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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이명박대통령과 미얀마 떼인 세인총리 정상회담 결과 본문
이명박 대통령은 6.2(화) 오후 「떼인 세인(Thein Sein)」 미얀마 총리와 제주도 하얏트 호텔에서 양자회담을 갖고, 한·미얀마 실질협력 증진방안, 미얀마 정치발전 등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이 대통령과 떼인 세인 총리는 양국간 상호보완적 경제구조로 인해 경협 잠재력이 큰 만큼, 앞으로 양국간 교역 및 투자가 확대될 수 있도록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특히 이 대통령은 에너지·자원 개발, 발전소 건설 등 분야에 한국기업의 진출이 확대될 수 있도록 총리의 관심과 지원을 요청하였고, 떼인 세인 총리는 한국의 개발경험이 더욱 공유될 수 있도록 한국의 개발협력 지원과 미얀마 근로자들의 한국취업이 증대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떼인 세인 총리가 한국대중문화에 대한 미얀마 내 인기로 인해 한국이 미얀마 국민에게 매우 친숙한 나라가 되었다고 한데 대해, 이 대통령은 문화인적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런 차원에서 미얀마에 대한 장학사업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이 대통령은 미얀마 정부가 민주화 이행과정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민화합 및 실질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국제사회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미얀마 (아시아 국가) [Myanmar, 버마]
공식명칭 : 미얀마연방(Union of Myanmar)
인구 : 47,383,000
면적 : 676,577㎢
수도 : 양곤
정체·의회형태 : 군사정권
국가원수/정부수반 : 국가평화발전위원회 의장/국가평화발전위원회 의장
공식 언어 : 미얀마어
독립년월일 : 1948. 1. 4
화폐단위 : 미얀마차트(Myanmar kyat/K)
국가(國歌) : Gba majay Bma("We shall love Burma for ever")
동남아시아 벵골 만과 안다만 해의 동쪽 해안을 따라 자리잡고 있는 나라.
수도는 양곤이다. 말레이 반도를 따라 내려간 길이 640km의 지협까지 포함해서 남북길이는 약 2,050km이고, 폭이 가장 넓은 곳의 동서길이는 935km 정도이다. 남동쪽으로 타이·라오스, 북동쪽으로 중국, 북서쪽으로 방글라데시 및 인도의 아루나찰프라데시·나갈란드·마니푸르·미조람 등의 여러 주들과 경계를 이룬다. 남부와 남서부의 해안선은 벵골 만, 마르타반 만, 안다만 해와 접해 있다. 면적 676,577㎢, 인구 47,383,000(2006 추계).
1.자연환경
미얀마는 지형상 북부 산악지방, 서부 산악지방, 중부 저지대, 동부의 샨 고원 등 4개 주요지역으로 나뉜다. 북부 산악지방은 미얀마 최북단으로, 중국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이 나라 최고봉 카카보 산(5,881m)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쿠몬 산맥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서부 산악지방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이지만 주요고지대로서, 히말라야 산맥 최동단에서 남쪽으로 뻗으면서 해발 3,000m 높이까지 치솟은 여러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구릉지대를 형성한다. 더 남쪽으로는 인구가 희박하고 삼림이 빽빽한 아라칸 산맥이 자리잡고 있다. 중부 저지대는 아라칸 산맥과 샨 고원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벵골 만을 향해 펼쳐진 아라칸 해안평야와 안다만 해에 접해 있는 좁다란 테나세림 해안평야, 인구밀도가 조밀한 이라와디 강과 시탕 강의 삼각주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4번째 주요지역은 깊이 개석(開析)된 샨 고원으로 미얀마의 가장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부 저지대에서 갑작스레 치솟은 지형으로 단번에 600m까지 치솟은 곳도 있다. 샨 고원의 평균 높이는 900m이고 몇몇 산봉우리들은 2,600m가 넘는다. 남쪽으로 가면서 고원은 테나세림 산맥으로 흡수된다.
미얀마는 산이 매우 많아 경작지가 전체 국토면적의 1/6 정도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1/10 정도만이 관개가 이루어지며 이곳에서 주로 쌀을 재배한다. 국토 어디에도 초지로 이용할 만한 곳이 거의 없으며 국토의 거의 절반이 삼림으로 우거져 있다. 저지대의 자연식생은 강수량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강우량이 2,000㎜가 넘는 지역에서는 상록 열대림이, 삼각주지대에서는 무성한 홍수림 수목들이 자란다. 1,000∼2,000㎜의 강우량을 보이는 지방에는 티크를 포함해 재질이 단단한 몬순림이 풍부하며 강우량이 1,000㎜ 미만인 지역에서는 삼림지들이 점차 관목지로 바뀌어간다. 산악지방에서는 해발 1,000m의 강상(降霜) 한계선 위로 참나무와 소나무 숲이 발견된다. 여러 종류의 새·포유동물·뱀들이 서식하는 우림이 발달해 있어 동물군이 다양하고 풍부하게 나타난다. 코끼리와 호랑이는 멸종 위기에 처해 있으나 여전히 중요한 동물들이다. 샨 고원에는 은·구리·납·아연 광상들이 있으며 테나세림 해안지대에는 텅스텐과 주석의 충적광상, 그밖에 석유 및 천연 가스 등을 비롯해 상업상 개발 가능한 광물자원들이 있다. 북부 산악지방에서는 양질의 비취가 채광된다.
