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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남도 대표 의원출신 북한 초대 수령(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남도 대표 의원출신 북한 초대 수령(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CIA bear 허관(許灌) 2015. 2. 1. 18:16

 

북한 제1공화국은 인민 민주주의 헌법 인민 회의정부론(인민의회 정부론)으로  초대 국가수반은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었다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은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인민의회정부론(인민회의정부론)에서는 명목상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고 내각수반과 군 총사령관은 수상이다

1.1889년 3월 17일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87번지 출생(부친 김돈홍 유학자)

2.부친 김돈홍 밑에서 한학공부

3.1908년(17세때) 기호소학교 입학과 졸업(후일 중앙학교)

4.보성고등보통학교 입학과 졸업한 후 교사로 근무

5. 아펜젤러 설립자 감리교 사립학교  배재학당 입학[이승만 前대통령 배재학당 졸업]

6.낮에는 학교 생활을 하면서 김두봉은 밤에는 보성고보의 국어 교사였던 주시경 운영하는 하기강습소 근무

28세때 보성, 휘문, 중앙등지에서 우리말을 가르쳤다

7. 주시경 선생 영향으로 "조선말본" 저술(1916년)

8.1913년 대동청년단 사건으로 배재학당 중퇴

9.최남선이 운영하던 광문회(光文會)에 입사하여, 한글을 연구하며 회보와 잡지 "붉은 저고리" "청춘" 등을 편집

10.건국시조 단군교 대종교 활약

 

                                                          1918년 8월 15일 스승 나철 외 5인과 함께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김두봉, 두 번째가 스승 나철)

1916년 음력 8월 대종교 교주 나철의 시봉자(侍奉者) 6명 중의 한사람이 되어 나철을 따라 강화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하던 중, 8월 15일 나철의 순교를 목격하고 내려온다.

11.1915년 4월 조선물산장려회 조직 참여-김성수, 최남선, 이은상등 130명 회원

12. 30살 때 1919년 3.1운동 참여 그리고 일제 탄압으로 4월 중국으로 망명

13.상하이에서 신채호 주필로 있던 '신대한신문'(新大韓新聞) 편집위원

14.1919년 7월 2일 임시정부 이광수등 10명 사료편찬위원 참여

15.1919년 10월 이동휘 부통령 등을 통하여 공산당에 입당

16.1922년, 1916년부터 1922년까지 연구하여 펴냈던 조선말본을 수정 보완하여 "깁더 조선말본"을 상해에서 출판

17.1923년 상하이 교민이 세운 인성학교(仁成學校) 국어교사와 교장 역임

18. 사회주의 독립운동가가 된 김두봉은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남도 대표 의원에 선출됨

19.1929년 한국독립당 입당하여 한국독립당 비서장 역임(이시영 대한민국 부통령도 참여), 1930년 한국독립당 이사로 활동하면서 안창호 등과 함께 시국강연 참여

20.1935년 6월 29일 한국민족혁명당 창당(후일 조선민족혁명당)[좌우익연합전선, 우파 김규식. 좌파 김두봉]

내무선전 김두봉, 외무 김규식, 재무 윤기섭, 군무(군사) 이청천(李靑天), 신익희, 조소앙 등..

이청천(지청천) 장군은 1913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 후 제1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에 배속되어 중국에서 독일군과 싸웠으며 중위로 진급했다. 1919년 4월 하순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갔다

북한 김일성(김성주)은 조선민족혁명당 무장단체 조선혁명군(조선인민혁명군)에 가담했다고 미화해왔다 북한 김일성(김성주)은 중국 만주지역 공산당 출신으로 중국 공산당 하부 조선인 혁명군에 가담했고 1940년대 중국 공산당 붉은군대 소련지원군으로 활동했다 

21.1939년 10월 민혁당 중심으로 의열단 김원봉 조선의용대 창설 그리고 김두봉은 조선의용대 편집위원으로 활동

 

