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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암살과 한국의 핵개발 중단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박정희 암살과 한국의 핵개발 중단

CIA bear 허관(許灌) 2016. 10. 31. 13:01

 

                                 전두환정부 업적 "비무장지역 남측 군사분계선 3중 철책선 구축과 자유화 개방화 조치[민주화 조치] 그리고 88 서울 올림픽"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최측근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피살됐다.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유신체제에 대하여 비판해 온 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의 실종 그리고 강력한 비판과 이에 대응한 여당의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과 뒤이은 부마 항쟁(10월 17일)으로 정국이 극도로 혼란스러운 와중에서 시해 사건이 이루어진 것이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김재규는 박정희의 동향에 육사 동기였다( 나이는 김재규가 박정희의 9세 연하다). 그리고 유신 독재정권의 가장 중요한 요직인 정보부의 최고 책임자 직책을 1976년부터 맡길 정도로 김재규에 대한 박정희의 신뢰는 남달랐다.
'유신의 총'이 '유신의 심장'을 쏨으로써 유신 군부 독재정권은 끝이 났다.

그러나 이는 독재정권의 끝이 아닌 새로운 군부 독재정권의 시작이었다. 박정희의 피살로 확실하게 끝이 난 것은 한국의 핵개발이었다.
당시 한국정부는 비밀리에 핵개발을 진행 중이었으며 이해 초 서해에서의 미사일 발사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 미국의 극도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최규하 전 대통령 별세 후 동아일보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2006년 10월 23일자)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을 수사하던 육군 보안사령부는 이해 12월 8일 대전 대덕의 국방과학연구소에 수사관을 파견, 핵무기 개발과 관련한 모든 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 이틀 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된 최규하 대통령은 이 보고를 받자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대덕에 내려가 이를 일단 저지했다.
하지만 이로부터 나흘 뒤인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축이 되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12·12 쿠데타가 발생하였고 이후 보안사는 국방과학연구소에 있던 핵무기 관련 자료와 장비를 모두 가져가 폐기하였다.
한편 신군부 집권 이후 핵개발과 관여했던 연구원들은 국방과학연구소를 타의에 의해 떠나야 했다. 꺼진 불이 재발하지 않도록 완전히 밟아 끄는 이 조치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하던 핵개발 계획은 완전히 중단됐다.
이 핵개발 연구인력 축출 작업은 전두환 대통령의 육사 11기 동기생인 김성진이 과기처장관을 맡아 철저하게 수행했다.
신군부 정권 하에서 한국의 핵무기 개발 추진 노력은 '되돌이킬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핵 무기 개발의 '다른 바퀴'인 독자적인 미사일 개발도 사거리가 묶여 '거북 걸음'을 하게됐다.
오랫 동안한반도 조차 커버하지 못하는 수준인 500km족쇄가 풀린 것은 2012년이 돼서야이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위협이 확실해짐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사거리는 최대 1000km으로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사거리에 턱 없이 못 미친다.
'토끼는 낮잠을 자지 않고 질주하는 가운데 거북이는 타의에 의해 기어가는 것조차 상당 기간 저지됐다.' 이솝 우화의 또 다른 패러독스다.
한국의 핵개발은 군인 출신에 의해 시작됐고 군인출신에 의해 치명적 타격을 받았으며 또 군인출신에 의해 마지막 대 못질이 가해졌다.
박정희는 가장 최측근에 의해 그의 생애를 마감해야 했고 그가 가장 총애한 군부 소장그룹에 의해 목숨을 걸고 추진했던 핵개발 계획이 완전 폐기됐다. 박정희는 이중의 배반을 당한 것이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10월 유신'은 끝이 났다. 박정희가 이를 단행한 지 7년 9일만이었다. 10월 어느날(1972년 10월 17일) 어리둥절한 가운데 맞아야 했던 '10월 유신'은 10월의 마지막 밤을 닷새 남긴 날에 충격적으로 퇴장했다.
박정희가 1961년 5·16 군사 정변일으킬 당시 한강 인도교 앞에서 일본 말로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0월 유신'이 일본의 명치 유신을 본 뜬것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10월의 그 밤 박정희는 김재규의 저격을 받는 순간 '적은 혼노지에 있다'라는 일본 역사에서 비롯한 일본어 경귀가 생각나지 않앗을까.
사실 박정희의 '10월 유신'은 김종필의 '이집트 군사 혁명'의 한국 버전을 명치유신의 한국 버전으로 바꾼 것이다.물론 프랑스 5공화국 정치 체제를 수립한 드골의 영향이 없지 않았지만  드골에 의한 정치 체제 전환은 국민의 부름과 지지와 합헌적 절차에 의해 이루어졋다는 점에서 군사 정변 방식으로 단행된10월 유신과 질적 차이가 있다.
박정희와 1년의 시차를 두고 고고성을 울렸던 인물들 중에는 박처럼 혁명적 변화를 일으텼고 비극적 종말을 맞은 정치 지도자 가 여럿 눈에 뛴다. 뉴 프론티어의 기수로 미국에 젊고 신선 한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존 F 케네디는 박정히와 같은 해인 1917년에 태어났다. 케네디는 재선 유세를 벌이던 중 암살됐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와 안와르 사다트는 1918년 생이다.
나세르는 이집트 군사 혁명을 일으켰으며 사다트는 4차 중동전을 사실상 승리로 있끌어 3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에 빼앗긴 수에즈 운하를 외교 교섭을 통해 되찾았다. 나세르는 3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에 불과 6일만에 치욕적 패배를 당한 뒤 이를 만회하지 못한채 52세에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사다트는 이스라엘과의 단독 강화애 분노한 이슬람 과격주의 군인들에 의해 암살당햇다. '4차 중동전 승리' 8 주년 기념 군사 퍼레이드 식장에서 였다.

