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핵심 측근 34인의 프로필 - 인물순서 가나다순
Keys 발간 40호 특집으로 「김정일 핵심 측근 34인의 프로필」을 내놓습니다. 물론 북한사회는 김정일이 유일한 권력자로, 수령에 의해 모든 것이 움직이는 사회입니다. 여기에 핵심측근은 수령절대주의체제를 위해 음으로 양으로 기여하는 자들로, 김정일과 함께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중 혹 참회와 반성, 또는 자기이익을 계산하여 김정일을 향해 머잖아 정의의 총을 들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결단을 내린다면 그의 지난날의 죄과를 과감히 용서해주도록 너그러운 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김정일을 알면 북한 체제의 속성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김정일 체제가 어떠한 핵심측근에 의해 움직이는지도 알아 둡시다. 북한체제가 워낙 폐쇄적인지라, Keys 편집위원회에서 ‘핵심측근’으로 분류한 이들 34인 중에서도 이미 숙청되어 사망했거나, 직책만이 존재하며 실권은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프로필을 작성하는 중에도 대남사업분야에 있어서 김정일의 오른팔이었던 김용순이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아무쪼록 이 자료가 북한인권·민주화운동을 함에 있어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로필의 내용은 손광주著 「김정일 리포트」(바다출판사)를 기본 텍스트로 하고, 조선일보사의 북한인물 데이터베이스 및 연합뉴스에서 발간하는 「2002 북한인명사전」과 각종 북한관련 서적을 참고하였음을 밝혀둡니다. 인물이 실린 순서는 가나다 순입니다. / 편집자
강관주(康寬周) 이명 강주일(姜周一)
1930년 7월 5일 평남 대동 출생.
당 대외연락부장, 조평통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김일성종합대 역사학부(1960년)와 김일성고급당학교를 졸업했다. 1975년 대외문화연락위원회 국장으로 출발, 1989년 당 연락부 제1부부장, 199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위원장을 거쳐 1994년 7월 당 통전부 제1부부장 겸 통전부 초급당 비서가 되었다. 2000년 5월 말 김정일이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을 때 수행한 것으로 보도돼 주목받기도 했다.
강주일은 김일성의 외오촌 조카로 김달현 전 부총리가 그의 매제이며 손성필 전 러시아주재 대사와는 사돈관계로 알려져 있다. 개방 성향이 강하고, 남북회담과 남북교류에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김정일의 ‘수족’으로 불릴 정도로 김정일과 밀착관계다. 조총련과 평양을 연결하는 채널이자, 조총련에서 김정일에게 전달되는 성금을 관리하고 있다. 북한의 ‘일본통’으로, 향후 북일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면 김정일에게 자문역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
대외연락부는 대남공작원을 선발, 밀봉교육을 시켜 남파하고 대남공작 전술을 연구, 개발하는 곳. 통전부가 드러내놓고 대남업무를 수행하는 부서라면 대외연락부는 막후에서 음성적으로 대남공작을 추진하는 노동당 내 대남공작의 본산이다.
강상춘
1940년 6월 8일 생.
김정일 서기실 실장, 당중앙위 조직지도부 부부장
김일성고급당학교를 수료했고, 1982년 김정일 서기실 과장, 마카오 주재 북한상사원(1991년),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1994년)을 지냈다. 호위총국 제2국 아미산 물자담당(김정일 개인 물품담당) 부부장이며, 서기실 의례(의전) 담당 및 신변호위 담당 비서다.
김정일 서기실은 1985년 전후에 등장한 조직으로 종래 중앙당 조직지도부에 속해 있던 기능과 업무를 분리해 신설된 기구이다. 여기에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의학 및 과학교육 등 각 분야별 고문들이 배속돼 있어 김 국방위원장의 업무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있다. 사안에 따라서는 정책문건에 김 국방위원장의 이름으로 대신 서명을 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누리고 있다. 구성원들은 공식 석상이나 선전매체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며 대개 비공개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일반 주민들은 이들의 존재나 활동상황을 잘 알지 못한다.
강상춘은 개방적이고 치밀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며, 김정일에게 보고되는 문건을 전반적으로 검토한다. 20년간 김정일을 그림자처럼 보좌해왔고,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 김정일에게서 ‘216-3333’이라는 특수 번호판이 붙은 벤츠를 선물 받아 타고 다닌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북한의 어느 곳이나 그가 출입하지 못하는 곳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한때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지적을 받아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김정일이 “남의 눈도 있고 하니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선에서 사건을 무마했다는 후문이다. 부인 현명화씨와의 사이에 2녀를 두고 있다.
강석주(姜錫柱)
1939년 평남 평원군 출생.
당 중앙위 위원, 외무성 제1부상,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내각 외무성 제1부상으로 정통외교관이자 외무성의 실무사령탑.
국제관계대학 영어과를 졸업했고 중국에 유학했다. 북한의 외교부는 정무원 소속이지만 실제로는 독립기관처럼 되어있고, 북한의 정부 대 정부 외교를 전담한다. 강석주는 정통 외교부맨이다. 1984년 외교부 부부장이 됐고, 1986년 이후 외교부 제1부부장으로 활동해오고 있다. 1990년 외교부 대표단장으로 제45차 유엔총회 특별회의(제네바 회의)에 참가했고, 사실상 북한의 외교를 이끌고 있는 인물이다. 1993년 외교부 대표단장으로 북미 고위급회담에 참석했고, 1994년 카터 전 미 대통령의 김일성 면담시 배석했다. 1994년 북미 고위급회담 북측대표단장으로 제네바를 방문하는 등 북미 핵협상을 주도했다. 2002년 제임스켈리 미국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시 핵개발 사실을 시인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김정일이 “나의 의도에 민감한 외교일꾼”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신임이 두텁다. 1m 68cm 정도의 작은 키에 서글서글한 인상, 약간 벗겨진 이마를 감추려고 옆머리를 쓸어올린 헤어스타일, 금테안경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눈매, 북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좀처럼 찾기 어려운 세련된 매너 등으로 독특한 이미지를 던져준다. 유창한 영어 실력에 프랑스어에도 능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단적인 일처리’로 1개월간 ‘혁명화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김정일의 신임을 회복했으며, 비밀파티 멤버다. 당 역사연구소장 강석숭의 동생.