                                                                       김두봉선생등 조선의용군이 머물렀던 자리(중국 연안 근교 모습 사진)

22.1942년 7월 10일 김두봉은 사회주의자로 국민당 지원을 받고 활동하는 김원봉 조선의용대(의열단)에서 탈퇴하여 중국 공산당 모택동부대 연안으로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 행군과 도착하여 김무정(중국 공산당 당군 팔로군 포병지휘관. 임표, 팽덕회 지원으로 화북조선쳥년회 조직 ), 최창익등과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했다

이때 김두봉은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최고책임자와 통수권자로서 독립동맹은 정치단체로, 의용군은 군사단체로 조직했다.

김두봉을 보고 신민주주의(인민 민주주의) 혁명 노선 모택동 부대라고 지칭했다

독립동맹에는 김두봉(주석), 최창익(부주석), 김무정, 허정숙등이 참여했다

무장군 조선의용군 총사령관에는 김무정, 부사령관 박효삼등이었다

 

"나가자 동무야 함께 뭉치여

원수를 소탕하러 나가자

총칼을 메고 혈전(血戰)의 길로

다 앞으로 동무들야

혁명의 기(旗,깃발)는 우리 앞에 날린다

(후렴)앞으로 동무들아

무거운 쇠줄을 둘러 메치고

뼈속에 사무친 원을 풀자

삼천만 대중(對衆)아 모두 다 나가자

승리는 우리를 재촉(催促)한다[의용군 소탕(掃蕩)의 노래]"

*소탕의 노래는 이국 땅에서 일제를 소탕하고 독립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짐하는 것이다

 

                                                                                                   조선의용군 모습

조선의용군 영웅적인 투쟁과 희생을 보고 중국 공산당 당군 팔로군 총사령관 주덕은 이렇게 추모했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전투정신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중.조 인민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치하할 정도였다

 

23.1944년 10개의 독립동맹 분맹과 의용군 지역지대를 설치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김두봉은 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중국 공산당과도 연계, 공산당의 군대인 팔로군과 연대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44년 연안(延安) 한인촌의 조선청년학교 교장이 되었고, 1945년 2월 김두봉은 학교를 군관양성소로 개조, 조선혁명군정학교로 고치고 다시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김두봉은 주은래와 친했다

 

["우리의 영도자 김두봉주석 만세"

동무들! 오늘은 기쁨의 날임에 틀림 없습니다. 삼십육년 동안 우리 동포들의 피와 땀을 아서 먹든 왜적이 넘어졌다고 합니다. 이들로 말미암아 조선의 아들 딸은 피눈물을 머금고 이역에서 헤메이게까지 되었든 것입니다.

동무들! 오늘 같은 기쁜 소식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온몸 온정신으로 이것을 마지하지 못하는 마음이 한편에 있습니다. 이 마음은 아마도 우리들을 그렇게 착취하고 압박하고 우리 동지들을 학살한 우리들의 원수를 우리 손으로 무찔으지 못하고 외국의 힘을 빌어 타도 되었다는 것, 우리들이 가진 힘을 다하여 배려온 총과 칼로써 최후의 일전을 할 기회를 노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아마도 우리들이 가지는 바 섭섭함일 겝니다.

그러나 동무들!

싸움이 이제부터입니다. 그 싸움이 비록 총과 칼로써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조선의 참된 행복을 위한 지리하고도 힘찬 싸움이 시작됩니다

밖으로는 새로운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싸움, 안으로는 인민의 이익을 위한 싸움.

왜적이 넘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느낀 감회와 앞으로 싸워야 할 내 자신의 각오와 말을 여러 동지들께 몇 마듸 였주는 바입니다.

 

"우리의 지도자 주석 동지의  옳은 영도를 힘차게 접수하자!"

"접수하자!"

"최고 지도자 주석 동지 만세!"

"만세!"

 

동무들 우리 의용군의 손으로 왜군을 쳐부수지 못한 것은 분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무기 없는 싸움이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 조국이 왜놈 손에서 해방 되었다. 이째뜬 해방일세 분명하다.

