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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중앙정보부에 특별지시 하달 "김형욱 건에 '용서'란 있을 수 없다" 본문
박정희, 중앙정보부에 특별지시 하달 "김형욱 건에 '용서'란 있을 수 없다"
CIA Bear 허관(許灌) 2014. 10. 26. 15:04
▲ 박정희 전 대통령은 77년 6월 17일 중앙정보부 앞으로 '대통령 특별지시사항'을 하달해 "김형욱에게 용서란 없다"고 명령했다. 사진은 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왼쪽에 정일권 총리가 서 있다. 정일권 총리는 김형욱 미국 망명 당시 미국으로 김형욱을 설득하러 갔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지난 77년 6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용서할 수 없다는 내용의 '대통령 특별지시사항'을 당시 중앙정보부에 하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따라서 이 '특별지시사항' 문서는 그동안 의혹으로만 제기되어 왔던 박 전 대통령의 '김 전 중정부장 살해 지시설'의 신빙성을 한층 높여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바 따르면,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77년 6월 17일자로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보낸 '대통령 특별지시사항' 문서를 확보했다.
박정희 "정부는 온갖 노력해야 한다고 명심할 것"
▲ 박정희 전 대통령 |
이 특별지시사항은 김형욱 전 부장의 미국 망명 이후 행각에 대해 엄중한 조처를 명령한 내용이다. 이 문서는 현재 국정원 진실위가 보관중이다. 박 전 대통령이 중정에 내린 특별지시사항은 다음과 같다.
"본 건(김형욱의 미국 망명 이후 행동)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므로 정부는 온갖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임을 명심할 것이며, 본 건에 관한 한 용서란 있을 수 없음."
1972년 유신헌법을 선포한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중앙정보부에 특별지시사항을 내려보내 "정부는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을 명심하라"며 "김형욱에게 용서란 있을 수 없다"고 밝힌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당시 이 지시사항을 접한 정보요원들은 이 뜻을 명확히 알고 '누가 나한테 지시하지 않나, 명령만 내려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에 따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단독 범행은 아닐 수 있다는 일단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지난 26일 국정원 진실위의 김형욱사건 중간조사 발표이후, '김재규 정범론'이 일파만파 번졌었다.
김형욱 미국 망명활동 차단방법 여러 경로로 연구
박 전 대통령은 이 특별지시사항을 내려보내기 전에도 김형욱 전 부장의 미국 망명 이후 활동을 전격 차단할 방법에 대해 여러 차원으로 궁리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김형욱 전 부장을 설득하기 위해 미국에 특사 형식으로 정부 고위급 인사를 파견하는 일이었다. 1973년 4월 김 전 부장의 미국 망명 직후,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정일권, 김종필, 김동조, 오치성 등 정부 고위급 인사들을 미국으로 보내 김형욱의 귀국을 설득한 바 있다.
계속되는 고위층들의 설득에도 김 전 부장은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77년 6월 2일엔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정권의 내부비리를 폭로했다.
김형욱 전 중정 부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불만을 품고 비리폭로에 나선 이유는 69년 10월 박정희정권 유지를 위한 3선 개헌의 1등 공신인 자신을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하고, 73년 3월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에서도 제외했기 때문이다.
김형욱 전 부장은 이에 따라 미국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비롯한 각종 박정희정권의 비리를 터뜨리는 나팔수가 됐다.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도 출석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강력히 비난하고, 치부를 고발하는 회고록 출간도 추진했다.
이를 참다못한 박 전 대통령은 77년 6월 16일 김재규 중정 부장에게 "김형욱의 미 하원 청문회 출석 저지를 위해 민병권 무임소장관을 특사로 파견해 김형욱이 자제할 수 있도록 설득, 회유하라"고 명령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6월 17일에는 박 대통령이 직접 김형욱 관련 특별지시사항도 내려보냈다.
총리 주재로 김형욱 대책회의... "김재규 단독범행은 불가능"
이 같은 김형욱 전 부장의 행동에 대해 박정희정권은 "용서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정부 차원의 대응책 마련에 부심했던 것이다.
미 하원 청문회 직후인 77년 6월말 박정희정권은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로 "김형욱 대책회의"를 3차례 여는 등 강력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대책회의만으로 끝낸 것도 아니다.
박 대통령은 77년 12월 '외국 정부에 대하여 도피처 또는 보호를 요청한 자'와 '외국에서 귀국하지 아니하는 자로서 죄상이 현저히 중한 자'를 처벌할 수 있는 '반국가 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명백히 김형욱 전 부장을 겨냥한 것으로 정부 내에서 추후 김형욱과 같은 행위를 하는 자에 대해서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경고장이었던 것이다.
'대통령 특별지시사항' 적극적 해석해야
이처럼 김형욱 전 부장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일련의 작업과정을 볼 때, 10월 7일 프랑스에서 이뤄진 김형욱 살해사건에는 김재규 전 중정 부장의 손을 넘어 그 윗선에서 기획됐을 가능성도 크다.
한 역사학자는 이와 관련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직접 지시해서 살해하라는 명령과 달리 특별지시사항으로 살해를 암시하는 것도 명령"이라며 "박정희의 특별지시사항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역사학자는 "당시 권력구조상 박정희 지시 없이 김재규 단독범행은 불가능했다"며 "김형욱의 미국 망명 이후, 살해사건이 몰고 올 국제적 파장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김재규 혼자서는 감행할만한 일이 못된다"고 덧붙였다.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도 29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김재규 부장과 김형욱 전 부장은 둘 다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입장이었다"며 "김재규 부장이 자기와 정치적 견해가 같은 김형욱을 살해하라는 야만적이고 불법적인 명령을 내릴 리 만무하다"고 말했다.
