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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 체포동의안 가결…내란음모 혐의 현역의원 첫 사례 본문

Guide Ear&Bird's Eye/국가안보 위해사범(NLPDR) 자료

이석기 체포동의안 가결…내란음모 혐의 현역의원 첫 사례

CIA bear 허관(許灌) 2013. 9. 4. 17:59

 

                                       북한은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김일성주의입니다 김일성주의는 국제적 좌익무장단체입니다(김일성주의 세뇌 주요 책자)

"좌익군정(좌익 무장단체)을 지지하는 세력은 국민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히틀러의 독일 노동자 당등)이나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노선-마오주의나 김일성주의 등)이 있습니다 북한 세습제 좌익군정(국방위원회- 무장세력)을 지지하는 단체는 김일성주의자로 국제적으로 친남한세력으로 조직화 해온 김일성 노선 통일혁명당(한국민족민주전선-반제민족민주선)으로  남한이나 일본, 쿠바, 베트남, 시리아등 대표부를 두고 있는 국제적 반미무장단체입니다"

*남로당(박헌영등 조선공산당 주도)-박헌영 노선(공산주의 노선)

*통일혁당(김일성노선 최초 남한 창당, 한일회담 반대 투쟁 당시 박정희정부)-김일성 노선(좌익군정, 반일세력 주도)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통일혁명당 모델로 창당, 반제동맹-반미청년회-90년1월 한국민족민주전선-반제민족민주전선, 노태우정부 때 창당)-김일성, 김정일 노선(좌익군정, 반미세력 주도), 자주노선(주체사상)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내란음모 혐의를 받고 있는 현역 국회의원에 대한 국회 체포동의안 가결은 이석기 의원이 헌정사상 처음이다.

의원들의 무기명 비밀 투표로 진행된 이 날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 표결 결과 찬성 258표, 반대 14표, 기권 11표, 무효 6표로 나타났다. 국회재적의원 298명 중 289명이 투표에 참가했다. 이로써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 의원 과반 찬성 요건을 충족해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은 가결됐다.

본회의에서 의원 체포동의안이 가결 처리된 사례는 제헌국회 이후 이번이 12번째다. 19대 국회 들어서는 박주선·현영희 무소속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에 이어 세 번째 사례로 기록됐다.

체포동의안 가결 이후 절차는 어떻게 될까.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체포동의안은 법무부와 대검, 수원지검을 차례로 거쳐 처음 체포동의요구서를 발송한 수원지법으로 돌아간다. 수원지법은 전례에 따라 요구서를 돌려받는 대로 피의자인 이석기 의원에게 구인장을 발부한다.

구인장이 발부되면 보통 하루나 이틀 정도 후에 영장실질심사를 위해 법원 출석을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이석기 의원은 5일이나 6일 법원에 출석할 것으로 보인다. 영장실질심사는 구속 전 판사가 피의자를 직접 심문해 구속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법원이 영장을 발부하면 이석기 의원은 곧바로 구속 수감된다.

*국가사회주의 군정분리주의 세습제 좌익군정 북한 노동당 이론-김일성주의

 

모든 독일인의 자유와 삶은 총통 한 사람의 손에 달렸다.

오직 <독일국가사회주의 노동자의 당>만이 빵과 일자리를 줄 수 있다
따뜻한 집과 귀여운 아이들 그리고 가족들이 편안하고 배부르게 먹으며 살 수 있는 <천년제국> 건설은 오늘날 독일에 사고 있는 게르만의 소망이며 지상명령이다
프랑스 놈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러시아의 백정놈을 모조리 몰아낸 다음 <선민 게르만=하늘의 자손>이 살아갈 터전을 확장해야 한다 [국가사회주의 군정분리주의 세습제 좌익군정 북한 노동당 이론-김일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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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병제 군 복무 북한 여자경찰은 의무교육 중학교 고등반 16세때 키(신장) 163cm이상 여성 아동 20명이 선발돼 17세때 복무하여 26세때 전역하고 있습니다 북한 여성들은 현역군복나 교통순경이나 간호사, 삼림원등 다양한 직업에서 군 복무를 해오고 있습니다

북한은 군정분리주의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북한 주민 대부분이 7년(여자)이나 10년(남자) 기간의 군 복무 생활을 하여 국가 공무원 생활을 한 후 개인의 능력과 유상교육 대학 공부이나 직장 취업, 결혼등을 해오고 있습니다

 

 

                                                        북한 주체사상(자주노선) 반미 민족해방운동과 우리식 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는 열광적인 민족주의, 대중선동, 1인 독재적 지배 등 보수적 극렬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급진주의(사회주의 좌익군정) 사이에서 조화를 모색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주로 나쁜 의미에서이지만 철저한 게르만 통일이나 아랍통일, 태양의 민족(조선민족 통일) 민족해방 혁명운동이 되었습니다.
합리주의·자유주의·민주주의·법치주의·기본적 인권 및 국제협력과 평화에 관한 모든 노력을 거부했으며, 그 대신 본능과 국가에 대한 개인의 종속, 위로부터 임명된 지도자들에 대한 맹목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복종 들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개인이나 종족은 원래가 불평등하며, 따라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국가사회주의는 엄격하고 잔인한 정책들을 추진하여 경쟁상대가 되는 정치적·종교적·사회적 조직들을 억압하거나 제거하려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부적격자와 낙오자들을 운동에 끌어들임으로써 부분적으로 계급적 차이를 없애기도 했습니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히틀러의 독일 노동자의 당 나찌즘이나 이라크 후세인의 아랍 사회당(바트당), 북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노동당은 극렬 민족주의 기반으로 민족통일운동 이념으로 1인 독재정치와 병정분리주의 군사이론(좌익군정)으로 전쟁 군사 패권주의를 내세워 세계전쟁이나 국지전을 추진해왔습니다
이들은 국내적으로 사회주의 진영 민족주의 전선을 구축한 후 공산주의자와 연합으로 반봉건, 평민기반으로 왕정복구 반대 공화국 수립노선으로 귀족계급을 제거하는데 노력했으며  권력 장악이후에는 공산주의자를 제거한 후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견지하면서 1인 지배권력으로 권력재편을 해왔습니다 [히틀러의 독일 노동자의 당이나 스탈린 사회민주당(뜨빌리씨), 김일성의 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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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부의 세뇌 음향소리(뇌파)

김일성 우상화 책자 공부---->북한 대남 선전국 요원 감시---->세뇌 음향소리(뇌파 세뇌)----->대남 납치나 스파이 활용(남한 친북 NLPDR 조직 결성과 북한정부 요원으로 활동) 

-친북기업 옹호

-친북인사 옹호

-김일성과 김정일 세력 옹호

-자주노선과 반미투쟁 활동 옹호

-남북정상회담 옹호와 김정일노선 홍보(NLPDR노선과 반미 민족해방전쟁 홍보)

-핵무기 보유와 장거리 미사일 발사 옹호(북한정부 입장에서 남북통일 지지) 

*친북단체 내부 NLPDR(민족해방 인민주주의 혁명) 대남공작기구 반제민족민주전선(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단체 파악방법

-"봄우뢰』(불멸의 역사)" 등 김일성 우상화 책자 보급하거나 탐독 그룹

-"애국시대" 등 통일혁명당이나 남민전  투쟁 옹호하는 책자 보급하거나 탐독그룹

-"전통과 계승" 등 김정일, 김정은 세습제 승계 옹호하는 책자 보급하거나 탐독그룹

 -중국 연변대학교나 일본 조선대학교 내부 남북한 출신 중 자주노선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학습조 NLPDR(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 혁명) 단체(북한 노동당 가입) -일본인이나 중국인 위장하여 대남 침투조나 대남 테러단체 개조하여 간첩활동 

