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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을 장악한 지 만 2년을 한 달 남긴 시점인 1981년 1월 25일 장청(江靑, 강청) 사형언도 본문
덩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을 장악한 지 만 2년을 한 달 남긴 시점인 1981년 1월 25일 장청(江靑, 강청) 사형언도
CIA Bear 허관(許灌) 2017. 2. 5. 20:51
모택동과 강청
그녀는 나는 마오 주석의 '주구(走狗)'였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1981년 1월 25일 중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은 4인방의 일원이며 마오쩌둥(毛澤東)의 미망인인 장칭(江靑)에 사형을 선고했다.
문화대혁명 기간(1966~1976)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던 장칭은 마오쩌둥이 사망한 뒤 1개월 뒤인 1976년 10월 6일 4인방 동료들과 함께 체포됐다. 연금 상태에 놓여 있던 이들에 대한 재판은 덩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을 장악한 지 만 2년을 한 달 남긴 시점인 인 1980년 11월 20일 시작됐다.
장칭 등 4인방을 포함 10명의 피고인에 대한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칭, 장춘차오 사형(집행연기 2년) 정치권리 박탈 종신
야오원위안 징역 20년 정치권리 박탈 5년
왕훙원 무기 징역 정치권리 박탈 종신
천보다 징역 18년 정치권리 박탈 5년
황융성 징역 18년 정치권리 박탈 6년
우파셴 징역 17년 정치권리 박탈 6년
리쭤펑 징역 17년 정치권리 박탈 5년
츄쭤후이 징역 16년 정치권리 박탈 5년
장텅자오 징역 18년 정치권리박탈 5년
1.4인방 체포
1976년 10월 6일 문화대혁명의 하수인이었던 4인방이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9월9일)한 지 채1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체포되며 실각했다. 이를 ‘베이징(北京) 10월 정변’으로 부른다.
마오의 처 장칭(江靑)은 스스로 "마오의 주구(走狗)"狗로 자처했고 왕훙원(王洪文)은 '마오의 후계자'로 한때나마 간주 되었으며 장춘차오(장춘교)는'문혁 집행의 총설계자'와 같은 인물이었다. 야오원위안(姚文元)은 '문혁의 붓'으로 불렸다.
▶華國鋒 마오쩌둥 사망 다음날 4인방 체포 결단
화궈펑(華國鋒)과 예젠잉(葉劍英)은 이날 밤 긴급 정치국 회의를 가진 뒤 중앙정치국은 당과 인민의 의지를 집행하여 장칭(江靑), 장춘차오(張春橋), 왕훙원(王洪文), 야오원위안(姚文元) 및 베이징(北京)에 있는 이들 4인방의 핵심 분자들에 대한 격리 심사를 실행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이날 오후 중공중앙(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판공청은 화궈펑, 예젠잉과 왕둥싱(汪東興)의 지시에 따라 당일 20시에 중난하이(中南海) 회인당(懷仁堂)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개최한다고 통지했다.
통지는 상무위 회의에서 다룰 의제를
1. 마오쩌둥 선집 제 5권의 검토,
2. 마오쩌둥 기념당의 설계안과 중난하이에 있는 마오쩌둥 거주지의 보존 방안
이라고 밝혔다.
통지는 이와 함께 마오쩌둥의 원고 교정을 위해 야오원위안이 배석하도록 지시했다.
4인방 중 왕훙원과 장춘차오는 정치국 상무위원이었으나 장칭과 야오원위안은 정치국 위원이었다. 따라서 장칭과 야오원위안은 정치국 상무위에 참석할 수 없었다.
야오는 이와 같은 유인책에 따라 왕과 장과 함께 체포되었고 장칭은 자신의 숙소에서 별도로 연행되었다.
오후 8시께 장춘차오, 왕훙원, 야오원위안이 잇달아 회의장에 도착하자 화궈펑은 이들 각자에게 중공중앙이 그들을 격리, 조사하기로 결정했다는 문건을 낭독하고 체포하였다.
