.

전쟁발발과 함께 단교했던 중국과 베트남은 국경문제 등으로 인해 냉랭한 관계를 지속해오다가 1991년 복교했다. 이를 계기로 양국 정상이 상호방문을 하는 등 정상화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장쩌민(江澤民)은 1994년과 2002년에 총서기 겸 국가주석 자격으로 , 리펑(李鵬)은 1996년 에는 총리 신분으로, 2001년 9월에는 전인대 상무위원장 자격으로 각각 베트남을 방문했다.

또한 장쩌민 후임으로 총서기겸 국가주석에 오르는 후진타오(胡錦濤)도 2001년 국가부주석겸 정치국 상무위원 신분으로 베트남을 방문, 베트남 공산당 제 8차 당대회에 참석했다.

이어 후진타오는 총서기가 된 뒤인 2006년 하노이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비공식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베트남을 공식방문했다. 후진타오는 베트남 방문 이후 역시 과거 국경충돌을 벌였던 인도를 방문했다.

한편 베트남에서도 쩐 둑 렁(Tran Duc Luong : 陳德良국가 주석이 2000년에, 농 둑 만(Nong Duc Manh) 공산당 서기장이 2001년에 중국을 방문했다. 농 둑 만 서기장은 2006년 8월 중국을 다시 방문했는데 이는 그가 서기장에 연임된 뒤 첫 해외방문이었다. 2004년에는 양국 총리가 상호 방문했다.

양 측이 접근하게 된 동인은 미국이 제공하고 있다. 중국은 빌 클린턴 행정부의 적극적인 베트남 접근에 자극받아 베트남과의 화해를 추구하였고 베트남은 조지 W 부시 정권 이후 미국이 소극적인 자세로 전환하자 중국과의 접근을 가속화한 것이다.

중국과 베트남과의 접근이 가속화하자 부시 정권도 2006년 6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을 베트남에 보내는 등 전환된 자세를 보였다. 미 국방장관이 1975년 베트남전 종전 이후 베트남을 방문하기는 클린턴 행정부 말기인 2000년 코언 장관 이래 2 번째였다. 베트남은 종전 후 처음으로 2003년에 국방장관이 미국을 방문했다.

이어 2007년 6월에는 베트남의 응웬밍찌엣(阮明哲) 국가주석이 베트남 전쟁 종료 후 최초로 공식 방미,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중국과 베트남은 빈번한 상호 접근을 배경으로 국경 문제 역시 해결 절차를 밟았다. 지상 국경선 문제와 관련에서는 합의가 이루어졌고 통킹만의 해상 국경선 역시 가닥이 잡혀있으나 남사군도 문제는 여전히 충돌 가능성이 잠복한 뜨거운 감자이다.

관계정상화에 따라 양국의 교역량도 수직 상승했다. 2004년 당시 양국의 교역규모는 72억 달러였는데 이는 관계를 정상화한 1991년에 비하면 190배 증가한 것이다. 또한 이해를 기점으로 중국은 베트남의 최대교역국이 되었다. 2005년에 교역량은 80억 달러로 증대됐다.

배트남을 중심으로 중국과 미국이 세력 균형을 이루던 현상은 2012년 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로의 회귀 전략'('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 '재 균형' 전략으로도 불린다) 정책을 선언하면서 베트남이 군사 전략적으로 중국과는 대립하고 미국과 가까워지는 현상이 시작됐다. 베트남은 남중국해의 남사군도와 서사군도에서 중국과 긴장 관계를 고조시키면서 미국과 가까워지고 있다. 베트남전 종전 후 소련과연대하여중국을 견제하는 원교근공 정책이 솧련을 미국으로 바꾼 채 다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은 중국이 2014년 남중국해 시사군도에서 석유 시추 사업을 시도한것에 대응, 2015년에들어 와 남중국해에서 실효 지배하고 있는섬과의 항곡 교통편 설치를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양국은 상대방에 대해대화의 손짓을 계속하고 있다..

