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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갑 국회의원 예비 출마자 허원제(57, 이명박후보 선대위 방송특보) 본문

-미국 언론-/아시아뉴스

부산진갑 국회의원 예비 출마자 허원제(57, 이명박후보 선대위 방송특보)

CIA Bear 허관(許灌) 2008. 2. 5. 09:34

http://www.benhur.kr/ 

부산진갑 한나라당 국회의원 예비 출마자  허원제(57세)는 누구인가

2006년 SBS이사회 사무국장과 SBS이사 역임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후보 선대위 방송특보, 2008년 제17대 대통령인수위원회 자문위원.........

프로필

    이름 : 허원제(Hur Won Je)
    생년월일 : 1951년 9월 27일
    출생지 : 부산광역시
    직업 : 정당인
    소속 : 한나라당
    병역 : 필(실역필 보충역)


    학력

    1964년

    부산진초등학교 졸업

    1967년

    부산 중학교 졸업

    1970년

    부산 고등학교 졸업

    1974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1978년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2002년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수료

    경력

    1978년

    국제신문기자

    1980년

    부산일보 기자

    1981년

    경향신문 기자

    1981년

    KBS 기자

    1991-2007년

    SBS 기자, 독일특파원, 사회부장, 정치부장, 비서실장, 이사

    2007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후보 특보 겸 방송단장

    2007년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방송특보

    2008년

    제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자문위원

     

 

 

지나온길

허원제는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년 9월 27일에 서면에서 1녀 4남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집안은 할아버지가 경남 고성에 사시다가 일제강점기에 저의 아버지를 데리고 서면에 이주를 하면서 부산생활이 시작됐습니다. 80년 전 일입니다. 저의 아버지도 부산진 초등학교 졸업생이고 저의 가족은 모두 부산진 초등학교 동창생입니다. 일제 말기에 부산공전에서 교편을 잡았던 아버지는 학생이 아버지께 보낸 편지내용 때문에 옥고를 치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수업 중 조선에 대한 애국심을 고취시킨 것이 문제가 됐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사상범에 대해 극형을 처하던 때라 일본패망이 일주일만 늦었더라도 아버지는 처형이 됐을 것이라고 어머니는 불안했던 당시를 회고한답니다. 그랬다면 저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겠죠. 그래서 광복절은 제게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부산진초등학교 5학년 때 저는 처음 생긴 야구부에 들어갔습니다. 캐처에다 4번 타자였으니 꽤나 잘 했던 것 같습니다. 6학년 때 어머니가 중학교 진학을 위해 야구선수생활을 못하게 하는 바람에 아쉽지만 중도하차했습니다. 부산중학생 시절에는 음악선생님의 영향으로 서양의 클래식음악에 심취했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부산고등학교 재학 때는 합창단에 스스로 가입했습니다. 그 외에도 도서반과 물리반, 농촌봉사단에 가입해 과외활동에 열중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부산시내 남녀고교생들의 모임인 노엘성가단원으로서의 생활은 잊을 수 없는 내 인생의 일부입니다. 2학년 때 9기 회장직을 맡은 저는 연습이나 발표회 준비를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고교생 신분으로 노총각 간사와 함께 교회를 순방하며 찬조금을 지원받으러 다녔고 추운겨울 음악발표회를 마치고 종이쓰레기로 가득한 부산 동주여상 강당을 간사와 단둘이 대걸레로 밤늦게 까지 청소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통행금지 시간을 넘겨 인근의 연습장인 동광교회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난로를 사이에 두고 간사와 저가 이불도 없이 새우처럼 구부려 밤새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금도 노엘성가단의 동기와 선후배들과는 자주 연락을 하며 남달리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학창 시절이 남겨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입니다.

  저의 대학시절은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대학 진학 때 학과 선택 문제를 놓고 아버지와 대립하는 바람에 생전 처음으로 가출했습니다. 신문광고를 통해 초등학교 5학년생 집에서 입주과외를 하며 보름동안 가출이 계속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나름대로 강단과 고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의대, 저는 물리학과를 고집해 문제가 발단됐는데 결국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대로 담임선생님의 지원사격으로 서울대 물리학과를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2학년이 되면서 인문, 사회, 자연과학이 혼재하는 문리대 생활은 나의 인생에 큰 의식의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연일 계속되는 데모와 최루가스 속에 그동안 자연과학의 중요성에만 무게를 두고 있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사회문제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고 그 것이 내 인생에 일대 전기가 됐습니다.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군 복무를 마치고 저는 부족한 사회과학에 대한 지식을 보충하고자 정치학과로 학사 편입했습니다. 특히 그리스시대의 정치 철학에 몰두했고 졸업논문도 플라톤을 비판한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 대해 분석함으로써 전체주의와 합리주의가 지닌 비민주적, 논리적 맹점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물리학과 재학 시에는 송우회라는 모임의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임은 4.19혁명당시 유일하게 희생된 문리대 수학과의  김치호 선배의 숭고한 얼을 기리기 위해 결성된 모임입니다. 당시 혼탁했던 대학사회에 쓰레기 줍기와 커닝 안하기 등 모범적인 학생상을 구현하자는 것이 이 모임의 소박한 성격이었습니다. 수학과에서 출발해 문리대로 확산됐고 저희가 재학할 때는 숙명여대 약대에도 같은 자매조직이 있었습니다. 김치호 선배는 광화문 앞 시위에서 총탄을 맞고 병원으로 실려 갔으나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보다 다른 환자를 먼저 돌보라며 자신은 결국 목숨을 잃은 의인이었습니다. 김 선배의 얼을 기린 서울 문리대의 4.19탑은 이제 관악산으로 옮겨져 뜻있는 후배들의 사표가 되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초중고 1년 후배의 초빙으로 중화학기기를 제작하는 부산 망미동에 소재한 유망 중소기업에 일시 생산책임자로 몸을 담았다가 곧바로 부산의 국제신문 23기 수습기자로 입사해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초 기자를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자 생활을 통해 언론의 중요성을 절감하면서 사회 공기로서의 기자직에 매료 되었습니다.