계응태(桂應泰)
1925년 2월 25일 평남 평원 출생.
당 중앙위 비서(공안담당), 당 중앙위 정치국원, 당 중앙위 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일반 노동자 출신으로 권력핵심까지 입신한 입지전적 인물로, 북한 고위간부 중 가장 검소하고 청렴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초중등 교육을 받고 남만주에서 대학교육을 받았다. 해방 후 김일성의 추천으로 소련의 고급당학교에 유학했고, 1980년대 말 김정일의 특별지시로 김일성고급당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다. 1957년 당 중앙위 국제부 부부장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했고, 1960년대 외무성, 무역성 부상 등 관료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1967년 무역부장, 1976년 부총리, 1980년 당 정치국 위원, 1985년 당 중앙위 공안담당 비서, 1988년 당 정치국원에 올랐다. 1987년 당, 정 대표단장으로 동구를 방문했고, 노동당 대표단장으로 공산권 국가를 수차례 방문했다. 타협을 모르는 원칙론자로 일밖에 모르는 실무관료로서 평판이 높다.
술, 담배를 전혀 입에 대지 않으며 평소 과묵한데다 강직한 원칙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사생활도 검소하고 청렴하며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는 것이 중평인데 그가 15년 이상 권력기관을 관리하는 공안담당 비서로 요직을 ‘독점’하고 있는 것도 이런 그의 생활태도와 관련이 깊다는 지적이다. 김정일이 “나의 오른팔”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신임이 두텁다. 부인 강묘와 사이에 2남2녀(자료에 따라서는 3남 2녀)를 두고 있는데 이따금씩 말썽을 부리는 막내 아들을 함남 검덕광산 노동자로 보낸 일화는 그의 강직한 인품을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김국태(金國泰)
1924년 함북 청진 출생.
당 중앙위 위원, 당 중앙위 비서, 당 중앙위 간부부장
김일성고급당학교 교장,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겸 자격심사위원장
노동당 중앙위원회 간부담당 비서이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최측근 가운데 한 사람.
만경대혁명학원과 소련군사아카데미를 졸업했다. 1963년 민족보위성 총정치국 부국장, 1967년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1972년과 1983년 당 선전선동부장, 1984년 당 간부부장, 1992년 이후 당 간부담당 비서로 있다. 김일성의 빨치산 동료였던 김책의 아들이다. 그가 만주 등을 떠돌다 아버지 김책의 손에 이끌려 김일성 집무실을 찾아갔을 때 신발을 벗어들고 들어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국태는 이때부터 학교교육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 선전선동부장 시절 김성애, 김영주 축출에 앞장섰고, 당역사연구실을 김일성역사연구실로 개편했다. 김정일 초상화를 김일성 초상화와 동등하게 취급하자는 방침도 그에게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김정일이 김국태를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막역한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정권을 떠받치는 중추적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김용순과 함께 김정일의 공식활동에 가장 많이 수행하는 당료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과 함께 순안비행 환영식과 환송식 등에 동행했으며 이에 앞서 김정일의 비공식 중국 방문(200. 5.29∼31)에도 수행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과 함께 공항영접을 나가기도 했다. 평소 말 수가 적고 엄격하며 보수적인 성향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김기남(金基南)
1926년 8월 28일 강원도 원산 출생.
당 중앙위 위원, 당 중앙위 비서(혁명사적담당)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만경대혁명학원,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했고, 모스크바 국제대학에 유학했다. 1952년 외무성 참사로 출발, 1957년 외무성 의례국장, 1961년 과학교육부 부부장, 1973년 <근로자>지 책임주필, 1979년 <노동신문> 책임주필, 1980년 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1985년과 1989년 당 선전선동부장을 역임했고, 1992년 당 선전담당 비서에 올랐다. <노동신문> 주필 현준극과 <민주조선> 책임주필인 김정숙(김일성의 조카, 허담 부인)과 함께 선전선동 부문 ‘트로이카’를 형성하고 있다. <노동신문> 대표단장으로 수차례 일본, 소련, 폴란드 등을 방문했다.
“우리식대로 살아가자”, “생산도 학습도 항일유격대식으로”라는 구호를 만들어낸 장본인. ‘구호제조기’가 그의 별명. 한마디로 김정일의 대변인이다. 후계체제와 관련, 일찍부터 김정일의 편에 서서 측근 중 측근으로 자리잡았다. 1960년대 말 당시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었던 그는 “곁가지가 무성하면 본가지가 크는데 장애가 된다”고 해 계모 김성애와 이복동생 등을 제거하는 일등공신이 됐고, 1991년에는 “한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듯 수령동지와 지도자동지는 혼연일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며 김정일을 설득하기도 했다.
김정일은 1970년대 말부터 김기남의 실무능력을 높이 사 그를 자주 불러 협의할 정도로 신임을 받았으며 김정일이 공식 석상에서 “김기남 동무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황장엽 전 중앙당 국제담당 비서는 한 기자회견에서 완곡하게나마 김정일 앞에서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인물로 김기남을 꼽기도 했다. 김정일 명의의 각종 발표문과 축하문 작성을 맡고 있다. 외교단 사업총국에 근무하는 부인과의 사이에 2남 2녀. 김영남 최고인민회 상임위원장과 금수산기념궁전 관장을 맡고 있는 김두남 대장이 그와 형제간이라는 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김달현(金達鉉) :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설
1941년 1월 1일 평남 강서 출생.
