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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은 북한 남침” 구소련 기밀문서 공개 본문

-平和大忍, 信望愛./韓中日 동북아역사(한자언어문화권)

“6·25 전쟁은 북한 남침” 구소련 기밀문서 공개

CIA Bear 허관(許灌) 2020. 6. 28. 14:56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南侵)으로 시작됐음을 인정한 구(舊)소련의 1960년대 기밀문서가 발견됐다. 구소련 외무성이 1966년 8월 9일 작성해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 부부장이었던 올렉 라흐마닌(1924~2010)에게 보고한 ‘1950~1953년 조선전쟁과 휴전담화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문서다.

해당 문서는 “김일성은 미국이 남조선을 위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고 스탈린과 마오쩌둥으로부터 무력통일에 통과를 받도록 간절히 노력했다”며 “김일성이 1950년 3~4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은 조선인들의 계획을 최종적으로 승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이한 지금까지 ‘남침’을 인정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북한 당국이 편찬한 공식 백과사전인 ‘조선대백과사전’은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란 이름으로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현명한 령도 밑에 우리 인민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기 위하여 미 제국주의를 우두머리로 하는 외래침략자들과 리승만(이승만) 괴뢰도당의 무력침공을 반대하여 진행한 정의의 전쟁”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미 제국주의자들과 그 주구 리승만 괴뢰도당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드디여 불의에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하여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침략전쟁을 일으켰다”고 사실과는 정반대인 ‘북침(北侵)’으로 기술하고 있다.

1946년 3월 1일 북한 평양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식 때 자신과 소련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의 대형 초상화 아래서 연설하는 김일성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가운데). 뒤에 걸린 태극기가 이색적이다. photo 뉴시스

북한 조선대백과 ‘북침’ 기술

하지만 해당 문서에 따르면, 소련 당국이 대외적으로 북한의 남침을 부인해온 것과 달리,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 집권(1964~1982) 때인 1960년대부터는 내부적으로 북한의 남침을 기정사실로 인정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1991년 구소련 붕괴 이후 소련공산당의 내부 문서들이 간간이 공개되면서 북한의 남침설이 학계에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는데, 해당 문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추가 증거라는 평가다.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현대사 문서보관소에서 해당 기록을 찾아낸 사람은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국민대 선임연구원(한국명 이휘성)이다.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김일성을 비롯한 구소련 제88독립보병여단(88국제여단) 출신 북한 ‘만주파’ 핵심 간부들의 수기(手記) 이력서와 김일성의 1956년 남한 대선 개입을 실토하는 문서 등을 찾아 주간조선에 제공한 바 있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러시아 현대사 문서보관소는 1952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문서를 보관하는 곳”이라며 “문서를 보고받은 올렉 라흐마닌은 소련공산당 대외연락부 제1부부장을 지냈고,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과 북핵 6자회담 러시아 수석대표를 지낸 블라디미르 라흐마닌의 부친”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발견된 6·25전쟁 관련 1960년대 구소련 정부 문서에 따르면, 6·25전쟁과 관련해 흥미로운 사실들도 몇몇 엿보인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김일성을 위시한 당시 북한 최고지도부가 3단계 계획에 따라 전쟁을 구상했다는 기록이다.

해당 문서는 “조선(북한) 지도부는 자신의 목표를 위한 3단계 계획이 있었다”며 “첫째 해당 준비 사업에 38선 인근에 병력을 집결, 둘째 남조선(남한)에 평화통일 제안서를 제출, 셋째 남측이 평화적 제안을 거절한 다음에 무력 작전을 시작한다”는 언급이다.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단행된 북한의 남침은 구소련 당국이 정부 문서에서 언급한 대로 3단계에 걸쳐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38선 인근에 병력을 집결한 첫째 단계가 완성된 이후, 북한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은 6·25전쟁 개전 직전인 6월 7일, ‘평화통일 호소문’을 발표하고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제안한 바 있다.

“1950년 8월 5~8일까지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적 최고입법기관을 창설하고, 광복 5주년을 맞이하는 같은해 8월 15일 남북한 총선거에 의해 선출된 최고입법기관 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자”는 내용이었다.

통일부 북한정보포털에 따르면, 조국전선은 6·25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6월 25일, 박헌영, 여운형, 허헌 등 남쪽의 공산주의자들과,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등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이 함께 결성한 통일전선기구다. 1961년 결성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에 앞서 비슷한 기능을 수행해 왔다. 겉으로는 평화통일을 강조하면서, 물밑으로는 전쟁을 준비해온 전형적인 ‘위장평화술’이었던 셈이다.

개전 직전 북한 김일성을 비롯한 소련 스탈린, 중국 마오쩌둥(毛澤東) 등 공산진영 수뇌부 3자는 미국은 물론 일본의 참전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것도 이번 문서에 의해 드러났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조선인민군의 추가 부대 설립을 위해 북조선 측에 무기나 군사장비 원조 요구들이 급히 수락되었다. 중국 지도부는 중국 군대에서 복무했던 조선족 사단을 조선에 파견하고 식량 배급을 약속하였고 일본이 남조선(남한)을 지지해 참전할 가능성을 우려해 한 개의 집단군을 조선과 더 가까운 지역에 파견한다고 약속했다”는 대목이다.

6·25전쟁 와중인 1951년 4월 북한을 찾은 중국인민위문단을 맞이하여 연회를 주재한 김일성 당시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뒤로 자신의 초상화와 함께 소련 스탈린(왼쪽), 중국 마오쩌둥(오른쪽)의 초상화와 국기가 걸려 있다. photo 바이두 

6월 25일 날짜는 김일성이 택일

구소련 외무성은 6·25전쟁 발발 당시 남북한의 병력 상황 역시 상세히 보고하고 있다. “1950년 1월 1일 기준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력은 11만명이 있었고, 새로운 사단들이 급히 설립되고 있었다”며 “남조선군 대(對) 북조선군을 비교하면 병력으로 1 대 2, 포(砲)의 수 1 대 2, 기관총의 수 1 대 7, 따발총의 수 1 대 13, 탱크의 수 1 대 6.5, 비행기의 수는 1대 6이었고, 이 모든 분야에 북조선 군대는 우월하였다”는 대목이다. 6·25전쟁 발발 당시 남북한의 압도적 병력 차이는 기존 연구에서도 많이 밝혀진 바 있으나, 구소련 정부 기록에 의해 드러난 점이 의미 있다는 평가다.

또한 문서는 “조선(북한)군은 날마다 15~20㎞ 정도 전진하고 20~22일만 지나면 군사작전이 대체로 완수될 것이라는 계획을 포함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 ‘6월 25일’이라는 개전 날짜는 김일성이 스스로 택일했다고 구소련 문서는 적고 있다. “김일성의 강한 요구에 따라 1950년 6월 25일을 군사행동 시작의 날짜로 결정했다”는 대목이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해당 문서에 나오는 몇몇 표현들에 비추어 봤을 때 상당히 객관적인 입장에서 쓴 것 같다”고 말했다. 가령 문서에 언급되는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의 이름들이 아무런 직위와 직함 없이 그대로 쓴 대목이 객관성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은 “스탈린의 경우,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이란 완전한 이름 혹은 ‘스탈린 동지’라는 식으로 표현되는데, 여기서는 ‘스탈린’이란 이름으로만 표현되는 점도 대단히 흥미롭다”고 했다.[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