▲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26일 오전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에서 `김형욱 실종사건` 등에 대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26일 오전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에서 '김형욱 실종사건' 등에 대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김형욱 전 중정부장은 79년 10월 실종 당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지시에 의해 중정 프랑스 주재 거점 이상열 공사와 중정 직원 연수생, 이들이 고용한 제3국인들에 의해 파리 현지에서 살해된 것으로 조사됐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 이하 진실위)는 26일 오전 서울 내곡동 국정원 국가정보관 3층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사건에 대한 중간발표를 했다.
박 전 대통령은 김형욱 활동에 분개했지만... 지시는?
진실위는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형욱의 박 정권 비난활동에 대해 분개하고, 김형욱의 미 하원 청문회 출석 및 회고록 출간을 저지하도록 지시한 사실은 분명하나, 직접 김재규 전 중정부장에게 김형욱 살해를 지시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추가 확인작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국정원 진실위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김형욱 살해사건에 직접 가담했다고 진술한 신현진(가명, 당시 중정 연수생)은 1979년 10월 7일 저녁 동유럽 외국인 2명을 고용해 미화 10만달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사건을 지시했다.
신현진은 국정원 진실위의 7차례 면접조사에서 이상열 프랑스 주재 공사의 지시로 미리 받아 갖고 있던 소음권총 1정과 독침 가운데, 권총만을 동유럽 외국인에게 제공했고, 이들은 파리 시내를 이탈해 인적이 드문 작은 마을의 작은 숲에서 이 소음권총 7발을 쏴 김 전 부장을 숨지게 했다고 밝혔다.
"파리 인근 숲에서 소음 권총 7발 쏴 살해"... 사체유기 장소는?
당시 김형욱 전 중정부장과 신현진, 외국인 2명은 이상열 공사의 관용차(푸조604)에 탑승하고 있었으며, 권총으로 김형욱 전 중정부장을 사살하기 전에 두 외국인은 차안에서 김 전 부장의 머리 뒷부분을 주먹으로 수차례 가격, 실신케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신현진은 당시 사체를 유기한 장소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술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에 국정원 진실위 측은 이에 대한 추가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특히 국정원 진실위는 이 사건의 완전한 진실규명을 위해서는 살해지시 수령, 담자 물색 및 모의, 권총 및 독침 등 사전 준비, 사후처리, 사건전후 일시 귀국 김재규 부장 보고 등 사건내용을 소상히 알고 있을 이상열 공사의 진솔한 고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국정원 진실위 측은 김형욱 실종사건의 살해기획 및 수립, 살해과정 부분은 전적으로 신현진의 진술에 의존한 것이기 때문에 여타 가담자인 이상열, 이일만, 이만수의 진술을 통해 신씨 진술의 진실성을 검증하고, 신씨가 진술하지 않았거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할 계획이다.
국정원 진실위는 이번 김형욱 사건의 중간조사 발표를 위해 공개자료 59권8700여쪽, 국정원 존안자료 748건 1만905쪽, 국정원외 여타 기관 존안자료 87권9521쪽을 검토했으며, 총 33명에 대한 관련 인물 면담조사도 벌였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사건을 먼저 꺼낸 이유
이에 앞서 오충일 위원장은 "우선 조사대상 7개 사건 중에서 조사 진척이 빠른 김형욱 사건의 조사결과 중간발표와 여타 사건에 대한 조사 진행상황과 향후 계획 등에 대해 설명하겠다"며 "특히 김형욱 실종사건처럼 소송서류 등 기록이 부족한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면담조사를 중심으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문장식 국정원 진실위 민간위원은 김형욱 실종사건과 관련해 "국정원 존안 및 외부기관 자료를 분석, 사건관계자들과 집중 면담조사를 통해 사건 관계자 및 가담자 경위 등 사건 실체의 핵심에 대해 주로 파악했다"고 밝혔다.
문 위원은 이어 "김형욱 실종사건과 관련한 모든 조사가 종료되는 것은 아니다"며 "완전한 진실규명을 위해서는 조사내용을 보강해나갈 계획"라고 전했다.
국정원 진실위는 이번 중간발표를 위해 그 동안 국정원 보유문서와 관계기관, 외교·법무·국방부, 검찰·경찰, 국가기록원, 서울시교육청 등 각급 기관으로부터 자료를 협조 받아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부일장학회 강제헌납사건 같은 경우는 기부승낙서 등 일부 문건의 진위 여부에 대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문서감정 의뢰를 했고, 공안사건의 경우에는 북한과 연계성 여부 및 조직의 실체가 있었는지 등에 대해 다각적인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국정원 진실위는 향후 국정원 자료를 중심으로 외교·국방부, 검찰·경찰 등 외부 기관자료에 대한 기록검토와 실지조사를 병행해 사건관계자와의 면담을 통한 진실고백 등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11월 2일 공식 출범한 국정원 진실위는 현재까지 25차례의 정기회의를 열고 90여개의 진실규명대상사건에 대한 예비조사와 7건의 우선 조사대상을 선정해 본격적인 조사활동을 진행해왔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국정원 진실위원회 곽한왕, 문장식, 김만복, 손호철, 박용일, 한홍구, 안병욱 민간위원 등이 참석했다.
