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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월 13일 장경국(蔣經國) 대만 총통 타계 본문
장개석과 장경국 선생 부자(父子) 모습
1988년 1월 13일 장제스(蔣介石)의 아들이며 대만 총통으로 있던 장징궈(蔣經國)가 타이베이(台北)에서 사망했다. 향년 78세.
장징궈의 어린 시절 이름은 젠펑(建豊)이었으며 러시아 유학 시절에는 ‘니콜라’라는 러시아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장징궈는 1910년(중국 공산당의 기록은 그가 신해혁명이 발발하던 1911년에 태어났다고 밝히고 있다) 저장(浙江)성 펑화(奉化) 현에서 장제스와 그의 첫 부인 마오푸메이(毛福梅)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0년 상하이(上海)의 유명한 완주(萬竹)소학교를 다녔으며 장제스가 광둥(廣東)성에서 손문(孫文 : 쑨원)을 도와 일하게 되면서 천궈푸(陳果夫)에게 맡겨졌다.천궈푸는 훗날 장제스 집권 시기 장제스의장씨 가문, 쑹쯔원의 쑹(宋씨 가문, 쿵샹시의 쿵(孔) 씨 가과 함께 장제스 독재 치하의 국민정부를 좌지우지한 4대 가문중 하나인 천(陳)씨 가문의 리더였다.
1925년 10월 장징궈는 소련 모스크바 중산(中山)대학[중산(中山)은 손문의 호이며 : 손문의 자(字)를 따서 손일선(孫逸仙 : 쑨이센 대학으로도 불리웠음]에 유학하였으며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시는 1차 국공합작 기간이었다.
1927년 장제스가 '상하이 반공 정변'으로도 불리는 ‘4.12 상하이 쿠데타’을 일으켜 반공반소 입장을 드러내자 소련에 있던 17세의 장징궈는 아버지인 장제스가 혁명을 배반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성명서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그(장제스)의 혁명 사업은 이미 끝났다. 그의 혁명에 있어서 그는 사형언도를 받은 거나 다름없다. 혁명을 배반한 이상 이제부터 그는 중국 노동자 계급의 적이다. 과거에 그는 나의 부친이며 혁명동지였다. 그러나 적의 진영으로 돌아선 이상 그는 나의 적일뿐이다.”
이 때의 장징궈는 중국 전통의 효(孝) 사상 보다는 아버지를 ‘반혁명적 언동’을 밀고한 아들이 영웅으로 대접받는 ‘볼세비키 윤리’에 충실했던 셈이다.
장징궈는 1928년 레닌그라드로 보내져 홍군군정학교(紅軍軍政學校 : Central Tolmatcheh Military & Political Institute)에 입학한다.
하지만 1931년 이후 트로츠키 파 숙청 여파로 농장, 광산 및 공장을 전전해야 했다. 그는 이 때 생의 반려를 만나게 된다. 우랄기계 공장(Ural Heavy Machinary Plant)의 부공장장으로 있던 1935년 3월 그는 공장 노동자 파이나(Faina)와 결혼했다. 파이나는 장징궈가 중국으로 귀국할 때 중국으로 함께 왔으며 이름도 장팡량(蔣方良)이라는 중국식으로 고쳤다.
창팡량과의 사이에서 이해 12월 첫 아들 애륜(중국명 장샤오원蔣孝文)을, 다음해에는 딸 애리(중국명 장샤오장蔣孝璋)를 낳았다.
이 장샤오장은 훗날 대만 국방부장을 지내는 위다웨이(兪大維)의 며느리가 되었다. 위다웨이는 현재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있는 정협 주석 위정성(兪正聲)의 종조부로 장샤오장은 그의 당숙모가 된다. 이어 장샤오우(蔣孝武)와 장샤오융(蔣孝勇)이라는 또 다른 아들 둘이 태어났다.
장징궈는 1936년 1월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장제스의 초공(剿共) 5차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장정(長征)을 거쳐 서북 변방 지구로쫓겨 온 공산당에 대한 토벌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부친 장제스를 비난하는 공개서신을 발표했다. 이 서신에서 사용한 용어 하나하나는 장제스의 어떤 정적도 감히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매섭고 신랄한 것이었다. 그 서신의 첫 대목은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나는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죽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후 세 차례의 반란에서 그 때마다 중국 인민의 이익을 팔아먹었으므로 그는 중국 인민의 적이기 때문이다.”
