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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최장수 총리 베를루스코니 사임 본문

남유럽 지역/이탈리아[意大利, 伊太利

이탈리아 최장수 총리 베를루스코니 사임

CIA bear 허관(許灌) 2011. 11. 13. 20:21

 

이탈리아 최장수 총리였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75)가 12일 오후(현지시간) 공식 사임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이날 하원에서 경제 안정화 법안이 통과된 직후 조르지오 나폴리타노 이탈리아 대통령을 만나 사임을 표명했으며, 나폴리타노 대통령은 이를 수용했다고 성명을 통해 밝혔다.

   1994년 정계에 입문한 언론재벌 출신의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17년의 정치경력 중 10년 동안 3차례 총리를 지냈다.

   재임 중 온갖 성추문과 비리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이날 하원 표결 직후 관저에서 마지막 내각회의를 주재하고 나폴리타노 대통령에게 사임 의사를 밝히기 위해 승용차를 타고 출발할 때 군중은 '어릿광대(buffoon)'라며 야유를 보냈다.

   이날 밤 로마 시내에서는 베를루스코니에 반대하는 수천명의 군중이 사임 소식이 알려지자 일제히 환호했다.

 

   이 광경을 본 베를루스코니는 측근에게 "매우 씁쓸하다"고 말했다고 이탈리아 뉴스통신 안사(ANSA)가 전했다. 베를루스코니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경제개혁을 이끌 총리로는 유럽연합(EU) 경쟁담당 집행위원을 지낸 마리오 몬티(68) 밀라노 보코니대학 총장이 유력하다.

   경제위기를 타개할 중립 성향의 관료 중심으로 새 내각 구성을 준비 중인 몬티 거국내각은 이르면 13일 오후 또는 14일 오전 출범할 예정이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자유국민당(PdL)은 이날 총리의 사임 직전 성명을 통해 몬티 거국내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북부연맹이 반대하고 있지만, 최대 정파인 자유국민당이 지지하고 나섬에 따라 몬티 내각 출범은 중대한 문턱을 넘은 것으로 평가된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지난 8일 2010년 예산지출 승인안 표결에서 과반 확보에 실패한 사실이 확인되자 유럽연합(EU)에 약속한 경제 안정화 법안이 통과되는 대로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그의 사임은 지난 11일 상원에 이어 이날 하원에서도 연금 개혁과 일부 국유재산 매각 등의 내용을 담은 경제안정화 방안이 찬성 380표 대 반대 26표, 기권 2표의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된 데 따른 것이다.

경제안정화 방안은 유로존 3위의 경제국 이탈리아가 1조9천억 유로에 달하는 정부부채를 줄이고 균형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경기 부양을 위한 세금 감면 ▲2014년까지 150억 유로 상당 국유재산 매각 ▲2026년까지 연금 지급연령 67세로 상향 ▲노동시장 유연화 등을 추진하는 내용이다.

   나폴리타노 대통령은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고 국채 금리 급등에 따른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정치 리더십 교체의 속도를 높이고 있으며, 여야 정치인들에게 눈앞의 작은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국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달라며 비상 거국내각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나폴리타노 대통령은 13일 각 정파 대표들과 만나 새 내각 구성 문제를 협의할 예정이다.

   헤르만 반 롬푀이 EU 정상회의 의장 등 EU 수뇌부와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도 몬티 내각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의회를 통과한 경제안정화 방안에는 연금 지급시기 연기와 노동시장 유연화 등 노동계와 서민들의 희생과 양보를 요구하는 사안들이 포함돼 있어 비상 거국내각의 경제개혁 실행 작업에는 적잖은 진통이 예상된다.

 

야유 속에 떠난 베를루스코니 퇴임 후도 험난

재임 중 숱한 성추문과 부패 의혹, 말실수 등으로 화제를 몰고 다녔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가 여론과 시장의 압력에 밀려 17년 정치인생을 마치고 12일 권좌를 떠났다.

