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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국외교의 함정 본문
“ 한반도는 중국 외교에 있어서 하나의 함정이었다. ......
......16세기 말에 명나라는 세차례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군대와의 공동작전으로 조선을 침입한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대와 싸움을 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었다.
청나라는 조선과 계속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 때문에 일본과 갑오전쟁(청일전쟁)이 일어나 조선의 종주권을 일본에게 양보하도록 강요받았을 뿐만 아니라, 타이완(대만)을 할양하고 일본에 거액의 배상을 지불하도록 압박받는 커다란 대가를 지출하였다.
1950년 한국의 남북 양쪽의 군사충돌이 다시 한번 중국을 전쟁의 진흙탕으로 끌고 들어갔다. 마침내 미국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에 서명하도록 강요하였지만, 이 전쟁은 중미 양국을 더욱 더 대립하도록 만들었고, 타이완도 미국의 대중국 억제전략의 범위 내로 들어갔다......
......중국은 역사가 주는 경험을 끊임없이 총결산하는 기초 위에서 다시 이 진흙탕에 빠져드는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
예쯔청(葉自成), 『중국의 세계전략』(이우재 옮김), 21세기북스(경기 파주, 2005년 5월), 533~544쪽.
중국 인민해방군이 압록강 도하
1950년 10월 19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압록강 도하를 시작했다. 이날 이후 중공군 18개 사단이 압록강을 통해 한반도로 진입, 한국전에 개입했다.
선발대는 이보다 닷새 전인 10월 14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에서는 10월 25일을 참전 기념일로 전했는데 이날은 중국군과 한국군 간의 첫 교전이 일어난 날이다.
10월 19일은 38선을 돌파한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한 날이다(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은 이보다 4일 전인 10월 15일 평양에 진입했다).
미국이 한국전 발발 이틀 뒤인 6월 27일 해군과 공군을 한국에 파병하고 제7함대를 대만 해협에 출동시키자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는 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미국이 대만을 침략한 것이라고 비난, 중국의 한국전 개입을 예고했었다.
중국은 한국전 개입을 ‘항미원조(抗美援朝)’로 부르고 있으며 ‘집과 국가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것(保家衛國)’으로 규정하고 있다.
맥아더 한국전 중국확대 성명
1951년 3월 24일 미국의 맥아더 원수는 한국전을 중국까지 확대하는 주장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1950년 10월 19일 중국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후퇴를 거듭한 끝에 1951년 1월 4일 서울을 공산군에게 내주었던 유엔군은 1월 25일부터 반격을 개시, 2월 10일 인천과 김포를 탈환하였고 맥아더가 확전 주장 성명을 발표한 3월 24일에는 다시 38선을 돌파하였다(우리 국군은 동해안 지역에서 다음 날인 25일 38선을 돌파함).
맥아더는 중국군의 개입으로 시작된 ‘새로운 전쟁’의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 만주폭격이 필요하다고 주장, 워싱턴의 트루먼 행정부와 대립하였다.
맥아더와 트루먼 행정부간의 대립은 트루먼 대통령이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 직에서 해임함으로써 끝이 났다. 맥아더가 확전주장 성명을 발표한 지 18일만의 일이었다.
중국 한국전 참전기념탑 丹東에 건립
1993년 7월 25일 한국전 종전 40주년을 이틀 앞두고 신의주를 마주보고 있는 중국 단둥(丹東)에서 확장된 한국전참전 기념관(중국명 ; 抗美援朝紀念館) 개관식과 함께 참전기념탑 제막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으로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껄끄러운 상태였다.
탑의 제자(題字)인 ‘항미원조기념탑(抗美援朝紀念塔)’은 덩샤오핑(鄧小平)이 썼으며 장쩌민(江澤民), 리펑(李鵬), 그리고 군사위 부주석 류화칭(劉華淸)도 각각 기념관을 위해 기념글씨를 써주었다.
이들의 제사는 당시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를 반영하듯 양국 관계의 언급은 없고 참전이 중국에 갖는 의의만을 언급하고 있다.
장쩌민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애국주의, 국제주의 그리고 혁명영웅주의 정신은 영원히 빛나리”라고 썼고 리펑은 “항미원조로 국가를 보위한 위대한 승리를 기념한다”라고 썼다.
한편 류화칭은 “항미원조 전쟁 중 영광스럽게 희생한 열사들의 공은 영원하라”이라고 썼다.
이날 기념식에는 후진타오(胡錦濤) 정치국 상무위원 겸 서기처 서기, 천무화(陳慕華) 전인대 상무 부위원장, 국무위원겸 국방부장, 중앙군사위 위원 츠하오톈(遲浩田)상장, 훙쉐즈(洪學智) 정협 부주석이 참석했다
추억...첸지천의 중국의 한국전 개입관련 발언 등
“역사문제는 좀 복잡하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2차대전 이후의 두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대립되어 있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원인은 국경선으로 군대가 접근하는 등 원인이 복잡하다. ”
-1993년 5월 24일 첸지천(錢其琛) 중국 부총리 겸 외교부장
10월 19일은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한국전 참전을 위해 압록강을 도하하기 시작한 날이며 동시에 국군과 미군이 북한의 수도 평양에 입성한 날이다.
미군이 한중 국경선으로 다가오자 중국은 이를 한반도에서 전진 저지하기 위해 국경선을 넘은 것이다.
최근 중국은 무장경찰이 맡아오던 북-중 국경선의 경비를 해방군이 맡도록 했다. 중국군이 한반도 쪽으로 전선을 전진시킨 셈이다. 반면에 미군은 지상군 재배치 프로그램에 따라 휴전선의 방위를 한국군에 맡기고 평택선으로 물러선다는 계획이다.
중국이 전진한 만큼 뒤로 물러서는 형국으로 기존의 완충지대 거리만큼 유지하려는 자세가 엿보인다.
원치 않았던 중국과의 군사 충돌로 소련에 세계 전략적 이익을 안겼던 6.25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미국의 전략적 고려가 읽히는 대목이다.
‘북극곰’에 이득을 안긴 피 튀기는 ‘재주’를 다시 부려서는 안 된다는 데 ‘왕서방’과 ‘엉클샘’은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은 첸지천에 관한 추억의 모자이크이다. 6.25에 관한 그의 언급은 한국전에 대한 중국의 입장과 시각을 반영한다. <차이나워처>
첸지천(錢其琛)의 추억... 한중수교와 6.25
필자가 홍콩 베이징(北京)특파원으로 활동하는 동안(1992~95년) 첸지천(錢其琛)은 중국 지도자 중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 리펑(李鵬) 못지않게 외국 언론에 빈번하게 등장했다. 이는 당시 그가 맡고 있던 외교부장이라는 직책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중국이 겪던 미증유의 외교적 격동상황이 그를 국제 언론의 ‘스타’로 만든 것이다.
그가 중국 외교의 조타수로 있던 1988년부터 1998년까지 10년간은 중국 외교의 격동기였다. 외교부장에 선출된 지 1년 뒤에 벌어진 6. 4 천안문 사태는 중국 외교를 개혁개방 이후 최대의 위기 상황에 빠져들게 했다. 서방 각국은 앞을 다투어 중국에 대해 경제 외교적 제재를 가했다.
‘죽(竹)의 장막’의 빗장을 스스로 연지 10년 만에 중국은 결코 원치 않았던 ‘고립 상황’에 다시 빠져든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동구권공산정권과 소련의 붕괴는 ‘공산’ 중국의 외교적 처지를 더욱 고단하게 했다.
첸지천은 취임 초 연거푸 밀어닥친 이 위기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를 계기로 국제무대에서 외교활동공간을 취임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폭 확대하고 발언권을 높이는데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그가 성취한 업적중 하나가 바로 1992년 8월의 한중수교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대만과 국교를 유지해오던 한국과 수교를 성사시킴으로써 중국이 거둔 외교 경제적 실리는 막대했다. 우선 당시 경제력을 무기로 동구권, 아프리카, 중남미 등지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대만의 공세적 외교를 좌절시키는 단초를 마련했다. 한국의 ‘선택’을 계기로 대만은 동구권과 소련의 붕괴라는 새로운 국제환경 속에서 외교적 활동공간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거두어야했다.
또한 한반도의 남북한 모두와 수교함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제고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한반도 주변 4강중 중국에 앞서 소련이 남북한 양국과 수교를 했으나 소련은 북한을 거의 포기하다시피한 점이 중국과 다르다.
중국은 ‘옛 친구’를 크게 섭섭하게 하지 않는 가운데 ‘새 친구’를 얻음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향상시켰던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한국과의 수교는 양국의 경제교류를 보다 활성화 하는데 그치지 않고 머뭇거리던 미국과 일본, 그리고 다른 서방국가들의 중국시장 진출 의욕을 자극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야말로 일석삼조(一石三鳥)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혹자는 한중수교가 중국이 건국 후 이룩한 외교성취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업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첸지천 역시 중국 건국이후 역대 외교부장중 저우언라이(周恩來)에 버금가는 업적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필자가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처음 본 것은 1992년 12월 16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였다. 당시 홍콩특파원 신분으로 베이징 상주 특파원 준비 등을 위해 베이징에 출장 와 외교부를 들락거리던 필자는 외교부로부터 외교부 신년 하례회에 참석을 초청 받았다.