2.국민
미얀마에는 단순한 방언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100개가 넘는 토착어가 있으나 공용어는 미얀마어로서 평야와 산악지방의 주민 모두가 사용한다. 버마라는 공식 이름으로 불렸던 영국 식민지시대(1885∼1948)에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했으나 독립한 후로 영어는 공용어로서의 자격을 잃었다. 그러나 영어의 기초 지식은 각급 학교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고 있으며 1981년에는 영어를 교과 과정에 다시 복귀시켰다. 아시아에서 인구밀도가 희박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서, 기복이 심하고 삼림이 우거진 지방에는 아직도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살고 있을 뿐이다. 촌락은 작은 마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국민의 1/4 미만의 사람들만이 도시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연간 인구증가율은 세계적인 수준에 비하면 다소 높은 편이지만 동남아시아의 수준으로 보면 대략 평균치에 이른다. 비교적 높은 유아 사망률은 1950년대 이후로 상당히 감소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대도시로는 이라와디 강 삼각주에 위치한 양곤과 내륙의 만달레이를 꼽을 수 있다.
(1)주민
ㄱ.버마족 68%
ㄴ.샨족 9%
ㄷ.카렌족 7%
ㄹ.중국계 3%
ㅁ.인도계 2%
ㅂ.몬족 2%
ㅅ.기타 5%
(2)언어
버마어가 공용어이다. 소수민족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며, 약간의 영어도 사용된다.
(3)종교
ㄱ.불교 89%
ㄴ.개신교 3%
미국의 침례교 선교사인 아도니람 저드슨의 영향으로 침례교신자들이 소수부족인 카렌족 중에서 많이 존재한다.
ㄷ.로마 가톨릭 1%
ㄹ.성공회
ㅁ.이슬람교 4%
ㅂ.정령 신앙 1%
ㅅ.기타 신앙 2%
전 국민의 대다수가 불교 신자인 미얀마에서 승려들은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다. 그리고 승려들은 사회적 영향력이 상당히 강력하다.
3.경제
4.정치와 사회
5.역사
1980년대말까지 정부의 부패와 잘못된 관리정책으로 자원이 풍부한 미얀마는 세계에서 매우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오랫동안 쌓여온 대중의 불만이 1987∼88년 광범위한 반(反)정부 폭동으로 터져나왔으나 군의 폭력 진압으로 실패했다. 그후 미얀마사회주의계획당(MSPP)의 1당독재는 폐지되었고, 여러 정당이 속속 등장했다. 1990년 5월 헌법 개정을 위한 총선에 약 90개의 정당이 참여해 야당인 민주국민동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NLD)이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새 의회의 의석을 대부분 차지했지만, 1988년부터 권력을 장악한 군사정부의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는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당선자의 상당수를 투옥시켰다. SLORC가 장악한 국회는 신헌법을 제정했고, NLD의 지도자이며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지와 야당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탄압했다.
바간 왕조 (1044-1287)
1044년, 아노라타 왕에 의해 바간 제국이 건설되었다.
(1)작은 왕국 (1287-1531)
(2) 따웅우 왕조 (1531-1752)
(3)콘바웅 왕조 (1752-1885)
1752년, 알라웅페야 황제에 의해 알라웅페야 제국(콘바웅 왕조)이 건설되었다.
1824년 - 1826년 : 제1차 영국-미얀마 전쟁 : 영국에 패배함으로써 아라칸, 아삼, 마니푸르와 테나네심이 영국령이 되다.
- 1852년 - 1855년 : 제2차 영국-미얀마 전쟁 : 저지미얀마가 영국에 합병되다.
- 1885년 :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 : 고지 미얀마가 영국에 합병되다. 이 때 미얀마는 국가적인 위기를 겪게 되었다.
(4) 식민지 시대 (1886-1948)
당시 독립 제국이었던 미얀마는 1886년 대영 제국에 의해 합병되어 인도의 식민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중 버마는 일본군에 점령되었다가 다시 해방되었다.
- 1937년 : 버마가 인도로부터 분열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다.
- 1942년-1945년 : 일본군 점령기. 이 때 많은 미얀마인이 일본군에 학살당하였다.
- 1947년 2월 12일 : 팡롱 조약에 따라 자치 공화국으로 승격되다.
(5)민주 공화국 (1949-1962)
독립 후, 미얀마는 우 누(U Nu)의 신정권을 수립하였으나 크나큰 정치적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소수 종족들은 아웅산이 약속했던 자치주의 실현을 요구하고 무장 공산주의자들의 공산정권 수립을 주장하는 등 이념과 정파별로 정쟁이 계속되면서 버마연방공화국 건국을 혼란으로 몰고 간다.
