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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내란음모' 등 혐의 이석기 징역 20년 구형 본문
검찰, '내란음모' 등 혐의 이석기 징역 20년 구형
CIA bear 허관(許灌) 2014. 2. 4. 11:18
"軍政分離主義 세습제 좌익군정 북한정부가 軍政統合主義 民間政府(文民政府)로 권력변경이 돼야 패권주의 군사정책(NLPDR-무장혁명과 남침)보다는 경제실리를 추구하는 평화공존 남북협력 세력이 될 수 있다. 통합진보당 RO가 세습제 좌익군정(김일성주의,NLPDR)를 옹호할 때 무장단체(남침옹호)로 내란음모에 해당한다 남한내부 김일성주의 NLPDR단체는 통일혁명당과 민혁당[반제동맹->반미청년회->한민전서울대표부(민혁당)]이었다 "
내란음모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에게 검찰이 3일 징역 20년, 자격정지 10년을 구형했다.
함께 기소된 이상호·홍순석·조양원·김홍열·김근래 피고인에게는 징역 15년에 자격정지 10년, 한동근 피고인에게는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수원지법 형사12부(부장판사 김정운)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이석기 피고인은 북한 주체사상과 대남혁명론에 따라 사회주의혁명을 위해 국회에 진출, 신분을 악용하며 'RO' 조직원들에게 폭동 등 군사 준비를 지시해 엄한 처벌이 필요하다"며 중형을 구형한 이유를 밝혔다.
검찰은 이어 "민혁당 사건으로 처벌받았음에도 국민 생명을 사지로 몰아넣고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제거하려는 범행을 계획하고 전혀 반성하지 않아 사회로부터 장기간 격리하는 방법만이 재범을 막는 유일한 길"이라고 설명했다.
검찰은 또 정신이상자에 의해 120여명의 시민이 사망한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을 예로 들며 "기간시설은 마비될 경우 안보와 국민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하는데 피고인은 자신의 계획이 실행될 경우 따를 무수한 희생을 예상하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또 피고인 모두를 겨냥해 "피고인들이 속한 RO와 같은 지하혁명조직은 단선연계, 복선포치로 운영돼 적발하기가 매우 어렵다"며 "이러한 조직이 얼마나 더 있을지조차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을 통해 체제 위협 세력에 엄중한 경고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형법상 내란음모 및 선동은 유죄가 인정될 경우 징역 3년 이상 유기징역,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 위반은 7년 이하 유기징역에 처해진다.
그러나 내란음모 및 선동, 국가보안법 위반 등 각각의 혐의는 실체적 경합(수 개의 행위로 수 개의 범죄가 성립) 관계여서 형법상 가장 장기간 징역형인 30년의 절반인 15년까지 더해 처벌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내란음모 및 선동,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는 이 의원과 김홍열 피고인은 징역 3년~45년, 내란선동 혐의가 빠진 나머지 피고인들은 징역 3년~37년까지 구형이 가능하다.
검찰은 구형에 앞서 RO의 조직 체계와 비밀회합을 통한 내란선동과 음모, 이적동조 등 국가보안법 위반, 법률적용 및 정상관계 등에 대해 2시간 30여분에 걸쳐 최후의견을 진술했다.
오후 재판에서는 검찰의 최후의견 진술에 맞선 변호인단과 피고인들의 최후변론 절차가 진행되며 1심 선고는 오는 17일 이전에 나올 전망이다
*인민의회정부론에서 국가수반(국가대표)은 국가주석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다
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권력주체)로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 할 수 있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인민의회 정부론은 내각책임제 정부형태로 공산주의국가나 사회주의 헌법(국가 사회주의)에서 실행돼오고 있다
인민의회 정부론에서 국가수반(국가대표)은 국가주석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다
1.내각책임제
의원 내각제(議院內閣制, Parliamentary system)란 일단 행정과 입법이 분리된 근현대 헌법 기관 형태를 갖추고는 있으나, 내각(행정부)의 존립 근거가 전적으로 의회 신임 여부에 달려있는 정부 형태이다. 대통령제는 내각이 통수권자의 임명 후 의회의 추인에 따른 절차적 형태를 띄는 데 반해, 의원 내각제의 내각 구성은 집권당 혹은 연정에 참여한 여러 정당의 의원들에 의해 구성되고 정당이 모든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이 특징이다. 내각책임제 또는 의회정부제라고도 한다
(1)내각책임제 역사
ㄱ.17세기 시민혁명
의회민주주의는 시민혁명이 실천된 17세기의 영국에서 입헌군주제와 함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의회가 군주에 대해 불신임을 주장한 혁명인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 주권의 원칙이 확립되었고, 이후 의회를 대신해 집행권을 행사하고, 의회의 통제에 따르며, 국왕의 자문에 응할 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튜더 왕조 시대에 성립한 추밀원(Privy Council)에서 내각이 분화되면서 초기에는 국왕이 주재하였다
ㄴ.입헌군주제
1714년에 조지 1세가 각의를 주재하지 않게 되었고, 1721년에는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이 조지 1세의 신임에 따라 각의를 주재하면서 이른바 ‘각의의 수석’(Primius inter pares, the first in equals)이라는 관념이 생겨났다. 이는 동시에 ‘군주는 군림하지만,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ㄷ.하원과 상원의 구분
1782년에 프레드릭 노스의 내각이 하원의 불신임 결의에 따라 총사직하고, 1783년에는 윌리엄 피트의 내각이 하원의 불신임 결의에 대해 하원의 해산을 단행한 뒤 1784년의 총선거에서 승리하게 된 이후에 의회의 내각에 대한 불신임과 내각의 의회에 대한 해산의 관행이 정착하면서 의원내각제가 본격적인 시대를 맞게 되었다
(2)내각책임제의 유형
ㄱ.고전적 의원내각제
고전적 의원내각제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영국과 같이 내각과 의회의 다수파가 형식적으로 일치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내각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형태인 영국형 의원내각제(이른바 내각책임제)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의 제3·4공화국과 같이 강한 의회와 약한 내각을 특징으로 하는 프랑스형 의원내각제이다. 프랑스형 의원내각제의 경우 수상이 행정을 담당하고, 대통령은 의례적 권한을 행사하는데 의회는 정부에 대하여 불신임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정부는 의회를 해산하지 않는 것이 관계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ㄱ)영국형 내각책임제-입헌군주제
군주의 권력이 헌법에 의해 제한을 받는 정치 체제로 군주는 국가의 상징적인 지배자일뿐 실질적 통치는 내각과 국민들이 선거로 뽑은 의회가 하는 체제이다
국민을 통치와 책임은 내각(수상), 의례적 형식적 국가대표(국민대표, 국가원수)는 국왕이나 대통령이다
(ㄴ)프랑스형 내각책임제-의회정부론(의회의 우월성 측면에서 운영하는 정부)
a.본래의미 의회정부제-프랑스 국민공해
b.집정정부제-의회가 행정부 지위와 역할 수행(스위스)
c.인민회의제(인민 회의정부론, 인민민주주의)-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헌법(국가사회주의)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하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하지 못한다(권력이 의회에 집중돼 있고 내각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있다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헌법 국가들은 1당 독재 국가체제로 당 총서기나 당 총비서가 내각 수상이나 국가주석이다)
인민의회정부론에서 국가수반(국가대표)은 주석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대통령)이다 국가주석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의례적 상징적 인물이고 실질적 권한은 수상이 해오고 있다
ㄴ.외견적 의원내각제
ㄷ.건설적 의원내각제
건설적 의원내각제는 통제된 의원내각제라고도 하는데, 독일 기본법과 같이 강한 정부와 약한 정부를 기초로 한다. 이 경우 의회가 의결을 통해 후임 수상을 선출하지 않은 경우에는 현 수상에 대하여 불신임을 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독일연방공화국 헌법)
통제된 내각책임제(제어된 내각책임제)는 정부(내각)가 의회보다 우월한 정부 권력구도로 강한정부, 약한의회 정부라고 표현하고 있다
건설적 불신임 투표제는 단순한 불신임제와는 달리 차기 수상을 먼저 선출 하여야만 현직 수상을 불신임할 수 있는 제도로 건설적 불신임제는 내각(행정부)의 안정을 가져다주게 되며 의회에 대한 정부의 우위를 의미한다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은 의례적 상징적 국가수반(국가원수)이며 수상은 국민의 통치와 책임자 내각수반이다
(3)내각책임제의 특색
의회의 다수파에 의하여 정부가 구성된다. 이는 민주적 정당성을 일원화해 주는데, 집행부의 장인 수상이 의회에 의하여 선출되고 수상이 인선하는 각료가 수상의 정책노선을 따라 구체적으로 집행업무를 담당한다. 이 경우 수상과 함께 내각 전체가 의회에 대하여 정치적인 책임을 진다
ㄱ.장점
내각의 존속과 진퇴가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에 의존하기 때문에 민주적 정당성이 강하며, 민주적 요청을 만족시킬 수 있다. 또한 내각이 의회에 대하여 책임을 짐으로써 책임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 또한 내각의 의회해산권과 의회의 내각불신임권은 서로의 정치적 대립을 해결하는 데 주효한 역할을 할 수 있고, 내각이 입법부에 대하여 신임을 얻기 위해 유능한 인재를 기용할 확률이 커진다.
ㄴ.단점
의원내각제의 단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우선 내각제는 장관직을 전문가나 행정 관료가 아닌 집권당의 국회의원들이 맡게 되고, 통수권자의 명령이 아닌 합의를 요구하는 절차적 특성 탓에 국가 위급 사태 등이 닥쳤을 때 대통령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제 해결 속도가 느리다. 특히 소수의 의석을 가진 여러 정당이 난립하는 경우에는 연정을 구성해 장관직 등을 의석 수대로 각 당에 분배할 수밖에 없어 긴급 현안에 대한 대처가 더욱 더뎌질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이를 타개하기 위해 대연정과 같이 내각을 대통령제처럼 행정 관료나 대학 교수등 비정치인들이 담당하고 다수당이 결정권을 독점할 경우 오히려 다수결의 횡포를 가져올 수 있으며, 견제장치를 마련하기가 곤란하다. 이 점은 대통령제의 단점과 같다. 대표적으로 양차에 걸친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상,하원의 경우가 그 역사적인 예가 된다.