초청장을 전달한 중국 외교부 관리는 이 모임에는 첸지천 외교부장이 참석, 베이징 상주 외국특파원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답변할 것이니 꼭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새해가 되려면 보름 정도 남아 있어 우리식으로 하자면 ‘1992년 송년모임’이어야 할 텐데 중국인들은 이를 ‘93년 신년 초대회’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 이색적이었다.
실물로 본 첸지천의 첫 인상은 외교관치고는 키가 작다는 것과 그리고 동안(童顔)에 눈빛이 젊은 사람 이상으로 반짝인다는 것이었다. 첸지천은 기자들의 질문을 받기에 앞서 외교부장으로서 1992년을 회고했다. 다음은 그의 서두 발언의 요약이다.
“1992년은 성취의 해였다. 1992년 초 덩샤오핑의 남부 방문이 있었고 14차 당대회를 치루었다. 현재 중국이 처하고 있는 상황은 매우 좋다. 154개국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60개국 부총리급 이상의 외국지도자를 초청했으며 이달 25일까지 3명의 국가원수가 방문한다. 베이징에는 180명의 외신기자들이 주재하고 있고 올해에만 연인원 3,000여명의 외국기자들이 중국을 취재하기위해 중국을 방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짧은 인사말은 1992년이 중국 외교의 ‘득의(得意)의 한해’였음을 잘 요약하고 있다.
뒤 이어진 기자들의 질의에 대한 그의 응답은 상당히 짤막했다. 질문 보다도 답변이 더 짧은 경우도 있었으며 원칙 천명으로 그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하고자 할 말을 다 한다는 인상이었다. 결코 친절한 답변은 아니지만 질문의 핵심을 꿰뚫고 하고자하는 발언에 군더더기를 전혀 붙이지 않는 ‘하드 보일드’식의 답변이었다. 질문이 끝나면 그가 무슨 답변을 어떤 식으로 할까를 기대하게 하는 능란한 ‘답변자’였다.
그 날 질문권은 주요 강대국 특파원들에 ‘분배’된 인상이었는데 수교한 첫해여서 한국 특파원단에게도 질문권이 주어졌다. 다음은 질의응답의 요약이다. (질문은 간단히 정리한 것이지만 답변은 거의 전부를 기록한 것이다)
“ -클린턴 미대통령이 최근 중국에 대한 최혜국대우(MFN)지정 취소를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발언했는데 이에대한 입장은.(미국특파원)
▲ MFN문제는 미국과 중국이 상호 이익되는 방향으로 처리될 것으로 예상한다. 클린턴의 발언도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하고 있다.
-옐친 방문에 따른 러중관계 전망은.(러시아 타스 통신)
▲엘친의 중국방문은 중국과 러시아의 관계증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한다. 러시아와 중국 간에는 논의가 필요한 여러 현안을 갖고 있으며 이번의 옐친의 방문은 대단한 성공을 거둘 것으로 생각한다.
-프랑스가 대만에 대해 미라지기를 판매하려고 하는데.(프랑스 르피가로)
▲프랑스는 그 계약 건에 대해 명백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홍콩문제와 관련하여 영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데.(영국 특파원)
▲중국의 항구적인 이익문제와 관련해서는 양보가 있을 수 없다.
-한국 대통령 선거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선거결과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한국 연합통신)
▲한국의 내정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는 선거결과와는 관계없이 변하지 않을 것이다.
-대만의 선거에 대해 묻고 싶다.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반대당이 의회의 다수당이 될 경우 중국은 어떠한 입장을 취할 것인가.
▲중국의 기본적 입장은 ‘1개의 중국’원칙에 따라 대만은 중국의 하나의 성이라는 것이다.
-내년에 외교관계를 맺을 국가는.
▲1월에 아프리카의 국가를 초청할 계획이다.
-홍콩의 신임 총독 패튼의 개혁은 온건한 것처럼 보이는데 왜 논쟁이 벌어지는가.
▲홍콩 문제는 1997년 반환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논의가 이루어져할 사안이다.
첸지천이 외교부장으로서 외교부 신년하례회에 참석한 것은 이 것이 마지막이었다. 1993년과 1994년 말 외교부 신년 하례회는 외교 부부장이 주재하였다. 외교부 관리에게 물어보니 1993년 3월 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부총리 겸 외교부장으로 선출되어 ‘영도자급’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에 의전관계상 이러한 자리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첸지천이 신년 하례회에 참석하지 않으므로 해서 1993년말 특파원들과의 질의응답은 맥이 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필자 역시 기록도 하지 않았다. 부부장으로 격이 낮아져서가 아니라 첸지천이 자아내던 ‘긴장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해인 1994년 말 신년 하례회에서는 이런 ‘맥빠진’ 질의 응답시간 조차 사라졌다.
1993년 5월 24일 한국방문을 앞두고 첸지천은 베이징 상주 한국특파원들과 기자회견을 가졌다. 첸지천으로서는 한국과의 수교 후 부총리 겸 외교부장 자격으로서 첫 한국방문이었기 때문에 베이징 상주 한국특파원들에게 기자회견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하지만 준비과정에서 몇 가지 해프닝이 있었다.
외교부 신문사 관리들은 일본특파원단과의 공동기자회견을 준비했다. 한국과 일본을 순방한다는 이유였다. 또 질의응답 방식도 양국 특파원단이 준비한 질문을 대표를 통해 일괄해서 질문하면 첸지천이 그에 대한 답변을 해나가겠다는 것이다.
한 질문이 끝난 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괄질문 일괄답변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양국 특파원단에게 주어진 시간이 30분이니 만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었다.
이러한 외교부의 통보에 대해 한국특파원단은 공식적인 한국방문이 처음이니 만큼 한국특파원단과의 별도의 기자회견을 가져야하며 또 일괄질문 일괄답변 방식이 아닌 질의답변 식으로 회견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외교부는 ‘관례’를 들어 난색을 표했으나 결국 이를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특파원단 내에서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자’자는 입장과 기자들을 들러리 세우는 그런 기자회견 방식대로 기자회견을 갖느니 차라리 보이콧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이 대립되어 잠시 갈등을 빚었다.
특파원단의 입장이 후자 쪽으로 정리된 이후에는 실무를 맡고 있는 외교부관리와 한국특파원들과의 마찰이 빚어졌다. 급기야는 기자회견 며칠 전 노재원(盧載源)초대 주중대사의 이임 리셉션 장에서 한국 특파원들과 중국 외교부 관리가 언성을 높이며 언쟁을 벌이는 상황이 빚어졌다.
각자의 주장을 펴던 중 한 한국 기자가 중국외교부의 이러한 일방적인 기자회견 방식에 대해 기사를 통해 ‘비평(批評)’을 하겠다고 하자 불만스러운 표정 가운데서도 외교적으로 상대하던 그 외교부 관리가 발끈한 것이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그 중국 외교부 관리는 “우리는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비평에도 꿈쩍 하지도 않았다. 마음대로 비평을 해보아라. 그렇다고 우리가 두려워 할 줄 아느냐”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비외교적인 언사를 내뱉고는 리셉션 장을 나가버렸다.
기자회견이 물 건너갔나 했는데 그 다음날 외교부로부터 우리 측의 요구를 모두 수용한다는 뜻이 전달됐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 외교부 관리가 갑자기 흥분했던 것은 ‘비평(批評)’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당시 ‘비평’은 ‘숙청’을 의미했고 그 것은 또 죽음 아니면 투옥, 그리고 하방(下放)을 의미했던 것이다.
‘당신을 비평한다’는 말은 중국인들에게는 ‘당신 인생을 끝장 내겠어’라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같은 한자어이지만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이 느끼는 뉘앙스 차이는 천양지차였던 것이다. 중국 외교부가 한국 특파원단의 요구를 수용한 것은 외교부장의 첫 공식 한국방문에 재를 뿌릴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어찌 보면 잘못된 용어의 선택이 역효과가 아닌 정반대의 긍정적인 효과를 거둔 셈이었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기자회견은 그러나 회견 당일 또 한 번의 해프닝을 연출했다. 12명의 상주기자 중 4명이 회견시간을 대지 못하고 회견이 진행되는 도중에 회견장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회견 시작 직전 외교부 관리가 좌석배치를 바꾸고 회견 중에는 요란한 구두소리로 회견 진행이 방해받는 소란 속에 15분간의 기자회견이 이루어졌다.
한 특파원은 일본특파원단과의 기자회견을 위해 기자회견장을 떠나던 첸지천이 회견중간에 들어온 기자들은 슬쩍 쳐다보았는데 ‘한심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해프닝 속에 이루어진 기자회견이었지만 기자회견 자체는 양국관계의 ‘민감한’ 부분에 대한 중국 측의 입장을 짐작할 수 있게하는 유익한 것이었다. 그리고 짧은 답변 속에 할 말을 다하는 첸지천 특유의 답변 방식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다음은 기자회견의 요약이다.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문제에 관한 중국의 입장은.
▲이 문제에 관한 중국의 입장은 명백한 것이다. 가장 좋기는 회담 당사자들이 접촉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가능한 대로 해결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현재 미국과 조선(북한)이 접촉하고 국제원자력기구도 북한과 접촉을 계속하고 있다. 한국도 고위급 회담을 제의해 놓고 있다. 이는 좋은 발전 상황이다.
-북한의 핵개발 능력에 대해 중국은 어떠한 판단을 갖고 있는가.