2.8비날론 연합기업소 지배인. 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만경대혁명학원, 김일성종합대 화학과 졸업, 알바니아 유학. 1977년 과학원 부원장을 지냈고, 1987년 화학 및 경공업 위원장, 1988년 국가계획위원장, 1990년 정무원 부총리, 1992년 당 정치국 후보위원 및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92년 7월 북한 경제대표단장으로 서울을 방문하여 한국경제를 시찰한 바 있으며, 1993년 중반 군수용 전력을 민수산업 전력으로 돌리려 했다가 김일성의 노여움을 받아 국가계획위원장직에서 2.8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강등됐다.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줄곧 “외국의 투자와 선진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일성 앞에서도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등 개혁개방의 성향을 갖고 있다. 그의 부인 강관숙(강관주의 여동생)은 김일성의 외사촌 강린수의 딸. 따라서 김달현은 김일성의 조카사위가 된다. 슬하에 1남 1녀.
최근 북한을 다녀온 한 기업인은 “김 전부총리가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2000년 말께 사망했다는 얘기를 북측 안내원을 통해 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는 “김 전부총리가 심장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사망했다는 얘기는 처음이며,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사망설을 일축했다.
김동운(金東雲)
1935년 11월 1일 자강도 우시군 출생.
당 중앙위원회 39호 실장, 대성경제연합체 총사장.
노동당 중앙위원회 39호실 실장으로 대외적으로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으로 불리고 있다. 39호실에서 마약밀매를 통해 얻은 외화는 김정일의 비자금뿐만 아니라 노동당 운영비, 대남공작금, 해외공관 운영비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진광산금속대학을 졸업했고, 1988년 당 39호 부실장, 1991년 당 재정경리부 부부장, 1994년 당 39호 실장으로 임명됐다. 김정일 ‘심복’으로 김정일의 외화를 총괄(당 39호실)하고 있다. 1989년 대성그룹 대표단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했고, 1994년 북한대표단장으로 식품공장 플랜트 수입관련 협의차 이탈리아를 다녀왔다. 김정일에게 무조건 충실한 인물이며, 친구도 별로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맡고 있는 업무의 성격상 비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공식 석상에도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다. 1999년 8월 김정일이 새로 개축 확장된 ‘차주현동무가 지배인으로 일하는 양어사업소’ 양어장을 둘러볼 때 동행했다.
김두남(金斗南)
1930년 평양 출생.
금수산기념궁전 관장, 당 중앙위 위원, 인민군 대장
만경대혁명학원, 강건군관학교를 졸업했고, 소련군사아카데미에 유학했다. 1970년 포병사령부 부사령관, 1980년 당 군사부 부부장, 1982년 당 정치국 후보위원, 1982년 당중앙위 군사부장을 지냈다. 1985년 대장에 올랐고, 김일성 군사보좌관을 지냈다. 178cm에 전형적인 무골형.
매사에 치밀하고 꼼꼼하며 숫자 암기력이 뛰어나 북한군이 보유하고 있는 각종 포의 수와 포탄 수량까지 암기하고 있다는 소문이 날 정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의 친동생. 북한군의 군장비 현대화와 군생활 개선문제를 수차례 김일성에 건의했다. 북한군에 내려보내는 김일성의 교시 대부분이 그를 통해 전달됐다. 외국의 군사기술에 대해 연구해두었다가 김일성이 외국군사대표단을 만날 때 자료를 제공해준 인물이다. 김일성 사후에는 그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기념궁전 관장으로 있으면서 유사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군사보좌역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명국(金明國)
1940년 출생.
전 인민무력부 작전국장. 대장. 당 중앙위원, 군사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제108기계화군단 군단장.
김일성군사종합대학과 구소련 프룬제군사대학을 졸업했다. 김일성군사종합대 작전전술 강좌 교원을 거쳐 강좌장을 지냈다. 4.25훈련소 참모장을 시작으로 1984년 총참모부 작전국 훈련부국장, 1991년 당 중앙위원, 1992년 총참모부 작전국장(상장)을 거쳐 1995년 당 중앙군사위원(대장)에 올랐다.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이 높고 총참모장 후보로 꼽힌다. 작전 및 전술통으로 일찍이 김정일의 집무실에 파견, 군사문제에 어두운 김정일에게 입체전 개념과 인민군 전력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김정일은 소장파 장성들의 군심 파악을 김명국을 통해 얻고 있다.
김정일과 수차례 독대를 가졌다. 김명국과의 독대를 통해 나온 것이 “조선인민군을 불패의 혁명무력으로 강화하자”는 내용의 김정일 군 지시사항이다.
김정일은 김명국의 집도 방문하고, 자식들의 문제도 해결해줄 정도로 신임을 주고 있다. 1993년경 김정일이 이봉원(총정치국 전 조직담당 부총국장)에게 “김명국의 권위를 헐뜯는 것은 나를 헐뜯는 것과 같다”고 경고할 정도로 김정일의 신임을 받고 있다.
김영남(金永南)
1928년 2월 4일 평양 중구역 출생.
당 중앙위 위원, 당 중앙위 정치국원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헌법상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정통 외교관료 출신. 새로운 국가체제 하에서 평양주재 각국 대사들의 신임장을 접수하고 외국과 축전을 교환하는 한편 방북하는 외교사절을 영접하는 등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김일성종합대 졸업. 구소련 모스크바대학과 로스토프대학에 유학했다. 1956년 당 중앙위 국제부 서기장, 1960년 함남도당 부위원장, 1962년 외무성 부상을 역임한 외교통. 1972년 당 국제부장을 거쳐 1978년 당 정치국 위원에 올랐다. 1982년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에 임명되어 박헌영-남일-박성철-허담-김영남으로 이어지는 외교관료의 맥을 이루고 있다.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영전하기 전까지 15년간 자리를 지키면서 외교수장으로서 북한외교를 진두지휘했다. 1991년 북한 정부대표단장으로 UN총회에 참가하는 등 대외활동에 자주 얼굴을 비쳐 왔다.
