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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靑과 여황제 본문
"누군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 린뱌오(林彪)가 나를 무측천(武則天)이라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이 나를 여후[(呂后 : 한고조 유방(
마오쩌둥(毛澤東) 처 장칭(江靑)이 '여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장칭은 중앙위 회의 기간 12개 성, 자치구회의를 소집하고 당시 부총리인 덩샤오핑(鄧小平)을 지주 자산계급이며 중국과 국제 자본주의의 대리인으로 ‘한간(漢奸 : 매국노)’이라고 공격했다.
자신의 비난에 대해 “맞느냐 틀리느냐(正確不正確) ?”라고 반문한 뒤 그녀는 '여황제'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음을 토로했다. 장칭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 누군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 린뱌오(林彪)가 나를 무측천(武則天)이라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이 나를 여후[呂后 : 한고조 유방(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러한 영광스런 자리에 도달하지 못했다. 여후는 실제 황제의 관을 쓰지 못했지만 실제로 정권은 그녀의 수중에 있었고 그녀는 법가의 노선을 집행했다.
무측천을 비방하고 여후를 비방하는 것은 나를 비방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주석(마오쩌둥)을 비방하는 데 있다.”
마오쩌둥은 장칭의 이 같은 발언내용을 전해 듣고 질책했지만 장칭은 다음 달인 4월 초에 벌어진 청명절 천안문 시위를 이용, 덩샤오핑을 실각시키는데 성공했다(덩샤오핑의 3차 실각).
그러나 장칭은 마오가 사망한 지 채 한 달도 안 된 이해 10월 초에 10월 정변으로 숙청된다. 여황에 대한 야심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지 7개월 뒤의 일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장칭이 여황제의 꿈을 접어야 했던 10월은 무측천이 황제에 즉위한 달이다. 장칭이 체포된 때로부터 1,286년전인 690년 10월 무측천은 여황제에 즉위했고 이는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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