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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

CIA bear 허관(許灌) 2017. 6. 24. 17:51

 

 한국전쟁 추진 세력  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김일성(인민군 총사령관), 최용건(방어총사령관), 김책(전선총사령관), 김일(인민군 문화부 사령관), 강건(인민군 총참모장) 모습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과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이다
한국전쟁 이후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이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그룹과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 그룹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 그룹은 한국전쟁 패전 책임과 박헌영등 미국간첩으로 제거 되었고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그룹은 종파주의자로 제거 되었다

아직도 북한 권력층은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후손들이 장악하고 있다

김일성은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주도 인물로 소련군 도움므로 권력을 장악했다

중국에서는 김일성을 만주 조선족자치정부[만국 조선족자치정부] 공산주의(사회주의) 세대로 평가하고 있으며 일본 좌파는 김일성을 김광서(일본육사 23기 기병과 출신)으로 평가해왔다

소련에서는 한족과 조선족, 만주족, 몽골족 등  혼성 용병부대 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그룹 조선인 지휘관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일성주의 주체사상도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이론 도입으로 구소련이나 중국처럼 붕괴 되어가고 있다

 

1.8.15해방과 한국전쟁 당시 국제정세

(1)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 깃발[소비에트 홍군에서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개편]

 

 

                                                       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 깃발[소비에트 홍군에서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개편]

1937년 7월 27일 마오쩌둥(毛澤東), 장원톈(張聞天)이 중공중앙을 대표하여 국공합작에 따른 홍군개편 원칙을 발표하였다. 이는 항일전 기간 홍군이 ‘8로군’으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홍군 통솔기구의 명칭에 대해서 양보할 수 있지만 홍군과 소비에트 지구에 대해서는 전권을 보유한다고 천명했다. 국공합작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이 홍군의 인사에 간여할 수 없다는 것이 이날 천명된 원칙의 요체였다.

다음 날인 28일에 8월 15일까지 홍군의 재편성을 마치고 같은 달 20일에 항일전에 출동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중국 공산당은 이어 장제스(蔣介石)에게 전문을 보내 홍군을 국민혁명군으로 개명하여 장제스의 지휘 아래 항일전쟁에 동참시킬 뜻을 전달하였다.

공산당은 이 제안에서

①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실현

② 국민당정권의 전복을 위한 모든 폭동정책과 지주의 토지몰수 정책 취소

③ 소비에트정책과 홍군 명칭의 취소

④ 국민혁명군으로의 개편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명령 수용 등의 4개항을 제시하였다.

8월 장제스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장제스는 홍군을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지휘부를 인선하였다. 하지만 이 인선은 공산당이 결정한 것을 추인하는데 불과했다.

8로군 총사령관은 주더(朱德)이고 부사령관은 펑더화이(彭德懷)였다. 정치부를 설치하여 런비스(任弼時)를 주임에 덩샤오핑(鄧小平)을 부주임으로 하였다.

그 아래 3개 사단을 두었는데 115사 사단장에 린뱌오(林彪), 120사 사단장에 허룽(賀龍), 129사 사단장에 류보청(劉伯承)이 임명됐다.

8로군 개편 당시 총병력은 4만 5,000명이었다.

한편 주력군을 8로군으로 개편한 뒤 따로 1만 명의 병력으로 보안대를 창설하고 사령관에 가오강(高崗)을 임명했다.

8로군은 이후 국민혁명군 제 18 집단군으로 개칭됐으나 계속 8로군으로 불렸다. 화베이(華北) 일대에서 활동한 중공 계 정규군과 유격대의 총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항일전쟁 개전 직후 8로군은 맹렬한 전투와 유격전으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항일전쟁 종전 뒤에는 신사군(新四軍)등과 합쳐져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였다.

‘3대 기율 8항주의(三大規律 八項主義)’로 대표되는 인민에 봉사하는 엄격한 규율에 의해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이것이 중일전쟁 후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는 최대요인이 되었다

 

                                                             1930년 말기와 1945년 8월까지 동북아 지도[동북3성과 내몽골 만주국]


 

 

 

                                                                                              1945년 8월 15일 이후 지도

팔로군(八路軍), 중국 국민혁명군 제8로군은 1937년 제2차 국공합작후에 중국 공산당 휘하 독립적 성향을 가진 부대로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설립되었고 신사군과 함께 화베이 지방에서 항일전의 최전선을 담당한 부대이다. 적극적인 항일전과 민심도모로 인해 중일 전쟁 기간에 중국 공산당에 큰 발전을 기여했다

ㄱ.개요

마오쩌둥은 군벌이나 열강에 대항하려면 민중에 의한 혁명 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편 중국 국민당에서는 1920년대 1차 국공 내전 당시 빈약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군대의 수나 그 재정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장개석은 군대를 이용해 상하이 쿠데타(중국어: 四·一二事件)를 부흥시켰고, 제1차 국공 합작을 붕괴시켰다. 중국 공산당은 이 씁쓸한 경험으로부터 독자적인 군대의 창설을 해야했다.

중국 공산당에 있어서 큰 기회로 바뀌었다. 마오쩌둥에 의한 인민전쟁 이론(「점화한 적군을, 인민의 바다안에 매장한다」―인해전술)에 따라, 공산당은 중국 각지에의 침투 공작을 적극적으로 행했다. 공산당에 협조적인 지역을 넓히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공산당 세력은 풀뿌리적으로 증식하였고 중일 전쟁이 끝난 1945년 980,000명 정도의 게릴라 군을 모으게 된다.

그러나 1937년에 중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후 8년동안 중국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무기와 군사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국민당 정부군은 전쟁발발 직후부터 일본에 밀리기 시작하여 충칭으로 임시수도를 옮기고 서부 산악지대를 근거로 지구전을 펼쳐야만 했다. 팔로군은 일본군에 제대로 반격 한번 해보지 못했다. 반면 일본은 동부해안지대에서 북경-서안-장사-계림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고 중국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갔다. 중국 국민당의 국민 혁명군과 중국 공산당 휘하에 있던 팔로군은 전쟁기간동안 일본에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했다.

1945년 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소련이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일본의 패전 후, 국공 내전이 재개하면서 팔로군은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만주의 할힌골 전투(러시아어: Бои на Халхин-Голе)에서 승리한 소련군은 관동군의 장비를 접수하였고 이것을 그대로 팔로군에게 주었다. 또 일본군의 군인이나 민간인을 팔로군에 가세하는 것으로 군사 기술이나 전문 기술을 얻을수 있었다. 공군이 없었던 팔로군은 일본군의 항공 부대의 장교를 회유하여 항공대원 양성하였고, 포병 전술, 전략 측이 미비하여 기본적으로 체계화 된 일본군의 포병 전략을 베이스로 하였다. 또한 팔로군 내 조선인이 간호, 의사들 그리고 좌익 아나키스트 계열의 항일군이었던 조선의용대를 필두로 국공 내전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승리하고도 팔로군은 긴 세월에 걸쳐 징용 했고 팔로군은 국민당군과의 싸움에서 최종 승리하여 1949년 10월의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큰 역할을 완수했다.

ㄴ.활동 지역

팔로군은 주로 관동군 점령지역의 후방 교란과 게릴라전을 담당했다. 1940년 8월에는 화북에서 백단 대전이라고 하는 철도나 탄광에 대한 대규모 게릴라 공세를 실시했지만, 관동군은 이 팔로군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특수치안부대, 간도특설대를 미리 조직하였고 팔로군 일부는 백단 대전에서 금세 소탕되었다.

ㄷ.승전국(勝戰國)

2008년 현재, 중국 국민의 대부분이「중공은 일본과의 전투로 승리했다」라고 믿고 있다.「중공은 일본과의 전투로 승리했다」라고 하는 이유는 원래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상대로 해서 이길 확률이 거의 없었으나, 갑자기 터진 중일 전쟁에 의해 중국 공산당은 활발한 게릴라 작전등을 펼쳤고 이에 대해 지지를 얻었다는 애매모호한 주장들을 펼치고 있다.

