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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택 전 총재, 별세 전날 회고록 탈고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이기택 전 총재, 별세 전날 회고록 탈고

CIA bear 허관(許灌) 2017. 4. 18. 09:14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애국주의(나라사랑, 대한민국)와 민주주의(民有, 民治, 民享)가 필요합니다

三韓(三國)正統說, 大韓的三韓之也. 三韓的馬韓(高句麗=高麗)弁韓(百濟)辰韓(新羅)之也. 大韓民國(대한민국)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등[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을 할 수 없다]
*민주주의 3대 원칙: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4·19 세대 정치 거목인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20일 오후 1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

이 전 총재는 경북 포항 출신으로 부산상고와 1960년 고려대 상과대학 학생위원장 시절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8 고대 의거'를 주도해 4.19 혁명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4.19 세대 대표주자로서 정치권에 입문한 이 전 총재는 7대 국회 때 신민당 전국구 의원을 지냈고, 전두환 정권 집권 직후인 11대를 제외하고 14대까지 내리 당선해 7선 의원을 역임한 정계 원로다.

이 전 총재는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서도 야당 외길을 걸었고, 야권의 두 거목인 고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어깨를 견주며 한국 정치사를 써나갔지만 양김의 그늘을 벗어나진 못했고, 양김과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대립하곤 했다.

고인은 1967년 30살에 신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7대 국회에 들어와 76년 39살에 당 사무총장직과 부총재직에 잇따라 오르면서 정계 지도자로 떠올랐다. 1979년 5월 제1야당인 신민당 총재 경선에 도전해 1차 투표에서 이철승, 김영삼에 이어 3등을 하고, 2차 투표에서 YS 지지를 선언해 김영삼 총재 당선에 기여했다

1979년 5월30일 신민당 마포 중앙당사에서 열린 신민당 정기 전당대회 2차 투표에서 378표를 얻어 새 총재로 당선된 김영삼 총재와 지지자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왼쪽부터 박영록, 조윤형, 김영삼 총재, 노승환, 이기택 의원. 연합뉴스

1986년 5월, 신민당 개헌추진 경남 지부 결성대회를 마치고 마산시가를 행진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기택 전 총재. 오른쪽부터 이중재, 김영삼, 이민우, 최형우, 이기택. 연합뉴스

고향은 포항이지만, 부산이 지역구였던 이 전 총재는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대선 후보와 관련한 양김의 갈등 국면에서 이 전 총재는 YS 를 지원했다. 그는 민주계로 분류되면서 신민당 사무총장 및 부총재, 통일민주당 부총재, 국회 5공 비리조사 특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 때 YS의 권유에도 민자당으로 따라가지 않은 이 전 총재는 노무현 홍사덕 이철 당시 의원 등과 함께 민주당(꼬마민주당)을 창당해 총재로 선출됐고, 이듬해 DJ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해 공동대표 자리에 올랐다

 

1992년 5월25일 민주당 정기전당대회에서 공동대표로 다시 추대된 김대중 이기택 대표가 참석 대의원들의 환호에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하고 있다. 진천규 기자

이후 대선에서 패배한 DJ가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제1야당 민주당의 단독 대표가 되고 당 총재 자리까지 오르며 차기 대권 주자로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DJ가 1995년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동교동계는 민주당을 탈당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이 전 총재는 이때 DJ와도 결별한다. 이 전 총재는 민주당 간판을 유지하면서 1996년 15대 총선과 1997년 포항 보궐선거에 출마했지만 연거푸 패배한 뒤, 그해 15대 대선 과정에서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과 합당해 한나라당 창당에 참여했다. 평생 야당이었던 이 전 총재가 양김과의 갈등 속에 여당으로 옮기는 순간이었다.

이후 이 전 총재는 1998년 한나라당 총재권한대행을 지내기도 했지만, 2000년 16대 총선 과정에서 한나라당을 탈당해 당시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김윤환·김광일 등 중진의원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부산 연제구로 출사표를 던졌으나 낙선했고, 그해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에 선출됐다. 이어 2002년 대선과정에선 과거 동지였던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면서 새천년민주당 중앙선대위 상임고문을 맡아 다시 야당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 당선 이후 이 전 총재는 참여정부에서 중책을 맡지 못했고, 4.19 세대 정치인들이 하나둘씩 밀려나면서 자연스럽게 현실정치와는 멀어지게 된다.

이처럼 참여정부 5년간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이 전 총재는 2007년 17대 대선 당시 노 전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고려대 상대 및 고향 후배인 이명박 전 대통령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나라당 중앙선대위 상임고문을 맡았다. 그리고 2007년 17대 대선에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지지해 중앙선대위 상임고문을 맡았고, 민주평통수석부의장까지 지냈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오른쪽 두번째)가 지난 2007년 8월 서울 신촌의 한 음식점에서 경선 때 자신을 도와준 원내외 당협위원장 등과 함께 식사를 하며 대선승리를 다짐하는 건배를 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박희태 전 공동선대위원장, 이명박 후보, 김덕룡 전 공동선대위원장. 김종수 기자

빈소는 강남성모병원에 차려지며, 발인은 24일, 장지는 4.19 국립묘지에 마련된다. 유족으로는 배우자인 이경의 여사, 세 딸인 이우인 지인 세인씨와 아들 승호씨가 있다.

