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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화학박사, 이태규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우리나라 최초의 화학박사, 이태규

CIA bear 허관(許灌) 2016. 11. 18. 17:55

 

우리나라에는 아직 과학기술과 관련해서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 이웃나라 일본은 과학 분야 노벨상을 19명이나 배출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노벨상 근처도 가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잘 알려진 이휘소 박사는 유력한 노벨상 후보였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에 수상하지 못했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연구를 토대로 한 연구자 7명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제1호 화학박사인 이태규(1902.1 ~ 1992.10)가 있다. 해방 직전 천재 과학 삼총사(리승기, 정의택, 이태규) 중 한 명이었던 이태규는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노벨상 후보에 올랐고, 그 후에는 노벨상 추천위원이 됐다.

■ ‘영재(英才)’였던 이태규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던 이태규는 요즘 소위 말하는 ‘영재’였다. 남달리 똑똑했던 그를 알아본 아버지가 학교를 일찍 보냈으나, 월반(越班)을 거듭한 결과, 4년 만에 경성보통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또한 졸업 후에는 도지사의 추천을 받아 당시 최고 명문이던 경성보고에 입학했으니, 영재라 불릴 만 했다.

이태규의 원래 꿈은 소학교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경성보고에서 만난 화학 선생, 호리 선생을 만나면서 세계적인 화학자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1920년에는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일본 히로시마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밤을 새며 다른 학생들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한 결과, 교토대학교에 장학금까지 받으며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최고 화학자인 호리바 신기찌 교수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이태규 이학박사 학위 취득 보도(출처: 1931년 7월 20일자, 동아일보)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많은 차별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태규는 일본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와 일본 언론에서는 화제를 낳았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이태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 남아 7년 동안 조수로 연구에 몰두한 결과, 조교수로 임용되기도 했다. 그의 지도교수였던 호리바 신지찌는 “학문에 민족이 따로 있느냐?”고 주장하며, 그의 교수 임용을 설득하기도 했다.

■ 세계적인 석학과의 만남, 그리고 6.25 전쟁

이태규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공부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저명한 석학들이 모여 있다는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으로 갔다. 당시에 전쟁 때문에 시국이 어지러워, 유학을 가지 못할 뻔 했으나,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유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태규는 이곳에서 이론 화학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던 헨리 아이링(Henry Eyring, 1901~1981) 박사를 만나 함께 연구한 쌍극자 능률 계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1940년). 이것은 화학분야에 양자역학을 도입한 최초의 것으로 화학 분야에 많은 발전을 이끌었다.

해방 후 우리나라는 연구나 공부를 하기에는 상황이 열악했지만, 이태규는 조국으로 돌아와 조선화학회(지금의 대한화학회)를 설립했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초대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화학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화학계 터를 다지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다시 헨리 아이링 박사가 있는 미국의 유타 대학으로 넘어가 연구를 계속 했고, 그 결과로 ‘리-아이링 이론’을 발표했다.

1955년 헨리 아이링과 공동으로 발표한 이 논문은 그동안 이론적 접근이 어려웠던 비뉴턴 유동현상을 다룬 일반 공식을 제시한 것이다. 비뉴턴 유동이란 뉴턴의 점성 법칙에 따르지 않는 유동이다. ‘리-아이링 이론’으로 그동안은 설명하기 어려웠던 비뉴턴 유동의 상당수를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6.25 전쟁이 발발해 이태규도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그는 가족 걱정을 연구에 몰두했고, 훗날 이태규의 성과를 놓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잊으려고 밤낮으로 연구하고 공부한 결과라고 전하고 있다.

■ 예리한 관찰과 끊임없는 노력

‘리-아이링 이론’으로 그는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그와 그의 아들, 그리고 헨리 아이링이 공동으로 참여한 수송현상(輸送現象)의 완화원리는 미국 화학회의 산업 및 공업화학분과로부터 상패를 받기도 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간 학생들을 직간접적으로 지도해 양강, 한상준, 김각중, 장세헌 등 훌륭한 학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1973년 한국과학원의 석좌교수로 귀국했을 때 고희를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후학 양성과 연구를 계속해 20년 동안 70편에 가까운 논문을 발표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계 인물이 현충원에 안장된 경우는 총 4명이다. 그 중 한 명이 이태규 박사로 과학자로서는 처음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유품전시관에는 그의 신조를 적은 액자가 있다. ‘예리한 관찰과 끊임없는 노력’이 그의 신조였고, 그가 연구에 몰두 할 수 있는 밑바탕이었던 것이다.

글 : 심우 과학칼럼니스트

 

*이태규(李泰圭, 1902년 1월 26일 ~ 1992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이론화학자이다.

그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화학 분야 전공 이학박사로 양자역학을 화학반응 연구에 도입한 과학자로 유명하다.[1] 또한 그는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李會昌)의 중부(仲父)이다.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2년에 일본 히로시마(廣島)고등사범학교 과정을 마쳤다. 1927년 일본 교토 제국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여, 1931년 〈환원 니켈을 이용한 일산화탄소의 분해〉라는 논문[2][3] 으로 화학 분야의 박사 학위를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받았다. 그 후 교토 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8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 초청과학자로 재직했다. 1941년 교토제국대학으로 돌아가 양자화학을 가르쳤고 1943년에 정교수가 되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경성제국대학교 이공학부장을 맡았다. 이후 서울대학교가 출범하면서 문리과대학 학장이 되었으나, 국대안 파동의 여파로 1948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54년 학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55년 헨리 아이링과 함께 비뉴턴 유체에 대한 연구를 하여 ‘이-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을 발표하였다.[4][5].

1965년에는 노벨상 수상자 후보 추천위원, 1966년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71년 미국 유타 공립대학교 객원교수, 1973년 한국과학원 석좌교수로 활약하였다. 1974년 태평양과학협회(미국 소재) 이사로 선임되었고, 1975년 이론물리센터 소장이 되었다.

미국화학회의 표창을 받았으며, 대한민국학술원상·국민훈장무궁화장·서울특별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수송현상(輸送現象)의 완화원리〉 등 5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출생: 1902년 1월 26일(1902-01-26)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면 예산리 55번지

사망: 1992년 10월 26일 (90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직업: 화학자, 대학 교수

국적: 대한민국

소속: 前 한국과학기술원 석좌교수

학력: 일본 교토 제국대학교 대학원 이학박사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졸업

교토제국대학교 화학 학사

교토제국대학교 대학원 이학 석사

교토제국대학교 대학원 이학 박사

활동기간: 1931년 ~ 1992년

장르 화학교육학 저술

부모: 이용균(부)

친지: 이홍규(아우)

이회정(조카)

이회창(조카)

이회성(조카)

배우자: 박인근

자녀: 슬하 1남 3녀

아들 이회인(李會仁)

종교: 유교(성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