▲솔직해 말해 우리는 북한의 핵개발 능력에 대해 잘 모른다. 핵분야의 협력이 전혀 없다. 평화적 핵능력 이용문제와 관련한 협력도 없다.
-한중 항공협정이 관제이양점 문제로 늦어지고 있는데.
▲중한 양국은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 편리한 교통수단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항공협정은 하루 빨리 체결되어야한다. 관제이양점 문제는 담판을 통해 양해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중국 외교부장 자격으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장쩌민(江澤民)주석의 한국방문문제도 협의되는지.
▲이번 방한 기간동안 한중 양국간 관계 발전방안에 대해서 논의할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 각하와 우리 사이에 고위급 인사의 방문을 결정하지 않았으며 장쩌민 국가주석이 귀국을 방문할 계획도 아직은 없다.
-이번 방한 기간 중 한국전 참전문제에 관해 언급할 것인지, 또 국립묘지에 참배할 것인지.
▲역사문제는 좀 복잡하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2차대전이후의 두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대립되어 있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원인은 국경선으로 군대가 접근하는 등 원인이 복잡하다.
이번 방한은 중국 외교부장으로서는 첫 한국방문이다. 양국이 외교관계 수립을 한지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서로간의 기쁜 일이 많이 있었다. 양국은 여러 분야에서 협력관계를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중한 양국은 지리적으로 가깝다.
산둥(山東)반도에 가면 한반도의 닭 우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그러나 최근 한 세기동안 양국 사이에 내왕이 없었다. 이번 본인의 방한은 김영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첫 중요한 고위급 회담이 되었다.
-중국이 정치적으로는 북한을 중시하고 한국과는 경제적으로 중점을 두는 접근을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데.
▲중국은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정책을 갖고 한반도 문제를 다루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는 유무상통의 원칙에 따라 처리하고 있다. 북한과는 지리적으로 접근돼 있어 경제적 내왕이 많았다. 한국과는 경제 기술 투자분야의 협력을 하고 있다.
중국의 한국전 참전 문제와 관련한 첸지천의 답변은 핵심을 피하고 있다. 회견이 끝난 뒤 일부 한국기자들이 중국 측 통역에게 뭘 빠뜨린 것이 없느냐고 물었던 것도 깔끔하지 않은 그의 답변 태도때문이었다. 물론 중국 측 통역은 약간 당혹스런 표정이긴 하였지만 정색하며 외교부장이 한 말을 가감 없이 통역했다고 강조했다.
한중 수교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던 6.25 참전문제에 대한 첸지천의 이러한 태도는 6.25 참전과 관련하여 중국과 우리가 결코 견해를 같이 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일깨우고 있다.
첸지천이 이 기자회견을 할 때는 한중관계가 ‘밀월시대’라는 표현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가까웠다. 베이징에서 상주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특파원단이 일본 특파원단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베이징식 기자회견’ 방식을 한국특파원단의 요구에 따라 변경한 것에서도 중국 측의 한국에 대한 배려를 읽을 수가 있었다. 그답지 않은 모호한 답변은 아마도 피해당사자인 한국에 대한 최대한의 ‘외교적’ 배려였다.
6.25 참전에 대한 중국 측의 본심은 마오쩌둥(毛澤東) 탄생 100주년을 즈음하여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첸치첸의 입을 통해서였다. 첸지천은 마오가 태어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이해 12월 26일 베이징에서 열린 ‘마오쩌둥의 생애와 사상 연구토론회’에서 연설을 통해 마오가 한국과 베트남 및 대만에서 미국과 대결해 정의를 신장하고 평화를 수호했다고 말해 한국전참전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첸지천은 마오가 “ 조선과 월남 및 대만의 3개 전선에서 미국과 대결해 미국의 방자하고 오만한 기세에 엄청난 타격을 가하여 우리나라 군의 권위와 국가의 권위를 확립했다”고 말하고 그는 이로써 “중국 외교에 독립 자주적이며 정의를 신장하고 원칙을 견지하며 평화를 수호하는 독특한 특징을 확립했다” 고 말했다.
한국특파원단과의 기자회견 때와는 달리 확실한 어조로 6.25 참전에 대한 중국 측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1999년 6월 30일)
중국인 57% 한국전 재발시 북한 지원해야
중국인의 과반수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할 경우 중국 정부가 북한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AFP 통신이 16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중국사회조사소가 중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57%가 한국전쟁 재발시 북한을 도와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북한이 필요로 한다면 핵무기를 보유해도 좋다는 의견도 절반을 넘은 54%에 이르렀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를 제거하기 위해 이중잣대를 사용해 압력을 가하고 있다고 답한 비율도 93%를 기록했다.
이는 중국인에 있어 反美親북한의 기본적인 입장이 지난 50년 한국전쟁 때와 그다지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반영해 주목된다.
북한 문제가 전쟁 이외에는 다른 해결 방안이 없을 경우 중국은 북한을 '재차 지지해야 한다'고 답한 사람이 57%, '모르겠다'가 24%, '지지해선 안된다'는 19%로 각각 나타났다.
중국 한국전쟁을 제국주의 침략전쟁으로 규탄
당기관지 인민일보를 비롯한 중국 관영매체들은 25일 한국전쟁을 일본군의 중국 침공에 의한 항일전쟁과 같은, 중국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관영매체는 중국군 한국전쟁 참전 50주년인 이날 1면에 일제히 게재한 '애국주의와 혁명영웅주의의 불후 업적'이라는 제하의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항미원조 전쟁의 승리는 항일전쟁에 이어 중국 인민이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해 거둔 또 하나의 승리"라고 규정한 뒤 "이는 조국의 안전을 수호하고 조선 인민을 지원, 아시아와 세계 평화에 불멸의 공헌을 했다"고 강조했다.
인민일보 사설은 '50년전 평화와 정의가 패권과 사악함에 승리한 항미원조 전쟁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영광과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면서 지금의 경제발전과 안락한 생활은 어렵게 얻어진 것임을 젊은 세대에 일깨웠다.
중국 당국이 이처럼 사설을 통해 새삼스럽게 한국전을 제국주의 침략전쟁으로 규정한 것은 대륙이 미국 등 외세의 개입을 무릅쓰고 양안 통일에 나서겠다는 단호한 결의를 대만과 미국 등에 강력히 경고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이와 관련 사설은 "중국은 패권주의와 강권정치에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주권과 국가이익을 위해 싸울 것'이라고 천명했다.
중국은 참전 50주년 기념행사의 대대적인 개최를 계기로 국제무대의 자국위상을 외부에 과시하는 한편 내부에 대해선 애국주의를 고양시키려는 모습을 보여왔다.
관영매체들은 이달 들어 연일 한국전 참전에 관한 특집기사 및 기획물을 내보내면서 분위기를 한껏 부추겨 왔다.
한편 이날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는 중국군 총사령관인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과 리펑(李鵬) 주룽지(朱鎔基) 리루이환(李瑞環) 후진타오(胡錦濤) 리란칭(李嵐淸) 등 최고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참전 50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장 주석은 연설을 통해 "항미원조 전쟁의 승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 인민의 위대한 승리이자 정의를 지키고 강권에 반대하는 장거"라면서 "역사와 현실의 눈으로 이 전쟁을 관찰해 인류 평화와 발전의 숭고한 사업을 촉진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1951년 1월 4일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북중(朝中)연합군[중공군]이 38도선 이남과 서울 그리고 한강이북을 점령한 후 축배를 즐기는 모습과 한강 이남을 점령하기 위하여 정찰하는 모습
모택동은 38도선 이남 월경과 서울 점령을 승인했다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이다
1943 년 10 월 5 일 야전 훈련 후 촬영한 제 88독립저격여단( 국제여단, 각 민족 빨치산 부대) 대원 사진 . 제 1 열 좌로부터 : 바탈린 ( N. S. Batalin, 巴达林 , 소련 ), 정치 부여단장 이조린 ( 李兆麟 , 일명 張壽籛 [ 张寿篯 ], 중국 ), 왕일지 ( 王一知 , 주보중 부인 ), 여단장 주보중 ( 周保中 , 중국 ), 김일성 ( 金日成 , 제 1 영장 , 조선 ), 부여단장 시린스키 (Timofei Nikitovich Shirinsky, 什林斯基 , 1904~?) 。 제 2 열 : 장광적 ( 张光迪 , 중국 ), 풍중운 ( 冯仲云 , 중국 ), 왕효명 ( 王效明 , 중국 ), 왕명귀 ( 王明贵 , 중국 ), 팽시로 ( 彭施鲁 , 중국 ) 。 제 3 열 : 양청해 ( 杨清海 , 중국 ), 서철 ( 徐哲 , 조선 ), 강신태 ( 姜信泰 , 강건 , 조선 ), 김광협 ( 金光侠 , 조선 ), 수장청 ( 隋长青 , 중국 ) 。 제 4 열 : 안길 ( 安吉 , 조선 ), 박덕산 ( 朴德山 , 조선 ), 최용진 ( 崔勇进 , 조선 ), 도우봉 ( 陶雨峰 , 중국 ), 김경석 ( 金京石 , 조선 )[사진: 소련 제88국제여단 소속원 - 중국 길림성 도서관]
한국전쟁의 주도세력은 북한 노동당 내부 만주파(동북항일연군 내부 제 88독립저격여단)이다
만주파(滿洲派)란 북한에서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을 한 인물들을 가리킨다. 김일성이 지휘했던 부대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제 6사에서 활동하지 않은 동북항일연군의 요인들 중에서도 최용건 등 같이 만주파에 포함된 인물들이 있다(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출신자들로 이루어진 세력. 주요 인물로 김일성, 김책, 최용건, 최현, 김일 등이 있다)
이 만주파는 해방이후 갑산계 소련계 남로당계 등을 정권투쟁에서 몰아내고 북한의 정치·군사 분야를 이끌어가는 핵심세력이 되었으며 북한의 현대사는 김일성과 만주파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8월 종파사건 이전까지 김일성은 북한과 조선로동당의 전체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고 만주파의 영수에 불과했다.
