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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통합당(더불어 민주당)의 민주연합정부론과 전략투표 그리고 남북 우파연합정부(민주국가) 수립 본문

대북정책

미래통합당(더불어 민주당)의 민주연합정부론과 전략투표 그리고 남북 우파연합정부(민주국가) 수립

CIA bear 허관(許灌) 2020. 3. 16. 20:05





미래통합당(더불어 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민주연합정부론(민주국가)을 내세워서 전략투표로 파시즘(자주노선 좌익 파시즘 주체사상과 우익 파시즘 유신정치) 세력을 제거, 청산하고 남북 우파연합정부(민주국가)를 수립해야 할 시기이다


그러면 민주연합정부론에 대하여 말씀 드립니다

민주연합정부론(민주국가)은 반전체주의, 반독재주의 입장에서 남북한 좌우익 파시즘 세력을 배척하고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를 지지하는 우파세력의 주도로 연합정부를 구성한 후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국가)로 나아가자는 이론이다

우파는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를 지지하는 분들을 말한다면 좌파는 노동계급의 령도 노농연맹(勞農聯盟)의 사회주의 국가(인민공화국이나 사회주의 공화국)를 지지하는 분들을 말한다

우파는 입헌군주국을 인정하지만 좌파는 공화국만을 인정한다

한국정부 내부 좌파는 친북세력 즉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북한정부(주체사상, 김일성주의)를 인정하는 세력을 지칭하고 있으며, 우파는 북한 김일성 정부(김일성 가계 김정일, 김정은정부)를 공산주의 독재체제나 전체주의 독재정부로 인정하는 세력들을 지칭하고 있다

우파와 좌파에서 진보와 보수와도 구분해야 한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전체주의(독재주의)이며 자본주의 반대는 공산주의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국가)는 우파세력으로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자유주의(자유권, 자유무역)를 지향하는 세력을 보수세력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사회주의(생존권, 보호무역)를 지향하는 세력을 진보세력으로 지칭하고 있다

한국은 민주국가(민주공화국)로 진보세력을 인정하지만 좌파 사회주의 국가를 인정하지 않는다

친북세력이 사회주의 국가를 지지하는 좌파세력이고 좌파세력 조직도 친북성향이다

미래통합당(더불어 민주당)은  민주연합정부론(우파연합전선) 입장에서 보수와 진보연합이 돼야 한다

그랴야 이번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총선도 전략투표로 민주연합정부(민주국가)를 수립해야 한다


다음은 전략투표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전략투표(선거구 연합후보 등록)은 지역구에서 단일후보로 추대하고 후보를 출마하지 않은 곳에서는 출마한 연립정당 후보자를 전략 투표하고 비례의원 후보자에게는 자당(自黨) 후보자에게 투표하게 하는  방법이다

민주연합정부론 입장에서 전략투표는 반전체주의, 반독재주의 반파시즘 전선 구축이다

좌익 파시즘 주체사상(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를 배격하고 제거하는 것이 애국운동으로 신념화할 수 있을 만큼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 이론에 무장화돼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파시즘(자주노선 좌익 파시즘 주체사상과 우익 파시즘 유신정치) 세력을 타도돼야 지역구도 해소와 민주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연합정부론 입장에서 선거구 연합은 지역구에서 단일후보로 추대하고 후보를 출마하지 않은 곳에서는 출마한 연립정당 후보자를 전략 투표하고 비례의원 후보자에게는 자당(自黨) 후보자에게 투표하게 하는  방법이다.  지역구 승리는 바로 비례의원 승리이다

다당제 선거에서 소수당이 연합이 아닌 독자로 선거를 할때 선거보전 비용조차도 되돌려 받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정당이 부도 붕괴되는 경우가 많다


남북 민주연합정부론 입장에서 남북통일을 합시다

친북세력은 경제 교류의 매개체(중개역)로서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으며 친북 NLPDR노선 일본 공산당처럼 1단계 민주연합론, 2단계 사회주의 변혁 목표로 활동하는 좌파세력도 있다

남북 민주연합정부론이 반전체주의, 반독재주의로 반주체사상 세력이 될 때 노동계급의 령도 노농연맹(勞農聯盟)의 사회주의 국가(인민공화국이나 사회주의 공화국)를 지지하는 좌파세력보다도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를 지지하는 우파세력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북 민주연합정부(민주국가) 수립에 대하여 말씀 드립니다