(연안에서 김두봉 조선의용군 최고지도자의 연설문)]"

 

 

"중국의 광할한 대지 우에

조선의 젊은이 행진하네

발을 마처 나가자 다 앞으로

지리한 어두운 밤이 지나고

빛나는 새 아침이 닥처오네

우렁찬 혁명의 함성 속에

의용군 기빨이 휘날린다

나가자 피 끓는 동무야

뚫어라 원수의 철조망

양자와 황하를 뛰여 넘고

피무든 만주벌 결전에

원수를 동해로 내여 몰자

전진 전진

광명한 저 압길로[조선의용군 행진곡]"

 

"조선의 완전 독립이 없이 중국의 독립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의 동지들의 목적달성은 우리보다 앞설 것이다 최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건투해 주기를 바란다[연안에서 중국 공산당 주최로 환송회때 모택동前주석의 송별사]"

 

1945년 11월 7일 러시아혁명 기념 봉천(奉天) 시가행진 때 소련의 적군(赤軍, 붉은 군대-김일성등  조선인 참여), 의용군(광복군=조선의용군- 김두봉,최창익, 김무정등), 중국군(팔로군-주덕,임표, 팽덕회등 중국 공산당군), 몽고군 그리고 일반 시민이 참여했다 의용군은 중국 만주지역 조선족 주력군으로 1만명의 완전무장으로 참여했다

소련의 적군(赤軍, 붉은 군대) 도움으로 몽고,극동(러시아 극동자치정부)과 사할린(러시아 사할린 자치정부), 만주(만주국과 만주군, 동북3성 임표 팔로군), 이북(관동군사령부, 북한-대소참전과 소련군 귀순)등을 점령했다

영국군과 미국군 도움으로 인도군(영국군)과 중국 국민당군(영.미군) 그리고 광복군(중국군-김구, 김규식, 이범석등) 등이 중국 남방(중국군-장개석부대)과 동남아(인도군과 중국군),일본(일본군사령부, 친미 일본인과 미국군-항복과 미국군 귀순)과 남한(조선군사령부, 이승만등 미국군-이승만등 조선인 참여.대미참전과 미국군 귀순)지역을 점령했다

 

24.김두봉 등은 1945년 9월 3일 의용군 4개 대대를 인솔하여 귀국했지만 신의주에서 소련군에게 무장해제와 추방됨

극동,사할린과 만주지역 그리고 북한지역은 소련군이 장악했다

소련군은 팔로군이 대독군사작전과 대일군사작전에 도와주겠다는 조건으로 중국 공산당과 협약한 만주지역(동북 3성)은 팔로군 임표 동북 3성 사령관에게 넘겨 주었고  

북한은 소련 극동군 조선인부대 김일성등에게 맡겼다 그리고 극동과 사할린지역은 소련군이 직접 통치했다

 

2차 대전 종결 이후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분열로 중국 공산당은 화북과 만주지역에 국민당 진출(진격)을 거부했다 이 지역이 소련군과 팔로군 활동지역이었다

이로 인해 3차 국공내전으로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에 가담하여 중국 내전 전투에 참가했다

중국 통일은 화북과 만주지역을 누가 장악하는냐에 달려 있다

장개석은 미국등 우방 군대 원조를 거부하고 본토를 포기했다

장개석은 너무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노선을 믿었다

 

25.북한지역 군 통치권자: 소비에트 연방(소련) 국가원수 스탈린(임시정부) 1945년 8월 15일-1948년 9월 9일

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은 북한 김일성 前 주석을 비롯한 "혁명 1세대"의 모태이다.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전투 이후 만주에서 일본군의 항일세력 토벌작전이 심화됨에 따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도피하였다. 소련은 장래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과의 충돌을 대비하고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자국군에 편입하고 88여단이라고 칭했다. 소련군 소속이었으나 실제로는 동북항일연군(중국 공산당군)의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약 60여명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을 비롯한 4인이 중학교 중퇴이다. 이들은 88여단에서 1940년경부터 해방까지 약 5년간 복무했으며, 소련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북한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이들 중 중등교육 수준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대위 김일성, 상조 임춘추,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의 5인이다. 이 외의 55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귀국 후 1945년 12월 평양 조선독립동맹 지도부 모습 [무정과 김두봉선생]