장칭의 체포는 오후 8시 30분께 그녀의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장칭의 체포 지시는 왕둥싱이 직접 내렸으며 체포 작전을 지휘한 인물은 당시 중앙판공청 부주임 겸 경위국장인 장야오츠(張耀祠)였다. 그는 사복차림으로, 여성 2 명을 포함한 호위관은 군복을 입은 채로 6일 오후 8시 30분께 중난하이(中南海)의 완즈랑(萬字廊) 301호의 장칭의 자택으로 가 소파에 앉아 실크 잠옷 차림으로 비디오를 보고 있던 그녀를 연행했다.
이 때 예젠잉의 경호원 출신인 자오칭(曹淸)이 장칭의 체포 작전의 요원으로 참여하였는데 그는 31년이 지난 2007년 10월 중앙 경위국장에 임명되었다. 중앙 경위국장은 중국 최고 지도자의 경호를 책임지는 직책이다.
이어 오후 9시 화궈펑과 예젠잉은 회인당에서 겅바오(耿飇)에게 부대를 이끌고 신화사, 중앙라디오 사업국(中央廣播事業局 ), 중앙TV(中央廣播電台), 베이징TV(北京電視台) 등 언론기관을 접수하도록 지시했다. 사인방은 당시 매스컴 부분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다
현 총서기 겸 국가 주석 시진핑은 1979년 중앙 군사위 핵심 요직인 군사위 비서장을 맡고 있던 겅바오 밑에서 비서로 일한 바 있다..
오후 10시 중공중앙은 베이징에서 정치국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4인방 분쇄 후의 당과 국가의 중대문제’를 토론하였다.
당시 출석한 정치국 위원 및 후보위원은 다음과 같다: 화궈펑, 예젠잉, 리센녠(李先念), 왕둥싱, 천시롄(陳錫聯), 쑤전화(蘇振華), 지덩쿠이(紀登奎), 우더(吳德), 니즈푸(倪志福), 천융구이(陳永貴), 우구이센(吳桂賢).
화궈펑과 예젠잉은 회의에서 4인방 분쇄의 경과와 그 의의를 밝히는 연설을 했으며 정치국 위원과 후보위원은 4인방 반당집단에 대한처리에 대해 동의했다.
회의는 이어 베이징에 있지 않은 정치국 위원인 웨이궈칭(韋國淸), 쉬스요우(許世友), 리덩성(李德生), 사이푸딩(賽福鼎) 등에게도 보고를 했으며 이들은 중공중앙 정치국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선고법정의 4인방. 왼쪽부터 야오원위안, 장칭, 장춘차오, 왕훙원
2.4인방재판
1980년 11월 20일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이 린뱌오(林彪)와 장칭(江靑) 등 사인방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재판과정은 TV로 생중계되었다.