   그러나 17년 정치 경력 중 10년 동안 총리직을 지낸 베를루스코니에게는 성매매 재판 등 적잖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어 사임 후의 미래도 파란만장할 전망이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 공개 의향서를 통해 약속한 경제안정화 및 개혁 방안이 하원을 통과한 직후 그동안 함께 정부를 이끌었던 각료들과 마지막 내각회의를 가진 뒤 조르지오 나폴리타노 대통령을 만나 `사표'를 냈다.

베를루스코니의 공식 사임 소식이 알려지자 로마 도심 총리 집무실과 하원 의사당 앞 광장에 모여있던 수천명의 군중은 일제히 환호했다. 일부 군중은 나폴리타노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하기 위해 총리 관저를 떠나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에게 '어릿광대'라며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지난 2008년 세 번째로 총리직에 복귀한 이후에만 51번의 신임투표에서 살아남았던 베를루스코니 총리도 결국 이탈리아 경제를 뿌리째 흔드는 시장의 공세와 압력은 견뎌내지 못했다.

   1936년 9월 29일 밀라노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 건설업으로 돈을 모은 뒤 복합 언론기업 메디아셋을 설립해 언론재벌이 된 베를루스코니는 `매력적인 억만장자' 이미지를 앞세워 1994년 `포르자 이탈리아'라는 정당을 이끌고 혜성처럼 정계에 등장해 곧바로 총리가 됐다.

   북부연맹의 연정 탈퇴로 첫 임기 시작 후 몇 달 만에 사임해야 했던 그는 2001년 5월 치러진 총선에서 총리직에 복귀했다. 또 그는 2006년 로마노 프로디 전 총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가 2년 후 프로디 정부가 붕괴하자 현 집권당인 자유국민당(PdL)을 결성해 세 번째 총리직을 맡았다.

재임 기간 성추문과 비리 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베를루스코니는 `스캔들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부인으로부터 이혼도 당했다. 저택에서 종종 심야 비밀파티를 벌여 `붕가붕가 파티'라는 속어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외교 무대에서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 주요국 정상들을 비하하는 언행으로 자주 구설에 올랐다.

 

성 문제와 마초적 언행에 비교적 관대한 이탈리아 문화 덕택에 베를루스코니는 잦은 스캔들에도 비교적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시작된 재정위기의 불길이 이오니아해를 건너 이탈리아 반도로 번지고 국채 이자율이 위험 수위로 급등하면서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적 리더십이 도마 위에 올랐다.

   야권은 연일 베를루스코니의 사임을 요구했고, 높은 실업률과 장기화된 경기침체에 분노한 국민들은 지난달 로마시내에서 건물과 차량에 불을 지르는 폭력시위를 벌였다.

   지지율 추락과 일부 연정세력 이탈, 핵심 동맹세력인 북부연맹의 외면, 집권당 의원의 탈당 등으로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베를루스코니는 지난 8일 치러진 2010년 예산 지출 승인안에 대한 투표에서 집권연정의 다수의석 붕괴가 확인됨에 따라 사의를 밝혔다.

   총리직을 떠난 75살의 베를루스코니의 앞길은 험난하다. 우선 지루한 법정투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모로코 출신 나이트클럽 댄서 카라마 엘 마루그(일명 루비)와의 미성년 성매매 및 권력 남용, 소유기업의 조세포탈, 법정 위증교사 및 뇌물공여 등 3건의 재판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미성년 성매매와 권력 남용은 유죄 판결시 최대 12년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는 사안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베를루스코니가 그의 전임자이자 정치적 후원자였던 베티노 크락시 전 총리처럼 해외망명을 택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이탈리아 사회당을 몰락으로 이끈 크락시 전 총리는 부패 혐의로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하자 1994년 튀니지로 망명했고 궐석재판에서 27년 형을 선고받았다.