꼼꼼하고 기억력이 비상한 인물로 알려지고 있고, 성품이 점잖고 온화하며, 다소 우직해 보일 정도로 철저히 원칙을 고수하는 유형. 이런 생활태도가 오랜 정치역정 속에서도 단 한번의 굴절없는 이력을 이어올 수 있는 바탕이 됐다는 지적이다. 지금까지 단 한번의 좌천이나 ‘혁명화 교육’을 받은 사실이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해왔다. 1995년 “북한이 한반도의 통일을 책임지고 해낼 것이며, 동시에 프랑스, 독일, 스웨덴,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 외국과의 경제협력관계도 증진시키기를 희망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러시아어에 능하고 영어도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구사하며 실무능력과 외교적 감각도 두루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치적 기류변화에도 민감해 일찍이 1956년 8월 종파사건의 와중에 연안파 비판에 앞장섰으며, 1967년 5월 당시 중앙당 국제부장이던 박용국의 비리를 폭로하는 등 갑산파 숙청에도 일역을 했다는 후문이다. 또한 1970년대 중반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과정에서 불거진 김동규 부주석의 숙청사건 때도 한 몫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일성 주석의 무관을 지낸 뒤 현재 금수산기념궁전 관장으로 있는 김두남 대장이 그의 동생. 평양봉화진료소 치료체육실 간호사인 부인과의 사이에 3남 1녀.
김영춘(金英春)
1932년 강원도 출생(함경북도 출생이라는 자료도 있음).
국방위원회 위원, 당 중앙위 위원, 인민군 총참모장
인민군 차수,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졸업, 소련 푸룬제군사대학을 유학했다. 1986년 당중앙위원회 위원, 1992년 인민군 대장, 1993년 군수동원총국장, 1994년 인민군 제6군단장을 역임했고, 1995년 10월 인민군 차수로 인민무력부 총참모장에 올랐다.
오랫동안 군사작전분야에서 몸담아 작전통으로 알려져 있다.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과 함께 인민군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삼두마차의 일각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오극렬과 친분이 두터워 오극렬이 총참모장에서 해임될 때 불만을 토로하다 강등, ‘혁명화 교육’을 받고 1년 만에 복귀. 북한군 내 ‘소련간첩단 사건’을 적발하는 데 공헌했고, 1995년 군인사 때 총참모장에 올랐다.
1987년 4월 김일성 훈장을 수훈했으며, 2000년 4월 김일성 88회 생일을 맞아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다. 키 173cm에 보통 체격. 성격이 급하고 배짱이 두둑한 인물로 알려진다. 김정일이 사냥을 갈 때 동행하는 멤버.
김철만(金鐵萬)
1918년 평남 출생.
제2경제위원장, 국방위원회 위원, 중앙위 위원, 당 중앙위 정치국 후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전병호 중앙당 군수공업부장 겸 비서와 함께 북한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군수공업을 이끌어 나가는 쌍두마차. 현재 생존해 있는 몇 안되는 빨치산출신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소련군사아카데미를 졸업했다. 해방 전 김일성과 함께 활동했고, 1955년 37사단장, 1965년 2군단장, 1970년 제1 부총참모장, 1980년 당 정치국 후보위원, 1989년 제2경제위원장, 1990년 국방위원회 위원. 6.25전쟁 당시 연대 참모장을 지냈다. 해방 전 김일성유격대의 소년중대 출신으로 김일성의 신임이 두터웠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6권에서 “김철만은 소년중대에 입대한 후 무슨 일에서나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소년중대가 해산된 후에는 7련대에 가서 오중흡련대장의 전령병으로 임무를 책임적으로 수행하였다. 오중흡이 전사하였을 때 제일 눈물을 많이 흘린 대원이 바로 이 김철만이였다”고 회고했다.
1969년 군부파 숙청 때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큰 징계를 받지는 않았다. 작은 키에 뚱뚱하고 다소 우락부락한 외모. 6·25때 부상한 상처 때문에 아직도 고생하고 있으며 담배를 무척 즐긴다고 한다. 남다른 정치감각의 소유자로 김정일이 당 조직지도부장에 임명되자마자 전 군수공장에 김정일 초상화를 걸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의 사위 한우철이 조총련 의장을 지낸 한덕수의 아들이다.
김충일(金忠日)
1938년 12월 함경남도 장진 출생.
김정일 서기실 서기, 당 중앙위 위원, 국제문제연구소 부소장
외교분야 및 국제문제 전문가. 김정일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 가장 유력한 차기 외교부장 감으로 꼽히고 있다.
평양 외국어대를 졸업하고 중국 북경대학에 유학했다. 1973년 주UN 옵저버 대표부 1등서기관을 시작으로 1980년대 초 외교부 비동맹국장, 외교부 제1부부장(86년)을 지냈다. 1982년 2월부터 최고인민회의 제7, 8, 9기 대의원을 역임했으며 1986년 2월과 12월 각각 당 중앙위 후보위원, 위원을 거쳐 1988년 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에 올랐다. 유네스코 대표단장으로 구소련을 방문했고, 1994년 유엔개최 사회개발정상회의 준비회의에 참가하는 등 외교활동을 많이 해왔다.
차분한 성격, 치밀하면서도 사교적, 개방적 성향으로 김정일의 측근파티 고정멤버다. 1988년 김정일이 김영남 외교부장에게 “이 사람은 내가 직접 쓰겠다”고 하여 선전선동부 대외선전담당 제1부부장에 임명했다. 외국에서 온 인사가 김정일과 면담할 경우, 통역 및 의전을 담당한다. 당 조직지도부나 선전선동부 등 핵심부서의 실세들이 그러하듯이 공식석상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가족은 아내와 슬하에 2남을 두고 있다.
김치덕
1934년생.
인민보안성 공병총국장, 인민군 상장,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
1959년 중국 북경공대를 졸업했고, 1986년 이후 사회안전부 제2공병국장으로 있었다. 호탕하고 언변이 좋으며, 선동가로 탁월한 자질을 갖고 있다. 새로운 공법으로 빙상관(아이스링크)을 건설하여 김정일의 총애를 받아온 인물.
김하규(金河奎)
1936년생.
