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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주항쟁 35주년 기념·계승 행사 '다채'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부마민주항쟁 35주년 기념·계승 행사 '다채'

CIA Bear 허관(許灌) 2014. 10. 9. 21:18

 

"중국 등소평정부 등장(5년 중임제)->김형욱납치살해사건->부마항쟁->10.26과 유신종언[無間道]"

부마민주항쟁 35주년을 맞아 '진실: 거짓과의 싸움'이라는 슬로건으로 부산과 서울에서 다양한 기념·계승 행사가 열린다.

먼저 14일 오후1시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기념학술대회가 열린다. 학술대회는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부마민주항쟁의 현재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의 방향 ▲부마에서 광주로 등으로 나뉘어 발제와 토론이 진행될 예정이다.

제35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은 오는 16일 오후 7시 부산 중구 민주공원 중극장에서 열린다. 이날 기념식은 송기인 前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문정수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우무석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 김광수 민주공원 관장, 전국민주화운동단체 관계자, 시민사회단체 대표, 시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여는 공연, 국민의례, 부마민주항쟁 경과보고, 기념사, 축사, 노래극단 희망새의 특별공연, 특별결의문 낭독 등이 진행된다.

특별결의문에는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및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의 편향적인 구성에 대한 우려와 그 동안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해 온 민주화운동단체의 입장을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전해졌다.

기념식에 이어 제23회 민주시민상 시상식이 이어진다. 민주시민상은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민주주의, 평화, 인권, 환경, 자치 등 우리사회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고 실천하는 개인과 단체를 선정해 매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서 시상하고 있다.

올해는 부산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신라대 청소노동자들(부산지역일반노조 신라대 현장위원회)이 수상한다. 부산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중증장애인 활동보조 24시간 지원 체계 마련과 장애인콜택시 '두리발'의 부산시직영 요구 농성투쟁 등을 벌여 인권을 지키고 향상시키는데 앞장 섰고, 신라대 청소노동자들은 고용 승계와 학교당국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70여 일의 고공농성과 45일의 단식농성을 벌여 용역노동자들의 차별적 노동환경을 바로 잡으려는 활동을 펼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밖에도 기념전시 '오월광주 치유사진전-기억의 회복'이 16~26일까지 민주공원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부마민주항쟁 상황재현 춤극이 18일 오후 6시30분 민주공원 원형램프에서 펼쳐진다.

더불어 제15회 부마민주항쟁기 시민축구축전이 19일부터 11월16일까지 삼락생태공원 잔디구장 등에서 열린다.

김광수 민주공원 관장은 "부마민주항쟁 35주년 기념행사를 통해 그날의 저항 정신을 되새기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뜻을 모으는 자리가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yulnetphoto@newsis.com


 

 

 

 

부마민주항쟁(釜馬民主抗爭) 또는 부마민중항쟁(釜馬民衆抗爭)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대한민국부산광역시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유신 체제에 대항한 항쟁을 말한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은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민주화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날인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18일19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민주화 시위가 확산됐다.

당시 박정희 유신 정권은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66명을 군사 재판에 회부했으며, 10월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을 출동시킨 후 민간인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1.배경

1978년 12월에 실시된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는 불법적인 금권, 관권선거에 영향이 크게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권 공화당은 야당인 신민당에 패배했다. 그 후 민주화 시위가 활발해지면서 당시 민주 인사들에 대한 연행과 투옥 등 탄압 강도가 강화됐다. 같은 해 8월에 YH무역주식회사 여성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점거 농성으로 집권 공화당은 야당인 신민당김영삼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했다. 이는 곧 야당 국회의원 전원 의원직 사퇴로 이어졌다. 같은 해 9월 전국에서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가 확대됐다. 한편 김영삼의 발언을 문제삼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처분을 하고 감금한 것에 대한 반발이 부마민주항쟁을 작용케 했다는 견해도 있다.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 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 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주로 그 사람들의 구호를 보니까,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이런 것이 작용해서, 경찰서 11개를 불질러 버리고, 경찰 차량을 10여 대 파괴하고 불지르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현지를 시찰한 뒤 당시 상황에 대해 내린 결론

2.일지

1979년 5월 3일 – 신민당 전당대회. 온건파 이철승 패배. 강경파 김영삼이 대표로 당선.

1979년 8월 11일 – YH사건 발생.

1979년 10월 4일 – 여당인 공화당이 날치기로 신민당 대표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

79년 10월 7일 -김형욱 前중앙정보부장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됐다.

1979년 10월 16일 – 부마 민주 항쟁 발생. 부산대학교 학생 5,000여 명이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단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 저녁에 시내로 진출

1979년 10월 17일 – 저녁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가 지속적으로 확산, 충무파출소 · 한국방송공사(KBS) · 서구청 · 부산세무서 등이 파괴, 경찰차량 전소 내지 파손

1979년 10월 18일 – 정부,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투입해 1,058명을 연행하고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

1979년 10월 19일 – 마산 지역에서 마산대학교경남대학교 학생 시위, 민주공화당사·파출소·방송국 타격

1979년 10월 20일 – 근로자, 고등학생 시위 합세. 마산에 위수령 선포

1979년 10월 26일 – 박정희 대통령 피살(10·26 사태)

 

    3.영향

이 사건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앞당긴 계기가 됐고, 긴급조치로 유지되던 유신체제를 존망의 위기에 몰아넣었다.

 

-미국의회에 출석하여 유신정부 독재와 투쟁하면서 자유, 민주주의를 외친 김형욱, 박정희 독재자를 죽인 김재규..

그 두 분 한국 군사정부 정보책임자이다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 반공반독재구국전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민주정부로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공산주의 반대는 자본주의입니다

 

*`김형욱 암살범은 ‘박지만 납치’ 지령받은 2중 스파이 조모씨`

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암살범은 북한과 남한을 넘나든 이중 스파이 출신의 조모씨라는 주장이 나왔다.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이 7월초 시판되는 자신의 신간 저서 『박정희 시대의 마지막 20일』(인물과사상 펴냄)에서 조씨의 증언 내용을 내용을 공개했다고 조선일보가 27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김 전 의원은 “조씨의 말을 종합해 보면 암살은 차지철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며 “2005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가 밝힌 조사 결과는 상당 부분 왜곡됐다”고 주장했다. 조씨는 책 발간 직후 기자회견 개최를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조씨의 증언을 토대로 한 김 전 의원의 저서 내용을 다시 정리한 것이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암살 실행조는 2명이었고 이들은 중정(中情ㆍ국가정보원의 전신) 요원 3명의 도움을 받았다. 1979년 10월 7일 김형욱은 파리 중심부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던 중 이곳에서 중정 요원을 만났다. 중정 요원은 밖에서 한국 여성이 기다린다는 말을 전했다. 중정은 김형욱이 미국으로 망명한 뒤 프랑스로 올 때까지 계속 그를 관리하고 있었다. 중정 요원은 김형욱에게 “부장님, 저쪽 차에서 여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차(캐딜락)를 타고 따라가시면 됩니다”라는 말을 했다. 김형욱은 아무 의심 없이 중정 요원이 문을 열어준 두 번째 캐딜락 승용차에 탑승했다. 그 순간 뒷좌석에 앉아 있던 조씨가 김형욱의 목을 꺾었다.

합기도, 태권도 등 무술 합계가 20단이 넘는 조씨의 완력 앞에 김형욱은 속수무책이었다. 순간 “우두득!”하며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김형욱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조씨는 김형욱의 몸에서 혁대, 지갑 등 소지품을 꺼냈다. 신원을 감추기 위해서다.

암살조는 파리에서 서북부 방향으로 4㎞ 떨어진 양계장에 도착했다. 현장에는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에 파견돼 훈련을 받고 있던 청와대 경호실 직원 곽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양계장의 관리인은 알제리 출신 노인이었다. 곽모씨는 전날 닭을 구입하는 척하며 노인과 안면을 텄다. 암살 당일 곽씨는 노인에게 술을 사준 뒤 취해 잠들게 했다. 앙계장을 지키던 개도 곽씨가 약을 먹여 재웠다. 암살조는 김형욱을 닭 사료용 분쇄기에 넣어 처리했다.

조씨와 곽씨는 김형욱을 암살한 뒤 곧바로 자신들이 묵던 허름한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긴 뒤 스페인 쪽으로 빠져나왔다. 조씨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쿄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행(行) 비행기를 탔다. 조씨는 그곳에서 다시 이스라엘 북부 하이파항(港)까지 간 뒤 동원수산 선적(船籍)의 ‘씨월드’호(號)를 탔다. 씨월드호는 곡물과 목재 수송을 하는 화물선이다. 그는 이 배로 벨기에의 항구도시 안트베르펜에 도착했다. 거기서 승용차를 타고 10월 1일 프랑스 파리로 잠입했다.

조씨는 김형욱을 암살한 뒤 그는 곧바로 스페인 국경까지 갔다. 거기서 1주일간 걸어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모로코까지 갔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씨월드호를 타기 위해서였다. 조씨는 잠입 루트의 역순(逆順)으로 하이파항~텔아비브~도쿄 코스를 되돌아왔다.

조씨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서울의 한 사립대 사학과를 나왔다. 그의 아버지는 어릴 적 일본으로 밀항했으며 교토(京都)에서 조총련 고위 간부를 지내고 있었다. 조씨는 한일회담 반대로 촉발된 6ㆍ3사태 데모 때 신동아 화보에 크게 사진이 찍혔다. 조씨의 아버지는 그 사진을 우연히 일본에서 보고 자기 아내와 조씨, 딸을 일본으로 밀항시켰다. 조씨는 이후 북한으로 가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을 만났다.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은 자신과 ‘의형제를 맺자’고 했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조씨는 이후 김일성(金日成) 전 주석도 면담했다. 북한에서 각종 훈련과 임무를 부여받은 그는 다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귀환했으나 거리에서 한국인 여성을 희롱하는 일본 건달과 싸우다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 조사를 받던 중 불법체류자임이 발각돼 한국으로 추방 당한 조씨를 김포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정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그는 중정으로 끌려가 북한에서 박지만 납치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전향 선언 뒤에도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하다 북파공작대 요원이 됐다.

북한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 납치 임무를 맡았던 조씨는 중정의 회유로 전향한 것이다. 조씨는 1971년 청와대에서 처음 만난 박 대통령으로부터 “자네가 내 아들을 살렸다”는 격려를 들었다.

1979년 박 전 대통령은 조씨를 다시 불러 술을 함께 마셨다. 이 자리에서 조씨가 “김형욱을 제가 처리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박 대통령은 “뭐, 그럴 것 없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위험한 발언을 하는 김형욱 전 부장에 대해 “내가 믿었던 이놈이 나쁜 놈이로구나”라는 말을 했지만 구체적인 암살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다.

조씨가 김 전 부장 암살의 진상을 밝히기로 한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북파 공작원에 대한 처우가 형편없이 낮아진 데 따른 불만 때문이다. 조씨가 이런 불만을 토로하고 다니자 의문의 사건이 잇따랐다.

DJ정권 중반 무렵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 근처에서 조씨는 승용차에 치였는데 운전자가 중정 요원 출신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노무현 정권 당시 국정원장은 조씨가 가짜라던 입장에서 돌변해 조씨에게 거액의 정착자금과 함께 고급 시계까지 선물했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는 김형욱 암살은 중정이 프랑스 중정 책임자 이상열 주불(駐佛)공사에게 지시했으며, 이 공사가 파리에서 어학 연수 중이던 신현진ㆍ이만수(이상 가명)씨를 ‘살해 실행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신ㆍ이씨는 동구권 출신의 제3국인 두 명을 끌어들여 소음(消音)권총으로 김 전 부장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정 소속인 이 공사와 신ㆍ이씨는 지원을 맡았을 뿐이고 동구권 출신이라는 2명은 바로 조씨와 곽씨였다. http://news.joins.com/article/998/3664998.html?ctg=1000&cloc=home|list|list1

 

*30년 만에 밝혀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암살 사건'

1967년 7월 8일 '북괴대남적화공작단사건(동백림사건)'을 발표하고 있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손에 증거물을 들고 있다

김형욱은 분쇄기 속으로… 그 분쇄기 뒤엔 킬러가
조씨 "제가 처리하겠습니다"…박 前 대통령 "뭐, 그럴 것 없어"

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김형욱(金炯旭) 전 중앙정보부장이 이중(二重) 스파이 출신의 프로페셔널 킬러에게 암살당한 사실이 30년 만에 밝혀졌다. 이 사실은 김경재(金景梓) 전 민주당 의원이 7월 초 발간할 책 '박정희 시대의 마지막 20일'(인물과 사상)에 수록돼있다.

이 책은 200자 원고지 1300장 분량이다. 김 전 의원은 1985년 박사월(朴思越)이란 필명으로 전 3권의 김형욱 회고록을 출간한 바 있다. 김 전 의원의 책에 따르면 암살범은 조모씨다. 그의 일본명은 구로이 다카기리(黑井身切)이며 여권에는 김승(金勝)이란 가명을 썼다.

김 전 의원의 책에서 조씨가 밝힌 암살 정황에 따르면, 암살 실행조는 2명이었고 이들은 중정(中情·국가정보원의 전신) 요원 3명의 도움을 받았다. 납치 직전까지 파리의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에서 도박 중이던 김형욱은 중정 요원들로부터 한국 여성이 밖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밖으로 나왔다.