   베를루스코니는 검찰이 입수한 통화녹취에서 이탈리아를 `형편없는 나라'라고 지칭하면서 "나는 몇 달 안에 떠날 것"이라고 말해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그가 해외도피를 선택할 경우 카리브해의 섬 안티구아가 유력하다고 이탈리아 정치 분석가들은 예상했다. 안티구아는 이탈리아와 범죄인 인도협정을 맺고 있지 않고 베를루스코니가 호화 별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정치무대의 중심에 서는 것을 좋아했던 베를루스코니의 기질로 미뤄볼 때 카리브해의 고독한 섬에서 여생을 보내는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정치 분석가 세르지오 리초는 AFP에 "베를루스코니가 안티구아에서 체스나 두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베를루스코니는 공식적인 삶을 떠나 살 수 없으며, 관심의 초점에 있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차기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과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집권 자유국민당에서 고문 역할을 맡겠다고 말한 바 있다.

   과거 두 차례 실각 이후에도 불사조처럼 살아났던 전례를 비춰볼 때 여론이 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정계에 돌아올 것이라는 관측도 없지 않다



Silvio Berlusconi dominated Italian politics since the early 1990s. However, the message of this Milan cartoon depicting him as Napoleon, hitched to a cart of half-naked women, is that he is more "Buon Party" (Good Party) than Bonaparte.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어: Silvio Berlusconi, 1937년 9월 29일 ~ )는 이탈리아의 기업인·정치인이다. 1994년 ~ 1995년, 2001년~2006년, 2008년 ~ 2011년 이탈리아의 총리를 지냈다.

2000년 포브스 지가 집계한 개인 자산 순위에서 120억 달러의 재산을 보유하여, 이탈리아 1위, 세계 14위의 부자로 기록된 인물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재산을 축적하는 과정에서 돈세탁과 탈세 및 세무관련자 매수 등의 혐의로 여러 차례 법원에 출두하였고 1998년에는 2년 9개월의 징역을 선고받기도 했다.

이탈리아 최대의 미디어그룹 미디어셋의 소유주이자 유명 축구구단인 AC 밀란의 구단주이기도 하다.

그는 이러한 재력을 바탕으로 1994년포르차 이탈리아(이탈리아어: Forza Italia)를 창당하여 국민연합북부연맹 등 타당과 연정을 구축하여 전후 최초의 우파정권을 수립하여, 수십 년동안 계속된 기독교민주당 정권을 붕괴시키며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연정의 붕괴로 인해 7개월 만에 물러나게 되었다.

1996년에 다시 총리직에 도전하나 실패하고 1998년에는 전직 총리 신분으로는 최초로 "마피아 지원의혹"으로 불구속기소되기도 했으나, 2001년 5월 13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우파연합이 승리하여 78대 총리가 되었다.

2006년 4월 총선에서는 로마노 프로디에 아주 근소한 차로 패배해 총리직을 사임했으나, 2008년 4월 치러진 총선에서 그가 이끄는 우파 연합이 압승을 거두어, 그는 5월 8일에 세 번째로 총리직에 취임하였다.

2011년 11월 12일 하원에서 경제안정화 법안이 통과된 뒤, 유로존 부채위기에 대한 책임으로 총리직에서 사임하면서 17년간의 정계생활에서 은퇴하였다.

1.가족 배경 및 사생활

베를루스코니는 밀라노에서 태어나 중상류층의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루이지 베를루스코니(Luigi Berlusconi, 1908년 - 1989년)는 은행원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로사 보씨(Rosa Bossa, 1911-2008)였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두 사람의 세 자녀 중 첫째다.

그의 형제들은 모두 기업가로, 마리아 프란체스카 안토니에타 베를루스코니(Maria Francesca Antonietta Berlusconi, 1943년 - 2009년)와 파올로 베를루스코니 (Paolo Berlusconi, 1949년 -)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살레의 성 프란시스학교(St Francis de Sales college)에서 고등 교육을 받았고, 밀라노 대학교(Università Statale in Milan)에서 법학을 공부해 광고의 법적 측면을 다룬 졸업논문으로 1961년 학위를 받았다. 베를루스코니는 당시에 강제적이었던 군대에서 1년간의 복역을 하지 않았다.