1.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에서 만들어진 항일 빨치산 조직(소련군의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성격)으로 지금까지 만주에서 활동하던 공산당계의 조선인, 중국인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문호를 넓혀 우파 항일 무장단체를 받아 들여 1936년부터 개편되어 갔다.
주보중이나 김일성 등 중국인과 조선인의 유명한 파르티잔(Partizan, 빨치산) 소속으로 나중에 소련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조직으로 개편하여 그 구성원 중 김일성을 중심으로 북한 권력의 중추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다)
(1)성립
1930년대 초반에서 만주국(満州国, 1932년 3월 1일 건국일)에서 중국 공산당 지도하에 조선인, 중국인의 항일 빨치산 부대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이 편성되어 있었지만, 조선인 대원 400명 이상이 친일 스파이로 의심 받고 숙청된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 등으로 탈출도 잇따라 조직이 효과적으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한편, 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통일 인민전선(統一人民戦線)의 결성을 호소되면서 중국 공산당도 8월 테제를 발표하고 제2차 국공합작(第2次国共合作)을 호소했다. 이에 따라 만주에서도 “항일 반만(抗日反満)” 구호로 내세우면서, 국민당 계열의 독립 무장단체를 포함한 모든 단체와 합작하여 흡수를 목표로 정책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이미 1934년경부터 국민당계열의 마적(馬賊, 말 타고 다니는 소수 무장단원의 군벌)이나 의용군(義勇軍)도 공산당의 지도하에 정리하려고 시도했던 것이지만, 토착 무장단체는 주로 부농(富農), 부호(富豪)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해 공산주의 색깔(노동자 계급 령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을 싫어하여 국가자본주의(국가사회주의) 일만측(日満側, 일본과 만주국)에 돌아는 경우가 많았다. 최대한 공산주의 색깔을 엷게 하여(통일전선 구축) 존속하고 있는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소규모 마적과 독립 무장단체를 흡수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으로 재편되어 갔다.
그러나 통화성(通化省)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계열의 최대의 항일 무장단체 왕봉각(王鳳閣)
의 반만항일군(大刀会, 대도회)과 만주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조선인 민족주의자 무장단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우파는 공투하고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집단의 참여를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큰 세력이 될 수 없었다.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은 제1. 2군이 남만주, 제4. 5. 7. 8. 10군이 동만주, 제3. 6. 9. 11군이 북만주로 확장했다
1936년 우선 남만주군(南満)이 제1로군(第一路軍)이 되고, 이것이 두고 두고도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주력부대인 것으로 계속되어 나가게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거주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간도는 민생단 사건이 꼬리를 이어 내분이 계속되고 좀처럼 재편은 부진했지만 1937년에는 동만주군 제2로군(東満軍 第二路軍)이 되었고, 1939년 북만주군 제3로군(北満軍 第三路軍) 것으로, 일단의 재편을 하게 되었다[처음 만들어졌을 때에는 제1군으로부터 제11군까지 존재했으며, 제1군, 제2군이 남만주에서, 제4, 5, 7, 8, 10군이 동만주, 제3, 6, 9, 11군이 북만주에서 활동하였다. 후에 남만주의 군은 제1로군으로 동만주의 군은 제2로군으로 북만주의 군은 제3로군으로 재편성되었다]
(2) 편성
편성 당시의 제1로군(第1路軍)의 인원은 중국 공산당측 자료 "中共延辺党組織活動年代記(중공연초당조직활동연대기)“ ”동북항일연군투쟁사(東北抗日聯軍闘争史)“ 등 6,000여명 추측되고 일본측의 ”만주공산 비적의 연구(満州共産匪研究)“에 따르면 1,630명 정도에서 상당한 차이가있다.
또한 동북항일연군 아래의 인물은 사사키 하루타카(佐々木春隆) "한국전쟁 이전의 한국 독립운동 연구“와 강재언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라했다.
서대숙 "김일성 사상과 정치 체제“가 자세 하지만, 동북인민혁명군 시대(東北人民革命軍時代)에 전사 한 인물이 실리는 등 착오가 보여 자료로 피했다.
해방 이후 최현(崔賢),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庸健), 김책(金策), 강건(姜健), 최용진(崔勇進). 김일(金一), 이영호(李永鎬)은 살아남아 나중에 북한의 요직을 차지한다[동북항일연군을 만주파로 지칭하고 있으며 제88독립저격여단을 소련군으로 지칭하고 있다]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부총사령 왕덕태 [副総司令-王徳泰]
정치위원 위증민[政治委員・魏拯民]
제 1로군 군단장 양정우[ 第一軍 軍長-楊靖宇]
제1사단 사단장 정빈[第一師 師長-程斌]
· 제3여단 정치부 주임 이질수[第3団 政治部主任-李鉄秀]
제4여단 단장 수상태 [第4団 団長-隋祥太]
제6여단 단장 유인봉[第6団 団長-劉仁鳳]
제2사단 사단장 조국안[第二師 師長-曹国安]
제8여단[第8団]
제3사단 사단장 왕인재[第三師 師長-王仁斎]
제5여단[第5団]
제7여단[第7団]
제2로군 군단장 왕덕태[第二軍 軍長-王徳泰]
정치주임 오성륜(前),이청(後)[政治主任-呉成崙. 季青]
제4사단 사단장 안봉학[第四師 師長-安鳳学]
제1여단 단장 최현[第1団 団長-崔賢]
제2여단[第2団]
제3여단[第3団]
제5사단 사단장 진한장[第五師 師長-陳翰章]
제4여단[第4団]
제5여단[第5団]
제6여단[第6団]
제6사단 사단장 김일성[第六師 師長-金日成]
제7여단 단장 김주현[第7団 団長-金周賢]
제8여단 정치위원 박덕산(김일)[第8団 政治委員・朴徳山(金一)]
제9여단[第9団]
제10여단[第10団]
독립여단 여단장 방진성[独立旅 旅長-方振声]
제1여단 단장 최춘국[第1団 団長-崔春国]
제2여단[第2団]
교도여단[教導団]
제2로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 주보중[第二路軍 総司令兼政治委員-周保中]
참모장 최용건(최석천)[参謀長-崔庸健(崔石泉)]
제4군 군단장 이연평[第四軍 軍長-李延平]
부군단당 왕광우[副軍長-王光宇]
제1사단 사단장 관서범[第一師 師長-関書範]
제1여단[第1団]
제2여단[第2団]
제3여단[第3団]
제2사단[第二師]
제2사단 정치위원 도정비[第二師 政治委員-陶浄非]
제4사단 정치위원 김광협[第4団 政治委員-金光侠]
제5여단 정치위원 박동화[第5団 政治委員-朴東和]
제6여단[第6団]
제3사단 사단장 이문빈[第三師 師長-李文彬]
제8여단[第8団]
제9여단 정치위원 강신태(강건)[第9団 政治委員・姜信泰(姜健)]
제7군 군단장 이학복[第七軍 軍長-李学福]
군단장 대리 최석천(최용건), 경낙정[軍長代理-崔石泉,景楽亭]
정치주임 정로암, 포림(政治部主任-鄭魯岩,鮑林)
제1사단 사단장 왕여기[第一師 師長-王汝起]
정치부 주임 팽시노[政治部主任-彭施魯]
제1여단 여단장 최용진[第一団団長-崔勇進]
제2사단 사단장 유기창[第二師 師長-鄒其昌]
제7여단 정치위원 이영호[第七団政治委員-李永鎬]
제3사단 사단장 경낙정,운학영, 수장청[第三師 師長-景楽亭,雲鶴英、隋長青
제8군 군단장 사문동[第八軍 軍長-謝文東]
제10군 군단장 왕악신[第十軍 軍長-汪雅臣]
구국군[救国軍]
의용군[義勇軍]
제3로군 총사령관 장수전(이조린)[第三路軍 総司令-張寿籛(李兆麟)]
참모장 허형식[参謀長-許亨植]
정치위원 빙중운, 김책[政治委員-馮仲雲, 金策]
제3군 군단장 허형식[第三軍 軍長-許亨植]
제6군 군단장 장수전[第六軍 軍長・張寿籛]
제7군 군단장 이화당[第九軍 軍長・李華堂]
제11군 군단장 기치중[第十一軍 軍長・祁致中]
정치부 주임 김정국[政治部主任・金正国]
1932년 3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만주국 지도]
(3)활동 상황
ㄱ.제1일로군 제1군(一路軍第一軍)의 서쪽정벌
1936년 남만주에서 제1일로군(第一路軍)이 성립한 당시 중국 공산당은 소위 장정(長征) 한창이었지만, "항일동정(抗日東征)“ 깃발을 들고 산서성(山西省)에서 하북성(河北省)에 진출하여 동쪽으로 향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제1일로군 1군(第一路軍第一軍)의 첫 번째 활동은 이에 잇따라 움직을 하여 서쪽을 정벌하는 것이었다.