ㄹ.전신 체계

당초 조직 된 홍군(중국 공산당군)은 마오쩌둥 지휘하의 중국공농홍군과 남창 봉기로 주덕 밑의 홍군인 정강산에서 합류해 중국공농혁명홍군 제4군이 되어 후에 중국공농홍군 제4군이 되었다. 제4군은 서금의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에 본거지를 두었지만, 5회에 걸치는 국민당군의 포위 공격에 맞아, 근거지를 떠나고 대장정을 시작하게 된다

 

ㅁ.규모 및 규모 변화

팔로군은 비정규적인 게릴라 전을 구사하였으나 정규 전술을 썼던 국민당에 비해선 사상자가 적었다. 중국측 자료주장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의 경우는 약 300,000명의 사상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팔로군은 소련에 의해 압수된 수 많은 일본군측의 장비와 무기들을 소련측으로부터 흡수함으로써 장비로서 정규적 전술을 펼칠수 있는 군대를 만들수 있었으며, 팔로군의 숫자를 계속 늘릴수 있었다.

(ㄱ)국민혁명군 제8로군

1937년 - 120,000명

1938년 - 156,000명

1940년 - 400,000명

1944년 - 600,000명

1945년 - 980,000명

(ㄴ)중국 공산당

1946년 - 1,200,000명

 

ㅂ.조직

(ㄱ)지휘부

사령관:주더

부사령관:펑더화이

참모장:예젠잉

정치부(제8로군정 지부) 주임:런비스

(ㄴ)예하 부대

제115 사단장 린뱌오, 부사단장 네룽전, 부대 주 지휘관 뤄룽환

제120 사단장 허룽, 부사단장 샤오기, 부대 주 지휘관 관웅

제129 사단장 류보청, 교위단장 쉬샹첸, 부대 주 지휘관 장하오

각 사단은 각각 2개 여단이 있다.

독립단- 조선인으로 구성 된 여단이다. 조선의용대 또는 1940년대 초반에 차출된 동북항일연군이 주축을 이뤘다.

기병단 - 주로 측면을 교란하던 기병대였다.

포병단 - 팔로군이 숲속이나 농촌지에 요새를 구축할 때 그 수성전은 주로 포병단이 맡았다.

타격단 - 팔로군의 주력 여단이었으며 게릴라 전술을 통한 관동군 후방 교란이 주요 목적이었다.

교도단 - 주로 경비 또는 죄수 교도를 맡았다.

특무단 - 지금의 헌병대의 역할이며 팔로군 내 군경 역할을 했다.

국민당군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를 받았기 때문에 중일 전쟁 기간 내에 장비는 우수했지만 병력 보존에 우위를 두어서 일본군과의 정면 결전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관동군이 전략 요충지로 결정하고 쳐들어 오는 곳에서는 격렬히 저항하였고 정규 전술을 펼쳤다. 그러나 항상 소규모 전투에서 패전을 했으며, 같은 국민 혁명군에 속했던 팔로군을 간접적으로 탄압하였다. 또한 팔로군에 대해서 적극 공세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예로 신사군 사건이 일어났다.

국민당군이 병력 보존을 고려한 것은 중일 전쟁이 끝난 후 공산당을 무력으로 즉각 없애버리려는 의도였지만, 이 전략은 완벽하게 실패가 되어 버린다. 항일전에서 과감하게 일본군과 싸운 팔로군은 화북을 중심으로 민중의 지지를 모은 것이었다. 그에 비해 국민당군에 대한 민중의 평판은 확고히 돌아서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국민당을 돕던 미군도 사실상 팔로군과 주로 작전 수행을 하였다.(미국 육군으로부터 파견되었던 죠셉 스티르웨르 중장의 해임사건도 이것이 원인이 되었다.)

팔로군은 군복과 군모의 색은 함께 황토색.하지만 홍군시대의 남색의 군복의 군인도 많았다. 왼팔에 「8로」라고 쓰여진 완장을 붙인다. 군화는 신지않고 포화나 짚신을 신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팔로군은 점령지에서 어느 정도의 소지를 소유한 농민을 「부농」이라고 판단해 인민재판에 걸쳐 처형했다. 이것은 팔로군의 힘을 과시해 주민에게 공포심을 안게 하기 위한 목표였고 팔로군에 대한 부정적 측면으로서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잔학행위는 지역 내의 빈곤한 자의 질투심, 복수심을 채우는 일로도 판단되어,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모으는 일에 공헌한 면도 있다.

ㅅ.3대 기율과 8항주의

중국 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에는 「3대 기율 8항주의」(三大纪律八项注意)라고 하는 규칙이 있었다. 이는 팔로군이 대중에게 지지를 받은 결정적 요인이 되었으며, 후에 한국전쟁 당시 중국에서 파견된 인민지원군에게도 나타났다. 이 규율을 어긴 팔로군은 중형을 받게 되었고 심하면 총살형에 처해졌다. 팔로군은 장개석 휘하의 국민혁명군과는 반대로 이 엄격한 군대 교조로 인해 게릴라 전으로 큰 전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는 말도 있다.

(ㄱ)3대 기율[三大規律]

1.모든 행동은 명령에 따라야한다

2.인민의 바늘 하나, 실 한 오라기도 공짜로 취하지 않는다.

3.모든 전리품은 공유하여야 한다.

(ㄴ)8항주의[八項主義]

1.병사를 구타하거나 욕하지 않고 불필요한 상명하복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사람은 때리거나 모욕하지 말아야 한다]

2.부녀자를 희롱하지 않는다.

3.공평하게 사고 판다[매매는 공정하게 하여야 한다]

4.포로를 학대하지 않는다.

5.말할 때는 온화하게 한다[말을 부드럽게 하여야 한다]

6.빌린 것은 반드시 되돌려 준다.

7.파손한 물건은 반드시 배상한다.

8.농작물에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ㅇ.소멸

1947년에 제2차 국공합작이 국민당군의 선공으로 붕괴하면서 팔로군은 신사군과 함께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편입되었다.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은 중국 공산당의 당군이며, 사실상 중화인민공화국의 정규군이다.

*신사군 사건(新四軍事件) 또는 원난 사건(皖南事变)은 중일 전쟁중인 1941년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이 공동 항일 전선을 펼 당시 일어난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은 사실상 결렬되었고 이론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사건을 두고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가들의 평가가 나뉘는데 중화민국 쪽에서는 이를 공산군의 불복종에 대한 징벌이라고 보는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쪽에서는 국민당의 배신행위라고 보고 있다.

제2차 국공 합작이후 양쯔 강 남쪽에서는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신사군이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산군과 공산당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는 것에 불안을 느낀 장제스는 점차 공산군과의 협력을 꺼리게 되었고 1940년 12월 신사군을 안후이 성 및 저장 성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산당은 이에 동의하고 병력을 양쯔 강 이북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처음에 신사군 공산당 장교들은 이 명령에 반발했으나 결국 이동에 합의했다.

예팅이 이끄는 신사군의 정예 병력 9,000명은 3개 방면으로 나눠 양쯔 강을 도하하기 시작했고 1월 5일 도하를 마치고 집결하였다. 이때 갑자기 8만명의 국민혁명군이 나타나 이들을 포위하고 다음날 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숫적 열세에 밀려 신사군은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고 부대장 예팅은 부하를 살리기 위해 1월 13일 국민당군측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예팅이 협상하러 오자 갑자기 국민당측은 그를 체포해 버렸고 결국 신사군의 부부대장도 전사하고 2,000명의 병사만 살아서 포위망을 돌파하였다.

1월 17일 장제스는 신사군의 해체를 명령했고 예팅은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그러나 1월 20일 옌안의 공산당 군사위원회는 부대를 재건하기로 결정하고 천이가 새로운 부대장이 되었고 류샤오치는 정치위원이 되었다. 신사군은 7개 사단 및 1개 여단으로 구성된 9만병력의 규모로 재편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실상 제2차 국공 합작은 결렬되었고 국민당은 항일전선을 깨뜨렸다는 비난에 당면한 반면 공산당은 항일의 영웅으로 인식되었다. 비록 공산당은 이 사건으로 인해 양쯔강 남쪽의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인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신사군(新四軍) 깃발

1938년 1월 6일 신사군(新四軍)이 난창(南昌)에서 정식으로 구성됐다.

신사군은 1934년 10월 홍군의 주력이 장정(長征)을 시작, 서천북상(西遷北上)한 뒤 화중(華中), 화난(華南)에 남아서 유격전을 계속해 온 홍군 잔존 부대로 구성되었다.