베를루스코니가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현재 미디어셋(Mediaset)의 의장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인 페델 콘파로니에리(Fedele Confalonieri)와 함께 만든 그룹에서 더블베이스를 연주했고, 크루즈선에서 종종 연주했다고 한다. 1965년, 베를루스코니는 칼라 엘비라 돌로글리오(Carla Elvira Dall'Oglio)와 결혼해 두 명의 아이인 마리나 베를루스코니피에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를 갖는다.

1980년에 베를루스코니는 배우 베로니카 라리오와 관계를 갖게 되어 1984년 바바라 베를루스코니, 1986년 엘레오노라 베를루스코니, 1988년 루이지 베를루스코니로 이렇게 셋의 아이를 갖는다.

그는 결국 돌로글리오와 1985년 이혼하고 라리오와 1990년 결혼했다. 이 시기 베를루스코니는 유명한 기업가였으며, 그의 결혼식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였는데 신랑측 친구 중 한명은 전직 총리이자 이탈리아 사회당의 당수 베티오 크락시였다.

2009년 5월, 베로니카 라리오는 "저질 여자들과 놀아나는 이런 남자와 살 수 없다"며 이혼서류를 제출했다. 베로니카 라리오는 이때 18세 소녀 노에미 레티자와의 관계를 가리켰던걸로 알려졌다

2.기업가 시절

(1)밀라노 2

베를루스코니의 기업가로서의 첫 출발은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1960년대 후반, 베를루스코니는 3500여개의 아파트로 이뤄진 가든 시티인 밀라노 2에 대한 아이디어를 갖게 되었고, 밀란 동쪽 외곽의 세그라테(Segrate)에 결국 짓게 되었다. 베를루스코니가 이 사업에 어떻게 자금을 이끌어왔는지는 불분명하다.

1968년 9월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베를루스코니의 이름은 법적 서류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았으며, 명목상의 소유자로 대체되었다가 1975년에야 베를루스코니의 이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금을 끌어오는 과정을 많은 언론인들이 조사했지만, 해외 조세피난처와 중국의 자금책 등을 이용하는 복잡한 방식이었던지라 아무도 이를 제대로 파헤칠 수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자산 거래의 경우, 가정의 자산이든 부동산 개발이든 세금을 줄이기 위해 문서상으로는 실제보다 더 적은 액수를 적어넣는다.

(2)텔레밀라노

베를루스코니는 1973년텔레밀라노라는 세그라테 아파트에 방송을 공급하기 위한 작은 케이블 텔레비전 회사를 세움으로써 미디어 산업에 뛰어든다.

텔레밀라노는 1974년 9월에 송출을 시작했다. 두 개의 채널을 더 구입한 뒤, 베를루스코니는 1997년에 방송국을 밀란 중심으로 옮겨 지상파 방송을 시작했다

(3)핀인베스트

1978년 베를루스코니는 그의 첫 미디어 그룹 핀인베스트(Fininvest)를 설립했다. 이 회사를 통해 베를루스코니는 113,000,000,000 리라( 1997년의 260,000,000유로에 상당)을 벌 수 있었다. 이 회사의 자금 조달 구조는 지주회사의 복잡한 형태로 인해 여러 검사들에 의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대로 알려진게 없다. 핀인베스트는 텔레비전망을 이탈리아 전국으로 넓혀서 결국 하나의 전국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핀인베스트의 행동은 후에 철폐된 이탈리아의 공영 방송 RAI의 독점 구조를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980년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의 첫 민영 전국 방송 카날레 5를 세웠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스코니 가문으로부터 1982년에 사들인 이탈리아 1몬다도리로부터 1984년 사들인 레테 4 등의 방송국을 더 갖게 된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사회당 사무총장이자 당시 이탈리아의 총리였던 베티노 크락시와의 후광을 이용해 성장할 수 있었으며, 1984년 10월 20일 이탈리아 정부가 베를루스코니의 전국 송출을 합법화하는 긴급 명령을 결의하면서 베를루스코니는 최초의 유일한 이탈리아 상업 TV 제국을 갖게 되었다.

