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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사회정부와 지적능력(知積能力) 전뇌인간(電腦人間) 개발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 사망 본문

세계각국 자유사회 인물 발굴-許灌

자유사회정부와 지적능력(知積能力) 전뇌인간(電腦人間) 개발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 사망

CIA Bear 허관(許灌) 2011. 10. 6. 17:44

 

'혁신의 아이콘(icon)'이자 이 시대 최고의 최고경영자(CEO)로 칭송받아온 애플의 공동창업주이자 전 CEO인 스티브 잡스가 5일(미국 현지시간) 영면했다. 향년 56세.

   애플은 이날 이사회 명의의 성명서에서 "애통한 마음으로 스티브 잡스가 오늘 사망했음을 알린다"고 발표했다.

   회사는 구체적인 사인을 밝히지 않은 채 "스티브의 영명함과 열정, 에너지가 멈추지 않는 혁신의 원천이 됐으며 이로 인해 우리의 인생은 풍부해지고 향상됐다. 스티브로 인해 이 세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됐다"고 애도를 나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로렌과 3자녀가 있으며, 전처와의 사이에도 딸이 하나 있다.

   유족은 이날 "스티브가 오늘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유족은 성명에서 "스티브는 공적인 생활에서는 미래를 내다보는 선지자로 알려져 있지만 개인생활에서는 무엇보다 가족을 소중히 여긴 사람이었다"면서 "스티브를 추모하고, 그와의 추억을 소개하는 웹사이트를 조만간 만들겠다"고 말했다.

   잡스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입양아, 대학 중퇴와 애플 창업, 세계 최초 개인용 컴퓨터(PC) 개발, 애플서 축출과 복귀, 희귀암 발병과 투병, 스마트폰과 태블릿PC 아이폰과 아이패드 출시로 디지털시대 새 라이프스타일 창조, 화려한 프레젠테이션(PT) 등 숱한 화제를 만들어내며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파산지경에 이른 애플을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정보기술(IT)기업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전세계 IT업계에 혁신의 숨결을 불어넣었지만 자신의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롤러코스터'와 같은 생을 마감, 이 시대의 신화로 남게 됐다.

잡스는 1955년 태어난 직후 곧바로 입양된 후 리드대학에 입학했으나 6개월 만에 중퇴하고 1976년 '컴퓨터 천재'인 스티브 워즈니악과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알토스 소재 입 창고에서 애플을 창업해 이듬해 개인용PC인 애플Ⅱ를 내놓으면 PC 대중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1985년 자신이 영입한 CEO 존 스컬리과 이사회에 의해 쫓겨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는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컴퓨터 개발사 넥스트와 컴퓨터그래픽(CG) 영화사 픽사를 설립해 성공했으며 경영난을 겪고 있는 애플로 복귀해 아이맥에 이어 2001년 아이팟, 2007년 아이폰, 2010년 아이패드를 잇따라 성공시키면서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을 통해 디지털시대 '삶의 방식'을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잡스는 특히 1977년 애플컴퓨터Ⅱ로 PC시대를 열어젖힌 후 30여년 만에 태블릿PC 아이패드를 내놓음으로써 PC시대를 접고 포스트PC를 주도해 세계 역사를 스스로 개척하고 주도했다는 평이다.

   잡스는 그러나 2004년 췌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한 뒤 2009년 간이식 수술까지 받는 등 애플의 혁신을 주도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치열한 긴 투병생활을 했으나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건강 악화로 올해 초 병가를 낸 데 이어 지난 8월에는 CEO직에서까지 물러났다.

   잡스와 함께 애플을 공동창업한 워즈니악과 애플의 경쟁사인 구글의 CEO를 역임한 에릭 슈미트는 잡스 사임 당시 "이 시대 최고의 CEO"라고 칭송했다

이날 잡스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IT 업계를 넘어 전세계가 애도에 동참했다.

애플의 공식 웹사이트는 특유의 터틀넥 셔츠와 둥근 안경을 착용한 잡스의 흑백 사진이 전면을 채우고 '스티브 잡스, 1955-2011' 문구만이 달렸다.