26. 독립동맹 귀국과 1946년 1월 14일 "조선 동포에 고함"

27.1946년 2월 8일  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창설

위원장 김일성, 부위원장 김두봉으로 추대

28.1946년 2월 26일 독립동맹을 조선신민당으로 창당과 당수로 취임

29.1946년 8월 신민당(김두봉, 모택동 인민 민주주의 노선)과 공산당(김일성, 스탈린 일국 사회주의 또는 자국 사회주의 노선) 합당으로 북한 노동당 창당과 북한 노동당 위원장으로 추대

 

북조선노동당 결성 후 1946년 8월 30일 당 고위 간부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30.인민위원회 선거와 1947년 2월 21일 김두봉 북한 인민의원회 상임위원장(명목상 국가수반) 추대 그리고 김일성 북한 인민위원회 위원장(내각 수상)으로 추대 

김일성은 중국 만주지역 공산당출신으로 팔로군에 가담했고 2차대전 때 중국 팔로군 조선인부대 소련지원군 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으로 활동했다  소련군 출신 김일성, 김책등 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 주축으로 북한 인민군 창설에 주력했다

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 주축 북한 인민군이 국내 공산당 계열 박헌영과 중국 공산당 계열 의용군(독립동맹)등을 제거하고 북한 권력을 사실상 장악했다 지금 북한에서 권력층 혁명 1세대나 2세들은 대부분 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 출신 항일세력들이다 북한지역이 중국이냐 소련(러시아)냐는 극동과 만주지배자들이다

 

                                                                             김두봉선생 부부와 소련군 장성들 오찬을 함께 하는 모습

31.북한 임시헌법초안제정위원회 위원장 김두봉, 위원 김일성. 최용건 등

32.김일성대학교 총장 역임. 1946년부터 1948년까지

33.제1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여

김두봉은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북측 대표로 김일성, 박헌영, 최용건, 주영하 등과 함께 남측 대표인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과 회동하였으며, 김일성과 함께 단독으로 남측 대표의 주장격인 김구, 김규식과 4김회동을 하였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남북협상 세력에서 친중세력은 김구, 김규식, 조소양, 김두봉, 최용건 등이며 친소세력은 김일성, 박헌영, 주영하등이다

친소세력 중 김일성은 스탈린주의(자국 사회주의)계열이고 박헌영, 주영하 등은 마스-레닌주의(국제 공산주의) 계열이었다

 

34.1948년 9월 9일 북한 건국

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수상(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노동당 당수

부수상 박헌영(외상), 홍명희, 김책(산업상)등

국가계획위원회 위원 정준택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국가검열상 김원봉

내무상 박일우

농림상 박문규

상업상 장시우

교통상 주영하

재정상 최창익

교통상 백남운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리승엽

로동상 허성택

보건상 리병남

도시경영상 리용

무임소장 리극노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은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인민의회정부론(인민회의정부론)에서는 명목상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고 내각수반과 군 총사령관은 수상이다

 

북한 제1공화국 초대 내각은  독립동맹(조선의용군),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 조선 공산당 출신이 많았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35.1948년 9월부터 12월까지 소련군 극동지역으로 철수

36.1948년 10월 12일 소련과 국교 수립

1949년 1월 14일 김두봉 상임위원회 위원장 스티코프 대사 신임장 수여

 

                                                             1949년 1월 14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이 신임장을 받는 장면

37.1949년 3월 30일 지방주권기관 선거실시

38.1949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거행된 스탈린 탄생 70주년 경축대회에서 축하연설

