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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2월 19일 덩샤오핑(鄧小平) 사망 본문
1997년 2월 19일 덩샤오핑(鄧小平)이 사망했다. 1904년 8월 22일 생으로 향년 93세였다. 출생지는 쓰촨(四川)성 광안(廣安)현이다. 덩샤오핑 사후 그에게 중국 공산당이 붙인 수식어는 다음과 같다.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무산계급 혁명가, 군사가, 외교가, 중국공산당. 중국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영도자의 한 사람, 중국 사회주의 개혁개방과 현대화 건설의 총설계사, 덩샤오핑 이론의 창립자.”
1989년 천안문 유혈진압의 최종 결정권자였음에도 그가 타계하였을 당시 중국의 인민들은 마치 아버지를 잃은 듯이 슬퍼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자인 마오쩌둥(毛澤東)이 사망했을 당시 중국 인민들은 다가 올 미래에 대한 불안의식을 갖고 그를 보냈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사망했을 당시에는 그런 불안감은 없어 보였다. 모두들 한 마음으로 그의 공적을 기리며 덩샤오핑을 보냈다.
그러나 불과 강산이 한 번 변했을 때 그는 이미 잊혀진 지도자가 되었다.중국에서는 10년 단위로 성대한 행사를 치루는 것이 보통인데 10 주기이던 2007년 2월19일 중국 당국은 베이징(北京)이 아닌 그의 고향에서 기념 학술대회를 열고 그에 앞서 기념문집을 발간했을 뿐이다.
그의 지명을 받아 장쩌민(江澤民)의 후계자가 된 당시 국가 주석 겸 총서기인 후진타오(胡錦濤)를 비롯한 지도부 인사가 10주기를 앞두고 그에 관한 언급한 내용을 찾아보기 힘들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溫家寶) 등 제4세대 지도부는 ‘허시에(和諧,화해)’, 즉 조화(화해)를 내세우며 균형발전을 추구하였다.
덩샤오핑의 노선은 깊이 들어가면 그렇게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일단 ‘선부론(先富論)’으로 압축된다.이는 허시에 노선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다.
덩샤오핑의 마오를 대우했듯이 덩샤오핑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경이원지(敬而遠之.공경은 하지만 가까이하지는 않음)’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 곁의 마오는 덩샤오핑의 행동에 대해 대단히 분노를 느꼈겠지만 마오 옆의 덩샤오핑은 후계자들의 이런 태도에 섭섭해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덩은 선부(先富)가 긍국적으로 국부(國富)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이미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에서 밝혔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의 유해는 화장되어 1997년 3월 2일 부인 줘린 등 가족들에 의해 연꽃에에 싸여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다. 그가 생전에 "휠체어를 타고 서라도 주권이 반환된 홍콩 땅을 밟고 싶다"는소원은 실현되지 못햇다. 홍콩은 덩의 유해가 뿌려진지 꼭 4 개월을하루 앞 둔 이해 7월 1일 중국 땅이 됐다.
"국가발전은 展(개혁개방, 자본주의)과 紅(공산주의, 평등)이 아닌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이다
경제는 자본주의이며 정치는 민주주의이다
자본주의 3대원칙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등이며 민주주의 3대원칙은 民有, 民治, 民香정부(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이다
국민이 가난한 나라는 국가도 가난할 수 밖에 없다 중국의 발전은 1인당 국민소득 증가이다. 紅(공산주의, 평등)은 공산당 세력(마스 레닌주의 세력)만 배부른 가계(귀족가계)가 될 수 있다 "
"資本主義 反對 共産主義!! 民主主義 反對 全體主義(獨栽主義)!!
資本主義民主主義革命以后, 自由主義(自由權)和社會主義(社會權, 生存權) 共存(尊重)是自由社會.-自由社會[民主化 政府]-"
*資本主義 三代原則(經濟):私有財産, 利潤追求, 市場競爭原理 等等
*民主主義 三代原則(政治):爲民有、民治、民享之政府 等等
-民主政治要求 "人民本位"-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을 어떻게 처리했나
1959년 대약진 시기 당시의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중국을 처음 방문했던 1992년 5월, 차를 타고 한 밤중에 천안문을 지나친 적이 있다.