대부분 김일성주의자(주체사상파)가 북한 세습제 좌익군정(선군정치) 추종세력이다 이들이 남한이나 일본, 중국, 미국, 유럽등지에서 존속하여 활동할 수 있는 망(단체)이 친북기업(대북기업) 자금줄 때문이라고 파악해오고 있다 김정은 세력은 개인의 사상 이념보다 더욱 더 돈줄(기업)로 간첩망을 조직화 해오고 있다

 

*17세 군입대 북한 징병제 신체조건 4년 연속저하 142cm OK

 

                                                 북한 인민군 병사가 급류에 남한으로 남하하여 유엔군이 북한으로 입북시키는 북한 병사 모습

북한 인민군 병사 신체(신장)조건이 2008년 150cm에서 4년 연속 저하 2012년 142cm OK입니다

북한 전지역이 식량난과 기아로 북한 인민군 징병제 신체(신장)조건이 142cm으로 저하 되었습니다

 

 

 

북한 세습제 좌익군정을 추종하는 세력은 국민사회주의(국가사회주의- 극렬 반미, 반일 민족주의 그룹)이거나 김일성주의자(NLPDR) 세력으로 남북협상(평화통일)보다는 전쟁통일(남침)을 추구해오고 있습니다

이들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 평화이며 남침을 옹호하는 남한 내부 무장세력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북한정부 내 강경파 입장을 대변하는 세습제 좌익군정을 추종하는 국방위원회(김일성 가계) 소속이며 북한정부 내부 온건파 남북협상세력(개혁개방화 세력) 입장이 아닙니다

이들은 북한 상류층 생활 모습을 보고 의식화 돼 있는 세력들입니다

 

*좌파전선(진보전선)과 민주전선

오늘 한국 머리소리함 주요 인물들이 좌파전선(진보전선)과 민주전선에 대하여 논의해드립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이며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입니다

민주전선은 반독재주의(반전체주의)를 의미하며 민주화 세력 모임을 의미합니다 민주화 세력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자유권 존중=자유민주주의 세력)

와 사회주의자(사회권 존중=사회민주주의 세력) 세력 좌우익연합세력 모임입니다

민주화 세력 적은 독재자나 전체주의자임으로 전제군주, 국가사회주의 세력이나 좌익군정세력입니다 좌익군정은 사회주의 세력 내부 군정분리주의(병정분리주의) 노선으로 인민회의제 정부론(순수 내각책임제 정부론, 내각이 의회 시녀)을 부정하고 인민의회 보다 윗 권력기구 최고지도자 제도(군사위원회나 군사평의회, 국방위원회)를 도입하여 군 통수권자(국방위원회)와 군부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독재주의(전체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 정부 형태입니다

북한정부는 노동당  좌익세력(사회주의 세력-인민의회)이면서 노동당 당군 인민군(국방위원회)이 북한 권력을 장악하는 국가사회주의 노선 좌익군정입니다

 

좌파전선(진보전선)은 반우파전선(반보수전선)을 의미하며 사회주의 전선을 의미합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인정하면 사회주의 세력으로 자본주의를 부정하면 공산주의 세력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는 개인의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공동생산, 공동분배 윈칙으로 인민회의제 정부형태(순수 내각책임제-정부는 의회 시녀)로 의회독재(일당독재) 계급없는 사회 만민(萬民)의 평등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 전선 내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 노선(생존권= 사회권 존중)을 지향하는 세력은 민주전선 세력이고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군정분리주의 좌익군정(군사평의회나 국방위원회, 군사위원회) 형태 최고지도자 중심의 권력을 지향하는 세력은 민주전선이 아닌 전체주의(독재주의) 노선 국가사회주의 정부형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좌익군정이 좌파전선(진보전선)은 될 수 있지만 민주전선이 될 수 없습니다

좌익군정은 대부분 공산주의 세력보다는 사회주의 세력으로 북한 노동당(아랍 사회당)등입니다

 

군(軍)이 당군이 될 수 없습니다

국가의 군대는 국군으로 국민(인민)의 군대입니다

북한 인민군은 노동당 당군으로 노동당 이익을 위해서 활동하는 군대이며 김일성주의 노선을 추종하는 세습제 좌익군정(김일성, 김정일, 김정은등) 무장력입니다

북한 인민군은 북한 노동당 당군 김일성주의 군대로 세계 각국 김일성주의 세력을 확장하는 무장력입니다

유엔이나 선진국에서는 북한 인민군을 보고 좌익군정 테러단체(김일성주의 무장단체)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북한 협력세력은 민주전선이지 좌파전선(진보전선)이 아닙니다

북한 내부 남북협력과 평화세력은 사회민주주의 세력이며 개혁개방세력(자유화 개방화 세력)입니다

북한 내부 전쟁세력은 좌익군정 세력이며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세력 김일성주의 세습제 좌익군정입니다

남한도 전쟁세력은 군정입니다

 

대북정책에서 좌파전선(진보전선)보다는 민주전선으로 추진돼야 합니다

민주전선은 자유민주세력과 사회민주세력 연합모임이지만 좌파전선(진보전선)은 사회주의 전선으로 세습제 좌익군정 세력도 연합세력으로 포용할 수 있습니다

북한정부는 세습제 좌익군정 국가입니다

세습제 좌익군정은 약점은 민주전선(반독재주의나 반전체주의)입니다

 

민주전선 무장력은 민주화 세력입니다

유엔이나 세계 각국 대부분 국가들이 민주정부입니다

세계 각국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정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미국 오바마정부 조언그룹 글)

 

"북한 세습제 좌익군정(김일성주의자)을 옹호하는 세력은  북한 상류층 생활 모습에 의식화돼  있는 인물로 북한 평민층 생활 모습을 보고 북한 자유화, 개방화 정책을 옹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들은 북한 평민층보다 상류층 입장을 대변함으로 세습제 좌익군정 이익을 위해서 복무하고 있습니다 북한 자유화 개방화 정책과 북한 평민층 입장을 옹호한다면 대한민국(남한정부) 입장을 지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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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韓“白富美”豪宅生活

북한 상류층 여성들의 평양시내 고급주택과 수영장에서 호화생활 모습 사진입니다 북한은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평민층(빈곤층과 평민층), 상류층으로 구분돼 있으며 상류층은 호화생활을 즐기고 있으며 평민층은 식량난과 배고픔으로 신음해오고 있습니다

북한 상류층은 핵무기 보유와 세습제 좌익군정을 옹호하고 있고 평민층은 핵무기 포기와 개혁개방화 정책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북한 평민층은 북한 상류층의 안보논리 자주노선보다는 평등사상 서구 자유민주주의 정부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북한 평민층 빈곤한 생활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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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평민층들의 식량난이 심각합니다

굶주림과 배고픔 그리고 기아등으로 신음하는 북한 평민층들의 모습입니다

 북한 평민층에게는 핵무기도 아닌 굶주림과 배고픔 해결할 수 있는 빵과 경제활동 생활 터전입니다

북한 식량난(영양실조) 주민은 90년대 초 420만명, 90년대 중반 700만명, 북한 경제 만성적 경제위기로 10년 후 2007년도 전체 국민 33% 780만명이 영양실조(영양부족) 상태입니다