남북한 민주국가 수립론 1단계는 북한지역의 민주연합정부 구성이다

북한지역의 민주연합정부론은 북한정부 입장으로 북한 내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를 지지하는 민주세력이 노동계급의 령도 노농연맹(勞農聯盟)의 사회주의 국가(인민공화국이나 사회주의 공화국)를 지지하는 전체주의 김정은 독재정부를 타도하고 개혁개방세력  즉 민주화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북한정부에서도 북한정부 의회 내부 민주연합정부론 우파세력이 권력을 장악해야 가능하다

북한지역 우파 세력 민주연합정부는 주체연호(주체사상, 김일성 김정일주의) 폐지, 김일성 가계 권력(주체연호 세습제 좌익군정) 타도, 북한 김정은 전제정부 퇴진과 민주정부 수립 등을 요구하고 있다 

남북한 민주국가 수립론 2단계는 남북민주연합 공동정부(민주국가) 수립이다

북한 지역 민주정부와 남한지역 민주정부의 연합으로 공동정부(민주국가)를 수립하는 방법이다

북한지역 노동계급의 령도 노농연맹(勞農聯盟)의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 타도와 새로운 국가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  통일 국가를 수립 하는 것이다

더불어 민주당과 문재인정부는 남북한 브로커(중개인) 문화를 중단해야 하고 남북 경제 교류의 매개체(중개역)로서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당 내부나 정부 내부의 풍조를 쇄신해야 할 것이다

노동계급의 령도 노농연맹(勞農聯盟)의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김정은 독재정부 타도와 남북한 민유(民有), 민치(民治),민향(民享)의 민주국가(민주공화국)를 수립 합시다





-우파 민주공화국이나 입헌군주국 이론[民營資本體制]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聯邦共和國)

-국정(國政, 民國)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民有),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民治),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民享)는 민주주의(민주)국가이다

-중화민국은 삼민주의(三民主義)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이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있다.

-국정은 국민의 엄숙한 신탁에 의한 것으로서, 그 권위는 국민에 유래하고, 그 권력은 국민의 대표자가 행사하고, 그 복리는 국민이 향유한다. [일본국 헌법]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프랑스 국민은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규정되고 1946년 헌법 전문에서 확인· 보완된 인권과 국민주권의 원리, 그리고 2004년 환경헌장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준수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상기의 원리들과 각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공화국에 결합하기를 희망하는 해외영토들에게 자유· 평등· 박애의 보편적 이념에 입각하고 그들의 민주적 발전을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제공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자유· 평등· 박애를 국시로 한다.

프랑스 공화국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원칙으로 한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개인과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이를 준수하며 수호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이다.

국민투표와 자유선거는 국민에 의한 최고의 직접적인 권력행사이다.

러시아연방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다양성이 허용된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국가이념이나 의무적 이념으로 규정될 수 없다.

러시아 연방에서는 정치적 다양성과 복수정당이 허용된다.

모든 사회단체들은 법앞에 평등하다. [러시아연방 헌법]

*미합중국 헌법[민주국가 헌법]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http://blog.daum.net/007nis/15876066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전문

http://blog.daum.net/007nis/15871495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성향 독일 바이마르 헌법(1919)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로부터 해방법률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독일 통일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048

*군국주의 대일본제국 헌법 전문과 평화주의 입헌군주제 일본국 헌법 전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4623

*러시아 연방 헌법[Конститу́ция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민주국가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72

*中華民國 憲法(중화민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57658

*대한민국 헌법(大韓民國 憲法)

http://blog.daum.net/007nis/15875575

*몽골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1736


-좌파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 공화국) 이론[國營資本體制]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라오스 그리고 쿠바 등 5개국에 불과하다.[노동계급의 노농동맹(공산당) 령도(領導, 지도) 인민의회정부론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 국가](많은 분들은 노동자 국가를 지향ㄹ하고 있는 이탈리아 파시즘이나 독일 나찌즘을 극우라고 표현하지만 좌익 파시즘으로 표현하고도 있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1990314일에 개정된 소연방의 신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6069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3485