신사군이란 명칭은 2차 국공합작 후 국민당 정부가 1937년 10월 이들 잔존 게릴라 부대의 재편을 허용하고 이 부대에 '국민혁명 신편 제4군(國民革命新編第四軍)'이란 부대명칭을 붙인데서 비롯됐다.

군장(軍長)에 예팅(葉挺), 부군장에 샹잉(項英), 참모장에 장윈이(張雲逸), 부참모장에 저우쯔쿤(周子昆), 정치부 주임 위안궈핑(袁國平)이 임명됐으며 4개 지대를 관할했다.

3년 뒤인 1941년 1월 6일환난(皖南), 즉 안후이(安徽)성 남부에서 활동 중이던 신사군 9,000명이 장제스(蔣介石)의 명령을 받고 양쯔강(揚子江) 이북으로 이동하던 도중, 국민당 군 7개 사단 8만 명의 포위공격을 받는다.

2,000명만이 포위망을 돌파했으며 부군장 샹잉과 7,000여 명은 전사하고 군장 예팅도 포로가 되었다. 이는 공산군 세력이 강화되고 있는데 대한 국민당군의 초조감의 발로로 ‘환난사변(皖南事變)’으로 불린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적인 일본군을 앞두고 벌인 동족상잔에 대해 조식(曹植)의 ‘칠보시(七步詩)’를 빗대 ‘千古奇冤 江南一葉; 同室操戈 相煎何急’ 이라는 시를 신화일보(新華日報)에 발표하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은 천이(陳毅)를 대리군장으로, 류샤오치(劉少奇)를 정치위원으로. 장윈이(張雲逸)을 부군장으로 삼아 신사군 재건에 나섰으며 한층 강한 군대로 발전했다. 항일전쟁 후 내전 당시 화둥(華東)야전군으로 활동했다.

 

 

(2)미군시찰단 연안(延安) 방문

1944년 7월 22일 미군 대령을 단장으로 한 미군 시찰단이 주중 미군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홍군의 최고 지도부가 위치한 옌안(延安)을 방문했다. 8월 7일에는 2차 시찰단이 비행기 편으로 옌안에 왔다.

이들의 시찰 목적은 전선 후방 지역에서 8로군(八路軍)과 신4군(新四軍)의 작전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적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젠잉(葉劍英)과 양상쿤(楊尙昆)의 영접을 받은 이들은 마오쩌둥(毛澤東),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을 만났으며 펑더화이(彭德懷)와 천이(陳毅) 등으로부터 8로군과 신4군의 전투 활약상황을 브리핑 받았다이들 시찰단은 옌안 외에 진찰기(晋察冀)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허베이성 일대), 진수(晋綏) 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네이멍구 일대) 등 홍군의 항일 근거지 등을 시찰했다.

이들 시찰단은 시찰을 마치고 미국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중국 공산당과 그 무장역량을 중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이들 미군 시찰단을 맞아 옌안에서 발행되던 해방일보(解放日報)는 ‘우방 미국 군사사절단 환영’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시찰단이 미국에게 중국공산당과 그들의 저항운동에 대한 호의적 평가를 제공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주중 미군 총사령부의 군사시찰단 파견은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움직임과 연계된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미국은 중국에서의 제2전선 역량 강화를 위해 모든 중국 군대의 통합을 희망했다.

헨리 월레스(Henry Wallace) 미국 부통령은 1944년 6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개선하여 항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7월 초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를 포함한 전 중국군 지휘자로 스틸웰(Stilwell) 장군을 제안했다.

이는 미국이 한국전 초기 한국군의 작전권을 요구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협정을 통해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렇게 절박한 상황은 아니어서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루스벨트의 이 제안은 필연적으로 공산당이 참여한 중국의 연합정부 창설 제안으로 이어졌다. 공산당은 이 일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미군 시찰단의 옌안 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루스벨트는 결국 장제스와 심한 불화를 보였던 스틸웰을 소환하고 웨드마이어(Wedmeyer)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또 공산당을 포함한 연합정부를 제안한 가우스(Gauss) 대사도 이해 11월 30일 스틸웰의 소환을 주장했던 패트릭 헐리(Patrick Hurley)로 교체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시도가 좌절된 셈이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은 유럽에서 처칠이 추구한 유고 정책 을 본 뜬 것이다. 유고에서는 나치 침공 후 왕정 세력의 게릴라와 티토가 이끄는 공산 세력 게릴라가 별도로 활동했는데 처칠은 티토의 게릴라가 적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데 더욱 효과적인 역할을 하자 그들이 공산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적극 지원햇다.

이 결과 2차 대전 기간 티토의 게릴라는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티토의 게릴라 세력은 종전 후 벌어진 유고 내전에서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왕정 세력을 격파하고 자체적으로 유고를 공산화하였다.

 

(3)포츠담 선언과 소련군 대일참전

포츠담 선언문에서 연합군(미국정부) 청탁으로 소련군이 일본과의 전쟁 참여가 서명되었다. 서명된 내용대로 5월 9일 유럽 전쟁에 승리한 지 정확히 3개월 후 소련군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 모든 사실들이 얄타, 포츠담에서 진행된 연합군 회의 국제 문서 내용에 있다.

8월 폭풍 작전은 미국을 상대로 한 본토 결전에만 대비하고 소련의 참전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던 일본제국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원자폭탄 투하만으로도 국가 멸망 및 민족 멸절의 위기를 맞이하는 상태에서 소련의 참전은 일본군 수뇌부의 항전 의지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조 대장이 항복조칙에 따라 무조건 항복하였고, 8월 30일까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다. 불과 1주일(1945년 8월 9일~15일)의 짧은 기간동안 8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전사했으며, 60만 명이 넘게 포로로 잡혔다. 반면, 소련군의 전사자는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8월 13일에 청진시에서 소련과 일본이 싸우면서 소련은 300명이 죽었고, 일본은 500명이 죽으면서 250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고 한다

소련은 이 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과 몽강국을 붕괴시키고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서방 연합국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자국 영토로 흡수하였다. 또,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진주시켜 미국과 함께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하였다

 

 

(4)한국전쟁의 불씨(유인) 애치슨 라인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언급했다.

애치슨은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 이후 이를 '애치슨 라인'으로 지칭됏다)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즉 방위선 밖의 한국과 대만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애치슨은 이 발언으로 6개월 뒤 일어난 한국전쟁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국전 수정주의론자들 중에서는 '유발'이 아닌 ''유도' 더나아가 '유인' 했다는주장까지 나왔다. 이런 주장은 소련 해채 후 한국전 관련 소련 측의 비밀 문서들이 공개 되면서 소멸됐으나 판단착오에 따른 미필적 고의의 '유발 '비판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겨냥한 목표는 이와는 무관한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그 것은 ‘마오의 농민정권’을 유고화 하자는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이 미국의 전통적인 대아시아 군사전략이었던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재확인 하면서도 섬인 대만을 방위선 밖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는 누가 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대만 섬으로 쫓겨 온 국민 정부를 보호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이는 그가 소련과 같은 볼세비키정권이 아니라 토지 개혁 정권으로 판단하는 '마오의 공산 정권'이 유럽에서의'티토의 유고'처럼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고수하며 소련의팽창주의를 견제하는 기능을 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엇다.

애치슨은 공산당도 국민당도 강하게 견지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 원칙의 주인공을 국민당 정권에서 공산당 정권으로 바꾼 것이다.

'애치슨 국무부' 내의 친중국 공산당 성향의 이른바 '스틸웰 그룹'이 입안한 2대 중국 전략은 한국전 발발로 파탄이 났다.

중국 대륙의 변화에 미국이 '애치슨 라인'으로 '장군'하자 그 바로 한 달 이틀 뒤에 ' 스탈린의 소련'이 '중소우호동맹 상호 원조조약'이라고 '멍군' 하며 응수햇다. 이는 한반도에서 동서 진영의 제로섬 게임을 불러일으키고 말앗다.

이후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정신 분열' 증상에 빠져 버렸다. 겉으로는 '하나'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두개'의 현실을 수용하고 유지하려 애썻다.


