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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故) 김근태선배 민주화는 조국통일이라는 말씀은 우리들이 되새겨야 본문

세계각국 자유사회 인물 발굴-許灌

고 (故) 김근태선배 민주화는 조국통일이라는 말씀은 우리들이 되새겨야

CIA bear 허관(許灌) 2012. 1. 2. 21:16

 

남북한 민주화=남북통일(남북한 민주화는 남북통일이 될 수 있지만 남북전쟁으로 남북통일이 민주화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의 남북관계에서는 북한 민주화가 남북통일의 기반입니다)  

 

허관 님,

 

 

다시 김대중 전 대통령을 그리워한다

-한반도 평화에 관한 신년 인터뷰를 읽고-


실로 오랜만에 들어본 ‘속 깊은 얘기’였다. 벌써 이틀이 지났지만 아직도 새해 첫아침에 느꼈던 가슴 꽉 차오르는 “그” 기분을 잊지 못한다. 새해를 맞아 처음으로 받아든 신문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내 시선을 꼼짝없이 붙든 것은 ‘남북협력에 힘 쏟을수록 핵 해결에 보탬이 된다’는 신문 기사였다. 아, 우리에게도 이런 경륜과 폭넓은 시각이 있었지. 새삼스런 자각이 나를 약간 들뜨게 만들었다.

‘핵문제가 해결돼야 남북관계 개선도 가능하다’는 주장이 당연시 되는 요즘, 오히려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 남북관계가 잘돼야 한다’는 주장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냉수 한바가지를 퍼부은 것처럼 시원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아가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에 빚을 지고 있다’며 김정일 위원장에게 서울 답방을 촉구하는 대목에서는 나와 똑같은 생각과 주장을 하고 있어 반가왔다. 마치 오래전에 헤어진 가족을 예기치 못한 시점에 뜻밖에 상봉한 것 같은 살가운 느낌마저 들었다.

또 하나, 이 기사가 정초부터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 것은 ‘용산미군지기 이전’에 대한 사려 깊은 고찰 때문이었다. 솔직히 이 문제는 나 역시 적지 않은 고민을 해왔던 것이다.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했던 문제이다. 그런데-. 이 대담의 주인공은 너무나 분명하게 용산기지가 일본군 사령부가 주둔하던 ‘치욕의 현장’임을 떠올리며 ‘외국 군대 사령부가 수도 한복판에 있는 것은 민족자존을 위해서나 국가 독립성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라고 단언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미간의 합의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문제에 관해서는 일정한 역할을 하고자 해왔다고 은근히 자부해온 나였지만 이토록 깊고 명료한 의견 앞에서는 좋으면서도 얼마간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새해 첫날 아침부터 이토록 설레임을 안겨준 주인공은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마침 그날은 오랜만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기로 한 날이었다. 나는 그날 찾아뵙고, 이날 아침에 받았던 각별한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이렇게 말씀드렸다. “몇년 전 대통령이 되시기 전에 롯데호텔 강연에서 한반도 평화와 민족의 통일에 대한 연설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상황으로 봐서 정치적으로는 다소 부담도 되고 위험하기조차 했습니다. 그 강연은 또 다시 ‘용공세력’으로 중상모략 받고 정치적 공격을 받기에 딱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발언을 과감하게 하신 김대중 총재를 존경합니다라고 했는데 혹시 기억하십니까”라는 취지로 말씀드렸다. “오늘 아침 대담기사를 보면서 그때 그 감동이 되살아났습니다”라고….

세배하려는 분들이 많이 있어 마음이 약간 바쁘고 그래서 충분히 전달되었는지 걱정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의 반응은 간접적이었지만 분명했다. 그래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거기에 저에 대한 큰 덕담도 곁들여 주셨다. 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큰 역할을 해주실 것을 요청하고 싶었다. 북한에 대한 평화특사가 되어 주십사하고 요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는 참았다. 하지만 여기서는 얘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는 스스로 남북문제만큼은 발언하고 협력할 것임을 밝혀왔다. 김 전대통령께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 노무현 대통령은 대미관계에서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다. 우리 입장을 세우기 위해 정말로 고통스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럴 때 한반도 평화에 관한 탁월한 식견과 풍부한 경륜을 갖춘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팔을 걷고 나서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전직 대통령이 획득한 경륜은 나라의 소중한 자산이다. 남아공의 만델라 대통령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수많은 전직 대통령들이 현직 대통령을 도와 평화와 외교 등의 분야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오랜 전통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는 이런 전통이 아직 없다. 그러다보니 전직 대통령이 쌓은 풍부한 경륜이라는 국가적 자산이 빛을 잃고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두분께 말씀드리고 싶다. 이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나갈 때다. 전직 대통령이 획득한 풍부한 경륜은 소중한 국가자산이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 특히 7천5백만 민족의 안전과 평화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절실한 것이 아닌가?

새해를 맞아 작은 소망 하나를 품어본다. 머지않은 장래에 그런 모습을 꼭 보고 싶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흉금을 터놓고 말씀을 나누는 모습! 민족의 평화와 외교문제를 놓고 함께 고민하는 전통! 나의 이런 소망이 두분에게 전해져 어떤 분명한 전진이 있기를 정말로 바란다. 뜻있는 여러분이 함께 해주시면 그것은 확실히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나는 예감한다.



2004년 1월 3일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김근태


Thank you for e-mailing President Bush. Your ideas and comments are very
important to him.