국정원 고위층이 읍소해 그나마 진술
김재규 단독범행으로 결론낸 적 없다"
[인터뷰] 진실위 관계자, '김형욱사건' 조사과정 힘겨움 첫 토로
▲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26일 오전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에서 '김형욱 실종사건' 등에 대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손호철 위원이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동안 오충일 위원장(왼쪽)과 김만복 위원(국정원 기조실장)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의혹 1 : 김재규가 박정희 명령 없이 김형욱 전 중정 부장을 살해했을까?
의혹 2 : 국정원 과거사건 진상규명을 통한 발전위 민간위원들이 신현진을 직접 조사하지 않은 이유는?
의혹 3 : 신씨의 진술대로 김형욱 전 중정부장의 사체를 낙엽으로 덮을 수 있었나?
국정원 과거사건 진상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 이하 진실위)가 26일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사건'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한 뒤 제기된 의혹들이다.
이와 관련, 국정원 진실위의 한 관계자는 중간조사 발표 이후 처음으로 ‘김형욱 실종사건’ 조사과정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그는 <오마이뉴스>에 이 과정을 털어놓는 이유에 대해 “억측이 떠돌아서 조사과정 일부를 알리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토로했다.
그는 특히 신현진의 신상과 관련해 “현재 60세가 넘은 나이로 베테랑 중앙정보부 요원이다, 아무런 조사경험이 없는 민간위원들이 그들로부터 진술을 받아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면서 "김만복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을 비롯한 국정원 고위층들이 6차례나 이상열 공사, 신현진 등과 만나 술을 마시며 읍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국정원 진실위는 26일 중간조사발표에서 단 한번도 김재규의 단독범행으로 결론내린 바 없다”며 “김재규 전 중정 부장에게 누가 지시를 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한편 ‘김형욱 회고록’ 저자인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이 27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 출연, “국정원 진실위 민간위원들이 파리 중앙정보부 요원이던 신현진(가명)씨를 직접 조사하지 않고 국정원의 일방적 조사결과를 수용했다”고 주장해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국정원 진실위측은 또 27일 <문화일보>의 ‘과거사위 활동 내분’ 보도와 관련 “사실과 다르다”는 내용의 해명자료를 배포했고, “<문화일보>측에 조속한 시일 내에 정정보도를 요청하고 법적 대응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현재 제기되고 있는 의혹을 중심으로 <오마이뉴스>가 국정원 진실위 관계자와 인터뷰한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 민간위원, 왜 신현진을 직접 조사하지 않았나
국정원 진실위의 한 관계자는 “신현진이 김형욱 실종사건에 관여했다는 것은 당시 국정원 직원들 사이에서 상당부분 알려진 얘기”라며 “심지어 당시 해외 파견 연수생들이 모두 신현진을 지목할 정도였다”고 밝혔다.
신현진의 증언을 뒷받침할만한 자료도 상당부분 확보했기 때문에 중간조사발표를 통해 김형욱사건의 상당부분을 공식적으로 표명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정에 익히 알려진 내용이 왜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느냐는 의혹에 대해 이 관계자는 “지난 26년간 김형욱사건에 대해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조사한 일이 없다”며 “공식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진실고백’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국정원 직원들은 한번 취득한 비밀은 무덤까지 갖고 간다는 철칙이 있다”며 “이상열 공사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핵심적인 증언을 고백하지 않아 중간발표에서는 신현진 증언을 중심으로 밝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신현진의 신상과 관련해 “현재 60세가 넘은 나이로 베테랑 중앙정보부 요원”이라고 밝혔다. 1970년대 당시 중앙정보부가 해외로 연수를, 그것도 프랑스 파리로 어학연수를 보낼 정도라면 중정 내부에서도 알아주는 베테랑 요원이라는 것이다.
1979년 10월 7일 ‘김형욱 살해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의 프랑스 주재 거점 요원과 연수생은 총 8명이었다. 그러나 이중 누구 하나 쉽게 협조한 사람은 없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당시 프랑스 거점요원과 연수생은 ▲이상열 프랑스 공사(중정 책임자) ▲신현진(가명, 당시 프랑스 중정 연수생) ▲이만수(가명, 당시 프랑스 중정 연수생) ▲김철진(가명) 이일만(가명)-당시 중정 프랑스 거점 요원 ▲여타 당시 프랑스 중정 연수생 3명 등이다.
이 관계자는 “국정원 진실위는 신현진에 대해 7차례, 이상열 공사에 대해 3차례, 이만수에 대해 6차례, 김철진 1차례, 이일만 3차례, 여타 연수생 1차례씩 총 23회에 걸친 면담조사를 벌였다”며 “아무런 조사경험이 없는 민간위원들이 그들로부터 진술을 받아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만복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을 비롯한 국정원 고위층들이 6차례나 이상열 공사, 신현진 등과 만나 술을 마시며 읍소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수사관들 같으면 취조실에 사람들을 집어넣고 자백을 받을 수 있겠지만 국정원 진실위는 오로지 양심고백을 통한 진실규명밖에 할 수 없는 기구”라며 조사활동의 한계를 피력하기도 했다.
▲김재규가 박정희 명령 없이 김형욱을 살해했을까
김재규 전 중정 부장의 지시로 김형욱 살해사건이 이뤄졌다는 신현진의 진술에 대해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는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 진실위 조사에 대해 정면 반박했다.