중국의 베트남 침공 36 주년을 6일 앞 둔 2015년 2월 11일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겸 당 총서기는 베트남 최고 지도자 응웬 푸 쫑 당 서기장과 전화 회담을 갖고 쫑 서기장이 올해이른 시일 내에 중국을 방문해달라고 초청햇다. 이에 쫑 서기장도 시 주석의 베트남 방문을 요청하는 화답을 했다

그러나 중국의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 문제가이슈화 하면서 양국 관계는 대단히 불편한 상황에 처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
시 주석은 2015년 11월 5일베 트남을 국빈 방문, 쫑 서기장과 정상 회담을 가졋다.

시 주석의 베트남 방문 4개월 전인 2015년 7월 6일부터 10일까지 쫑 서기장은 미국을 방문했다. 쫑 서기장은 공산 베트남 최고 지도자로서는 사상 처음으로미국을 방문했는데이해는 베트남 전 종전 40 주년이었다.

쭝 서기장은 미국 방문 2개월 뒤이며 시 주석의 베트남 방문 2 개월 전인 9월 15일 일본을 방문햇고 올해 5월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할 예정이다.

미국과 일본이 중국 을 겨냥 샌드위치 대 베트남 정상 외교를 펼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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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월 전쟁(中越戰爭) 또는 중국-베트남 전쟁(中國越南戰爭)은 1979년 2월 17일 국경분쟁을 시작으로 일어난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1.배경

1975년 북베트남의 베트남 전쟁 승리로 베트남은 공산 통일되었고, 그 여파로 인접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공산화되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전쟁 중에 중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으나, 역사적으로 베트남인들의 대중국 감정이 좋지 않은 데다가 공산 정권이 남베트남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화교를 탄압하여 양국관계는 험악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친중국계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관계도 악화되었으며, 급기야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베트남의 이웃 나라 캄보디아는 1975년 4월 론놀의 친미 군사 정권이 전복되었고, 1976년 1월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고 민주 캄푸치아의 성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폴 포트 정권은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 정치를 실시하였고, 통일 베트남과의 대립이 격화되어 1978년 1월에 국경 분쟁으로 국교를 단절하기에 이르렀다.

캄보디아 내의 베트남계 주민에 대한 폴 포트 정권의 박해와 공포 정치가 극에 달하고 캄보디아와의 미확정 국경 문제로 인해 크메르 루주의 국경 침범과 도발이 반복되자, 통일 베트남 정부는 캄보디아에서 망명해 온 크메르 루주군 사령관 헹 삼린 등을 지원하는 형태로 캄보디아를 침공하였고, 1979년 1월에 프놈펜을 점령하여 헹 삼린을 수반으로 하는 친(親)베트남 캄보디아 정권을 세웠다. 이에 중국 정부가 후원했던 폴 포트는 밀림 지대로 도망쳤다.

베트남 공산당이 소련-중국 분쟁에서 소련측을 지지한데다가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캄보디아에서 중국이 지원하던 폴 포트 정권이 붕괴되고 친베트남 정권이 들어서자, 중국 지도부(덩샤오핑과 화궈펑)는 캄보디아 전선에 머물던 베트남군의 주력을 철수시키기 위해서 베트남의 북부를 침공하기로 결정하였다.

2.전쟁 과정

1979년 2월 17일 국경 지대인 윈난 성에 집결한 중국군은 베트남과의 국경을 넘어 공세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베트남 북부는 열대 산악 지형으로 중국군이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베트남군은 주력 부대가 캄보디아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 침공군에 맞선 병력은 민병대와 국경 수비대뿐이었다. 그러나 베트남군은 수십 년 간의 실전 경험이 있었고 현지 지형에 익숙했던 반면, 중국군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중국을 뒤흔든 문화대혁명 때문에 장비나 통신면에서 근대화가 지체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중국군은 전쟁 중 많은 사상자를 내는 희생을 치렀는데, 그 와중에도 계속 전진하여 3월 6일 국경에서 40 km 정도 떨어진 요충지인 랑선을 점령하였다.