김두봉은 스탈린 이름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조선인민들의 광명한 희망이며 행복한 장래를 위한 투쟁의 기치이며 새 전쟁도발자들을 반대하며 평화와 각국 인민들간의 친선을 위해 투쟁의 기치"라고 찬양했다

 

39.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과 한국전쟁(남침)

김일성은 대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지 못했다

김일성(인민군 총사령관) 박헌영(인민군 육군 중장 겸 인민군 총정치국장) 등 내각과 인민군 주도로 한국전쟁을 추진했다

김두봉이나 최용건 등은 전쟁을 반대했지만 김구선생 사망(1949년 6월 24일) 후 남침을 찬성하고 중국 독립동맹(의용군)이 전쟁 주력부대가 되었다 김구선생 사망 1년 이후 1950년 8월 25일 새벽에 남침을 했다

전쟁 다음 날 6월 26일 상임위원회는 전시체제에 부합되는 최고권력기관으로 군사위원회를 조직한다는 내용의 정령을 공포했다

군사위원회는 일체 주권을 장악하고 모든 기관, 정당, 사회단체, 군사기관들은 군사위원회의 결정과 지시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군사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위원 박헌영, 홍명희, 김책, 최용건, 박일우, 정준택등 6인이다

이때부터 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이 북한 권력을 장악했다

김일성이 이오시프 스탈린을 꼬드겨 한국전쟁을 일으키려 할 때 김두봉은 서울은 한반도의 심장이다. 서울만큼은 무조건 장악해야만 한다며 김일성의 남침을 찬성했다

다른 계파와 경쟁관계 중 한국전쟁에 중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북한내에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연안파의 발언권도 강화되었다.  1952년 김두봉의 위상은 어느 때보다 높아 입법부와 행정부 그리고 당을 대표하여 신년사를 발표할 수 있었다.

김두봉은 중국군 참전 1주년을 기념하여 연안시절부터 친근하게 지내던 지원군 사령관 팽덕회에게 국기훈장 1급을 수여했다

 

1950년 4월 초 조선노동당 중정치위원회에서 전쟁에 의한 통일노선..

김일성이 "조국의 통일문제에 관한 건"에 관하여 보고하였다

김일성은 그의 보고 가운데서 현단계에 있어서의 정세를 보고하고, 현단계에 있어서는 무력통일이 단 하나의 옳은 현실적인 정책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정치위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적극적으로 이 방안을 지지해줄 것을 요망하였다

박헌영은 김일성 다음 가는 석차이기 때문에 토론을 하기 위하여 최초로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 동지의 보고를 전적으로 지지하면서 약간의 보충을 하겠습니다" 박헌영은 이렇게 자기 토론을 시작하였다

김일성의 보고 중요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뒤 김일성의 보고가 전적으로 옳다는 것 그리고 자기는 이것을 절대 지지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면서 "남한에는 현재 20만명의 남로당원이 지하에 있어 만일 인민군이 남하한다면, 20만의 남로당원들이 내응해서 군사작전을 원호할 것으로 믿습니다"고 끝을 맺었다

 

신민당 김두봉 계열이나 민주당 최용건계열, 근로 인민당 홍명희 계열 등은 남침을 반대했다가 찬성한 사람들이다.

남침은 노동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1949년 3월 김일성 수상과 박헌영, 홍명희 등 부수상등 북한 대표단 소련방문, 스탈린과 회담

-남로당 책임비서 이승엽[박헌영 최측근, 한국전쟁 때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겸 서울시장 역임]

이승엽은 남한에서 이승만정권과 미제국주의들을 분쇄 타도하기 위하여 일어난 빨치산들을 영웅적이며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투사라고 강조했으며 이들을 전심전력 원호하는 것이 참으로 가장 중요한 거족적 파업이라고 주장했다(남조선 정치정세와 인민들의 구국투쟁)

-1950년 5월 김일성, 박헌영등 북경방문, 모택동과 회담 

-최용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전 그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자 민족보위상을 맡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에 반대 하였다.

