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김일성 한국전 후 첫 방중 본문
1953년 11월 12일 북한의 김일성이 내각 수상과 원수(元帥)의 자격으로 북한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한국전 종전 3개월 16일 만의 일이다. 중국 공산 세력이 베이징(北京)에서 중화 인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때가 1949년 10월 1일이고 그 바로 다음해 6월25일부터 3년간 한국전이 진행 중이었으므로 공산 정권이 중국에서 수립된 뒤 김일성의 중국 방문은 이때가 처음으로 추정된다.
중국 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 소속 하급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일본군에 쫓겨 소련으로 들어간 이후부터 따지면 거의 10년 만의 중국 방문일 수도 있겠다.
한국전 와중에서 연안파의 김무정과 소련파의 허가이를 숙청하고 휴전 직후 남로당의 박헌영마저 제거, 최고 지도자의 위치를 확고히 한 그로서는 '금의환중(錦衣還中)'의 감회를 느꼈을 수 있었다.
기차 편으로 베이징에 온 김일성 일행을 영접하기 위해 중국 정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 국가계획위원회 주임 가오강(高崗), 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彭德懷)가 베이징 역에 나왔다.
김일성은 13일 인민대회당에서 마오쩌둥(毛澤東)과 회견하고 이날 저녁에는 저우언라이가 회인당(懷仁堂)에서 개최한 환영만찬에 참석했다.
이어 14일부터 22일까지 북한과 중국 정부간에 회담이 진행되었다. 중국 정부는 이 회담에서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12월 31일까지 제공되었거나 제공될 일체의 원조를 무상으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어 1954년부터 1957년까지 4년간 8조 위안을 경제부흥을 위해 북한정부에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중국의 이 같은 환대는 한국전을 겪으면서 소련 스탈린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반도에 친소 통일 정권을 세우려 한국전 도발을 승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파악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얼마 뒤 가오강이 숙청되는데 이는 동북지역, 즉 만주 지역이 친소 기지화하는 것을 막으려는 얘방 사전 조치였다.
김일성 모택동 1951. 6
1950년 12월 북중(朝中)연합군 창설과 중국 인민해방군 한국전쟁 개입[김일성과 팽덕회 모습]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베트남 전쟁 (0) | 2017.01.08 |
---|---|
1962년 11월 21일 中 인도서 철군 (0) | 2016.12.11 |
우리나라 최초의 화학박사, 이태규 (0) | 2016.11.18 |
박정희 암살과 한국의 핵개발 중단 (0) | 2016.10.31 |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압록강 도하 (0) | 2016.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