2.인민의회정부론
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권력주체)로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 할 수 있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ㄱ.민선의회에 권력이 집중
ㄴ.집행부(내각, 행정부)는 의회에 예속 종속됨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하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하지 못한다(권력이 의회에 집중돼 있고 내각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있다 공산주의 국가나 사회주의 헌법 국가들은 1당 독재 국가체제로 당 총서기나 당 총비서가 내각 수상이나 국가주석이다)
인민의회정부론에서 국가수반(국가대표)은 주석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대통령)이다 국가주석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의례적 상징적 인물이고 실질적 권한은 수상이 해오고 있다
중국은 국가주석이 국가수반(국가대표)이고 군사위원장이 군 통수권자이며 총리(수상)은 행정부 수반이다 국가주석 임기는 5년 중임제이고 총리는 의원 임기와 동일하다 군사위원장 임기는 제한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국가수반(국가대표)이고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군 통수권자이며 총리(수상)은 행정부 수반이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임기는 의회 의원 임기와 동일하고 연임이 가능하다
ㄷ.북한 국가수반(국가원수)
(ㄱ)북한정부 제 1대 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48년 9월 9일 ~ 1958년 3월(사임)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북한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김두봉이 선출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金枓奉(朝鮮語:김두봉, 1886年3月16日-1961年?),朝鲜政治人物。曾任朝鲜第一届最高人民会议常任委员会委员长 兼朝鲜國家元首(1948年 9月 - 1958年 3月)。延安派之一。號 白淵(백연)。
1886年生于庆尚南道。1946年2月16日在中国成立朝鲜新民党,任党主席。8月,新民党与朝鲜劳动党合并,金枓奉出任中央委员会委员长。1948年出任最高人民会议常任委员会委员长,后期改任南北朝鲜合并成的朝鲜劳动党中央委员会副委员长,委员长一职由金日成接任。1957年后与金日成不和,被开除出党。去世情况不详,估计在1961年左右。金枓奉有一女儿。
(ㄴ)북한정부 제 2대 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58년 3월 4일 ~ 1972년 12월 14일
(ㄷ)북한정부 제 3대 국가수반(국가원수) 김일성 주석 1972년 12월 15일 ~ 1994년 7월 8일
(ㄹ)북한정부 임시 국가수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
(ㅁ)북한정부 제 4대 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98년 9월 5일--현직
김정일 사후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수반으로 대내외 정책을 수행해오고 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였지만 주석직은 계속 유지되면서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유훈통치(遺訓統治)를 하다가 1998년 9월 5일 사회주의헌법이 개정 되면서 김일성 주석이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었고 국가수반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제106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 휴회중의 최고주권기관이다.
제107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위원장, 부위원장, 서기장, 위원들로 구성한다.
제108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약간명의 명예부위원장을 둘수 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가운데서 오랜 기간 국가건설사업에 참가하여 특출한 기여를 한 일군이 될수 있다.
제109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임기는 최고인민회의 임기와 같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 임기가 끝난후에도 새 상임위원회가 선거될 때까지 자기임무를 계속 수행한다.
제110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임무와 권한을 가진다.
1. 최고인민회의를 소집한다.
2. 최고인민회의 휴회중에 제기된 새로운 부문법안과 규정안, 현행 부문법과 규정의 수정, 보충안을 심의채택하며 채택실시하는 중요부문법을 다음번 최고인민회의의 승인을 받는다.
3. 불가피한 사정으로 최고인민회의 휴회기간에 제기되는 국가의 인민경제발전계획, 국가예산과 그 조절안을 심의하고 승인한다.
4. 헌법과 현행부문법, 규정을 해석한다.
5. 국가기관들의 법준수집행을 감독하고 대책을 세운다.
6. 헌법, 최고인민회의 법령, 결정, 국방위원회 결정, 명령,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결정, 지시에 어긋나는 국가기관의 결정, 지시를 폐지하며 지방인민회의의 그릇된 결정집행을 정지시킨다.
7.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사업을 하며 지방인민회의 대의원선거사업을 조직한다.
8.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과의 사업을 한다.
9. 최고인민회의 부문위원회와의 사업을 한다.
10. 내각 위원회, 성을 내오거나 없앤다.
11. 최고인민회의 휴회중에 내각총리의 제의에 의하여 부총리, 위원장, 상, 그밖의 내각성원들을 임명 또는 해임한다.
12.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문위원회 성원들을 임명 또는 해임한다.
13. 중앙재판소 판사, 인민참심원을 선거 또는 소환한다.
14. 다른 나라와 맺은 조약을 비준 또는 폐기한다.
15. 다른 나라에 주재하는 외교대표의 임명 또는 소환을 결정하고 발표한다.
16. 훈장과 메달, 명예칭호, 외교직급을 제정하며 훈장과 메달, 명예칭호를 수여한다.
17. 대사권과 특사권을 행사한다.
18. 행정단위와 행정구역을 내오거나 고친다.
제111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상임위원회 사업을 조직 지도한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국가를 대표하며 다른 나라 사신의 신임장, 소환장을 접수한다.
제112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전원회의와 상무회의를 가진다.
제113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전원회의는 상임위원회의 임무와 권한을 실현하는데서 나서는 중요한 문제들을 토의결정한다.
제114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정령과 결정, 지시를 낸다.
제115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자기 사업을 돕는 부문위원회를 둘수 있다.
제116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자기 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앞에 책임진다.
*세습제 좌익군정(좌익군사정부)
1.세습제 좌익군정이란
세습제 좌익군정(좌익군사정부)은 병정분리주의(兵政分離主義) 또는 군정분리주의(軍政分離主義) 군사정책으로 군 통수권 독립이 허용하는 국가권력기구로 국가수반(국가대표)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나 대통령이고 군 통수권자는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나 최고지도자이다
북한 권력기구는 총리가 행정의 수반을 맡고 있으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수반을 맡고 있으며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군 통수권을 맡고 있다
군정분리주의는 군정과 군령을 분리된 국가제도이다 군정분리주의는 군정기관과 군령기관의 역할을 내각과 국방위원회로 분리함으로써 군정은 정부의 책임과 의회의 통제 아래에 두지만 군령은 정부나 의회보다 우월한 군령권을 국방위원회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군 통수권에 정치적 판단(의회통제)이 개입할 여지가 없고 오로지 수령(최고 지도자)에게만 모든 군 인사권이 주어지고 있다
북한은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김일성 가계(家系) 군대이다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 등이 북한 최고 군사기구 국방위원회와 군 통수권을 장악해왔다 북한 인민군은 북한 주민이나 정부군대가 아닌 김일성 가계군대 즉 사병(私兵)이다
(1)군정분리주의 세습제 좌익군정은 군(軍)통수권 독립이 허용되는 모델로 국가수반(국가대표)이 군 통수권자가 아닌 국방위원회(군사평의회) 위원장이 군 통수권자이다
(2)군정분리주의는 문관(의회와 내각)에 대한 무관(인민군과 국방위원회)의 지배가 가능함으로 군국주의가 대두 되고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단체들이 군을 장악하는 형태이다 그러므로 용병작전(用兵作戰)에서 정치적 이익(의회)관계가 개입될 우려가 없고 오로지 수령(지도자)에 대한 충실한 충성 군대만 있었므로 강군(强軍)을 유지할 수 있는 침략주의 국가사회주의 군대 모델이다
북한 인민군 실권자가 최고 권력자로 언제든지 군사쿠데타나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으며 내전 위기때 군벌끼리 권력투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북한정부는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김일성 가계군대로 김일성에 대한 충성은 있지만 김정일, 김정은 세습제 가계군대로 변질돼 최고지도자(세습제 좌익군정)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고 반란 가능성이 꾸준히 내부에서 제기돼 오고 있다 북한 인민군만 장악하면 북한 최고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이론이 군정분리주의 좌익군정 한계이다
(3)북한은 군정분리주의(병정분리주의) 좌파성향 국가사회주의 좌익군사독재정부(좌익군정) 국방위원회(군사평의회) 군대모델로 언제든지 남한을 침략할 수 있는 국가사회주의 체제이다 (4)병정분리주의(군정분리주의) 국가는 중국이나 북한, 이란, 리비아 카다피, 시리아등 좌익군사정부 국가사회주의 체제 국가들이다 노동당 당군이 인민군이며 국방위원회와 인민군이 노동당과 내각, 의회를 사실상 장악하여 현역군인 중심으로 북한 권력을 장악해오고 있다중국은 등소평 헌법에서 국가주석과 부주석 임기제한 그리고 군사정책도 군정통합주의로 개혁을 추진해오고 있다 군은 당군이 아닌 국민의 군대, 국군이 돼야 한다
(5)병정통합주의(兵政統合主義)란 군정통합주의는 군정기관과 군령기관을 모두 행정부에 소속시켜 군령 또는 군정과 같이 국가행정의 일부로서 정부의 책임과 의회의 통제 아래서 수행하도록 하는 주의로써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다 군정통합주의는 통수권의 독립이 허용되지 않으며 문관에 대한 무관의 지배가 불가능함으로 군국주의(군부통치)의 대두를 방지하는 장점이 있다 군정통합주의는 미국이나 영국, 한국, 러시아등 대부분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다 ㄱ.국가원수가 군 통수권자이다 ㄴ.문관(의회와 내각)에 대한 무관(인민군과 국방위원회)의 지배가 불가능함으로 군국주의나 침략주의 군대가 될 수 없다
2.북한 헌법상 국방위원회
제 2 절 국방위원회 제100조 국방위원회는 국가주권의 최고군사지도기관이며 전반적 국방관리기관이다. 제101조 국방위원회는 위원장, 제1부위원장, 부위원장, 위원들로 구성한다. 국방위원회 임기는 최고인민회의 임기와 같다. 제102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은 일체 무력을 지휘통솔하며 국방사업전반을 지도한다. 제103조 국방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임무와 권한을 가진다. 1.국가의 전반적무력과 국방건설사업을 지도한다. 2.국방부문의 중앙기관을 내오거나 없앤다. 3.중요군사간부를 임명 또는 해임한다. 4.군사칭호를 제정하며 장령이상의 군사칭호를 수여한다. 5.나라의 전시상태와 동원령을 선포한다. 제104조 국방위원회는 결정과 명령을 낸다. 제105조 국방위원회는 자기 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앞에 책임진다
3.북한 헌법 변천과정
1948년 공화국 설립 시에는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원수직을 겸직하게 하고, 그 아래 내각 총리를 두었다. 이후 최고인민회의의 상임위원장인 김두봉, 최용건이 국가원수직을 겸하였으며, 1972년 사회주의 헌법 제정과 동시에 국가 주석직을 신설하여 초대 총리인 김일성을 주석으로 추대했다. 이후 김일성은 1990년 국가주석에 재선되었으나 1994년 사망하여 국가주석직은 사실상 폐지된 상태이다.
북한의 정치체제는 주체사상과 '독재주의'에 근거하는 일인 일당 체제이다. 스스로는 '공산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국가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과 국제공산주의 운동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다. 한 예로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표방하는 점은 공산주의의 국제성과 자체모순된다. 사실상 권력을 부계로 세습하는 상황이어서 북한이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김씨 왕조', '공산왕조', '봉건주의' 왕국이라고 비난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정당을 비롯한 계급이 소멸하도록 되어 있는데, 북한에서는 계급이 소멸되기는 커녕 오히려 지배계급이 세습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김일성,김정일, 김정은 세습제 좌익군정이 북한 노동당과 군을 장악하고 있고, 북한 노동당 이외의 정당도 여러 가지가 있긴 하지만 노동당이 곧 국가라는 관점이 지배한다.