*베트남 헌법(2013년 개정)[민주공화국 형태 사회주의 헌법]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는 인민에 의한(民治), 인민을 위한(民享) 인민의(民有) 사회주의 법치국가이다-

http://blog.daum.net/007nis/15876070

*북한헌법

-인민민주주의 인민공화국(1공화국 헌법)과 주체사상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2공화국 헌법),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3공화국 헌법)-

http://blog.daum.net/007nis/15875476


1957년 10월 15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중공중앙)이 ‘우파분자 분류 표준에 관한 통지’를 발표하였다.[모택동주의 노선 중국 공산당이 분류한 자본주의민주주의 세력(수정주의자) 우파와 극우세력 동향]
이에 따른 우파는 다음과 같다.
1) 사회주의 제도를 반대하는 자 .
2) 무산계급의 독재와 민주집중제를 반대하는 자 .
3) 공산당의 국가 정치생활 중의 영도적 지위를 반대하는 자 .
4) 사회주의와 공산당을 반대함으로써 인민의 단결을 분열시키려는 자 .
5)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공산당을 반대하는 소집단을 조직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 일부 분야 혹은 일부 계층 단위에서의 공산당의 영도를 뒤엎으려는 자 공산당과 인민정부를 반대하는 소란을 선동하는 자.
6) 앞에서 규정한 우파분자의 범죄활동을 지지하고, 관계를 맺으며 또 통신하여 혁명조직의 기밀을 보고하는 자.

통지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극우분자로 분류했다.
1) 우파활동 중의 야심가, 지도분자, 주모분자와 핵심 분자.
2) 공산당과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강령성 의견을 제출하고 이 같은 의견을 적극적으로 고취한 자.
3) 사회주의 반대활동에 특별히 악랄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한 분자.
4)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반공산당, 반 인민 활동을 전개해 왔으며 최근의 우파활동 전개 시에 적극적으로 반동활동을 한 자.


중공중앙의 이 통지는 반우파 투쟁을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1949년 건국 후사회주의 개조과정에서 후펑(胡風본명은 장광런張光人) 비판 등의 부르주아사상 비판 캠페인으로 위축되어 있었던 지식인의 활동을 적극화시키기 위해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운동을 제창했다.
중국문화가 꽃핀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의 자유로운 언론활동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마오쩌둥(毛澤東)이 명명했고, 1956년 5월 중국공산당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가 '백화제방·백가쟁명'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지식인의 자유로운 발언을 호소했다.
당초 지식인의 반응은 매우 소극적이었으나 1957년 5월 '언자무죄(言者無罪 : 무엇을 말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라는 방침에 고무, 일제히 발언하기 시작,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속출했다.
마오의 생각은 이 운동을 통해 이왕의 사회주의 건설을 정당화하고 강화하자는 것이었으나 순식간에 체제를 부정하는 단계로까지 치닫자 자신이 고무한 이들의 발언을 "'우파' 분자에 의한 반당·반사회주의적 '독초'"라고 매도하고, 같은 해 6월 '반우파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의 모순을 비판했던 공산당원들 다수가 반우파 분자로 몰려 숙청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였다. 29세이던 1957년 당적박탈과 강등 조치를 당한 주룽지는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이 ‘우파분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5년 동안 노동개조를 받기도 했다. 그는 마오쩌둥이 사망한 2년 뒤인 1978년 당적을 회복하고 사회과학원 공업경제연구실 주임에 임명되면서 ‘개혁 총리’로서의 미래를 예비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일본 공산당 "2단계 민주연합정부론과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

http://blog.daum.net/007nis/15875883

일본 공산당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당의 기본 방침으로 한다

일본 공산당은 2단계 혁명이론 NLPDR노선으로 우선 대미 종속과 대기업의 지배에 대한 민주주의 혁명을, 미래에 사회주의적 변혁을 목표로 한다

1단계로는 반미 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며 2단계로는 노동계급 령도 노농동맹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인민 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다

1단계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革命)

20041월 제 2 차 당대회 개정 강령에서 일본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社會主義 革命)이 아니며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 革命)과 민주연합정부(民主聯合政府)'의 목표로 내세웠다

대기업 재계와 대미 종속 세력으로부터 일본 국민(日本 國民)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에 권력 이양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이라고 평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대기업 재계와 대미 종속 세력에서 일본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세력으로의 권력 이양을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으로 자리매김하고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가능한 민주적 개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본 공산당은 현재 일본 사회가 요구하는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다음의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하였다

.국가의 독립 · 안보 · 외교 분야(分野)

대미 종속을 타파하고 미일안전보장조약(日米安全保障条約)의 폐기(廃棄)와 비동맹(非同盟중립(中立)의 일본을 실현한다. 미국과 대등 평등(対等平等)

의 우호 조약(友好条約)을 맺는다 등등

.헌법(憲法)과 민주주의(民主主義) 분야(分野)

()헌법 전문을 포함한 모든 내용을 지키고, 특히 평화적 민주적 조항(平和的民主的諸条項)의 완전한 이행을 목표로 한다.