이후 중국은 일방적으로 "징벌적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철군한다"고 발표하여 랑선을 철저히 파괴하고 철군하였다.

3.결과

중국군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주장하며 철군하였으나,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을 철군시키려던 당초의 전쟁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중국과 베트남은 1980년대 내내 국경선 획정을 두고 산발적인 전투를 계속 벌였다. 1989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로부터 철군하자, 양국 사이에 평화 협상이 시작되어 1999년 중국-베트남 간 육지 국경선을 획정하는 국경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와중에 1980년대 내내 베트남에서는 해상로를 통한 화교들의 탈출이 계속되어 보트피플이 동남아 해상을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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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요

1975년 남부 베트남을 함락시킨 통일 공산베트남은 전통적으로 反中감정을 갖고 있는데다가 소련과의 탄탄한 연대력을 갖고 있어 중국으로서는 베트남을 매우 위험스레 보게 된다.

게다가 사회주의 체제를 뿌리내리려했던 베트남으로서는 베트남에 거주하는 화교들의 영리행위가 전형적인 자유경제행위를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화교에 대한 탄압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외화획득원의 하나였던 화교에 대한 탄압정책을 중국정부로서는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2.일지

1978년 가을 부터 베트남과 중국의 대립은 매우 빠르게 악화되었고, 매스컴을 통한 비난 성명전도 강도를 더욱 높여가게 된다.

1979년 초부터는 국경지역에서 작은 충돌들이 일어나면서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하며, 양국의 상대방에 대한 비난 강도는 더욱 높아지면서 국경선에는 군대가 증강배치 된다.

중국군 수만명이 운남성(雲南省)에서 베트남의 국경지대로 이동하는 것이 미국의 인공위성에 의해 확인되기 시작했으며, 이어서 국경선상의 십여 군데에서 포연과 화염이 일어나는 것도 포착하여 서방세계에 알리게 된다.

중국군은 5개사단 약 7만명의 병력으로 구경선으로부터 20-30Km 떨어진 인구 3~5만 정도의 작은 도시인 베트남의 몽카이, 하치만, 라이차우 3도시를 목표로 주공격 루트를 삼아 공격 한다.

1979년 2월 18일 중국은 '베트남에 대한 징벌이며, 영토에 대한 야심은 없다' 성명을 발표한다.

이에 베트남의 Hanoi 방송은 중국의 침략에 항의하며 항전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1979년 2월 20까지 중국군의 침공군 병력은 더욱 늘어나 63형 전차 수백대를 포함하여 10만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중국군은 후방에 580만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이들 모든 병력을 운남성 일대로 집결 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경선 일대는 주로 1,000~1,500m에 이르는 산악과 아열대림 지역으로 대규모 병력의 이동이 어려울 것으로 예측 되었으나, 중국군은 인해전술에 기초하여 아열대 산림을 벌채하가면서 길을 뚫고, 이 뚫린 길로 병력을 투입하는 제파공격으로 베트남군의 진지를 압박한다.

베트남으로서는 이 국경산악 지대가 돌파 당하면 국경지역으로부터 16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수도 Hanoi가 위태로워지며, 이 산악지대를 벗어나면 Red river의 삼각주에 위치한 Hanoi까지는 방어가 불가능한 평야지대가 펼쳐지는 지리적 약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군으로서는 이 산악지대에서 중국군의 주력에게 타격을 입힐 필요가 있었다.

무식할 정도로 병력을 대량투입하여 무조건 전진돌파하는 중국군의 전술에 맞서 베트남군과 베트남 지방 예비군들은 민간인들을 대피 시키고, 산의 능선을 중심으로 북사면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완강히 항전한다.

