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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핵무장을 했을까? 본문

핵.잠수함.미사일.전자 지능 뇌 자료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핵무장을 했을까?

CIA bear 허관(許灌) 2020. 6. 17. 17:41

중국의 군사박물관에 전시된 중국의 두 번째 핵미사일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손에 쥐고자 한 나라는 북한만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북한이 핵무장에 사활을 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짐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1945년 일본에서 핵무기의 가공할 만 위력을 목격한 이후, 세계는 핵의 평화적 이용 증진을 위해 여러 차례 진통 끝에 1970년 핵확산방지조약(NPT)을 발효시켰다.

NPT 체제 하에서 공식적으로 핵무기 보유국으로 인정받는 나라는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의 다섯 개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핵을 보유하지 않은 국가의 핵 보유를 막는 것이 NPT의 주된 목표다. 핵물질의 공급(수출)을 통제하는 원자력원료공급그룹(NSG)과 각국의 핵 활동을 감시하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원자력 발전 등)을 지원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를 돕는다.

그러나 핵무기를 갖고자 하는 몇몇 국가의 욕망은 NPT 체제로 억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NPT 체제에 합류를 거부하면서 핵무장을 한 나라들도 있고, NPT에 가입했다가 탈퇴를 선언한 북한의 경우도 있다.

한편으로는 핵무장을 추진하다가 포기하고 NPT 체제로 합류한 독특한 경우도 있다.

인도

NPT가 결성된 후 최초의 핵실험을 실시한 나라는 바로 인도(1974년)다. 인도는 '평화적인 핵폭발물'의 이용까지 제한한다는 이유로 NPT 가입을 거부해왔으며 현재까지도 NPT 가입국이 아니다.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최초의 총리가 된 네루는 국제적으로는 핵무기 개발에 반대했지만 국내적으로는 '평화적 용도'의 핵 개발을 적극 지원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흔히 파키스탄과의 갈등으로 인해 인도가 핵무장을 시작하게 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인도의 핵무장에 직접적인 단초를 제공한 것은 사실 중국이었다고 김준석 가톨릭대 국제학부 교수는 2007년 작성한 논문에서 설명한다.

중국은 1962년 국경분쟁에서 인도를 제압했고 1964년에는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1965년에는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면서 인도의 안보 불안은 더욱 악화됐고 결국 이것이 1974년의 핵실험으로 이어진다.

이후 국제사회의 제재로 인도는 핵활동을 자제했으나 파키스탄이 핵무장을 추진하면서 1998년 다시 핵실험을 실시한다.

2006년 인도는 미국과 원자력협정을 체결했다. IAEA의 사찰을 어느 정도 허용하면서 미국으로부터 핵기술과 핵물질을 제공받는 것이 골자다.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만모한 싱 당시 인도 총리가 2006년 원자력 협정 체결을 발표하면서 악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는 NPT에 여전히 가입하지 않았다. 사실상 인도의 핵무기 보유가 용인된 셈이다.

당시 <한겨레>는 미국이 경쟁자로 떠오르는 중국을 겨냥해 인도를 끌어들인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미국이 핵을 포기하도록 압박해온 북한과 이란 등에 잘못된 선례를 남기는 것"이라는 비판을 소개했다.

파키스탄

파키스탄의 핵무장은 앙숙인 인도에 비해 늦다. 주로 미국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1950년대에 파키스탄은 미국의 공산권 봉쇄정책에 매우 중요한 동맹국이었고 때문에 안보를 미국과의 동맹에 크게 의존했다고 김준석 교수는 설명한다.

그러나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겪고 미국과의 동맹이 약화되면서 파키스탄도 비밀리에 핵개발을 시작한다.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무장을 강력히 반대하며 압력을 행사했지만 1980년에 들어서 상황이 바뀐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파키스탄의 전략적 가치가 증대됐기 때문이다.

미국은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하지 않는 이상 파키스탄의 핵개발 노력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암묵적으로 합의했고 이로 인해 파키스탄의 핵무장은 큰 진전을 이루었다고 김 교수는 설명한다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A. Q. 칸 박사의 2009년 모습

냉전이 끝나고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미국은 다시 파키스탄의 핵무장에 대해 압력을 행사했지만 이미 파키스탄은 상당한 수준의 진전을 이룬 상태였다.

결국 1998년 인도가 핵실험을 재차 실시하자 파키스탄은 5월 28일과 30일 연이어 두 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했다. 현재 파키스탄은 100개가 넘는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파키스탄은 북한의 핵개발에도 영향을 미쳤다.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압둘 카디르 칸(A. Q. Khan) 박사는 북한과 이란, 리비아에 우라늄 농축에 사용되는 가스 원심분리기 기술을 판매했다.