제1차 서쪽 정벌은 제1사단(第一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6년 6월 하순, 번시(本渓,본계-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동부의 중공업도시)와 안동성 봉성현(安東省鳳城県)의 경계에 있는 화상 모자산(和尚帽子山)을 출발하여 요양(遼陽)에서 남만주 철도와 요하(遼河)를 넘어 요서(遼西)에서 열하(熱河)로 나아 가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 요녕성 수암현(岫岩縣)의 산악 지대에서 만주국군(満州国軍)에 포위되어 뚫고 탈출했지만, 다수의 도망자, 전사자를 내고 돌아갔다.
제2차의 서쪽정벌은 제3사단(第三師)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전원이 기마대(騎馬隊)가 되어 결행(決行) 하게 되었고, 1936년 11월 하순 싱징현(흥경현,興京県) 경계에서 기마로 출발하여 만주국군(満州国軍)의 추격을 받으면서 청원(清原)에서 철령(鉄嶺)을 넘어 요하(遼河)유역에 도달 하였다
그러나 따뜻한 겨울을 위한 요하(遼河)가 결빙(氷結, 물 따위가 얼어붙음) 되지 않고, 한달의 행군으로 피폐 결국 되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 기간 동안 400명의 대원이 백 수십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 제3사단(第三師)의 대원 수가 400명이었다고 한다면, 6개사단(6個師) 모든 동일 숫자라고 하는 단순 계산으로 제1일로군 전체(第一路軍全体)는 2400명 정도가 6000여명으로 하는 것으로 지나치게 과대 포장되었다고 알 수 있다
이듬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1로군 제1군(一路軍第一軍)은 서쪽 정벌에 실패하면서도 또한 팔로군(八路軍)과의 연계를 지향 일본군의 후방을 위협하는 목적으로 제3사단(第三師)의 생존을 중심으로 청원(清原), 서풍(西豊), 개원(開原) 일대로 활동을 계속하였고 별동대가 심양(瀋陽), 무순(撫順) 일대에 진출하는 등 소모(消耗)를 거듭했다.
ㄴ.김일성 부대에 의한 보천보 습격
한편, 1936년 제1로군의 제2군(第一路軍 第二軍)은 장백지구(長白地区)에 근거지를 만들려고했다. 제4사단 사단장(第四師 師長) 안봉학(安鳳学)체포되어 투항하였고 제2군 군단장(第二軍軍長) 왕덕태(王徳泰)이가 만주국군에 포위되어 전사하는 등 상당한 희생하면서 우선 김일성이가 사단장을 맡고 있는 제6사단(第六師)의 근거지 개척에 성공하여 1937년에는 제1로군(一路軍)의 제1군 제2사단(第一軍第二師)과 제2군 제4사단(第二軍 第四師)이 장백(長白)에 근거지를 옮기고 있었다.
원래 1932년에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을 시작한 것은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반석현위원회(中国共産党満州省委磐石県委)이었지만, 그 당시부터 고참 조선인 멤버에 오성륜(呉成崙) [全光, 전광]], 이상준(李相俊)[이동광(李東光)]이가 있었다.
오성륜(呉成崙) 제2군(第二軍)의 정치주임이었고 이상준(李相俊)도 제2군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보여지지만, 그들은 민생단 사건(民生団事件)의 반성에 따라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의 지지를 얻고 조선인의 민족의식에 호소하기 위하여 재만주지역 조선인 조국광복회(祖国光復会)를 조직하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장백(長白) 침공은 이에 따른 것으로 제6사단(第六師)의 지지기반 구축 공작을 시작하고 그 일환으로 압록강 유역의 조선반도 내부 함경남도 (현재 양강도) 갑산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박금철(朴金喆), 박달(朴達) 등 공산주의 단체 (후에 조선 노동당 갑산파)와 연락을 하게 되었다.
1937년 6월 제6사단(第六師)은 압록강을 건너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甲山郡普天面保田里)[보천보(普天堡)]의 습격(보천보 전투)에 성공했지만, 이것은 갑산그룹 안내와 참가해서 성공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김일성은 조선뿐만 아니라 조선반도를 단속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일본측에서도 공비[共産党匪賊(공산당 비적)]으로 거물시 되는 것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권력을 독점 하는데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고도 한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이 전년(前年) 제6사단(第六師)의 장백(長白, 백두산) 근거지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수 십명 규모의 소대 김일성 부대를 자칭 무송(撫松)과 장백(長白)에 출몰하여 약탈을 반복 만주군 수비대와 충돌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한이 해(年)에 들어서는 갑산 그룹의 활동도 활발해 지고 조선인 부호(朝鮮人富豪)에서 금품을 갈취 등의 사건도 있었다. 또한, 최현를 단장으로하는 제4사단 제1여단(第四師第一団)이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 무산(茂山)에 진입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미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을 전년(前年) 조선반도의 신문은 ‘김일성 부대’의 동향을 전했다. 1936년 9월 11일자 매일신보는 "혜산 건너 편에 출몰하는 적단(賊団, 도적 단체)는 150 - 160명으로, 3분의 1이 만주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이고 ... 관헌과 같은 복장으로 소련식 중국식의 소권총, 강한 기병2정(軽機二丁), 대포1문(大砲一門)을 가지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계(東北抗日聯軍系)에서 장백현(長白県) 방면에 파견된 이 부대의 수령(首領) 김일성이라고 한다. 이들은 15-20 명씩 소대 약탈반을 꾸어 조선인 부락에서 식량을 약탈하였다"와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고 정보를 싣고 있다. 참고로 뒤를이었다 경성일보 기사에서는 "비수(匪首, 도덕의 두목) 김일성 일당“이 있고, 제6사단(第六師)가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1937년 5월, 최현 부대(崔賢部隊)가 무산(茂山)에서 남하(南下) 하여 혜산 경찰서 관내(恵山署関内),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태리 상흥경수(上興慶水) 부락 고뢰조재목작업소(高瀬組材木作業所,)을 습격했다
금품 많은 것을 약탈 한 후, 주 임무인 일본인 1명, 조선인 5명, 중국인 30명을 납치해 강유역으로 도망친 후 몸값을 요구했다.
그에 이은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이다. 보천보 300호 남짓의 마을에서 일본인 26호, 중국인 2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인이다. 그래서 무차별 적으로 금품을 강탈하고 동사무소 나 소방 회관, 우체국, 초등학교 등에 방화하고 도망한 것은 충격을 받은 단속측 조선총독부는 김일성과 최현에 거액의 상금을 걸고 수배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크게 보도했다. 이 신문의 논조는 그들을 비적(匪賊)으로 비난하고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동정(同情)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이 시기의 조선에서는 관헌 (조선 총독부)에 의한 검열을 위해 항일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곤란이기도 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중국 공산당과의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소련의 원조도 얻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었다. 물자 보급을 위해 종종 일본인, 조선인, 현지인의 구별없이 금품강탈이나 몸값 목적의 유괴 등 폭력적인 약탈 행위도 했다. 또한 몸값 목적 외에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주민을 납치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불어 넣어 인원 충당하고 있었다. 물자와 인력의 공급 수단에 있어서는 비적(匪賊)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하는 연구자도 있다
보천보전투 양강도는 중국 장백산과 한국 백두산으로 접경을 두고 있으며 두만강, 압록강이 양국으로 접경하고 있다
ㄷ.혜산사건과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
김일성부대의 보천보 습격(普天堡襲撃)에서 추격한 혜산경찰서의 경찰부대는 매복을 받아 32 명 중 7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상에 급히 함흥 보병 제74연대 김인욱(金仁旭) 소좌(소령)이 혜산 수비대장으로 임명 되었다.
이 혜산 수비대가 경찰부대와 협력하여 최현 부대와 합류하고 있는 김일성 부대를 급습하여 타격을 주었다. 이는 김일성 부대가 다시 국경을 넘어 조선에 침공하는 것은 없어졌지만, 갑산 그룹의 활동은 운흥면(雲興面) 금광을 습격하여 사금(砂金)을 강탈 하였다. 도적단이 김일성 부대를 자칭하는 삐라를 뿌리고 있던 것으로부터, 동조(同調) 갑산 그룹의 존재가 드러나고, 갑산측에서 162명, 장백현에서 59명이 검거됐다. 혜산사건의 시작이다 .박금철도 이 때 검거 되었다.
혜산사건(恵山事件) 제1차 검거의 자백도 이듬해 1938년에는 박달을 포함한 279명이 검거 돼 만주국 주재 조선인 조국광복회(在満韓人祖国光復会)와 거기에 기담한 갑산그룹이 괴멸했다.
한편, 1938년 초에 제1로군(第一路軍) 주력군은 주로 집안현(輯安県)의 삼림 지대에 있었다. 중국인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와 정치 위원 위증민(魏拯民)은 팔로군과 연락을 고집해 여러 번 서쪽 정벌을 계획했다.
그런데 그 중에 제1사단(第一師)의 사단장 정빈(程斌)과 그의 부대가 일만토벌부대(日満討伐部隊)에 투항했다. 일만측(日満側)은 투항자를 처형하지 않고 상금이나 직장을 보장하는 귀순 전략을 취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한 것이다. 따라서 서쪽 정벌은 중지(中止)가 다음과 같이 제1로군(第一路軍)의 편성 기준이 이루어졌다.