한 중정 요원은 김형욱에게 "부장님, 저쪽 차에서 여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차(캐딜락)를 타고 따라가시면 됩니다"라는 말을 했다. 김형욱은 의심하지 않고 캐딜락에 오르자마자 조씨에게 목이 꺾여 실신했다. 조씨는 김형욱의 혁대, 지갑 등 소지품을 빼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발언 도중 안경을 고쳐 쓰고 있다. 1979년 10월 7일 그가 암살된 후, 이 사건은 30년 동안 미궁에 빠져 있었다. 김형욱 회고록을 낸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이 마침내 킬러의 신원과 당시 상황을 공개했다.
1966년 10월 필리핀 방문 당시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에서 두번째)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보고를 듣고 있다. / 조선일보 DB


암살조는 파리에서 서북부 방향으로 4㎞ 떨어진 양계장에 도착한 뒤 김형욱을 닭 사료용 분쇄기에 넣어 처리했다. 현장에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에 파견돼 훈련을 받고 있던 청와대 경호실 직원 '곽씨'가 있었다고 한다.

김 전 의원은 "조씨의 증언을 3년간 확인해 김형욱 사망 30주년을 맞아 출간했다"며 "그의 말을 종합해 보면 암살은 차지철(車智澈)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2005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가 밝힌 조사 결과는 상당부분 왜곡됐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책을 요약한 것이다.

1979년 10월 7일

김형욱은 파리 중심부 카지노에서 중정 요원을 만났다. 중정은 김형욱이 미국으로 망명한 뒤 프랑스로 올 때까지 계속 그를 관리하고 있었다. 김형욱은 아무 의심 없이 중정 요원이 문을 열어준 두 번째 캐딜락 승용차에 탑승했다. 그 순간 뒷좌석에 앉아 있던 조씨가 김형욱의 목을 꺾었다.

합기도, 태권도 등 무술 합계가 20단이 넘는 그의 완력 앞에 김형욱은 무력했다. 순간 "우두득!"하며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김형욱은 정신을 잃었다. 조씨는 김 전 부장의 몸에서 혁대, 지갑 등 소지품을 꺼냈다. 신원을 감추기 위한 조치였다.

양계장의 관리인은 알제리 출신 노인이었다고 한다. 조씨와 한 조였던 곽모씨는 전날 닭을 구입하는 척하며 노인과 안면을 텄다. 암살 당일, 곽씨는 노인에게 술을 사준 뒤 취해 잠들게 했다. 김 전 의원은 "앙계장에 개가 있었지만 곽씨가 약을 먹여 잠들게 했다"고 했다.

조씨와 곽씨는 김형욱을 암살한 후 곧바로 자신들이 묵던 허름한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긴 뒤 스페인 쪽으로 빠져나왔다. 김 전 의원은 "수년 전 MBC PD수첩팀이 문제의 양계장을 취재했지만 당시 광우병의 여파로 닭 사료용 분쇄기가 치워진 상태여서 현장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김형욱이 아무 의심 없이 따라 나올 만큼 푹 빠졌던 미모의 한국여성은 누굴까. 항간에는 이국적인 마스크로 뭇 남성을 설레게 했던 유명 여배우와 가수 이름이 거론된 적이 있지만 김 전 의원은 "그 사람은 아니다"고 했다. 다만 그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만 책에는 쓰지 않았다"고 했다.

프랑스 잠입과 탈출 루트

암살 주역인 조씨의 프랑스 잠입과 탈출 행적은 웬만한 스파이 영화를 뺨칠 정도다. 김 전 의원이 조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바에 따르면 조씨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쿄에서 이스라엘 텔아비브행(行) 비행기를 탔다.

조씨는 그곳에서 다시 이스라엘 북부 하이파항(港)까지 간 뒤 동원수산 선적(船籍)의 '씨월드'호(號)를 탔다. 씨월드호는 곡물과 목재 수송을 하는 화물선이라고 한다. 그는 이 배로 벨기에의 항구도시 안트베르펜에 도착했다. 거기서 승용차를 이용해 10월 1일 프랑스 파리로 잠입했다.

10월 7일 김형욱을 암살한 후 그는 곧바로 스페인 국경까지 갔다. 거기서 1주일간 도보(徒步)로 피레네 산맥을 주파한 뒤 스페인~지브롤터 해협을 거쳐 모로코까지 갔다. 자신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씨월드호를 타기 위해서였다.

조씨는 잠입 루트의 역순(逆順)으로 하이파항~텔아비브~도쿄 코스를 되짚어 귀환했다. 김 전 의원은 조씨에 대해 "대단한 완력의 소유자이며 지금도 한번에 300회 이상 푸시 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힘과 민첩함, 완력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조씨는 책 발간 후 기자회견을 열 것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 / 최순호 기자 choish@chosun.com

조씨는 누구?

조씨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서울의 한 사립대 사학과를 나왔다. 그의 아버지는 어릴 적 일본으로 밀항했으며 교토(京都)에서 조총련 고위 간부를 지내고 있었다. 조씨는 한일회담 반대로 촉발된 6·3사태로 데모를 할 때 동아일보가 발간하는 신동아 화보에 크게 사진이 찍혔다.

김 전 의원은 당시 사진이 매우 상징적인 것이라고 했다. 즉 데모에 참가하고 있던 조씨를 경찰이 연행하려는 순간, 주변에 있던 할머니가 조씨를 붙잡는 장면이 포착된 것이다. 이는 당시 정권에 대한 민심(民心)을 잘 보여주는 사진으로 평가받았다고 한다.

조씨의 아버지는 신동아에 실린 그 사진을 우연히 일본에서 보고 자기 아내와 조씨, 딸을 일본으로 밀항시켰다. 조씨는 이후 북한으로 가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을 만났다. 조씨에 따르면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은 자신과 '의형제를 맺자'고 했을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조씨는 이후 김일성(金日成) 전 주석도 면담했다. 북한에서 각종 훈련과 임무를 부여받은 그는 다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귀환했으나 우연한 사건으로 신분이 드러났다. 거리에서 한국인 여성을 희롱하는 일본 건달과 싸우다 경찰에 붙잡힌 것이다.
*김중린

1924 평북 벽동~.
1969년 이후 조선노동당 비서국 비서로서 주로 대남혁명사업을 지휘한 인물.
8·15해방 전 중국에서 민족해방동맹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8년 북조선노동당 함경북도 도당위원회 부장으로 당료생활을 시작했으며, 1959년 조선적십자회 중앙상무위원으로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깊이 관여했다.
북한이 1·21사태,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사건 등 일련의 무장 게릴라 중심의 대남사업에 실패하자 1969년 허봉학(許鳳學)의 뒤를 이어 조선노동당 대남담당 비서로 선임되었다. 1970년대 대남사업을 담당하면서 적극적인 군사개입정책을 지양하고 남한에 혁명여건을 조성하는 데 치중하는 방식으로 기본전술을 전환했다. 조선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정치위원회 위원으로, 1974년 정치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1980년 6월 당이론지인 〈근로자〉에 〈항일의 기치 밑에 전민족을 굳게 결속시킨 반일민족통일전선〉이라는 논문을 기고하여 통일사업에서 민족통일전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역설했다.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비서국 비서로 재선되었으나 1984~86년 1년 간격으로 비서직에 기용·해임이 엇갈리다가 1987년 3월 관영 조선중앙통신사 사장 겸 공보위원장에 취임했고, 1988년 11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4차 전원회의에서 비서국 근로단체담당 비서로 재기용되었다.

박 전 대통령은 암살 지시 내리지 않았다!

경찰 조사를 받던 중 불법체류자임이 발각돼 한국으로 추방당한 조씨를 김포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중정 요원들이었다. 그는 중정으로 끌려가 북한에서 "박지만 납치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는 전향 선언 뒤에도 이중스파이 노릇을 하다 북파공작대 요원이 됐다.

북한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고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志晩)씨 납치 임무를 맡았던 조씨는 중정의 회유로 전향했다. 조씨는 1971년 청와대에서 처음 만난 박 대통령으로부터 "자네가 내 아들을 살렸다"는 격려를 들었다.

1979년 박 전 대통령은 조씨를 다시 불러 술을 함께 마셨다. 이 자리에서 조씨가 "김형욱을 제가 처리하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박 대통령은 "뭐, 그럴 것 없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는 항간에 나돌던 박 전 대통령 암살 지시 의혹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조씨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위험한 발언을 하는 김형욱 전 부장에 대해 "내가 믿었던 이놈이 나쁜 놈이로구나"라는 말을 했지만 구체적인 암살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조씨는 암살 동기에 대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고 해 '신념에 따른 암살'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김 전 의원은 김 전 부장 암살 지시의 주역이 차지철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이라고 추정했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정보부 모사드에 파견돼 훈련을 받고 있던 한국의 요원이 조씨와 합류했는데 당시 모사드와 훈련 협정을 맺은 것은 중정이 아니라 경호실이었다는 것이다. 김 전 의원은 "중정은 당시 김형욱이 미국 하원에서 한 일련의 발언들을 제지하지 못해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며 "차 전 실장이 이 일을 계기로 확고한 2인자로 발돋움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왜 폭로를 결심했나?

조씨가 김 전 부장 암살의 진상을 밝히기로 한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북파 공작원에 대한 처우가 형편없이 낮아진 데 따른 불만 때문이다. 조씨가 이런 불만을 토로하고 다니자 의문의 사건이 잇따랐다.

DJ정권 중반이 넘어갈 즈음,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 근처에서 조씨는 승용차에 치였는데 운전자가 전 중정 요원이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노무현 정권 당시 국정원장은 조씨가 가짜라던 입장에서 돌변해 조씨에게 거액의 정착자금과 함께 고급 시계도 선물했다고 김 전 의원은 주장했다.

김 전 의원은 2005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원회가 밝힌 조사 내용도 의혹에 가득찬 것이라 주장했다. 당시 진실위는 김형욱 암살은 중정이 프랑스 중정 책임자 이상열 주불(駐佛)공사에게 지시했으며, 이 공사가 파리에서 어학 연수 중이던 신현진·이만수(이상 가명)씨를 '살해 실행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진실위에 따르면 신·이씨는 동구권 출신의 제3국인 두 명을 끌어들여 소음(消音)권총으로 김 전 부장을 살해했다. 하지만 정작 살해 실행조로 지목된 신씨가 시체 유기장소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의문이 제기됐다. 핵심인물인 이상열 공사는 당시 진술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김 전 의원은 "중정 소속인 이 공사와 신·이씨는 지원을 맡았을 뿐이고 동구권 출신이라는 2명이 바로 조씨와 곽씨였다"고 주장했다. 김 전 의원은 또 조씨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와 직선 거리 4㎞쯤에 있으며 책 발간 전까지는 모습을 안 나타낼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욱은 누구?

김씨는 1925년 1월 16일생으로 고향은 황해도 신천이다. 1948년 육사 8기로 입학했으며 1961년 5·16 때 중령의 신분으로 쿠데타에 참가했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최고위원이 됐고 1963년 7월 중앙정보부장이 됐다.

김씨는 3선 개헌 등의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의 정적을 가차없이 처리해 원성을 샀다. 박 전 대통령은 이만섭(李萬燮) 의원의 해임건의를 받고 1969년 10월 20일 그를 해임했다.

김씨는 공화당 의원으로 활동했지만 1972년 10월 17일 유신(維新) 선포 후 의원직을 상실하자 박 전 대통령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1973년 4월 15일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씨는 1977년 '코리아게이트'사건이 터지자 미국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유신정권의 비화를 폭로했다. 김씨가 프랑스로 간 것은 1979년 중앙정보부 해외담당 차장의 권유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재는 누구?

전남 순천생으로 1942년생. 서울대 정치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를 거쳐 사상계에서 일하다 15년간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귀국해 14·15대 의원을 지냈다. 그가 '박사월'이라는 필명으로 낸 김형욱 회고록은 당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수십종의 해적판이 나돌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은 1980~89년에 발간된 책을 대상으로 한 '10년간의 명저' 조사에서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 김홍신의 소설 '인간시장', 도종환의 시집 '접시꽃 당신'에 이어 4위에 올랐다. 그는 현재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에서 집필을 하고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26/2009062601243.html?Dep0=chosunmain&Dep1=news&Dep2=headline1&Dep3=h1_02

 

*국정원 진실위 김형욱 사건 중간발표 요약 자료와 김형욱실종 관련 인물 각종 자료

1.국정원 진실위 김형욱사건 중간 발표 요약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526/021200000020050526125022K2.html

다음은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2005년 5월 26일 오전 발표한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중간발표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1)사건 개요

김형욱 전중앙정부은 1963년 7월 이래 중정부장으로 재직하던 중 1969년 10월 발정희 던대통령이 3선 개헌의 1등 공신인 자신을 전격 해임하고 1973년 3월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에서도 제외하자 1973년 4월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김형욱은 1977년 6월 <뉴욕타임즈>기자회견 및 미국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박정희 전대통령을 강력 비난한데 이어 박정희정부의 치부를 고발하는 회고록 출간을 추진하였다

이에 박정희정부는 1977년 6월 민병권 무임소장관을 대통령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여 김형욱을 설득, 회유하는 한편 국무총리 주재 김형욱 대책회의를 3차례 개최한데 이어 김형욱을 실질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1977년 12월 "외국정부에 대하여 도피처 또는 보호를 요청한 자"와 "외국에서 귀국하지 아니하는 자로서 죄상이 현저히 중(重)한자"를 처발할 수 있는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였고 당시 박정희 정부는 김형욱 회고록 출판을 저지하기 위해 여러 경로를 통해 김형욱에 대한 회유와 협박을 시도하였으며 동(同) 과정에서 김형욱은 1979년 10월 1일 단신으로 프랑스 파리에 도착 10월 7일 저녁 파리 시내 카지노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 실종 되었다