대표적인 세력들은 아웅산 등이 결성하고 독립 후 집권여당이 된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AFPFL), 점진적 공산정권 수립을 주장하는 트로츠키류의 적기파 공산주의자들이 결성한 CPB(Communist Party of Burma), 즉각적인 공산정권 수립을 외치던 스탈린의 백기파 BCP(Burmese Communist Party)와 이와 같은 공산당에서 이탈하여 정식 미얀마 연방군에 흡수되지 못한 인민 의용군(PVO), 꺼인족을 대표하는 꺼인 민족 방위군(KNDO)과 샨,몬,꺼친족 등 소수민족의 세력들이 이합집산의 형태로 조직화하거나 세력화 하였다.
우 누 수상은 공산주의자들을 제도권내로 흡수하고 소수종족의 자치를 약속하는 등 폭동을 진정 시키려 하지만 연방 분열 불가를 주장하는 군부로부터 불신을 사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아웅산과 초대 수상이 된 우 누 등 독립 민족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제국주의와 동일시 하며 식민잔재를 철패하고 평등사회 구축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뜻은 같이 하였으나 아웅산은 종교를 배제한 대신 우 누 수상은 ‘불교교리가 바로 사회주의 이론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미얀마인의 가치추구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신앙에 기초한 정신세계이며 그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이며 불교 사회주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54년 우 누 수상은 복지 국가론을 주창하며 그 실현을 위하여 산업 국유화의 전단계로 농지 국유화 등 정책을 펴지만 오히려 경제 위축만 가져오고 실패 하고 만다.
한편 선거 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친여 성향의 상공인과 결탁하고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지도력을 상실하면서 여권이 분열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고 이러한 혼란 상황에 공산당과 꺼인 반군의 제휴로 내전이 확대되면서 결국 1958년 10월 군사령관인 네윈의 위기관리내각에 권력을 넘기고 물러난다.
2년여 동안 위기관리 내각을 맡았던 네윈은 정정을 안정시키고 1960년 공명정대한 선거를 통하여 다시 집권한 우 누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으로 원대 복귀한다. 그러나 우 누는 불교 국가 복지론을 강조하는 정책을 펴 다시 새로운 내분으로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즉 우 누는 불교를 국가의 종교로 하는 불교국교화법 제정을 추진하면서 타 종교는 물론 소수종족별 심한 반발을 사면서 무장봉기를 확산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
기독교, 무슬림, 토속 종교 등 전국적으로 종교적 저항에 부딪치면서 소수종족이 불교국교화법에 반대한다면 자치 연방제를 재고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서 소수종족의 무력 봉기를 부채질 하였다.
양곤 카톨릭 대주교의 종교 자유 보장책과 타종교 박해 방지 대책 없는 법제화 추진은 국민단합에 심대한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1961년 8월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불교국교화가 비불교도 및 소수종족의 심한 반발을 사자 우 누는 제4차 헌법 개정안에 모든 종교의 자유화를 선언해 버리는데 이제는 불교 승려들의 반발을 초래 하였고 반 회교 폭동이 발생했다. 나아가1961년 3월1일 소수종족에 대한 자치권을 의회에서 논의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불교 국교화를 무색케 할 뿐만 아니라 국토의 분할을 용납 할 수 없다는 네윈을 비롯한 군부의 반발에 부딪치면서 마침내 다음날 3월2일 쿠테타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 결과 버마 연방 공화국은 붕괴 되었다.
1983년, 아웅 산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북조선) 공작원들이 한국 대통령및 각료들을 암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방문장소였던 아웅 산의 묘소에 설치한 폭탄이 터져 한국인각료와 미얀마인 다수가 살상된 사건으로, 사건 당시에 한국(남한)측은 미얀마가 같은 공산주의 국가라는 이유로 미얀마당국이 연관된 것으로 오해하였으나, 사건을 조사한 미얀마정부가 북한(북조선) 외교관을 추방하고 국교를 단절함으로서 오해는 해소되었다. 아웅 산은 미얀마 독립의 영웅으로 대단한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기에, 미얀마에서는 북한을 대대적으로 규탄하는 움직임도 일어나기도 하였다. 후일 네윈 장군은 한국(남한)에 답방하였다.
(6)이후 (1962-현재)
- 1988년, 군부는 경제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민중시위에 대한 군부의 진압을 했고 1988년 8월 8일, 군부가 시위자들에게 화기 발사했는데, 일명 "8888 시위"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 운동의 결과로 선거가 허가되었다.
- 1990년 : 자유 선거가 행해지나 군부에 의해 무효화되다.
- 1991년 : 아웅 산 수 치의 노벨 평화상 수상.
- 2005년 : 11월 7일 핀마나를 행정 수도로 하였다.
- 2006년 : 미얀마 정부의 공식 수도를 양곤(영어 표기로는 랑군)에서 네피도로 이전하였다.
- 2007년 : 2007년 미얀마 반정부 시위
지금까지도 미얀마는 군부가 철권 통치를 하고 있는 상태이다. 군사 정권의 물가 인상으로 국민들과 승려 모두가 군정에 항거하고 있다. 승려들은 1988년에 일어난 8888 시위를 주도한 바 있다
6.한국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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