인원의 숫자는 강재언(姜在彦) "김일성 신화의 역사적 검증“에 따른다.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 정치위원 위증민, 군수처장 오성륜, 총서령부경위여 여장 방진성 (500 명)[第一路軍 総司令・楊靖宇 政治委員・魏拯民 軍需処長・呉成崙 総司令部警衛旅 旅長・方振声 (500人]
제1방면군 지휘 조아범(250명)[第一方面軍 指揮・曹亜范 (250人)]
제2방면군 지휘 김일성(350명)[第二方面軍 指揮・金日成 (350人)]
제3방면군 지휘 진한장(300여명)[第三方面軍 指揮・陳翰章 (300人余)]
이 중 제2방면군(第二方面軍), 제3방면군(第三方面軍)은 기존 제2로군(第二路軍)의 활동 범위로 되어 있던 동만주의 화룡(和竜), 안도(安図), 연길(延吉), 왕청(汪清), 혼춘(琿春) 등 조선인이 많이 사는 지역 이 활동 구역으로 통합 되었다.
ㄹ.제1로군(第一路軍)의 괴멸
중일전쟁이 발발했던 1937년 소련은 만주국, 조선과 접하는 국경을 경계하여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조선인) 모두 친일세력으로 간주하고,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렇게 한 것은스탈린의 대숙청에 처음부터 관계 당국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에 있었다
극동 내무 인민위원회(국가 정치부) 장관 겐리후 류시코후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몸이 위태로워 것을 헤아려 1938년 6월 연해주에서 국경선을 넘어 만주국로 망명했다. 류시코후는 혼춘( 琿春)헌병대에 연행 된 후 도쿄의 참모 본부에 보내 망명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 망명 사건에서만 아침의 국경은 극도로 긴장하여 소련군과 일본군 수비대가 충돌하는 장고봉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이듬해 1939년 노몬한 사건이 일어나 일단 휴전은 되었지만, 일본측의 경계가 높아져 관동군에 의해 만주 국내 항일세력에 대한 철저한 단속이 시작 되었다. 제2 독립수비대 사령관 노조에(野副昌德) 소장에 만주국군(満州国軍) 7개여단, 경찰대 30개 대대가 배속되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하여 대적 하게 되었다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작전은 군, 경찰, 행정기관, 민간조직의 연락을 긴밀히하여 그물망을 잘게 치고 게릴라 활동을 봉쇄 민중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었다. 즉, 일반 주민에게 토벌대와 게릴라 부대가 교대로 나타나는 상황에서 신변안전을 위해 쌍방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지만, 토벌대가 게릴라 부대를 몰아 약탈과 납치 위협을 완전히 봉쇄하여 치안을 유지한다면 게릴라 부대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적극적으로 토벌대에 협력하게 된다. 결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사람이 없는 삼림 지대에 몰려 식량과 의류의 확보도 곤란해 질 것이다
토벌대 중에서도 가장 유능하게 움직인 것은 정빈(程斌) 등 투항한 전(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이 구성하고 있는 경찰부대였다. 그들의 활약으로 제1로군(第一路軍)은 점차 멀리 분산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40년 초에는 경위여장(警衛旅長) 방진성(方振声) 체포되어 처형, 투항들도 잇 따랐다. 그 투항자 때문에 총사령관 양정우의 동정(動静)이 알려져 단신 행동을 강요 될 때까지 되었다. 양정우는 몽강현(濛江縣)[현재는 양정우을 따서 정우현으로 개명 됨]에서 산 일에 들어간 주민과 접촉하여 통보돼 투항을 거부 사살 되었다. 토벌대는 최후의 절개에 흠모하여 불교행사를 영위하고 영혼을 달랬다.
양정우 사후, 제1로군(第一路軍) 지도자로 추대된 위증민(魏拯民)은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주력 부대를 북상시키기 위해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남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그 직후 지휘관 조아범(曹亜范)이가 대원에 의하여 살해 되었고 제1방면군(第一方面軍)은 내분에 의해 해체 되었다.
그런 중에도 김일성이가 이끄는 제2 방면군(第二方面軍)은 100 ~ 300명 정도의 집단 활동을 유지하고 습격, 약탈, 납치를 성공시키고 있었다. 1940년 3월에는 안도현(安図県) 대마록구(大馬鹿溝) 산림 경찰대(森林警察隊)를 습격하여 사상자 각 2명의 피해를 주고 금품 2만 3천엔을 약탈하고 대충 약 140명을 납치했다. 이틀 뒤 피랍자 중 25명(일본인 1명, 조선족 13명, 만주족 9명, 백계 러시아인 2명)을 석방. 나머지 납치 인질 70여명과 함께 도망을 계속했기 때문에 만주 경찰과 마에다군단(前田隊)의 쫓는 곳이 되었지만, 제2 방면군(第二方面軍)의 매복으로 마에다대(前田隊) 140명 중 일본측 문서 전사자 수 58명, 전상자 27명, 실종자 9명이라는 엄청난 타격을 주고 건재함 인상을 남겼다.
이 가을에서 노조에(野副昌德) 토벌대의 활동은 다시 활발해지면서 제2 방면군을 주요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김일성 부대도 소수 부대에 분산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의식(衣食)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제1로군 중추의 위증민도 연락이 취하지 못하고 김일성을 포함한 수십명은 8월에서 10월경에 자신의 판단으로 소련령으로 도망쳤다. 소련 측과의 연락도 없이 갑자기 입소였기 때문에 김일성은 억류 돼 한때 투옥 되었다.
제3 방면군(第三方面軍)은 1939년 제2로군 제5군(第二路軍第五軍)과 대규모 공동 작전에서 한때 안도현 대사하진(安図県大沙河鎮)을 점령하는 등의 활약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해 겨울부터 군 단위(軍単位)의 활동은 불가능하므로, 전사, 전상(戦傷), 도망, 투항자가 이어 괴멸 상태가 되었다. 1940년말 지휘관의 진한장은 추격에 의하여 전사한다.
그러나 활동을 계속 되어 김일성 부대 입소 이후 소수 인원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소련에 입국했다. 제13여단(十三団)을 이끌던 최현도 그 안에 포함돼 있다.
제1로군 총사령부(第一路軍総司令部)도 괴멸 상태였지만, 1940년 11월경에는 군의관 처장 서철(徐哲)도 경위대 살아남은 몇 명을 데려 입소했다. 만주에 남은 제1로군 수뇌부에 관해서는 1941년 1월에 오성륜(呉成崙) 투항 귀순. 3월 질병에 시달리고 고립되어 있던 위증민이 토벌대에서 발견되어 전사 혹은 병몰 후 발견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제1로군의 만주에서의 활동은 거의 끝났다.
1939 年秋,魏拯民(左二)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指戰員在一起 。
ㅁ.제2로군(第二路軍), 제3로군(第三路軍)과 소련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은 원래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재편 된 것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있었지만, 소련의 극동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 대한 대응은 상황에 따라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제1로군(第一路軍)의 활동 범위는 소련 국경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원래 지원을 받을 수도 적었지만 국경 근처의 동만주나 북만주에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제3로군(第三路軍) 밀접하게 소련과 염려 했다.
국경선이 긴장하고 있던 1938년 말에는 개편 이전의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의 제6군5사(第六軍五師)가 일본군에 쫓겨 부대마다 월경했지만 사단장(師長)이 체포 될 뿐만 아니라 전원이 신장성(新疆省)으로 보내졌다.
제2로군(第二路軍), 제3로군(第三路軍)은 함께 대규모 내분을 안고 있었지만, 그 조정(調整)에 지도력을 발휘하고 양군 통해의 중심이 되어 있던 것은 제2로군(第二路軍) 총사령관 겸 정치 위원 주보중(周保中)이었다. 1940년의 1월 그가 중심이 되어 소련 극동당국과 1차 하바롭스크 회의를 받고 중국 공산당 중앙과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상황 소련 극동당 조직과 극동 방면 군이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을 임시 지도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합의가 성립했다.
1940년 11월 주보중과 참모장 최용건은 사전에 소련측의 연락을 받고 부대마다 입소하고 살아 있던 제2로군(第二路軍) 다른 대원도 그 뒤를 이었다. 투옥되어 있던 김일성의 신원을 보증한 것은 주보 중이다.
제3로군(第三路軍)은 총사령관 이조린(李兆麟) 등의 간부는 입소했지만, 소련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있고, 참모장의 허형식(許亨植)의 지휘 아래 부대의 절반이 북만주에 남아 싸움 계속했다
.허형식(許亨植)은 1942년 경안현 청봉령(慶安県青峰嶺)에서 장렬한 전사를 이루었다. 일단 입소했던 정치 위원의 김책은 허형식(許亨植)의 의지를 이어 1943년 연말까지 입소를 거부하고, 봉산현(鳳山県)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1941년의 시점에서 제1로군에서 입소한 인원은 88명 정도 제2로군에서 110명 정도로, 총 200여명이 소련령에 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939년 김일성(앞줄 좌로부터 네번째)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지휘부 전투지휘자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
[金日成(前左四)與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部指戰員攝於1939年。金日成於1932年春到安圖創建游擊隊。先後擔任汪清反日游擊大隊政委,東北人民革命軍第二軍獨立師第三團政委、第二軍第三團政委,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三師(後改為第六師)師長、第一路軍第二方面軍指揮]
東北抗日聯軍第第一路軍女戰士 。 左三為金貞淑 。
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警衛旅部分指戰員攝於1939年夏
(3)그 후
소련에 망명한 구성원은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제88독립저격여단)에 편입 되었다. 이 여단은 소련군에 흡수된 형태였지만, 소련 사람을 섞으면서 그 구성원이나 직책 등 주보중이 여단장되는 등 대체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조직 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중국 공산당은 이 여단을 동북항일연군 교도여단이라고도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대원은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에서 분리 된 소련군 정보국 직속되어 만주국에 침투해 공작에 종사했다. 위험한 임무에 종사한 그들이었지만, 숙청과 일본군의 스파이로 간주 형을 받은 사람도 있다.