포병사령관(대장), 당 중앙위원, 인민군 대장,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
김철주포병종합군사학교,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연구원을 졸업했다. 1986년 인민군 중장, 1987년 4.25훈련소 참모장을 지냈고, 1991년 인민군 포병사령관에 기용됐다. 1992년 10월 상장, 1995년 10월 대장으로 고속승진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공식행사에 자주 동행하는 등 1990년대 들어 현철해 인민군 총정치국 조직부 총국장과 기존의 군부 실세들과 함께 앞으로 북한군부를 이끌어갈 핵심인물로 꼽히고 있다.
김일성, 오진우 사망시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김정일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으며, 아들 5명을 모두 군에 복무시키고 전연 구분대(전방 하급부대)에 근무하게 했다.
남상락(南相樂)
1933년 황해도 출생.
평양 반(反)항공사령부 사령관, 인민군 대장, 당 중앙위 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평양 고사포사령부(반항공사령부) 사령관으로 북한 군부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세.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했다. 인민무력부 포병지도국 출신으로 1986년까지 반항공국장을 지냈고, 1987년 중장, 1992년 상장, 1994년 대장에 올랐다. 주 1, 2회 김정일과 독대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전 작전국장 김명국, 과거 김일성의 군사보좌관 김두남과 가깝다.
1995년 1월 1일 황남 사리원시에 주둔하고 있는 인민군 제214부대를 방문한 김정일을 영접한 것을 마지막으로 공식석상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평양 고사포사령부는 반항공사령부 예하부대로 특히 컴퓨터에 의한 지휘체계가 가장 잘 구축되어 있는 부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1994년 7월 김일성 국가장의위원회 위원과 1995년 2월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김정일에 절대적인 충성을 보이고 있으며, 군사실무에 밝다. 178cm에 80kg 내외의 거구. 슬하에 2남을 두고 있다.
박재경(朴在慶)
1933년 6월 10일 함경북도 출생.
인민군 총정치국 선전담당 부총국장, 대장
군부의 실세 가운데 한 명으로 군내 선전선동사업의 총괄 책임자.
김일성정치대학을 졸업했다. 인민무력부 총정치국 선전부 지도원으로 출발, 1980년 총정치국 선전부장, 1985년 인민군 소장, 1989년 군단 정치위원, 1994년 총정치국 선전 부총국장에 올랐다. 1997년 1월 인민군 대장에 진급. 1994년 총정치국 선전담당 부총국장으로 임명되자마자 음악무용서사시 <장군님을 따라 천만리>를 발표하도록 했다. 김정일의 이른바 ‘선군정치’, ‘음악정치’에 발맞춰 인민군협주단, 인민군공훈합창단 등을 조직하고 중대급 예술소조공연 등을 활성화시켜 김정일에 대한 찬양과 인민군 사기진작, 사상교양사업 등을 활발히 벌여 김정일에게서 매우 신임을 받았다. 김정일은 이와 관련 “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공훈합창단의 공연을 보고 힘을 얻곤 했다”고 한다.
실제로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에서 1998년부터 1999년 9월까지 북한 고위인사의 김정일의 현지지도 등 공식행사 수행 횟수를 집계 분석한 것에 따르면 박재경은 현철해 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조직 담당)의 80회에 이어 73회로 두 번째로 많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서 오찬, 만찬 등에 참석했으며 9월 11일에는 김정일의 특사자격으로 온 김용순 당 중앙위 비서와 함께 서울을 방문해 송이를 전달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차분한 성격으로 말이 없는 편이며 술은 어느 정도 하나 담배는 피우지 않고, 책읽기를 즐기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백학림(白鶴林)
1918년 10월 중국 남만주 출생.
인민보안상, 당 중앙위 위원, 당 중앙위 정치국 위원, 국방위원회 위원
인민군 차수,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겸 법제위원회 위원장
중앙당 정치학교와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원을 수료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김일성의 항일빨치산에 들어가 전령 역할을 하며 인연을 맺었으며, 해방 후 김일성 호위대원을 지냈다. 일찍부터 김일성과 함께 활동해 그와 관련한 여러 가지 일화가 있다. ‘고난의 행군’, ‘김일성을 위험에서 구한 일’, ‘어린 김정일을 뒷바라지한 일’ 등이 그것인데 특히 고난의 행군의 회상록인 『한홉의 미싯가루』는 북한 주민들의 사상학습 필독서이다.
1958년 제3사단장, 1967년 사회안전부 부부장, 1978년 인민무력부 부부장, 1985년 사회안전부장, 1992년 인민군 차수에 올랐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김정일의 생모) 등과 한 평생을 같이 한 인물로 아직도 김 위원장의 그에 대한 신임은 각별하다고 한다. 따라서 실무능력에 관계없이 김정일 체제의 전형적인 빨치산 원로로 대접받고 있다. 다소 신경질적인 성격이나 김정일에 대해서만은 깍듯해 그가 원하는 녹음기나 악기류 등을 구해주기 위해 전문가를 데리고 직접 해외에 나간 일화도 있다. 가족은 부인과 슬하에 1남 4녀.
연형묵(延亨默)
1931년 11월 3일 함북 경원 출생
자강도당 책임비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현직), 당 중앙위 위원
당 중앙위 정치국 후보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1990년 남북 고위급 회담에 정무원 총리로서 북한측 수석 대표로 참여해 남한에도 꽤 얼굴이 알려진 인물로서 현재 자강도당 책임비서 겸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있다.