()의회 민주주의의 체제 반대 당을 포함한 복수 정당제 선거에서 다수를 얻은 정당 또는 정당 연합이 집권하는 정권 교대(政権交代)는 당연히 견지한다.

()18세 선거권을 실현한다.

()일본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억압하는 모든 시도를 제거한다. 남녀평등(男女平等)의 권리(權利)를 모든 분야에서 옹호하고 지킨다.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고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에 철저를 도모한다. 등등

.경제적 민주주의(経済的民主主義)의 분야(分野)

()장시간 노동과 일방적 해고 규제를 포함해 유럽 주요 자본주의 국가와 국제조약 등의 도달점도 근거로 '규칙 있는 경제사회'를 실현한다.

()대기업(독점 자본)에 대한 다양한 민주적 규제(民主的規制)와 군축(軍縮), 불필요한 공공 사업의 중지, 대기업 · 재벌 우대 세제의 재검토를 재원으로 한 사회보장의 충실 등등.

 

이상(以上)의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革命)에 의해 일본은 미국의 사실상의 종속국의 지위에서 벗어나 진정한 주권을 회복하고, 국내적으로도 국민이 처음으로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 또한 일본은 군사적 긴장의 근원임을 멈추고 평화의 견고한 초석으로 바뀐다.

 

이 민주주의 혁명(民主主義 革命)에 대한 입장 1961년 강령에서는 ""일본의 당면한 혁명은 미국 제국주의와 일본의 독점 자본의 지배, 두 적()에 반대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 인민민주주의 혁명(人民 民主主義 革命)이다"라고 되어 있고, 1994년의 강령까지 거의 동일한 표현을 했다

2004년 강령 개정 당시에는 '다수자 혁명'이나 '의회의 다수를 얻어 혁명의 노선'이라는 설명이 이루어졌다

 

민주주의 혁명의 과정: 통일전선에 근거한 민주연합정부(民主連合政府) 구상(構想)

일본 공산당은 일본 공산당(日本共産党)과 통일전선(統一戦線)의 세력이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 국회에서 안정된 과반수를 차지한다면 통일전선(統一戰線)의 정부(政府) 즉 민주연합(民主聯合) 정부(政府)를 만들 수 있다는 입장으로 단독 정권(単独政権)이 아닌 통일전선(統一戦線)에 기반한 연합정권(連合政権)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국회를 명실상부한 최고기관으로 하는 의회제 민주주의 체제(議会制民主主義 体制)

, 반대당(反対党)을 포함한 복수정당제, 선거에서 다수를 얻은 정당 또는 정당연합이 정권을 담당하는 정권교대제(政権交代制, 정권교체)는 당연히 견지한다.

 

'통일전선(統一戦線)'은 역사적으로 1945년의 강령에서는 모든 민주주의 세력의 결집에 의한 인민전선(人民戰線)의 결성올바른 실천적 목표 아래 협동할 수 있는 모든 단체 및 세력과 통일전선(統一戰線)의 결성한다고 되어 있다

1947년의 강령에서는 광범위한 민주전선으로 1961년부터 2004년까지 강령에서는 '민족 민주 통일전선(民族民主統一戦線, NLPDR)'으로 표현 되었다

'민족민주통일전선 정부(民族民主統一戦線政府)''혁명정부(革命政府)'로 전환한다고 하고 있었지만, 2004년 강령 개정에서는 이 규정은 삭제 되었다.