이에 대해 이 관계자는 “국정원 진실위는 26일 중간조사발표에서 단 한번도 김재규의 단독범행으로 결론내린 바 없다”며 “현재까지 김형욱 살해사건의 최종 책임자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필요에 의해 김형욱 살해사건을 지시한 게 아니”라며 “김재규 전 중정 부장에게 누가 지시를 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낙엽으로 사체를 덮었다?
"제3국인 친구 2명은 신현진이 U턴시켜놓고 기다리던 승용차에 탑승해 김형욱이 입고 있던 버버리코트에 여권, 지갑, 시계 등의 소지품을 싸서, 벨트로 묶어 건네주면서, 도로에서 약 50m 떨어진 지점에서 김형욱의 머리에 권총을 쏴 죽였으며, 시체는 땅을 파지 않은 채 두껍게 쌓여있는 낙엽으로 덮어버렸다고 보고했다."
지난 26일 국정원 진실위가 배포한 ‘김형욱사건 조사결과 중간발표’에 들어있는 신현진의 사체유기관련 증언이다.
이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어떻게 낙엽으로 사체를 덮을 수 있냐는 지적이다.
이 관계자는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 교외의 평야지대는 군데군데 울창한 숲이 많다”며 “그 숲 가운데는 소공원이 있고, 가운데 작은 소로가 나 있는데, 이 소로를 벗어난 곳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프랑스의 숲은 충분히 사체를 유기할 만큼 낙엽이 많이 쌓인다”며 “프랑스는 비교적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만큼 시신을 유기한 현장을 찾을 수 있기를 고대한다”고 밝혔다.
"중정 직원 주장만으로 김재규 장군 명예 훼손" 김재규명예회복위 반발... "김재규는 김형욱 사건과 관계 없다"
▲ `고 김재규 장군 25주기 추도식`이 교수형 집행일을 하루앞둔 23일 오후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 주최로 열렸다.
김재규 장군은 김형욱 피살사건과 관계 없다. 중정 직원의 일방적 주장만으로 김재규 장군의 명예를 먹칠해서는 안 된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 이하 국정원 진실위)가 26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살해하라고 지시했다'고 발표하자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에서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김재규명예회복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혐의는 왜 뺐나?
김범태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은 26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김형욱씨 살해사건에 김재규 장군이 개입됐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중정 일부 관계자들의 발언만 듣고 발표한 것을 수긍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어 김범태 집행위원장은 "최세현 전 주일공사도 김재규 전 중정 부장의 '김형욱 실종사건' 연루설에 대해서는 강력히 부인했었다"고 전달했다.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는 이번 국정원 진실위의 중간조사 발표가 '중정 관계자들의 증언만을 가지고 김재규 부장의 개입을 기정사실화 했다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과거사 진상규명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저지른 악행의 뿌리를 찾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김범태 위원장은 "김재규 부장은 '김형욱 살해사건'을 결코 지시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자기도 김형욱과 똑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안했겠냐"고 반문했다.
또 김 위원장은 "중정 관계자의 일방적 주장을 토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혐의를 빼버리는 국정원 진실위의 활동에 의구심이 생긴다"며 "이 같은 방식의 활동은 올바른 과거사 진상규명의 걸림돌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국정원 진실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흔적 발견 못했다"
함세웅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도 "김형욱 사건을 김재규 전 부장이 직접 지시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며 "80년 5월 18일 광주사태의 진범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아니고 누구냐"고 '김형욱사건'의 배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있다고 강력히 시사했다.
김재규 전 중정 부장의 조카인 김진백씨는 "국정원 진실위의 발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이렇쿵 저러쿵 얘기할 바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국정원 진실위 측은 "드러난 사실을 가지고 구체적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노력한 결과"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형욱 전 중정 부장의 행각에 대해 불만을 품고 여러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살해를 지시했다는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앞으로 남은 조사과정에서 구체적인 정보를 이끌어내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여부에 대해 확인할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김재규 전 중정 부장의 지시만 사실로 확인된 상황이라는 것이다.
특히 국정원 진실위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형욱 살해를 직접 지시했는지 여부에 대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면 국민 앞에 밝힐 것"이라며 "김형욱 사건의 구체적 실체를 은폐하려는 게 아니다"라고 밝혔다.
한편, 윤원일 '김재규 명예회복추진위원회' 사무총장은 27일 전체회의를 열어 국정원 진실위가 중간발표한 내용(김재규 지시로 김형욱 피살)에 대한 반박 성명과 보도자료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양계장 살해설, 실현가능성 없다고 판단"
국정원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 이하 국정원 진실위)는 26일 오전 서울 내곡동 국정원 국가정보관 3층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사건에 대한 중간발표를 했다.
다음은 이날 국정원 진실위 관계자들과 기자들과의 일문일답 요약이다.
- 신현진(가명, 전 중앙정보부 연수생)이 두 명의 외국인에게 미화 10만달러를 제공하겠다고 하고 사건을 진행했는데, 이 사건에 대해 파리 경시청의 협조를 받았나.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면서부터 파리 경시청의 수사기록, 수사기관의 면담협조 요청을 했다. 파리 경시청에서는 성의 있는 확인작업을 해줬으나, 당시 수사기록이 없다고 했다. 당시 수사관들도 모두 퇴직해서 파리에서 모두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있다고 밝혔다. 프랑스 당국에서도 우리에게 관련 내용을 발표해도 좋다고 협조해줬다."