한국전에서 잠시 '하나의 한국'을 추진하다 너무나 큰 비용을 강요당하게 되자 '두개의 한국'을 유지하는 선으로 후퇴했고 중국 대륙에서는 대만 섬을 '하나의 중국'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정하며 새로운 중국의 주인공이 된 공산 정권을 무시하는 전략을 장기간 고수했다. 베트남에서도 한반도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데도 불구 '2개의 베트남'을 무리하게 유지하였다. '
'애치슨라인'의 '중국 대륙 구상'은 그러나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라지지도 않았다. 1972년 2월 리처드닉슨과 헨리 키신저의 중소 미중화해로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났다.
유엔군

1950년 6월 25일 비가 내리는 평화로운 새벽의 정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야포와 자동화기의 굉음과 함께 북한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었다. 침략군은 이내 38선을 넘어 반 무방비 상태의 대한민국 경찰군을 밀어내며 수도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틀 후 유엔은 북한군의 침략 저지를 위한 회원국의 단결과 원조를 요청하였다. 유엔 안보이사회는 결의안을 통해 미합중국을 결의안 내용의 실행과 한국 내 유엔군 작전 지휘를 담당할 집행국가로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자유 세계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공산세력이 자유국가를 짓밟는 행위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당시 미 육군 극동사령부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침략을 격퇴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는 명령에 따라 미 공군 및 해군을 투입하고 7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유엔 사령부 총 사령본부를 설치하였다.

(5)유엔의 호소

한편, 유엔은 모든 회원국에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의 항전 노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군사 및 기타 원조 제공을 촉구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미 보병 24사단 21 보병연대가 유엔 지상군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른바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로 명명된 이들은 일본 내 주둔지로부터 공수된 병력으로 7월 5일 오산에서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투입되었다.

한-미 양국의 군대는 우세한 전력의 북한군을 상대로 점차 남쪽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유엔 사령부는 지연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즉, 수적으로나 장비 측면에서 열세인 가운데 유엔의 다른 회원국이 약속한 지원을 기다리며 조금씩 후퇴하면서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 8월 29일, 영국 제 27여단이 부산에 도착, 한국군 및 미군으로 구성되어 있던 유엔 사령부에 합류하였으며 곧 대구 서쪽의 낙동강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이디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터키가 자국 병력을 파병하였고, 남아프리카 연합은 공군병력을, 덴마크, 인도, 노르웨이, 스웨덴은 의무부대를 지원하였고, 당시 비회원국이던 이탈리아는 병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자유세계의 자유를 수호하다

3년 간의 한국전쟁을 통해 연합군에 소속된 장병들은 유엔 사령부의 일원으로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고 침략행위 저지를 위한 유엔의 의지를 확인시켰다.

한국 땅의 혹서기와 혹한기를 견뎌내면서 영국, 이디오피아, 한국, 태국, 터키, 미국 등을 비롯한 연합국 출신의 젊은이들은 북한과 중국 인민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전쟁이야말로 현대 전쟁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피의 능선, 장진호, 함흥, 단장의 능선, 화천호, 철의 삼각지, 펀치볼, 부산 등은 한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 격전지들이다. 연합군의 용맹스런 장병들이 흘린 피는 불모고지의 흙먼지와 한강과 임진강의 흐르는 강물도 붉게 물들였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총성은 멈췄다. 판문점에서 체결된 휴전협정은 전투의 종결과 함께 정치적 타협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비록 전투는 끝났으나 군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양측은 휴전선으로부터 2,000미터씩 물러나 비무장지대(DMZ)를 사이에 두고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해야만 했다.

자유의 대가

부산항 부근에 위치한 당곡 평야에는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수많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빛 바랜 터키와 이스라엘의 '초승달과 별'과 '다윗의 별' 문양 옆에 세워진 하얀 십자가들은 33,629 명의 미군과 수많은 한국 병사들, 717명의 터키 병사들, 그리고 1,109 명의 영국군이 치열한 전투 속에서 산화해 간 흔적인 것이다. 이 곳은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죽어간 12 개국 병사들의 시신이 묻혀있는 영광의 장소이기도 하다.

휴전협정과 함께 유엔 사령부 회원국들은 전쟁으로 피폐한 한국의 경제를 재건하는 데 힘을 쏟기 시작했다. 도시와 농촌을 온통 폐허로 만들어버린 전후 한국의 재건과 복구를 돕는 일은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병력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 연합군의 병력은 932,964 명으로 최대규모를 이루었다. 각국별 병력사항은 다음과 같다.

한국 - 590,911

콜롬비아 - 1,068

미 합중국 - 302,483

벨기에 - 900

영국 - 14,198

남아프리카 - 826

캐나다 - 6,146

네덜란드 - 819

터키 - 5,455

룩셈부르크 - 44

호주 - 2,282

필리핀 - 1,496

뉴질랜드 - 1,389

태국 - 1,294

이디오피아 - 1,271

그리스 - 1,263

프랑스 - 1,119


 

2.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소련 육군 극동사령부)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스탈린부대[민주사회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 그룹]

 

제2전선 구축을 위해서 미영정부의 원조로 창설한1944년 소련령의 동북항일연군(88독립 저격여단) 부대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김일성.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흑룡강성당사자료> 10집에 수록[1943년의 金日成(김일성) 첫 공개된 金日成(김일성)의 88여단 시절 사진. 이 사진은 지난 1943년 초여름, 하바로프스크부근 브야츠크촌에 있는 88여단본부앞에서 여단장 周保中(주보중)중좌와 조선인 대원들이  함께 촬영한 것. 88여단은 42년 스탈린의 지시로 소련, 중국, 조선인등으로 구성, 對日戰(대일전) 준비를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당국은 지금까지  金日成(김일성)이 88여단에 소속됐던 사실을 부인해 왔다. 앞줄  한가운데가 周保中(주보중), 그 오른쪽이 金日成(김일성), 세번째줄 왼쪽부터 徐哲(서철)(前(전)북한검열위원장), 姜健(강건)(前(전)인민군총참모장), 金光俠(김광협)(前(전)북한민족보위상), 네번째줄 왼쪽부터 金一(김일)(前(전)북한제1부수상), 崔勇進(최용진)(前(전)북한제1부수상), 한사람건너 金京錫(김경석)(前(전)북한노동당조직부장)] 

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 소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 1개이다

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88독립 저격여단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 여단 1 대대장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 88독립 저격여단  사실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부대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 1939년경부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가 등장했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당국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남은 자들 물자 부족으로 인해 활동 계속이 곤란해 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동북 항일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 이 야영지에 따라 제88 독립 저격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나 나아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 편성 동북 항일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10%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 들어간 부대도 합류해, 88독립저격여단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 소련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받은 적군 계급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었고, 지휘 관직 붉은 군대(소련군) 장교 임명 되었다. 병사 적군 군복 착용했다.

 

1944 4 현재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 - 스 메르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소총 대대
무선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9 ~ 1943 7 현재)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
88 여단 병사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과  파괴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 주보 1940 ~ 1943 사이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독립저격여단  1 독립 저격 대대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고 소련군과 함께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인 수행과 이 때 발휘 된 용기"에 김일성에게는 적기 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독립저격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 1945 10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第88独立狙撃旅団(ロシア語: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略称88 осбр )は、ソビエト連邦が第二次世界大戦中に創設した民族旅団の1つ。極東戦線情報科に直属し、満州・朝鮮半島における偵察・破壊工作を使命とした。

旅団は、元東北抗日聯軍将兵が中核となり、主として中国人と朝鮮人から編成された。後の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国家主席、金日成は、同旅団の第1大隊長を務めていた。ただし、朝鮮労働党の公式見解では、金日成は朝鮮人民革命軍を組織して東北抗日連軍本体とは共闘しつつも別行動であったとしており、その後の入ソの事実は無視されている。中国共産党は、この部隊を東北抗日連軍教導旅団(抗連教導旅)と称している。

後に旅団の中核となる東北抗日聯軍は、1939年頃から関東軍と満州国軍の大規模な掃討作戦により、多数の戦死者を出した外、日本当局に帰順する者も出始めた。周保中、崔庸健、金策、金日成等、残った者達も物資の不足により、活動の続行が困難となった。そのため、彼らはソ連に脱出することを決定した。

1940年12月末、聯軍はアムール川を渡って、ソ連領内に入った。ソ連領内では、聯軍の活動支援のため、沿海地方のヴォロシーロフ・ウスリースク郊外に北(A)野営(Северный лагерь又はлагерь А)、トルクメニスタンのケルキ郊外に南(B)野営(Южный лагерь又はлагерь Б)を設営した。当初、約100人がここで訓練を受けたが、後に200~300人にまで増加した