이 서신에서는 또 장징궈의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엿볼 수 있다. 장제스가 제창했던 충효사상의 가면을 벗긴다는 소제목 아래 쓰여진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어머니, 어머니는 기억하십니까. 누가 어머니를 때렸고 어머니의 머리를 잡아챘으며, 누가 어머니를 2층에서 아래로 던졌습니까. 그 모두가 장제스의 짓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
장징궈는 1939년 일본군의 폭격으로 모친이 사망한 이후 그녀의 전기를 썼으며 총통이 된 후 자신의 집무실에 모친의 대형 사진을 걸어 두었을 정도로 모친에 대한 효성이 각별하였다.
장징궈는 1937년 귀국한다. 2차 국공합작으로 중국 국민정부와 소련과의 관계가 개선된 것이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1936년 12월 12일 발생한 시안(西安)사변으로 감금된 장제스와 협상할 때 아들의 문제를 슬며시 꺼내 완강하게 버티던 장제스의 마음을 돌리는 데 일조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1925년 10월에 유학, 1937년 3월에 귀국했으니 소련 생활은 12년간이었다. 장제스는 귀국한 아들을 펑화 현 시커우(溪口)의 고향으로 보내어 ‘맹자’와 ‘증문정공 가서(曾文正公家書 : 증문정공은 曾國藩을 말한다) 등의 고서를 읽게 한다.
장제스는 이를 ’보충수업(補課)‘ 또는 ’세뇌(洗腦筋)‘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총리전집‘과 ’15년 이전의 장제스‘와 같은 장제스의 전기도 읽도록 했다.
이 ‘세뇌’는 장제스가 바라던대로의 성과를 거두었다. 한 때 공산당원이었으며 소련에서 12년을 생활했고 소련여자를 부인으로 둔 장징궈였지만 이후 장제스의 정치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일본군에 상하이가 함락된 이후 난창(南昌)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1938년 궁(贛)현의 현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장시(江西) 제4행정구 독찰전원(督察專員), 보안사령, 방공사령, 방호단장, 삼민주의 청년단 장시 지단부 주임, 장시 성 정부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 때에 삼민주의 청년단에서 교육을 받던 장야뤄(章亞若)와 만났으며 장야뤄는 장징궈의 쌍둥이 아들을 낳은 뒤 얼마 안가 사망했다. 이들 두 아들은 장 씨 가문의 인정을 받지 못해 아버지의 성 대신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대만의 외교부장을 역임한 장샤오옌(章孝嚴)과 대만 동오(東吳) 대학 총장을 지낸 장샤오츠(章孝慈)가 바로 장징궈의 서자 형제이다.
민간인 신분이었던 장샤오츠는 양안간 교류가 시작되면서 중국 내 모친의 묘소를 찾는 등 중국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1994년 베이징에서 중풍으로 쓰러져 사망하고 말았다.
러시아 여자 사이에 난 적자들인 샤오원, 샤오우, 샤오융 3 형제는 정보 계통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서구적인 외모가 주는 대중의 거부감 , 건강 및 복잡한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인해 정치 무대에서 별다른 빛을 보지 못한 반면 서자인 샤오옌은 외교부장에 이어 국민당 중앙 상무위원을 지내는 등 대만 정계의 실력자로 성장했다. 장샤오옌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던 장팡량 여사가 사망한 후인 2005년 3월 ‘장(蔣)씨’로 개성(改姓)절차를 마치고 현재는 ‘장샤오옌(蔣孝嚴)’으로 활동하고 있다.
장징궈는 1944년 1월 삼민주의 청년단 중앙간부학교 교육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해 10월에 장제스가 발기한 10만 청년 종군운동에 참여하였고 청년군 총정치부 주임에 임명되었다.
1945년 당시 국민당 정부의 행정원장이던 쑹쯔원(宋子文)을 수행하여 소련과 담판, ‘중소우호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항일전쟁 승리 이후 동북행영(東北行營)의 외교특파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삼민주의 청년단을 이끌면서 국민당의 주요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1949년 1월 국공내전의 연이은 패전에 책임을 지고 장제스가 일시 총통 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지커우로 내려 가자 장징궈 역시 부친을 따라갔다. 결국 청두(成都)에서 부친과 함께 대만으로 철수했다.
대만에서 장징궈는 국민당 대만성 당부 주임위원, 대만 국방부 총정치부 주임, 국방부 부부장, 부장, 행정원 부원장, 원장을 역임했다.
장제스 사망 3년 뒤인 1978년 5월 20일 중화민국의 제 6대 총통에 취임했으며 1988년 1월 13일 사망했다.
장징궈는 사망에 앞서 대만의 계엄 상태를 해제하였으며 중국의 친지를 방문하는 탐친(探親)을 허용하였다. 또한 대만성 출신 리덩후이(李登輝)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등 현실주의 노선을 채택하였다.