북한정부는 과거 700 그램(gram) 식량을 배급하다가 요즘에는 200 그램(gram) 식량을 배급하고 있습니다 북한 군인들도 식량난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입대조건 신체 신장이 작아지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북한 주민 금년 식량부족량은 414만톤입니다

북한 평민층은 식량난이나 영양실조 경험을 하고 있지만 북한 상류층은 사치 호화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 평민층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혁개방정책과 핵무기 포기 조건으로 북미수교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함경남도 해주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영양실조 북한 평민층 자녀들 모습(上)과 북한 평양시 상류층이 거주하는 고층 아파트 밀집지역 창전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북한 상류층 교육기관 경상유치원(慶上幼稚園) 공부하고 있는 북한 상류층 자녀들 모습(下)

 

 

 밥 걱정(끼니 걱정)을 하는 북한 평민층 자녀들

그리고 피아노나 바이올린, 미술공부등을 걱정하는 북한 상류층 자녀들

자유화 개방화(개혁 개방정책)만이 북한 평민층 자녀들도 끼니(밥) 걱정이 아닌 피아노나 바이올린등 음악공부나 미술공부 걱정이 될 것입니다 

 

 

평양시내 아파트촌 모습입니다 북한도 토지를 제외한 모든 물건 매매가 가능하며 상속도 가능합니다 북한 시내 급속한 아파트촌 등장은 아파트 매매와 상속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평양 시내  상류층과 평민층, 빈곤층등의 빈부격차도 심각합니다

 

                                                                                     평양 평민층 아파트 주택 모습입니다

 

                                                                 평양시내도 평민층 슬레이트 지붕[판자촌] 모습입니다

 

                                                                  북한 상류층이 거주하고 있는 평양 만수대 고밀도(高密度) 고층 주택 모습[2012년 3월 25일]

 

 

평양사회 특권층(상류층)과 평민층(하층민) 이질적인 생활모습을 사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평양에도 각종 외국음식점이 개설돼 운영돼 오고 있으며 특권층 가족들은 외국 음식에 탐닉하고 있지만 평민층은 식량난에 헤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권층은 외국 승용차나 북한정부 생산한 휘파람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지만 평민층은 대부분 자전거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정부도 계층간의 경제적 격차와 빈부격차로 반정부투쟁이 가중될 것이며 평민층들은  특권층 부패정부를 붕괴시키고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북한정부 권력을 장악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북한 평화자동차 생산한 휘파람 승용차 광고선전입니다 북한 상류층이 구입하여 타고 다니는 모습이 자주 사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승용차는 개인 소유로 인정돼 상류층은 외국 승용차나 평화자동차 생산한 휘파람 승용차등 구입하여 타고 다닙니다  아직도 평민층은 자전거가 재산 목록 1호입니다

 

 

 

 

                                                    교통 여순경과 북한 개인 승용차 모습(상류층과 평민층 빈부격차 피부로 느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과 함께 그의 17년 철권통치도 막을 내렸습니다. 저희 ‘미국의 소리’ 방송은 막 내린 김정일 시대를 경제와 핵, 정치, 안보, 그리고 인권 등 3차례에 걸쳐 조명해 보는 특별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그 첫 순서로 이연철 기자가 파탄난 북한경제에 대해 전해 드립니다

조선중앙TV: “어버이 수령님의 이 교시가 마지막 교시가 될 줄 우리 어찌 알았겠습니까?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 주시려….”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 1994년 7월 8일 아버지인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자 권력을 물려 받았습니다. 1974년에 후계자로 공식화 된 지 20년 만에 마침내 김정일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자신의 시대를 맞은 김정일 위원장의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는 경제를 되살리는 것이었습니다. 1970년대 말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북한경제는 1980년대 말 구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5년과 96년에는 대 홍수 같은 자연재해까지 이어지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은 오히려 북한경제를 더 큰 수렁에 빠뜨렸습니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가 닥친 것입니다.

북한영화 한 장면: “우리는 방금 희생된 동지의 시신을 언 땅에 묻었습니다. 피눈물을 뿌리며 시작한 이 고난한 행군이 이처럼 가슴 아픈 희생을 가져 오리라고 생각해 본 사람은 없었고…”

북한체제 선전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행군 시기의 끔찍했던 북한의 식량난을 생생히 전하는 영화로 평가되는 ‘자강도 사람들’의 한 장면 처럼, 당시 북한 전역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이 시기에 수십 만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 의회 산하 의회조사국의 딕 낸토 연구원은 김정일 시대 최악의 순간으로 고난의 행군 시절을 꼽았습니다.

사회와 경제를 개방해 외부사회의 지원을 받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주민들을 굶어 죽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탈북 행렬에 나서기 시작한 것도 이 때였습니다.

북한은 6년 만인 2000년에 고난의 행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외부세계의 대규모 원조에 의한 것일 뿐 붕괴된 경제의 기반이 재건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2002년, 북한은 부분적으로 시장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사상 유례 없는 경제개혁 조치에 나섰습니다. ‘7.1조치’로 불리는 이 조치의 핵심은 임금과 물가를 대폭 인상하고 기업의 자율권을 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은 또 금강산 관광특구와 개성공업지구를 지정하는 한편, 종합시장 개설과 국영상점 임대, 개인상업 허용 등 유통 분야의 개혁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개혁 조치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시장이 확산되는 등 체제위협 요소가 나타나자 2005년부터는 시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등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은 특히 김 위원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다음 해인 2009년, 경제개혁 보다는 계획경제를 강조하는 움직임을 강화했습니다. 2009년 4월20일 시작된 대중 노력동원 운동 ‘1백50일 전투’가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조선중앙TV: “모두가 1백50일 전투에서 영예로운 승리자가 되자.”

또한, 북한은 2009년 11월 30일, 커져가는 시장을 통제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인플레이션을 막고 화폐 가치를 높이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식량 가격과 환율이 폭등하고 물자 부족 사태가 벌어지는 등 후유증이 극심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화폐개혁을 경험했던 탈북자의 말입니다.

“쌀 값이 30원까지 쭉 내려갔다가 일주일 만에 40원, 50원으로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 때부터 쭉쭉 올라가서…”

이 밖에 북한에서는 화폐개혁 실패의 여파로 달러화 등 외화를 선호하는 현상이 심화됐고, 물가 상승으로 서민층의 실질적인 소득이 줄어드는 결과가 초래되면서 빈부 격차가 더욱 확대되는 부작용도 나타났습니다.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엔 은 주민의 66%가 끼니를 거르고 있다며, 특히 식량난 때문에 영양실조에 걸리는 영아와 유아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북한은 현재 외부 원조를 받지 않고는 당면한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주립 샌디에이고 대학의 스테판 해거드 교수는 북한이 경제 개혁개방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 김정일 시대 경제정책의 최악의 실책이라고 말했습니다.

북한이 경제발전을 위해 아주 조심스럽게라도 개혁의 길로 나아가지 않았고, 오히려 핵 야욕과 선군정치를 앞세웠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2005년과 2009년 두 차례 핵실험으로 유엔 등 국제사회의 제재에 직면하면서 국제 경제에서 점점 더 고립됐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생전에 주민들에게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뒤 권력을 물려받은 김정일은 그 같은 약속을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외부세계의 지원 없이는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를 파탄시킨 채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진행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을 계기로 미국의 소리 방송이 전해 드리는 특별기획, 내일은 두 번째 순서로 김정일 시대의 북한 핵과 정치, 안보 현안들에 대해 전해 드립니다.