独ソ戦勃発後の1941年7月中旬、ソビエト政府は、日本の北進に備えて、これらの野営地に基づき、第88独立狙撃旅団を編成することを決定した。旅団は、ハバロフスク市のヴャツコエ・ナ・アムーレ(Вятское-на-Амуре)に配置することが決定された。1942年7月21日付極東戦線司令官ヨシフ・アパナセンコ上級大将の命令第00132号に基づき、旅団の編成の期間は、 同年7月28日から9月15日までの間と定められた。

部隊の充足は、東北抗日聯軍の中国兵と朝鮮兵の外、中国系・朝鮮系ソ連人、その他の少数民族(ナナイ人、エヴェンキ人等)から行われた。旅団隊員の大部分は中国人で、朝鮮人は10%に過ぎなかった。その後、後続してソ連領内に入った部隊も合流し、第88旅団の兵員数は、1,500人を超えた。

聯軍から来た多くの者は、ソ連の軍事学校の促成指揮課程か、管区少尉課程を受け、赤軍の階級を授与された(旅団長周保中は中佐、金日成は大尉)。通常、旅団の指揮官職には中国人が、副指揮官職には赤軍の将校が任命された。兵員は、赤軍の軍服を身に着けた。

1944年4月現在の編制。

旅団本部 - 旅団長:周保中中佐、参謀長:V.サマルチェンコ少佐

政治科 - 政治委員:V.セレギン少佐

防諜科 - スメルシ

第1独立狙撃大隊 - 大隊長:金日成大尉

第2独立狙撃大隊 - 大隊長:王效明大尉

第3独立狙撃大隊 - 大隊長:王明貴大尉

第4独立狙撃大隊 - 大隊長:姜健大尉

自動小銃大隊

無線大隊

独立迫撃砲中隊

独立工兵中隊

独立対戦車銃(PTR)中隊

独立経済中隊

独立機関銃小隊

軍事通訳課程特殊分隊

各独立狙撃大隊は3個中隊から成り、各中隊は3個小隊から成った。

装備(1942年9月~1943年7月現在)は、小銃x4,312挺、自動小銃x370挺、重機関銃x48挺、軽機関銃x63挺、火砲x21門、対戦車銃x16挺、自動車x23両。

第88旅団の兵士は、満州・朝鮮半島地域において偵察・破壊工作活動に従事した。その詳細は不明だが、旅団長の周保中は、1940年~1943年の間に計89人の減員(損害)があったことを報告している。その内訳は以下の通り。

第2極東戦線の諜報業務に派遣 - 9人

第1極東戦線の諜報業務に派遣 - 26人

未帰還 - 24人

スメルシに引渡し - 6人

傷病のため後送 - 15人

死亡 - 2人

旅団復帰 - 7人

1945年7月、ソ連対日参戦に備えて、旅団から無線機を装備した100人を投入する戦闘行動計画が立案された。しかしながら、ソ連軍の急速な進撃と日本の降伏のため、この計画は実行されなかった。かくして、第88旅団、その大隊長である金日成が朝鮮半島の解放に参加する機会は訪れなかった。

1945年8月29日、第2極東戦線司令官マクシム・プルカエフ上級大将の命令第010号/nに従い、「日本の侵略者との戦いの前線における戦闘指揮任務の模範的遂行と、この際に発揮された勇敢さと勇気」に対して、金日成に赤旗勲章が授与された。同命令により、第88旅団の将兵216人に、各種勲章とメダルが授与された(9月10日に更に58人追加)。

第88旅団は、1945年10月12日付極東軍管区司令官令第042号により解散された.]

 

김일성은 88여단 창설로 1942년 7월에 남야영에서 뱌츠코예 마을로 이주하여[3] 대위 계급으로 1대대 대대장(營長)이 되어 8.15 해방 때까지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4]

이곳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약 60여 명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을 비롯한 4인이 중학교 중퇴이다. 이들은 88여단에서 1940년경부터 해방까지 약 5년간 복무했으며, 소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북한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이들 중 중등교육 수준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대위 김일성, 상조 임춘추,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의 5인이다. 이 외의 55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

 

조선인 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은 다음과 같다

(1)김일성(1912년생, 평안남도 평양)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사령관한국전쟁 당시 북한 수상 겸 군사위원회 위원장, 인민군 총사령관

(2)최용건(1900년생, 평안북도 태천군)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부참모장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정치위원

한국전쟁 당시 군사위원회 위원, 민족보위성상

(3)김책(1903년생, 함경북도 학성군)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대위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단원

한국전쟁 당시 군사위원회 위원, 부수상, 전선총사령관[한국전쟁 당시 가스중독으로 평양 사망]

(4)강건(1918년생, 경상북도 상주)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단원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총참모장[한국전쟁 당시 경북 안동에서 지뢰 폭발 사고로 전사]

(5)김일[1910년생,본명 박덕산(朴德山)]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단원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문화부 사령관, 전선사령부 군사위원

1972년12월에 정무원 총리 겸 중앙인민위원회 위원

(6)최광 (1918년생,라선시)

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조선공작단 단원

1950년 6월 인민군 제13사단장

1995년 10월 8일, 인민무력부장과 인민군 원수 칭호

(7)임춘추(1912년생, 만지린성)

문인, 작가출신

88독립 저격여단 상조

1983년 1월 7일 국가 부주석

(8)안길(1907년생, 함경북도 경원군)

88독립 저격여단 대위

1947년 12월 13일 사망

(9)서철(1907년생, 함경북도 온성군)

88독립 저격여단 중위

1947년 9월에 대남공작 및 게릴라 양성소로 세워진 강동정치학원의 군사부원장

1977년 인민군 총정치국장

(10)김광협(1915년생, 함경북도 회령)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한국 전쟁 당시 동부전선 2군단장

 

남침은 노동당(공산당과 신민당, 인민당 합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신민당 김두봉 계열이나 민주당 최용건계열, 근로 인민당 홍명희 계열 등은 남침을 반대했다가 찬성한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부대) 등이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연단(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전선사령관 김책[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총참모장 강건[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조선의용대 중국 팔로군 출신]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소련군 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을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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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의용군(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은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를 개편한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이다.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華北支隊)를 개편한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의 한커우[漢口]에서 결성한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金元鳳)]·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金星淑)]·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柳子明)]·조선혁명청년연맹[최창익(崔昌益)]등 중국본토에서 활약하던 좌파 4당의 연합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군사조직이다

(1)연원 및 변천

조선의용대의 대장은 김원봉이었다. 처음에는 제1구대(朴孝三)와 제2구대(李益星)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1940년 5월 3개 지대로 확대, 개편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는 후난성[湖南省]과 후베이성[湖北省]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한편, 조선의용대 본부는 구이린[桂林]·치장[綦江]을 거쳐 충칭[重慶]으로 옮겨 1940년 11월 4일조선의용대의 화북 이동을 결정하였다. 조선의용대 본부는 충칭에 남고 모두 허난성[河南省]뤄양[洛陽]으로 집결해 1941년 3월황하의 맹진(孟津)나루를 건너 화북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그 해 7월 10일린현[林縣]에서 신악(申岳)·윤세주(尹世胄)·박효삼(朴孝三)·김창만(金昌滿) 등을 중심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하였다. 지대장에 박효삼, 제1대장에 이익성, 제2대장에 김세광(金世光), 제3대장에 왕자인(王子仁)이 임명되었다. 그 뒤 화북지대는 타이항산[太行山]일대에서후자좡[胡家庄]전투(1941.12.12.)·싱타이[邢台]전투(1941.12.26.)·편성(偏城)전투(1942.5.28.)를 치렀다. 편성전투 무렵인 1942년 5월충칭에 있던 조선의용대 본부가 임시정부의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하자 화북지대는 본부없는 지대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42년 7월 10일허베이성(河北省)타이항산 끝자락에 자리한 셰현(涉縣)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제2차 대회가 개최되었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국민혁명군 제8로군에 있던 무정(武亭)을 사령관으로 맞았다. 1942년 7월 10일 때마침 충칭에 있던 김두봉(金枓奉)이 옌안[延安]을 거쳐 타이항산으로 왔으므로 그를 맞아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조선의용군은 그의 당군이 되었다.