그간 각종 언론보도등 통해 국제 범죄조직 또는 정치적 보복에 의하 프랑스 현지 살해, 국내 압송 살해등 각종  의혹들이 유포되어 왔고 그 배후에는 당시 박정희 정부와 그 예하에 있는 중정이 이를 주도하거나 개입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어 왔다   

(2)조사내용--관련 인물 면담조사: 총 33명

 ㄱ.사건당시 중정 주(駐)프랑스 거점 요원 및 연수생:8명

 (ㄱ)이상열 공사(76세,당시 주프랑스 중정 거점장)

3차례 면담 조사와 함께 김형욱 실종 사건에 개입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사건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진술 거부 의사를 표명

(ㄴ)신현진(가명, 당시 주프랑스 중정 연수생)

7차례 면담조사와 김형욱 살해 과정에 직접 참여하였음을 시인하면서 동(同) 살해 진해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진술함 다만, 사체유기 장소애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술 회피

(ㄷ)이만수(가명, 당시 주프랑스 중정 연수생)

6차례 면담조사와 김형욱살해사건에 직접 가담하였으며 하급자로서 부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시인하였으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진술을 회피함

(ㄹ)김철진(가명) 및 이일만(가명): 당시 중정 주프랑스 거점 요원

김철진은 1차례, 이일만은 3차례 면담조사를 하였으며 두 사람은 사건 당시 파리 현지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연수생등 일부 김형욱 살해 사건 가담자들은 이일만이 동(同) 사건의 기획임무를 담당하였다고 진술   

(ㅁ)여타 연수생 3명

김형욱 실종사건 당시 연수생 6명 중 사건 가담자인 신현진, 이만수와 사망자 1명을 제외한 생존자 3명에 대해 각각 면담조사했으며 연수생 1명은 김형욱실종사건에 이상열공사, 공관원 이일만, 연수생인 신현진과 이만수가 관요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술하였으며 다른 연수생 2명은 사건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답변

ㄴ.중정본부 지휘계통 간부 및 직원:5명

중종 본부 차원의 조직적 가담 여부를 규명하기 위해 1979년 10월 당시 그 직위에 있던 윤일균 해외담당 차장, 김00 해외담당 국장, 이00 해외담당 부국장, 조00 유럽담당 과장, 황00 유럽담당과 주무관등을 각각 면담 조사하였다 상기명(上記名) 모두 사건 당시 중정차원에서는 조직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이상열공사는 개입된 것으로 본인다고 진술하였으며 김형욱 실종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시점인 1979년 10월 16일경 사건 진상파악 노력을 시작한 점으로 보아 사건 개입 가능성 희박하다고 본다   

ㄷ.지원업무 담당 및 여타 해외거점 근무 중정 직원:4명

사건당시 해외통신등 지원업무 담당자 및 여타 해외거점 근무 직원 4명에 대한 면담조사한 결과, 김형욱 실종사건 개입 정황 미발견함

ㄹ.합수부 관계자 및 특파원 등 사건 주변 인물:16명

1979년 10.26사건 직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조사했던 전두환 전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이학봉 전 합수부 수사국장은 각각 면담시 10.26사건 당시 김형욱사건을 조사하거나 보고받은 사실이 전혀 없다고 진술하였고 신00(조선), 주00(중앙), 박00(동아)등 사건 당시 파리주재 특파원등 언론인 8명을 면담한 결과 그간 제기된 의혹이상의 구체적 정황이나 진술은 없었다 김경재 민주당 전의원은 2차례 면담, 송진섭 안산시장 1회면담으로 청와대 경호실 개입설 진위여부등을 문의하였으나 사건진상 규명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은 없었으며 김형욱을 파리로 유인하는 과정에 관련된 것으로 의혹이 제기된 연예인 최00, 정00등 여성 3명을 면담한 결과 개입 정황 미발견되었다 10.26사건 당시 김재규 부장으로부터 김형욱사건의 진상을 직접 득문 하였다고 주장하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의 김재규 부장 감시 헌병 박00을 2차례 면담조사하였으나 사건 실체를 알고 있진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3.조사결과

조사결과 김형욱은 김재규 당시 중정부장의 지시에 의해 중정 주(駐)프랑스 거점 요원들과 이들이 고용한 제3국인들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밝혀짐

(1)살해동기

윤일균 전 중정 해외담당 차장의 진술에 의하면 김형욱이 김경재(필명:박사월)를 통해 박정희 정부의 비를 폭로하는 회고록 집필(김형욱 회고록 1. 2.3권)을 추진하자 박대통령은 1978년 12월 김형욱과 동향으로 친분관계에 있던 자신(윤일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급히 방미하여 김형욱과 회고록 관련 협상을 추진토록 지시하였으며 이에 따라 자신니 방미 김형욱에게 미화 50만불을 주고 회고록 원고를 받아내었으나 1979년 4월경 일본의 한 군소 출판사가  동(同) 회고록 문고판을 출간함으로 책내용이 국내와 일본, 북한 지식층에 전파되었고 박정희정부의 김형욱에 대한 분노가 고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형욱회고록 1.2권은 1982년경부터 지하서적으로 읽어지고 있다가 1985년도내 왔어는 일반화 되었다(북한에서도 김형욱 회고록 내용이 삐라유형으로 제작하여 바람 풍선으로 남한지역 살포되는 실정이었다)     

(2)살해지시

김재규 부장은 1979년 9월말 이전 이상열 공사에게 김형욱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상열 공사가 1979년 10월 1일경 귀국시 김재규 부장에게 김형욱 살해 계획을 보고한 후 그때 소련제 소음 권총과 독침을 수령했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으며 김재규부장의 지시를 받은 이상열공사는 현지 중정 연수생 2명 등에게 김형욱살해 관련 임무를 부여하고 동(同) 연수생들이 준비를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살해 지시를 했는지는 박정희와 김재규 사망으로 정확히 확인 할 수는 없지만은 1977년 6월 16일 민병권 당시 무임소장관 미국 방문이나 윤일균 전 중정해외담담 차장의 "1978년 12월 박대통령이 자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급히 방미하여 김형욱의 회고록 출판을 저지토록 지시를 내렸다"고 진술하는 점 그리고 1977년 6월말 최규하 내각의 김형욱대책회의 3차례 개최한데 이어 1977년 12월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란 특별조치법"을 제정한 점등을 볼때 박정희대통령이 김재규부장에게 직접 또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김형욱 살해를 지시하였다고 볼수 밖에 없다      

  

(3)살해준비

ㄱ.살해 가담자 물색

김재규 부장의 직접 지시를 받은 이상열 공사는 1979년 9월경 김형욱 납치 및 살해 임무를 연수생들에게 맡기로 하고 신현진등 당시 파리 연수중이던 중정 연수생 5-6명을 자택으로 초대하여 대화도중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어 문제다"라는 등으로 질책, 젊은 연수생들의 정의감을 부추기면서 반응을 타진했으며 연수생들에게 파리 주재 "북한 통상대표부의 현황과 실태등에 대항 관찰결과"를 보고서로 제출토록 하여 그 내용 검토를 통해 적극성, 과단성등 개개인의 자질을 검증한 후 최종적으로 신현진, 이만수 등 2명을 적임자로 선정했다   

-김형욱이 곧 파리에 온다 중정부장을 지낸 사람이 거액의 외화를 빼돌려 카지노등에서 탕진하고 있으며 국가기밀을 마구 폭로하고 있다 이런 사람을 그냥 둬서는 안된다며 상부의 지시로 김형욱 처치해야 한다고 강조

ㄴ.살해계획 수립

  신현진은 김형욱을 살해하기 위해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구라파 출신 제3국인 친구 2명에게 사건을  청부키로 하고 동인들을 접촉하면서 미화 10만불 제공 조건으로 살해을 의뢰, 승낙을 받았으며 또한 평소 기질이 맞아 친근하게 지내던 후배 연수생 이만수가 임무 수행시 보조역할을 맡기로 한 후 상기 제3국인 친구 2명을 이만수와 함께 수차 접촉 상호친분관계를 형성하는 한편 파리 시내 소재 <바뇰레> 벼룩시장에서 김형욱 살해에 사용할 칼과 노끈 등을 구입하고 1979년 10월 초경 이상열 공사를 다시 접촉 임무수행에 필요하다면 미화 10만불과 권총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하는 등 살해 준비를 진행했다

 

(4)살해과정

1979년 10월 7일 오후 늦게 신현진은 이상열공사로부터 급히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이상열 공사 집에 도착하자 이상열공사가 "김형욱으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전화가 왔는데 돈이 없다고 거절하려다가 오히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돈이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 줄 수 있다고 하여 만나기로 하였다" "2시간 뒤 샹젤리제 거리로 김형욱이 나오기로 했는데 지금이 좋은 기회다 오늘 처치해야 하니 이만수와 일꾼들을 불러라"라고 지시하였다

신현진은 인근 공중전화를 이용 제3국인 친구 2명과 이만수에게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리도극장>앞에서 동구라파 제3국인 친구 2명과 이만수를 접촉, 동인들에게 김형욱 살해계획을 설명하였으며 이만수에게는 미화 10만불이 든 가방을 가지고 개선문 근처 <빨레 데꽁그레>빌딩과 인접해 있는 <콩크드 라파예트> 호텔 34층 <르 플랭시엘>바에서 대기하도록 지시하고 이만수를 먼저 보낸 후 조수석에는 이상열 공사, 뒷좌석에는 제3국인 친구 2명을 태운 채 신현진이 운전하여 <리도극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김형욱과의 약속 장소로 이동하던 중 차내에서 신현진은 이상열 공사로부터 미리 받아 지니고 있던 소련제소음권총 1정과 독침 중 권총을 뒷좌석의 동구라파 제3국인 친구에게 제공하였다

그들은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김형욱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상열 공사가 차에서 내려 김형욱에게 인사를 하면서 "운전하는 사람은 제가 아끼는 중정 연수생이고 뒷좌석의 두 사람은 제가 소개시켜 드리겠다고 한 전주(錢主)들입니다"라고 설명한 후 "이 분들과 어디 가까운 카페로 가서 이야기를 나눠보시죠 저는 저녁 약속이 있어 그냥 가보겟습니다"라면서 김형욱을 승용차 조수석에 앉게 하고 이상열공사 자신은 현장을 이탈하였다

김형욱은 카지노 도박 자금을 빌릴 목적으로 연수생 신현진이 운전하는 이상열 공사 관용차 조수석에 앉아 뒷좌석의 제3국인 2명과 돈 빌리는 문제를 협의할 카페로 가는 줄 알고 출발 당시 시각은 날이 어느 정도 어두워져 전조등을 켰을 때이며 신현진이 운전하는 승용차가 제3국인 친구들이 지시하는 대로 개선문 앞 로터리를 우측으로 돌아 시 외곽 순환도로를 건너 가던 중 김형욱 뒷좌석에 앉아 있던 제3국인 친구가 갑자기 김형욱의 머리 뒷부분을 주목으로 수차례 가격, 실신케 하였고 승용차는 파리 시내를 이탈, 파리교외로 이동하였으며 길가에 가로등이 켜져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나 인적이 드물고 작은 숲이 내리막 방향으로 이어진 장소에 도착하여 제3국인 친구 2명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에서 실신해 있는 김형욱을 양쪽에서 팔을 끼고 차에서 끌어내려 도로 우측 숲속으로 끌고 내려간 후 약 30분쯤 지나 돌아왔으며 제3국인 친구 2명은 신현진이 U턴시켜 놓고 기다리던 승용차에 탑승하여 김형욱의 바바리 코트에 여권, 지갑, 시계등의 소지품을 싸서 벨트로 묶어 건네주면서 도로에서 약 50m 떨어진 장소에서 김형욱의 머리에 권총을 쏘아 죽였으며 시체는 땅을 파지 않은 채 두껍게 쌓여있는 낙엽으로 덮어 버렸다고 보고 당시 신현진은 제3국인들이 김형욱을 살해 후 권총을 분실한 사실을 확인하였으나 신속한 현장 이탈을 위해 권총회수를 포기하였으며 계속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이었기 때문에 낙엽들에 의해 사체가 두껍게 덮여질 것이라 판단하였다 살해 당시 총성은 들리지 않았으나 제3국인들은 권총 실탄 7발을 모두 쐈다고 언급하였으며 신현진은 이들에게 불어로 <잘했어>라고 격려하고 이만수가 기다리고 있던 장소로 이동하여 이만수로부터 미화 10만불이 든 가방을 받아 제3국인 친구 2명에게 전달하면서 "내일 중으로 프랑스로 떠나라"라고 지시하였다

(5)사후조치 및 보고

ㄱ.신현진의 이상열공사에게 임무 수행 결과 보고

이상열공사 "수고했다"며 김형욱 여권, 지갑은 자신(이상열)이 가지고 다른 소지품들은 신현진에게 주면서 "철저리 인멸한 후 즉시 파리를 떠나 귀국하라"고 지시

출국 전 이상열 공사는 "그림(살해경과)에 대해서는 "신군 한테 들으십시오"라는 내용의 밀봉되지 않은 서신을 김재규 부장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ㄴ.신현진의 귀국 후 1979년 10월 13일경 김재규부장에게 김형욱 처리결과를 보고  

김재규부장은 "수고했어 잘했어 우리가 그런 놈을 그냥 놔두면 우리 조직은 뭐하는 곳이야?"라며 살해에 사용한 권총을 분실하였다고 보고하자 김재규 부장은 "괜찮아, 소련제 권총이니 발견되어도 오히려 북한이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니 문제될 게 없다"면서 현금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를 각각 2개씩 주어 그 중 1개씩은 이만수에게 전달하였다