  80년 5월 신군부에 저항해 국제신문사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제작거부를 시작했을 때 저를 포함한 젊은 기자들이 앞장을 섰습니다. 차장급이상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침묵의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8월에는 언론인 해직사태로 30여명이 희생되고 11월30일 언론 통폐합이 이루어져 국제신문은 부산일보에 흡수됐습니다. 부산일보 근무 당시 신문 지면이 8면에서 12면으로 증면되자 중앙지들이 부산일보 기자들에게 스카우트 손길을 뻗쳤고, 저는 부산고 선배가 있던 경향신문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경력기자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고 이것이 KBS 수습기자로 재출발하는 동기가 됐습니다.   

  81년 가을 KBS 공채9기생으로 입사함으로서 저의 방송기자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방송기자를 하면서 국내외 수많은 사건을 접했고 긴박한 사전현장에서 뉴스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산가족 찾기와 대도사건, 한강대홍수, 가스폭발사건등 사건사고의 연속이었습니다. 91년 민영방송인 SBS가 생기면서 저는 10년간의 KBS생활을 정리하고 SBS로 이적했습니다. 92년 대선을 비롯해 4차례 선거방송을 직접 진두지휘했고 독일 특파원 근무 시에는 북미 핵협상과 보스니아 내전, 월드컵 유치전, 통일독일의 후유증 등을 집중 취재해 한국문제를 국제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눈을 길렀습니다.

  귀국 뒤 전국부장과 기동취재부장, 사회부장을 거쳐 국제부장 근무 시 9.11 테러와 아프간 공습이 발발해 두 달 간을 거의 회사에서 지내는 고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치열한 취재경쟁에서 타사를 앞서는 기획과 아이디어로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2002년 대선을 정치부장으로 치르면서 방송기자로서는 취재와 제작, 데스킹 능력등 선거방송의 핵심 역량을 두루 갖추는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특히 2004년부터 3년간 비서실장, 이사를 지내면서 디지털시대 방송 산업의 미래와 정책과제 등에 대해 실무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지식을 쌓았습니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회장이나 파월 전 미국 연방통신위원회 의장, 존스턴 OECD 사무총장 등 세계적인 인물들을 만나 폭넓은 의견을 나눔으로서 고령화, 실업, 빈곤, 에너지 고갈, 방통 융합 등 세계적인 이슈들에 대한 교류와 이해의 폭을 넓히는 좋은 계기가 됐습니다.

  한나라당 경선을 앞둔 지난해 2월 저는 SBS 이사직을 사임했습니다. 또다시 무능한 386운동권 세력에게 정권을 맡겨서는 안 되겠다는 절박한 마음에서 작은 힘이지만 한나라당에 더해야겠다는 심정으로 30년에 가까운 기자생활을 청산했습니다. 언론인이 정치인으로 변신하는데 따른 부작용과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SBS를 떠난 뒤 두 달 동안은 수면 아래로 사라져 오로지 아내와 함께 보냈습니다.

  4월 들어 특정캠프에 몸을 담았습니다. 정치부장 시절에 인연이 있던 박근혜 후보를 선택했습니다. 원칙과 정도를 걸어온 모습이 좋았습니다. 방송단장으로 TV토론을 준비하는데 일익을 맡았습니다. 결과는 아쉬운 패배. 그러나 아름다운 승복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박근혜 후보는 큰 정치인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정권 교체를 위한 저의 행보는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토론담당 방송특보로 참여하면서 계속됐습니다. 정치부 기자출신으로서 저는 이명박 후보와 그 진영의 속했던 많은 국회의원들과도 평소 잘 알고 지냈었습니다. 경선 과정에서 방송토론팀이 취약했다며 본선에서 토론준비를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이후보 측으로부터 받았습니다. 평소 이 후보와도 친분이 있었던 저는 정권교체를 위해 흔쾌히 동참했습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 후보의 경영능력과 미래에 대한 비전 그리고 강한 추진력에 대해 동시대를 살아온 한 인생후배로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권교체만이 우리 국가와 국민의 살길인 만큼 최선을 다 했습니다. 국민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압승했습니다. 상대는 아직도 국민을 가르치려하는 오만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더불어 한나라당은 국민을 섬기고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힘쓸 것입니다. 저도 작은 힘이지만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위해 보탬이 되고자 제18대 총선에서 부산진구 갑구에 출사표를 던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