만경대혁명학원, 김일성종합대학, 체코 프라하공대를 졸업했다. 1968년 노동당 중공업 부장, 1985년 정무원 제1부총리겸 금속 및 기계공업위원장, 1986년 노동당 중공업 담당 비서 등을 거쳐 1988년 정무원 총리에 올랐던 전형적인 기술 관료로 평가 받는다. 정무원 총리 시절 김일성으로부터 역시 총리를 지낸 강성산보다 더 신임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92년 정무원 총리직에서 해임되고 자강도 당 책임비서직으로 좌천되었다. 또한 1974년부터 맡고 있던 ?? 정치국 위원에서도 후보위원으로 강등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좌천 사유는 김정일에게 중국 경제 개방을 모델로 ‘우리도 개방을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가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에 따라서는 좌천이 아니라, 군사시설이 밀집된 자강도 지역을 연형묵에게 전적으로 믿고 맡긴 ‘신임의 표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당 중공업 담당 비서 시절에는 김정일로부터 많은 신임을 얻기도 했으나 정무원 총리 시절에는 김정일과 다소 거리가 생긴 것으로 전해졌다. 1990년 9월 남북 고위급 회담 북측 대표단장으로서 서울을 방문했고 2000년 6월13~15일 평양 남북 정상회담 시 고별 오찬 및 공항 환송 행사 등에 참석했다.
염기순(廉基淳)
1924년 함경북도 출생.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당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졸업. 1973년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강원도 당 책임비서(1977년), 당 중앙위원(1986년) 등을 거쳐 1994년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올랐다. 보수적이고 원칙에 충실하며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라 향후 조직부장 감으로 지목되고 있는 김정일의 최측근. 1974년 김정일이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직을 맡고 있을 때 염기순도 조직지도부에 근무한 인연을 갖고 있다. 당시 염기순의 일솜씨를 눈여겨본 김정일이 조직비서로 올라가면서 부부장으로 승진시켰다. 꼼꼼하고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 1990년 모스크바대에 유학 중이던 사위 김재건이 말썽을 피우자 자신이 직접 나서서 사위를 ‘혁명화’ 교육을 받도록 조치, 김정일이 그를 높이 평가한 적이 있다. 김일성 훈장 2개.
오극렬(吳克烈)
1931년 중국 길림성 출생.
당 작전부장, 당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 소련 프룬제군사대학을 졸업했다. 뛰어난 두뇌와 예리한 분석력을 가진 김정일의 최측근. 1950년 공군소위로 6.25전쟁에 참가했다. 1964년 공군대학장, 공군사령관(1968년), 인민군 총참모장(1979년),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1980년-88년), 군사위원회 위원, 당 작전부장(1990년) 등 요직을 맡아왔다. 1988년 오진우 인민무력부장에 밀려 당 정치국 후보위원과 총참모장에서 물러났으나 김정일의 신임을 바탕으로 1990년 조선노동당의 대남사업부서인 작전부장을 맡았다.
오극렬은 혁명 2세대로 만경대혁명학원 1기생이다. 일제 말기 ‘김일성 부대’의 대원이었던 오중성의 외아들로 북한이 ‘김일성 부대’의 귀감으로 내세우는 오중흡은 5촌 당숙이다. 그는 어릴 때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보살핌 속에서 김정일과는 형제처럼 자랐다. 김정일의 술친구이기도 한 그는 여전히 김정일로부터 높은 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루 만보 걷기를 실천하는 건강주의자이며, 독서를 통해 가다듬은 예리한 분석력을 지닌 전형적인 군 작전통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장 174cm, 체중 80kg 내외로 과묵한 성격에 호남아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에 능통하다. 군사이론가이자 역사에 대한 조예도 깊다.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군대 안의 정치기관을 축소하고 무력부의 국들을 통합하는 사업을 수행했다. 이 때문에 오진우가 김일성에게 “오극렬이 군대를 당에서 떼내려 한다”고 보고하여 총참모장에서 물러났다. 이 해에 총참모장에서 물러나 단천시 당 책임비서로 좌천됐으나 현직에 부임하지 않아 김정일이 김일성고급당학교에 잠시 다니도록 했다. 그후 당 민방위부장을 거쳐 1990년 작전부장에 기용됐다. 러시아에 군사유학생을 대거 파견한 적이 있고, 전자전 장교 육성목적의 미림대학을 창설했다. 김정일이 하사한 특수번호의 승용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김정일의 신임이 높다. 김일성종합대 교수를 지낸 부인과의 사이에 1남 4녀(자료에 따라서는 2남 5녀). 장녀 오혜영은 4.25예술영화촬영소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원응희(元應熙)
1936년 양강도 삼수군 출생.
당 중앙위원, 인민무력부 보위국장, 인민군 대장,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
1983년 인민군 소장(준장)으로 별을 달았고, 1988년 반(反)항공사령부 정치위원을 지냈다. 1992년 인민군 보위사령관, 1994년 대장에 올랐다. 김정일에 절대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고, 정치적인 사건에는 비타협적이다. 1992, 94년 2차에 걸쳐 구소련 프룬제군사대학 유학생 출신 군관, 장령들의 간첩단 조직을 색출해낸 장본인. 이 공로로 대장으로 승진했다. 군 보위 사업으로 잔뼈가 굵은 인물로, 김정일의 ‘비밀 보좌관’으로 불린다. 1994년 김일성 영구 호위를 호위총국에 맡기지 않고, 무력부 보위국에 맡겼을 정도로 김정일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다. 1996년 2월 27일 김정일의 351고지 군부대 방문시 수행했다. 키 168cm에 보통 체격. 날카로운 성격에 말수가 적은 편.
이명수(李明洙)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 인민군 대장,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장으로서 2000년 10월에 인민군 대장으로 진급한 인물이다. 80년 혁명승리기념관 관장을 지냈으며, 1992년 인민군 중장, 1993년 인민군 제3군단 참모장, 1995년 인민군 상장, 1996년 인민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을 거쳐 총참모부 작전국장에 이르는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순탄하게 군 요직을 밟아 왔다.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신임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실제 그는 1996년부터 김정일의 각급 군부대 방문에 수행해 왔다.
조명록 군 총정치국장, 김영춘 총참모장에 이은 군부 서열 3, 4위 정도에 랭크된다. 1994년 이후 김정일은 총정치국, 총참모부, 군 보위사령부 등을 분리 통치하면서 작전국의 위상을 높였는데, 총참모장을 거치지 않고 작전국장에게 바로 지시를 내릴 수 있도록 되면서 이명수의 권한이 막강해졌다. 2002∼2003년 김정일의 군 시찰시 반드시 수행하고 있다.