이스라엘

핵보유국으로서 이스라엘의 지위는 매우 독특하다. 모두가 이스라엘을 핵무장 국가로 여기고 있지만 정작 이스라엘은 한번도 자국의 핵무기 보유 여부를 밝힌 바 없다. 이스라엘은 NPT에 가입돼 있지 않다.

지정학적으로 적대적인 아랍 국가들에 포위된 형세에 있는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협력을 받아 1950년대 중반부터 핵개발을 시작했다.

프랑스가 1960년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이스라엘 또한 핵실험을 실시하지 않고서도 핵무장에 성공했다. 이스라엘이 투발 가능한 핵무기를 완성한 것은 1967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은 주변국의 핵무장을 강력히 저지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1년에는 이라크의 원자로를 공습으로 파괴했고 2007년에는 시리아의 원자로를 마찬가지로 파괴했다.

중동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은 핵무장 추진 국가인 이란에 대해서도 수차례 공습 위협을 가한 바 있다.

존 케리 당시 미 국무장관과 모하마드 자리프 이란 외무장관이 2016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회담에서 대화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공은 핵무기 제조에 성공한 이후 이를 자진하여 폐기한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다.

우라늄 매장량이 풍부한 데다가 60년대부터 미국의 원자로 기술을 도입하여 운영함으로써 기술력을 갖추고 있던 남아공은 1970년대부터 핵무장을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아공은 이스라엘과의 은밀한 협조를 통해 빠르게 핵무장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79년 미국의 인공위성이 남아프리카 남단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 근처에서 포착한 섬광은 이스라엘-남아공의 공동 핵실험의 결과라는 것이 중론이지만 이것이 공식적으로 입증된 적은 없다.

남아공이 핵무장을 추진했던 것은 물론 안보 불안 때문이었지만 다소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소련과 쿠바의 군대가 인접국인 앙골라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고 조동준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한 논문에서 주장한다.

냉전이 끝나면서 앙골라에 주둔했던 쿠바군이 철수하고,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과 핵무장으로 인한 국제적 압박이 심해지자 남아공은 1993년 핵무기를 폐기했다.

1994년 IAEA는 사찰 후 남아공이 완전히 핵무기 사업을 철폐했다고 발표했다.

리비아

리비아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NPT에 가입하고서도 비밀리에 핵무장을 시도했다. 북한과 마찬가지로 파키스탄의 A. Q. 칸이 제공한 기술이 밑바탕이 됐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제재에 굴복하여 결국 2003년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했고 IAEA의 사찰을 수용했다.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와 스커드 미사일, 화학무기 등이 모두 폐기됐다.

리비아는 핵 포기 이후 미국의 경제제재에서 벗어났으며 국교도 정상화됐다. 그러나 호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2009년 유엔 총회에서 연설 중인 무아마르 카다피

2011년 아랍의 민주화 시위가 곳곳으로 퍼지면서 리비아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이는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바탕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이 카다피군을 공습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결국 카다피는 그해 10월 시민군에 붙잡혀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리비아의 사례는 북한에게 좋은 본보기가 됐다.

"리비아는 서방세계에서 핵포기 대가로 보상을 받았지만 카다피 정권은 거리의 민중 혁명으로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북한에겐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가 지난 5월 RFA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BBC 뉴스 코리아]

 

 압둘 카디르 칸(A. Q. Khan) 박사

압둘 카디르 칸(우르두어: عبد القدیر خان압둘 카디르 한, 193641~ )은 파키스탄의 핵개발의 아버지로 불리는 과학자로,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파키스탄은 칸 박사의 지도하에, 19985월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해 이슬람권 최초의 핵보유국이 되었으며 파키스탄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 다수의 국가에 핵확산을 한 혐의로 가택 연금 형에 처해졌으며, 20092월 이슬라마바드 고등법원의 판결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압둘 카디르 칸(우르두어: عبد القدیر خان압둘 카디르 한, 193641~ )은 파키스탄의 핵개발의 아버지로 불리는 과학자다.

 

원래 칸 박사는 네덜란드의 민간 핵연구소 유렌코에 취직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1971년 조국 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인도와의 전쟁에서 참패하며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분리 독립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큰 충격과 치욕에 빠진다.

 

파키스탄에 비해 국력이 압도적인 인도를 견제하려면 핵을 반드시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한 칸 박사는 유렌코의 핵심기술인 원심분리기 설계도를 빼돌려 파키스탄으로 귀국했다. 그리고 칸은 핵발전소 부지를 알아보는 동시에, 돈에 환장하는 일본과 서방의 회사들을 이용해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부품과 재료를 사들인다. 인도는 이미 핵보유국이 되었기 때문에 칸은 더욱 열심히 움직였고, 특히 자주 방문하는 나라가 있었다.