또한 김일성은 스스로의 조선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에 편입 된 것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출판)"로 인정하지만 소련군과는 연계된 것만으로 제88 특별여단(교도 여단, 제88독립저격여단)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소련군이 조선반도의 해방군이 되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조선인 대원은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38 도선 이북의 조선)에 돌려 보내 북한 인민위원회와 조선 공산당 (이후 조선 로동당) 및 조선 인민군의 요직에 올랐다.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후 동북항일연군 출신은 만주파 (파르티잔파, 빨치산파)라는 파벌이 되어 남로당파 (남조선 노동당 출신), 연안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중국에서 귀국 한 자, 조선의용군) 소련파(동북항일연군과는 별도로 소련에서 파견 된 자. 소련군 출신이나 행정,기술관료 출신), 갑산파(보천보 전투 등으로 동북항일연군과 공동 투쟁 한 자)을 잇따라 숙청하고 북한 권력을 독점했다. 조선 로동당에서 정적을 제거하고 구축한 만주파는 1967년에 당의 지도 이념으로 유일사상 체계를 채택하고 이후 북한은 주체 사상에 기초한 독자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걸어 가게 된다.
김일성은 만주국(만주지역 조선족 자치정부) 조선 공산당 활동가에서 소련군 예하 각 민족 빨치산부대로 그리고 2차대전 때는 소련측(좌파진영) 연합군 조선인(한국인) 부대로 활동했다
김일성은 민족주의자보다는 철저한 마스-레닌주의 노선 공산주의자이며 스탈린 추종세력이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스탈린을 "세계혁명의 총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는 "세계 혁명의 총사령관 스탈린, 아시아 혁명의 총사령관 마오쩌둥"이라 했다.
후에 그는 바트당(아랍 사회당)을 조직한 사담 후세인,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북한의 주체사상 김일성, 리비아의 카다피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련 공산당 스탈린 일국 사회주의 이론이 독일 노동자당 히틀러 국가사회주의 이론 비슷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국영 자본체제) 이론이다 소련 공산당은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과 소련 공산노동당 그룹이 있다 소련 연방공산당 그룹이 수정주의자(실용주의자)라면 공산노동당 그룹이 교조주의자들이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사회주의 공화국(사회주의 국가) 세력은 국가자본주의 일본제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수립할 때 민족해방과 왕권신수설 전체주의 군주, 지주계급이나 매판 자본가를 타도하고 노동자 계급 령도 노농연맹 인민민주주의 혁명 체제 사회주의 국가 승리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개인 우상화, 신격화로 1인 장기집권으로 왕권신수설에 도취되고 있다
2.제88독립 저격여단
제88독립 저격여단 (러시아어 : 88-я отдельная стрелковая бригада; 약칭 88 осбр)는 소련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한 극동지역 각 민족여단(한족,조선족, 몽골족, 만주족 등 외국인 연합군)의 1개이다
제88독립 저격여단은 극동전선 정보과 직속 만주, 한반도에서 정찰 , 파괴 공작임무을 수행했다[소련군 특수부대 빨치산]
제88독립 저격여단은 원래 동북 항일연군(聯軍) 장병이 핵심이 주로 중국인과 조선인에서 편성 되었다. 후일 북한 국가 주석 김일성은 동 여단 제 1 대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의 공식 견해에서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동북 항일연군 본체와 공투하면서도 다른 행동이었다고 하고 다음의 제88독립 저격여단 사실은 무시되고 있다(부정하거나 서술하지 않고 있다, 북한은 자주노선과 주체정부 노선으로 김일성의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군 참여를 부정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이 부대를 동북 항일 연군 교도여단이라고 칭하고 있다.
제88독립 저격여단의 핵심 동북 항일연군(聯軍)는 1939년경부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만국)군의 대규모 소탕 작전으로 수 많은 전사자가 등장했고 내부적으로는 일본 당국에 귀순하는 사람도 나오기 시작했다. 주보중, 최용건, 김책, 김일성 등 남은 자들도 물자의 부족으로 인해 활동의 계속이 곤란해 졌다. 따라서 그들은 소련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12월 말 동북 항일연군(聯軍)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 영내에 들어갔다. 소련 영내에서는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의 활동 지원을 위해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했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
당초 100여명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후 200 ~ 300명으로 증가했다
독소전 발발 후 1941년 7월 중순, 소련 정부는 일본의 북진에 대비하여 이 야영지에 따라 제88 독립 저격 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여단은 하바로프스크시의 부쯔코에나 나아무레 (Вятское-на-Амуре)에 배치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1942년 7월 21일 극동 전선사령관 이오 시프 아빠나센코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0132호에 따라 여단의 편성 기간은 같은 해 7월 28일부터 9월 15일까지로 정해졌다.
부대의 편성은 동북 항일연군 중국인 병력과 조선인 병력의 외부 중국계 · 조선계, 소련인, 기타 소수 민족 (몽골족, 민주족등 )에서 열렸다. 여단 대원의 대부분은 중국인이었고 조선인은 10%에 불과했다. 그 후, 후속하여 소련 영내에 들어간 부대도 합류해, 제88독립저격여단의 병력 수는 1,500 명을 넘어 섰다.
연군(聯軍, 동북 항일연군)에서 온 많은 사람들은 소련의 군사 학교 촉성 지휘 과정 또는 관구 소위 과정을 받은 적군의 계급을 수여했다 (여단장 주보중 중령, 김일성은 대위). 일반적으로 여단의 지휘 관직에는 중국인이었고, 부지휘 관직에 붉은 군대(소련군)의 장교가 임명 되었다. 병사는 적군의 군복을 착용했다.
1944 년 4 월 현재의 편제.
여단 본부 - 여단장 : 주보중 중령, 참모장 : V. 사마루첸코 소령
정치 과학 - 정치 위원 : V. 세레긴 소령
방첩과 - 스 메르시
제 1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김일성 대위
제 2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효명 대위
제 3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왕명귀 대위
제 4 독립 저격 대대 - 대대장 : 강건 대위
자동소총 대대
무선대대
독립 박격포 중대
독립 공병 중대
독립 대전차 소총 (PTR) 중대
독립 경제 중대
독립 기관총 소대
군사 통역 과정 특수 분대
각 독립 저격 대대는 3 개 중대로 구성되어 각 중대는 3 개 소대에서 되었다.
장비 (1942 년 9 월 ~ 1943 년 7 월 현재)은 소총 x4,312 테이, 자동 소총 x370 정, 중기관총 x48 자루, 경기관총 x63 정, 화포 x21 문, 대전차 소총 x16 테이, 자동차 x23 양.
제 88 여단의 병사는 만주, 한반도 지역에서 정찰과 파괴 공작활동에 종사했다. 그 자세한 것은 불명이지만, 여단장의 주보중 1940 년 ~ 1943 년 사이에 총 89 명의 감원 (손해)이 있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제 2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9명
제 1 극동 전선의 첩보 업무에 파견 - 26명
미 귀환 - 24명
스 메르시에 인도 - 6명
환자를 위한 후송 - 15 명
사망 - 2명
여단 복귀 - 7명
1945년 7월 소련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여단에서 무전기를 장착 한 100명을 투입하는 전투 행동 계획이 수립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급속한 진격과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제 88 독립저격여단 제 1 독립 저격 대대 대대장 김일성이 한반도의 해방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가 되었고 소련군과 함께 방문했다.
1945년 8월 29일 제 2 극동 전선 사령관 막심 뿌루카에후 상급 대장의 명령 제 010 호 / n에 따라 "일본 침략자와 싸우는 전선에서 전투 지휘 임무의 모범적인 수행과 이 때 발휘 된 용기"에 김일성에게는 적기 훈장이 수여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제 88 독립저격 여단 장병 216명에게 각종 훈장과 메달이 수여되었다 (9 월 10 일에 더욱 58 명 추가).
제 88여단(외국인군단, 대일연합군)은 1945년 10월 12일자 극동군관구 사령관령 제 042호에 의해 해산 되었다.
이 사진은 김일성이 토벌군에 쫓기다가 소련으로 도주했을 당시 오케얀스카야에서 좌로부터 김철호(최현의 부인), 리영숙(안영의 부인), 김정숙(김일성의 부인), 황순희(류경수의 부인 조선혁명박물관장)의 모습이다.