6월 한국전쟁 직후 서울방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50년 가을 그는 방어총사령관을 맡아 후방의 일을 처리하였는데, 한국전쟁에 최소한의 협력만을 수행하였다. 1950년12월 김규식이 납북도중 사망하자 동료들과 함께 그의 장례에 참여했다.

한국 전쟁 초기 그는 한국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전쟁 준비에는 국방부장관격인 민족보위상 최용건은 참여하지 않았고, 차수인 김책이 관여 하였다. 미군이 참전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선사령부를 중심으로 전쟁이 치루어졌다. 미군이 개입하자 1950년 7월 4일 김일성은 최용건 대신에 자신이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 전선사령관 김책, 총참모장 강건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을 임명했다 그는 서울방어와 인민군 재건을 지휘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에 소극적이었던 점을 들어 대륙파나 연안파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그는 긴장하게 된다. 1953년 2월 7일 휴전 무렵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차수(次帥)에 임명된 뒤, 박헌영리승엽이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재판장으로서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등 남로당 계열 숙청에 앞장섰다.

-미군정이 끝나면서 미군과 소련군은 동시철수를 개시했다. 하지만 미군이 한국군에게 애초 약속했던 수준보다도 못한 소화기와 약간의 물자만 넘겨주고 고문관도 500명 미만으로 남긴데 반해, 소련군의 경우 T-34를 비롯한 중화기 일체와 관련 군수물자를 통째로 넘겨주었을 뿐 아니라 고문관도 3,000명 이상 남겨놓았다. 이들 소련의 고문관들은 조선인민군의 훈련은 물론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고 소련군 극동지역 군인들이다. 냉전시대 군사개념상 북한과 만주일부 지역이 소련군 극동사령부 통제를 받았다 

실제로 개전당시 인민군 6사단 출신으로 한국군에 투항해 대한민국에 정착한 북한군 장교는 개전 직전에 소련군 군사고문단이 기존의 '훈련전담'고문에서 '작전지휘'고문으로 전부 교체됐음을 증언한바 있다

 

40.1955년 12월 15일 오전 10시 검사의 논고, 박헌영의 최후진술 그리고 오후 8시 판결진행이 되었다

판결에서 미제의 고용간첩이라는 명목으로 박헌영에 대해 사형 밎 전재산 몰수가 언도 되었다

 

41.실각과 최후

그 뒤 김일성 일파에 대하여 집단지도체제를 요구하는 등 비판을 가하다가 1956년 일부 연안파 간부들이 김일성의 개인숭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8월종파사건'이 발생하자, 이로 인해 김두봉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958년 3월 당대표자대회 직후, 이른바 연안파숙청 때 '8월종파사건'의 주동혐의를 받고 반혁명종파분자로 공격받아 최창익, 서휘  연안파, 박헌영 등 국내파 등과 함께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의 결의로 노동당에서 제명과 동시에 숙청되었다. 고령의 이유로 사형은 모면하였으나, 평안남도 순안군 산골 오지의 한 지방협동농장으로 끌려가 중노동을 강요당하며 농사일을 하다가 61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향년 75세였다.

한편 1961년 한국 장면 정권은 화해무드 조성을 이유로 김두봉과  홍명희 등을 남한으로 초청하려 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그는 실각당한 뒤였다.

 

"반당종파분자들의 중심 인물은 김두봉, 최창익을 비롯한 신민당 출신이라고 지적하고, 이들의 의도는 공산당 출신의 핵심을 없애고 당 내에서 신민당 출신, 즉 소부르주아 성분이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이들은 노동당을 소부르주아적 정당으로 바꾸고 소련과 미국에 대해 중립정책을 실시하려고 하였으며, 조국을 허무하고 위험한 길로 끌고 가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박헌영은 조선인민공화국 건국때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했고 김두봉은 배재학당 이승만 후배로 친미 친이승만 세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