또한, 1990년대 말부터 선군정치(先軍政治) 사상이 추가되었다. 또한 군 통수권이자 국방 전반의 최고 지도자는 국방위원장이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국가수반(국가대표)과 會議政府論(입법부) 수장(의장)이다. 현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김영남(金永南)이다. 2010년 김정일의 차남 김정은이 대장 칭호를 받고 김정일의 후계로 추대되고 김정일 사망 이후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
(1)북한 헌법 변천과정
ㄱ.1공화국 헌법-김두봉 헌법(인민 민주주의 헌법)
북한 제1공화국 헌법은 인민민주주의(회의제 정부론) 헌법 또는 김두봉헌법으로 알려지고 있다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김두봉이 선출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PDR(인민민주주의 혁명)은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 이론이다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는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
중국에서는 인민의회에 중국 권력기관이 집중되거나 예속, 종속하는 형태이다(스위스는 의회가 행정부 부담 회의제 정부형태로 의회의장의 1년에 한번씩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권력 임기를 제한함으로 국가권력 특권층이 없다)
ㄴ.제2공화국 헌법-김일성 헌법(사회주의 헌법-주체헌법)
북한 제2공화국 헌법은 사회주의 헌법 또는 김일성헌법으로 알려지고 있다.1972년 12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채택했다
ㄷ.제3공화국 헌법- 군정분리주의 좌익군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김정일 헌법)
북한 제3공화국 헌법은 국가 주석제를 폐지하고 군정분리주의 세습제 좌익군정 국방위원회 도입으로 국가수반(입법부 수장)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며 군 통수권자(노동당 총비서)는 국방위원회 위원장(제1위원장)으로 규정하여 우리식 사회주의(주체노선, 군사정부) 김일성 헌법과 인민회의 정부론(인민민주주의, 의회정부론) 김두봉 헌법을 기반으로 새로운 권력구도를 재정립해왔다
북한 제2공화국 김일성 헌법보다는 권력분배를 했지만 인민회의정부론 북한 제1공화국 김두봉헌법 수준이 아니다
북한 제3공화국 헌법은 군정분리주의 좌익군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이다
(2)북한 국가수반(국가원수)
ㄱ.북한정부 제 1대 국가수반 김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48년 9월 9일 ~ 1958년 3월(사임)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북한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김두봉이 선출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ㄴ.북한정부 제 2대 국가수반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58년 3월 4일 ~ 1972년 12월 14일
ㄷ.북한정부 제 3대 국가수반(국가원수) 김일성 주석 1972년 12월 15일 ~ 1994년 7월 8일
ㄹ.북한정부 임시 국가수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
ㅁ.북한정부 제 4대 국가수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98년 9월 5일--현직
김정일 사후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수반으로 대내외 정책을 수행해오고 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였지만 주석직은 계속 유지되면서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유훈통치(遺訓統治)를 하다가 1998년 9월 5일 사회주의헌법이 개정 되면서 김일성 주석이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었고 국가원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제106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 휴회중의 최고주권기관이다. 제107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위원장, 부위원장, 서기장, 위원들로 구성한다. 제108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약간명의 명예부위원장을 둘수 있다.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가운데서 오랜 기간 국가건설사업에 참가하여 특출한 기여를 한 일군이 될수 있다. 제109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임기는 최고인민회의 임기와 같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 임기가 끝난후에도 새 상임위원회가 선거될 때까지 자기임무를 계속 수행한다. 제110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임무와 권한을 가진다. 1. 최고인민회의를 소집한다. 2. 최고인민회의 휴회중에 제기된 새로운 부문법안과 규정안, 현행 부문법과 규정의 수정, 보충안을 심의채택하며 채택실시하는 중요부문법을 다음번 최고인민회의의 승인을 받는다. 3. 불가피한 사정으로 최고인민회의 휴회기간에 제기되는 국가의 인민경제발전계획, 국가예산과 그 조절안을 심의하고 승인한다. 4. 헌법과 현행부문법, 규정을 해석한다. 5. 국가기관들의 법준수집행을 감독하고 대책을 세운다. 6. 헌법, 최고인민회의 법령, 결정, 국방위원회 결정, 명령,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결정, 지시에 어긋나는 국가기관의 결정, 지시를 폐지하며 지방인민회의의 그릇된 결정집행을 정지시킨다. 7.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사업을 하며 지방인민회의 대의원선거사업을 조직한다. 8.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과의 사업을 한다. 9. 최고인민회의 부문위원회와의 사업을 한다. 10. 내각 위원회, 성을 내오거나 없앤다. 11. 최고인민회의 휴회중에 내각총리의 제의에 의하여 부총리, 위원장, 상, 그밖의 내각성원들을 임명 또는 해임한다. 12.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문위원회 성원들을 임명 또는 해임한다. 13. 중앙재판소 판사, 인민참심원을 선거 또는 소환한다. 14. 다른 나라와 맺은 조약을 비준 또는 폐기한다. 15. 다른 나라에 주재하는 외교대표의 임명 또는 소환을 결정하고 발표한다. 16. 훈장과 메달, 명예칭호, 외교직급을 제정하며 훈장과 메달, 명예칭호를 수여한다. 17. 대사권과 특사권을 행사한다. 18. 행정단위와 행정구역을 내오거나 고친다. 제111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상임위원회 사업을 조직 지도한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국가를 대표하며 다른 나라 사신의 신임장, 소환장을 접수한다. 제112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전원회의와 상무회의를 가진다. 제113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전원회의는 상임위원회의 임무와 권한을 실현하는데서 나서는 중요한 문제들을 토의결정한다.제114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정령과 결정, 지시를 낸다.제115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자기 사업을 돕는 부문위원회를 둘수 있다.제116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자기 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앞에 책임진다.
(3)군정분리주의 좌익군사정부:노동당과 당군 인민군이 북한 권력장악[북한 김일성 측근 권력장악]
ㄱ.실권자 대리- 노동당 제1비서 김정은
ㄴ.군 통수권자 대리-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김정은
ㄷ.국가수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
ㄹ.행정수장- 내각총리 박봉주
*국가원수 영원한 주석 故 김일성
*군 실권자 영원한 국방위원장 故 김정일
*노동당 실권자 영원한 노동당 총비서 故 김정일
(4)북한정부 통치자(실권자-군 통수권자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
ㄱ.소비에트 연방(소련) 국가원수 스탈린(임시정부) 1945년 8월 15일-1948년 9월 9일
(ㄱ)소비에트연방의 극동군 제88국제여단은 북한 김일성 前 주석을 비롯한 "혁명 1세대"의 모태이다.
김일성이 주도한 보천보 전투 이후 만주에서 일본군의 항일세력 토벌작전이 심화됨에 따라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도피하였다. 소련은 장래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과의 충돌을 대비하고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자국군에 편입하고 88여단이라고 칭했다. 소련군 소속이었으나 실제로는 동북항일연군(중국 공산당군)의 편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곳에 참가한 조선인 가운데 약 60여명이 확인되며, 이들 대부분은 소학교 중퇴자이며 김일성을 비롯한 4인이 중학교 중퇴이다. 이들은 88여단에서 1940년경부터 해방까지 약 5년간 복무했으며, 소련군정하에서 김일성의 측근이 되어 훗날 북한 권력층의 핵심이 된다.
이들 중 중등교육 수준의 학력을 갖추었던 사람은 대위 김일성, 상조 임춘추, 대위 안길, 대위 김책, 중위 서철의 5인이다. 이 외의 55인의 평균학력은 소학교 3학년이다
(ㄴ)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ㄷ)후세인과 김일성등 국가사회주의 세력은 1991년 8월 19일 보수강경파 주도 소련 군부쿠데타를 지지했고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소련군부 쿠데타를 반대했다
중국과 소련등 반미세력이 퇴진하면서 일어난 사건 임표사건, 소련군부 쿠데타등이다 북한정부는 항시 반미세력편에 가담했다(김일성세력은 임표 반란나 소련군부 쿠데타를 지원했다 김일성은 극동소련군 사령부 정찰국 대대장 출신이다)
a.중국정부와 미국정부, 일본정부 국교정상화 과정에 일어난 1971년 임표등 중국 군부쿠데타 시도와 실패 그리고 주은래 등소평등 수교 교섭세력 승리
b.1992년 한국과 소련국교 정상화 과정에 일어난 소련군부쿠데타 시도와 실패 그리고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세력 옐친등장
ㄴ.김일성 총리 겸 인민군 총사령관(국방위원회 위원장) 1948년 9월 9일-1994년 7월 8일
-1991년 12월, 김정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취임과 인민군 장악
ㄷ.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임시) 1994년 7월 8일-1998년 9월 5일[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ㄹ.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 1998년 9월 5일-2011년 12월 17일[주석제 폐지]
ㅁ.김정은 노동당중앙군사부위원장(임시) 2011년 12월 17일-2012년 4월 12일[유훈통치기간 군 통수권 대행]
ㅂ.김정은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2012년 4월 12일--현직
(5)북한 국가주석은 1972년부터 1998년까지의 북한정부의 국가원수이다.