1943년 6월 일본군의 침공을 받아 제8로군과 함께 이른바 ‘반소탕전’을 전개하며 타이항산 속 곳곳에서 항전하며 용명을 떨쳤다.

그때 중국공산당에서 조선의용군의 옌안 이동을 결정하였다. 많지도 않은 인력을 타이항산전투에서 소모하기 보다는 전쟁 후에 조선 통치의 요인으로 보호하는 것이 중국공산당에 유익하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 같다. 조선의용군은 1943년 12월부터 1944년 3월까지 옌안 이동을 완료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옌안 교외의 뤄자핑[羅家坪] 마을에 주둔하였다. 조선의용군 사령관은 무정이었지만 그는 제8로군의 포병사령부의 책임을 맡아 있었기 때문에, 뤄자핑에 있는 조선항일군정학교가 사령부의 구실을 하였다. 군정학교는 김두봉이 교장이었고 부교장은 박일우(朴一禹), 학도대장은 박효삼이었다. 그 밑에 4개 구대가 있었다.

조선의용군은 뤄자핑에 있는 병력 외에 산둥성(山東省)에 이익성, 산시성(山西省)에 김세광, 동북(만주)지방에 이상조(李相朝)가 이끄는 선견대(先遣隊)가 별도로 있었다. 그들은 전선에서 일본군에 종군한 조선인 병사들을 초모해 조선의용군의 병력을 증강하며 정보수집활동을 하였다.

조선의용군의 병력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병력 150명 정도 외에 제8로군에 종군한 10명 내외, 1940년 최창익·허정숙(許貞淑)과 함께 조선의용대가 구이린에 있을 때 미리 온 18명, 그리고 김태준(金台俊)·김사량(金史良)처럼 망명해온 인사, 그리고 각처에서 새로 초모한 인원을 300명 정도로 보면 모두 합쳐 약 500명을 헤아린다

(2)기능과 역할

조선의용대의 활동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전지공작이었다. 전지공작은 일본군

점령지구에 잠입하거나 전선에 접근해 활동하는 초모활동·선전활동·정보활동 등을 말한다. 옌안에 있을 때는 전방에 파견된 선견대가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둘째는 교육활동이었다. 교육은 군사교육과 사상교육으로 나뉜다. 뤄자핑에 있던 조선항일군정학교가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셋째는 생산활동이었다. 제8로군 지역은 토지가 척박해 생활물자가 궁핍했으므로 ‘자력동수 풍의족식(自力動手 豊衣足食)’이라는 모택동(毛澤東)의 구호 아래 군인들이 밭을 일구어 농산물을 자급 자족하였다. 조선의용군도 그에 발맞추어 밭을 갈아 일을 하였다.

옌안지방의 주민은 야오둥[窯洞]이라는 토굴 속에서 생활하는데, 뤄자핑에 가면 지금도 조선의용군이 살던 굴집이 남아 있고 군정학교의 옛터와 의용군이 일군 밭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제8로군의 동북(東北) 정진군이 편성되어 만주로 갈 때 그 해 9월 15일 함께 옌안을 떠났다.

그 뒤 일부는 북한으로 들어 가다가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당하였다. 북한으로 들어간 조선독립동맹은 김두봉·한빈(韓斌) 등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해 활동하였다. 이들이 북한정계의 연안파라는 정치그룹이다. 그들은 김창만·허정숙 등 몇명 외는 모두 숙청당하였다.

만주에 남아 있던 병력은 그 곳에서 동포들을 모병해 부대를 증강하고 중국의 공산혁명전쟁에 참가했고 1950년 6·25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중국 산시성과 옌안(延安, 연안), 타이항산

 

                                                                       김두봉선생등 조선의용군이 머물렀던 자리(중국 연안 근교 모습 사진)

1942년 7월 10일 김두봉은 사회주의자로 국민당 지원을 받고 활동하는 김원봉 조선의용대(의열단)에서 탈퇴하여 중국 공산당 모택동부대 연안으로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 행군과 도착하여 김무정(중국 공산당 당군 팔로군 포병지휘관. 임표, 팽덕회 지원으로 화북조선쳥년회 조직 ), 최창익등과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했다

이때 김두봉은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최고책임자와 통수권자로서 독립동맹은 정치단체로, 의용군은 군사단체로 조직했다.

김두봉을 보고 신민주주의(인민 민주주의) 혁명 노선 모택동 부대라고 지칭했다

독립동맹에는 김두봉(주석), 최창익(부주석), 김무정, 허정숙등이 참여했다

무장군 조선의용군 총사령관에는 김무정, 부사령관 박효삼등이었다

 

"나가자 동무야 함께 뭉치여

원수를 소탕하러 나가자

총칼을 메고 혈전(血戰)의 길로

다 앞으로 동무들야

혁명의 기(旗,깃발)는 우리 앞에 날린다

(후렴)앞으로 동무들아

무거운 쇠줄을 둘러 메치고

뼈속에 사무친 원을 풀자

삼천만 대중(對衆)아 모두 다 나가자

승리는 우리를 재촉(催促)한다[의용군 소탕(掃蕩)의 노래]"

*소탕의 노래는 이국 땅에서 일제를 소탕하고 독립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짐하는 것이다

 

                                                                                                   조선의용군 모습

조선의용군 영웅적인 투쟁과 희생을 보고 중국 공산당 당군 팔로군 총사령관 주덕은 이렇게 추모했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전투정신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중.조 인민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치하할 정도였다

 

23.1944년 10개의 독립동맹 분맹과 의용군 지역지대를 설치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김두봉은 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중국 공산당과도 연계, 공산당의 군대인 팔로군과 연대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44년 연안(延安) 한인촌의 조선청년학교 교장이 되었고, 1945년 2월 김두봉은 학교를 군관양성소로 개조, 조선혁명군정학교로 고치고 다시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김두봉은 주은래와 친했다

 

["우리의 영도자 김두봉주석 만세"

동무들! 오늘은 기쁨의 날임에 틀림 없습니다. 삼십육년 동안 우리 동포들의 피와 땀을 아서 먹든 왜적이 넘어졌다고 합니다. 이들로 말미암아 조선의 아들 딸은 피눈물을 머금고 이역에서 헤메이게까지 되었든 것입니다.

동무들! 오늘 같은 기쁜 소식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온몸 온정신으로 이것을 마지하지 못하는 마음이 한편에 있습니다. 이 마음은 아마도 우리들을 그렇게 착취하고 압박하고 우리 동지들을 학살한 우리들의 원수를 우리 손으로 무찔으지 못하고 외국의 힘을 빌어 타도 되었다는 것, 우리들이 가진 힘을 다하여 배려온 총과 칼로써 최후의 일전을 할 기회를 노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아마도 우리들이 가지는 바 섭섭함일 겝니다.

그러나 동무들!

싸움이 이제부터입니다. 그 싸움이 비록 총과 칼로써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조선의 참된 행복을 위한 지리하고도 힘찬 싸움이 시작됩니다

밖으로는 새로운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싸움, 안으로는 인민의 이익을 위한 싸움.

왜적이 넘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느낀 감회와 앞으로 싸워야 할 내 자신의 각오와 말을 여러 동지들께 몇 마듸 였주는 바입니다.

 

"우리의 지도자 주석 동지의  옳은 영도를 힘차게 접수하자!"

"접수하자!"

"최고 지도자 주석 동지 만세!"

"만세!"

 

동무들 우리 의용군의 손으로 왜군을 쳐부수지 못한 것은 분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무기 없는 싸움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 조국이 왜놈 손에서 해방 되었다. 이째뜬 해방일세 분명하다.