중국군은 엄청난 병력의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베트남 진지를 공략하기 위하여 많은 전차와 보병을 투입하지만, 오히려 개전 24시간만에 63형 전차 13대를 격파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들 63형 전차는 대개 베트남군 보병이 발사한 소련제 싸가 대전차 미사일에 의해 파괴 되었다.

중국군과 베트남군은 쌍방간에 포병의 많은 화력을 동원하기도 하였지만, 산악과 삼림으로 이루어진 지리적 특성상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에 초조해진 중국군은 2월 20일 현재 까지 중국군은 목표한 대부분의 베트남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는데 실패하면서, 추가로 10만명의 병력을 투입하게 된다.

1979년 2월 24일에는 결국 20만명의 대공세 앞에 베트남의 돈단과 몽카이 방어진지가 돌파 당한다.

그러나 중국군은 이 작은 도시를 점령하기까지 2,000명의 전사자와 40대 이상의 전차와 차량을 잃게 된다.

이에 반해 베트남군은 완강하고도 적절한 작전을 펼쳐 엄청난 공격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비해 1/3 수준인 840명 사상이라는 병력손실에 그칠 수 있었다.

1979년 2월 27일부터 베트남은 반격에 나선다.

1979년 2월 28일 베트남군은 중국군에게 빼앗겼던 돈단市을 다시 탈환한다.

베트남 병사들이 중국군의 숫적 위력 앞에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항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중국 수뇌부에게 이 탈환 소식은 엄청난 충격이 되었다고 한다.

공군의 동원은 전면전으로의 확전을 우려한 탓인지 양측에서 많이 동원되지는 않았지만, 중국군의 J6(Mig-19의 중국형)와 베트남군의 A-37이 일부 출격하여 주로 소규모 대지 공격에 투입되었는데, 중국군의 J6이 15대 이상 격추 된데 비하여 베트남군이 1/3수준인 5-6대 정도를 잃었다.

1979년 3월 1일부터 중국군은 6.25때 투입되었던 정예의 325사단과 338사단을 주축으로 란손市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강화한다. 중국군은 6.25 때처럼 인해전술에 기초한 제파공격으로 베트남군 진지를 파상공격하여 차례로 공략하게 된다.

베트남군은 몇몇 거점에서는 전멸상황까지 가면서도 항전하면서, 전략적 철수를 병행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이는 중국군에게 가능한 한 많은 손실을 강요하면서, 지탱할 수 없을 때에는 퇴각하는 방법이었다.

60,000명 이상의 병력을 집중하여 란손市를 점령한 중국군은 이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 한다.

1979년 3월 2일에는 국경선에 위치한 Laokai도 중국군에게 점령 당한다.

1979년 3월 2일 소련은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베트남에 대규모 의용군을 파견한다는 발표를 한다.

1979년 3월 3일 국경선으로 부터 30Km 거리를 어렵게 점령한 중국군은 '징벌'을 달성하였다고 성명을 발표하고 철수를 시작 합니다. 이에 베트남군도 휴전을 전한다.

1979년 3월 15일 중국의 국방장관 화국봉은 베트남에서 완전철수 하였다고 발표 한다

3.결과

이 전쟁에 중국군은 20만명의 병력을, 베트남은 10만명을 동원하였다.

이 후 베트남은 중국군 41,705명 섬멸, 전차와 차량 421대 그리고 화포 66문을 파괴 또는 노획하였다고 발표한다.

이 전쟁에서 중국군은 징벌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성명을 발표하였지만, 피해는 예상외로 커서 중국 수뇌부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다.

중국의 11개 사단이 괴멸적 또는 중대한 손실을 입는 예상외의 타격을 받은데에는 베트남군이 열세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숫적 열세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았고, 미국제 M113장갑차와 소형무전기 같은 상대적 첨단 장비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9년 발행된 중국군의 보고서는 보병의 돌격에 의한 인해전술은 현대전에 적합하지 않은 과거의 전법이며, 중국군 역시 과거의 군대에 불과하다고 자체 평가를 하게 되며, 1982년 부터 중국군 현대화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