- 당시 연수생들이 어떤 역할을 했나. 제3국인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연수생들은 불어를 공부하기 위한 어학연수생들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살해한 제3국인 2명은 동유럽인이라는 것만 밝히겠다. 덧붙여 설명하면, 신현진은 당시 3년5개월짜리 연수를 계획하고 있었고, 그 기간을 마친 상태였다. 이 사건에 관여한 또 다른 연수생 이만수는 2년 계획으로 프랑스에 연수를 갔으나 10월 7일 사건 당시에는 3개월이 지난 상태였다."
- 이 사건을 지시한 사람은 당시 김재규 중정 부장이라고 발표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게 아닌가.
"김형욱 전 부장의 반국가 행위와 관련, 깊이 관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특히 윤일균 중앙정보부 해외담당 차장에게 직접 김 전 부장과 회고록 출판저지 협상을 해보라고 지시한 것 등이 있다. 그러나, 김재규 부장에게 직접 살해하라고 지시한 것에 대해서는 들은 사람도 없고, 증언할 사람도 이미 죽은 상태다."
- 신현진에 의한 일방적 진술에 의거한 조사내용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밝혔는데, 이것만 갖고 중간조사 발표하는 이유가 뭔가.
"신현진 진술뿐만 아니라 당시 그들(이상열, 신현진, 이만수 등)의 귀국 날짜나 여러 정황적인 자료들이 그 발언을 뒷받침할 만큼 있다. 면담조사 내용에 부합하는 자료의 신빙성이 있기 때문이다. 79년 10월 16일 언론에 김형욱 실종사건이 보도되자 그 직후 국정원 내부 직원들 사이에서는 프랑스 중심으로 업무관계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쏠렸다. 이상렬 공사의 행위, 신현진, 이만수의 부적절한 행위에 대해 국정원내에서도 이들이 김형욱 사건과 관련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국정원 공작원들은 철저한 교육을 받는다. 취득한 비밀은 무덤으로 갖고 간다는 게 철칙이다. 그래서 국정원에서는 주변에서 묻지 않는 게 예의다. 그 세 명을 중심으로 집중 조사를 해서 이 내용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국정원내 자료들에서 그런 정황을 전부 파악할 수 있었다."
- 신현진과 이만수는 국정원에 있나.
"지금은 모두 퇴직하고 근무하고 있지 않다."
- 김형욱이 파리에 가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이상열과 김형욱이 무슨 관계였는지.
"이상열 공사(당시 1군보안부대장)가 63년 원충연 반혁명사건을 주도적으로 처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형욱 전 부장과 상당한 친분관계를 맺어왔고, 중정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김형욱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으면서 승진해왔다. 그 이전에도 파리에서 카지노에 간다거나 하는 등 이상열을 만나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 사체 유기한 장소가 명확하지 않다. 이에 대해 확인할 수 있나.
"그래서 최종적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발표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사정이 중간설명회를 안 할 수 없게 됐다. 그 부분은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최종 결과가 나오면 유골을 수습해서 유가족들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그리고 당시 사건에 연루된 본인들은 허술하게 시체를 처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0월은 낙엽 떨어지는 시기다. 유럽은 낙엽이 굉장히 많이 쌓인다. 내리막길에는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는 곳이다. 낙엽을 치우고 시체를 묻었다고 한 것은 땅을 깊이 파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리는 큰숲과 작은 숲이 있다고 한다. 큰숲은 등산객이 많지만 작은숲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안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당사자들은 이 정도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시사저널>에서 진범이라고 주장한 이모씨의 존재는 뭔가.
"우리는 <시사저널> 보도 이후 철저하게 조사했다. 과정 하나 하나를 자세히 분석했다.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모씨는 국정원 공작원이다. 그 사람이 뭘 했는지 안다. 우리가 공작원으로 활용했던 사람이다. 이모씨가 뭘 원하는지도 알고 있다."
- 신현진, 이만수가 국정원에서 퇴직했다고 하는데 그들은 어느 정도 직위에 있었나.
"신분의 보안이 있지만, 신현진, 이만수가 가명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다. 신현진은 일찍 나갔다. 이만수는 상당히 오래도록 있었다. 이만수는 상당히 고위 간부직까지 있다가 퇴직했다."
- 사건기획부터 사후조치까지 문서로 남아있는 게 있는지, 진술에 의한 것인가.
"지난 2월 3일 기자회견에서 말했듯이 어떤 면에서는 핵심적인 기획안에 대한 문서는 문서보존규칙에 따라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규칙에 따라 보존할 수 없게 돼 있다. 증빙자료가 없다. 다만 관계자들이 언제 귀국했고, 그 뒤에 간접정황을 밝힐 수 있는 증빙은 확보했다. 사후보고는 전적으로 신현진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 다만, 정황설명이 있다.
신현진은 10월 13일 귀국신고를 했다. 신현진 혼자가 아니고 당시 들어왔던 연수생, 파견관들도 한꺼번에 김재규에게 귀국신고를 했다. 당시 부장은 귀국한 연수생 한 명의 치적을 알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때 김재규 부장은 "신군, 자네 내 방으로 좀 와!" 이렇게 해서 당시 참석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부장이 연수생을 아는지' 상당히 놀랐다.