중국은 장징궈가 사망한 다음날인 1월 14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중국은 장징궈가 ‘대만독립’을 반대하고 국가통일을 추구하였으며 양안관계의 긴장완화를 위해 일정한 노력과 행동을 했다고 평가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관련 인사 및 중국 내 친지들이 모두 타이베이에 조전을 보내었다. 중국은 저장성 펑화 현 시커우 진의 산시(剡溪)의 장제스 일가의 고택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2000년 8월 장샤오옌이 가족들과 함께 조상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이 곳을 찾기도 했다.
장징궈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본토수복 후 고향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가매장됐다.
장징궈의 부인 장팡량 여사는 대만 독립을 강령으로 하고 있는 민진당 집권 기간인 2004년 1월 가족 명의로 대만 정부에 장제스-장징궈 부자의 대만 매장을 청원, 타이베이(台北)현 우스잔(五指山) 국군묘지에 유택도 마련되었으나 장샤오옌의 반대에 따라 매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경국 前총통 모습
장개석 총통이 사색적 ・귀족적인 반면, 장경국은 서민적 ・행동형인 셈이다. 그는 철저한 대중 정치가로, 서민들의 일상 생활에까지 파고드는 활동가로 정평이 높다. 지방에 나가 대중과 호흡을 같이하는 '현장의 정치인'으로서 정력을 아끼지 않았다
장경국은 아버지 장개석 전 총통이 부패로 대륙에서 패배한 것을 너무도 똑똑하게 지켜 본 터라 부정부패 일소와 청빈을 덕목으로 살았다
대만을 강소국으로 만든 그였지만 그의 사후에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어 기념관 조차 지을 수가 없었다 그저 옷 몇벌 밖에 없었다고 한다
*장개석(蔣介石) 총통부자 대만매장 연기
대만에서 사망후 가매장된 고 장제스(蔣介石)-장징궈(蔣經國) 총통 부자를 안장하기 위한 유택이 타이베이현 우즈산(五指山) 국군묘지에 마련됐다.
하지만 유족들이 유체의 대만 매장에 난색을 표시하면서 장제스 부자의 국군묘지 안치는 아직 불투명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장징궈의 서자인 장샤오옌(蔣孝嚴) 입법위원은 "매장을 3년후 총통 선거가 끝난 뒤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9월로 예정된 장례식이 연기되기도 했다.
지난 75년 서거한 장제스와 88년 별세한 장징궈의 유체는 양안 통일후 대륙에 매장하겠다는 명분은 그간 대만에서 '중국통일'의 상징이 돼왔다.
장징궈의 부인으로 옛소련 출신인 장팡량(蔣方良) 여사는 작년 1월 유체의 매장을 신청해 국방부의 정식 승인을 받았지만 그해 12월 사망했다. 이후 장샤오옌 등 유족은 대만 매장을 반대해 왔다.
국방부 후근사령부 후샤오융(胡孝勇) 중교(중령)에 따르면 완공된 장제스 부자를 모실 유택은 '장릉'(蔣陵)으로 명명됐다. 장릉의 부지는 약 1000 평방m로 깊이 1.25m의 묘혈까지 파놓고 장 부자의 안장을 기다리고 있다.
장제스의 묘는 30cm 높은 곳에 위치하며 벽에는 중국 국민당의 당장인 '청천백일'(靑天白日)이 크게 새겨져 있다. 전통적 풍수(風水)를 최대한 적용해 설계됐다.
31일은 장제스가 중국 저장(浙江)성에서 태어난지 118년째 되는 말이다. 국민당계 TV는 '장공탄생기념일'(蔣公生誕記念日)이란 다규멘터리까지 방영하며 분위기를 띄웠으나 매장 문제는 피해갔다.
장제스 부자의 대만 매장은 과거 장씨 집안을 정점으로 했던 국민당의 '대만 본토화' 전환점으로 여겨지는 만큼 국군묘지 안치를 연기한 것은 앞으로 유권자의 표심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章孝嚴 “이제부터 蔣孝嚴입니다”
장제스(蔣介石)의 서손인 장샤오옌(章孝嚴) 전 대만 외교부장이 지난 2일 신분증 상의 개성(改姓) 절차를 마치고 2일부터 장샤오옌(蔣孝嚴)으로 바뀐 성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장징궈(蔣經國)과 그의 비서로 있던 장야뤄(章亞若) 사이의 쌍둥이 형제의 한 사람으로 1942년 3월1일에 태어났다.