◆장칭의 모습. 그녀는 나는 마오 주석의 '주구(走狗)'였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창춘차오의 모습. 4인방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그는 아예 생을 포기한 모습을 보였다 3. 강청의 자살 1991년 마오쩌둥(毛澤東)의 미망인이며 문화대혁명(1966-1976) 당시 ‘4인방’의 일원이던 장칭(江靑)이 연금 중이던 베이징(北京) 근교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1914년생으로 향년 77세였다. ▶ 1981년 4인방 재판 당시 장칭. 이는 공석에서 그의 마지막 모습이기도 하다. *화궈펑의 ‘탈당’ “나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를 신봉해왔다. 모택동과 강청모습 강청의 본명은 이청운[李靑雲], 별명은 이운학[李雲鶴], 무대이름은 란핑[藍蘋. 중국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의 3번째 부인이며, 마오가 죽은 해인 1976년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4인방 (四人幇)의 한 사람으로서 1981년 반(反)혁명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투옥되었다. 산둥 성 출신으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녀는 1929년 연극단의 일원이 되었다. 연극학교에서 공부했고, 칭다오 대학의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지식인들의 영향을 받아 1933년에 공산당 전방조직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체포·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후 상하이[上海]에 있는 좌익성향의 영화사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 와중에 두 차례 결혼하지만 모두 이혼을 했다 1937년 일본이 상하이를 공격하자 중국국민당의 전시(戰時) 수도인 충칭[重慶]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정부가 통제하는 중앙영화사에서 일했으며, 그후 옌안[延安]에 있는 공산군에 합류했다. 루쉰 예술학원[魯迅藝術學園] 연극 강사로 있을 때 그곳에 연설하러 왔던 마오쩌둥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들의 결혼은 많은 당원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특히 공산당의 장정(長征 : 1934~35)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여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마오의 전 부인은 모스크바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했다. 당의 지도자들은 그녀가 앞으로 30년 동안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의 결혼을 승낙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그녀는 외빈(外賓) 접대를 위해 마오의 부인 역할을 하거나 다양한 문화위원회에 참석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63년에 들어서자 중국 전통예술 형식과 프롤레타리아에 관한 주제들을 접목하고자 하는 경극(京劇) 운동을 후원하면서 활발한 정치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문화개혁운동은 점차 중국의 많은 지도급 문화계 인사와 지식인들에 대한 장기적인 공격으로 바뀌었고, 1966년에는 중국 전역을 뒤흔든 문화대혁명을 통해 그 절정에 달했다 1966년 그녀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최고에 이르렀다. 또한 대중집회에서의 열띤 연설과 극단적 혁명단체인 홍위병(紅衛兵)과의 관련으로 명성을 얻었다. 마오쩌둥이 신임한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그녀는 문화대혁명의 첫번째 부(副)지도자가 되었으며, 중국 문화생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혁명기간중에 다양한 전통적·비정치적 문화활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그러나 1960년대말 혁명의 기운이 약해지면서 그녀의 명성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1974년 문화적인 지도자로서, 그리고 '정착'으로 표현되는 마오의 새로운 정책의 대변인으로서 다시 등장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자 당내 과격파들은 보호자를 잃게 되었다. 1개월 후 4인방으로 일컬어지던 장칭과 다른 3명의 과격파들을 비난하는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으며, 그 비난의 정도는 점점더 심해졌다. 그후 4인방은 구속되었고 1977년 그녀는 중국공산당에서 축출되었다. 1980~81년 4인방에 대한 공개재판에서 그녀는 혁명기간에 인민 폭동을 부추겼다는 혐의를 부인했으며 오히려 당 지도자들을 꾸짖었다. 처음에 그녀는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2년 동안 형집행이 유예되었다가 1983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그녀는 1991년 자살했다. 로스 테릴이 쓴 그녀에 대한 전기(傳記) 〈백골의 악마 The White-Boned Demon〉가 1984년에 출간되었다
장칭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은 문화대혁명 발동 25주년 나흘 뒤였다. 새가 죽을 때 마지막 울음 소리가 곱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본명이 리윈허(李雲鶴)로 '구름 속의 학'이란 뜻을 지닌 장칭의 경우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그는 유서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지극한 연모의 감정을 담았으나 정적인 덩샤오핑에 대해서는 증오의 독설을 퍼부었다
베이징(北京)교외의 딸 집에서 연금상태에 놓여 있던 장칭은 목을 매어 자살하기 전 작성한 유서에서 저주나 다름없는 비난을 덩샤오핑과 당 지도부에 대해 퍼부었다. 몇몇 대목을 보자.
“덩샤오핑은 허풍쟁이 대장이다. 그는 마오 주석의 면전에서 결코 이미 결정된 사안을 변경하지 않는다고 약속했으면서도 정권을 잡자마자 마오 주석을 배신했고, 중국 공산당을 배반, 중국 인민에 등을 돌렸다.