 

                                            북한 농민은 대부분 평민층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달구지로 농사를 지고 있습니다

 

                                                                안주시 거리의 소 달구지와 북한정부 제조한 휘파람 승용차 모습

 

                                                                             금강산 근해 순찰하는 북한 해군들 모습

 

                                                                               북한 인민보안부(경찰) 순찰차

 

 

                                                                              북한 주민 재산목록 1호 자전거

 

                                                북중(北中)공동 주최 가을국제상품전시회때 보석류 상품을 둘러보는 평양여성들 모습(사진)

 

                                                                                            북한 화면반주음악실(노래방)

 

                                                                               북한 아동 의복(衣服) 패션(Fashion) 광고 사진

 

                                                                        북한 최고 미인 김옥희(金玉姬, 19세)-북한 인민군 예술단무용수, 계급: 인민군 중위

조선인민군예술단 무용배우 김옥희 조선인민군예술단 무용배우 김옥희라고 기사가 났지만 사실 일본세미누드모델인 "나카시마 마리"라고 합니다.

 

 

                                                                                         금강산 관광지역 안마실 모습 

 

 

                                   평양시내 도로 위에서 폐품수집하는 북한 아줌마들 모습(폐품회수-재이용-재가공- 수출)[2007년 8월, 평양시 선교구]

 

 

                                                                                       평양 시내 평민층 모습

 

*민혁당과 대남정책 그리고 김정일 권력장악 지원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창당이 남북 역사에 많은 것을 던져 주었습니다 민혁당은 통련당(통일혁명당) 창당 이래 두번째로 김일성 김정일 중심의 정당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주체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등장한 정당이며 통련당이 김일성 권력장악을 지원했다면 민혁당은 김정일 권력장악을 지원했다는 것입니다

통련당 검거와 해체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평양방문 성사로 남북대화를 가능하게 했고 민혁당 검거와 해체가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통련당은 김일성 중심의 정당을 창당하고 김일성 유일사상노선 북한노동당을 추종했다면  민혁당은 김정일 중심의 북한 노동당을 인정하고 전통과 계승 입장에서 주체사상 창시자이며 김일성 후계자 김정일을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추대하는데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정부는 1990년 1월 남한지역 반미청년회를 한국민족민주전선(민혁당)으로 개편하여 김정일 중심으로 세력개편을 추진했으며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1992년 4월  북한국가 원수, 1993년 4월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돼 북한 인민군과 북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직무를 맡았으며 1991년 12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직무를 맡았다. 1992년 4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원수로 당선되었다. 1993년 4월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당선되었으며 1997년 10월 조선노동당 총서기 직무를 맡았다. 1998년 9월과 2003년 9월에 재차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추천받았다-북한관련 중국자료)

 

남과 북이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북한도 중국식 모델 공산정부에서 사회정부로 수평적 권력교체(주석,총리등 5년 중임제)나 러시아식 모델 공산정부에서 자유민주정부로 수직적 권력교체(대통령 임기 4년 중임제)가 돼야 하며 북한도 남한처럼 자유화 민주화가 돼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유럽연합처럼 미국정부 지원으로 한중일 중심으로 국가연합구성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과거처럼 남한 일부세력이 김일성, 김정일 권력장악 지원 모델로 김정일 아들 김정운 권력승계 작업을 지원, 추진하는 세력이 있다면 북한정부는 오판으로 핵무기 보유와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남침모델로 김정일 아들 김정운이가 권력을 장악할 것으로 봅니다 남한 자유화 민주화 세력이 북한 김정일 독재정부와 투쟁하는  북한 자유화 민주화를 위하여 투쟁하다가 탈북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세력이 돼야 남북통일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남과 북 통일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가 돼야 합니다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일본정부등이 남북통일을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자유화 민주화정부를 지지하고 전쟁통일모델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노선을 제거하는데 도와주어야 합니다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 핵보유 불인정, 세습 권력승계 반대, 전쟁통일반대와 평화통일 지지"

 

 

 

 

 

 

1.통일혁명당 간첩사건
1968년 발표된 통일혁명당의 대규모 대남 간첩단 사건이다
북한 김일성정부는 4.19혁명이 일어나자 대남 통일전선 조직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구성하여 대남 평화공존과 연합전선 구축 공세를 강화하게 됐다 그때 남파 간첩 김송무를 남파시켜 1964년 3월 통일혁명당을 결성했으나 1968년 7월 통일혁명당과 청맥 잡지등이 체포되거나 검거됨에 따라 조직의 와해 되었다
김종태(金鍾泰)를 정점으로 이문규(李文奎, 조국해방전선 책임자), 김질락(민족해방전선 책임자), 최영도(통일혁명당 전라남도 위원회 위원장), 정태묵,윤광수등이 활동한 통일혁명당(약칭:통혁당)은 북한 노동당의 재남(在南) 지하당(地下黨) 조직으로 1964년 무렵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당시 박정희 정권 아래서 억눌린 변혁적 사회운동을 잠재력을 가진 혁신적 지식인, 학생, 청년등과 전(前) 남로당 당원을 포섭하여 결정적 시기에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 정부전복을 결행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 준비위원회 활동이 드러남으로써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158명이 검거되었으며 문화인. 종교인. 학생등이 많이 포함되어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이관학. 송승환등 5명이 사형이 선고되고 신영복교수등 무기징역 4명 등 관련 피고인 30명 전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이들은 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에 김질락이 중심이 된 민족해방전선과 이문규가 중심이 된 조국해방전선을 두었으며 전라남북도, 부산. 경상북도까지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또한 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 준비위원회 기관지인 <청맥>을 발간 당시 지식인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통일혁명당(통혁당)의 이념. 조직활동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다른데 북한의 지령을 받은 단체로 보기도 하고 독자적인 혁명세력으로서 6.25 한국전쟁 이후 남한 내에서 전위조직을 건설하려는 최초의 주체형 김일성주의 정당 시도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혁신 정치세력의 입지를 좁히고 남한 정치사회의 보수화를 초래하였다
통일혁명당은 1971년 재건을 기도하였으나 또 검거되어 실패하였다
-전위당 문헌 해설(한민전 구국전선 통일여명 편집국 자료)
통일혁명당 선언과 통일혁명당 강령(통일혁명당 중앙위원회 1969년 8월 서울)
http://ndfsk.dyndns.org/kuguk8/ku22/ic_030202.htm
-열린우리당 한명숙의원 남편인 박성준(현 상공회대 교수)씨는 지난 1968년 8월 24일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북한 노동당 지하조직인 통일혁명당(통혁당) 산하조직인 경제복지회 주동자로 15년형을 선고받고 13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통일혁명당 경북지역 조직원 권양섭
http://ugh.or.kr/ja/jangkisu1.html
1972 년 2월 경북지역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권양섭은 22년동안 복역하다가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나 1997년 3월 18일 사망
-1968년 2월 15일(조총련 자료)
남조선통일혁명당 전라남도 위원회 위원장 고(故) 최영도씨를 추도하는 재일조선인의 모임 진행 그리고 남조선통일혁명당의 김종태를 비롯한 사형수(애국자)에 대한 사형을 반대하는 재일일본 조선인 중앙대회
-1969년 7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가칭 통일혁명당(통혁당) 간부 김종태에게 <영웅칭호> 수여
-1969년 11월 25일 통일혁명당 공판을 규탄하는 평양시 집회 개최
(1)통일혁명당사건 주요 인물
ㄱ.김종태(사형)--통일혁명당 위원장(당수) 및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통일혁명당 서울시위원회 위원장)
-1926년 경상북도 영천군 금호면 냉천리(동) 출생
-통일혁명당 주도자였던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등은 모두 월북해 북한 노동당에 입당한 노동당원들이었으며 김종태는 사형집행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ㄱ)김종태의 북한정부 한민전(통일혁명당 후신) 자료
-통일 애국전위 투사 김종태 동지
http://ndfsk.dyndns.org/kuguk8/02_7_11/18.htm
-충신, 전위투사 김종태 동지
http://ndfsk.dyndns.org/kuguk8/45/15.htm
64년 3월 통일혁명당 준비위원회를 결성했으며 <창당준비선언문>을 채택했다
또한 <조국해방전선> <민족해방전선>과 그 산하에 <60년 대학사회> <새문화연구회> <쳥년문학가협의회> <불교도 청년회> <동창회> <청맥회> <민족주의연구회> <학사주점>등 각종 합법, 비합법 대중단체들을 조직하여..
(ㄴ)검찰변천사(연도별 주요사건)
http://www.sppo.go.kr/intro/his_main0313.htm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등 서울에 무장공비 31명 침투(1.21사건)
1968년 8월 12일 서울지방검찰청, 12월 19일까지 <통일혁명당 사건> 피의자 31명 기소
북한은 이 사건의 수괴인 간첩 김종태등을 구출하기 위하여 무장특공대 14명을 공작선편으로 침투시켰고 김종태의 사형이 집행되자 영웅칭호를 부여함
(ㄷ)김종태전기 기관차공장(평양시 서성구역)
김종태는 1960년대 중반 북한의 남조선혁명전략에 따라 남한내에 지하혁명조직인 통일혁명당(한국민족민주전선 전신)결성을 기도했던 인물이다
-1999년 4월 27일 북한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은 궐기모임을 열고 김정일 총비서에게 충성다짐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 종업원들은 2001년 12월 6일 일본경찰의 재일본조선인 총연합회 중앙본부 수색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고 평양방송이 12월 7일 보도 했다
-2002년 3월 21일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에서 반미궐기 집회 개최
-평양지하철(역별사진)
http://wesleyc.com/kr/metro/map1.shtml
평양 DK4지하철 차량이 김종태 전기 기관차 공장에서 제작되었다고 주장 함
(ㄹ)평양방문기--애국렬사릉의 사라진 묘, 생겨난 묘
http://www.khistory.or.kr/connection/read.asp?num=7&page=1
가묘--1969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체포돼 이듬해 사형 당한 김종태와 체포과정에 사망한 최영도등..
(ㅁ)통일혁명당과 김종태 미화 신격화 소설책--애국시대(상.중.하)
주인공 김종태(장준호)와 통일혁명당이 남한지역 최초의 김일성주의 정당으로 묘사
ㄴ.김질락(사형)---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 민족해방전선 총책
ㄷ.이문규(리문규, 사형)--통일혁명당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 조국해방전선 총책
ㄹ.최영도(검거과정 사망)---통일혁명당 전라남도 위원회 위원장

