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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밀약 中 통보 본문
얄타회담(크림회담)
1945년 6월 15일 미국 주중 대사 헐리가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얄타 협정에서 중국과 관련하여 맺은 비밀협약 내용을 국민정부에 통보하고 소련과 협상을 벌일 것을 촉구했다.
얄타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4일∼11일 미국의 F.D. 루스벨트, 영국의 W. 처칠, 소련의 I. 스탈린 등 3개국 수뇌가 크림반도 얄타에서 전후처리의 기본 방침에 대하여 합의한 회담으로 정식명칭은 크림 회담이다. 이 회담에서는 한반도의 분할 점령 이 처음 거론되었다.
얄타비밀협정의 중국 관련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련은 독일항복 2∼3개월 뒤 다음의 조건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에 참가한다.
(1) 외몽골의 현상유지 ;
(2) 사할린 및 쿠릴열도의 소련귀속;
(3) 다롄(大連)항의 국제화와 소련의 우선권 승인;
(4) 뤼순(旅順)항을 소련군항으로 하는 조차권(租借權) 승인;
(5) 남만주철도, 동중국 철도의 중소합판(中蘇合辦)에 의한 운영;
(6) 소련은 장제스(蔣介石) 정부를 유일한 중국정부로 인정한다.
중국의 국민정부는 이해 8월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 후 얄타 밀약을 수용하는 협정을 소련과 체결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화 후 소련을 방문한 마오쩌둥(毛澤東)이 스탈린과 담판을 통해 1950년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소련의 제정 러시아 특권 상속은 5년 만에 폐기됐다.
대만으로 철수한 장제스의국민정부는 1953년 초에서야 굴욕적인 중소 동맹 조약을 폐기 선언햇다. 국민정부가 이처럼 폐기를늦춘 것은 대륙 진공의 기회가 다시 찾아 올 때 소련의 중립을확보하기 위해서엿다. 그러나 한국전이 종결될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마침내 '와신상담'의 자세로 유지하고 있던 '굴욕'을 내던진 것이다.
-얄타 회담(영어: Yalta Conference)은 1945년 2월 4일부터 2월 11일까지 소련 흑해 연안에 있는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수뇌자들이 모여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의견을 나눈 회담이다.
내용[편집]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무렵 주요 추축국 중 하나인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을 하고 나치 독일이 패전할 기미를 보이자 연합국의 지도자들이 나치 독일을 패배시키고 그 후를 의논하기 위하여 크림 반도에 위치한 얄타에 모여서 회담을 하였다. 회담의 수뇌는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소비에트 연방의 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이다.
이 회담에서 나치 독일을 소련·미국·프랑스·영국 4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웠으며, 연합국은 독일인에 대하여 최저 생계를 마련해 주는 것 이외에는 일체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것에 합의하였다.
또 나치 독일의 군수산업을 폐쇄하거나 몰수한다고 선언하였으며, 전쟁의 주요 전범들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하였고, 전후 배상금에 대한 문제는 별도의 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임하기로 하였다.
폴란드에 대해서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서 규정한 폴란드 동부 영토 대부분을 소련에 병합하기로 합의하였고, 그 대신 폴란드에게는 동독의 일부 지역을 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각각 폴란드 동부 영토 일부를 얻게 되었다.
얄타 회담에 모인 수뇌들 (좌로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루스벨트미국 댗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와 소련의 스탈린 원수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소련 크리미아 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갖고 2차대전 전쟁 완수와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1945).
이 협정은 둘로 구성됐다.
1. ‘크리미아 회의의 의사(議事)에 관한 의정서’는 세계기구(국제연합) 창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의 개최, 대서양헌장 제원칙의 재확인,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소련 4개국에 의한 독일의 분할 점령, 배상 위원회의 설치, 전쟁범죄인의 조사, 폴란드ㆍ유고슬라비아의 처리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2. ‘소련의 대일(對日) 참전에 관한 합의’에서는 소련은 몽골인민 공화국의 현상유지, 남사할린의 반환, 다롄(大連)항의 국제화와 소련에 의한 우선 이용, 뤄순(旅順) 군항(軍港)의 조차(租借), 남만주 철도의 중소 공동경영, 만주에서의 중국의 주권 유지, 사할린(樺太), 치시마열도(千島列島)의 할양 등을 대가로 독일항복 후 2~3개월 이내에 대일 참전할 것, 중국국민 정부와 우호 동맹조약을 체결할 것 등이 약속되었다.
이 밖에 미국과 소련 간에 한반도 군사 분할에 대한 밀약이 있었다. 일본 항복 후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한반도를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양군의 경계선으로 38선이 설정됐으며 이는 2차 대전 종전 뒤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국의 남북 분단을초래하는결과를 가져왔다
중소우호조약
1950년 2월 14일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이 모스크바에서 체결되었다.
1949년 10월 1일 베이징(北京)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마오쩌둥(毛澤東)은 같은 해 12월 소련과 새로운 조약 체결을 위해 소련을 방문했다.
중국과 소련 간에는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기 하루 전인 1945년 8월 14일 체결한 ‘중소우호동맹조약’이 있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대만으로 패퇴한 국민정부가 체결한 것이었다.
‘1945년 중소 우호 동맹조약’도 모스크바에서 체결됐다. 그것은 얄타 협정에 따라 중·소 양국이 대일(對日)전쟁에 승리할 때까지 상호원조, 단독 불휴전 및 불강화(不講和)를 약속하고 일본의 재침략 방지에 대한 보장 등을 다짐한 조약이었다.