“덩샤오핑이여, 기뻐하기는 아직 이르다. 덩샤오핑은 애국학생을 학살한(1989년 톈안문 사태를 가르킴)주모자이며 피고인이다.
“덩샤오핑이여 결코 좋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화궈펑,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 등은 개와 개가 서로 물고 뜯는 관계다. 검둥이(黑)가 검둥이를 잡아먹었다. 그들의 불행은 자초한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반혁명이 아니었다. 4인방이라고 하지만 나만이 옳았다. 나머지 3명과 다르다.”
장칭이 문혁의 선봉장이었다고 한다면 화궈펑은 문혁의 우등생이었다. 둘 다 덩샤오핑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났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그 대응 방식은 판이했다.
장칭이 ‘확신범’의 자세를 보였다면 화궈펑은 속 마음이 어찌 됐던 ‘대세’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 탈당계를 제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른 3명과 나는 다르다’는 장칭의 말은 무엇보다도 80년 11월 베이징(北京)에서 개시된 재판을 대하는 태도에서 정확한 사실임을 입증했다. 문혁 당시 오만불손하기 이를 데가 없었던 ‘3명의 남자’들은 권좌에 있을 때와는 전혀 딴 판인 축 쳐진 몰골로 재판정에 서 방청객들의 빈축을 샀다.
왕홍원(王洪文)은 ‘비굴’했고, 야오위안(姚文元)은 ‘협조적’이었으며 장춘차오(張春橋)는 ‘체념적’이라는 표현을 넘어 삶을 아예 포기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장칭만큼은 ‘당당’했다. “나는 마오 주석의 ‘주구(走狗)’였다. 마오 주석이 짖으라고 하면 짖었고 물으라고 하면 물었다”라며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문혁 당시에도 과격하지 않았던 화궈펑은 덩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3중전회 이후 ‘무골호인’ 마냥 자신의 ‘실각 절차’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 과정은 한마디로 말해 ‘날개 없는 추락’이었다.
권력을 장악한 덩 일파는 80년 2월 11기 5중전회에서 ‘총서기제’를 부활시켰다. 화궈펑이 맡았던 당주석은 이로써 실권 없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1980년 9월 전국인민대표대회 5기3차회의를 통해 총리에서 사임했다(후임은 자오쯔양). 1981년 6월 11기 6중전회에서 당 주석과 군사위 주석을 내놓고 당 부주석으로 강등됐다(후임 당 주석과 군사위 주석은 각각 후야오방과 덩샤오핑이 담당했다).
화궈펑은 자신의 강등을 결정하는 이 투표에 참가했다. 중국 농민을 연상시키는 순박한 미소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그의 표정은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졌고 전송사진을 통해 이를 본 이들은 ‘죽의 장막’ 너머의 권력 교체를 실감했다.
당 주석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총서기가 당을 대표하도록 한 82년 9월 12차 전당대회(12대)에서 화궈펑은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나 최고 영도층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78년 12월에서 82년 9월까지 3년 9개월 동안 권력의 정상에서 한 계단 한 계단씩 밀려 내려오는 동안 화궈펑은 외부의 눈에 띨만한 저항을 하지 않았다.
화궈펑과 장칭의 이런 상반된 성격은 그들의 ‘마지막 글과 말’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장칭의 유서에 독기가 서렸다면 쟁명이 전한 화궈펑의 ‘정치적 유언’은 반대파들마저 숙연하게 만든다.
특히 자신의 마지막 당비의 용처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지역의 당원들을 위해 써달라는 화궈펑의 당부는 그의 따뜻한 마음씨를 읽게한다.