(2)통일혁명당 기관지(청맥)
http://ndfsk.dyndns.org
(3)통일혁명당(1968년 8월 21일-12월 19일)과 관련된 무장간첩 사건
-김종태는 북한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공작금 미화 7만달러, 한화 2,250만원을 받고 남파된 거물 간첩이었다 허봉학은 통일혁명당 와해 책임과 베트남식 남한점령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거되었으며 지금까지 정치 사상범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
ㄱ.1968년 1월 21일--청와대 기습사건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등 31명 북한군 제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침투하여 청와대 기습사건
ㄴ.1968년 10월 30일--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북한은 통일혁명당 수사와 검거, 체포과정에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울진 삼척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 침투시켜 군복, 신사복, 등산복등으로 위장하여 게릴라전을 펴쳤다

 

 

                                                     김영환씨 반성문

 

                                                       조유식씨 반성문 

2.민족민주혁명당 간첩사건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은 북한이 1980년대 학원가의 친북투쟁을 주도해온 주사파 핵심세력들을 포섭, 조선노동당에 가입시킨 뒤 북한의 직접 지도를 받는 <민족민주혁명당>을 구축하여 이른바 <남조선혁명운동>을 사주해온 전형적인 지하당 사건으로 북한은 남한내 주사파를 대남적화혁명의 전위대로 삼기 위해 학생운동권에 영향력과 조직적 기반을 갖고 있던 김영환을 포섭, 입북시킨 후 남한내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지하혁명지도부를 구축토록 지령하였고 김영환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주사파 지하조직 <반제동맹=반미청년회>의 핵심세력들을 하부망으로 포섭, 노동당에 현지 입당시켜 <관악산>등의 암호명을 부여하고 북한의 공작금으로 전국적인 조직기반을 갖춘 <민족민주혁명당>(약칭:민혁당)을 결성 암약해 왔으며 북한은 총책인 김영환이 사상적 변화를 일으켜 <민족민주혁명당>을 이탈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주체사상이 투철한 <민족민주혁명당> 중앙위원 하영옥을 접촉한 후 그를 통한 <민족민주혁명당>을 재결속시켜려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국가정보원은 지하조직 <반제청년동맹> 관련 혐의 및 1997년 10월 검거한 최정남 부부 간첩 사건 연루의혹 관련 김영환을 내사해 오던 중 1998년 12월 18일 남해에서 북한으로 복귀하다가 격침된 반잠수정에서 김영환등의 전화번호가 암호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확인 증거확보에 주력해 오던 차에 1997년 10월부터 중국에서 체류 중이던 김영환이 정부당국에 입국허용 탄원서를 제출한 후 7월 29일 김영환이 자진 귀국함에 따라 자연스러운 분위기하에 4회에 걸쳐 심사를 실시 <1989년 7월 북한 직파 간첩에 포섭 되어 입북 귀환 후 북한 지령에 따라 지하당을 결성하였다>는 등의 자백을 받아내고 자수자에 준한 선처방침을 검토하고 있던 중 8월 16일 김영환이 돌연 <말>지에 찾아가 <국정원이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려고 한다>는 거짓내용의 인터뷰를 하여 관련 혐의자들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고 잠적하였다가 8월 18일 18시 35분발 대한항공편을 이용 홍콩으로 출국하려던 김영환을 공황에서 긴급체포하고 관련자 조유식.하영옥. 심재춘. 김경환등을 차례로 연행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수사과정에 김영환과 조유식은 자수와 반성문으로 대한민국정부로 귀순하였다