그때 10월 16일 김형욱 실종사건이 보도되고, 김재규 부장이 관심 가진 정황이 알려지자 그 사람이 관련자일 것이라는 얘기가 국정원 직원들 사이에 흘러나왔다. 진실위는 신현진을 상대로 '그때 부장과 만나 무슨 얘기를 했느냐'라고 말하면서 (이번) 진술을 받아냈다."
- 사우디실종설이 있었다. 국정원은 이미 부인했지만. 미국 비밀문서 나오게 된 배경이나 경위는 뭔가.
"문서를 확인했다. 당시 작성된 시기는 80년대초 김형욱 실종 직후다. 미 동아태 차관보에게 드린 문서다. 그때 비밀이 해제돼 공개된 자료다. 그 내용은 공식문서이기 때문에 상당히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프랑스에 출입국 기록을 협조하고, 항공사에도 협조해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 정황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공식보고인데 왜 이렇게 됐나 의문이 남지만 우리는 대충 추리하고 있다. 조사중이다."
*김형욱(金炯旭, 1925년 1월 16일 ~ 1979년 10월 7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하였으며,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재건회의 내무분과 위원장과 운영기획 위원장을 지냈다. 이어 5월 동지회 지도위원과 부정축재 처리위원을 역임하고, 1963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963년부터 1969년까지 중정부장을 맡았다.
1971년 5월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뒤 유신 후반에 코리아게이트 사건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과 마찰을 빚다가 프랑스에서 실종되었다.[1]1984년 10월 8일에 사망신고되었으며 1990년 서울지방법원에서도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2005년에는 미국에 있는 그의 묘소가 발견되기도 했다.
1.생애 초반
김형욱은 1925년 1월 16일에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1949년에 육사 8기생으로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였다. 그 후 뒤늦게 공부하여 1963년 39세의 늦은 나이에 경희대학교를 졸업하였고 4년 후 경희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역대 중정부장, 안기부장, 국정원장 중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던 사람이기도 하다.
적극적이고 말없이 열심히 나서는 스타일이었는데 일찍이 박정희에게 발탁되어 박정희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받았다. 박정희보다는 같은 육사 8기의 김종필에 가까웠지만 군 복무 시절 특정조직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소신을 지키다가 박정희를 만나면서 박정희와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신뢰관계를 구축하였다. 육군 제6관구사령부 정보참모, 육군 제6관구사령부 작전참모 등을 지냈으나 진급이 늦었고 1960년 5월 김종필, 길재호, 오치성 등 육사 8기생 중령 8명을 비롯한 고급 장교들과 함께 선배 장교들을 타도하려는 하극상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겨우 위기를 넘기고 1961년부터 박정희, 김종필 등과 정변을 기획하였다.
2.5.16 군사 쿠데타 전후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때 중령으로 참여한 후 1961년의 5·16 군사 쿠데타이 성공하면서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 최고위원의 한사람이 된 뒤 내무분과 위원장과 운영기획 위원장을 지냈다. 이어 5월 동지회 지도위원ㆍ부정축재 처리위원을 역임하였다. 그 뒤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자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가, 1963년 7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중앙정보부장으로 김형욱을 임명했다. 같은 해 10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971년 5월 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3.정치 활동
(1)
제3공화국 시절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그가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일반 시민을 가장하여 야당 후보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사퇴를 막았고, 이로써 야당을 분열시켜 야당후보의 난립으로 박정희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박정희는 10만여 표 차이의 근소한 차이로 이기는 바람에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다음은 이날 국정원 진실위 관계자들과 기자들과의 일문일답 요약이다.
- 신현진(가명, 전 중앙정보부 연수생)이 두 명의 외국인에게 미화 10만달러를 제공하겠다고 하고 사건을 진행했는데, 이 사건에 대해 파리 경시청의 협조를 받았나.
"우리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면서부터 파리 경시청의 수사기록, 수사기관의 면담협조 요청을 했다. 파리 경시청에서는 성의 있는 확인작업을 해줬으나, 당시 수사기록이 없다고 했다. 당시 수사관들도 모두 퇴직해서 파리에서 모두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있다고 밝혔다. 프랑스 당국에서도 우리에게 관련 내용을 발표해도 좋다고 협조해줬다."
- 당시 연수생들이 어떤 역할을 했나. 제3국인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연수생들은 불어를 공부하기 위한 어학연수생들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살해한 제3국인 2명은 동유럽인이라는 것만 밝히겠다. 덧붙여 설명하면, 신현진은 당시 3년5개월짜리 연수를 계획하고 있었고, 그 기간을 마친 상태였다. 이 사건에 관여한 또 다른 연수생 이만수는 2년 계획으로 프랑스에 연수를 갔으나 10월 7일 사건 당시에는 3개월이 지난 상태였다."
- 이 사건을 지시한 사람은 당시 김재규 중정 부장이라고 발표했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게 아닌가.
"김형욱 전 부장의 반국가 행위와 관련, 깊이 관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특히 윤일균 중앙정보부 해외담당 차장에게 직접 김 전 부장과 회고록 출판저지 협상을 해보라고 지시한 것 등이 있다. 그러나, 김재규 부장에게 직접 살해하라고 지시한 것에 대해서는 들은 사람도 없고, 증언할 사람도 이미 죽은 상태다."
- 신현진에 의한 일방적 진술에 의거한 조사내용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밝혔는데, 이것만 갖고 중간조사 발표하는 이유가 뭔가.