 

바로 중국. 칸은 핵탄두를 실어나를 미사일 기술을 얻기위해 중국에 자주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북한에도 노동 미사일 기술을 제공받는 대가로 우라늄 농축 기술을 제공하여 북한의 핵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우라늄 농축 기술 커넥션은 기존에는 1994년 제네바 합의에 의해 동결된 플루토늄 재처리 능력만을 가지고 있던 북한이 비밀리에 우라늄을 통한 핵개발을 가능케함으로써 제2차 북핵위기의 원인을 제공했다. 특히나 핵개발 건설을 위한 완성품 제조를 치밀하게 분산-위장시키고 위장회사로 거래하는 수법을 처음 쓴 장본인이다.

 

파키스탄은 칸 박사의 지도하에 19985월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해 이슬람권 최초의 핵보유국이 되었으며 파키스탄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칸 박사는 북한 등 다수의 국가에 핵확산을 지원한 혐의가 드러나면서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하였다.

 

1.학력

1952~1956: D.J. 신드 과학대학교

1956~1960: 카라치 대학교

1961~1965: 베를린 공과대학교

1965~1967: 델프트 공과대학교

1967~1972: 루뱅 가톨릭대학교

 

2.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거래

페르베즈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은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1980년대 말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핵무기 제조에 필수적인 원심분리기 설계도와 부품, 심지어 원심분리기 완제품 20여기와 관련 기술을 제공했다고 밝혔다동일한 시기에 이란에도 원심분리기 등을 공급했다.

 

미국 의회조사국의 CRS 보고서는 "칸 박사가 리비아에 판매한 중화인민공화국의 핵탄두 설계도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넘겼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칸 박사는 파키스탄으로부터 우라늄 농축 핵프로그램(UEP)에 사용되는 원심분리기를 지난 2000년 파키스탄 보안요원들의 감독 하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항공기에 선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제공했다고 밝혔다.

 

칸 박사는 "베나지르 부토 총리가 내 요청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거래를 응낙해 주았다"고 말했다. 파키스탄은 우라늄 농축에 사용되는 원심분리기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제공하고 그 대가로 미사일을 획득한 것으로 전해졌다.[5] 부토 총리는 200712월 총선 유세 도중 사망했다.

 

부토 전 총리의 측근이자 언론인인 시얌 바티아가 펴낸 책에서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가 199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국빈 방문할 때, 코트 주머니에 우라늄 농축기술이 담겨진 CD를 건네주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미사일 기술을 들여왔다고 한 주장의 진위여부에 대해 칸 박사는 "그같은 말을 뒷받침할 만한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3.핵탄두 소형화

칸 박사는 1999년 북한의 핵시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영변과는 다른 쪽으로 안내됐으며, 정확한 방향은 모르지만 평양에서 한시간 거리의 지하 비밀시설에서, 탄도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플루토늄 소형화 핵탄두 3개를 직접 봤다고, 2004년 파키스탄 수사관들에게 진술했다. 칸 박사는 북한의 핵무기를 목격한 뒤 공개한 첫번째 외국인이다.

 

1998년과 1999년 평양 북서쪽 110 km 떨어진 평안북도 구성시에서 3~4차례 고폭실험이 실시되었다. 평안북도 영변 서북쪽 40 km 지점에 있는 평안북도 구성시 용덕동 고폭실험장에서 북한은 1970년대 부터 백여회의 고폭실험을 했다.

 

4.고농축 우라늄

칸 박사는 북한이 2002년에 원심분리기 3,000대를 가동했다고 말했다. 연간 무기급 고농축 우라늄 60kg을 생산하는 규모다.

 

워싱턴포스트는 정보분석가들의 말을 인용해 북한 자강도 하갑이 농축우라늄 핵무기 개발 장소로 꼽히고 있다고 보도했다.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A. Q. 칸 박사의 2009년 모습

원심분리기[centrifuge , 遠心分離器]

원심력을 응용하여 고체와 액체, 또는 비중이 서로 다른 액체률 분리시키는 장치. 시용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원심분리기의 원심력은 중력과 비슷하지만 더 강한 힘을 낸다. 모든 원심분리기에는 회전용기가 있는데, 용도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다. 세탁소에서 세탁물의 물을 짜내는 다공 회전통도 원심분리기의 한 형태이며, 산업에서는 대상물질을 분쇄한 뒤에 고체에서 유체를 분리하기 위해 이용한다.
회전자나 볼 등으로 알려진 원심분리기의 회전요소는 전동기나 공기 터빈에 의해 주로 고정축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축과 베어링에 대한 진동과 변형을 최소화하기 위해 하중을 받는 회전요소가 균형이 잘 잡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베어링이 고속에 알맞고 동력이 베어링의 마찰저항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크다면, 균형이 잘 잡힌 회전자의 속도에 대한 유일한 제약조건은 재료의 파괴강도이다. 원심분리기는 현탁액 또는 유체에 녹은 물질의 농축과 정제에 가장 폭넓게 이용된다.

원심분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