초기의 헌법에서는 인민위원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수반역할을 수행하였고 김일성은 내각의 총리였다. 1972년 김일성이 국가원수로 선출됨으로써 국가수반직이 되었다. 그러나 1994년 유훈통치기간을 거친 뒤 주석제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1998년 9월 5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의 헌법개정으로 인해 일종의 명예 국가 원수화가 이루어졌다. 이 헌법 개정에서는 김일성에 대해 고인임에도 불구,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이라 규정했고 그 대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을 국가원수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최고인민회의 자체가 조선로동당의 정책을 추인하는 기관으로 변질되었고 그 북한 노동당의 총서기를 국방위원장이자 이미 사망한 김일성주석의 아들인 김정일이 겸임하기 때문에 사실상 김정일이 국가 최고 실권자로서 권한을 행사하였다가 2011년 12월 사망하게 되자 사실상 김정은이 최고 지도자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6) 회의제 정부(의회정부제)와 인민 회의정부론(인민민주주의)
ㄱ.회의제 정부(의회정부제) 개념
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권력주체)로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 할 수 있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ㄴ.회의제 정부(의회정부제) 유형-의회의 우월성 측면에서 운영하는 정부
(ㄱ)본래의미 의회정부제-프랑스 국민공해
(ㄴ)집정정부제-의회가 행정부 지위와 역할 수행(스위스)
(ㄷ)인민회의제(인민 회의정부론, 인민민주주의)- 공산주의 국가
ㄷ.회의제 정부(의회정부제) 특징
(ㄱ)민선의회에 권력이 집중
(ㄴ)집행부는 의회에 예속 종속됨
의회는 내각을 불신임하지만 내각은 의회를 불신임하지 못한다
ㄹ.북한 제1공화국 헌법-인민회의제(인민 회의정부론, 인민민주주의)
PDR(인민민주주의 혁명)은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 이론이다
회의제 정부론(의회 정부제)은 의회(인민의회)가 가장 우월한 정부형태이며 의회는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지만 내각(정부)는 의회를 불신임할 수 없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회의제 정부 형태이다
공산주의 국가는 인민의회가 권력을 장악하여 내각은 의회 정책수행 시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각(정부)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왔다
북한 제1공화국 헌법은 인민회의제(인민민주주의) 헌법으로 최고인민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가수반이고 내각은 의회에 예속, 종속돼 있은 권력형태었다
북한 제1공화국 헌법은 인민민주주의(회의제 정부론) 헌법 또는 김두봉헌법으로 알려지고 있다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상임위원장이었고, 김두봉이 선출되었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중국에서는 인민의회에 중국 권력기관이 집중되거나 예속, 종속하는 형태이다(스위스는 의회가 행정부 부담 회의제 정부형태로 의회의장의 1년에 한번씩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므로 권력 임기를 제한함으로 국가권력 특권층이 없다)
4.세습제 좌익군정의 북한 인민군 군 복무기간
북한은 의무교육 중학교 졸업 후 17세때 군 입대하여 남자는 10년간, 여자는 7년간 군 복무를 한다 군 제대 이후 결혼이나 취업, 능력에 따라 유상교육 대학진학 등을 하고 있다 북한 평민층 자녀들이 인민군 제대이후부터 빈곤층, 평민층, 상류층으로 구분돼 가고 있다는 자료이다
북한 특권층(상류층) 자녀들은 의무교육 중학교 졸업 후 능력에 따라 유상교육 대학에 진학하거나 해외유학등을 하고 있으며 군생활도 군간부나 군복무 면제로 군복무를 하고 있다
북한정부 의무교육 혜택이 군복무로 댓가를 지불하는 형태 세습제 좌익군정 권력통치모델이다
(1)북한 여성들은 의무교육 중학교 졸업 후 17세때 군 입대하여 7년간 군복무를 하고 있다 군 복무는 현역군인부터 교통경찰, 보안경찰, 인민군 예술단 단원, 간호원, 산림원, 공장이나 협동농장 근로자, 해외 파견 근로자등 다양한 직종으로 생활하고 있다
(2)17세 군입대 북한 징병제 신체조건 4년 연속저하 142cm OK
인민군 병사 신체(신장)조건이 2008년 150cm에서 4년 연속 저하 2012년 142cm OK이다
북한 전지역이 식량난과 기아로 북한 인민군 징병제 신체(신장)조건이 142cm으로 저하 되었다
(3)북한 12년제 의무교육과 군사훈련
북한 제12회 최고인민회의 제6회 회의 법률개정에서 북한 12년제 의무교육 실시를 하고 있다 5세에서 17세까지 의무교육이다
1년간 취학전 유치원 교육, 초등학교 5년제, 중학교 6년제(중등교육 3년, 고등교육 3년)이다
중학교 졸업 후 군 입대나 대학진학을 하고 있다 대학 진학은 개인 학업능력과 유상교육이다
대학 입학생은 대부분 중학교 졸업생이나 제대 군인들이며 중학교 졸업자 중 30%이내 수준이다 북한에서 대학진학은 돈과 개인 학업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북한 고아등 빈곤층과 일부 평민층 자녀들은 식량난과 기아생활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의무교육 혜택조차 보호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엔과 미국, 유럽, 한국등 각국 정부 식량지원으로 고아등 빈곤층과 일부 평민층 자녀들 식량난을 해결해오고 있다
그리고 북한정부는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때 군사훈련 교육을 받고 있다 중학교 때 우수한 군사교육생은 교통경찰등 각종 특례 군 복무를 할 수 있게 하며 중학교 졸업 후 인민군 전체 40%수준이 거주(중학교 졸업 지역) 군 복무를 하고 있다
북한 지역에서 군인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남자 10년간, 여자 7년간 군 복무를 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졸업생 40% 수준이 지역 치안과 방위 군복무를 하고 나머지는 전시군인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다
야간통행금지 시간에는 지역 검문소를 운영하면서 북한 주민통제를 인민군이 직접하고 있는 계엄 좌익군정이다
5.평민층 식량난
북한 평민층들의 식량난이 심각하다
굶주림과 배고픔 그리고 기아등으로 신음하는 사람은 북한 상류층이 아닌 북한 평민층들이다
북한 평민층에게는 핵무기도 아닌 굶주림과 배고픔 해결할 수 있는 빵과 경제활동 생활 터전이다
북한 식량난(영양실조) 주민은 90년대 초 420만명, 90년대 중반 700만명, 북한 경제 만성적 경제위기로 10년 후 2007년도 전체 국민 33% 780만명이 영양실조(영양부족) 상태이다
북한정부는 과거 700 그램(gram) 식량을 배급하다가 요즘에는 200 그램(gram) 식량을 배급하고 있다 북한 군인들도 식량난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입대조건 신체 신장이 작아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북한 주민 금년 식량부족량은 414만톤이다
북한 평민층은 식량난이나 영양실조 경험을 하고 있지만 북한 상류층은 사치 호화생활을 하고 있다
북한 평민층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혁개방정책과 핵무기 포기 조건으로 남북협력과 북미수교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 반공반독재구국전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민주정부로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공산주의 반대는 자본주의입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자본주의 3대원칙 개인의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시장경쟁원리등)를 부정하지만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 국가는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민주정부 복지국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유럽을 동서 양 진영으로 분단했던 이른바 '철의 장막'의 붕괴 2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식전이 동서를 실제로 격리시킨 철조망을 처음 철거한 헝가리에서 열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서 양 진영간에는 철조망 등이 길게 쳐져 있었으나 20년 전인 6월 27일 당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외상이 양국의 국경에 있었던 철조망을 절단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당시의 동독 국민이 헝가리 등을 경유해 서독으로 넘어왔으며 그 해 11월에 '베를린의 장벽'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3대 원칙[개인의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시장경쟁원리] 승리입니다. [미국정부 귀가 빙빙 돌아가는 머리소리함 연구원 許灌 자료]
*좌파전선(진보전선)과 민주전선
오늘 한국 머리소리함 주요 인물들이 좌파전선(진보전선)과 민주전선에 대하여 논의해드립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입니다
민주전선은 반독재주의(반전체주의)를 의미하며 민주화 세력 모임을 의미합니다 민주화 세력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자유권 존중=자유민주주의 세력)
와 사회주의자(사회권 존중=사회민주주의 세력) 세력 좌우익연합세력 모임입니다
민주화 세력 적은 독재자나 전체주의자임으로 전제군주, 국가사회주의 세력이나 좌익군정세력입니다 좌익군정은 사회주의 세력 내부 군정분리주의(병정분리주의) 노선으로 인민회의제 정부론(순수 내각책임제 정부론, 내각이 의회 시녀)을 부정하고 인민의회 보다 윗 권력기구 최고지도자 제도(군사위원회나 군사평의회, 국방위원회)를 도입하여 군 통수권자(국방위원회)와 군부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독재주의(전체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 정부 형태입니다
북한정부는 노동당 좌익세력(사회주의 세력-인민의회)이면서 노동당 당군 인민군(국방위원회)이 북한 권력을 장악하는 국가사회주의 노선 좌익군정입니다
좌파전선(진보전선)은 반우파전선(반보수전선)을 의미하며 사회주의 전선을 의미합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인정하면 사회주의 세력으로 자본주의를 부정하면 공산주의 세력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는 개인의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공동생산, 공동분배 윈칙으로 인민회의제 정부형태(순수 내각책임제-정부는 의회 시녀)로 의회독재(일당독재) 계급없는 사회 만민(萬民)의 평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전선 내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 노선(생존권= 사회권 존중)을 지향하는 세력은 민주전선 세력이고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군정분리주의 좌익군정(군사평의회나 국방위원회, 군사위원회) 형태 최고지도자 중심의 권력을 지향하는 세력은 민주전선이 아닌 전체주의(독재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 정부형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좌익군정이 좌파전선(진보전선)은 될 수 있지만 민주전선이 될 수 없습니다
좌익군정은 대부분 공산주의 세력보다는 사회주의 세력으로 북한 노동당(아랍 사회당)등입니다
군(軍)이 당군이 될 수 없습니다
국가의 군대는 국군으로 국민(인민)의 군대입니다
북한 인민군은 노동당 당군으로 노동당 이익을 위해서 활동하는 군대이며 김일성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세습제 좌익군정(김일성, 김정일, 김정은등) 무장력입니다
북한 인민군은 북한 노동당 당군 김일성주의 군대로 세계 각국 김일성주의 세력을 확장하는 무장력입니다
유엔이나 선진국에서는 북한 인민군을 보고 좌익군정 테러단체(김일성주의 무장단체)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북한 협력세력은 민주전선이지 좌파전선(진보전선)이 아닙니다
북한 내부 남북협력과 평화세력은 사회민주주의 세력이며 개혁개방세력(자유화 개방화 세력)입니다
북한 내부 전쟁세력은 좌익군정 세력이며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세력 김일성주의 세습제 좌익군정입니다
남한도 전쟁세력은 군정입니다
대북정책에서 좌파전선(진보전선)보다는 민주전선으로 추진돼야 합니다
민주전선은 자유민주세력과 사회민주세력 연합모임이지만 좌파전선(진보전선)은 사회주의 전선으로 세습제 좌익군정 세력도 연합세력으로 포용할 수 있습니다
북한정부는 세습제 좌익군정 국가입니다
세습제 좌익군정은 약점은 민주전선(반독재주의나 반전체주의)입니다
민주전선 무장력은 민주화 세력입니다
유엔이나 세계 각국 대부분 국가들이 민주정부입니다
세계 각국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정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통일혁명당과 민혁당
북한지역--통일전선사업부 산하 반제민족민주전선(한국민족민주전선)
통일혁명당은 북한 김일성정부가 4.19혁명이 일어나자 대남 통일전선 조직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구성하여 대남 평화공세과 연합전선 구축 공세를 강화하게 됐다 그때 남파 간첩 김송무를 남파시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등을 포섭 월북시켜 간첩교육을 시킨 뒤 1964년 3월 통일혁명당을 결성하였으나 1968년 7월 김종태(통일혁명당 총책 겸 서울시 책임자), 이문규(조국해방전선 책임자), 김질락(민족해방전선 책임자)등 통일혁명당 관련자 검거 체포와 통일혁명당 기관지 청맥 보급로 제거등으로 조직 와해되었다
북한정부는 <통일혁명당> 당 명칭을 1985년 7월 27일부터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변경해 사용해오고 있다 일본지역에서 1986년 8월 8일부터 <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명칭을 변경하여 사용해왔다 그리고 2005년 3월 29일부터 <반제민족민주전선>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사용해오고 있다
남한지역에서는 1985년 7월 27일 이후 <통일혁명당> 명칭이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공식 변경하지 않고 한국민족민주전선 위장단체 <반제청년동맹> <반미청년회>로 사용해오다가 1990년 1월경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로 공식 사용해왔다
2003년도부터 노무현정부의 한민전 세력 제거작업로 공식 명칭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를 사용하지 않고 2005년 3월 29일부터 과거처럼 위장단체 반미여성회나 반미넷등으로 투쟁하면서 지하 유인물로 <반제민족민주전선>으로 사용해오고 있다
1.통일혁명당 간첩사건
1968년 발표된 통일혁명당의 대규모 대남 간첩단 사건이다
북한 김일성정부는 4.19혁명이 일어나자 대남 통일전선 조직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구성하여 대남 평화공존과 연합전선 구축 공세를 강화하게 됐다 그때 남파 간첩 김송무를 남파시켜 1964년 3월 통일혁명당을 결성했으나 1968년 7월 통일혁명당과 청맥 잡지등이 체포되거나 검거됨에 따라 조직의 와해 되었다
김종태(金鍾泰)를 정점으로 이문규(李文奎, 조국해방전선 책임자), 김질락(민족해방전선 책임자), 최영도(통일혁명당 전라남도 위원회 위원장), 정태묵,윤광수등이 활동한 통일혁명당(약칭:통혁당)은 북한 노동당의 재남(在南) 지하당(地下黨) 조직으로 1964년 무렵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당시 박정희 정권 아래서 억눌린 변혁적 사회운동을 잠재력을 가진 혁신적 지식인, 학생, 청년등과 전(前) 남로당 당원을 포섭하여 결정적 시기에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 정부전복을 결행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 준비위원회 활동이 드러남으로써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158명이 검거되었으며 문화인. 종교인. 학생등이 많이 포함되어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이관학. 송승환등 5명이 사형이 선고되고 신영복교수등 무기징역 4명 등 관련 피고인 30명 전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이들은 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에 김질락이 중심이 된 민족해방전선과 이문규가 중심이 된 조국해방전선을 두었으며 전라남북도, 부산. 경상북도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또한 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 준비위원회 기관지인 <청맥>을 발간 당시 지식인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통일혁명당(통혁당)의 이념. 조직활동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다른데 북한의 지령을 받은 단체로 보기도 하고 독자적인 혁명세력으로서 6.25 한국전쟁 이후 남한 내에서 전위조직을 건설하려는 최초의 주체형 김일성주의 정당 시도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혁신 정치세력의 입지를 좁히고 남한 정치사회의 보수화를 초래하였다
통일혁명당은 1971년 재건을 기도하였으나 또 검거되어 실패하였다
-전위당 문헌 해설(한민전 구국전선 통일여명 편집국 자료)
통일혁명당 선언과 통일혁명당 강령(통일혁명당 중앙위원회 1969년 8월 서울)
http://ndfsk.dyndns.org/kuguk8/ku22/ic_030202.htm
-열린우리당 한명숙의원 남편인 박성준(현 상공회대 교수)씨는 지난 1968년 8월 24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북한 노동당 지하조직인 통일혁명당(통혁당) 산하조직인 경제복지회 주동자로 15년형을 선고받고 13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통일혁명당 경북지역 조직원 권양섭
http://ugh.or.kr/ja/jangkisu1.html
1972 년 2월 경북지역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권양섭은 22년동안 복역하다가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1997년 3월 18일 사망
-1968년 2월 15일(조총련 자료)
남조선통일혁명당 전라남도 위원회 위원장 고(故) 최영도씨를 추도하는 재일조선인의 모임 진행 그리고 남조선통일혁명당의 김종태를 비롯한 사형수(애국자)에 대한 사형을 반대하는 재일일본 조선인 중앙대회
-1969년 7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가칭 통일혁명당(통혁당) 간부 김종태에게 <영웅칭호> 수여
-1969년 11월 25일 통일혁명당 공판을 규탄하는 평양시 집회 개최
(1)통일혁명당사건 주요 인물
ㄱ.김종태(사형)--통일혁명당 위원장(당수) 및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통일혁명당 서울시위원회 위원장)
-1926년 경상북도 영천군 금호면 냉천리(동) 출생
-통일혁명당 주도자였던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등은 모두 월북해 북한 노동당에 입당한 노동당원들이었으며 김종태는 사형집행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ㄱ)김종태의 북한정부 한민전(통일혁명당 후신) 자료
-통일 애국전위 투사 김종태 동지
http://ndfsk.dyndns.org/kuguk8/02_7_11/18.htm
-충신, 전위투사 김종태 동지
http://ndfsk.dyndns.org/kuguk8/45/15.htm
64년 3월 통일혁명당 준비위원회를 결성했으며 <창당준비선언문>을 채택했다
또한 <조국해방전선> <민족해방전선>과 그 산하에 <60년 대학사회> <새문화연구회> <쳥년문학가협의회> <불교도 청년회> <동창회> <청맥회> <민족주의연구회> <학사주점>등 각종 합법, 비합법 대중단체들을 조직하여..