"신현진 진술뿐만 아니라 당시 그들(이상열, 신현진, 이만수 등)의 귀국 날짜나 여러 정황적인 자료들이 그 발언을 뒷받침할 만큼 있다. 면담조사 내용에 부합하는 자료의 신빙성이 있기 때문이다. 79년 10월 16일 언론에 김형욱 실종사건이 보도되자 그 직후 국정원 내부 직원들 사이에서는 프랑스 중심으로 업무관계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쏠렸다. 이상렬 공사의 행위, 신현진, 이만수의 부적절한 행위에 대해 국정원내에서도 이들이 김형욱 사건과 관련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국정원 공작원들은 철저한 교육을 받는다. 취득한 비밀은 무덤으로 갖고 간다는 게 철칙이다. 그래서 국정원에서는 주변에서 묻지 않는 게 예의다. 그 세 명을 중심으로 집중 조사를 해서 이 내용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국정원내 자료들에서 그런 정황을 전부 파악할 수 있었다."
- 신현진과 이만수는 국정원에 있나.
"지금은 모두 퇴직하고 근무하고 있지 않다."
- 김형욱이 파리에 가게 된 경위가 궁금하다. 이상열과 김형욱이 무슨 관계였는지.
"이상열 공사(당시 1군보안부대장)가 63년 원충연 반혁명사건을 주도적으로 처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형욱 전 부장과 상당한 친분관계를 맺어왔고, 중정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김형욱의 적극적인 비호를 받으면서 승진해왔다. 그 이전에도 파리에서 카지노에 간다거나 하는 등 이상열을 만나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 사체 유기한 장소가 명확하지 않다. 이에 대해 확인할 수 있나.
"그래서 최종적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발표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사정이 중간설명회를 안 할 수 없게 됐다. 그 부분은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최종 결과가 나오면 유골을 수습해서 유가족들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그리고 당시 사건에 연루된 본인들은 허술하게 시체를 처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0월은 낙엽 떨어지는 시기다. 유럽은 낙엽이 굉장히 많이 쌓인다. 내리막길에는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는 곳이다. 낙엽을 치우고 시체를 묻었다고 한 것은 땅을 깊이 파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리는 큰숲과 작은 숲이 있다고 한다. 큰숲은 등산객이 많지만 작은숲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안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당사자들은 이 정도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시사저널>에서 진범이라고 주장한 이모씨의 존재는 뭔가.
"우리는 <시사저널> 보도 이후 철저하게 조사했다. 과정 하나 하나를 자세히 분석했다.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모씨는 국정원 공작원이다. 그 사람이 뭘 했는지 안다. 우리가 공작원으로 활용했던 사람이다. 이모씨가 뭘 원하는지도 알고 있다."
- 신현진, 이만수가 국정원에서 퇴직했다고 하는데 그들은 어느 정도 직위에 있었나.
"신분의 보안이 있지만, 신현진, 이만수가 가명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다. 신현진은 일찍 나갔다. 이만수는 상당히 오래도록 있었다. 이만수는 상당히 고위 간부직까지 있다가 퇴직했다."
- 사건기획부터 사후조치까지 문서로 남아있는 게 있는지, 진술에 의한 것인가.
"지난 2월 3일 기자회견에서 말했듯이 어떤 면에서는 핵심적인 기획안에 대한 문서는 문서보존규칙에 따라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규칙에 따라 보존할 수 없게 돼 있다. 증빙자료가 없다. 다만 관계자들이 언제 귀국했고, 그 뒤에 간접정황을 밝힐 수 있는 증빙은 확보했다. 사후보고는 전적으로 신현진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 다만, 정황설명이 있다.
신현진은 10월 13일 귀국신고를 했다. 신현진 혼자가 아니고 당시 들어왔던 연수생, 파견관들도 한꺼번에 김재규에게 귀국신고를 했다. 당시 부장은 귀국한 연수생 한 명의 치적을 알기가 용이하지 않다. 그때 김재규 부장은 "신군, 자네 내 방으로 좀 와!" 이렇게 해서 당시 참석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부장이 연수생을 아는지' 상당히 놀랐다.
그때 10월 16일 김형욱 실종사건이 보도되고, 김재규 부장이 관심 가진 정황이 알려지자 그 사람이 관련자일 것이라는 얘기가 국정원 직원들 사이에 흘러나왔다. 진실위는 신현진을 상대로 '그때 부장과 만나 무슨 얘기를 했느냐'라고 말하면서 (이번) 진술을 받아냈다."
- 사우디실종설이 있었다. 국정원은 이미 부인했지만. 미국 비밀문서 나오게 된 배경이나 경위는 뭔가.
"문서를 확인했다. 당시 작성된 시기는 80년대초 김형욱 실종 직후다. 미 동아태 차관보에게 드린 문서다. 그때 비밀이 해제돼 공개된 자료다. 그 내용은 공식문서이기 때문에 상당히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프랑스에 출입국 기록을 협조하고, 항공사에도 협조해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 정황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공식보고인데 왜 이렇게 됐나 의문이 남지만 우리는 대충 추리하고 있다. 조사중이다."