(연안에서 김두봉 조선의용군 최고지도자의 연설문)]"

 

 

"중국의 광할한 대지 우에

조선의 젊은이 행진하네

발을 마처 나가자 다 앞으로

지리한 어두운 밤이 지나고

빛나는 새 아침이 닥처오네

우렁찬 혁명의 함성 속에

의용군 기빨이 휘날린다

나가자 피 끓는 동무야

뚫어라 원수의 철조망

양자와 황하를 뛰여 넘고

피무든 만주벌 결전에

원수를 동해로 내여 몰자

전진 전진

광명한 저 압길로[조선의용군 행진곡]"

 

"조선의 완전 독립이 없이 중국의 독립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의 동지들의 목적달성은 우리보다 앞설 것이다 최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건투해 주기를 바란다[연안에서 중국 공산당 주최로 환송회때 모택동前주석의 송별사]"

 

1945년 11월 7일 러시아혁명 기념 봉천(奉天) 시가행진 때 소련의 적군(赤軍, 붉은 군대-김일성등  조선인 참여), 의용군(광복군=조선의용군- 김두봉,최창익, 김무정등), 중국군(팔로군-주덕,임표, 팽덕회등 중국 공산당군), 몽고군 그리고 일반 시민이 참여했다 의용군은 중국 만주지역 조선족 주력군으로 1만명의 완전무장으로 참여했다

소련의 적군(赤軍, 붉은 군대) 도움으로 몽고,극동(러시아 극동자치정부)과 사할린(러시아 사할린 자치정부), 만주(만주국과 만주군, 동북3성 임표 팔로군), 이북(관동군사령부, 북한-대소참전과 소련군 귀순)등을 점령했다

영국군과 미국군 도움으로 인도군(영국군)과 중국 국민당군(영.미군) 그리고 광복군(중국군-김구, 김규식, 이범석등) 등이 중국 남방(중국군-장개석부대)과 동남아(인도군과 중국군),일본(일본군사령부, 친미 일본인과 미국군-항복과 미국군 귀순)과 남한(조선군사령부, 이승만등 미국군-이승만등 조선인 참여.대미참전과 미국군 귀순)지역을 점령했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조선의용군 출신은 다음과 같다

(1)김무정(본명:김병희.1904년생,함경북도 경성군)

조선의용군 총사령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포병사령관, 인민군 제2군단장, 평양지구방위사령관

1952년 10월 병사

(2)박일우(1903년생,함경북도 회령 출생)

조선의용군 부사령관

한국전쟁 당시 군사위원회위원, 전선사령부 부사령관

1955년 숙청

(3)김웅(1912년생,경상북도 김천)

조선의용군 제1지대(남만지대) 지대장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제1군단 사령관

1978년 11월 남예멘 대사

(4)방호산(1916년생,함경북도)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 정치위원

1949년 7월 조선인들이 절대 다수인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단 사단장으로로서 부대를 이끌고 입북하였다. 동 부대를 제6사단으로 개편하고, 초대 사단장이 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제6사단을 이끌고 호남 일대와 진주, 마산까지 진출하는 등 전공으로 제6사단은 근위사단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1950년 10월에는 제5군단장에 임명되어 동부전선 전투를 지휘하였다

1959년 연안계가 기도한 반당·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

(5)이상조(1915년생,경상남도 동래군)

동북(만주) 지방 조선의용군 선견대(先遣隊)

1945년에 입북하여 북로당 인민군에 들어갔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 중장의 계급으로 정찰국장, 부참모총장을 역임했고, 1953년에는 휴전협상에 김일성 얼굴마담역으로 나왔다. 이때, UN군측 대표로 나왔던 백선엽 장군에게 "미제의 개"라고 지껄이며, 근엄함을 보여주기 위해 얼굴에 똥파리가 한시간 넘게 앉아 있어도 험악한 표정을 유지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56년 김일성의 연안파 숙청 때 소련에 망명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한국에 와서 반김일성, 6.25남침 주장등을 적극 증언하였다

 

 

4.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

                                                                                  한국 전쟁 전 형성된 유격지구

 

                                                                            남부군 결성 전후 이현상 부대의 이동경로

조선인민유격대(朝鮮人民遊擊隊)는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대한민국 영역에서 유격전을 수행한 북한정부의 파르티잔 부대이다. 흔히 빨치산이라고 부르며, 남부군, 공비, 공산 게릴라라는 표현도 사용되었다

이현상은 1949년부터 지리산지구에서 인민유격대 제2병단을 편성하여 활동하였으며, 6.25전쟁시에는 광범한 지역에 걸쳐 협동작전을 벌였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지리산지구로 잠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50년 11월에는 후평리에서 남반부인민유격대로 재편한 다음 남하하였다. 같은 해 12월 제천지구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개편한 후 덕유산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현상은 남부군단 총사령관의 직함으로 1951년 7월 중순부터 남한일대의 유격부대들을 총지휘하였다.
이들은 주로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한국군 백야전전투사령부 등의 토벌작전에 의해 대부분 토벌되었다

(1)설립목적

이현상은 1950년 11월 중순 유격대를 지휘하여 강원 후평리로 후퇴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이승엽 등과 남한지역의 당사업과 유격투쟁에 관한 문제를 토의했다. 이승엽은 6개 도당(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에 대한 지도권한을 여운철에게 위임했고 이현상에게는 유격대의 통일적 지도를 맡겼다. 이현상은 후평리에 집결된 유격대로 남반부인민유격대를 조직하여 다시 지리산을 향했다. 이때 편성된 인민유격대는 유리사단(4백명), 혁명지대(60명), 인민여단(1백50명)과 사령부 및 기타
직속부대(1백50명) 등 약 8백 명의 병력이었다

(2)연원 및 변천

남반부인민유격대는 중공군 참전으로 1950년 12월 태백산맥을 타고 침투했다. 12월말에는 충북 단양을 거쳐 문경경찰서를 습격한 후 그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현상은 제천지구로 이동하여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다시 개편했다. 이 남부군단은 1951년 2월초에 속리산을 거쳐 덕유산으로 들어갔다

덕유산에 들어간 남부군단 총사령관 이현상은 여운철과 함께 1951년 7월 중순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의 6개 도당회의를 열기도 했다. 이후 남한일대의 유격투쟁은 이현상이 총지휘하게 되었다. 남부군단 예하에는 제1전구(전북의 북부지구와 충남)와 제2전구(전북의 남부지구)가 있었다. 제1전구에는 충남 빨치산 5백 70명을 68사단으로, 전북북부지방 빨치산 7백 명을 45사단으로 각각 개편했다. 제2전구는 전북 남부에 있는 각 유격대를 46사단, 53사단으로 개편했다. 직속부대로는 81사단, 92사단, 602사단이 있었다.
이들은 지리산에도 병기수리소를 설치하여 하루에 1천발의 탄환을 만들었으며 병원시설도 있을 만큼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951년 7월부터 노동당은 남한지역에서 제2전선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각 지대유격대 체제로부터 당 사업을 주로 하는 지구당 체제로 개편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3)기능과 역할

남부군단 예하의 지리산 빨치산은 남부군의 직속부대인 제81, 제92사단과 경남도당 사단인 제57사단, 그리고 전북도당 사단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여순 10.19사건 당시 반란군 출신 중 생존해 있던 인원과 북한군 전투부대의 낙오병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비교적 전투경험이 많은 병력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과 덕유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한국군과 유엔군의 보급로 차단, 차량약탈, 지서습격, 차량기습, 통신망 절단, 살인, 방화 등을 자행하였으며, 이들의 행동은 전후방 한국군 전투력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민심을 크게 동요시켰다.

(4)현황

한국군은 남부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2개 사단 규모의 토벌부대를 편성하여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군단급 ‘백야전전투사령부’ 창설을 명령하였다. 토벌작전이 개시되자, 기동타격부대는 지리산을 남북으로 양분하여 북쪽은 제8사단이, 남쪽은 수도사단이 담당하여 공비 주력을 타격하였고 저지부대는 빨치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백야사 예하 부대들은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일대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대부분 토벌하였고, 핵심지도자 대부분을 사살하거나 포획하였다. 백야사의
전과는 작전기간 동안 사살 포로 투항 등을 포함하여 1만 6천여 명에 달했고 노획무기도 3천여 정을 상회하였다

(5)의의와 평가

6.25전쟁 기간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단은 지리산, 덕유산 일대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전체 전선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과 국민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한국군이 빨치산 토벌작전을 위해 군단급 규모의 부대를 전선에서 이동시키게 하여 한국군의 전투력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남부군  주도세력은 일제시대부터 국내에서  마스-레닌주의(공산주의) 활동을 해온 조선공산당 (박헌영)계열로 알려지고 있다 남부군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각 지역에서 폭동과 반정부 투쟁을 주도했고 인민전쟁론을 주도했다 인민전쟁론은 주민들의 민심과 함께 지하정부(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인민군이 남침을 할때 무장투쟁으로 각 지역을 점령하는 전쟁이론이다