이는 1984년 10월 16일 페스카라, 로마, 투린의 사법부에서 RAI의 전국 방송에 대한 독점을 강제하는 법을 근거로 민영 텔레비전망이 송출을 중단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얼마간의 정치적 혼돈 뒤에 이 명령은 결국 승인되었다. 하지만 몇 년간 베를루스코니가 가진 3개의 채널들은 법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뉴스나 정치적 언급 등이 금지되는 등의 제한을 받았다.

3개의 채널들은 1990년이 되어서야 소위 마미법이라 불리는 법에 의해 전국 TV 채널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1995년 베를루스코니는 그의 미디어 지주회사의 주식 일부를 독일 미디어 그룹 레오 키르쉬 (현재 파산함)와 국가에 매각했다

(4)현재 자산

베를루스코니가 가진 주요 회사 미디어셋은 전국 시청률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3개의 텔레비전 채널들과 이탈리아 최고의 광고 홍보 에이전시인 퍼블리탈리아로 구성되어 있다.

베를루스코니는 아르놀도 몬다도리 에디토레라는 이탈리아 최대의 출판사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뉴스 잡지인 파노라마를 만들고 있다. 그는 영화 및 홈비디오 배급 회사(메두사펜타), 보험 및 은행(메디오라넘메디오방카) 등의 다양한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베를루스코니의 동생 파올로 베를루스코니는 강력한 친베를루스코니 성향의 중도 우파 신문인 《일 지올날레》(il Giornale)를 소유하며 경영하고 있다. 일 지올날레는 베를루스코니의 처인 베로니카 라리오 역시 일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 클럽인 AC 밀란을 가지고 있으며, 이 구단을 통해 그는 정치적인 성공 역시 거머쥘 수 있었다.

3.정치인 시절

유럽 정치인 중에서는 몇 안되는 반공주의 신봉자인데다 미국이라크 전쟁 정책에 적극 동조하면서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실정 및 실언에 자신이 대주주인 AC 밀란이 연루된 승부 조작스캔들이 화근이 되어 2006년 총선에서 패해 좌파에 정권을 내주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008년 4월 자신이 이끄는 우파 연합이 압승을 거두어 2008년 5월 이탈리아 최초로 3번째 총리로 임무를 수행 중이다.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부패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총리로 다시 복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텔레비전 방송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를루스코니는 지상파 방송과 신문, 인터넷 등 자신이 소유한 막강한 미디어 매체들의 보호막 속에서 이탈리아인들이 보고, 읽고, 생각하는 것까지 조종한다는 소리마저 듣고 있다

4.베를루스코니의 언론장악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적 성공의 기반은 '언론장악’에 있다. 그는 방송을 정치에 이용한 이탈리아 최초의 정치인으로 거론된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민영방송사 미디어셋은 2008년 총선에서 ‘총리 만들기’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미디어셋은 두 가지 사회적 이슈를 집중 보도했는데, 첫째로 집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보도로 ‘불안감’을 조성해 보수의 표심을 흡수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탈리아 좌파의 텃밭인 남부 농업지역의 표를 분산시키기는 이슈들을 제기했다. 세계 3대 미항인 나폴리의 ‘쓰레기대란’과 ‘다이옥신 치즈’문제 등을 집중보도 했다. 좌파의 텃밭은 흔들렸다. '이탈리아를 쓰레기처럼 망친 좌파 정권'에 등을 돌리게 만든 것이다. 자신이 소유한 민영방송을 이용한 정권재창출! 이것이 '최초의 3선 총리 탄생'의 비결이다.

