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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시찰단 옌안(延安, 연안) 방문 본문
중화민국 장개석전총통과 그의 부인 송미령 그리고 중국과 미국 연합군 미국 책임자 스틸웰 장군
1944년 7월 22일 미군 대령을 단장으로 한 미군 시찰단이 주중 미군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홍군의 최고 지도부가 위치한 옌안(延安)을 방문했다. 8월 7일에는 2차 시찰단이 비행기 편으로 옌안에 왔다.
이들의 시찰 목적은 전선 후방 지역에서 8로군(八路軍)과 신4군(新四軍)의 작전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적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젠잉(葉劍英)과 양상쿤(楊尙昆, 1907~1998, 1992년 한중수교 당시 국가 주석 역임)의 영접을 받은 이들은 마오쩌둥(毛澤東),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을 만났으며 펑더화이(彭德懷)와 천이(陳毅) 등으로부터 8로군과 신4군의 전투 활약상황을 브리핑 받았다 이들 시찰단은 옌안 외에 진찰기(晋察冀)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허베이성 일대), 진수(晋綏) 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네이멍구 일대) 등 홍군의 항일 근거지 등을 시찰했다.
이들 시찰단은 시찰을 마치고 미국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중국 공산당과 그 무장역량을 중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이들 미군 시찰단을 맞아 옌안에서 발행되던 해방일보(解放日報)는 ‘우방 미국 군사사절단 환영’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시찰단이 미국에게 중국공산당과 그들의 저항운동에 대한 호의적 평가를 제공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주중 미군 총사령부의 군사시찰단 파견은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움직임과 연계된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미국은 중국에서의 제2전선 역량 강화를 위해 모든 중국 군대의 통합을 희망했다.
헨리 월레스(Henry Wallace) 미국 부통령은 1944년 6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개선하여 항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7월 초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를 포함한 전(全) 중국군 지휘자로 스틸웰(Joseph Warren 장군을 제안했다.
이는 미국이 한국전 초기 한국군의 작전권을 요구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협정을 통해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렇게 절박한 상황은 아니어서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루스벨트의 이 제안은 필연적으로 공산당이 참여한 중국의 연합정부 창설 제안으로 이어졌다. 공산당은 이 일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미군 시찰단의 옌안 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루스벨트는 결국 장제스와 심한 불화를 보였던 스틸웰을 소환하고 웨드마이어(Wedmeyer)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또 공산당을 포함한 연합정부를 제안한 가우스(Gauss) 대사도 이해 11월 30일 스틸웰의 소환을 주장했던 패트릭 헐리(Patrick Hurley)로 교체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 시도가 좌절된 셈이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 전환은 유럽에서 처칠이 추구한 유고 정책 을 본 뜬 것이다. 유고에서는 나치 침공 후 왕정 세력의 게릴라와 티토가 이끄는 공산 세력 게릴라가 별도로 활동했는데 처칠은 티토의 게릴라가 적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데 더욱 효과적인 역할을 하자 그들이 공산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적극 지원햇다.
이 결과 2차 대전 기간 티토의 게릴라는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티토의 게릴라 세력은 종전 후 벌어진 유고 내전에서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왕정 세력을 격파하고 자체적으로 유고를 공산화하였다.
1940년 8월 20일부터 그해 12월 5일 까지 8로군 부총사령관 펑더화이가 지휘한 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미국에게 영국이 티토가 지휘하는 유고의 공산 게릴라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했던 것처럼 미국에게 마오쩌둥의 홍군의 전략적 가치를 괄목상대하게 만들엇다.
스틸웰 등 중국 주둔 미국 지휘부는 국민당 군대의 만연한 부패와 이에 따른 군사적 무능과비효율에 불만을 품고 처칠이 유고에서 취했던 것처럼 공산 게릴라 세력을 적극 지원, 대일본 제2전선을 구축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 민주당 행정부는 2차 대전 기간 중국의 유고화를 시도하지 못했으나 이러한 기조는 루스벨트 사후 트루먼 행정부에 이어져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는 것을 방치햇고 중국 공산화 이후에도 애치슨 라인 발표 등 중국 유고화를 부단히 추구했다. 이런 중국의 유고화 전략을 무산시킨 것은 한국전(6.25 사변) 발발이었으며 이 전략은 1971년 공화당 닉슨행정부의 키신저가 부활시킬 때까지 동면해야 했다.
중화민국 장개석전총통과 그의 부인 송미령 그리고 중국과 미국 연합군 미국 책임자 스틸웰 장군
조지프 스틸웰(Joseph Warren Stilwell, 1883년 3월 19일 ~ 1946년 10월 12일) 대장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역에서 중화민국 국군을 지도하여 일본군과 싸운 미국의 군인이다.
1.초기 경력
플로리다 태생으로,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사관학교에 입학하였고, 운동과 어학에 소질에 남달랐던 그는 이 시절에도 이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후 사관학교 교관을 거쳐 참모학교를 수료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프랑스 전선에 파견되어 베르됭 전투, 솜므 전투 등에서 장교로 활약하였고, 전투에서의 용맹으로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교관시절 엄격한 훈육방침으로 "식초같은 죠(vinegar Joe)"라는 별명을 얻었다.
2.제1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어에 유창했던 그는 틈틈이 중국어를 익혀 미국 육군내에서 중국 전문가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1919년에 중화민국으로 파견되었다가 소령으로 승진하여 조지아 주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중화민국으로 가 3년 동안 생활했다. 1940년에 조지 마셜에 의해 제7보병사단장으로 진급하여 1941년에는 제 3 군단장이 된다. 그는 당시 미국의 야전지휘관에서는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지휘관으로 간주되어 독일군에 대항하는 북아프리카에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중국어에 능한 중국 전문가였기 때문에 장제스 총통의 참모장으로 파견되었다.
3.제2차 세계대전
그는 중화민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 상주하면서, 일본군에 대항하는 중국-버마-인도 전역을 지휘하였다. 이는 맥아더나 아이젠하워와 비슷한 비중의 전역을 지휘한 것이었다. 그는 미군 지휘관으로서 영국과 중국측과의 마찰, 험난한 지형과 기후와 같은 악조건과 싸우면서 인도-버마-중국 전선을 지휘하였다. 그는 직접 인도 뉴델리를 방문해 미군, 영국군, 중국군, 프랑스군의 사령부를 세웠고 중국군 보병사단을 지휘하며, 미얀마 전선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43년에는 찰스 윈게이트, 윌리엄 슬림 장군과 함께 미얀마 전선을 탈환하면서 임팔, 코히마를 수복했고 프랭크 메릴 장군도 참여해 일본군 제18사단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으나 윈게이트 장군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중단되었다.
Gen. Frank Merrill (left) with Stilwell in Burma
4.죽음
1944년에는 대장으로 승진했으나, 곧 장제스와의 불화로 앨버트 웨더마이어 장군과 교체되었다. 이후 육군 지상군 사령관을 거쳐, 제 10 군을 인수받아 일본 오키나와에 상륙해 오키나와 주둔군 사령관으로 되었으나 미국으로 돌아와 위암으로 샌프란시스코 군병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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