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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3월 2일 - 중국과 소련 우수리강 전바오섬에서 충돌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1969년 3월 2일 - 중국과 소련 우수리강 전바오섬에서 충돌

CIA bear 허관(許灌) 2017. 1. 8. 20:47

 

 

                                                                                          Northeast Asia[Far East, 2016] 

동북아시아(극동지역)은 한반도와 중국 동북3성, 러시아 극동연방관구, 일본등이다 

1969년 3월 2일 새벽 4시, 소련과 중국의 국경인 우수리강 유역의 전바오(珍寶, 소련측 명칭은 다민스키) 섬에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날 충돌은 섬을 순찰하던 소련 국경수비대에 미리 매복하고 있던 중국군 300여 명이 기습공격을 가함으로써 촉발 되었다. 날이 밝자 소련은 자국 순찰대가 얼어붙은 강위를 지날 때 중국 측이 선제공격을 가해 31명이 전사하고 14명이 부상을 입는 피해를 당했다고 밝혔다. 중국은 장갑차까지 동원한 소련 측이 먼저 발포를 했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역시 세계 최대의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충돌은 그 뿌리가 19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60년 제정 러시아는 베이징조약을 맺어 쇠락한 청나라로부터 헤이룽강 북쪽과 우수리강 동쪽을 빼앗았다. 당시 러시아가 빼앗은 지역은 조선 영토였던 연해주를 포함해 한반도의 5배 가까운 엄청난 넓이였다. 중국으로선 억울한 일이었지만 빼앗긴 땅을 되찾을 만한 힘이 없었다. 한편, 혁명을 성공시킨 소비에트 정부는 1919년 카라한 선언을 통해 제정 러시아가 중국에서 얻은 이권과 불평등 조약의 전면적인 폐기를 선언한다. 1924년 5월에는 소비에트 정부와 중국 ‘헤이룽장’(黑龍江)省 군벌 정부 사이에 쌍방의 합의에 따라 국경선을 재조정하기로 하는 합의가 이루어져지만 중국의 혼란한 정치 상황과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구체적인 협상은 진행되지 못했다.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한 뒤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했지만, 1950년 2월 ‘중소 우호동맹 상호 원조조약’으로 양국 간의 밀월관계가 시작되면서 중·소 국경문제는 논의가 유보 되었다 한국전에서 함께 북한을 지원하면서 공고해져가는 듯 했던 양국의 밀월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이념문제였다. 1956년 제 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있었던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발언은 마오쩌뚱 1인 지도 체제를 구축해가던 중국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교조적 입장을 견지하던 중국에 대해 소련은 1959년 6월, ‘국방 신기술에 대한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중국의 국방 현대화를 지원하고 있던 자국의 기술자들을 철수 시킨다.

1962년 중국·인도 간 무력 충돌이 일어났을 때는 소련이 인도에 미그기를 비롯한 무기를 공급해 중국을 격분시켰다. 이런 갈등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입장차로 더욱 증폭됐고 중국의 문화혁명에 대한 소련의 맹렬한 비난에 중국은 ‘소련의 지도부는 사이비 수정주의 공산주의자’라는 말로 맞받았다. 갈등은 양국이 상대방의 외교관들을 추방시키는 사태로까지 비화되고 국경지대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동부국경 4280km와 서부국경 2978km를 맞대고 있던 양국 군대 간에 소규모 충돌들이 이어졌고, 소련은 그 때까지 강으로 나뉜 국경선의 경우 중국 쪽 강안(江岸)을 경계로 삼아 강 복판에 있는 1845개의 섬들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중국은 국제법대로 국경선을 강 중앙으로 설정, 총면적 787km²에 이르는 890여개의 섬을 되찾으려 시도한다. ‘전바오’섬 무력충돌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3월 15일, 양측 군대 간에 2차 교전이 벌어진다. 중국군은 2천 여 명의 병력과 야포를 동원했고, 소련군은 전차와 장갑차 등 현대식 무기를 총동원해 ‘전바오’ 섬뿐만 아니라 국경 일대의 중국군 진지에 포격을 가한다. 2차 충돌에서 중국군은 8백 여 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했고 소련군은 60여명의 인명피해를 낸다. 중국에서는 2억5천 만 명이 플래카드를 들고 소련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니, 세계는 사회주의 ‘형제 국가’간의 3차 대전을 걱정하게 된다. 다행히 같은 해 9월 북베트남의 '호치민' 주석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귀국길에 오른 소련의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가 북경을 방문함으로써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양국간의 긴장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된다

전바오’섬 충돌 이후 중국은 주된 적을 미국이 아닌 소련으로 상정하였고, 중국의 외교정책은 미국과 일본과의 협력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의 중국방문으로 중국과 미국은 화해의 시대를 열었다. 2005년 러시아와 중국 정부는 양국가간에 모든 국경문제는 해결되었다고 발표했다. 오늘날 중·소 양국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을 견제하고 있으니, ‘국제 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이야기가 실감나는 대목이다.

 

 

                                                                                                  우수리강 사건

                               

                                                                                             우수리강(Ussuri River)
우수리 강 (만주어:우수리 울라)은 러시아 극동의 남쪽에 있다. 시호테알린 산맥에서 발원을 한 다음,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을 이룬 다음 아무르 강으로 흘러 간다.

시호테알린 산맥의 남서부 기슭에서 발원하는 2개의 강, 즉 울라헤 강과 아르세니예프카 강이 합류하면서 우수리 강이 된다. 길이는 울라헤 강의 발원지에서부터 계산하여 909㎞이다.

우수리 강은 볼샤야('거대한'이라는 뜻)우수르카 강과 합류하는 지점에서부터 항행이 가능하며, 하바로프스크 부근에서 헤이룽 강과 합쳐진다. 강 경계의 넓은 지역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영토분쟁지역으로, 1969년 두 나라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1977년 두 나라는 우수리 강에서의 항행 규칙에 대해 제한적 합의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