ㄷ.이만수의 귀국 후 김일곤 차장보에게 김형욱 살해 결과 보고

이만수도 사건 직후 귀국하여 김일곤 차장보에게 살해결과를 보고하고 김일곤 차장보로부터 액수 미상의 상당히 많은 돈을 받았으며 김재규 부장이 준 돈도 신현진으로부터 전해받았다고 진술함 

 

2.김형욱 실종 관련 인물 각종 자료

(1)김형욱--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사람

ㄱ.성명:김형욱(金炯旭)

ㄴ.생년월일:1925년 1월 16일(양력, 쥐띠)

ㄷ.출생지:황해도 신천

ㄹ.학력

(ㄱ)육사 졸업 (ㄴ)육군대 졸업 (ㄷ)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ㄹ)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

ㅁ.경력

(ㄱ)5.16군사쿠데타 최고회의 최고위원

(ㄴ)1963년 7월-1969년 10월 제4대 중앙정보부장 역임

(ㄷ)1971년 4월-1972년 10월 제8대 국회의원(공화당 전국구)

(ㄹ)1973년 4월 미국 망명

(ㅁ)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

 

(2)김형욱 살해공작 지휘계통

ㄱ.김재규---김형욱 살해 지시

김재규(1926-1980)는 금녕(金寧, 김해 옛 이름) 김씨이며  경북 구미출생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고향 사람이다 그는일본육사와 육군사관학교 제2기 출신으로 5.16 이후에는 국영기업체 사장,보안사령관, 군단장, 유정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차장, 건설부장관을 역임하고 1976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다

비록 5.16의 주체는 아니었지만 우직한 충성심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의 만찬석상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유신시대의 종말을 앞당겼다

그러나 그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1980년 5월 24일 오전 서울구치소 사형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ㄱ)성명--김재규(金載圭)

(ㄴ)생년월일--1926년 3월 6일

(ㄷ)출생지:경북 구미

(ㄹ)학력--일본육사와 육군사관학교 졸업

(ㅁ)경력

-5.16군사쿠데타  가담 그리고 국영기업체 사장

-보안사령관

-군단장

-1973년 제9대 유정회 국회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1974년 제13대 건설부장관

-1976년 제8대 중앙정보부장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1980년 5월 24일 서울구치소 교수형

 

ㄴ.이상열(李相悅)--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김형욱 공작 총지휘자

(ㄱ)성명:이상열(李相悅)

(ㄴ)생년월일:1929년 11월 13일

(ㄷ)출생지:진천

(ㄹ)학력

1949년 춘천고 졸업. 1960년 연세대 상대 졸업

(ㅁ)경력

-1970년 주(駐)말레이사아 대사관 국방무관

-1974년 주(駐)사우디 참사관

-1976년 주(駐)사우디 공사

-1976년 주(駐)멕시코 공사

-1977년 주(駐)프랑스 공사

-1983년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1984년 주(駐)미얀마대사

-1987년 주(駐)리바아대사

-1990년 외교안보 연구원 연구위원

-1992년-1994년 주(駐)이란 대사

(ㅂ)김형욱과 관계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505/200505260214.html

이상열은 당초 군에 몸 담고 있었던 그는 1963년 "원충연 대령 반혁명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맺은 김형욱과의 인연을 계기로 중정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김형욱의 후원 아래 승승장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열씨는 이 사건에 중정최고 책임자였던 김재규 전 중정부장과 살해사건을 실행한 신현진. 이만수 두 행동요원의 가교 역할자이자 프랑스 현지에서 공작을 총지휘한 책임자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ㄷ.1979년 10월 7일 김형욱 살해 실행조

(ㄱ)신현진(가명)---주(駐)프랑스 중앙정보부 연수생

(ㄴ)이만수(가명)---주(駐)프랑스 중앙정보부 연수생    

(ㄷ)제3국에서 고용한 살인청구업자 2명

 

ㄹ.1979년 10월 7일 김형욱 살해사건 기획임무 담당

이일만(가명)----주프랑스 중앙정보부 거점 요원

 

*김형욱 전(前)중앙정보부장과 김형욱 전(前)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 자료

1.김형욱 전(前) 중앙정보부장
(1)성명: 김형욱(金炯旭)
(2)생년월일: 1925년 1월 16일(양력, 쥐띠)
(3)출생지: 황해도 신천
(4)학력
ㄱ.육사 졸업
ㄴ.육군대 졸업
ㄷ.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ㄹ.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
(5)경력
ㄱ.5.16군사쿠데타 최고회의 최고위원
ㄴ.1963년 7월----1969년 10월 제4대 중앙정보부 부장 역임
ㄷ.1971년 4월----1972년 10월 제8대 국회의원(공화당 전국구)
ㄹ.1973년 4월 미국 망명
ㅁ.1979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
(6)가족관계
배우자 ---- 신영순(申英順, 1932년생)
2.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진실위) 김형욱 실종사건 중간조사 발표내용
조사결과에 따르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1979년 9월말 이전 중정의 프랑스 거점장이던 이상열 주프랑스 공사에게 김형욱 실해를 지시했으며 이에 따라 이상열 공사가 적임자로 선정한 중정 연수생 신현진(가명)이 살인청부를 받은 제3국인 2명과 함께 1979년 10월 7일 승용차로 납치, 파리 근교로 끌고가 제3국인이 권총으로 살해했다
이들은 당시 김형욱 전부장의 시신을 낙엽으로 덮어놓은 채 현장에서 빠져나온 것으로 파악됐으나 신현진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사체유기 장소를 진술하지 않아 추가조사가 필요하다고 진실위는 설명했다
-이상열 공사가 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받고 전주를 소개시켜주겠다며 1979년 10월 7일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나기로 한 뒤 신현진이 제3국인 2명과 함께 이상열공사의 차량을 이용해 납치한 것으로 조사됐다
-제3국인 2명은 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을 살해한 뒤 신현진과 함께 사건에 연수행인 이만수(가명)로부터 미화 10달러가 든 돈을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이상열공사는 관저에서 신현진으로부터 결과를 보고받고 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의 여권과 지갑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소지품은 철저히 인멸한 뒤 귀국할 것을 지시했고 신현진은 귀국 후인 1979년 10월 13일께 김재규 부장에게 결과를 보고했다고 진실위는 설명했다
김재규 부장은 당시 신현진의 보고를 받고 격려한 뒤 그를 중정부장 직속기관인 정책연구실로 발령하고 300만원과 20만원이 든 봉투 두개씩을 지급 이만수와 나눠갖도록 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와함께 김형욱 전중앙정보부장을 파리로 유인하는 과정에 관련된 것으로 의혹이 제기됐던 연예인 최모, 정모씨등 여성 3명을 면담한 결과, 개입정황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진실위는 덧붙였다
-진실위는 당시 중정 주프랑스 거점 요원 및 연수생8명과 박정희전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본부장 전두환 전대통령을 포함해 관련인물 33명에 대한 면담을 실시했으며 이상열공사에 대해 3차례 면담조사를 했으나 사건 개입 사실은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관련내용에 대해서는 진술을 거부했다
-국정원 진실위 김형욱 사건 중간발표 요약
http://www.yonhapnews.co.kr/news/20050526/021200000020050526125022K2.html

3.신문보도 내용 자료
(1)김형욱 전(前)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 개요와 쟁점(연합뉴스 자료)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은 김대중 납치사건이나 정인숙 피살사건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3대 미스터리 사건으로 꼽힌다
김형욱 사건은 폭력집단이나 북한 또는 국가권력등 납치실체에 대한 의문점 못지 않게 국가권력이 자행한 것이라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배후인가 아니면 그와 충성경쟁을 벌이던 차기철 경호실장의 소행인지 여부도 관심을 끄는 대목이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10.26사건 3주 전인 1979년 10월 7일 오후 7시 프랑스 파리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를 나선 이후 (당시 54세) 실종됐다
역대 중앙장보부장 중 최장수인 6년 3개월간 막강한 자리를 지키다 전격 경질된 김형욱은 1973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박동선 로비 사건을 조사 중인이던 미국 의회의 프레이저 청문회 등에 나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표적이 됐다
그는 실종 전 항공편으로 뉴욕에서 파리에 도착 특급호텔인 리츠호텔에 머물다 2류호텔인 웨스트앤드 호텔로 옮긴 뒤 카지노에 들렀다가 행방불명 됐다
박정희 정권은 김형욱이 3공화국이나 유신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는 회고록을 출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977년-1979년 윤일균 당시 중정차장(해외담당), 이용운 전(前) 해군제독(작고)등 친분이 있는 인사들을 밀사로 미국에 보내 1백 50만 달러 제공, 여권보장 등 구체적인 조건을 놓고 막후 협상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형욱 사건은 4반 세기를 지난 지금도 파리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살해되어 무거운 추에 매달려 센느강에 던졌다느니 비밀리에 청와대로 압송돼 청와대 지하실에서 사살당했다 등의 구구한 억측만 자아낼 뿐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김형욱씨는 1991년 서울가정법원에서 <1984년 10월 8일 사망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실종선고 판결을 받은 뒤인 1996년 특별조치법에 대한 위헌결정 후 형사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김형욱 실종사건의 핵심은 국가권력의 개입여부, 마피아등 조직범죄 집단이나 북한의 개입 가능성 등 배후세력의 실체에 모아진다
범행 주체를 둘러싼 논란에서 카지노와 관련된 폭력집단이 금품을 노리고 범행을 했거나 북한이 관련됐을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이며 당시 여러자기 정황을 고려할때 국가권력의 개입 가능성이 가장 높다
ㄱ.김형욱 실종사건 관련 일지
-1973년 미국 망명
-1979년 9월 김경재(金景梓)전(前)의원의 <박사월> 필명으로 김형욱 회고록 <권력과 음모> 출간 <권력과 음모> 상.중. 하 3권
-1977년 6월 22일 김형욱, 미국의회 프레이저 청문회 출석 증언
-1982년 3월 궐석재판에서 <반국가행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혐의로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형 선고 그리고 전재산 몰수
-1991년 서울가정법원 <1984년 10월 8일 사망으로 간주>한다는 실종선고 판결
-1996년 특별조치법에 대한 위헌결정 이후 형사재판에서 무죄선고
-1998년 부인 신영순씨, 법정투쟁 3백억원으로 추정되는 재산 되찾음
ㄴ.김형욱 실종 사건 배후세력 실체
(ㄱ) 한국정부--국가권력 개입여부
(ㄴ) 마피아등 범죄조직 소행설
(ㄷ) 북한정부와 연계된 남한 반체제인사들의 소행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재직때 각종 인권침해와 간첩사건이 일어남
ㄷ. 김형욱 살해 사체---암매장설과 센느강 유기등 제기되고 있음
(2)"김형욱 실종" 기관개입 확인때 유신정권 도덕성 치명타
http://www.donga.com/fbin/output?f=todaynews&code=a_&n=200502040301&main=1#
ㄱ.김재규 전(前) 중앙졍보부장 말
사형 전(前) 강신옥 변호사에게 한 말---나와는 관계없다
김형욱 부장의 납치사건 직접 지시자로 일각에서 지목
ㄴ.이종찬 전 국정원장 말씀(김형욱 납치사건 당시 중정 총무국장 재직함)
나는 모른다 김형욱은 갱단에 의해 죽었을 것이다 박종규씨가 워낙 도깨비 같은 사람이라서 국정원에서 관련 기록을 본 적도 없다
ㄷ.김경재 전(前) 민주당 의원 말(1980년대 김형욱 회고록 출간)
경호실장이나 박종규 전 경호실장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ㄹ.윤일균 국제항공연맹 명예회장 말(당시 중정 해외담당 차장 재직)
정상적인 지시계통으로 (김형욱 납치)지시를 받은 일이 없다 김재규가 당시 어떤 목적인지 몰라도 자기 일에 별도 조직을 만들었다 차기철이 해외공작을 하긴 힘들었을 거다
ㅁ.이상열 전(前) 이란대사 말(당시 중정소속의 프랑스공사 재직)
나는 이 사건과 무관하다
ㅂ.송진섭 안산시장의 말(1979년 서대문구치소에서 투옥 중 옆방에 투옥된 박선호 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의 말)
대통령 경호실 간부들이 김형욱을 살해했다--박선호 중앙정보부 전(前) 의전과장의 말
*박선호--중정 의전과장
-예비역 해병대 대령 출신
-해병간부후보생학교 해병대학 수석 졸업
-해병간부후보 동기생 중 긴급이 가장 빨랐던 만큼 성실하고 충직했다
ㅅ.김형욱 중정 청부 받은 파리 조폭에 살해
http://www.donga.com/fbin/output?f=todaynews&code=a_&n=200502180101&main=1#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프랑스 유학생으로 위장한 중정요원과 한 여성 연예인에 의해 파리로 유인돼 1979년 10월 7일 파리에서 현지 조직폭력배에게 살해됐다고 한 시사월간지가 보도했다
월간조선 3월호는 중정 고위간부 출신인사들과 김형욱 회고록을 대필한 김경재 전(前) 민주당 의원등의 증언을 인용해, 파리 조폭은 김형욱을 살해한 뒤 사체를 처리했으며 유학생으로 위장한 중정요원은 이를 확인한 뒤 돈을 지불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미국 뉴저지에 머물고 있던 김형욱을 파리로 유인하는 데는 여성 연예인이 동원됐고 유학생으로 위장한 중정요원은 김형욱을 파리조폭에게 넘겼다
김경재 전 의원은 <김형욱씨가 실종 직전 한 연예인이 자신에게 보내준 러브레터성 편지를 보여줬다>면서 <김형욱은 한국출신 연예인을 만나 즐기기 위해 파리로 간 것>이라고 말했다
중정간부 출신 인사들은 <유학생으로 위장한 중정요원은 김형욱을 유인 살해한 이틀 뒤에 파리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고 당시 프랑스의 정보기관들이 의혹만 가졌을 뿐 적극적으로 수사할 수 없없다>며 <김대중 납치사건의 실패를 교훈 삼아 김형욱을 살해 제가하는 작업에 중정이 직접개입하지 않고 현지 조폭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ㅇ.재미 언론인 문명자씨의 쓴 책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내용
-김형욱의 부인 신정순씨의 말
"(유럽으로 떠나는 김형욱에게) 파리에 혼자 가느냐"고 물었더 "이상열 공사가 다 알아서 해줄 것"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상열씨는 "나도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일권 전 총리가 파리에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김형욱이 경복궁에서 청와대로 이어지는 지하벙커를 통해 박정희 앞에 끌려갔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라고 빌었으나 서울근교 폐차장 압착기 아래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ㅈ.김형욱은 내가 죽었다(중앙정보부 비선조직-- 박종규. 차기철등 대통령 비서실 중앙정보부 비선조직 가능성)
http://ucc.media.daum.net/uccmix/zine/mega/sisapress/200504/11/sisapress/v8807826.html?u_b1.svcid=02y&u_b1.objid1=16602&u_b1.targetcate=4&u_b1.targetkey1=20184&u_b1.targetkey2=8807826
우리는 김형욱 전(前) 중앙정보부장을 1979년 10월 7일 밤 파리 시내의 한 카지노 근처 레스토랑에서 납치했다 김형욱이 한국 여배우 000씨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에 레스토랑 입구를 지키고 있다가 그 여배우가 보낸 안내자 행세를 하며 납치하는데 성공했다 캐딜락승용차 안에서 김형욱을 마취시킨 다음 밤 11시께 파리시 서북 방향 외곽 4km 떨어진 외딴 양계장으로 가서 분쇄기에 그를 집어 넣어 닭모이로 처리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박종규 아니면 차기철 비선을 의심하던데 그쪽 소속 아니었는가? 누구의 비선도 아니었다
-파리로 가기 전 언제 어디서 누구와 박 대통령을 만났는가?
1979년 초 밤에 불려갔는데 청와대 별관으로 알고 있다 경호하는 분들이 옆에 있었지만 나는 대통령 말씀을 듣느라 긴장돼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술을 따라 주셨다 그것 뿐이었다
-박대통령이 술을 따라며 김형욱을 제거하라고 하던가?
"나쁜 놈이로구나 내가 믿었던 김형욱 이놈이 나쁜놈이로구나"말했다
--->김형욱 실종사건이 이란혁명, 박대통령 살해와 관련여부는 프랑스 정부에서 밝혀야 할 부분이다