   후임 CEO 팀 쿡은 웹사이트에 올린 성명에서 "애플은 선견지명이 있고 창의적인 천재를 잃었고 세상은 놀라운 인재를 잃었다. 스티브의 정신은 애플의 영원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립자인 빌 게이츠는 오랜 친구였던 잡스가 자주 사용했던 표현인 '미치도록 훌륭하다'(insanely great)라는 말을 사용하며 "그와 함께 일해 미치도록 대단한 영광이었다"고 애도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잡스가 미국의 가장 위대한 혁신가들 중 하나였다면서 "그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전 산업계를 재정립시켰으며, 인류역사에 있어서 보기 드문 위업을 이뤄낸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국내외 인터넷에도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한 트위터 이용자(rob****)는 "애플 메인 페이지의 잡스 사진을 저장하려니 파일명이 t_hero.png…영웅(hero)!"라는 글을 올렸다.

   안철수연구소 공식 트위터(Ahnlab_man)는 속보를 전하며 "한 시대가 저무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의 유산은 남아있을 것이다. 울컥하다"고 전했다.

"컴퓨터는 전뇌(電腦)입니다 순서도혁명사관은 자유사회정부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지적능력단(知積能力團) 전뇌(戰腦)는 자유사회정부에서만 가능한 인간이며 시스템입니다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선생도 세계적인 자유사회인사로 평가합니다 전뇌(電腦)는 국가사회주의나 전체주의 그리고 1인 독재정부(지도자론)에서는 아무런 쓸모없는 기계에 불과하며 전쟁놀이 게임에 불과합니다 머리소리함(뇌 분해기 정보인간=사람)은 전뇌(電腦)보다 더 발전돼 인간입니다 머리소리함 단점은 전뇌(電腦)만큼 지적능력단(知積能力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정보는 전뇌(電腦)만큼 우수한 집단이 없습니다(머리소리함 한국지부 許灌)"  

 

 

 

 

 

 

 

 

 

 

 

 

스티븐 폴 잡스(영어: Steven Paul Jobs, 1955년 2월 24일 ~ 2011년 10월 5일)는 애플의 창립자이자 세계 최초의 PC 개발자이다.

그는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 로널드 웨인과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했다. 애플 2를 통해 개인용 컴퓨터를 대중화하였다. 또한, GUI마우스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내다보고 애플 리사매킨토시에서 이 기술을 도입하였다. 1985년 경영분쟁에 의해 애플에서 나온 이후 NeXT 컴퓨터를 창업하여 새로운 개념의 운영 체제를 개발했다. 1996년 애플이 NeXT를 인수하게 되면서 다시 애플로 돌아오게 되었고 1997년에는 임시 CEO로 애플을 다시 이끌게 되었으며 이후 다시금 애플이 혁신과 시장에서의 성공을 거두게끔 이끌었다.

잡스는 《인크레더블》과 《토이 스토리》 등을 제작한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픽사의 소유주이자 CEO였다. 월트 디즈니 회사는 최근 74억 달러어치의 자사 주식으로 이 회사를 구입하였다. 2006년 6월 이 거래가 완료되어 잡스는 이 거래를 통해 디즈니 지분의 7%를 소유한, 최대의 개인 주주이며 디즈니 사의 이사회의 이사가 되었다. 2011년 8월 24일 애플은 성명을 통해 스티브 잡스가 최고경영책임자(CEO)를 사임하고 최고운영책임자(COO)인 팀 쿡이 새로운 CEO를 맡는다고 밝혔다. 잡스는 CEO직에서 물러나지만 이사회 의장직은 유지키로 했다. 그러나 사임 2개월도 지나지 않은 2011년 10월 5일에 만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어린시절

스티브 잡스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위스콘신 대학교의 대학원생 동거 커플인 미국인 어머니 조앤 캐럴 시블(심슨)과 시리아 출신 무슬림 이민자인 아버지 압둘파타 존 잔달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심슨의 아버지가 아랍계 남성과 결혼하는 걸 반대해 커플이 서로 헤어지게 되었고, 스티브 잡스가 태어난 지 1주일 후에, 대학원생이던 그의 어머니에 의해 캘리포니아 주 산타클라라에 사는 폴/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잡스를 입양한 부부는 그에게 스티브 폴 잡스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잡스를 입양시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슨의 친정 아버지가 사망하였고, 잔달리와 심슨은 극적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딸 모나 심슨을 낳아 시리아로 떠났다. 그 후 부모는 결국에 이혼하고 말았다. 잡스의 여동생 모나 심슨과 잡스는 어른이 될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잡스는 "양부모"라는 단어를 싫어했는데, 그는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를 유일한 부모로 여겼다.