2단계 사회주의적 변혁(社会主義的変革)

일본 공산당은 즉각 민주주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국민의 합의를 전제로 국회의 안정된 과반수를 얻어 사회주의를 위한 권력을 만들고 다음의 사회주의적 변혁(社会主義的変革, 사회주의 국가)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극복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社會)로의 진전(進展)을 도모(圖謀)

.주요 생산 수단의 소유, 관리, 운영을 사회의 손에 옮기는 생산수단(生産手段)의 사회화(社会化)

.민주주의와 자유의 성과(成果),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 있는 성과(成果)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 발전시킨다

.사상 신앙의 자유, 반대 정당을 포함한 정치 활동의 자유를 엄격하게 지킨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사상 신조의 자유, 반대 정당을 포함한 정치 활동의 자유는 엄격하게 보장된다."며 일당 독재(一党独裁制)와 지도 정당제(指導政党制)는 채택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또한 소련형 사회주의(連型社会主義)의 관료주의·전제(専制)의 잘못은 반복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언"에 더 자세히 설명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이념적인 내용이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헌법(憲法), 정부(政府), 군비(軍備), 의회(議会), 사유 재산제(私有財産制)의 범위 등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일본 공산당은 이러한 미래 세대가 창조적으로 해결 과제이며, 지금부터 고정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가 고도로 발전하면 착취와 억압을 모르는 미래 세대는 "원칙적으로 일체의 강제가 없는 국가 권력 자체가 불필요하게 되는 사회,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도 없고 억압도 전쟁도 없는 진정한 평등 자유로운 인간 관계로 이루어진 공동 사회에 대한 전망이 열린다고 한다.

또한 이 사회주의적 변혁'1961년 강령에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표현이었다는 것으로, 1994년에 사회주의적 변혁이라는 표현으로 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의 낮은 단계이다라고 하는 두 단계 발전론이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정설이었으나 마르크스, 엥겔스 자신은 그런 구별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두 단계 발전론을 그만두고 2004년 강령 개정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라는 표현으로 변경되었다 .



북한은 국가평가로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실패국가입니다

                                                                                      북한 아동 훈련용 목총(木銃) 모습

북한은 국가평가로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실패국가입니다
안보능력은 핵무기와 핵탄두 탄도미사일을 보유했지만 인권침해와 반정부세력 확대로 인민군 120만명 배치(60%이상 치안군) 그리고 중국 러시아등 유엔안보리 입장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을 지지로 약한국가로 평가하고 있으며 경제능력은 기아와 평민층 식량난으로 외부로부터 식량원조국가로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으며 정치능력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노선 좌익파시즘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실패국가로 평가되어 급변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실패국가이다
-머리소리함(知積能力團) 논의내용-


*안보능력: 내전위기 여부, 동맹국 여부 , 군사력 여부

*경제능력: 민생경제(식량난이나 의식주 여건)

*정치능력: 의회 민주주의와 주민 자치능력 그리고 지도자의 개인 능력

북한은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 의견입니다

북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권력은 세습제 좌익군정  체제유지에 주력해왔습니다

북한 김정은정부는 내전을 북한내부 지역 전쟁이나 북한 주민들의 반김정은세력 무장투쟁이 아닌  남북전쟁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소리함으로 논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북한정부의 안보능력은 약한국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안보능력은 핵무기와 핵탄두 탄도미사일을 보유했지만 인권침해와 반정부세력 확대로 인민군 120만명 배치(60%이상 치안군) 그리고 중국 러시아등 유엔안보리 입장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을 지지로 약한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1)북한정부의 군사력

북한은 재래식 핵무기(핵 폭탄, 수송기로 투하하는 대량살상무기)와 신형무기 핵탄두 탄도미사일(로켓이나 미사일로 투하하는 대량살상무기)을 보유하고 있다

북한의 군사력은 중국이나 러시아 극동지역 조차도 위협이 되고 있다

30분으로 서울을 평평하게 서울 불바다 이론이 바로 북한정부의 전술 핵무기와 전략 핵무기 이론이다

남한의 위협은 재래식 핵무기 원자폭탄과 핵 대포나 핵 배낭,핵 어뢰 등 전술 핵무기, 단거리 탄도미사일 전략 핵무기이고 일본, 중국, 러시아 극동의 위협은 중거리 탄도 미사일 전략 핵무기이며 미국등 태평양 연안국의 위협은 장거리 탄도 미사일[ICBM,탄도로켓] 전략 핵무기이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개발 수준이 고저(高低) 각도 발사로 비행거리를 조정하는 "로프티드 궤도(lofted trajectory)[高低角度 발사] 모델" 수준이고 북한 장거리 탄도 미사일[ICBM,탄도로켓] 전략 핵무기도 남한(한국)이나 일본, 중국, 러시아 극동지역의 위협되고 있다





 

 

The news came hours after state media showed North Korean leader Kim Jong-un inspecting what it said was a hydrogen bomb[미사일 핵탄두]