4.김형욱 전(前) 중앙정보부장에 관한 각종 자료
(1)세계경찰 사상 정확한 탐문과 수사를 자랑하는 프랑스 국립경찰도 <We don't know>가 김형욱 파리 실종사건에 대한 공식 최후 발표문
http://user.chol.com/~songwoo/today012.htm
(2)신동앙(동아닷컴)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3/12/26/200312260500041/200312260500041_1.html
1969년 12월 19일 서울, 윌리엄 포터 당시 주한 미국대사와 김형욱 전(前) 중앙정보부장이 마주 앉았다 "이제 한국도 북한과 대화에 나설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군사와 산업 모든 측면ㅇ에서 북한보다 우위에 선 한국이 독일이나 베트남처럼 적극적으로 남북접촉에 응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방국들은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한국 지도층은 이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김형욱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3)1999년 11월 28일(일) MBC 특별기획 제 10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년의 침묵--김형욱 실종사건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1252751_1590.html
(4)나는 왜 황태성 사건을 미국에 고발했나?
-중앙정보부 창립멤버 조웅목사의 현대사 X 파일 3탄-
http://www.khistory.or.kr/exhume/read.asp?num=9&page=1
"김형욱이 나에게 귀뜸해 준 정보에 따르면 황태성의 존재에 대해서 박정희나 김종필 측근 중에서 누가 폭로할까봐 그들 속에서 서로 이중삼중으로 감시했다는 겁니다 김형욱에 따르면 미국측에서 황의 존재를 알고 신병인도를 강력하게 요청하는 바람에 자기가 박정희와 미국 사이에 끼어서 샌드위치가 되어 죽겠다고 했습니다 미국측이 자꾸 황을 넘기라고 하니까 박정희가 피우던 담배를 던지고 고함을 치면서 절대로 넘겨줄 수 없다고 했다는 겁니다 김형욱이 황을 넘겨주고 다른 방법으로 한미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낫겠다는 얘기를 수차 건의했는데 번번이 묵살당했다는 얘기를 직접 들었습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황태성과 비밀회담을 통해 통일문제를 논의했던 사실과 민주공화당 창당 관련 20만불 조달문제등이 탄로나면 국민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을 두려워해서 미국에 넘기지 않으려고 했다고 봅니다"
(5)김형욱이 도박한 Las Vegas "씨저스 팔래스 호텔"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ld=10117&logld=261057
미국 CIA는 걱정했다
김형욱이 저렇게 오만방자하게 놀다간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암살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CIA요원을 붙인다 미국에서는 절대 암살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도록 조치한다 그래서 그런지 김형욱은 미국의 뉴저지주 거대한 저택에 살며 라스베가스를 제집 같이 드나들기 시작한다(당시 한인들에게는 거대한 주택이없음) 와중 프랑스 파리도 이따금 갔다 프랑스는 미국정보부의 힘이 미국과 같이 미치니 않는 곳이다
그러니 그를 쥐도새로 모르게 처치하려면 미국보다 프랑스가 더 나은 장소로 떠오르는 것
(6)인터넷 신문 경향뉴스 윈
http://www.newsone.co.kr/New/index_org4.php?id=157042&code=61&pa=c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3선 개헌을 주도했다 3선 개헌에 반대했던 이만섭 전(前)국회의장은 "당시 김형욱 부장이 지휘하는 정보부가 김영삼씨가 타고 가던 자동차에 초산을 뿌렸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7)국민복지회사건(國民복祉會事件)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2g2530a
1968년 김종필계의 민주공화당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당시 당 의장인 김종필을 1971년의 선거에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시키려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발각된 사건
-김용태가 회장인 국민복지회는 친선단체로 가장하여 정계. 금융계. 경제계. 언론계등의 엘리트들을 총망라하여 구성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관인 유승원의 부관이 국민복지회에 가담함으로써 알려졌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1968년 5월 18일 박정희의 명령에 따라 김용태의 동태를 살피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애초에 중앙정보부가 김종필에 의해 만들어졌던 만큼 중앙정보부내에는 김종필 및 김용태와 친화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따라 김형욱은 검찰실장인 방준모를 중심으로 특수조를 편성하여 김용태에 관한 조사를 진행시켜 나갔다 당황한 김용태가 국민복지회와 관련된 중요서류들을 굴뚝 속에 감추었으나..
(8)움직이는 세계-한겨레 21
http://h21.hani.co.kr/section-021019000/2000/021019000200009270327062.html
1960년대 3선 개헌 과정에서 야당의원 포섭공작에 나섰던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야당의원의 약점을 잡느라 <몰래 카메라>를 활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9)창경이의 미스터리-악마의 섬, 실미도
http://popcom_1.hihome.com/mi/mi.html
실미도 특수부대는 당시 권력실세였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대북 공작책 제1국장 이철희에 의해 만들어졌고 부대관리와 훈련은 공군이 맡았다
(10)2백자 원고지 5천 7백매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 <김형욱 회고록> 전 3권을 집필한 김경재 전(前)의원
http://kiss.breaknews.com/sub_read.html?uid=124§ion=section9
(11) 김형욱 회고록 저자 "김경재 전의원" 이제는 그들이 입을 열 때이다
사건에 근접했던 3인 지목
http://zine.media.daum.net/mega/newsmaker/200502/18/newsmaker/v8401977.html
김형욱 실종사건과 관련 김경재 전의원이 입을 열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3인이다
첫째는 당시 프랑스대사관의 정보담당자인 이상열 공사 그리고 소환당해 귀국한 이상열씨를 곧바로 중앙정보부로 데려가 심문을 담당했던 이종찬 전국정원장 그리고 김형욱씨에게 <여행을 하자>며 편지를 보낸 여성 연예인이 그들이다
-김형욱 미스터리는 그 동안 3가지 설이 있다
첫째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중앙정보부로부터 150만달러를 밤기로한 김형욱이 50만달러를 미리 받고 남은 돈을 파리에서 받으로 갔다가 살해됐다는 것
둘째는 과격한 성격의 차지철이 <박대통령에게 과잉 충성>을 하기 위해 납치해 서울로 데려와 모처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사살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카지노에서 단순강도가 돈을노려 살해했다는 설이다

(12)김형욱 살해. 중정이 미파아 통해 청부한 듯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2/005000000200502181546001.html
-김대중정부 시절 국정원 고위간부를 지낸 J씨
김형욱부장은 김재규의 지시를 받은 유학생(중정 직원)이 유인해 죽였다
김대중 정부때 국정원 고위직을 지낸 한 관계자는 2005년 2월 18일 <김형욱 전 중정 부장은 당시 중정이 청부를 줘 미피아가 살해한 것으로 들었다>며 <당시 공작에 참여한 중정 요원들이 8명 정도이며 이를 모두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애초 중정내의 관련자가 3명 정도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모두 8명이며 팀장급은 현재 81살쯤 됐을 것>이고 말했다 그리고 이 관계자는 <김형욱의 주검이 프랑스에 암장됐을 가능성이 높을 만큼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프랑스 현지조사를 통해 이를 발굴하고 DAN검사를 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중정이 마피아를 통해 청부살해한 후 프랑스 암매장했다는 입장
http://www.hani.co.kr/section-001001000/2005/02/001001000200502181728232.html
-당시 중앙정보부 간부 출신 A씨
김형욱(당시 55세) 전 중앙정보부 부장은 김재규 중정 부장의 지시에 의해 살해됐습니다

(13)재미 언론인 문명자씨가 쓴 책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내용 자료
http://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2/005000000200502141737082.html
-김형욱의 부인 신정순씨의 말
(유럽으로 떠나는 김형욱에게) "파리에 혼자 가느냐"고 물었더니 "이상열 공사가 다 알아서 해줄 것"이라고 대답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상열씨는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문명자씨의 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서 김형욱이 서울 근교 폐차장에서 살해됐다는 주장을 폈다
정일권 전(前) 국총리가 파리에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김형욱이 경복궁에서 청와대로 이어지는 지하 벙커를 통해 박정희 앞에 끌려갔고 "잘못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라고 빌었으나 폐차장 압착기 아래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강신옥 변호사의 말
중정보다는 청와대 경호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10.26사건 당시 김재규를 변호했던 강신옥변호사는 <나도 개인적으로 금금해서 김재규부장에게 여러 차례 "김형욱실종은 어떻게 된 것이냐"는 질문을 했지만 "정말 모른다"는 답변만 반복해 들었다>며 사형으로 죽어가는 김재규 말< 박정희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에 불타던 차기철 경호실장 쪽일 가능성이 크지 않갰냐>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김형욱씨가 국내에서 죽었다면 경호실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보며 프랑스에서 살해되었다면 중정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부마사태와 10.26사태와 깊은 연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형욱의 책자 내용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14)김형욱 서울서 피살설 제기( 김형욱씨 맏며느리 공개)
김형욱씨가 서울에서 살해됐다는 주장은 현재 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는 맏며느리 48살 김모씨가 제기했다 김형욱씨 실종사건과 관련해 직계 가족이 진술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씨는 오늘 YTN 뉴욕리포터와의 전화통화에서 시아버지는 프랑스 파리에서 살해된 것으로 아니며 중정요원들에 의해 한국으로 와 서울에서 살해됐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또는 시아버지 살해는 당시 프랑스에 파견된 전 중정요원 이모씨가 주도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가족들이 인사이드 인포메이션 즉 중앙정보부 내부로부터 이 같은 내용을 입수했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피살장소를 아느냐는 질문에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김형욱씨 맏 며느리 김모씨 인터뷰 내용
(질문) 사망장소가 한국입니까?
(답변)예!
(질문)청와대입니까?
(답변)예.. 어딘지는 관심이 없어가지고..
(질문)프랑스에서 실종됐는데 돌아가신 장소는 한국입니까?
예..이상열이 책임이 있다고 시어머님.. 온 가족이 확실히 말하고 있다고 알고 있거든요
(질문)가족들이 모두 밝히기 꺼려했을텐데 며느리인 김씨가 언론에 내용을 공개한 배경이 있습니까?
(답변)김씨는 남편이 오랜 지병으로 숨진 뒤 2년여 동안 자녀 3명을 데리고 혼자 살아왔으며 시아버지와 이 문제에 대해 발설하지 안기로 합의를 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재산 문제들으로 시어머지와 갈등을 빚었고 이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됐다고 김씨는 말했습니다
김씨는 최근 가족들과의 갈등 문제를 포함해 시아버지와 관련돼 잘못 알려진 내용은 오는 2005년 3월18일 기자회견에서 밝히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김씨는 시아버지가 실종된지 1년 뒤인 지난 80년 김형욱씨 큰 아들과 결혼했습니다

(15)김형욱, 청와대 지하실서 차기철 손에 죽었다?
http://www.donga.com/fbin/output?f=todaynews&code=a_&n=200503110347&main=1#
"박정희 전대통령이 청와대 지하실에 끌려 온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배신자>라고 부르며 총을 겨눠 사살하려고 했다 김형욱은 <나는 당신을 배신했을지언정 국민을 배신하지는 않았다>고 반박했다 박전대통령은 대노했다 옆에 있던 차기철 경호실장이 <각하, 손을 더럽히지 마시오. 제가 해치우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박 전대통령의 손에서 총을 낚아채 김형욱을 사살했다"