2004년 이전까지 이탈리아의 방송시장은 공영방송 RAI가 45%, 베를루스코니 소유 3개 민영채널이 44% 점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영방송 장악을 위해 베를루스코니는 RAI 이사의 2/3을 정부 및 여당이 선임하도록 규정한 2004년 '가스피리법'을 추진하여, 방송의 여론기능을 독점 및 통제하고자 한다.

수상이 된 베를루스코니는 가스피리법에 근거해 RAI를 장악함으로써 전체 방송시장의 90%를 점유하게 되었으며, 이후 보다 더 완벽한 여론시장 지배를 위해 방송사업자가 점유율에 상관없이 신문사를 인수할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을 추진해 관철시켰다.

이 법 개정에 대해 이탈리아 우파 연합은 ‘언론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언론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한다’며 지지를 표명했다.

이탈리아는 새로운 뉴스보도 방침이 탄생했다. 이른바 ‘샌드위치 뉴스’를 들을수있는데, 정치적 공방이 큰 사안에 대해 ‘정부-야당-여당’ 순으로 입장을 듣는 것이다. 야당의 입장도 방영되기에 얼핏 공정한 보도일 듯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시청자들은 ‘마지막 입장’을 옳게 느끼기 마련이다. 시청자들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공정히 보도되지만 늘상 정부가 일방적으로 승리할 뿐이다. 정부 권력에게 ‘사유화’된 방송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노동자의 시위’를 생중계한다. 2003년 베를루스코니는 이라크에 3천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반전여론이 거세지면서 로마에 300만명이 운집했다. 공영방송 RAI가 생중계 ‘반전시위’ 방송에 나설 차례다. 하지만, RAI의 생중계 방송차량의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총리의 측근들로 구성된 경영진이 기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생방송을 중단하기로 결정했기때문이다. 국민의 여론을 전달해야 할 공영방송의 '카메라출동'은 ‘베를루스코니 산성’에 막혀 버렸다

5.형사 재판 및 혐의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마피아 공모, 위증, 세금 포탈, 경찰과 법관에 대한 뇌물 및 부패 등 화려한 형사 재판의 전적과 혐의들을 가지고 있다.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재판에 12번이나 섰다.

하나를 제외한 모든 재판에서 베를루스코니는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재판 절차가 중지되거나, 베를루스코니 정부가 제안한 개정안에 의해 법이 바뀌어 1심 또는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베를루스코니는 "이것은 명백한 법적 학살이지만, 나는 여기에 저항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나의 저항과 희생이 이탈리아인들에게 더 공정하고 효율적인 사법 시스템을 만들어줄 것이기에 더욱 자랑스럽다."라고 주장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최고의 변호사들을 쓸 수 있었다.

이탈리아 사법 시스템은 공소시효가 재판 중에도 계속 계산되는 것을 허용한다. 따라서 베를루스코니가 고용한 변호사들의 지연전략은 여러 경우에 혐의를 무효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베를루스코니의 동생 파올로를 비롯한 몇몇 베를루스코니의 측근들은 관련된 범죄에서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이탈리아 우파도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정부로 나아가야 합니다

정치는 기업이 아닙니다

정치는 국민의 자유와 생존을 존중해야 하지만 기업은 해당기업의 근로자 자유와 생존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는 돈이 아닌 명예(권위)를 존중하지만 기업은 돈벌이와 사회공헌입니다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개인의 사유재산과 영리추구, 자유시장등을 존중하면서 국민의 자유권과 생존권을  존중하고 세계 각국 자유와 생존권을 보호하는 것이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정부입니다

개인의 사유재산이나 영리추구, 자유시장경쟁원리등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나 개인의 자유권과 생존권을 무시하는 국가사회주의 노선은 독재정치나 전체주의 정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