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Pacific Region Intelligence Center
수치 여사 언론에 첫 모습.."시종 미소" 본문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여사(63)가 지난 14일 미국인 잠입사건으로 체포된 뒤 공판정에서 처음으로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공판 셋째 날인 20일 수치 여사는 시종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으나 강인한 모습으로 미얀마의 옛 수도 양곤에 있는 인세인 감옥에서 공판을 취재하고 참관하는 보도진과 외교관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미얀마 군정 당국은 이례적으로 이날 수치 여사 공판에 대한 국내외 언론의 취재와 자국 주재 외교관들의 참관을 허용했다.
핑크와 적갈색의 전통 미얀마 의상 차림의 수치 여사는 가혹한 연금생활과 저혈압 등 지병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모습이었다고 공판을 취재한 외신들이 전했다.
수치 여사는 변호사를 통해 외교관과 보도진을 개별적으로 만나게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여사는 "(공판에) 참석해 나를 지원해준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며 "한분 한분을 만나뵐 수는 없지만 좋은 날 여러분 모두를 다시 뵙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외교관들이 한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답변하는 순간, 여경들이 더 이상 대화를 허용하지 않고 수치 여사를 데리고 갔다. 여사는 태국, 싱가포르, 러시아 외교관들을 별도로 만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수치 여사의 모습이 공개된 것은 가택연금 규정 위반으로 지난 14일 체포, 구금된 뒤 이번이 처음이다.
마크 캐닝 미얀마 주재 영국대사는 "수치 여사는 차분하고 당당했으며 힘있는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2천여명의 정치범이 수용되어 있는 악명높은 인세인 감옥 안에 마련된 특별 재판정에서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수치 여사의 왼쪽에는 자택에 잠입했던 존 윌리엄 예토(53)가, 오른쪽에는 여사의 두 하녀가 자리했다. 피고 앞에는 두 명의 판사가 자리했고 한 쪽에는 속기사가 배치돼 있었다.
이날 공판에서는 검찰 측 증인인 경찰의 진술이 있었으며, 예토는 때때로 변호사와 상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토는 지난 3일 양곤 대학로의 호수변에 있는 수치 여사의 자택에 헤엄쳐서 잠입, 이틀 동안 머문 뒤 5일 새벽 몰래 빠져나오다 보안군에 체포됐다. 군정은 이 사건과 관련, 지난 14일 수치 여사를 가택연금 규정 위반으로 두 하녀와 함께 체포해 인세인 감옥으로 이송했다.
수치 여사와 두 하녀, 예토는 유죄가 인정될 경우 최고 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을 처지에 놓였다.
sungok@yna.co.kr
아버지 아웅산 장군과 어머니 킨 치여사 그리고 두살 수치여사, 두 명의 수치 오빠들(Aung San Suu Kyi is Burma's opposition heroine, seen here aged two, with her parents and two elder brothers in 1947.)
아웅 산 수치 [Aung San Suu Kyi]
1945. 6. 19 버마 랑군(지금의 미얀마 양곤) ~.
버마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교한 국가영웅인 아웅 산 장군과 탁월한 외교관인 킨 치의 딸로서, 199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머지않아 독립될 버마의 실질적인 총리가 될 아웅 산 장군이 암살당했을 때 아웅 산 수치는 두 살이었다. 그녀는 어머니 킨 치가 인도 대사로 임명되기 전인 1960년까지 버마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인도에서 더 공부를 한 후에 그녀는 옥스퍼드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미래의 남편을 만났다. 그녀는 두 명의 아이들이 있으며, 그녀가 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서 버마로 돌아오기 전인 1988년까지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살았다. 버마로 돌아온 그녀는 군부 독재자인 네윈의 잔인하고 동정심이 없는 통치에 대항하는 시위자들을 향한 대량학살을 목격하고 난 후 그의 독재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게 되었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비폭력 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1989년 6월에 군부는 나라 이름을 미얀마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꾸었고, 아웅 산 수치를 가택에 연금하고 독방에 감금했다. 군부는 그녀가 미얀마를 떠나겠다고 약속을 하면 풀어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나라가 다시 민간정부가 되고 정치범들을 풀어 주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녀가 결성하여 새로 만든 당인 민족민주연합(NLD)은 1990년에 선거를 통해 의회 의석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그러나 군부는 그 선거 결과를 무시했다.
During anti-government protests led by Buddhist monks in 2007, Ms Suu Kyi made her first public appearance since 2003, greeting monks outside her house and praying with them.
'Guide Ear&Bird's Eye30 > 미얀마[버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이명박대통령과 미얀마 떼인 세인총리 정상회담 결과 (0) | 2009.06.03 |
---|---|
하버드 인권연구소, 유엔에 버마 인권유린 조사 촉구 (0) | 2009.05.22 |
세계지도자들, 아웅산 수치 투옥 우려 (0) | 2009.05.15 |
미얀마 군사정권, 수지 씨를 기소 (0) | 2009.05.15 |
미얀마, 수지 씨를 연행 (0) | 2009.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