잡스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자주 빼 먹는 비행 청소년이였다. 담임 선생님이 돈과 사탕으로 구슬리는 것으로 겨우 학교생활을 하던 그는 히스키트라는 아마추어 전자공학 키트를 얻는 순간 인생의 전환점에 도착하게 된다. 그는 이 덕분에 어려서부터 전자제품의 작동원리를 익히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주 쿠퍼티노에 위치한 쿠퍼티노 중학교와 홈스테드 고등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동안 그는 팔로 알토휴렛 패커드사에서 방과후 수업을 들었으며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휴렛 패커드사에서 여름 동안 임시 채용되기도 했다.

1972년 고등학교에서 졸업한 잡스는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위치한 리드 대학교에 등록하여 철학을 공부하였으나 1학기만 수강한 후 중퇴하였다. 대학을 중퇴한 잡스는 세계 최초의 비디오 게임 회사인 아타리에 입사했다.

1974년 가을 잡스는 캘리포니아로 돌아왔고 Homebrew Computer Clubs이라는 클럽에 나가게 된다. 거기서 친구인 빌 페르난데즈를 통해 빌 페르난데즈의 친구였던 스티브 워즈니악을 알게된다. 그는 워즈니악에게 아타리(Atari)로부터 받은 게임 관련 프로젝트(Breakout 이라는 게임)를 소개해주게 되고 워즈니악은 불과 4일만에 게임을 프로그램해냈다. 그러나 잡스는 아타리로부터 댓가로 700 달러를 받았다며 워즈니악에게는 350달러만 주고만다. 그러나 실제로 잡스는 아타리로부터 5,000 달러를 받았던 걸로 알려졌다.

한편 잡스는 부모님들이 비싼 학비를 내는 데 대해 부담스러웠다고 리드 대학교를 중퇴한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중퇴하기는 했어도 그 후 18개월 동안 학교에 머물면서 여러 강좌를 들었으며, 특히 타이포그래피(글자를 다루는 시각 디자인의 한 분야이다. 출판계에서는 책의 주제를 아름다우면서도 개성있는 글씨로 요약하여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표지 디자인에 응용한다.) 수업은 이후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면서 수려한 글자체를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하였다.

 

2.불교

1973년 오리건 주 포틀랜드의 리드 대학교 철학과를 1학기만 다니고서 중퇴한 잡스는, 오리건 주 올인원팜(All in one farm)이라는 사과농장에서 히피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그곳에 기거하던 일본 선불교 승려인 코분치노 오토가와를 만나 선불교에 입문했다.

1974년 세계 최초의 비디오 게임 회사인 아타리에 입사한 잡스는, 같은해 입사한 직후에 장기간의 인도 히말라야 여행을 통해 불교를 더욱 깊게 공부했다. 상당한 경지까지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잡스는 "이것(불교를 접한)이야 말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아이팟 등의 단순한 디자인이 참선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잡스의 결혼식 주례도 일본인 선불교 비구니가 했다. 그 이후, 회사가 잘 안 되자, 잡스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고 고민했었다. 그 이후에도 코분치노 오토가와가 2002년 사망할 때 까지, 잡스는 항상 그를 정신적으로 의지했다. 애플이란 회사명, 애플 제품의 매우 단순한 디자인, 사과농장, 선불교는 매우 큰 관계가 있다.