이용철(李勇哲)
당 중앙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당 중앙위원,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겸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있는 인물이다.
인민무력부 작전국장 출신으로서 1986년 노동당 조사부장으로 당에 발을 들여놓은 뒤 1993년에 당 중앙위 부부장을 거쳐 1994년에 현직인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에 올랐다. 이는 김정일이 과묵하고 세밀한 작전참모형인 그를 신임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김정일과의 관계가 아주 밀착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이는 그가 김정일의 지방 현지 지도나 각급 군부대 시찰을 수행해 왔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제강(李濟剛)
1930년 출생.
당 조직지도부 서기실 부부장.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했고, 1973년 말 김정일이 당 조직지도부장이 되었을 때 직속 지도원으로 일했다. 1978년에 김일성 특사로 아프리카 가봉을 방문했고 1980년대 초에는 문화대표단장 혹은 당 대표단장으로서 튀니지, 버마, 타이, 소말리아, 중국, 파키스탄을 방문하기도 했다. 1982년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을 거쳐 1994년 10월 당 조직지도부 서기실 부부장으로 임명됐다.
당 간부들의 당 생활 등 내부 문건을 검토한다. 침착한 성격과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로 노동당 인물들에 대한 현황이 머리 속에 모두 들어있다고 한다. 조직지도부 생활만 10년 이상 맡았고, 성격이 침착하다. ‘모든 것을 정확히 보고하고, 정확하게 지시를 받는다’는 것이 그의 신조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많은 시간을 병치료에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창선(李昌善) : 숙청된 것으로 보임. 이명(異名)은 이완기
1925년 11월 15일 함경남도 요덕 출생.
전 당 사회문화부장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자료에 따라서는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함)하고, 1955년 교육문화성 문화국장을 시작으로 문화성 선전국장(1960년),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1960년), 문화성 부상(1965년), 문화상(1972년), 문화예술부장(1972년), 당 사회문화부장(1989년) 등을 역임한 김정일의 측근이자 실세.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후 처음으로 손을 댄 분야가 문화예술이었는데 여기에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1976년 김일성 특사로 페루, 파나마 등을 방문했고, 1982년 당 대표단장으로 소말리아를 방문했다.
그는 작은 키에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머리회전이 빠르고, 임기응변에 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98년 사회문화부장(현 대외연락부장)에서 경질된 이후 소식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장성우(張成禹)
1935년 강원도 출생.
인민군 차수, 당 중앙위원, 인민군 3군단장,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했다. 1983년 버마 랭군 폭파 사건의 총지휘 책임자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이 1987년경 자신이 타던 승용차를 선물할 정도로 김정일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8년 인민무력부 정찰국장, 1989년 사회안전부 정치국장을 거쳐, 1994년 3군단장에 올랐다. 1992년 사회안전부 대표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했고, 러시아어에 능통하다. 175cm, 90kg 정도로 잘 생기고, 과묵하다. 그의 동생 장성택이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결혼한 이후 승승장구했다. 남상락과 함께 군부 내 실세다. 6.25전쟁 당시 인민군 2사단에서 중위 계급을 달고 참전, 낙동강까지 내려온 혁명 2세.
천성적으로 군인이라 할 만큼 모든 것을 군대식으로 처리하며 김정일과 같이 점퍼 입는 것을 즐긴다. 사회안전부 정치국장 시절 사회안전부장 백학림이 노쇠하여 실질적으로 사회안전부를 총괄하기도 했다. 인민군 대장으로서 인민군 3군단장 겸 당 중앙위 위원으로 있다가 2002년 4월 차수로 승진했다. 2003년 7월 현재 3군단이 평양 방어를 맡게 됨으로써 평양방어 책임자가 되었다.
장성택(張成澤)
1946년 2월 6일 출생.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당 중앙위 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김정일의 매제로 최측근 실세이자 ‘오른팔’이다. 제 2인자라고 할 수 있다.
만경대혁명학원, 김일성종합대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했다. 김일성이 김경희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지방으로 내려가 원산경제대학에 다닌 적이 있다. 평양시당 지도원으로 출발, 1972년 당 조직지도부 지도원, 당 조직지도부 해외대사관 지도과장, 1981년 당 청년사업부 부부장, 1989년 당 청년 및 3대혁명소조부장을 거쳐 1992년 당 중앙위원에 올랐다. 1994년 전립선암 치료차 프랑스에 다녀왔다.
머리가 총명하고 회전이 빠른 그는 모스크바 유학시절에도 최우수 성적을 받았고, 김일성전집을 비롯해 정치, 경제, 과학, 문예 등 다방면에 걸쳐 독서량이 풍부하고 세계문학전집, 삼국지, 임꺽정 등 동서고전에도 박식한 편이다. 운동, 음악에도 재주가 있어 만능수재로 꼽힌다.
김정일의 최대 신임을 바탕으로 당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구축하고 있으며, 현 김정일 체제의 고수와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정치국 위원에서부터 중앙당 지도원에 이르기까지 중요직책의 인사권을 거머쥐고 있다. 1998년부터 부쩍 김정일의 각급 군부대 시찰 및 각지방 현지지도에 수행하고 있으며,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회담 마지막 날에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고별 오찬 행사 등에도 참석했다. 형 장성우는 3군 단장으로 인민군 차수로 있고, 동생 장성길은 인민군 중장으로 군단 정치위원이다.
전병호(全炳浩)
1926년 3월 20일 함북 무산 출생.