김형욱은 1925년 1월 16일에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다. 1949년에 육사 8기생으로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였다. 그 후 뒤늦게 공부하여 1963년 39세의 늦은 나이에 경희대학교를 졸업하였고 4년 후 경희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역대 중정부장, 안기부장, 국정원장 중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던 사람이기도 하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때 중령으로 참여한 후 1961년의 5·16 군사 쿠데타이 성공하면서 군사혁명위원회(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 최고위원의 한사람이 된 뒤 내무분과 위원장과 운영기획 위원장을 지냈다. 이어 5월 동지회 지도위원ㆍ부정축재 처리위원을 역임하였다. 그 뒤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자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가, 1963년 7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중앙정보부장으로 김형욱을 임명했다. 같은 해 10월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
제3공화국 시절1964년 8월 중앙정보부를 시켜 인민혁명당 사건을 수사, 발표하게 하였으며 이때 도예종을 비롯한 혁신계인사·언론인·교수·학생 등 41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은 무더기 구속 외에도 이들의 구속, 처벌을 거절한 검사들에 대한 김형욱의 압력에 의한 공안검사의 사표 제출 문제와 고문 문제가 나중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해 6월부터 한일협정을 둘러싼 6·3사태와 국회비준 파동 때에도 그의 영향력은 크게 작용했다. 6·3사태를 전후하여 학생운동가들 및 재야인사들, 학원 동태를 수집, 파악하였으며 또한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을 움직여서 김종필에게 2차 외유를 권고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인혁당 사건 조사의 정당성을 주장 '인민혁명당 사건은 바로 6·3사태 배후 인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회고록에 기록하였다. 또한 한일협정 국회비준과정에서도 야당 의원들을 내사, 회유, 협박을 하는 등의 압력을 행사하였다.
외부와의 갈등과 해임 과정[편집]
1965년 대한사격연맹 제6대 회장에 피선되었다. 1967년 운동권 단체인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를 적발하고 이적행위를 수사하였으며, 1967년 봄에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일명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수사, 7월 8일에 발표하면서 국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정부운동가들의 동태를 면밀히 감시하는 한편 이들의 행위를 비판하는 한편 반정부운동에 대해 강하게 탄압하였다. 1968년에는 통일혁명당사건(統一革命黨事件)의 수사를 주관하였다. 김형욱은 박정희의 대역으로서 나쁜 일, 좋은 일 가리지 않고 박정희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처리했고, 이 때문에 국민들에게 원성을 사게 되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 1969년 3선 개헌 때에도 활발히 활동하다가, 국회의원 이만섭이 해임건의안을 박정희에게 전달하고 박정희는 이를 거절하였으나 야당과 주변의 반발이 심해지자, 결국 1969년 10월 20일 박정희는 김형욱을 해임시킨다.
이후, 김형욱은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72년 10월 17일에 유신이 선포되어 국회가 해산되자, 그는 의원직이 박탈되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이때까지 박정희의 정권 밑에서 허수아비에 불과했음을 깨닫고 박정희에 대한 깊은 원망을 품었다. 1973년 4월 15일 김형욱은 자신의 중앙정보부장 시절 비서실장이었던 문학림과 같이 대만으로 출국했고, 이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살았다.
(2)박정희와의 갈등
박정희는 김형욱을 설득하기 위해 미국에 특사 형식으로 정부 고위급 인사를 파견하였다. 1973년 4월 김형욱의 미국 망명 직후, 박정희는 정일권, 김종필, 김동조, 오치성 등 정부 고위급 인사들을 미국으로 보내 김형욱의 귀국을 설득한 바 있다.
계속되는 고위층들의 설득에도 김형욱은 응하지 않았고, 오히려 1977년 6월 2일에는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정권의 내부비리를 폭로했다.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불만을 품고 비리폭로에 나선 이유는 1969년 10월 박정희 정권 유지를 위한 3선 개헌의 1등 공신인 자신을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하고, 1973년 3월 유정회 국회의원 명단에서도 제외했기 때문이다.
김형욱은 이에 따라 미국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비롯한 각종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터뜨리는 나팔수가 됐다.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에도 출석해 박정희를 강력히 비난하고, 치부를 고발하는 회고록 출간도 추진했다.
(3)생애 후반
1977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지자, 김형욱은 미국 연방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박정희의 유신 정권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하였고, 이어 일본으로 가서 회고록(김경재 著)의 출판회를 가졌다. 이책은 80년대의 밀리언셀러가 된다.
1979년, 김형욱은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을 만나 프랑스 파리로 가라는 말을 들었고, 1979년 10월 1일 김형욱은 파리에 도착했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1984년 김형욱의 사망설이 나돌자, 그의 가족들은 사망 신고를 했다.
(4)사후
2009년 5월 초순에 미국 뉴저지 주의 한 공동묘지에서 김형욱의 묘가 발견되었다고 재미 한국인 안치용이 2009년 9월 21일 밝혔다. 묘비의 내용에 따르면 김형욱의 사망 날짜는 10월 7일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신이 산산조각 났다는 진술이 있는 데다가, 묘비상의 사망일자는 실제로는 김형욱의 실종 일자로서 정확한 사망일자는 아니다. 더욱이 김경재 전 의원은 브레이크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형욱의 아들 김정한이 2002년 가을 사망한 후 아들의 묘지 앞에 가족묘를 조성하기 위해 김형욱의 추모비 성격을 지닌 가묘를 조성한 것으로 안다'고 전한 바 있다.
-김해 김씨(가락종친회)
-육군사관학교 8기 졸업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경희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석사
명예 박사 학위명예 박사 학위
경희대학교 명예법학 박사. 중국문화대학 명예철학 박사
지휘 | 육군 제6관구사령부 정보참모 육군 제6관구사령부 작전참모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정축재처리위원장 중앙정보부장 |
주요 참전 | 한국 전쟁 |
기타 이력 |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한국골프협회장 |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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