일제 말 저항 시인 윤동주와 정치 깡패의 보스로 자유당 정권에서막후 실력자로 군림했던 이정재도 박정희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윤동주는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옥사했고 이정재는 '정치 깡패의 보스'라는 오명 속에서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둘다 정치 지도자는 아니었으나 나름의 대단한 성취와 비극적 최후라는 점에서는 박과 앞서 언급한 이들과 비슷한 인생 행로를 걸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박정희가 퇴장한 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의 군사 정변은다시 이집트 군사 혁명의 모델로 돌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세르가 나기브를 제거했듯이 신군부는 1961년 군사 정변의 주역 김종필을 제거햇다. 그러나 전두환은 반미적인 '나세르'가 아닌 친미적인 '사다트'와 '무바라크'로 빠르게 변신햇다.
한국의 정치 발전 과정이 얼치기식 제3세계 본까라기와 몽유병적 일본 모방에서 벗어나 한국적 특색을 지니기 시작한 것은 1987년의 6월 항쟁과 6·29 선언이 일어난  것의 계기가  됐다고 볼 것이다. 드라마틱한 그러나 철저하게 계산된 이벤트만 있었고 유혈 사태를 불러 일으키지는 않았다. 이로써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동시 구현이라는 2차 대전 이후 세계 유일의 선례를 성취했다.

박정희는 유신정치로 자주노선(독자방어)을 지지했다면 전두환은 자유화 개방화(민주화) 조치로 미국이나 일본정부 연합군 군사정책(연합군 방어, 집단 방위조약)을 지지했다[북한 주체사상이 자주노선이다]

유신말기 평민층의 경제빈곤으로 식량위기 계층(기아)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자주노선으로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전두환정부의 개혁개방정책(자유화 개방화 조치) 이후 남한에서 식량위기 계층(기아)이 사라졌다

 10월 26일은 1958년 10월 26일 한국전에 참전했던 중국군(중국은 이를 ‘인민지원군’으로 불렀다)이 북한에서 완전 철군했고,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

 

                                                                                                          박정희와 전두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