김형욱 회고록의 저자인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이 민주화 동지를 통해 들었다며 2005년 3월 11일 KBS라디오 <라디오 정보센터 박에스더입니다>에 출연해 밝힌 김형욱 <국내 피살설>의 핵심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김형욱 전 부장의 맏며느리가 최근 <시아버지는 파리가 아닌 서울에서 피살됐다>라고 주장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김경재 전의원은 <김형욱전부장이 한국에 끌려와서 처형되었다는 얘기를 민주화 동지인 송진섭 안산시장에게 들었다>며 이같이 밝혔다
김경재 전의원은 <송시장이 서대문 형무소에 구속되어 있을 당시 함께 수감 되어 있던 박선호 전 중정의전과장을 통해서 그 얘기를 듣고 내게 전해 주었다>고 말했다

(16)김형욱 파리서 안 죽었다
http://imnews.imbc.com/imnews/politic/1234537_512.html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돼 양계장에서 살해된 것으로 전해진 김형욱(당시 54세) 전 중앙정보부장이 최소한 파리에서는 살해되지 않았다는 근거 자료가 미국에서 나왔습니다 뉴욕한국일보는 오늘 실종 시기도 지금까지 알려진 1979년 10월 7일(이하 파리시간)이 아니라 이보다 이틀 뒤인 10월 9일이라는 사실이 담긴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를 입수해 공개했습니다
미국 국무부는 1980년 2월 29일 주한 미국대사관에 보낸 <주간 동향 보고서 한국판(Weekly Status Report-korea)>에서 "김(전 중앙종보부장)은 한인 남성 한명과 10월 9일 파리를 떠나 스위스 취리히를 경유해 사우디아라비아 다란으로 간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행적이 묘연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김 전부장이 파리 외곽 양계장 분쇄기에 살해됐다는 최근 보도와 1979년 10월 20일께 박정희 전대통령이 보낸 자객에 의해 파리 자동차 폐차장에서 압사당했다는 설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현재 국정원이 진행 중인 <김형욱 실종사건> 과거사 진상규명에도 중요 참고자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보고서는 또 <일본정부가 파리경찰을 상대로 김전부장 실종사건을 끈질기게 요구해 얻어낸 결과를 외싱턴 주일대사관이 우리(국무부)에게 전해왔다>며 <김은 한인 남성 한명과 함께 10월 9일 파리를 떠나 취리히를 경유해 다란으로 간 것이 확실하다>고 기록했습니다 보고서는 일본정부가 왜 김 전부장 실종사건에 관심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보고서는 <프랑스 경찰은 어쩔 수 없이 수사를 종결했다>고 덧붙여 프랑스 경찰이 당시 김 전부장의 실종사건을 철저히 조사했음을 암시했습니다
한편 이 보고서는 4천여 쪽에 달하는 국무부 한국관련 비밀해제 문서 중 김전부장이 거론된 유일한 것으로 1993년 비밀해제됐습니다

 

*“김재규는 두 가지를 착각했다”

 

나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습니다. 나는 민주 회복을 위해 그리 한 것이었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그리 한 것이었습니다. 아무 뜻도 없었습니다(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최후진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등 10·26사건 주요 관련자들의 변호인으로서 1심에서 3심까지 재판의 전 과정을 지켜봤던 안동일 변호사(65)가 ‘10·26은 아직도 살아 있다’(랜덤하우스중앙)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10·26사태 26주년에 맞춰 나온 이 책은 그동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10·26사태의 성격과 김 전 부장의 ‘범행’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해주는 요소들을 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책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담당 변호인이 쓴 본격적인 역사 기록물이라는 데 있다. 이제까지 나온 10·26 관련 저작물은 재판기록이나 수사기록, 관련자의 증언에 의존해 취재기자나 작가가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와 달리 공판조서와 법정 메모, 피의자 면담 등을 토대로 한 안 변호사의 기록은 10·26의 실체와 가장 근접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10월 26일 서울 중구 서소문동 배재빌딩 사무실에서 안 변호사를 만나 10·26의 실체에 한걸음 더 접근해 보았다.

책을 보면 김 전 부장이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혁명가로 묘사돼 있는데….

“어디까지나 그의 주장이죠. 내가 그걸 혁명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발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준비한 것은 사실이에요. 유신 선포 이후부터 ‘이건 민주헌법이 아니다’라며 회의를 품었던 거죠. 1974년 건설부장관에 임명됐을 때는 권총을 넣고 들어갔는데, 바지 담배주머니가 불룩한 그때의 사진을 법정에 증거물로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76년 중앙정보부장에 발탁되는 바람에 생각을 달리 한 겁니다.”

생각을 달리 했다는 건 무얼 의미합니까.

“그 전까지는 박정희와 자기가 같이 사라지자는 생각이었는데 중정부장이 되자 ‘아, 이건 선의로 해결할 수 있다’며 마음을 바꿔먹었어요. 모든 정보의 총책임자가 되고 항상 대통령과 독대하는 위치니까 유신체제를 완화하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거죠. 그런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나중에 들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등식을 세우기를 박정희가 바로 유신의 핵이다, 박정희가 있는 한 자유민주주의는 회복이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박정희가 없어져야 된다, 이런 확신적인 등식을 하나 만들어 놓고….”

왜 선의로 해결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어요.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거지요. 차지철도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어요.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 본인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하니까…. 더 큰 국민의 희생을 한 사람을 희생함으로써 막자는 거였죠.”

그런 취지로 혁명을 위한 거사를 했다면 그 뒤의 행동과는 앞뒤가 맞지 않지 않습니까.

“착각한 거지요. 착각한 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가 유신의 핵을 제거하면 7년여 동안의 유신체제, 더 나아가 박정희 18년 압제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던 모든 국민이 일제히 일어나 자기를 열렬히 환영할 것이라고 본 거죠. 두 번째는 거사가 성공하면 틀림없이 미국이 지지할 것이라고 확신한 겁니다.”

거사 직후 육본이 아니라 중정으로 갔다면 가능했을 법한데요. 김 전 부장의 판단이 순간적으로 흐려진 겁니까.

“그렇다기보다는 정승화씨를 믿었고, 또 육본으로 가도 계엄만 선포되면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판단이 흐렸다기보다 치밀하지 못한 측면이 있었죠.”

김 전 부장이 재직 시절 긴급조치 10호를 대통령에게 건의한 내용이 책에 나오는데 그동안 별로 알려지지 않은 얘기 아닙니까.

“긴급조치 9호의 나쁜 점은 죄목이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그 조치를 비판조차 못하게 하고 헌법 개정 논의는 아예 안 되게 했으니….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걸 완화하고 두 가지 ‘시퍼런 칼날’을 추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즉 노동계와 종교계를 규제할 수 있는 조항을 넣는 데 주안점을 두었어요. 표면적으로는 9호를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중요한 알맹이를 빼는 것이었죠. 이게 거의 될 뻔했는데 내부 반발 때문에….”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부분에서 책과 진실위 중간발표 내용이 상치됩니다. 김 전 부장의 ‘작품’이 아니라고 확신합니까.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그해 10월 초입니다. 김재규씨의 말을 들으면 그걸 자기가 자체조사시켰다는 겁니다. 그 보고를 받지 못하고 10·26이 났죠. 자기가 한 일이라면 굳이 조사를 시켰겠습니까.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아주 분개했어요. 정보부장을 지낸 사람을 그렇게 비참하게 죽이느냐고요.”

당시 역학관계상 김 전 부장이 그 일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김형욱 처리문제에 대해 항상 온건한 방법을 건의했었죠. ‘돈이 필요하면 돈이라도 줘서 막읍시다’ ‘신변 보장이라든가 자리를 요구하면 그렇게 해줍시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쪽을 설득해놓으면 저쪽이 안 듣고 저쪽을 해놓으면 이쪽이 안 되고…. 그래서 안 됐다고 했어요.”

궁정동 안가에서 간 여성이 200명쯤 되고 웬만한 일류 연예인은 다 불려갔으며 항간에 나돌던 간호장교 이야기, 인기 연예인 모녀 이야기 등 박 전 대통령의 여성편력에 대한 내용이 세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그건 중요한 얘기가 아닌데…. 김재규씨도 '남자는 벨트 아래 얘기를 하면 절대 안 된다'고 했어요. 박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 돌아가신 다음에는 많이 흔들렸거든요. 권력이란 건 10년 이상 잡게 되면 그렇게 되나 봐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 전 부장의 명예회복 문제로 진통을 계속하고 있는데….

“내게도 오라고 했는데 안 갔어요. 책을 쓰고 있는데 나는 이걸 자료로 주겠다고 했어요. 실제로 어제 책을 보냈고요. ‘안중근과 같은 의사다’와 ‘패륜아의 우발적 범행이다’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데 나는 그 판단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지요.”

안 변호사는 경기고·서울법대 출신으로 4·19시위 참여 후 민족통일연맹(민통) 활동을 하면서 학생운동에도 깊이 가담했다. 사단법인 4월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4·19세대다. 5·16쿠데타 직후 민통 관련자 일제 검거 때 도피하는 바람에 중형을 면한 그는 1980년 5월 10·26사건 대법원 확정판결 후에도 발 빠르게 잠적했다. 함께 변론했던 강신옥 변호사는 그때 연행돼 곤욕을 치렀다. 10·26 관련자들에 대한 변론을 너무 ‘열심히’ 한 괘씸죄 때문이었다고 한다.


 

 

10·26 사건(궁정동 사태)은 1979년 10월 26일대한민국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박선호, 박흥주 등과 함께 대통령 박정희, 경호실장 차지철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10월 26일, 박정희는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가졌다. 연회 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였고 곧 수도육군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후 7시경 과다 출혈로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1인 독재체제의 정치적 허점을 보여주였다.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권력 암투 과정에서 김재규가 차지철에 밀리는 상황이었고 이에 김재규가 충동적으로 일으킨 범행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편, 김재규는 10월 유신 때 부하들도 눈치를 챌 만큼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이 살인 사건을 7년간 준비해왔다는 설이 있고,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 추진과 박동선코리아게이트 사건 등으로 한미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 정부가 김재규를 통해 박정희의 암살을 은밀히 조장했다는 설도 있다.

1.사건 개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함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당진에 있는 중앙정보부 시설에 가려 했다. 그러나 '권력의 제 2인자'라고 불리던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를 일방적으로 제외시켰고 그 결과 방조제 준공식은 김재규가 없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박정희가 준공식에서 돌아오자,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오후 6시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부지 내에 있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한 안가로 오라는 박정희의 명령을 전했다.

 

2.사건 진행

김재규는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에게 박정희차지철을 죽일 것이라고 알렸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궁정동 안가로 들어오고, 김계원과 김재규도 연회장이 있는 '나'동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숨긴 채 박정희와 대면했다.

한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에게 보안 서약서를 쓰게 했다.

박정희는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 등과 함께 전통 한국식 만찬 교자상을 앞에 두고 앉아 술을 겸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박정희는 정치 및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대규모 소요사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김재규를 질타했다. 또한 신민당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온건한 자세도 질타하였다. 평소 학생 시위와 노동자 파업을 보다 확실하게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던 차지철도 지나치게 온건한 대응 탓에 혼란이 더욱 확산됐다고 주장하며 "반항하는 자들은 모두 탱크로 눌러버려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에 오자마자 전화로 들어오라고 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이 있는 '가'동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때가 저녁 7시 10분경이었다.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갔고 문 앞에서 총 체크를 하는 순간에 차지철이 나타났으나 김재규는 총을 도로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차지철은 그냥 지나갔다. 차지철은 경호원들이 있는 주방으로 내려가봤다. 차지철이 연회장에 다시 들어오는 때에 심수봉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다시 차지철이 들어오자, 김재규는 다시 나가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각하와 차지철을 죽일 것이다. 박선호 너는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과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

그 때가 저녁 7시 30분이었다.

다시 돌아와보니 시간이 저녁 7시 38분이었다.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자 이번엔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3.사건 순간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간에, 김재규가 총을 쏘고 총알은 차지철의 팔에 맞았고 김재규는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총을 쐈다. 그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통령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을 차례로 대기실에서 총을 쏴 죽였고,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역시 경비원들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들을 죽였다.

김재규가 총구를 차지철 쪽에 조준했고 차지철은 계속 김재규에게 저항하는데 김재규가 총을 쏘려고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작동이 되지 않았다. 그때 정전이 되었으며 김재규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갔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박선호가 나타났고 김재규는 총을 박선호의 총과 맞바꿨다.

박선호는 탐색하러 갔고, 김재규는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그때는 심수봉과 신재순이 박정희를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은 화장실에 숨었다가 다시 나왔고, 경호원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에, 다시 김재규가 들어와 있었다.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장을 던져 총을 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김재규는 피하고 차지철의 배를 향해 총을 쐈다. 차지철은 그대로 엎어졌다. 김재규는 박정희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가 어디론가로 숨었다. 김재규는 총구를 박정희의 머리에 겨누더니, 이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박정희의 사인은 머리에 총을 맞은 것이 아니라 가슴에 맞은 것이었으며 머리에 맞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연회장의 대기실에서 사건을 지켜봤다. 연회가 열린 '나'동이 아닌 '가'동에 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김정섭도 20여 발의 총소리에 조금 의아하게 여겼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김정섭과 함께 육군 본부로 갔다. 김계원은 박정희의 시체와 함께 국군 서울지구병원으로 가서 박정희를 살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김계원은 청와대로 들어와 국무총리 최규하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고, 최규하와 함께 육군 본부로 가서 정승화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을 만나 범인은 김재규라고 다시 말했다.