두 사람의 이러한 성격의 차가 마오 사후 불과 1개월도 채 안 되는 시점에서 갈라서게 한 원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마오 사후의 정치적 진로를 놓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였던 두 사람이지만 마오의 사상에 ‘순교’를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지난 3년간 고민해왔으나 지금이야말로 마르크스, 마오(毛)주석, 저우언라이(周恩來)총리 등 수많은 혁명 선배들 앞에 서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오늘날 우리 공산당이 과거 국민당 및 자산계급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 당내의 비정상적 생활이 부패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당이 민심과 당심(黨心)을 상실해 국가와 민족에 재앙을 초래하고 있다.
“마지막 당비로 5만 위안(750만원 상당) 내겠다.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빈곤한 지역의 당원들을 위해 써달라.”
지난 10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처 회의 석상에서 화궈펑(華國鋒ㆍ80) 전 중국공산당 주석이 했다는 발언 내용이다.
홍콩의 시사월간 쟁명(爭鳴)은 11월 호에서 현재 당 중앙위원인 화궈펑이 지난 9월 탈당계를 제출했으며 서기처 회의는 화의 탈당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특별 소집되었다고 전했다.
화는 탈당계에서 ▲건강상의 이유로 당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없고 ▲당 강령과 이념을 유지할 수 없으며 ▲당과 당원이 날로 부패, 변질되고 있다는 점을 탈당 이유로 들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 지도부는 76년 10월부터 81년 6월까지 5년 동안 중국 공산당의 최고 영도자를 지낸 화의 위상을 감안, 서기처 특별회의를 소집하면서까지 그의 탈당을 만류하였으나 그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당 지도부는 도리어 덩샤오핑(鄧小平)과의 노선투쟁에서 패배, 불명예스럽게 정치무대에서 떠난 이후 극도로 말을 아끼며 ‘정치적 식물인간’ 을 감수했던 전 당 주석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질타를 묵묵히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것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지명한 후계자인 그가 그 동안 ‘침묵’했던 것은 정치 현실에 대한 ‘적응’이 아니라 ‘인내’였다는 사실이었다.
쟁명은 당 지도부가 화의 탈당계를 수리했는지의 여부를 밝히지 않았다. 다만 올해 3월 이후 87명의 당 원로들이 탈당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는 내년으로 박두한 중국 공산당 16차 전국대표대회(16대)를 앞두고 ‘3개 대표론’을 내세우며 공산당의 혁명적 노선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장쩌민(江澤民) 총서기를 중심으로 한 현 지도부에 대한 당 원로들의 반발이 점차 거세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옛 물로 물레방아를 돌릴 수야 없겠지만 전 당수마저 당을 떠나겠다는 이런 사태 발전은 정치불안과 진통을 예고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현 당지도부에 대한 화궈펑의 질타는 91년 77세로 자살을 통해 생을 마감한 마오쩌둥의 처 장칭(江靑)의 독설을 상기시킨다
*강청[江靑, 본명-이청운]
현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노선 전환을 넘어 서구의 사회민주당과 같은 것으로 당의 성격을 환골탈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아울러 당명의 교체도 고려하고 있다.
장쩌민이 국호를 ‘중화인민공화국’ 대신 ‘중국’으로 바꿀 용의가 있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할 때 공산당의 당명 개정시도는 일과성의 해프닝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특히 장쩌민이 강조하고 있는 ‘3개 대표론’은 이러한 판단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노동자 농민과 함께 자산계급을 대표하는 당의 명칭으로 ‘공산(共産)’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資本主義 反對 共産主義!! 民主主義 反對 全體主義(獨栽主義)!!
資本主義民主主義革命以后, 自由主義(自由權)和社會主義(社會權, 生存權) 共存(尊重)是自由社會.-自由社會[民主化 政府]-"
*資本主義 三代原則:私有財産, 利潤追求, 市場競爭原理 等等
*民主主義 三代原則:爲民有、民治、民享之政府 等等
-民主政治要求 "人民本位"-
* 極端的自由主義:同性愛,痲藥服用, 無政府主義 等等
*極端的社會主義:國家社會主義(國營企業,國營農場,軍國主義,洗腦指導者論) 等等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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