-1997년 김영환씨가 베이징에 있을 때 울산 간첩 최정남이 붙잡혔다
그리고 최정남이는 김영환씨를 팔아 재야인사에 접근했다고 증언.
-1998년 12월 17일 남해안에서 북한 반잠수정 격침
북한의 반잠수정은 북한 공작원 배모씨와 하영옥씨를 밀입북시키려고 내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해병대 2사단이 이 배를 발견하고 조명탄을 쏴 확인을 시도하자 아군 고속정이 접근할 수 없는 얕은 수로를 통해 북한으로 도주해 버렸다
북한은 이때 데려가지 못한 공작원을 월북시키고 한달 뒤 여수로 반잠수정을 침투시켰던 것이다
남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반잠수정이 상륙한 사실은 민혁당 연루자인 하영옥(36세), 심재춘(29세)가 국정원에서 "1998년 12월 17일 북한 공작원 배모씨(44세)를 여수 해안으로 안내했다"고 진술하고 지난 1999년 3월 17일 건져 올린 반잠수정에서 이 공작원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됐다
-국정원 발표에 따르면 김영환씨는 지난 1989년 7월 남파간첩 윤택림에게 포섭돼 노동당에 입당한 후 1991년 입북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학 후배인 조유식(말지 기자출신)씨와 함께 반잠수함으로 월북한 후 운동방향등에 논의하고 귀환하여 주사파 운동권 조직인 반제청년동맹을 결성한 뒤 간첩활동을 해왔다고 발표함(예:반제청년동맹-->반미청년회--1990년 한국민족민주전선)
-국정원 발표에 따르면 김경환씨(말지 기자)는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 <민민투>위원장 등을 역임한 후 3차에 걸쳐 위장취업하여 노동자 의식화 활동을 하다가 1994년 4월부터 월간 말지 기자로 재직 중인자로 말레이시아인으로 위장침투하여 서울 강남에서 <삿떼리아>라는 말레이시아식 음식점을 운영하며 암약 중이던 간첩 진운방을 1989년 9월 중순 대학 후배의 소개로 알게 된 후 김영환과 진운방간의 중간 연락책으로 암약하면서 1991년 8월 원주 치악산에서 김영환의 주재로 노동당 현지 입당식을 갖고 <관모봉>이라는 암호명을 부여 받았다
1998년 10월말 진운방이 원진우로 위장하여 재차 침투하자 남파 간첩 원진우를 하영옥과 접선하도록 주선하고 그후 원진우를 여러 차례 접촉하여 그간의 활동내용과 국내정세등을 보고한 혐의이다
-1999년 9월 14일 김영환(서울대 법대 공법과)씨에게 포섭되어 노동당에 입당한과 민혁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혐의등을 받고 있던 박모(35세) 변호사 자수의사 밝힌 뒤 공소보류..
-1999년 9월 17일
8월 범민족대회와 관련하여 방북을 시도한 민족통일 부산연합의장 이성우씨 민혁당 가입죄로 추가 기소
-국가정보원은 민혁당 산하 영남위원회 총책 혐의를 받은 최진수씨와 고등학생 사업담당 혐의의 박정훈씨등 4명의 긴급체포했다

-1999년 10월 7일
민족민주혁명당 연루자가 100명-200명에 달한다고 발표함
서울지검 공안1부(정병욱 부장검사)는 7일 북한 전위혁명조직인 <민족민주혁명당>에 지난 1996년 4월 11일 총선 및 1995년 지방선거 출마자 5명을 포함해 20여명이 연루되었다고 발표
검찰, 민혁당의 영남위원회와 경기남부위원회, 서울지역 학생운동 사업부 소속, 고등학생사업부의 활동 가담자 20여명을 추가 확보 수사 중이라고 발표함
-한나라당 박진의원 자료
국군기무사령부가 국회 국방위 박진 한나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00년부터 지난2004년 8월까지 검거한 간첩은 2000년 1월 교수출신 간첩 한단석을 비롯해 2002년 5월 반국가단체 민혁당 경기남부 위원장 이석기씨와 2001년 9월 재중(在中) 조선족 간첩 모씨, 2004년 4월 재일(在日) 대남공작부 지도책 모씨등 모두 4명이라고 밝혔다
-Prochosun
http://prochosun.com.ne.kr/aaa/hwanginoh.html
<95년 위원회>를 이끌어 온 혐의를 받고 있는 최경호씨는 자신이 조직원 변의숙씨를 북한에 보낸 사실등 모두 시인하면서 <북한 노동당이 아닌 남한의 자생적인 운동조직 한민전의 지시를 따라..>
-한민전 영남위원회(일명:동창회)
양심수 홈페이지
http://www.yangsimsu.or.kr/freeboard_jaryosil_read.php?num=2
부산경찰청의 발표에 따르면 한민전 영남위원회(일명:동창회)는 울산지역 <희망의 젊은 연대>를 비롯해 12개 조직단체, <부산노동자회>등 7개 단체, 양산지역 1개 단체등 재야 합법, 반합법 조직에 조직원을 침투 및 외곽..
http://hrights.or.kr/tanwon.html
부산보안수사대는 영남위원회가 처음에는 한민전 영남위원회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조선노동당 영남위원회 또는 반제동맹 영남위원회로 번복
-한총련 제10기 의장이 소지한 한민전 문건과 강령
http://gs.kwpolice.go.kr/news/view.asp?num
(1)한국민족민주전선 등장 과정
<통일혁명당> 중앙위원회는 1985년 7월 27일 당의 명칭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칭했고 일본에서는 1986년 8월 8일 통일혁명당 일본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조직 확대 개편 개명했다
한국(남한)에서는 1990년 1월 1일 전후 반미청년회를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조직 확대 개편 개명했다
반제청년동맹(강철서신)--->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새세대.여명.아리랑. 백두산등)
ㄱ.반제청년동맹기관지--강철서신(김영환씨의 편지형식 글)
강철서신은 NLPDR이론과 북한 주체철학사전, 정치사전, 역사사전등에 수록된 NLPDR 반미이론을 체계적으로 제작하여 만든 소(小) 선전물이다
대표적 합법단체-----삼민투위와 자민투 등 내부 주사파계열 조직원
ㄴ.반미청년회 기관지---구국의 소리
구국의 소리는 김일성주의 표방과 한국전쟁은 북침에 의한 정의의전쟁으로 묘사 그리고 각종 NLPDR, 김일성 신격화 글 등 수록
대표적 합법단체---전대협과 한총련 그리고 전국연합(범민련,범청련, 전국농민회, 전국노동자단체등) 내부 주사파 조직원
ㄷ.한국민족민주전선 기관지---새세대. 여명.아리랑. 백두산등
한민전이 90년 1월 창당하여 기관지를 <새세대>를 내걸고 반미청년회 구국의 소리를 중지하고 NLPDR 김일성노선보다는 주체사상 김정일 노선을 표방함으로 김정일 노동당 비서가 1990년 말경 인민군 총사령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민혁당이 창당되었다고 본다
민족민주혁명당이 통일혁명당 모델로 창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1985년 7월 27일 <통일혁명당>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명했고,일본에서는 통일혁명당이 1986년 8월 8일 민족민주전선 일본대표부로 개명했고, 남한에서는 반미청년회를 1990년 1월경 민족민주전선(민혁당)으로 개명했다
(2)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인가
ㄱ.통일혁명당도 서울시 창당준비위원회 산하에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을 두었다 민혁당이 한민전 조직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반제청년동맹(강철서신)--->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 새세대.여명.아리랑, 백두산등)
김영환씨가 반제청년동맹 지하 기관지 강철서신 저작이다
강철서신 인적 자원 토대로 등장한 조직이 반미청년회와 한민전이다
1990년 1월에 반미청년회를 해체하고 민족민주혁명당(한민전)이 창립되었으며 반미전선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구축되었다 민혁당 지도부가 바로 강철서신과 구국의 소리 지하그룹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남한 땅에서 반미투쟁과 김일성주의 투쟁 배후세력이 반제청년동맹(반미청년회) 강철서신(구국의 소리)이었다
한국민족민주전선 조직이 남한 재야 반미세력 배후이며 그들의 전위당(민혁당)이 전국적으로 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NLPDR 지하당으로 구축되어 왔다
ㄴ.한국민족민주전선이 통일혁명당이라는 사실 입증 자료도 있다
북한정부는 통일혁명당을 1980년대 왔어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편 개명하였고 일본에서는 1986년 8월 8일 통일혁명당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각국 해외에 주체사상 조직이나 친북세력이 결집하여 통일혁명당 대표부를 한국민족민주전선 대표부로 개편. 개명하였다
남한에서는 반미청년회를 1990년 1월에 왔어 확대 개편하여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명했다 한민전 조직원들은 통일혁명당 소설책자 애국시대(1.2.3권)를 학습교재로 활용하여 민족민주혁명당을 통일혁명당으로 재건하려고 했다고 본다
(3)북한정부 대남공작부 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 구국전선(청맥) 홈페이지 사이트에서 통일혁명당이 한국민족민주전선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한민전 사이트 http://ndfsk.dyndns.org 