박선호의 명령을 받은 경비과장 이기주는 경비원 김태원을 시켜 쓰러져 있는 사람 모두를 확인 사살시킨다. 꿈틀거리던 차지철도 이렇게 죽어버렸다.

 

4.김재규 체포와 사형집행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육군 본부 헌병감 김진기에게 김재규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렸고, 10월 27일 오전 0시 40분경에 김진기가 김재규를 체포하자, 정승화는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불러 이를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인계받아 김재규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후 김재규는 동빙고동에 있던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사를 받았다. 김재규는 "너, 각하와 차지철에게 무슨 짓 했어? 어? 너 쇠파이프 맞아야 될려나 보다. 너 미쳤니? 네가 장애인이라서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거야?"라는 심한 욕도 들어야 했고, 쇠파이프로 맞았으며, 전기고문과 물고문까지 당했다. 1980년 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살인>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80년 5월 24일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5.사건의의와 박정희 저격 이유

나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습니다. 나는 민주 회복을 위해 그리 한 것이었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그리 한 것이었습니다. 아무 뜻도 없었습니다.

 
— 김재규,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

2004년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재규 부장에게 명예회복을 시도하는 등 10·26 사건에 대한 재평가 시도가 있었다. “안중근과 같은 의사다”와 같은 주장도 있었다

김재규는 10월 유신 때 부하들도 눈치를 챌 만큼 박정희에게 반감이 있었고 거사를 7년간 준비해왔다는 설이 있다.

1심 최후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에 의하면 차지철은 그런 참모가 옆에 있고 박정희도 ‘옛날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가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이어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암살을 했다고 주장했다

 

6.사건 여파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하기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군부 내 파벌 갈등으로 인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켜 군부를 장악했다. 신군부 세력은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10·26 사건 목격자 가수 심수봉은 전두환이 집권하던 시기에 가수로서 활동을 금지당해야했고, 사건 목격자 모델 신재순은 미국으로 이민갔다.

 

*사건 현장에 있던 사람들

박정희 - 대한민국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저격을 당한 뒤 사망.

차지철 - 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총을 맞고, 중정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당함.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박정희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을 궁정동 안가 연회장에서 사살함.

김계원 - 대통령 비서실장, 사건 목격자.

심수봉 - 가수, 사건 목격자.

신재순 - 모델, 사건 목격자.

 

*사망자

박정희 - 대한민국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머리와 가슴을 맞고 사망.

차지철 - 대통령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팔과 배를 맞고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당함.

정인형 - 대통령 경호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맞고 사망.

안재송 - 대통령 경호부처장,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게 가슴을 맞고 사망.

김용섭 - 대통령 경호관,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에 의해 사살당함.

김용태 - 대통령 운전기사,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에 의해 사살당함.

 

*생존자

김계원

박상범

심수봉

신재순

 

*사건 처리자들

정승화 -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박정희 유고후 계엄 사령관

최규하 - 국무총리, 박정희 유고 후 비상 국무회의 주관

김정섭 - 중앙정보부 제 2차장보

전두환 -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10·26 사건 수사 지휘자

 

*처벌

박흥주 대령의 경우는 그 신분이 현역 군인이었던 관계로 다른 가담자들보다 일찍 육군 교도소 내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박흥주 -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 대령, 중위 시절 김재규의 전속부관 - 1980년 3월 6일 총살형

박선호 -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중학교 시절 김재규의 제자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유성옥 -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전가옥 운전기사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이기주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과장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김태원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유석술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징역형

서영준 - 궁정동 안전가옥 경비원- 징역형

 

 

 

△ 김재규의 ‘민주인사’ 인정은 정당한가. 박정희 시해 사건 이후 현장검증(80보도사진연감), 선고공판(연합), 사형집행 직전의 모습(연합). (윗쪽부터)

10 · 26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성격

 

강 변호사를 비롯한 변호인단은 1980년 1월 제출한 항소이유서에서 △김재규는 3군단장으로 재직 중인 1972년 12월27일 유신헌법이 공포되자 유신헌법은 박 대통령이 영구 집권하기 위한 헌법으로 민주헌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976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 뒤로 1978년에 긴급조치 해제 건의를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등의 ‘민주화 행적’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보적 사회평론가 진중권씨 등은 “유신 체제를 유지했던 가장 강력한 억압기구가 바로 중앙정보부였다. 민주화 인사를 탄압하고 고문했던 기관의 장이 바로 김재규였다. 그런 기관의 장이 단지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이유만으로 민주화운동 유공자가 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반박했다. 진씨 등은 “김재규를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규정하는 것은 이미 다른 민주화 유공자로 되신 분들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고 밝혔다.

8월9일의 민주화심의위 관련자 분과 회의에서도 이런 복잡한 상황이 두루 검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판정을 일단 보류한 가운데 ‘필요한 자료와 증인을 더 확보하자’, 그러면서도 ‘시한을 정하지는 않은’ 이날 논의 내용도 그런 고민의 산물로 해석된다. 이날 관련자 분과 회의에선 민주화운동정신계승 국민연대가 ‘8월16일의 (신속한) 결정 반대’ 입장을 밝혀온 점도 고려된 것으로 알려졌다.

8월9일의 분과의 논의로 ‘김재규 심의’에 대한 공론화 길이 한결 넓어진 가운데, 공론화의 절차와 방법을 놓고도 이런저런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심의위의 일부 위원들은 이와 관련해 “김재규에 대한 심의 결과는 불가피하게 10·26 사건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 성격을 갖게 마련”이라며 “국무총리 소속의 행정위원회 성격인 민주화심의위가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꾀하는 것, 그것도 민주화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학계 안에서조차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사안을 서둘러 결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밝혔다. 민주화심의위가 지금까지 대체로 이미 판가름난 역사적 인식을 토대로 해당자를 가려 보상책을 강구하는 행정 행위를 주로 해온 반면에, ‘김재규 심의’는 여러모로 성격이 다른 점에 이들이 주목하는 셈이다.

민주노동당의 천영세 의원은 국회 차원의 유신 문제 평가기구 가동 방식도 제안하고 있다. 천 의원은 “당면한 현안 처리를 위해 올가을 정기국회는 넘긴 뒤에 고려할 문제”라며 “그 뒤에 정치권이 나서 현대사 재평가를 위한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나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북한 병정분리주의 좌익군정을 지지하는 세력이 애국자가 아니면 좌익군정을 사살한 세력이 애국자인가

귀가 빙빙돌아가는 사람은 의견이 다양합니다

많은 분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세습제 좌익군정을 종언하고 수평적 권력교체와 북미수교등을 추진하기를 바랬습니다

나는 세습제 좌익군정 추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제거를 지지했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건강에 관한 상황은 사망일  2년전부터 병원 입원 중국자료로 파악했고  러시아 방문 때 미국정부로부터 머리소리함으로 건강상태 불안으로 전달 받았습니다  

공화국이냐 국왕(전제 군주국)이냐 구분은 국왕제(군주제)를 부정하는 것이  공화국 이론입니다  공화국에는 국왕 즉 세습제가 없습니다

머리소리함 내부 귀소리팀 중 세습제  좌익군정을 지지하는 세력이 제거돼야 남북통일이 가능하다는 입장과 북한 현체제를 인정하면서 핵무기 포기와 북미수교, 북일수교, 남북대표부 설치등을 점진적 권력교체등을 주장하는 분으로 논의돼 오고 있습니다

 

김재규전중앙부장이 박정희전대통령 암살은 미국대통령 선거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와 부마 항쟁 그리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추진등으로 한국정부 내 주요 인사 문책론(경질론)이 나왔고 최규하 내각 총사퇴는 김재규등 경질로 이어질때 한국정부내 강경파 제거와 온건파 등장이 될때 미국 민주당후보에게 유리할 수 있었습니다

등소평 주석 미국방문이나 권력등장으로 중국정부가 임기제한 5년 중임 국가 주석제 도입으로 유신이론이 폐기돼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김재규 前중앙정보부장 “대통령을 희생시키고 본인도 자결하는 것”

혁명.
나는 1972.10 유신 직후 제3군단장으로 복무하면서 헌법을 보았다. 몇 차례고 보았다. 그러나 이 헌법이 아무리 보아도 민주 헌법이 아니고 그 목적이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영구 집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간단히 파악할 수 있었읍니다. 그 순간 나는 격분했고, 박 대통령이 한없이 미워졌읍니다. 당장 옆에 있으면 주먹질을 할 정도로 미워졌읍니다. 이 때 나는 생각했읍니다. 이 목숨 하나 바쳐서라도 이 자유를 회복해야 하겠구나 하고. 그 해 신체제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은 전방 군단 연말시찰을 했다.
나는 이 기회에 대통령을 납치, 하야시킬 생각을 하고 준비를 했다. 군 영내에 깊숙이 들어 온 이상 얼마든지 가능했읍니다.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대통령을 맞았으나 차마 결행할 생각이 우리들의 정리 때문에 일어났다 사그라지고 일어났다 사그라지곤 했읍니다. 결국 못하고 말았읍니다. 자신을 졸장부로 생각, 비웃었읍니다.
그 후 다음 해인 1973. 3 생각지도 않던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본인 의사도 물음이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알려 왔읍니다. 본인은 군인으로 좀 더 봉사하겠다고 했으나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리하여 30년 군 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49세에 예편했다. 생각하면 고생도 되었으나 보람도 있었다. 서운한 감 금할 길이 없었다.
국회의원 생활 10개월쯤 되어 중정 차장으로 발령되어 국회의원을 그만두고 중정 근무를 했다.
중정 근무 당시 민청학련 사건을 위시하여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본인은 민주화 운동과 통제에 도전하는 정당한 주장자들을 처벌하는데 나의 양심과 직책의 틈바구니에서 고민했다. 나는 항상 주장했다. 소수로 처벌대상을 추리라고, 그러나 사건은 꼬리를 물었다. 때로는 혼자서 격분도 해 보았다.
긴급조치로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놈의 정치가 어디에 있나. 주인은 국민인데. 국민을 우매하게 보아도 분수가 있지 나는 생각했다. 국민은 우매하게 보일는지 몰라도 결코 우매하지 않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했다. 국민이 우매하다면 하늘이 우매하다는 것이다. 하늘이 우매한가. 하늘을 우매하다고 보는 사람이 우매하지.
국민은 정부에 대해서 백번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백한번 용서해야 한다. 이러한 형안과 아량을 못 가진 자는 나라를 맡을 수 없다. 우리 정부는 국민을 적을 대하듯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집권 있고 나서 국민도 정치도 있다는 생각과 태도는 이미 지도자로서의 자격은 상실된 것이다. 우리 정부에는 고위관리도 많고 유능한 자도 많으나 단 한 명도 똑똑히 나라의 장래나 국민의 권리를 대변해 주는 이는 없었다.

나는 그후 10개월 후에 건설부 장관으로 전보되었다. 나를 전보한 것은 영전을 시켜려는 목적이 아니라 신 만만치 않으니 좋게 해서 내보내 준 것이다.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밉고 미운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여하히 해야 하겠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유신독재는 박 대통령 각하 혼자서 지키고 있으며 나머지는 그저 따라 하기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우리 국민들 전체도 자유를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누가 여하한 방법으로 유신독재 체제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하고 사방을 돌아보았으나 그러나 아무도 용기를 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하는 수 없구나 내가 하는 방법 이외에는.
이리하여 1974. 9. 14일 건설부 장관으로 사령장을 받는 자리, 청와대 접견실에서 대통령을 희생시키고 본인도 그 자리에서 자결하는 방법을 결심하고 당일 나는 권총을 몸에 품고 입장했다.
그러나 막상 결행하려고 하니 또 인정이 나를 가로막았다. 불발로 마치고 서글펐다. 자신의 못남을 뉘우쳤다. 그러다가 해는 바뀌어 다음 해인 1975. 2 연두순시 때 건설부에 대통령 각하께서 오셨다. 나는 그 날도 완전한 준비를 해 놓았다. 또 마찬가지로 용기부족과 인정이 나를 막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단념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유서와 태극기를 모두 불태우고 말았다.
그 후 1976. 12. 4 돌연 대통령께서 집무실로 부르셔서 집무실로 갔더니 중정부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순간 기분은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본인은 좋다 그러면 이제는 순리적 방법으로 대통령을 설득하여 유신체제를 고쳐보자, 절호의 찬스다. 이렇게 생각하고 처음에는 대통령의 의중을 탐색하는 데 노력했다.
그러나 조금도 틈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미련스럽게 틈만 있으면 슬슬 완화해보시도록 이야기해 보았으나 어림도 없었다. 국내 여론은 물론 혈맹의 우방 미국이 우리 나라 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세계의 자유 우방이 우리에 대해서 인상이 좋지 않다는 것 등.
그러나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조금도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아 나는 이제 다 틀렸다, 마지막 방법으로 혁명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 1979. 4 혁명을 결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건이 좋지 않아 미루다가 10. 26 드디어 결행하고 말았다.

혁명의 목적은
1. 자유 민주주의 회복
2. 국민의 희생을 더 이상 없애고, 예상되는 불행을 예방한다.
3. 적화를 예방한다.
4.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국방 안보를 튼튼히 하고 경제 외교 면에서 호혜의 이익을 도모한다.
5. 국제적으로 독재국가라는 낡은 이미지를 씻고 한국민의 명예를 회복한다.
이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여는 유신 체제로 지탱하고 있는 핵인 박 대통령 각하만 제거하면 다른 것은 손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최소의 희생으로 목적을 달성했다.