(ㄴ)검찰변천사(연도별 주요사건)
http://www.sppo.go.kr/intro/his_main0313.htm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등 서울에 무장공비 31명 침투(1.21사건)
1968년 8월 12일 서울지방검찰청, 12월 19일까지 <통일혁명당 사건> 피의자 31명 기소
북한은 이 사건의 수괴인 간첩 김종태등을 구출하기 위하여 무장특공대 14명을 공작선편으로 침투시켰고 김종태의 사형이 집행되자 영웅칭호를 부여함
(ㄷ)김종태전기 기관차공장(평양시 서성구역)
김종태는 1960년대 중반 북한의 남조선혁명전략에 따라 남한내에 지하혁명조직인 통일혁명당(한국민족민주전선 전신)결성을 기도했던 인물이다
-1999년 4월 27일 북한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은 궐기모임을 열고 김정일 총비서에게 충성다짐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 종업원들은 2001년 12월 6일 일본경찰의 재일본조선인 총연합회 중앙본부 수색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고 평양방송이 12월 7일 보도 했다
-2002년 3월 21일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에서 반미궐기 집회 개최
-평양지하철(역별사진) http://wesleyc.com/kr/metro/map1.shtml
평양 DK4지하철 차량이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에서 제작되었다고 주장 함
(ㄹ)평양방문기--애국렬사릉의 사라진 묘, 생겨난 묘
http://www.khistory.or.kr/connection/read.asp?num=7&page=1
가묘--1969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돼 이듬해 사형 당한 김종태와 체포과정에 사망한 최영도등..
(ㅁ)통일혁명당과 김종태 미화 신격화 소설책--애국시대(상.중.하)
주인공 김종태(장준호)와 통일혁명당이 남한지역 최초의 김일성주의 정당으로 묘사
ㄴ.김질락(사형)---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 민족해방전선 총책
ㄷ.이문규(리문규, 사형)--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 조국해방전선 총책
ㄹ.최영도(검거과정 사망)---통일혁명당 전라남도 위원회 위원장
(2)통일혁명당 기관지(청맥) http://ndfsk.dyndns.org
(3)통일혁명당(1968년 8월 21일-12월 19일)과 관련된 무장간첩 사건
-김종태는 북한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공작금 미화 7만달러, 한화 2,250만원을 받고 남파된 거물 간첩이었다 허봉학은 통일혁명당 와해 책임과 베트남식 남한점령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거되었으며 지금까지 정치 사상범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
ㄱ.1968년 1월 21일--청와대 기습사건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등 31명 북한군 제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침투하여 청와대 기습사건
ㄴ.1968년 10월 30일--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북한은 통일혁명당 수사와 검거, 체포과정에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울진 삼척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 침투시켜 군복, 신사복, 등산복등으로 위장하여 게릴라전을 펴쳤다
2.민족민주혁명당 간첩사건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은 북한이 1980년대 학원가의 친북투쟁을 주도해온 주사파 핵심세력들을 포섭, 조선노동당에 가입시킨 뒤 북한의 직접 지도를 받는 <민족민주혁명당>을 구축하여 이른바 <남조선혁명운동>을 사주해온 전형적인 지하당 사건으로 북한은 남한내 주사파를 대남적화혁명의 전위대로 삼기 위해 학생운동권에 영향력과 조직적 기반을 갖고 있던 김영환을 포섭, 입북시킨 후 남한내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지하혁명지도부를 구축토록 지령하였고 김영환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주사파 지하조직 <반제동맹=반미청년회>의 핵심세력들을 하부망으로 포섭, 노동당에 현지 입당시켜 <관악산>등의 암호명을 부여하고 북한의 공작금으로 전국적인 조직기반을 갖춘 <민족민주혁명당>(약칭:민혁당)을 결성 암약해 왔으며 북한은 총책인 김영환이 사상적 변화를 일으켜 <민족민주혁명당>을 이탈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주체사상이 투철한 <민족민주혁명당> 중앙위원 하영옥을 접촉한 후 그를 통한 <민족민주혁명당>을 재결속시켜려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국가정보원은 지하조직 <반제청년동맹> 관련 혐의 및 1997년 10월 검거한 최정남 부부 간첩 사건 연루의혹 관련 김영환을 내사해 오던 중 1998년 12월 18일 남해에서 북한으로 복귀하다가 격침된 반잠수정에서 김영환등의 전화번호가 암호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확인 증거확보에 주력해 오던 차에 1997년 10월부터 중국에서 체류 중이던 김영환이 정부당국에 입국허용 탄원서를 제출한 후 7월 29일 김영환이 자진 귀국함에 따라 자연스러운 분위기하에 4회에 걸쳐 심사를 실시 <1989년 7월 북한 직파 간첩에 포섭 되어 입북 귀환 후 북한 지령에 따라 지하당을 결성하였다>는 등의 자백을 받아내고 자수자에 준한 선처방침을 검토하고 있던 중 8월 16일 김영환이 돌연 <말>지에 찾아가 <국정원이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려고 한다>는 거짓내용의 인터뷰를 하여 관련 혐의자들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고 잠적하였다가 8월 18일 18시 35분발 대한항공편을 이용 홍콩으로 출국하려던 김영환을 공황에서 긴급체포하고 관련자 조유식.하영옥. 심재춘. 김경환등을 차례로 연행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수사과정에 김영환과 조유식은 자수와 반성문으로 대한민국정부로 귀순하였다
-1997년 김영환씨가 베이징에 있을 때 울산 간첩 최정남이 붙잡혔다
그리고 최정남이는 김영환씨를 팔아 재야인사에 접근했다고 증언.
-1998년 12월 17일 남해안에서 북한 반잠수정 격침
북한의 반잠수정은 북한 공작원 배모씨와 하영옥씨를 밀입북시키려고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해병대 2사단이 이 배를 발견하고 조명탄을 쏴 확인을 시도하자 아군 고속정이 접근할 수 없는 얕은 수로를 통해 북한으로 도주해 버렸다
북한은 이때 데려가지 못한 공작원을 월북시키고 한달 뒤 여수로 반잠수정을 침투시켰던 것이다
남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반잠수정이 상륙한 사실은 민혁당 연루자인 하영옥(36세), 심재춘(29세)가 국정원에서 "1998년 12월 17일 북한 공작원 배모씨(44세)를 여수 해안으로 안내했다"고 진술하고 지난 1999년 3월 17일 건져 올린 반잠수정에서 이 공작원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됐다
-국정원 발표에 따르면 김영환씨는 지난 1989년 7월 남파간첩 윤택림에게 포섭돼 노동당에 입당한 후 1991년 입북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학 후배인 조유식(말지 기자출신)씨와 함께 반잠수함으로 월북한 후 운동방향등에 논의하고 귀환하여 주사파 운동권 조직인 반제청년동맹을 결성한 뒤 간첩활동을 해왔다고 발표함(예:반제청년동맹-->반미청년회--1990년 한국민족민주전선)
-국정원 발표에 따르면 김경환씨(말지 기자)는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 <민민투>위원장 등을 역임한 후 3차에 걸쳐 위장취업하여 노동자 의식화 활동을 하다가 1994년 4월부터 월간 말지 기자로 재직 중인자로 말레이시아인으로 위장침투하여 서울 강남에서 <삿떼리아>라는 말레이시아식 음식점을 운영하며 암약 중이던 간첩 진운방을 1989년 9월 중순 대학 후배의 소개로 알게 된 후 김영환과 진운방간의 중간 연락책으로 암약하면서 1991년 8월 원주 치악산에서 김영환의 주재로 노동당 현지 입당식을 갖고 <관모봉>이라는 암호명을 부여 받았다
1998년 10월말 진운방이 원진우로 위장하여 재차 침투하자 남파 간첩 원진우를 하영옥과 접선하도록 주선하고 그후 원진우를 여러 차례 접촉하여 그간의 활동내용과 국내정세등을 보고한 혐의이다
-1999년 9월 14일 김영환(서울대 법대 공법과)씨에게 포섭되어 노동당에 입당한과 민혁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혐의등을 받고 있던 박모(35세) 변호사 자수의사 밝힌 뒤 공소보류..