조약은 중국과 소련간의 우호관계를 토대로 체결된 것이 아니라 미국 루스벨트, 영국 처칠 그리고 소련 스탈린이 얄타회담(1945. 2. 4. ~ 1945. 2. 11. )에서 합의한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가와 그 조건에 대해 중국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미국의 중재 아래 일본의 항복 전날에 정식조약으로 성립된 것이다.
이러한 비정상적 배경 하에서 체결한 이 조약을 통해 소련은 중국 동북(東北)지방, 즉 만주가 반소(反蘇) 기지화하는 것을 제약하는 일정한 법적 보장을 받았다.
이 같은 법적 보장은 마오의 눈으로 볼 때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유산을 승계한 것이기 때문에 마오는 대륙을 장악한 뒤 최우선 과제로 소련과의 새로운 조약 체결을 서둘렀던 것이다..
마오가 12월 모스크바에 도착했으나 소련이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협상은 해를 바꾼 1950년 1월 20일 시작됐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중국에서 날아와 협상에 참여했다)
중국공산당 기록에는 마오쩌둥이 1949년 말과 1950년 초에 소련을 방문했다고 밝히고 있어 마오가 소련이 회담에 응하지 않자 중국으로 되돌아 갔다가 다시 소련에 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스크바에 온 마오를 노골적으로 홀대하던 소련이 뒤늦게 1950년 1월 20일부터 회담 논의를 시작한 것은 그보다 8일 전인 1950년 1월 12일 미국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미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언급한 것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애치슨은 태평양에서 미국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즉 방위선 밖 한국과 대만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애치슨은 이 발언으로 6개월 뒤 일어난 한국전쟁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겨냥한 목표는 다른 데 있었다. 그 것은 ‘마오의 농민정권’을 유고화하자는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이 미국 대아시아 군사전략이던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재확인하면서도 섬인 대만을 방위선 밖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는 누가 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1949년 8월 5일 '중국백서(白鼠)'를 통해 국민정부의 국공내전 패배가 국민당과 국부군의 부패와 무능 때문이라고 규정한 미국 민주당 트루먼 행정부는 '애치슨 라인' 선포로 대만으로 쫓겨난 국민정부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중국 대륙의 새주인을 인정하고 악수를 먼저 공개적으로 내미는 것이었다.
이런 정세 하에서 체결되었기에 마오쩌둥을 카운터파트로 한 중소 상호원조 조약은 소련의 양보가 두드러진다.
조약은 전문(前文)과 6개조의 본 조약 및 2개의 부속협정·교환각서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련은 중국에서 특권을 포기하는 데 동의하고 부속협정에서 1952년 이전까지 창춘(長春) 철도의 일체 권리와 재산을 무상으로 중국에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또 뤼순(旅順)에 주둔하던 소련군이 철수하고 다롄(大連)항도 반환하기로 했다. 이런 특권은 바로 소련이 대일전 참전 대가로 미국의 적극적 지지 아래 국민정부로부터 얻어낸 것이었다.
뤼순과 다롄에서 1945년 이후 시설물의 건축 비용은 중국 정부가 상환하기로 했으나 소련은 연 1%의 싼 이자로 3억 달러 차관을 중국에 제공하기로 했다.
한편 본 조약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을 방지하여 동북아와 세계 평화를 공고히 하는데 협력하기로 하고 경제문화 상호 협력관계를 강화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소련은‘중국의 유고화'를 노리는 미국 전략을 분쇄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특권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이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조약 체결 후 중국의 티토화 전략을 주도하던 이른바 국무부 내 '스틸웰 그룹‘의 발언권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스틸웰 그룹‘은 2차대전 당시 중국 파견 사령관으로 중국 공산당에 호의적이라는 이유로 장제스(蔣介石)의 요청으로 1944년 파면당한 조셉 스틸웰 장군과 의견을 같이 하는 관리를 지칭한다.
그러나 여전히 ‘마오의 티토화’에 불안감을 느낀 스탈린은 한반도에 친소 통일정권을 수립, 중국을 견제하자는 전략적 고려에 따라 김일성의 대남 전면적 침공 계획을 승인, 6.25가 발발하게 됐다. 6.25의 발발로 미국의 ‘마오 티토화’ 전략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마오의 중국과 소련을 갈라서게 하기 위해 '애치슨 라인'이란 승부수를 던지자 '한국전 도발'이라는 역풍을 맞은 것이다.
스탈린의 속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미국은 중국과 소련이 북한을 앞세워 남침시킨 것은 궁극적으로 한반도를 발판으로 하여 일본 열도를 노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이 불과 반년 전 선포한 '애치슨 라인'너머로 전진 방어 조치를 취한 것은 이러한 상황 인식에서 비롯됐다.
1950년 4월 11일 발효된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은 유효기간을 30년으로 하였다. 체약국 중 한 나라가 조약 만료 1년 전까지 폐지를 제기하지 않으면 기한을 5년간 연장하기로 하였다.
조약 만료 1년 8일 전인 1979년 4월 3일 개최된 중국 5기 전인대 상무위원회 7차회의는 "국제정세의 중대한 변화에 따라 이 조약을 만기 이후 연장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고 이 조약의 폐기를 선언했다.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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