(4)1998년 12월 17일 해군이 남해에서 격침시킨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에 상륙
남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반잠수정이 여수해안 상륙한 사실은 민혁당 연루자인 하영옥 심재춘씨가 국정원에서 <1998년 12월 17일 북한 공작원 배모씨를 여수해안으로 안내했다>고 진술했고 지난 1999년 3월 17일 건져 올린 반잠수정에서 이 공작원의 시체가 발견됨으로써 확인됐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s_plus/news202/np202bb050.html

 

 

(5)민혁당과 관련된 무장간첩사건
-이선실 여간첩 사건(이선실은 한민전 부위원장 출신)
-1995년 10월 24일 부여침투 무장간첩 김동식 사건
-1996년 9월 18일 강릉무장간첩 사건
-1997년 10월 최정남 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울산지역)
-1998년 12월 17일 여수근해 반잠수함 격침사건
(6)남한지역의 한국민족민주전선 변천사
반제청년동맹-->반미청년회--->한국민족민주전선(90년 1월)-->반제민족민주전선(2005년 1월) 
 

북한 반잠수함(전남 여수): 김대중정부 때 북한 반잠수함이 남해 해안 침투하다가 격침되었다 북한 반잠수함 검거로 남한지역 민전조직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이 해체되었고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 부위원장 이선실 여간첩이 전두환정부 때부터 결성해 온 남한지역 한민전이 제거되었고 이선실 여간첩도 북한에서 사망했다  북한 대남 강경파 반미구국항쟁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세력이 제거한 덕분으로 그 다음해 남북정상회담이 됐다

노태우정부때 전남지역 대학생들의 자살투쟁도 한민전 배후 세력 조종이라는 견해도 있다

북한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정부때 민전조직원 운반 수단으로 반잠수함이나 잠수함을 이용해왔다(통일혁명당 해체와 남북회담 추진-이후락 평양방문)


참고 자료:

http://blog.daum.net/007nis/8585366

 

*한국민족민주전선(반제민족민주전선)부위원장 이선실(李善實) 대남 공작원

1.주요 경력

-제주출신과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ㄱ.중앙당 금강학교 출신---정치공작원 학교
박헌영 이승엽등의 빨치산 정치학원 강동정치학원과 비슷한 성격
ㄴ.79년 당 통일전선부 부부장(통일혁명당 전위대)
최고인민회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집행 행정기관으로 통일전선부를 두고 있다
ㄷ.80년 1월 당 정치국 후보 위원
ㄹ.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제7.8.9.10대
ㅁ.91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
한민전은 1990년 1월 반미청년회를 해체하고 등장한 단체이다
ㅂ.94년 7월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 위원
ㅅ.2000년 8월 사망
민혁당(한민전 서울지부) 지도부 자수와 검거 그리고 잠수함 격침

-이선실은 현재 북한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한민전」 부위원장 등으로 활동중인 자로서
북한의 권력서열 23위인 사회단체 담당 비서 김중린, 24위인 대남사업 담당비서 윤기복, 32위인 부총리 김달현보다 더 상위인 권력서열 22위의 최고위급 공작원임이 면밀한 수사 끝에 확인되었습니다.
 이선실은 1966년, 1973년 등 2회에 걸쳐 간첩으로 남파, 활동한 사실이 있으며 1980년 초에 조총련 모국방문을 위장하여 잠입,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합법신분을 얻어 1990년 10월 강화도를 통해 복귀시까지 10여년간 서울을 비롯한 전국 일원과 북한 및 일본을 왕래하면서
북한 직파간첩 「임」모, 「최」모, 「이」모 등 10여명과 국내에서 암약하고 있는 지역별, 부문별 공작원을 거느린 공작지도부를 구축, 대남공작을 총 지휘해 왔음이 드러났습니다

-남한 조선노동당사건이나 중부 노동당 사건, 김동식 간첩사건, 민혁당 사건등 한민전 부위원장 이선실 간첩 배후 조종(남한 간첩사건이 대부분 남한사람 월북자 단체 반제민족민주전선<한국민족민주전선=통일혁명당>이 주도해왔다)




2.이선실 주요 동정
92년 4월 김일성 80회 생일 기념 연회에 당 정치국 후보 위원으로 참석

3.한민전 추적과 이선실등 대남 공작원 생포과정
1990년 말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 새세대 신문 입수와 반미청년회 조직파악<한민전 90년 최초 1월호 새세대 지하신문 자료>
반제동맹(강철서신: 김영환씨 편지 글)--->반미청년회(구국의 소리)--->한국민족민주전선(새세대--여명--아리랑--백두산등)


*반제민족민주전선(한국민족민주전선)이란

반제민족민주전선(한국민족민주전선)은 초기 월북자 출신들로 조직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후속기관으로서, 북한이 우리 한반도의 통일 주도세력임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실행해온 노동당 적화 통일정책의 전위부대라고 할 수 있다.

반제민족민주전선(한국민족민주조선)은 우리 남한을 북한의 일부분으로 규정하고 한국의 민주주의단체를 주장하며 합법성을 주장한다. 반제민족민주전선(한국미족민주전선)의 공작 목적은 한국 국민의 민심을 위장 대변하여 친북, 친김정일 정서를 왜곡, 날조하여 유포시키고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 정책을 지지하고 실천한다.

남한내에 광범위한 친북조직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그 전위조직으로 자칭하며, 구국의 소리방송이나 26 연락소의 인터넷 침투를 통해 남한내 간첩, 친북, 좌파세력에게 통전부 정책에 맞는 행동의 일체성을 지령하거나 유도한다.

반제민족민주전선(한국민족민주전선)은 자기의 비합법성을 합법적 의미로 부각시키기 위해 동남아에 지부를 설치하고 그 지부를 통해 첩보수집, 인물포섭, 왜곡보도로 활동범위를 확대했다.
통전부에서 해외에 나가 회유 기만, 혹은 협박의 방법으로 한국인들을 유괴하거나 포섭하는 공작은 이 반제민족민주전선(한국민족민주전선)이 산하 지사들을 통해 전담한다.

반제민족민주전선(한국민족민주전선)은 정치분과, 선동분과, 보도분과로 나누어져 있으며, 본사 인원은 50명, 지사인원은 60여명으로 추정된다. 특히 최근의 반민전(한민전) 활동에 대해 강조할 것은 이전의 “반민전(한민전)” 활동을 계속 유지하면서도 지금은 범민련 활동을 더 추가하였다는 것이다.

과거 “반민전(한민전)”과 현재 “범민련”과의 관계를 좀 더 해부학적으로 설명한다면, 북한은 선군정치 발표 후 국내 혁명의 주력군을 노동계급으로부터 군(軍)으로 선회하였다. 이에 맞게 대남 부분에서도 과거에는 적화통일의 주력군 규정을 무산계급, 양심 있는 학자들과 민주화 세력으로 한정했다면, 지금은 친북 및 좌익세력 확산, 진보세력 확산으로 동조세력 범위를 더 확대하였다.