장샤오옌 형제는 모친이 형제를 낳은 직후 사망하고 또 장제스 일문의 인정을 받지 못해 어머니 성인 장(章)씨를 사용해왔다.
63번째 생일까지 모친의 성 ‘장(章)’을 사용한 장샤오옌은 64세가 된 첫 날부터 부친의 성 ‘장(蔣)’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장씨 형제는 일찌감치 장징궈의 아들임이 공인됐으나 장징궈의 본부인 장팡량(蔣方良)여사 등 본실 가족의 반대로 인해 부친의 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러시아 출신인 장팡량 여사가 지난해 12월 15일 향년 90세로 타계하자 장샤오옌이 오랜 염원을 실천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의 쌍둥이 형제인 장샤오츠(章孝慈)는 동오(東吳)대학 총장을 있던 중인 1994년 중국 베이징(北京)을 방문 중 중풍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대만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장샤오옌은 3일 가족들을 대동하고 부친 장징궈의 묘소를 방문, 부친에게 개명사실을 고하는 예식을 올렸다.
장샤오옌의 신분증 상의 배우자란에는 부인의 성명을 ‘장황메이룬(蔣黃美倫)’으로 기록했다. 대만과 홍콩에서는 여자가 결혼할 때 자신의 성에 남편의 성을 앞세우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경우도 그러한 예를 따른 것이다.
앞서 2년전 장샤오옌은 신분증 상의 부모 란에 부친 ‘장징궈’와 모친 ‘장야뤄’를 함께 기록하는 개정절차를 밟은 바 있다.
장샤오옌은 4월 청명절(淸明節)에 중국 광시(廣西)자치구 구이린(桂林)에 있는 모친 장야뤄의 묘소에 성묘, ‘장(章)’성을 ‘장(蔣)‘성으로 바꿈으로써 ’조상을 인정받고 가문에 복귀하는(認祖歸宗)’ 절차를 모두 끝마쳤음을 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모친도 이를 크게 기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장징궈의 본실 가족들은 장샤오옌이 개성한 데 대해 일단 달갑지 않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대만 언론은 전했다.
[2004년 대만총선] 章孝嚴 타이베이 시장 출마의사 표명
장징궈(蔣經國) 대만 전 총통의 서자인 장샤오옌(章孝嚴) 전 외교부장이 차기 타이베이(台北) 시장에 출마할 의사를 밝혔다고 동삼신문보(東森新聞報)가 13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입법위원인 장샤오옌은 총선 승리 후 “진지하고 심각하게 차기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 마잉주 시장은 1998년 시장 재선을 노리던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을 꺾고 시장에 당선되었으며 2002년에 재선에 성공했다.
국민당에서는 장샤오옌 외에 입법위원 천쉐성(陳學聖)과 이번에 입법위원에 당선된 딩쇼우중(丁守中)이 타이베이 시장 도전 의사를 밝혀 국민당 내 경선을 예고하고 있다.
한편 민진당에서는 두안이캉(段宜康)과 선푸슝(沈富雄)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가운데 객가위원회 주임 뤄원쟈(羅文嘉) 가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장샤오옌은 장징궈와 그의 비서로 있었던 장야뤄(章亞若) 사이 쌍둥이 형제 중의 한 사람이다. 모친 장씨는 1942년 3월 1일 아들 형제를 낳은 뒤 곧 사망했다.
이들 형제는 장 씨 가문의 인정을 받지 못해 아버지의 성 대신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그러나 현재는 장징궈의 아들임이 공인된 상태다.
러시아 여자 사이에 난 적자들인 샤오원(孝文), 샤오우(孝武), 샤오융(孝勇) 3 형제가 건강 및 복잡한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인해 별다른 빛을 보지 못한 반면 샤오옌은 외교부장에 이어 국민당 중앙 상무위원을 지내는 등 대만 정계의 실력자로 성장했다.
(사진= 장샤오옌이 부친 장징궈의 젊은 시절 초상화를 배경으로 연설을 하고 있다.)
장샤오옌의 쌍둥이 형제는 대만 동오(東吳) 대학 총장을 지낸 장샤오츠(章孝慈)이다. 장샤오츠는 민간인 신분이었던 관계로 양안간교류가 시작되면서 중국 내 모친의 묘소를 찾는 등 중국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1994년 베이징에서 중풍으로 쓰러져 사망했다.
한편 장샤오옌도 관직을 떠난 뒤인 2002년 가족들을 데리고 조부와 부친의 고향인 저장(浙江)성 펑화(奉化)현 시커우(溪口)진의 장씨 고택을 방문했다.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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