-1999년 9월 17일
8월 범민족대회와 관련하여 방북을 시도한 민족통일 부산연합의장 이성우씨 민혁당 가입죄로 추가 기소
-국가정보원은 민혁당 산하 영남위원회 총책 혐의를 받은 최진수씨와 고등학생 사업담당 혐의의 박정훈씨등 4명의 긴급체포했다
-1999년 10월 7일
민족민주혁명당 연루자가 100명-200명에 달한다고 발표함
서울지검 공안1부(정병욱 부장검사)는 7일 북한 전위혁명조직인 <민족민주혁명당>에 지난 1996년 4월 11일 총선 및 1995년 지방선거 출마자 5명을 포함해 20여명이 연루되었다고 발표
검찰, 민혁당의 영남위원회와 경기남부위원회, 서울지역 학생운동 사업부 소속, 고등학생사업부의 활동 가담자 20여명을 추가 확보 수사 중이라고 발표함
-한나라당 박진의원 자료
국군기무사령부가 국회 국방위 박진 한나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00년부터 지난2004년 8월까지 검거한 간첩은 2000년 1월 교수출신 간첩 한단석을 비롯해 2002년 5월 반국가단체 민혁당 경기남부 위원장 이석기씨와 2001년 9월 재중(在中) 조선족 간첩 모씨, 2004년 4월 재일(在日) 대남공작부 지도책 모씨등 모두 4명이라고 밝혔다
-Prochosun
http://prochosun.com.ne.kr/aaa/hwanginoh.html
<95년 위원회>를 이끌어 온 혐의를 받고 있는 최경호씨는 자신이 조직원 변의숙씨를 북한에 보낸 사실등 모두 시인하면서 <북한 노동당이 아닌 남한의 자생적인 운동조직 한민전의 지시를 따라..>
-한민전 영남위원회(일명:동창회)
양심수 홈페이지 http://www.yangsimsu.or.kr/freeboard_jaryosil_read.php?num=2
부산경찰청의 발표에 따르면 한민전 영남위원회(일명:동창회)는 울산지역 <희망의 젊은 연대>를 비롯해 12개 조직단체, <부산노동자회>등 7개 단체, 양산지역 1개 단체등 재야 합법, 반합법 조직에 조직원을 침투 및 외곽..
http://hrights.or.kr/tanwon.html
부산보안수사대는 영남위원회가 처음에는 한민전 영남위원회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조선노동당 영남위원회 또는 반제동맹 영남위원회로 번복
-한총련 제10기 의장이 소지한 한민전 문건과 강령
http://gs.kwpolice.go.kr/news/view.asp?num
(1)한국민족민주전선 등장 과정
<통일혁명당> 중앙위원회는 1985년 7월 27일 당의 명칭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칭했고 일본에서는 1986년 8월 8일 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조직 확대 개편 개명했다
한국(남한)에서는 1990년 1월 1일 전후 반미청년회를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조직 확대 개편 개명했다
반제청년동맹(강철서신)--->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새세대.여명.아리랑. 백두산등)
ㄱ.반제청년동맹기관지--강철서신(김영환씨의 편지형식 글)
강철서신은 NLPDR이론과 북한 주체철학사전, 정치사전, 역사사전등에 수록된 NLPDR 반미이론을 체계적으로 제작하여 만든 소(小) 선전물이다
대표적 합법단체-----삼민투위와 자민투 등 내부 주사파계열 조직원
ㄴ.반미청년회 기관지---구국의 소리
구국의 소리는 김일성주의 표방과 한국전쟁은 북침에 의한 정의의전쟁으로 묘사 그리고 각종 NLPDR, 김일성 신격화 글 등 수록
대표적 합법단체---전대협과 한총련 그리고 전국연합(범민련,범청련, 전국농민회, 전국노동자단체등) 내부 주사파 조직원
ㄷ.한국민족민주전선 기관지---새세대. 여명.아리랑. 백두산등
한민전이 90년 1월 창당하여 기관지를 <새세대>를 내걸고 반미청년회 구국의 소리를 중지하고 NLPDR 김일성노선보다는 주체사상 김정일 노선을 표방함으로 김정일 노동당 비서가 1990년 말경 인민군 총사령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민혁당이 창당되었다고 본다
민족민주혁명당이 통일혁명당 모델로 창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1985년 7월 27일 <통일혁명당>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명했고,일본에서는 통일혁명당이 1986년 8월 8일 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개명했고, 남한에서는 반미청년회를 1990년 1월경 민족민주전선(민혁당)으로 개명했다
(2)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인가
ㄱ.통일혁명당도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에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을 두었다 민혁당이 한민전 조직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반제청년동맹(강철서신)--->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 새세대.여명.아리랑, 백두산등)
김영환씨가 반제청년동맹 지하 기관지 강철서신 저작이다
강철서신 인적 자원 토대로 등장한 조직이 반미청년회와 한민전이다
1990년 1월에 반미청년회를 해체하고 민족민주혁명당(한민전)이 창립되었으며 반미전선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구축되었다 민혁당 지도부가 바로 강철서신과 구국의 소리 지하그룹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남한 땅에서 반미투쟁과 김일성주의 투쟁 배후세력이 반제청년동맹(반미청년회) 강철서신(구국의 소리)이었다
한국민족민주전선 조직이 남한 재야 반미세력 배후이며 그들의 전위당(민혁당)이 전국적으로 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NLPDR 지하당으로 구축되어 왔다
ㄴ.한국민족민주전선이 통일혁명당이라는 사실 입증 자료도 있다
북한정부는 통일혁명당을 1980년대 왔어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편 개명하였고 일본에서는 1986년 8월 8일 통일혁명당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각국 해외에 주체사상 조직이나 친북세력이 결집하여 통일혁명당 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로 개편. 개명하였다
남한에서는 반미청년회를 1990년 1월에 왔어 확대 개편하여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명했다 한민전 조직원들은 통일혁명당 소설책자 애국시대(1.2.3권)를 학습교재로 활용하여 민족민주혁명당을 통일혁명당으로 재건하려고 했다고 본다
(3)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구국전선(청맥) 홈페이지 사이트에서 통일혁명당이 한국민족민주전선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한민전 사이트 http://ndfsk.dyndns.org
(4)1998년 12월 17일 해군이 남해에서 격침시킨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에 상륙
남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 상륙한 사실은 민혁당 연루자인 하영옥 심재춘씨가 국정원에서 <1998년 12월 17일 북한 공작원 배모씨를 여수해안으로 안내했다>고 진술했고 지난 1999년 3월 17일 건져 올린 반잠수정에서 이 공작원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됐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s_plus/news202/np202bb050.html
(5)민혁당과 관련된 무장간첩사건
-이선실 여간첩 사건(이선실은 한민전 부위원장 출신)
-1995년 10월 24일 부여침투 무장간첩 김동식 사건
-1996년 9월 18일 강릉무장간첩 사건
-1997년 10월 최정남 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울산지역)
-1998년 12월 17일 여수근해 반잠수함 격침사건
(6)남한지역의 한국민족민주전선 변천사
반제청년동맹(김영환의 강철서신)-->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 새세대)-->반제민족민주전선(2005년 1월)
(7)여수 앞바다에서 북한 반잠수함 검거에 공헌한 김영환씨
김영환(1962년 ~ )은 1986년 서울대에서 구국학생연맹을 결성하고 최초로 주체사상을 학생운동권에 전파한 인물이다. 구학련은 한국 학생운동사에서 '최초의 비합법 주사파 조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당시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를 단 편지 형태의 글로 주체사상에 대하여 알기 쉽게 소개하였는데 이것이 '강철서신'이라고 부르는 글이다.
그는 1990년대 초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두 차례 면담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김일성을 면담한 후 그는 북조선의 현실을 알게 되어 반북주의자, 북한 민주화주의자로 전향하였다.
그는 “북한의 학자들과 주체사상에 대해 토론하는데 ‘수령이 문화대혁명과 같은 오류를 범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반복했지만 그들은 전혀 엉뚱한 대답만 늘어놓고 답을 하지 못했다”라면서 “세상에서 주체사상을 연구할 자유가 없는 곳은 바로 북한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북한에서 김일성을 2번 만났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주체사상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라면서 “오히려 그가 주체사상에 대해 발표된 책을 한 번이라도 정독했는지 의심스러웠다”라고 회상했다
북한 반잠수함(전남 여수): 김대중정부 때 북한 반잠수함이 남해 해안 침투하다가 격침되었다 북한 반잠수함 검거로 남한지역 민전조직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이 해체되었고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 부위원장 이선실 여간첩이 전두환정부 때부터 결성해 온 남한지역 한민전이 제거되었고 이선실 여간첩도 북한에서 사망했다 북한 대남 강경파 반미구국항쟁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세력이 제거한 덕분으로 그 다음해 남북정상회담이 됐다
노태우정부때 전남지역 대학생들의 자살투쟁도 한민전 배후 세력 조종이라는 견해도 있다
북한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정부때 민전조직원 운반 수단으로 반잠수함이나 잠수함을 이용해왔다(통일혁명당 해체와 남북회담 추진-이후락 평양방문)
3.한민전 부위원장 남파 여간첩 이선실 자료
이선실
李善實
1916 ~ ?
북한의 비밀 대남사업 전문가.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후 남조선노동당(약칭 남로당) 출신들로 운영된 금강정치학원을 수료했다. 1979년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에 임명되었고 1980년 제6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 중앙위원 등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당선된 이래 10기까지 계속 선출되었다. 같은 해 4월 김일성의 70회 생일에 즈음해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1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에 임명된 이래 대남 비밀공작부문의 주요 책임자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2년 4월 김일성의 80회 생일 기념연회에 당 정치국 후보위원 자격으로 참석했으며, 같은 해 9월 이른바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당시 지하당 조직 책임자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4년 김일성 사망 당시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녀는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민혁당 조직원들의 검거와 와해, 제거된 후 2000년 8월 사망했다
(1)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 이선실(李善實) 대남 공작원 주요 경력
-제주출신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중앙당 금강학교 출신---정치공작원 학교
박헌영 이승엽등의 빨치산 정치학원 강동정치학원과 비슷한 성격
-79년 당 통일전선부 부부장(통일혁명당 전위대)
최고인민회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집행 행정기관으로 통일전선부를 두고 있다
-80년 1월 당 정치국 후보 위원
-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제7.8.9.10대
-91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
한민전은 1990년 1월 반미청년회를 해체하고 등장한 단체이다
-94년 7월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2000년 8월 사망
민혁당(한민전 서울지부) 지도부 자수와 검거 그리고 잠수함 격침
(2)이선실 주요 동정
92년 4월 김일성 80회 생일 기념 연회에 당 정치국 후보 위원으로 참석
(3)한민전 추적과 이선실등 대남 공작원 생포과정
1990년 말 한민전 새세대가 미국정부 요원에게 발견되어 한민전 추적 과정에 이선실과 대남 공작원 그리고 한민전 지도부, 잠수함 일방타진 되었음...
