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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성립 본문
1932년 2월 16일 만주국 성립이 선포되었다.
1931 만주사변(9.18 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한 일본은 헤이룽장(黑龍江), 지린(吉林), 랴오닝(遼寧) 등 중국의 동북 3개성을 점령한 뒤 '동북최고행정위원회‘를 설치하고 만주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으로 1945년 일제가 2차대전에서 패전할 때까지 만 13년 6개월 동안 존속했다.
일제는 만주국의 수도를 창춘(長春)으로 하고 연호를 ‘대동(大同)’으로, 원수를 집정(執政)으로 하였다.
3월 9일에는 톈진(天津)에서 은거 중이던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꾀어 창춘으로 데려와 집정에 취임하도록 했으나 실권은 일본 군부와 특무기관이 차지하고 있었다.
1933년 1월 일본은 러허(熱河) 성을 점령하고 이를 만주국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1934년 1월 20일에는 만주국의 제정을 선포하고 집정으로 있던 푸이를 황제에 추대하였으며 연호를 강덕(康德)이라하고 창춘을 신징(新京)으로 개명했다. 국호도 ‘만주제국’이라고 바꾸었다.
2차대전으로 만주제국이 와해된 뒤 그 영토는 기존의 중국의 성으로 환원되었는데 이중 러허성은 1955년 폐지되어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랴오닝 성, 그리고 허베이(河北)성에 분할 편입되었다.
푸이 만주국 집정 취임
1932년 3월 9일 =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가 장춘(長春)에서 일본이 세운 괴뢰국 ‘만주국(滿洲國)’의 국가 원수에 해당하는 직책인 집정(執政)에 취임했다.
민국 당시 중국 최고의 시인이자 서예가로 평가받던 정샤오쉬(鄭孝胥)(1859?∼1938)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정샤오쉬는 청말 철도국유화를 건의하였으며 후난포정사(湖南布政使)로 이를 강행,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직접적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이다.
그는 1924년 이후 톈진(天津)에서 푸이를 가르치는 어전교육에 종사하며 만주국 건국에 참여하였다.
정샤오쉬가 뛰어난 서예가였다는 점은 역시 글씨로이름을 날렸던 한말의 민족 반역자 이완용을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을미사변 후 아관파천에 참여한 친로파였던 이완용은 독립협회에도 참여 독립문의 글씨가 그가 쓴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그는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으로서 일본이 한일합방 조약을 강제하는데 적극적으로 협조 민족 반역자로 자신의 역사적 위치를 자리매김했다.
푸이는 장춘을 신경(新京)으로 개칭했고 연호를 ‘대동(大同)’으로 하였다. 푸이는 다음 해인 1933년 만주국을 ‘만주제국’으로, 집정을 ‘황제’로 개칭한 뒤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양과는 달리 만주국의 실질적 권한은 일본 관동군이 장악하였다.
일본 만주국 승인
1932년 9월 15일 일본은 이해 3월 1일 성립된 만주국과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를 체결하고 만주국을 승인했다.
일본과 일본 자신이 세운 괴뢰국 만주국 간 ‘일만의정서’ 협정 체결은 이날 일본 관동군(關東軍) 사령관 겸 주만(駐滿)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와 만주국 총리 정샤오쉬(鄭孝胥)에 의해 창춘(長春)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은 1932년 3월 만주국을 성립시켰으나 국제연맹의 리튼 조사단이 활동하는 동안 공개적으로 이를 승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리튼 조사단의 결론이 만주국을 인정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만주국을 승인하는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리튼 조사단은 1932년 2월, 만주사변 처리에 대해 국제연맹이 파견한 조사위원회를 말한다.
중국이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발생한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을 국제연맹에 제소하고 연맹규약 제15조에 따라 총회 개최를 요구하자, 일본은 조사단 파견 제안으로 맞대응했고, 1931년 12월 이사회는 조사단 파견을 결정했다.
조사단은 영국의 V.A.G.R. 리튼을 단장으로 하고,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독일 등의 장군·외교관을 포함하여 모두 5명이었다.
일본은 리튼 조사단이 도쿄에 도착한 다음 날인 1932년 3월 1일에 만주국의 건국을 선언케 하여 이를 기정사실화 하려 하였다.
조사단은 1932년 3월 13일 상하이에 도착한 뒤, 6월 초순까지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한커우(漢口), 베이징(北京) 등과 만주에서 조사를 마치고, 베이징에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10월 1일 중·일 양국에 전달되었고 2일 공표되었다.
보고서는 '만주국'의 건국을 중국인의 자발적인 운동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만주를 중국 주권의 범위에 포함시켰으며 지방 자치정부를 설치해 비무장지대로 할 것을 제안함과 동시에 만주에 관한 일본의 권익도 승인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보고서에 불만을 나타냈다.