이것이 바로 북한이 주장하는 범민련 목적이다.
때문에 현재 남한에 있는 범민련 조직은 명백히 통일전선사업부의 조정을 받는 반민전(한민전) 소속 하부 기관이다

 

김일성주의자 모임 또는 주체사상파 모임
ㄱ.조직--평양대표부(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통일전선부) 서울대표부(반미청년회) 해외대표부(각국 주체사상연구소--쿠바나 일본. 유럽등지 주체사상연구소 회원)
ㄴ.대남 공작원 연락선---잠수함이나 반잠수함

 

 

 *여수 앞바다에서 북한 반잠수함 검거에 공헌한 김영환씨

김영환(1962년 ~ )은 1986년 서울대에서 구국학생연맹을 결성하고 최초로 주체사상을 학생운동권에 전파한 인물이다. 구학련은 한국 학생운동사에서 '최초의 비합법 주사파 조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당시 '강철'이라는 필명으로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를 단 편지 형태의 글로 주체사상에 대하여 알기 쉽게 소개하였는데 이것이 '강철서신'이라고 부르는 글이다.

그는 1990년대 초 밀입북해 김일성 주석을 두 차례 면담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김일성을 면담한 후 그는 북조선의 현실을 알게 되어 반북주의자, 북한 민주화주의자로 전향하였다.

그는 “북한의 학자들과 주체사상에 대해 토론하는데 ‘수령이 문화대혁명과 같은 오류를 범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반복했지만 그들은 전혀 엉뚱한 대답만 늘어놓고 답을 하지 못했다”라면서 “세상에서 주체사상을 연구할 자유가 없는 곳은 바로 북한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북한에서 김일성을 2번 만났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주체사상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라면서 “오히려 그가 주체사상에 대해 발표된 책을 한 번이라도 정독했는지 의심스러웠다”라고 회상했다.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의 핵심인물이었던 ‘강철’ 김영환 시대정신 편집위원이 자신의 ‘전향’ 운동사를 여과없이 털어놨다.

김 편집위원은 ‘강철서신’으로 알려진 문건과 서적을 통해 주체사상과 민족해방(NL) 노선을 학생운동의 주류로 성장시켰던 인물. 그러나 그는 1991년 5월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난 이후 북한 민주화운동가로 전향했다.

김 위원은 26일 오전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NDI·이사장 박관용)이 주최한 초청강연에서 ‘10만 주사파의 대부’가 북한민주화운동에 투신하게 되기까지의 인생역정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굵직굵직한 인생의 전환점들을 돌아온 강철 김영환. 80년대 운동권에게 그는 신화같은 존재였다. 강철이란 사람이 정말 존재하는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김 위원은 자신이 대학가에 민족해방운동론을 처음 전파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나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확산됐다. 서울대는 불과 2, 3달만에 (민족해방-NL계열이)학생운동을 장악했고 전국에 걸쳐 8~10개월만에 학생운동을 장악했다”고 말했다.

“당시 나를 잡기 위해 활동한 경찰이 400명 정도가 됐다. 고향에 있는 할머니 묘소를 지키는 것은 물론 막내 이모가 세를 내준 집을 새벽에 엄습하기도 했다.” 그를 잡기 위해 경찰이 후배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코믹한 상황까지 연출됐다는 것.

김 위원은 안기부에 검거된 후 ‘47일간의 고문’을 떠올렸다. “1월 9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인데, 바로 내가 교도소에 들어간 날이다. 교도소에 가게 됐지만, 안기부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고 말하자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북한과 연계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공안당국의 역할이 필요한 측면이 있었지만, 당시의 고문은 오히려 혁명의지를 다지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말했다. 고문도 그의 신념을 꺾지 못했다는 것.

그러나 그를 꺾은 것은 투옥과 고문이 아니라 ‘북한의 현실’ 그 자체였다고 한다.

김 위원은 교도소에서 나온 이후에도 지하당인 민혁당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91년 밀입북했다.

김 위원은 “북한 경제가 어렵다는 말은 워낙 많이 알려져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다른 측면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며 방북 당시를 떠올렸다.

특히 “북한의 학자들과 주체사상에 대해 토론하는데 ‘수령이 문화대혁명과 같은 오류를 범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반복했지만 그들은 전혀 엉뚱한 대답만 늘어놓고 답을 하지 못했다”면서 “세상에서 주체사상을 연구할 자유가 없는 곳은 바로 북한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 “북한에서 김일성을 2번 만났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된 주체사상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면서 “오히려 그가 주체사상에 대해 발표된 책을 한번이라도 정독했는지 의심스러웠다”고 회상했다.

북한과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감행한 방북이 오히려 북한의 진실을 깨닫게 하는 진실의 문이 되고 말았던 것. 90년대 중반부터 김 위원은 ‘북한의 수령론은 사기극’이라는 글을 말지에 게재하고 북한 민주화운동가로 공개 전향했다.

그는 북한이 ‘사이비 종교집단과 마피아 집단을 섞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동료들 중 핵심간부만 추려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지금 북한은 지구상 어떤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독재를 펼치고 있다. 인민을 굶어죽이고 인권을 억압하고 있다. 우리는 혁명가다. 인민의 적은 우리의 적이다. 인민의 적이 된 북한정권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나는 남은 인생을 북한정권을 타도하는데 바치려고 한다. 나와 같은 길을 걸으려고 한다면 나의 벗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김정일과 함께 나의 적이 될 것이다.”

김 위원은 “그 이후 나는 북한민주화운동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불렀던 노래와 구호들이 지금도 한국사회 곳곳에서 계속해서 회자되고 있는 사실에는 안타까움을 금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 친북이나 정통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세력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아니라 이미 학생운동을 벗어난 사람들”이라며 “당시의 ‘사회주의적 민족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그것이 사회전반에 뿌리깊게 배어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 사회의 사회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분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면서 “나는 북한 민주화를 위한 활동가로서 이 분야에 총력을 다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날 세미나에 참석한 한 방청객이 김 위원에게 “대다수 국민들이 친북좌경화가 잘못된 길임을 일찍 알았는데 김영환 씨는 왜 그렇게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느냐”며 비판하자, “그런 부분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과거 운동권의 잔재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부정적인 측면을 극복해나가야 할 부분에 책임감을 느낀다”고 대답했다.

 

 

 

 

 

 

 

                                                         Red stars are removed as communism relinquishes its grip in central Europe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 반공반독재구국전선!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공존 열린사회 자유민주정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유럽을 동서 양 진영으로 분단했던 이른바 '철의 장막'의 붕괴 2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식전이 동서를 실제로 격리시킨 철조망을 처음 철거한 헝가리에서 열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서 양 진영간에는 철조망 등이 길게 쳐져 있었으나 20년 전인 6월 27일 당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외상이 양국의 국경에 있었던 철조망을 절단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당시의 동독 국민이 헝가리 등을 경유해 서독으로 넘어왔으며 그 해 11월에 '베를린의 장벽'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27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있는 의회에서 열린 기념식전에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유럽의 정상 등이 참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독일의 쾰러 대통령이 '당시의 헝가리 국민의 용기있는 행동과 동독 국민에 대한 지원에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헝가리의 쇼욤 대통령은 '유럽의 분단을 종결지은 경사스런 날'이라고 말해 철조망을 철거한 것이 그후 일련의 동유럽 혁명의 출발점이 됐다고 평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