Because of the large volume of e-mail received, the President cannot personally
respond to each message. However, the White House staff considers and reports
citizen ideas and concerns.

In addition to President@WhiteHouse.gov, we have developed White House Web
Mail, an automated e-mail response system. Please access
http://www.whitehouse.gov/webmail to submit comments on a specific issue.

Additionally, we welcome you to visit our website for the most up-to-date
information on current events and topics of interest to you.

제목 | 다시 김대중 전 대통령을 그리워한다
보낸날짜 | 2004년 1월 07일 수요일, 오후 18시 56분 53초 +0900
보낸이 | CIA bear 허관 <8032816@hanmail.net>
받는이 | president@Whitehouse.GOV
소속기관 | KTF 진대리점

허관 님,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지냈던 고향과 가족이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저에게는 또한 늘 애정으로 지켜보아주시고 격려해주시는
여러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새로운 때이기도 합니다.

짧은 설, 분주하고 복잡한 고향길이 될 거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마음만큼은 더 없이 풍요롭고 넉넉한 명절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 해 새로운 정치로 여러분을 다시 만나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근태 드림

 

 한국 민주화운동의 큰 별이 졌다.

   30일 별세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민주화운동과 정치개혁에 앞장서며 재야운동과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민주화운동 시절 10여년 간 수배생활을 할 정도로 재야 운동권의 리더로 통했고, 제도정치권 입문 후에는 두 차례 대선후보 경선에서 대의를 위해 중도하차하는 자기희생적 모습을 보였다.

   재야운동권에서 김 고문은 `민주화운동'의 대부다. 그는 1965년 대학 입학 후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다. 1967년 서울대 상대 학생회장 때 총ㆍ대선 부정선거 항의집회를 하다 제적당해 군대에 강제징집됐다.

   그는 1970년 복학했지만 이듬해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지명수배됐다. 이 때부터 1979년 10ㆍ26 사태 때까지 도피생활을 하면서 `공소외(外) 김근태'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판ㆍ검사들이 법정에서 체포하지 못한 그를 호칭할 때 `공소외 김근태'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김 고문은 1983년 첫 공개적 민주화운동 조직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1985년 투옥될 때까지 두 차례 의장을 맡았다. 그는 이 때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보름 가까이 "죽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여덟 차례 전기고문과 두 차례 물고문을 받았다.

   김 고문은 고문을 받은 시기인 초가을만 되면 매년 한 달 가량 몸살을 앓았다. 말도 어눌해지고 몸동작도 둔해졌다. 고문 후유증이 파킨슨병으로 이어졌다는 시각도 있다.

   당시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두꺼비가 뱀에 잡히면 죽지만 그 뱀도 두꺼비 독에 쏘여 죽고 이후 두꺼비 새끼들이 그 속에서 뱀을 자양분으로 새롭게 성장하듯 자신에 대한 탄압을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한 희생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1987년 악몽같은 고문 경험을 `남영동'이라는 책으로 펴냈고, 미국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을 부인 인재근씨와 공동 수상했다. 김 고문은 자신을 고문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씨에게도 역사적 용서를 했다.

   김 고문은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을 하다 또다시 구속돼 1992년까지 투옥생활을 했다.

   김 고문은 1994년 제도권정치로 눈을 돌렸다. 그는 민주자유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결집하는 민주연합정당을 만들기 위해 출범한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또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손잡고 본격적인 정당생활을 시작했다. 1995년 10월 에드워드 케네디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김 고문의 사면복권을 요청해 김 전 대통령이 이를 수용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 출마해 2004년 17대 총선까지 내리 3선 배지를 달았다.

   원칙론을 강조하면서도 온화하고 신뢰감을 주는 성품 탓에 그는 신사다운 국회의원을 선정하는 백봉신사상에 7년 연속 뽑혔고 그 중 4번을 대상을 수상했다.

   반면 그는 동교동계 등 구여권 주류세력에 밀려 `재야의 리더'라는 무게에 걸맞은 당직을 맡지 못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때는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양심고백을 하며 중도에 경선 중단을 선언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고 2004년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한 이후 정동영 의원과 함께 열린우리당의 양대 계파 수장으로 자리매김했다. 재야 및 486 운동권 출신 의원들을 중심으로 `GT계'라는 세를 형성했다.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입각 경험을 쌓았고, 2006년 5ㆍ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스스로 독배를 들겠다"며 당의장을 맡아 당을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참여정부 후반기로 갈수록 정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심해지면서 열린우리당을 되살리기에는 버거웠다.

   2007년 열린우리당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경선 때 그는 또다시 기득권을 초개처럼 버렸다. 범여권 대통합과 오픈 프라이머리(국민경선) 실현이라는 대의를 위해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김 고문은 2008년 18대 총선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원외에서 민주진보 대연합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내년 총ㆍ대선에서 민주통합당이 승리하려면 진보정당과 시민사회 등 모든 세력이 참여하는 `반(反)보수 대연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고문은 지난달말 건강이 악화해 끝내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한 측근은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민주진보 대연합을 이루겠다는 의지까지 밝혔다"고 전했다.

   그는 입원 치료 중인 지난 8일 딸의 이틀 후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할 상황에 처하자 억측을 피하기 위해 파킨슨병 투병 사실까지 공개하며 재활 의지를 다졌지만 결국 합병증이 겹쳐 세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날 가족과 민주통합당의 이인영 최고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했다.

   jbryoo@yna.co.kr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