그 당시만 해도 몹시 어두었던 베이징의 밤거리에 천안문만큼은 조명으로 대낮처럼 환하게 밝았고 그 밝음의 중심 속에 마오의 초상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한 밤중의 베이징 드라이브는 사위에 짙게 깔린 어두움과 그 어둠에 곧 묻혀 버릴 것만 같은 희미한 불빛만이 문득문득 지나치는 것으로 해서 마치 터널을 지나는 기분을 주었다. 그 때문에 대낮처럼 환한 밝은 조명 속의 마오의 초상화는 밝은 낮에 처음 보았던 때보다도 오히려 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밝은 조명속의 마오쩌둥 초상화가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던 것은 그 것이 생전에 자신에게 두 차례의 실각을 안겼던 마오에 대한 덩샤오핑의 처리방식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1981년 6월 중국공산당 11기 6중전회에서 ‘건국이래 당의 몇가지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중국공산당의 보귀한 정신재산이며 건국과정에서의 마오의 공헌을 높이 평가했으나 마오쩌둥이 주도한 문화대혁명을 엄중한 착오로 규정했다.
마오의 공과에 대해서 ‘공(功)이 과(過)를 덮는다’고 결론지었지만 이후 덩의 주도로 전개된 개혁 개방정책은 마오쩌둥이 범한 착오를 극복하는 데에 집중됐다. 이 때문에 바깥사람들에게는 마오쩌둥에 대한 찬양은 하나의 치례일 뿐 결국 덩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마오에 대한 부정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이 무렵 덩샤오핑을 인터뷰한 오리아니 팔라치가 “천안문 위에 내걸린 마오쩌둥 초상화를 언제 떼어낼 것이냐”하는 질문을 던졌던 것도 당시 전개되고 있는 마오에 대한 재평가가 궁극적으로는 소련의 스탈린 격하운동처럼 마오쩌둥에 대한 완전 부정으로 귀결지을 것이 아니냐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리고 그 것은 서방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관심사를 대변한 것이었다.
그 때 덩샤오핑은 “ 마오 주석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민의 존경받는 지도자이며 천안문의 초상화는 앞으로도 계속 걸려있을 것이다”하고 답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스탈린의 후계자들이 스탈린을 완전 부정했던 것과는 달리 덩샤오핑의 마오에 대한 재평가는 '긍정을 전제로 한 부정’이었던 것이었고 그 것은 한 밤중에도 환한 조명 속에 모습을 드러낸 마오쩌둥의 초상화가 상징적으로 대변해주고 있었다.
1993년 2월부터 베이징에 주재하면서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마오쩌둥이 부활하고 있는 현상을 목도할 수 있었다. 개혁 개방의 부작용이 심화되면서 그 반작용으로 일기 시작한 마오쩌둥 열기는 그러나 덩리췬(鄧力群) 등 일부 좌파 지도자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현 체제의 대안을 넘볼 정도의 위험스러운 부활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사진이 부적처럼 안전을 가져다 준다는 식의 영웅에 대한 중국 전통의 민간 신앙 형태로, 또는 지도층의 부패에 대한 경종의 상징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강해져가는 중국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견제에 대한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마오쩌둥은 여러 모습으로 부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은 현 지도부도 용납하고 묵인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마오쩌둥에 대한 지도부와 민중의 이 같은 각기 다른 접근은 1993년 12월 들어서면서부터 자연스레 한데 어울어졌다. 그해 12월 26일이 마오의 탄생 100주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는 정말 신문을 보아도 TV를 켜도 온통 마오쩌둥 관련 기사가 아니면 마오쩌둥 관련 프로그램이었다.
신문에서는 토론, 세미나, 시화전 등 각종 행사관계 기사를 전하는 것은 물론 마오와 만났던 각계각층 인사의 회고담, 각 분야에 있어서의 마오쩌둥의 업적, 심지어 현재 마오의 시신을 담고 있는 수정관이 만들어지게 된 경위 등 마오와 관련한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루어지고 있었다.
TV 또한 상황은 비슷했다. 마오의 활동을 소재로 한 드라머가 빈번하게 방영되는가 하면 마오쩌둥 일대기를 기록 필름과 현장탐방, 그리고 관계자의 인터뷰 등을 통해 시리즈물로 내보내기도 했다.
그해 여름부터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이 시리즈물은 ‘혁명가로서의 마오쩌둥’ ‘군사전략가로서의 마오쩌둥’ ‘시인으로서의 마오쩌둥’ 등 여러 측면에서 마오의 일생을 다루고 있었다.
또한 마오쩌둥을 기리는 각종 행사도 많이 열렸다. 마오의 생일인 26일 인민대회당에서 당정군의 최고지도자들이 전원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마오쩌둥 탄신 100주년 대회’가 피날레를 장식할 때까지 중앙과 지방에서는 마오를 기리는 각종 행사가 잇달았다.