추적 열쇠고리<한민전 90년 최초 1월호 새세대 지하신문 자료 발견>
반제동맹(강철서신: 김영환씨 편지 글)--->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 새세대)
남파간첩 이선실 資料 | |||||||||||||||||||||||||||
생포된 무장간첩 김동식을 당부 조사실에 수용하여 면밀 수사한결과 김동식은 90.5.30 제주도 보목동 해안을 통해 1차 침투한후 기남파되어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라는 지하공작지도부를 구축하고 있던 북한 권력서열 22위의 최고위급간첩 이선실과 함께 약 5개월 동안 활동하다가 동년 10.17 이선실 및 간첩 황인오를 대동, 강화도를 통해 복귀한 사실이 있고 김동식 1차 침투시 복귀한 강화도 건평리 해안 95년 4월의 2차 남파는 국내에 암약중인 고정간첩에게 간첩장비전달 및 지도 검열, 15년전 남파되어 활동중인 공작원 대동복귀 등의 지령을 받고 김동식을 조장으로, 박광남을 조원으로 한 공작조를 편성하여 95년 8월 29일 어선으로 위장한 공작선편으로 북한 남포항을 출발, 9.2 24:00경 제주도 온평리 해안으로 침투하였으며
북한에서는 그동안 국내운동권을 중심으로한 주체사상의 만연과 전반적인 대공 경각심 해이현상에 고무되어 우리나라 전역을 활동 용이지역으로 하여 대담하고 거칠것 없는 대남공작을 자행하여 온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북한 대남공작부(통일전선부. 대외연락부. 작전부, 36호실)와 대남정치학원 주요 자료 1.북한 대남공작부
목표는 `남조선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통일` 현재 북한이 운영하고 있는 대남전문공작부서로는 당 중앙위원회 산하 크게 ‘통일전선부’(통전부), ‘대외연락부’, ‘작전부’, ‘36호실’등 4개의 공작부서와 인민군 총참모부 산하 ‘정찰국’, ‘국가안전보위부’ 등이 있다. 현재 이들 대남 공작부는 각자 독립성을 유지한 채 독자적인 대남사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중요 공작사안에 대해서는 각 부서에서 특급 공작요원을 차출하여 특별팀을 구성한다.
북한 공작기관의 목표는 ‘남조선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통일을 완수하는 것 이다. 일례로 북한의 통전부는 “북조선은 1945년 공산화와 더불어 식민지배와 모순된 자본주의의 질곡에서 일거에 벗어났으나, 남조선은 미군이 주둔함으로써 이러한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미군을 축출하고 남조선 해방과 혁명 그리고 북한식 사회주의 통일을 동시에 이루는 길”이라고 밝히고 있다. 조선로동당 4개 대남부서 가운데 ‘수석’은 통전부로서 북한이 추진하는 대남공작의 기본 골격을 만드는 곳이다. 통전부는 1977년 김일성의 직접교시에 따라 신설됐다. 통전부는 선전, 대남방송, 삐라배포, 해외교포들의 포섭 및 남한 내 친북조직 관리 등 공개적인 선전*선동공작을 펼친다. 이 부서는 직할부서로 직접침투과, 남북회담과, 해외담당과, 대남심리전 및 정보자료를 분석하는 조국통일연구원 등이 있으며 다른 공작부서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공개적으로 활동한다는 점이다.
ㄱ.임동욱(林東玉)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통전부가 북한의 통일방안을 만드는 ‘두뇌’라면 대외연락부는 통전부가 만드는 통일방안을 실행하는 ‘수족’이다. 특히 대외연락부는 남한 내 친북 조직을 유지,확대하고 정당이나 사회단체에 침투하는 간첩을 관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ㄱ.대외연락부
대남공작부서는 대남사업 당담 비서 산하에 통일전선부(통일전선구축),대외정보조사부(35호실,통일전선 구축 조직 조사와 자료. 수집.분석. 판단등),대외연락부(35호실 분석자료 바탕으로 간첩선 구축 즉 연락선이나 점조직망 구축),작전부(대외연락부 파견과 복귀등 안내원)등으로 구성돼 있다.
2.대남공작의 전위부서 인민군 총참모부 소속 정찰국자료(미얀마 아웅산 테러와 강릉 잠수함사태등) (1)대남공작의 전위부서 인민군 총참모부 산하 정찰국 3.祖國平和統一委員會(조국평화통일위원회) 1961년 5월 13일 발족한 북한의 주요한 통일관련 사회단체. 약칭은 '조평통'이라 한다. 조평통은 조선노동당의 통제 아래 북한의 사회주의 역량과 남한 각계각층의 애국적 민주주의 역량을 결합하여 국가의 자주적 통일의 실현을 위해 정당·사회단체들과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망라하여 조직된 사회단체이다. 1961년 5월 9일 김일성을 발기인으로, 33명의 준비위원과 홍명희를 위원장으로 하여 조직되었으며, 같은 해 5월 13일에 정식 발족되었다. 1명의 위원장과 6명의 부위원장, 23명의 상무위원회 위원, 77명의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관지로 〈조국통일〉이라는 신문을 주 2회 발행하고 있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 소속이 바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이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반미전선입장에서 남한 각종 반미단체나 친북단체를 총 망라하여 통일전선연합구축을 유도하여 반미 반제 공산주의 투쟁을 부추기고 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핵심조직이 바로 한국민족민주전선(반제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이고 반제민족민주전선 조직원에 의하여 친북활동단체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지시 통제 감독하고 있다
4.대남정치학원----강동정치학원과 금강정치학원
6.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 이선실(李善實) 대남공작원 (1)주요 경력
1.조총련(朝總聯,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은 재일본 한국인 가운데 북한을 지지하는 친북 재일교포단체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조선민주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NLPDR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단체 조총련을 결성하여 반미 반일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과 공산주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운동으로 궁극적으로 대남적화통일과 일본 국왕제도를 부정하고 일본 공산화에 주력하고 있다
해방 이후인 1945년 10월 15일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聯盟, 약칭:朝聯)이 결성되었으나 김천해(金天海)를 중심으로 친북단체로 기울어졌다 조련(朝聯)이 김천해의 공산주의 노선에 따라 일본 공산당의 지도 아래 과격한 불법투쟁을 벌이자 일본정부는 폭력단체라는 이유로 해산명령을 내렸다 1950년 4월 2일 잔류조직이 모여 조선인단체협의회를 결성했는데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조국통일전선실행위원회로 고쳤다 1951년 1월 9일 이를 토대로 재일조선민주전선(在日朝鮮民主戰線, 약창:民戰)을 결성, 폭력투쟁노선을 이어갔다 1954년 8월 30일 북한의 남일(南日)이 한덕수(韓德銖)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 1955년 5월 25일 한덕수를 의장으로 북한 직속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조총련은 명목상 최고의결기관으로 전체대회가 3년마다 소집되기는 하지만 사실상 한덕수 1인 체제로 운영되어 오다가 2001년 2월 21일 한덕수 의장 사망이후 현재 의장은 서만술, 책임부의장은 허종만, 부의장은 박재로. 권순희. 오형진. 남승우. 양수종. 이기석. 고덕우등 7명이다 북한이 해외 공민조직이라고 주장하는 조총련의 역할은 통일 운동이라는 대남공작과 애국사업으로 불리는 대북경제지원 사업으로 나뉜다 여기서 대남공작을 총괄하고 있는 인물은 현직 조총련 의장 서만술이며 애국사업 책임자는 허종만이다 행동강령에는 제일동포의 거주. 재산. 직업. 언론출판등의 권익을 옹호하고 자유를 옹호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나 북한노동당 일본지부나 다름없다 기본활동 목적은 일본의 좌익세력과 연계하여 일본에 남한 침략기지를 구축하는 것이고 한반도는 물론 전(全) 아시아와 태평양 연안국 공산화 와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의 혁명)을 위한 혁명 전초기지의 역할도 맡고 있다 특히 조총련내부 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학습조(學習組)를 설치하여 충성심을 강화하고 김일성 주체사상 강좌와 통일전선 사업에 집중하여 대남적화통일을 꾀하고 있으며 1974년 4월 1일 통일사업부를 설치하고 대남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를 조성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통일사업부의 임무는 민단조직의 와해. 대남적화공작 수행. 반미 반일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 인민민주주의 혁명 투쟁(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위장평화공세에 의한 통일전선전략의 효과적 수행등에 있다
과거의 조총련은 중앙위 산하에 48개 지방본부와 200개 지부, 18개 산하단체와 23개 사업체를 거느린 거대한 조직이었고 조총련계 학교는 한때 유치원, 초.중등학교, 대학교등 300여곳이나 되었으며 북한정부의 유혹적인 정책 말에 따라 1959년 재일 조선인 동포 10만명이 북한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남한)의 경제성장과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그리고 국제적 지위 향상으로 조총련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어가고 있다 일본 전체국민의 0.6%, 50만명이상이 재일 한국인으로 그 중에서 대한민국 국적 민단(民團) 동포가 40만명이고 10만명이 조선의 국적이다 2005년 5월 25일 창립 50주년을 맞은 조총련의 모습은 초라했다 4만 6,000여명에 이르던 조선학교 학생 수는 1만명 아래로 떨어졌고 굵직한 자금줄인 조선은행의 각 지역 조합은 파산하거나 강제합병 되고 있다 조선에서 한국으로 국적을 바꾸는 이들이 매년 1만여명에 이른다 한때 일본사회에서 민족혼의 상징하던 조총련 여학생들의 치마저고리는 김정일의 일본인 납치 시인 이후 일본인들에게 찢기고 오물을 뒤집어쓰는 등 폭력의 대상이 돼버렸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조총련 50주년을 맞아 보낸 메시지에서 북한의 핵개발 포기와 일본인 납치 문제가 조속히 해결돼야 북일(北日) 국교 정상화 협상에 나설 것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다 한때 조총련에서 활동했던 교포는 총련도 결국 조국인 북한체제의 운명과 같은 길을 걷게 될것이라고 말했다