미사일 요격 방어시스텀 미국 사드나 러시아 S-400는 수송기(폭격기)나 로켓,탄도 미사일도 요격이 가능하다

미사일 방어 전투는 미사일 탄두를 식별하고 그 미사일 탄두를 파괴하기 위한  한 순간의 전쟁이다. 한국이나 아시아 태평양지역도 나토처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DD) 배치로 탄도 미사일은 물론이고 지구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탄도로켓]까지 요격할 수 있는 미사일 방어체제(MD)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북한 로켓부대(미사일과 포부대) 이외 지상군(地上軍, ground army)은 남한보다 열세이다


(2)내전위기 여부

북한 김정은정부는 내전을 북한내부 지역 전쟁이나 북한 주민들의 반김정은 세력 무장투쟁이 아닌  남북전쟁으로 척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남녀 징병제 국가로 120만명의 인민군을 보유하고 있다[남자는 10년, 여자는 7년 군복무]

북한 인민군의 60%이상이 북한내부 법과 질서(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를 지키는 치안군이다

북한정부의 군사력에서 가장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 치안군이다

북한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김정은 부대가 남침이나 일본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할때 내전이 일어날 수 있으며 반김정은 세력이 대량살상무기를 장악할때는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이 붕괴될 것으로 본다

중국이나 러시아 정부도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에서 핵무기를 포기하고 민생경제로 전환할 수 있는 모델 수평적 권력교체를 선호해왔다




                                                                           



                                                                   

 

 

 

 

 

 

 

 

 


 

                                              





                                        

 



                                     





(3)동맹국 여부

과거 북한정부의 동맹국 러시아나 중국은 유엔안보리 5개국 상임이사국으로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 유엔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는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 살상 무기와 탄도 미사일[핵 대포, 핵 배낭, 핵 어뢰, 핵 기뢰등 전술 핵무기와 탄도 미사일(공중발사 순항 미사일이나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단거리 탄도미사일) , 탄도 로켓(대륙간 탄도 미사일 ,사거리 5,500km 이상)  등 전략 핵무기]의 완전한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폐기에 대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북한의 자금이나 경제, 외교의 활동을 제한하는 것이다

중국이나 러시아 정부도 북한 핵무기 포기정책에서 핵무기를 포기하고 민생경제로 전환할 수 있는 모델 수평적 권력교체를 선호해왔다

북한정부 내부 핵무기와 핵탄두 탄도미사일 개발을 추진해 온 세력은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이다

주체연호(세습제 좌익군정) 청산이 수평적 권력교체이며 핵무기 포기정책이다


*조소 우호 협력 및 상호 원조 조약[朝蘇友好協力─相互援助條約]

1961년 7월 6일 북한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양국 간의 군사동맹조약.

정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이다. 이 조약의 특징은 유사시 군사적 자동개입을 규정한 양자동맹조약이라는 것이다. 김일성의 소련 방문 중 체결된 이 조약은 6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핵심 내용은 ‘체약 일방이 어떠한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체약 상대방은 지체 없이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소련 양국 간의 경제·문화·기술의 원조·제공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당시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 등 다자간 안보조약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는 양자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대국-소국 간의 군사동맹이 소국의 수도에서 협정이 체결되는 것에 반하여, 이 조약은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체결되었다.

소련 측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에 통보하지 않고, 두 개의 조소, 조중 군사협정을 5일 간격으로 체결했다. 따라서 체결 당시부터 협정의 강제성이 의문시되었다

(1)역사적 배경

북한과 소련 간의 조약 체결은 1950년대 후반 치열해지는 사회주의 진영의 중소갈등과 중인전쟁, 그리고 한국의 5·16군사정변 및 한일관계 정상화 움직임,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 통합 전략 구상 등으로 북한을 둘러싼 안전보장 환경이 악화되면서 체결되었다. 그러나 동맹 체결 직후 중소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조소관계는 실질적으로 중단되었고, 허울뿐인 동맹으로 전락하였다. 조약 체결 이후 김일성은 국내외적으로 소련, 흐루시초프, 현대수정주의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6111월부터 196410월까지 소련은 북한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했다. 더욱이 소련은 중국, 북한과의 경제 원조를 중단했으며, 북한에 제공했던 차관을 황금으로 상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2)경과