결국 리튼 보고서와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다는 내용의 19인 위원회 보고서가 국제연맹 총회에서 채택되자 일본은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만주국 승인을 앞둔 1932년 일본에서도 큰 정치적 소용돌이가 벌어졌다.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가 해군 과격 청년장교 그룹이 중심이 된 ‘5 · 15 사건’으로 피살된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정당 내각 정치는 붕괴됐다.
이후 혼란을 거듭하던 일본 정국은 이해 8월 초 수습 가닥이 잡혔고 이는 국제 여론을 무시한 만주국 승인으로 이어졌다.
9월 13일 일본 추밀원의 ‘일만의정서’ 통과에 이어 9월 15일에 협정 서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일만의정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 2가지이다.
- 일본이 만주국 영역 내에서 기존 일-중 양국 조약. 협정, 기타 조관(條款), 및 공사 계약에 근거하여 향유하는 일체의 권익을 만주국은 승인한다.
- 양국은 공동으로 국방 책임을 지며 일본은 만주국 영역 내에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를 갖는다.
의정서는 이해 3월 10일에 이루어진 일본과 만주국 간 밀약을 지속시킨 외에 일본이 만주국의 교통망, 광산, 국방. 치안 등을 위탁 관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밀약이다.
일본은 조약 체결의 형식을 빌어 만주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든 것이다.
만주국은 일본이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1932년 3월 1일에 만든 괴뢰국가이다.
만주국 영역은 현재의 중국 둥베이(東北)지구에 있는 3성(省)인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으로 구성되었으며, 만주국 성립 후에는 러허(熱河)성도 판도에 넣어, 1940년의 행정구획으로는 18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931년 9월 18일 류탸오거우(柳條溝) 사건을 통해 만주사변을 일으킨 중심인물인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가타쿠라 다다시(片倉衷) 등 관동군 장교들은 사건 직후부터 당초의 만주에 대한 군사점령이라는 구상을 변경하여 괴뢰국가 건설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국민혁명(國民革命)에 부정적인 만주군벌의 시차(熙洽), 장징후이(張景惠), 짱스이(臧式毅), 장하이펑(張海鵬), 간츠산(干芷山), 마잔산(馬占山) 등에게 강요하여 각 성(省)을 독립시키고, 1932년 3월 1일에는 그들이 조직한 둥베이 행정위원회(東北行政委員會)에 의한 '건국선언'을 발표시켜 중국인 자신에 의한 독립이라는 형식을 갖추었다.
그리고 톈진(天津)에 은거하고 있던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비밀리에 만주로 데려와 3월 9일 푸이의 집정(執政) 취임식이 거행되어 '만주국'의 모양이 갖추어졌다(후에 푸이 '황제'로 즉위).
만주국 주권은 집정(황제)에게 있었으며 헌법은 없고 정부조직법이 이를 대신하였다. 입법·행정·사법·감찰의 4권 분립제였으며 집정(황제)의 자문기관으로서 참의부(參議府)가 있었다.
정부조직법에 의하면 행정권이 강력하였고 행정의 중심은 국무원(國務院)이었으며 수반은 국무총리였다. 집정(황제)에 대한 보필의 책임은 국무총리 한 사람만이 지고, 국무원 예하의 각 부 총장은 소관 사무에 대한 행정장관이었다.
따라서 국무총리 권한이 큰 편이었으며 국무총리의 참모적 지위에 있는 것이 총무청(總務廳)으로서 총무장관이 국무총리가 직접 관장하는 인사·회계·조달(調達) 등을 처리하였다. 이처럼 총무장관에게 실권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총무청 중심주의라 불렀다.
총무장관은 반드시 일본인이 임명되었으며 총무청 내 각 처장과 행정 각부 차장 이하의 일본인 관리를 사실상 감독하였다.
실질적 지배 주체인 일본 관동군은 4,000만 이상의 이민족(異民族)을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민족협화(民族協和)'를 내세우고 그것을 '오족협화(五族協和)'에 의한 '왕도낙토(王道樂土)'의 건설 이념으로 삼았다. 또한 만주국협화회(滿洲國協和會)라는 관제조직을 1932년 7월에 발족시켜 민중 지배의 첨병 역할을 맡겼다.
태평양전쟁에 의하여 만주국은 식량과 광공업(鑛工業) 원료의 생산 확대가 불가피하여 통제가 강화되었고 수탈적 요소가 더욱더 증대하였으며, 협화회가 수탈의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1943년 봄 이후부터 만주국의 물리적 기반인 관동군은 병력을 남방 각 지역과 본토 작전에 전용(轉用)하며 약체화하였으며, 1945년 8월 소련 참전과 일본 패전으로 만주국은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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