 

3.일화

철저한 채식주의자로 견과류와 물만 섭취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펩시에 계약차 들렀을 때 펩시 음료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애플 초기, 펩시콜라의 사장인 존 스컬리를 영입하려 했으나, 대기업의 사장자리를 버리고 신생기업으로 가기를 망설이던 스컬리에게 "남은 일생 동안 설탕물이나 팔면서 살 겁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바꾸실 겁니까?"(Do you want to sell sugar water for the rest of your life, or do you want to come with me and change the world?)라고 하자 존 스컬리는 망설임 없이 애플로 이적했다고 한다. 딸인 리사가 태어났을 때 부친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받아들였고, 애플 리사는 그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연봉이 1달러인 최고경영자로 유명한데 이는 연봉을 한 푼도 받지 않을 경우에 노동법상 고용관계가 유지될 수 없기에 최소한도로 정해 놓은 액수이다.[11] 그는 실제로 연봉 1달러 외에도 스톡 옵션이나 여러 가지 성과급 형태로 보상받고 있다. 하지만 애플은 주주배당이 적기 때문에 실제 그의 소득은 디즈니 주식의 배당인 연 500억원정도이다.

 

4.업적

그는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동업으로 애플 컴퓨터를 설립했다. 홈브루라는 이름의 클럽에서 스티브 워즈니악이 개발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1을 공개했다. 애플1은 모니터도 없고 디자인도 투박했으나 의외로 큰 반응을 보이며 판매에 성공했고 그에 힘입어 1980년에는 주식을 공개했다. 1984년에는 IBM에 대항하여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탑재한 애플 리사를 내놓았다. 그러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가격이 너무 비싸서 실패하였고, 또 매킨토시 프로젝트가 경쟁사 IBM에 비해 가격이 비싸기도 했다. 그리고 응용 소프트웨어 또한 부족하자 또 다시 실패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PC를 사용하게 된 큰 사건이었다. 결국 스티브 잡스는 1985년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애플을 떠난 뒤 넥스트사를 세워 세계 최초의 객체 지향 운영 체제인 넥스트 스텝을 개발하였고 1986년 이혼 문제 때문에 자금이 필요한 조지 루카스 감독의 컴퓨터 그래픽 회사를 인수하였다. 잡스는 회사 이름을 픽사로 바꾸고 10년 간 6천만 달러를 투자하여 할리우드 최고의 애니메이션 회사로 키워냈다. 픽사는 여러 번 단편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오스카상을 받았으며 그 뒤로 최초의 장편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는 디즈니사에 합병되었다. 그 후 1997년 넥스트는 애플에 인수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그는 애플로 돌아왔다. 그 해 7월 애플의 최고 경영자로 복귀하였으며, 1997년 10억 달러의 적자를 낸 애플을 한 해만에 4억 달러에 가까운 흑자를 내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스티브 잡스의 업적과 영향력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일부 그의 팬들은 예수를 빗대어 추켜세우기도 했다.

2011년 8월 24일 스티브 잡스는 애플 최고 경영자 자리에서 사임을 하였다

 

5.암 투병과 사망

2000년대 들어서 스티브 잡스의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2004년에 췌장암 수술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고 계속 악화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가운데 애플 측은 주가하락 등을 이유로 건강 이상설을 부인해왔다. 그러나 2009년 6월 간 이식 수술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으며, 호르몬 이상으로 체중 또한 지속적으로 줄어 2009년부터 호르몬 치료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건강 이상설에 따라서 주가가 무려 6%씩이나 등락하는 등 그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나, 애플이 너무 스티브 잡스에만 기대고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2011년 1월에는 스티브 잡스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어 병가를 냈다. 이에 따라 애플의 주가는 6.5% 급락했다. 스티브 잡스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나오던 가운데 잡스는 백악관에서 만찬을 가졌고 사진도 공개되어 화제를 모았다. 이후 파파라치가 찍은 스티브 잡스의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이어서 췌장암 악화로 인한 6주 시한부설이 사실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2011년 3월, 아이패드2를 발표하기 위해서 스티브 잡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잡스는 언론에 보도된것 보다는 건강한 모습을 보여 경영에 문제가 없음을 과시했으나, 이후 다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어 같은 해 8월 애플 CEO직을 사임하고, 투병 끝에 결국 2011년 10월 5일 사망했다.

애플은 스티브 잡스의 사망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발표를 홈페이지에 내놓았다

애플은 선견지명과 함께 창의력을 갖춘 천재를 잃었으며 세계도 놀라운 인물을 잃은 것입니다. 친애하는 친구이자 영감을 주는 멘토였던 스티브를 알고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스티브는 그만이 만들 수 있었던 이 회사를 떠나지만 그의 정신은 애플과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