혁명의 성공
10.26 혁명으로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되었다. 이는 마치 자유가 흐르는 강을 가로막고 있는 보를 절개해서 물을 흘려 보내는 것과 같다. 이제는 천하 누구도 이 자유의 물결을 가로막을 자는 없다. “이는 천명이요. 대자연으로의 섭리이다.”
혁명 결행해서 죽지 않고 살아났다. 이는 기적이다. 나는 죽을 가능성을 90%로 보았다. 경호요원들의 권총실력으로 보아 우리 동지 몇 명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살았다. 혁명 결행이 중요하지만은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혁명 과업수행이다. 근 20년 동안에 어지러진 쓰레기가 산적해 있지 않은가.
혁명적 방법이 아니고 무엇으로 시정할 것인가. 지금도 천하를 활보하고 있는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정렴, 오정건, 장동운, 길재호 등 수많은 부정치부자의 재산을 혁명적 방법이 아니고 무슨 방법으로 환수하겠는가.
유신 헌법을 기초하여 국민을 우롱한 자 무슨 방법으로 다루겠는가. 긴급조치 9호를 기초한 자, 무슨 방법으로 다루겠는가. 그후의 각종 의혹 사건 무슨 방법으로 다루겠는가.
권력과 결탁하여 집중 융자로 특혜를 받은 대기업들, 중소 기업들의 파산을 외면한 처사는 누가 책임지겠는가 등 설거지꺼리가 수업이 많이 있다. 이대로 두고도 이 사회에 정의가 살아 있다고 하겠는가.

나는 진로방해로 중도에서 아무 것도 손대지 못하고 말았다. 원컨대 개인은 여하히 되어도 좋으나 나라의 근기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지금 과도기에 요직에 있는 자들이여 나라 장래에 대한 책임을 느끼라. 눈을 뜨고 똑바로 세상을 보라. 이 나라 국민은 3.1 운동과 4.19를 치른 슬기로운 국민이다. 솥뚜껑으로 자라를 잡아보아라. 누르는 힘이 다하면 살아서 다시 기어 나온다.
이 원리를 모르면 바보다. 1개 군인 소장의 정치 경험으로 국사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최 대통령은 이런 소인배에 국가의 중대사를 맡겨도 좋은가. 최 대통령께서는 감정을 떠나 허심탄회한 생각으로 국사를 다루고 계시는가. 나는 당신을 높이 평가했으나 아무런 실수 없길 바란다.

<혁명과 희생>
박 대통령께서는 유신체제를 방어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완벽을 기했다. 따라서 자신과 체제개혁을 숙명의 관계로 만들어 놓았다. 한쪽의 희생 없이는 한족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민주주의 사회는 항상 필요하고 국민의 여망이 있으면 고칠 수도 있어야지 완전폐쇄를 시켜서는 혁명 이외 방법이 없게 된다. 대통령의 희생은 원통한 일이나 민주회복을 위해서는 방법이 없었다.

우리 나라의 앞으로의 전망>
자유민주주의는 누구도 못 막는다. 이제 과도기를 거쳐 신정부는 완전한 자유민주주의를 할 것이다. 이는 오로지 10.26 혁명의 성과이다.
민주회복을 최대통령은 인위적으로 혼란이라는 이유를 들어 천연시키길 것이다. 이는 큰 어폐이다. 계엄이 해제되거나 장기화되면 촉진투쟁이 일어날 것이다. 2, 3월 개학기가 위기가 될 것이다. 언론 보도 통제를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절대 현명한 방법이 못된다.
일시에 대폭발이 되어 그 동안의 불만이 터진다. 생활급이 못되는 노동자가 대정부 투쟁을 할 것이고 종교계, 기독교 중심으로 자유화 투쟁이 거세게 일 것이다. 국회가 개원되면 정국은 흔들릴 것이고 물가고를 못 잡으면 국민들의 대 정부 불신임이 고조되어 막기 어려울 것이다.
중세금정책도 문제가 될 것이다. 정부 정책발표가 조령모개하고 경제부처 장관들의 보조 불일치로 국민들의 정부신뢰도는 더욱 하락할 것이다.
앞서서 대책을 강구하는 것만이 불행을 막을 수 있다. 모든 투쟁 요인을 사전에 없애야 한다. 두고볼 일.
북괴는 평화공세로 나올 것이다. 그러면서 국론분열을 부채질 할 것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착실히 대처해야 한다. 국민이 민주통일이념을 확고히 하게 지도해야 한다. 국민에게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과연 여하히 찾을지?
미국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한정책이 나올 것이다. 물론 자유호가 제일 먼저 주장될 것이다. 이런 제문제들에 대해서 과연 대책이 연구 검토되고 있는지. 우선 복수 토의라도 있는지 알고 싶다.
누가 토의를 할 것이며 구상을 할 것인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고물가 대책>
국민의 생활안정을 보장하느냐는 것이 정부의 책무다. 생필품 중 절대적 품목을 골라서 무한정 생산하게 해야 한다. 정부는 지원해서 물량 확보가 되어야 한다. 대만을 보라. 물가 조정을 잘 하고 있다. 봉급자들의 생활급이 보장되도록 정부는 개입 조정해야 한다.
국민들의 협조를 호소해서 지지와 동조를 받아야 한다. 재벌 대기업들의 애국심 발휘를 유도해야 한다.

<혁명 성공 후의 나의 계획 복안>
3,5개월 이내에 완전한 민주회복을 해서 속히 정국을 안정시킨다. 밝고 명랑한 분위기가 국내에 충만하게 한다. 못살아도 불행한 것이 아니다. 정부를 신뢰하고 협조하며 같이 노력하는 우애에 넘치는 사회를 만든다. 그리하여 국민과 정부가 남이 아니라는 국토를 만든다.
신정권을 보위하여 5.16과 같은 사태를 미연에 방지한다. 정부의 행정기능이 집권당에 위해서 좌우되지 않게 해서, 여하한 정당이 집권하더라도 행정기능은 일사불란하게 대민 봉사를 한다. 여당 우위의 사고방식을 제거한다.
선거에 대한 과열을 방지하고 행정부의 절대중립을 보장한다. 정권의 교체나 지도자의 교체는 정당한 민의로서만 이뤄지게 하고 인위적 방식으로 장기집권은 절대 못하게 한다. 사회의 부조리는 근절시킨다. (사회정의를 구현한다).
집권자의 여하한 횡포도 용서하지 않는다. 대대적 국민운동으로 민주국민 교육을 통해서 국가관. 사회관. 생활관을 함양한다.
건국후 한번도 못해본 진정한 민주사회를 만들고 명랑한 복지사회를 만든다. 본인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국민운동회를 맡아서 사회발전에 기여함이 목적이다.

<국회의 처사>
국회가 정말로 존재했는지. 스스로 민의를 대변하는 자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지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이 나라 민주주의가 완전히 회복되는 날 지금의 국회의원들을 무엇을 했다고 하겠는지. 정말 민의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지 한심할 지경이로다.
걸핏하면 국회조사단 운운하던 친구들이 10.26 혁명에 대해서는 한마디 조사단 운운 말이 없으니 이런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가 국회의 관심 밖이라니.
정말 진정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유권자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한번이라도 좋으니 똑바로 민의를 반영해서 정부가 국민의 민의에 따라서 방향을 정하고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게 하시는 여러분이 이러니 이 나라 민주주의는 자주 병드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되지 않는 책임은 비단 행정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입법부에도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앞으로 국회에 대해서 양심 있는 정치인으로서 민주발전에 기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민들에게>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값비싼 대가를 치러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의 자유가 병들었던 것도 우리의 노력부족과 무관심에서 빚어졌습니다.
우리는 자유가 없어지고 나서 그 귀중함을 알게 되기 쉽습니다. 자유는 우리 대한민군의 기본입니다. 이게 없으면 공산주의도 못 막고 국토방위도 못하고 사회발전도, 경제발전도 복지사회도 다 못합니다. 일시적으로 무엇이 되는 것 같아도 궁극적으로 아니 되고 맙니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암흑의 사회로 곧 지옥입니다. 자유는 남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입니다. 국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지킵시다.
“오늘은 나를 위하고 내일은 후손들을 위하여”

“대통령과 대법원장에게 서신을 준비해보자”
“나를 앞세워 타인의 생명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

*김재규
1945년 9월 경북사범대학교 중등교원 양성소를 수료하고 김천중학교의 교사로 재직중 1946년 9월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육사 제2기로 그해 졸업·임관했다. 이승만(李承晩) 집권기에는 이종찬(李鍾贊) 계열의 장교로 인식되어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으나, 이종찬 장군의 도움으로 군에서의 위기를 여러 차례 극복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호남비료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6·3사태 때에는 준장으로 계엄군을 지휘하기도 했으며, 그후 보안사령관·3군단장을 역임하고 전역했다. 1973년 3월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이 되었으나 그해말 중앙정보부의 차장으로 임명됐다. 1974년 9월 건설부(지금의 건설교통부)장관에 취임, 중동건설 수출을 적극 추진하는 일을 맡았다. 이어 1976년 12월 제8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중앙정보부장 재직시는 유신체제가 그 스스로의 한계상황을 노출시키면서 와해되던 시기로서 1975년 발동한 긴급조치 9호 등의 억압적 조치로 명맥을 유지하던 때였다.

한편 1979년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는 YH여성노동자를 강제 해산시킨 것도 그의 중앙정보부장 재직중의 일이며, 학생운동과 대중운동의 결합이 부산·마산 지역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을 때는 시민들의 항쟁이 가속화될 것으로 입장을 개진하기도 했다. 중앙정보부장 재직 말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신뢰를 점차 잃었으며 경호실장 차지철과도 심각한 마찰을 야기했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의 안가(安家)에서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과, 실질적인 제2인자로 권력을 행사해온 차지철을 살해하여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김재규는 재판과정과 사형집행 직전까지 '10·26민주회복국민혁명'을 시종일관 주장했으나, 1980년 5월 24일 서울 구치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공화국은 국왕이 없다 세습제 왕을 원한다면 왕을 죽어야 공화국을 유지할 수 있다

 

*<씨이저>보다는 로마을 더 사랑하기에 연설문은 고대 로마의 영웅 <씨이저>는 <페르샤>를 정복하여 <그리스>원수를 갚게 되자 명성이 높아감을기회로 로마 왕제 왕위를 오를 야심을 품고 있었고 <부르다스>는 씨이저를 죽이는 것이 공화정치 건설자인 자기의무라고 믿고 마침내 <씨이저>를 저격 살해하였다
그리고 로마시민들은 모아 놓고 자기가 <씨이저>를 죽이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웅변으로 설명 하였다...

[공화국은 군주제와 다른 세습제 국왕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공화국은 민주공화국, 인민공화국, 연방공화국, 사회주의 공화국,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슬람(회교)공화국 등이 있습니다. 공화국 국가원수는 대통령으로 임기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씨이저>보다 더 로마를 더 사랑하기에 (연설문 제목)

나의 사랑하는 로마 시민 여러분
잠시 동안 조용히 나의 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인격을 믿고 나의 명예를 생각하여 이 <부르다스>의 말을 의심치 마십시오
여러분은 잘 분별하는 마음으로 냉정하게 내 말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씨이저>를 사랑하는 분이 계시다면 나는 그에게 이 <부르다스>가 <씨이저>에 대한 사랑은 결코 그분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씀 드리려 합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여러분이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씨이저>를 죽었느냐고 나무랄 것입니다
<씨이저>를 사랑하는 마음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로마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나의 대답입니다
여러분은 <씨이저>가 살아있으므로 해서 로마사람들이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십니까?
<씨이저>가 죽음으로써 로마 사람들의 자유의 인민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까?
나는 <씨이저>가 나를 사랑하는 까닭에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나는 용감하였던 까닭에 나는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가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그를 죽었습니다
야심에 대해서는 죽음이 있을 따름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좋아서 노예가 된 사람이 있겠습니까?
로마 사람이 아니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있다면 있다고 말씀 하십시오
나는 여러분의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내가 한 일을 책망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내가 <씨이저>에게 한 일을 여러분이 이 <부르다스>에 대하여 하셔야 할 일이 있겠습니까?
<씨이저>의 죽음 경위는 <캐피탈> 전당기록(殿堂記錄>에 올라져 그의 영광은 손상됨이 없이 그의 죄과(罪科)도 이상 더 지워지는 일 없이 전해질 것입니다
오! <씨이저>의 시체 옆을 <마아크 안토니>가 울며 울라옵니다
<안토니>는 <씨이저>를 죽이는 일을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마는 여러분과 함께 <씨이저>의 몰락으로 복리를 받은 공화국의 일원이 될 것입니다
이 <부르타스>는 나라를 위해서 눈물을 먹음으며 가장 사랑하는 동무를 죽였습니다
만약 로마가 <부르타스>의 죽음을 원하는 때엔 <부르타스>는 언제든지 <씨이저>를 죽일 것과 똑 같은 칼을 이 몸에 받기를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 반공반독재구국전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민주정부로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공산주의 반대는 자본주의입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자본주의 3대원칙 개인의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시장경쟁원리등)를 부정하지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 국가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민주정부 복지국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유럽을 동서 양 진영으로 분단했던 이른바 '철의 장막'의 붕괴 2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식전이 동서를 실제로 격리시킨 철조망을 처음 철거한 헝가리에서 열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서 양 진영간에는 철조망 등이 길게 쳐져 있었으나 20년 전인 6월 27일 당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외상이 양국의 국경에 있었던 철조망을 절단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당시의 동독 국민이 헝가리 등을 경유해 서독으로 넘어왔으며 그 해 11월에 '베를린의 장벽'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3대 원칙[개인의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시장경쟁원리] 승리입니다. [미국정부 귀가 빙빙 돌아가는 머리소리함 연구원 許灌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