12월 20일에는 후난(湖南)성 샤오산(韶山)의 마오쩌둥 고향에서 장쩌민 총서기가 참석한 가운데 마오쩌둥 동상의 제막식도 있었다. 대륙전역이 마오쩌둥 열기에 흠뻑 빠져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오쩌둥의 과오의 부정에서 출발한 덩샤오핑 시대이지만 ‘건국자’로서 존중하고 있던 것을 목격해오던 터이라 그의 탄생 100주년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전개된 양상은 이러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혹자는 중국지도부의 가세로 고조된 마오쩌둥 추모 열기를 두고 ‘마오쩌둥과의 영원한 작별의식’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 번을 끝으로 마오쩌둥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기 위해 이처럼 성대히 추모한다는 역설이 거기에 담겨있었다.
1978년 개혁개방이 본격 추진된 이래 형식으로만 존중하고 실질적으로는 부정, 외면 해오던 마오쩌둥을 요란스레 추모하는 행사에 대한 비야냥이 없지도 않은 이 평은 어느 면에서 옳았다.
이후 1995년 5월 베이징 떠나올 때까지 신문이나 방송에서 마오쩌둥을 그처럼 요란스레 다시 부각시킨 경우를 접하지 못했다. 그는 또다시 천안문에 장식물처럼 ‘모셔’있는 존재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추모행사를 그처럼 성대히 치루는 것을 보고 느꼈던 것은 두가지였다. 마오의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마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개혁 개방정책에 측면에 맞추어 재정립하려는 노력이라는 측면과 과거와의 화해라는 측면이었다.
동상 제막식에서 행한 왕마오린(王茂林) 후난성 서기의 치사는 당시 지도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게한다. 왕 서기는 마오쩌둥을 “중국혁명과 건설사업에서 불후의 역사적 공헌을 했고 세계 피압박민족과 인민의 해방, 그리고 인류의 진보사업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마오쩌둥 사상은 “마오쩌둥 동지를 대표로 하는 중국 공산당이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기본 원리로하여 중국혁명의 장기적 실천과정에서 독창적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정황에 맞도록 구성한 사상”이라고 했다.
이는 마오쩌둥 사상이 마오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이른바 집체작품임을 밝힌 것으로 마오가 지닌 상징성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그는 “마오쩌둥 사상은 덩샤오핑 동지에 의해 승계되어 그 내용이 풍부하게 되었으며 그 바탕 하에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가 건설되었다”고 말했다. 현재의 개혁과 개방정책과 마오쩌둥을 접목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민중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마오쩌둥의 열기를 체제강화와 현 개혁개방노선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려는 방향으로 유도하고자하는 현 지도부의 의도는 마오쩌둥의 일생을 각 방면에서 조명한 TV 프로그램에서도 보다 뚜렷하게 엿 볼 수 있었다.
보이보(薄一波)가 감수한 CC-TV의 프로그램은 마오쩌둥의 일생을 다루면서 그 사상형성에 큰영향을 미쳤던 그의 장인 양창지(楊昌齊)가 사숙했던 유교서원을 찾아간다. 그런데 그 유교서원의 현판은 덩샤오핑이 일생을 두고 역설한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리를 탐구함)’였다. 얼마나 절묘한 견강부회(牽强附會,근거가 없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대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맞춤)인가!
그러나 이 때 이루어진 마오에 대한 재평가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대목도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중국사회과학원의 원장을 역임한바있는 후성(胡繩)은 당시 인민일보 1면에 기고한 글에서 마오쩌둥이 이룩한 중요업적중의 하나로 소련의 발전 모델로부터 탈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성은 이어 1989년 이후 동구와 소련의 붕괴는 소련식의 모델을 추종하지 않은 마오쩌둥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해준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리전개는 마오쩌둥의 탈소(脫蘇) 노선과 덩샤오핑의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노선이 일치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화대혁명 당시의 마오쩌둥의 과오가 많은 프로그램과 관련 기사에서 일체 언급되고 않았던 것도 기억에 남는 특징 중의 하나였다. 15년의 개혁개방이 바로 문화대혁명의 과오를 청산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그의 과오를 다시 도마위에 올릴 필요가 없다는 이유 외에도 세월이 상처를 아물게 했음은 아닐까.
이런 이유에서 100주년을 맞아 요란스레 거행된 각종 추모행사는 덩샤오핑을 비롯한 반(反) 문혁세력과 마오쩌둥 간의 화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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