이날 빈소가 차려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측근들이 전한 이 전 의원의 마지막 활동은 자서전 탈고였다. 이 전 총재는 생전 6~7년 동안 공을 들여온 자서전 탈고를 마쳤다. 별세 전날에도 밤늦게까지 자서전 ‘우행(牛 行·가칭)’ 탈고 작업에 매달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총재가 민주당을 이끌 당시 비서실장으로 보좌했던 박계동 전 의원은 이날 빈소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같이 전했다. 박 전 의원은 “어제(19일) 밤 총재님이 여의도 사무실에서 지난 6년간 준비해온 자서전 원고의 탈고작업을 마치고 나오며 ‘아…큰일을 마쳤네’라고 흡족하게 말씀했다고 들었다”면서 고개를 떨궜다. 이어 “그렇게 어젯밤 늦게 집에 돌아와 오늘 아침 늦게까지 주무셨고 식사 때문에 총재님을 깨우러 방에 들어가 보니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다”며 상황을 전했다. 이 전 총재는 향년 79세의 나이였지만 평소 지병 없이 건강했다고 한다

-한겨레 자료-

 

머리소리함의 이야기 자료

"거산선생과 후광선생 선거때 미리 거산선생 승리를 예측했고 후광선생의 비토그룹 군부세력 무마하기 위해서는 거산선생을 도와주는 것이 올바른 선택으로 생각했다

후광선생이 차기 대통령으로 출마하기 위해서는  근소한 격차와 서울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대남 강경파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정리(해체)하기 위해서는  노태우 전대통령 비자금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재판에 회부할 수 밖에 없었고  후광선생 포용정책이 필요했다

후광선생은 이기택전대표보다는 지역기반이 있는 김종필 전대표를 선택하여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머리소리함은 영남지역에서 이기택전대표의 지지 기반이 거산선생의 지지 기반이고 영남지역에서 10%이상 후광선생 투표는  호남인맥이나 일부 민주화 운동가들의 지지 기반으로 예측했다

영남지역 많은 유신정부 때 투쟁한 민주화 인사들이 김종필전 국무총리와 연대를 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야당을 선택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김대중정부 초기 때 세계 각국 군부독재 지도자와 연대를 했다

김종필 국무총리는 군정분리주의 좌익 군사정부인 북한 김정일과는 대화를 거부했다

위대한 어르신이나 선배 정치인이 있을때 후배들이 권력을 버려야 역사 흐름을 바로 잡고 전진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대한민국 제6공화국 헌법 전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제국 국호 대한(大韓)과 3.1운동 주도세력 신민회(新民會)의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 이념 국체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을  포용하여 건국한 정부입니다

대한민국의 국호는 대한이며 국체는 민주공화국입니다

 

대한(대한)은 고종 국왕이 고대부터 내려오는 삼한정통설[三韓(三國)正統說] 입장으로 건국한 국호입니다

三韓(三國)正統說, 大韓的三韓之也. 三韓的馬韓(高句麗=高麗)弁韓(百濟)辰韓(新羅)之也.  大韓民國(대한민국)[삼한정통설, 대한은 삼한(삼국)이다. 삼한은 마한(고구려=고려),변한(백제), 진한(신라)이다. 대한민국]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국가 원수 및 대표에 의하여 국정이 운영되는 나라입니다 민주(民主, 백성의 주인) 3대 원칙은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이고 공화국(共和國)은 다수인이 국가권력을 보유하고 군주가 존재하지 않는 국가를 뜻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6공화국 헌법 제1조]"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을 할 수 없다]
*민주주의 3대 원칙: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

*국영 기업 []

국가 직접 세워 운영하는 기업

*공기업 []

국가 공공 단체 자본으로 설립하여 운영되는 기업

*사기업 []

개인 또는 사인() 같은 민간인 출자하여 경영하는 기업

공산주의 국가에는 원칙적으로 사기업 존재할 수가 없다

사기업 []은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적인 기업체제이자 현대 고도산업사회의 핵심적인 구성체로 산업사회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고도소비사회는 소비가 투자라는 경제원칙이 적용되는 고소득층이 국가 경제 주도층으로 되어 가는 사회이다

-고도 소비사회(고소득층)에서는 자본주의민주주의(자유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자유무역으로 국가간의 경제통합이 필요하다

*극단적 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국영기업, 군국주의)
*극단적 자유주의(무정부주의.마약복용,동성애)
*북한은 국영자본체제 반미 자주노선 국가사회주의 세습제 독재정부이다 북한정부의 반체제인사는 자유화, 민주화세력이다

남한정부 내부 친북세력은 자주노선 반미세력(국가사회주의 세력)이다

                                                            "Form Guide Ear(Language, Intelligence) to Bird's Eye(Reading,Investig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