당 중앙위 비서(군수 담당)
북한경제를 주무르는 핵심인물로 1971년부터 10년 동안 기계공업부장으로 일했고 1982년부터 북한경제의 주축인 군수산업을 총괄해 왔다.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하고, 모스크바대에 유학했다. 1960년 당 조직지도부 책임지도원으로 출발, 1968년 조직지도부 부부장, 1976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1980년 당 중앙위원, 1982년 제2경제위원장, 1986년 당 군수담당 비서, 1988년 정치국 위원, 1990년 국방위원회 위원에 오른 거물급. 핵, 군수산업, 기계공업의 전문가로 20년 이상 제2경제(군수경제)만 담당해온 군수경제통. 자동차, 공작기계 등에 관심이 많다. 북한 핵개발 분야의 핵심인물이자, 이 분야를 총괄하고 있다. 1983년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군수경제담당 비서로 동행했다.
민간인이면서 국방위원회 위원 자리에 오를 정도지만 다소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 중앙군사위원회 회의에 민간인으로는 전병호, 김철만 단 두 사람만이 들어갈 정도로 김정일의 신임이 두텁다. 1990년경부터 김정일의 비밀파티에 합류.
조명록(趙明祿)
1930년 만주 연길 출생.
인민군 총정치국장, 당 중앙위원, 당 중앙군사위 위원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인민군 차수,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차수를 상징하는 왕별이 달린 인민군복 차림으로 백악관에 ‘입성’해 눈길을 끈 인물.
만주비행학교와 소련비행학교 졸업. 공군조종사 출신으로 1975년 반항공사령관, 공군사령관(1980년)을 지냈다. 1985년 인민군 상장, 1992년 대장, 1995년 차수에 올라 인민무력부 총정치국장에 임명됐다. 업무추진력이 강하고 급한 성격에 직선적. 사생활에서 청렴결백하고 관료주의적인 성향으로 공군에서는 ‘호랑이’로 통한다. 오극렬이 공군사령관으로 있을 때 부사령관을 지냈다. 1993년 5월 페리 미 국방장관의 ‘영변 폭격’ 발언이 나오자, 삼지연비행장에서 미그기 조종사들과 함께 결사전을 선포했다. 당시 그는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경우 폭탄을 장착하고 미국 7함대에 옥쇄하자”며 대대적인 궐기대회를 열기도 했다. 원응희 군 보위사령관, 총정치국 선전부장 한동근 중장과 오래 일을 같이 해온 군부 실세이기도 하다.
김정일이 가장 중시하는 대미관계개선을 위한 특사로 미국에 파견할 만큼 신임을 받고 있다. 군 최고의 실세인 그는 김정일의 현지지도를 115회(2001년 6월 발간)나 수행하는 최다기록을 세워 친밀도를 과시했다.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오른 뒤 김정일의 대군부정책의 핵심인 ‘군사중시사상’을 전군에 확산시키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슬하에 3남 1녀.
최익규(崔益奎) : 이명 최상근(崔尙根)
1934년 평양 출생(자료에 따라서는 함경북도 화대군 출생).
당 중앙위 선전선동부 부부장, 문예총 중앙위 부위원장. 내각 문화상
평양사범대(김형직 사범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했고,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연출가(1954∼56년), 당 선전선동부 영화과장(1957∼69년)을 지냈다. 북한의 모든 영화는 지금까지 최익규를 통해 제작돼 왔다. 1972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최은희-신상옥의 북한탈출로 철직(해임)된 적이 있다. 1995년께 김정일의 특별지시로 독일에서 수개월간 병치료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1999년경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다시 발탁된 것으로 전해졌다. 2000년 8월 그는 북한의 국립교향악단 고문으로 두 번째 서울을 방문했다. 본명은 최익규이나 대외적으로는 주로 가명을 써왔기 때문에 최상근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영화에 대한 정규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터득하여 영화감독으로서의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1963년께 영화 「백일홍」을 제작하면서 유능한 감독으로 자리를 굳혔다. 1960년대 중반 영화부문 지도에 나선 김정일과 인연을 맺으면서「꽃파는 처녀」(1972년), 「유격대 오형제」(1968년), 「조선의 별」1∼10부 (1980∼87년), 조총련 합작영화인 「은비녀」(1985년), 민족가극 「춘향전」(1988년)을 연출 감독했으며, 1990년대 초부터 영화 「민족과 운명」(1∼50부작)의 제작자로 전면에 나서 시나리오와 감독을 맡았다.
가족으로는 부인과 1남 3녀가 있다. 장녀 일심(1964년생)은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창작과를 졸업한 재원으로 현재 영화문학창작사 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영화 「내가 본 나라」의 시나리오를 썼다.
현철해(玄哲海)
1934년 중국 길림성 연길현 출생.
인민군 총정치국 조직담당 부총국장, 인민군 대장
최고인민회의 자격심사위원 겸 대의원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으로 루마니아에 유학. 1965년 민족보위성 총정치국 부국장, 후방군관학교 교장(1976년), 인민무력부 후방총국장(중장 1991년), 상장(1992년), 대장(1995년)을 거쳐 1996년 1월 인민무력부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에 임명됐다. 1995년 군사대표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6.25전쟁 당시 최고사령부 직속 호위군관으로 근무한 사실이 있다. 조용한 성격에 김정일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
홍성남(洪成南)
1929년 10월 2일 강원도 원산 출생.
내각 총리(현 내각 총리는 박봉주), 당 중앙위 위원
당중앙위 정치국 후보위원, 최고인민회의 제10, 11기 대의원
함남도당 책임비서(현직)
충성심에다 전문적인 기술행정 능력을 갖춰 김일성, 김정일 체제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해 온 대표적인 인물.
김일성종합대와 체코 프라하공대를 졸업했다. 1954년 당 중공업부 지도원으로 출발, 1970년 당 중앙위 부장, 1973년과 1987년 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경제통. 1982년 평남도당 책임비서, 1986년 당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가 1989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다시 내려앉았다. 1990년 5월 부총리, 1997년 2월 20일 총리대리에 임명됐다. 1980년대 이후 정부대표단장으로 외국을 방문, 북한의 경제를 주도했다. 차분한 성격에 경제실무 능력이 좋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연임까지 포함, 국가계획위원장을 네 차례나 연임할 정도로 북한의 대표 경제관료다. 키 170cm, 슬하에 4남 1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