일부에서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부군 주도세력을 북한 인민군으로 확인하고 있지만 본래 남부군은 조선공산당 주축 남로당의 지하정부(인민위원회)이다 지하정부는 한국전쟁 이전에는 폭동과 반정부 투쟁 그리고 남침이후에는 합법화 각 지역 인민위원회 구성,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남부군으로 빨치산 투쟁과 월북으로 어어졌다

박헌영의 한국전쟁 패전 책임과 미국간첩으로 처형됨으로서 남로당계열 내부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와해 되었다

남로당 이후 당(黨) 수준 조직으로는 1960년대 박정희 군부의 5.16 쿠데타이후 김일성주의 노선 통일혁명당이 등장했고 1990년대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민혁당)가 등장했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남부군(조선 공산당) 출신은 다음과 같다

ㄱ.박헌영(1900년생, 충남 예산군)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총비서

한국전쟁 당시 군사위원회 위원, 인민군 총정치국장[육군 중장]

한국전쟁 패전 책임과 미국 간첩 총살형(1958년)

ㄴ.이승엽(1905년생, 경기도 부평군)

조선공산당 활동과 남조선노동당 경기도 책임자

한국전쟁 당시 서울시장, 인민유격대 총사령관(강동정치학원 운영. 강동정치학원은 유격전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관이다)

반당종파분자와 미국 간첩 총살형(1954년)

ㄷ.배철(1912년생,경기도 개성)

남로당 경상북도 위원장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유격지도처장

 미국 간첩 및 정부 전복 음모 혐의로 재산 몰수형과 함께 사형 선고

ㄹ.방순표(1906년생, 경상남도 거제군)

남로당 활동, 대구 10월 1일 사건 가담

한국전쟁 당시 전라북도 도당 위원장(전북 도당 유격대장)

1954년에 덕유산에서 토벌대와 전투 중에 생포될 위기에 놓이자 자폭하여 사망했다

ㅁ.박영발(1913년생,경상북도 봉화군)

남로당 활동

한국전쟁 당시 노동당 전남도당위원장(전남 유격대장)

1953년 5월 사망

ㅂ.이현상(1905년생, 충청남도 금산군)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활동

한국전쟁 당시 강동정치학원 유격대 출신으로 남부군 사령관

남부군은 1951년 5월 26일 충북도청 소재지 청주를 기습하여 여러 관공서를 불태우고 청주형무소의 좌익수 백사십이명을 석방시켰다. 6월 초, 민주지산에 자리를 잡고 인근 도시와 경부선 군용열차를 습격하였다. 6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에서 남한 6개 도당 위원장을 소집해 남부군 결성에 합의하고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8월 14일 참모장 박종하가 가회전투도중 사망하자 이현상의 남부군은 지리산으로 다시 들어갔다. 11월 말부터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의 토벌 작전이 거세지면서, '조선인민유격대 독립4지대'로 개편된 이현상 부대는 어려운 처지에 몰렸다.

1952년 1월 18일 군경토벌대에 쫓기던 지리산 일대 유격대와 좌익피난민 등 이천여 명이 대성리 골짜기에서 포위되었다. 미군이 네이팜탄 등을 투하하여 천 명 이상 죽거나 체포되었고, 독립4지대도 한 달 만에 4백명이던 대원이 백오십 명으로 줄어들었다.

1953년에는 대한민국 영역에 남은 유격대의 지위에 대한 언급 없이 한국 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1953년 7월 27일에 6.25 동란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 체결 1주일 후인 8월 3일에는 평양에서 박헌영이 정식으로 구속되고 리승엽 등은 처형되었다. 남로당 지휘 계통에 있던 이현상은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경상남도 서부 지역을 책임지는 제5지구당 위원장직에서 물러나 평당원으로 돌아갔다.

이현상은 모든 직책을 잃고 하산을 계획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토벌대가 하동군 빗점골에 숨어 있던 이현상을 추적하여 대략의 위치를 파악했다. 9월 17일에 토벌대는 빗점골을 포위했고, 이튿날인 9월 18일 오전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이현상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당시에도 이현상을 사살한 공을 놓고 차일혁이 이끄는 경찰 수색대와 김종원의 국군 부대가 다툼을 벌였고, 이태 등은 북한의 지시로 암살되었다는 소문을 기록한 바도 있어 정확한 사망 경위는 알 수 없다. 사망 날짜는 국군이 시신 발견 전날인 9월 17일로 추정했다.

이현상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서울로 이송되었다. 동향 출신의 친구인 유진산 임영신 등 지인들이 시신을 찾아와 확인했다. 빨치산의 최후를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창경원과 도로변에서 바지만 입힌 채 유품과 더불어 20여일동안 전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현상의 가족들은 대부분 월북한데다, 남은 친척들은 한국 전쟁 중 고초를 당해 시신의 인수를 거부했다. 결국 토벌군 측의 차일혁이 섬진강에서 화장해 장례를 치러주었다.

 

ㅅ.김선우

전남 보성군 출생인 김선우는 일제 강점기 공무원으로 일제에 부역하다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직책상 조선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오갔으나 군사 조직에서는 전남 지역 유격대 사령관으로서 유격전을 전담하였다. 이는 전남도당 위원장인 박영발이 과거에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을 때 고문을 받아 다리를 절었기 때문이다. 박영발의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움직임이 민첩하지 못한 신체적인 한계 때문에 군사 작전을 김선우가 주로 맡게 되었다. 김선우는 구빨치 출신으로서 풍부한 유격전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이현상과 박영발의 연이은 죽음 이후 조선인민유격대의 마지막 잔존 세력을 이끌던 중, 백운산 아지트에서 토벌대의 포위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김선우가 사망한 1954년 4월 5일을 조선인민유격대가 붕괴한 날로 보기도 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다.

ㅇ.김달삼

대구 출신인 김달삼은 일제 강점기부터 사회주의 운동가로 유명했던 강문석의 사위로, 제주도에서 교사로 재직한 지식인이었다.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 책임자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되어,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 총선으로 단독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며 봉기한 제주 4·3 사건을 총지휘했다. 태백산에서 유격대를 이끌다가 한국 전쟁 발발 전에 사살되었다고 알려졌다.

ㅈ.남도부

남도부의 본명은 하준수이며, 1921년에 경남 함양군의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주오 대학에 재학 중 태평양 전쟁 학병 징집을 거부하며 지리산에 은거며 보광당을 결성하였으며 해방후 여운형의 건국준비 위원회에 가담하였다. 보광당은 조선인민유격대로 이어졌고 남도부는 이현상과 쌍벽을 이룬 빨치산 지도자가 되었다. 1954년 대구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다.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의 주인공이다.

ㅊ.김지회·조경순 부부

김지회는 여수·순천 사건 당시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서 반란을 주도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김지회 부대로 불리는 유격 부대를 이끌었다. 제1공화국 정부 수립 2개월 만에 발생한 이 사건은 전남 동부 지역을 순식간에 장악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당황하게 했고, 주변 지형에 익숙한 향토 게릴라가 정규군을 괴롭히는 전형적인 국면으로 들어섰다. 김지회는 홍순석과 함께 지리산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지휘하던 중, 1949년 4월 뱀사골 전투 후 사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간호사 출신인 김지회의 부인 조경순은 여성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그해 9월 사형에 처해졌다.

ㅋ.리인모

1917년 함경북도 풍산군에서 태어난 리인모는 조선인민군 종군기자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 중 낙오하여 지리산에서 조선인민유격대에 합류하면서 신빨치가 되었다가 1952년 체포되었다. 이후 총 34년 동안 복역하면서 전향하지 않고 비전향 장기수로 남았다. 리인모는 인민군 출신이며 전쟁 중 붙잡혔다는 점 때문에 전쟁 포로로 대우하여 북송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장기 방북 형식을 빌려 송환했다. 북한은 리인모를 “신념과 의지의 화신”이며 살아남아 끝까지 투쟁한 유격대원의 모범으로 높이 칭송하고 있다.

 

                                                                                           지리산의 주요 아지트 위치

 

                                                                                                     지리산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민주화 정부-"
*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사기업(私企業)[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사기업은 산업사회와 고도소비사회 기반이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국민의(民有), 국민에 의한(民治), 국민을 위한(民享) 정부
-Guide Ear[머리소리함] 許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