1941년 동북항일연군 전투지휘자들이 소련 남부 야영 훈련장에서 촬영한 사진
[在南野營整訓的部分東北抗日聯軍指戰員攝於1941年。
前右金日成
一排右李英淑(第七軍戰士)、右三金貞淑(第二軍戰士)、右四黃順姬(第二軍戰士)、右五金哲鎬(第二軍戰士)。
二排右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
三排右一沈鳳山(第一路軍警衛旅一團團部警衛員)三排右一柴世榮、右二季青。]
제88 독립저격여단 시절 사진. 좌로부터 김일성(金日成), 계청(季青, 중국인), 최현(崔贤), 안길(安吉)
제88독립 저격여단 소부대 활동시기 촬영한 사진[在小部隊活動時期的合影]。
金日成,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營長。
季青,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四營政治副營長。
崔賢,曾任東北抗日聯軍第二軍第一師(後改為第四師)第一團團長、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三團團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第一連連長。
安吉,曾任東北抗日聯軍第一路軍第三方面軍第十四團政委、第三方面軍參謀長、東北抗日聯軍教導旅第一營政治副營長。
동북항일연군 지도여단의 일부[東北抗日聯軍教導旅部分乾部]
일렬(一列):심태산(沈泰山)、최명석(崔明錫)、김경석(金京石)、서철(徐哲)、장광적(張光迪)。
두렬(二列):바슈코비츠(瓦什科維茨,와십과유자)、최춘국(崔春國)、강신태(姜信泰)、양청민(楊清海)、도우봉(陶雨峰)、주암봉(周岩峰)。
삼렬(三列):장석창(張錫昌)、유철석(劉鐵石)、범덕림(范德林)、고만유(高萬有)、교수귀(喬樹貴)、유안래(劉雁來)、진덕산(陳德山) [1945年7月的合影(1945년 7월 촬영)]
1947년 5월, 왕효명. 팽시로, 왕일지 등 동북항일연군 관계자는 조선인 출신 동북항일연군 인사를 조선인민군 총사령부에서 만났습니다
[1947年5月,王效明、彭施魯、王一知分另受有關部門委派先後赴朝鮮平壤。圖為他們與原東北抗日聯軍的朝鮮戰友在朝鮮人民軍總司令部合影留念]。
앞열(前排):김일(金一)、주위(周偉)、왕일지(王一知)、왕효명(王效明)、안길(安吉)、팽시로(彭施魯)。
가운데열(中排):이영호(李永鎬)、최광(崔光)、김광협(金光俠)、심태산(沈泰山)、최춘국(崔春國)、유창권(柳昌權)、이을설(李乙雪)。
뒷열(後排):박우섭(樸禹燮)、김려중(金麗重)、최용진(崔勇進)、강상호(姜尚鎬)、유경주(柳京珠)、오진우(吳振宇)、김창봉(金昌鳳)、오백룡(吳伯龍)、전문섭(全文燮).
소련군을 환영하는 김두봉 북한 초대 국가수반과 북한지역 지도부들
모스크바 거주 레베데프씨가 제공한 사진 내용물 중 소련군정과 북로당 간부들...
<지도자 김은 스티코프가 주도한 소련군 극동사령부 작품이었다 1946년 8월 30일 소련군정 지도부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 공산당과 신민당을 합당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한 후 당 고위간부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앞 줄 오른쪽에는 허가이. 김일성.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김두봉. 소련군정 정치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김책..뒷 줄 오른쪽에는 주영하. 박일우. 최창익등>
소련공산당과 소련군이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다 소련군은 1945년 8월 6일부터 진주하여 소련군 25만명이 북한지역에 배치했다 그리고 1948년 10월 19일부터 철수하여 1948년 말까지 철군했다
-한국전쟁 남침은 노동당 계열 내부 대남 강경파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 복조선분국 김일성과 조선공산당 남조선분국 박헌영) 계열 주도로 추진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국전쟁 남침 인민군 지휘부 작전 라인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단), 전선총사령관 김책(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전선부사령관 박일우(조선의용군),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독립 저격여단)이며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조직 박헌영(인민군총정치국장), 이현상(남부군, 빨치산 부대 또는 저격여단) 등 이다[빨치산부대를 소련에서는 저격여단이나 특수부대, 공수부대로 표현하고 있다]
남침은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 독립저격여단 출신 주도로 조선의용군과 남로당 내부 조선공산당 출신이 적극 가담했다
전선사령부는 최고사령관 김일성[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전선사령관 김책[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총참모장 강건[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 라인으로 지휘체계가 작동하였다. 그리고 전선사령부 밑에는 서부전선을 담당하는 1군단과 동부전선을 공격할 2군단을 창설했다. 1군단장에는 김웅(金雄) 중장[조선의용대 중국 팔로군 출신]을, 2군단장에 김광협(金光俠) 중장[소련군 제88독립 저격여단 출신]을 임명했다
-북한정부의 남침(한국전쟁) 3대 군사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제88독립 저격여단[소련군 극동 정찰국, 소련 육군 극동사령부]은 스탈린 부대(일국 사회주의노선, 자국사회주의 성향 사회주의(민주사회주의) 그룹]이며 조선의용대[중국 공산당-중국 팔로군]은 모택동부대[신민주주의 노선, 인민민주주의 그룹], 남부군[남로당, 조선공산당]은 레닌부대[공산주의 노선, 마스-레닌주의 공산당 그룹]이다
(1)스탈린의 한국 전쟁 개입
1949년 3월 5일, 북한의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인민군이 남한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남한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 12월 남한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남한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북한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남한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 1월 30일, 스탈린은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공(중국 공산당)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남침을 반대했다. 1949년 갑자기 남한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을 언급하며 혹시 모를 미국과 자본주의 진영의 함정이라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그러나 무려 48회에 달하는 거절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끝까지 남침을 고집한 탓에 스탈린이 이를 허락했는데 그렇게 발발한 한국 전쟁은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한국 전쟁 관여를 부인하였지만 포스트 냉전 시대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한국 전쟁을 감행하게 된 배경에는 스탈린의 명시적 허가와 지원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무려 48번이나 시도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시한 입장은 아니고 김일성이 남침하겠다는 고집을 꺾지 못해서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김일성이 남침을 끈질기게 고집했을 때 스탈린은 애초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아닌 다른 사람을 통제관으로 임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일성에게 한반도 북부의 통치를 책임지게 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나 때는 늦었다. 김일성이 파견되자마자 한반도 북부지역에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한 이후였기 때문이였다.
한국 전쟁 중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던 그는 뇌질환과 중풍 증세로 손과 발을 쓰는 것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고 체력이 소모되었음을 알고는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의심과 망상증세가 한층 강화되었다. 모스크바와 소련의 대도시에는 오직 스탈린 자신만이 리모콘과 장비로 열 수 있는 건물이 건립되었는데, 그 건물들에는 같은 모양의 방이 여러 개가 있어 아무도 스탈린을 쉽게 찾기 어려운 구조였다. 또한 그는 비행기와 헬리콥터에 탑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장거리 여행도 열차로 했다.
(2)모택동의 한국전쟁 개입에 대한 후회
1950년 한국전쟁 기간부터, 친소련파였던 김일성으로는 북한에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다고 본 마오쩌둥(모택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 김두봉, 김무정 김원봉등의 조선의용대(독립동맹-모택동의 신민주주의와 중국 공산당 계열)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그러나 이들과의 교류는 김일성에 의해 차단된다.
그는 1948년에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고려 공산당 계열) 박헌영을 통해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영향력 행사를 기도하였으나,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은 김일성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수반으로 낙점한다. 한국전쟁 기간 중 그는 김일성의 견제세력으로 박헌영과도 연결을 시도했는데, 박헌영을 김일성의 대안으로도 고려했다. 1953년부터 1955년 8월 종파 사건으로 북한의 남노동당원들이 대규모 감금, 체포, 처형당했을 때 그는 북한 외무성을 통해 압력을 넣어 박헌영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김일성의 박헌영 처형 의지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북한 인민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의 상의도없이 멋대로 북한 인민군을 후퇴시켜 결국 중공군은 유엔군의 기습으로 막대한 인명피해와 보급 손실을 받았다. 마오쩌둥(모택동)은 그 소식을 듣고 분노하였다. 그후 북중 관계는 악화되었다. 1975년 김일성은 베트남 공산화와 남한 박정희 유신정부 혼란으로 남침을 할 수 있는 국내외 상황의 기회로 보고 마오쩌둥(모택동)에게 찾아가 다시 한국전쟁을 일으키려 했지만 마오쩌둥(모택동)은 거절하였다. 이유는 1972년 마오쩌둥은 중국을 방문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고백을 했고 김일성은 매우 무례하고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망나니놈이라고했고 북한에 군대를 파병보내 김일성과 북한을 도운 것을 후회하였고 한국(남한)이 통일되게 나뒀어야 했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는 남북통일이 군사력보다는 신민주주의(민주화) 입장에서 남북통일을 지지하고 있다
북한 김일성은 남북통일을 개인 우상화와 자주노선 국가사회주의 성향 군사력에 치중함으로 남북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남한 제6공화국 수립이후 남한정부 주도 민주화 정책으로 남북통일을 주도하고 있으며 남북 주민들이 지지하고 있다
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그리고 쿠바 등 4 개국에 불과하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년 3월 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69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3485
*베트남 헌법(2013년 개정)[민주공화국 형태 사회주의 헌법]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는 인민에 의한(民治), 인민을 위한(民享) 인민의(民有) 사회주의 법치국가이다-
http://blog.daum.net/007nis/15876070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제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제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제3공화국 헌법)-
'-平和大忍, 信望愛. > 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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