조총련도 21세기 고도소비사회에서 변화돼야 할 시기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에서 진보진영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것이 올바른다 반미. 반일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NLPDR)노선 국가사회주의 침략이론을 버리고 일본 국왕제를 인정한 후 자유화 개방화 민주화 통합 사회로 나아가는 재일 한국인 동포들이 되기를 바란다 *대학-- 조선대학교:1956년 6월 8일 설립과 운영 *신문(기관자)--조선신보:1945년 10월 26일 창간 *방송(통신사)--조선통신사 *가극단--금간산 가극단 (1)한덕수(韓德銖) ㄱ.출생-1907년생(生) ㄴ.출신-경북 경산(慶山) ㄷ.학력--일본대(日本大) 전문부 중퇴 ㄹ.경력 1927년 7월 도일(度日-일본으로 이주) 1945년 일본공산당 가입 1945년 가나가와현(懸) 본부 공산당 위원장 1949년 9월 조국전선 중앙위원 1951년 1월 재일조선민주전선(民戰) 중앙위원 1955년 5월 조총련 수석의장 1957년 4월 조선대학 학장 1958년 조총련 중앙상임위 의장 1959년 재일 조선인 10만명 북송 주도 1967년 11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 1972년 12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5기 대의원 1976년 4월 노력영웅칭호 1977년 12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6기 대의원 1982년 4월 김일성훈장 서훈 1986년 11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 1989년 9월 조총련 의장 유임 1990년 4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9기 대의원 1990년 8월 조국통일상 수상 1992년 5월 조총련 의장 8선(8選) 유임 1994년 4월 26일 신병 치료차 입북(入北- 북한 방문) 1994년 4월 28일 김일성과 함께 회견 1994년 6월 7일 김일성과 면담 1994년 7월 9일 김일성 조문 1994년 7월 20일 김일성 중앙추도대회 참석 1994년 10월 10일 일본 귀국 앞서 김정일에게 충성하는 편지와 <김정일 장군님께 드리는 노래>등 2곡의 노랫말 전달 1994년 10월 16일 김일성 사망 1백일에 즈음 만수대 김일성 동상에 헌화 1994년 10월 19일 단군릉 참관 1994년 10월 22일 박성철 부주석. 김용순 당 대남 비서 전송 속에 일본으로 귀환 1994년 11월 15일 일본 사회당 서기장 구보 와타루와 일본 정치인들의 방북 문제 논의 1995년 2월 조총련 중앙위 제16기 4차회의서 김정일의 연내 당중앙 총비서 및 국가 주석직 취임시사 1995년 4월 15일 김일성 83회 생일 기념 중앙대회서 김정일에의 충성다짐(조선문화 회관) 1995년 5월 24일 조총련 결성 40주 기념 중앙대회 참석 1995년 6월 15일 조총련 제16기 5차회의 확대회의 개최 <김일성충성세력화> 다짐 1995년 7월 5일 김일성 사망 1주기행사 참석차 북한 방문 1995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2주기 중앙 추모대회 진행 1995년 7월 9일 김일성 사망 1주기 추모연회 참석 1995년 7월 14일 김일성 사망 1주기 조총련 추모단 인솔 <한덕수경공업대학> 참관 1995년 9월 8일 북한정권 수립 47주 중앙보고대회 참석 1995년 9월 17일 제17차 조총련 전체대회서 의장에 재선 1995년 9월 25일 조총련 제1부의장 이진규(李珍珪) 장례식 참석 1995년 10월 26일 조선신보 창간 50주 기념식서 대김정일(對金正日) 충성보도활동 촉구 1995년 12월 27일 김정일 새해선물 전달식 참석 1996년 1월 30일 <문예.체육일꾼모임> 개최 그리고 에술,체육 통한 조직확대 역설 1996년 2월 15일 김정일 54회 생일 맞아 대김정일(對金正日) 충성 다짐하는 "글" 전달 1996년 2월 15일 김정일 54회 생일 기념 재일본조선인 중앙대회 개최 대(對) 김정일 충성 및 대북지원 사업 강화 다짐 1996년 6월 8일 조선대학교 창립 40주 기념보고 축사 통해 조선대학생의 <김정일의 전사화> 다짐 1996년 6월 18일 조총련발간 대중잡지 <이어>창간축하모임 참석 1996년 6월 23일 재일동포들의 민족교육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각계각층 대표자회의 진행 1996년 10월 5일 증등교육실시 50주 중앙대회 참석 1997년 1월 22일 90회 생일 맞아 김일성 훈장 서훈 1997년 5월 8일 김일성. 김정일의 교육원조비 송금 40주기념 중앙감사대회 참석 1997년 5월 17일 조총련 금강산 가극단 새회관 준공식 참석 1997년 5월 29일 김정일장군의 노래보급을 위한 총련 일꾼들의 모임 참석 1997년 6월 27일 진행된 <조선신보> 복간 45주년 기념 모임 참석 연설 1997년 7월 6일 김일성 3주기 재일 조총련 추모대표단 한덕수단장 인솔, 평양도착 1997년 7월 8일 김정일 예방과 환담 그리고 김일성 3주기 맞아 조의(弔意) 1999년 1월 1일 김정일에 신년축하문 보냄 2001년 2월 21일 오후 8시 20분 94세 나이로 사망
(2)허종만 ㄱ.출신--경남 고성 ㄴ.경력 1959년 조총련 도쿄도(東京都) 본부위원장 1986년 9월 조총련 중앙위원회 부의장 1993년 7월 조총련 중앙상임위원회 책임부의장(신설) 1994년 2월 28일 평양서 김정일과 친선담화 1994년 7월 17일 김일성 조문, 김정일에 충성다짐 1995년 3월 20일 김정일이 조총련 예술단에 베푼 목란관연회에 당비서 김기남 김용순과 함께 참석 1995년 5월 24일 조총련 결성 40주 기념 제일 조선사회과학자 <학술보도회> 연설 통해 학자들이 김정일 사상 실현 기여 강조 1995년 12월 27일 김정일 새해선물 전달식서 대(對) 김정일 충성 및 <95년의 조직강화의 해> 강조 1996년 6월 27일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 지지 일본위원회" 결성 20주 기념 모임 참석 1996년 10월 조총련 청년상공회 중앙간사회 제1기 2차 확대회의 연설 통해 대북 합영. 합작 사업 주력 강조(대북투자회) 1997년 7월 8일 김일성 3주기 재일 조총련 중앙추모대회 참석(동경 조선문화회관) 2005년 조총련 결성 50주 기념 행사때 김영남 축하 메세지 낭독 -->허종만은 대북 투자와 대북 경제송금을 주도했으며 조총련 학습조 실질적 책임자로 알려지고 있다 -http://zine.media.daum.net/mega/h21/200506/03/hani21/v9251826.html
2001년부터 조총련을 이끌고 있는 서만술의장은 경북 경주 출신으로 조총련 조직국장과 사무총국장등 핵심라인을 거친 한덕수의 직계, 한덕수 의장 사망 후 조총련 안팎에선 대북 송금 사업을주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신임이 두터운 허종만 책임부의장의 승인을 예상했으나 결과는 서만술의장의 낙점이었다 위축된 조총련의 조직을 추스르려면 성품이 부드럽고 인화에 강점이 있는 서만술의장이 적임이라고 북당국이 판단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2.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學習組)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이 지난 2002년 북일정상회담 직전에 해산했던 비공식 조직 "힉습조"를 부활시켜 재편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조총련이 이번에 학습조를 부활시켜는 것은 자금조달과 조직강화, 그리고 대일(對日), 태평양연안 공작을 강화하려는 목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學習朝)란 ㄱ.일본 재판부에 제출된 조총련 내부 자료에 따르면 학습조는 "위대한 김일성 원수가 조직하고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가 지도하는 재일조선인 김일성 김정일주의자의 혁명조직"이며 활동임무는 조국을 엄호방위하고 일본에서 주체혁명 위업을 이루는데 적극적으로 이바지한다는 것이다 ㄴ.조총련은 학습조를 설치하여 충성심을 강화하고 김일성 김정일 주체사상 강좌와 통일전선사업에 집중하여 대남적화통일을 꾀하고 있으며 1974년 4월 1일 학습조 조직 기반으로 통일사업부를 설치하고 대남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를 조성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통일사업부(학습조-통일혁명당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의 임무는 민단조직의 와해, 대남적화공작 수행, 위장평화공세에 의한 통일전선 저력의 효과적 수행, 동북아지역의 북한정부 연락선 구축(잠수함 기지구축), 무기구입과 밀매 추진, 반합법적 또는 비합법적. 합법적 기업등을 운영하면서 자금확보등에 주도하고 있다 (2)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총련 학습조 활동 자료 ㄱ.조총련 학습조는 동북아 지역 북한정부 간첩망과 반미구국전선 조직 ㄴ.조총련 학습조는 북한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 조직 조총련 소속 공작요원 소위 "학습조" 3,000명 및 재일(在日) "한통련", 재미(在美) "한청련", 해외 "범민련"등 친북전위 조직 16,500명등 대남공작에 활용 ㄷ.북한 불법 수출에는 총련의 비공개조직인 "학습조"가 주도적으로 관여했다고 공안당국의 조사를 인용해 보도 또한 16일 다산케이(産經)신문은 세이신기업이 미사일 추진 연료완성에 필요한 제트 밀을 판매한 곳은 사실상 북한 인민무력부라고 보도했다 ㄹ. 조총련 학습조는 북한과 북한 노동당에 충성을 맹세하는 재일 조선인계의 신용조합에 강한 영향력 행사 반합법적 비합법적 합법적 기업 운영과 자금확보 ㅁ.1998년 한 재일동표가 조긴 아이치(朝銀 愛知)를 상대로 이 지점 부의장이 홍령한 자신의 예금 약 17억 5천만엔을 반환해달라고 청구 재판 자료 -재판 과정에 원고측은 "학습조"라는 조직이 조긴 아이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리고 이 재판 판결문을 보면 "피고(조긴 아이치)의 간부는 전부 학습조원에서 등용되었다 조긴 아이치는 금융기관으로서 본래의 업무 이외에 조총련의 활동자금이나 북한에 돈을 보내는 특수임무를 행하고 있다"고 명기하고 있다 이 재판에서 원고인 재일동포 기업가는 "나의 예금은 북한에 대한 송금이나 한국의 유학생 조직, 일본내 친북계 국회의원의 정치자금에 쓰였다"고 말했다 ㅂ.1999년 여름 일본 자민당 외교부회에서 공안관계자는 학습조에 관하여 "전국에 약 1000개 조직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ㅅ.전(前) 일본 공안조사청 조사 제2부장 스가누마 고코(管沼光弘)씨는 2001년 11월 15일자 슈칸 분(週刊 文春)에 북한이 그 동안 은밀히 제3세계에 무기를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라는 돈세탁 장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ㅇ.김정일은 1999년 4월 20일 조총련 제1 부의장 서만술에게 "외유내강(外柔內剛) 방식으로 조총련을 재건하라"라고 지시했다 "외유(外柔)" 는 조총련이 우경화하지 않았느냐는 오해를 살정도로 취직센터와 노인 복지정책등 다양한 정책을 펴서 동포들로부터 고립되는 것을 방지하라는 것이었다 "내강(內剛)"은 학습조(조선노동당 일본조직-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통일전선부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에서 철저하게 김정일 숭배사상을 고취하라는 것이었다 ㅈ.일본근해 괴선박 격침사건--테러요원 침투를 위한 대일(對日) 한민전 공작선과 필로폰을 밀무역하는 북한 선박이었을 가능성 제기 마약과 현금등 막대한 규모의 현물을 싣고 있었다 ㅎ.북한은 2001년 7월 일본으로부터 중고어선 49척을 밀수입한 사실이 있다
조총련도 대한민국과 일본 국왕제도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노선과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노선 김일성 김정일주의를 버리고 서구사회 진보진영처럼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는 것이 올바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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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주의자들의 세뇌는 대부분 눈으로 돼 뇌분해기로 이용해오고 있다(봄우뢰등 김일성 우상화 신격화 책자) 귀소리 즉 말지나 민중의 소리등은 아직도 뇌 세뇌기로 미약하다 대부분 language 말(귀)이 아닌 Reading(눈)이다
범죄수사를 하기 위하여 대부분 국가들은 범죄 경력자 이력을 지문, 뇌분해기용으로 눈 스캔이나 전기나 빛 음향소리 범죄이력등으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독재국가에서는 이런 범죄 수사기구들이 반정부인사 탄압용으로 이용돼 오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대남 친북인사(주사파) 월북용(세뇌 납치)이나 고위층, 반정부인사 감시나 탄압용으로 악용돼 오고 있습니다
The FBI wants to use eye scans, combined with other data, to help identify suspects. [FBI는 용의자를 식별 할 수 있도록, 다른 데이터와 결합 눈 스캔을 사용하려고합니다]
The FBI stores its information on databases like these 30-feet underground. [FBI는 지하이 30 피트 같은 데이터베이스에 해당 정보를 저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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