이 조약은 10년간 효력을 가지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체약 일방이 기한 만료 1년 전에 조약 폐기에 관한 희망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자동으로 5년간 연장되도록 되어 있었다. 탈냉전 분위기와 더불어 1990년 한국과 소련의 국교정상화 이후 조약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19946월 김영삼 대통령 러시아 방문 시 옐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동 조약의 폐기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199587일 러시아 동 조약을 연장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북한에 통보하여, 1996910일 이후 효력 상실했다. 20002월 이바노프 외무장관의 평양 방문에서 조러 친선선린 협조조약(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북한은 20004, 러시아는 7월에 이를 비준했다. 새 조약에는 쟁점 조항인 자동군사개입 규정이 삭제되었으며, 경제·문화·기술 협력에 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3)의의와 평가

냉전 시기 북중우호조약과 더불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한 주요 군사동맹조약. 19617월 북중우호조약과 북소우호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북소조약 체결 직후 북소관계의 악화와 더불어 1962-64년 북소관계에 따라서 허울뿐이 조약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냉전시기 북소동맹조약의 불완전하게 작동함으로써 북한의 안전보장이 불완전하게 되었다.

 

*조중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

1961년 7월 11일에 북한과 중국 사이에 맺은 조약.

조중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은 1961711일 베이징에서 체결됐다. 북한 김일성 주석과 당시 저우언라이(주은래) 중국 총리가 양국 전권 대표로 서명했다. 양국이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 것을 전제로 어느 한쪽이 타국의 침략을 받아 전쟁에 들어갈 경우 양방은 의무적으로 모든 노력을 다해 군사적 지원 등을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지난 1981년과 2001년에 2차례에 걸쳐 자동 연장됐고 앞으로 유효기한은 2021년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와 탄두 미사일 개발이 평화와 안전을 지키는의무를 위배한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조중우호협력 상호원조조약 내용

1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아시아와 세계 평화 그리고 양국 국민의 안전을 위해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이 노력한다.

2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모든 조치를 공동으로 맡으면서 체결국에 대한 특정 국가의 침략을 방지한다. 체결국 가운데 한 쪽이 몇몇 동맹국의 침략을 받을 경우 전쟁 상태로 바뀌는 즉시 군사적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

3조 어느 체결국도 다른 체결국과 맺은 동맹에 참가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에 대한 특별한 집단, 행동, 조치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4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양국 공통의 이해 관계가 있는 모든 중대한 국제 문제에 대해 서로 협의하기로 한다.

5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주권의 상호 존중, 내정 불간섭과 평등 호혜의 원칙, 우호-협력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양국간의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서 가능한 한 경제-기술 원조를 진행하며 양국간의 지속적인 경제, 문화, 과학, 기술 협력을 통해 발전시킨다.

6조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양국은 조선의 통일이 평화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실현되는 것을 원하며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조선 인민의 이익 및 동아시아의 평화 옹호 목적과 일치하는 것을 인정한다.

7조 이 조약은 양국 의회가 비준하지 않으면 효력이 생기지 않으며 양국이 비준서를 교환한 날부터 효력이 발생한다. 비준서는 평양에서 교환하며 양국이 조약의 개정 또는 효력의 상실에 대해 합의하지 않는 이상 효력이 유지된다

 

핵 보유를 위한 북한의 시도는 자국과 지역의 안전에 충격을 줬고 중국의 국가안보 이익에도 심각한 피해를 줬기 때문에 이는 조약 위반 사안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조약은 침략을 단호히 반대한다고 명시했는데 북한이 고집대로 핵을 개발하고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위배되는 미사일 발사시험을 진행하고 있다"면서 "이는 조약을 체결했을 당시와 2001년 조약이 마지막으로 갱신됐을 때와는 다른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신문은 "북한은 반드시 핵실험을 중단해야 하고 한미 양국도 북한을 겨냥한 군사적 위협을 멈춰야 하며 양측은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위해 각자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간의 북중관계가 외부로 비치는 것보다 그리 끈끈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한중 수교 다음 해인 1993년 북한은 2000년 올림픽 유치 경쟁에서 중국이 아닌 호주를 지지했고, 1997년 덩샤오핑(鄧小平) 사망 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대사관에 조전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즈화(沈志華) 화둥사범대 교수가 북중 혈맹관계 와해를 주장하며 조선(북한)은 잠재적 적국이고 한국은 가능한 친구라고 말한 강연록도 회자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은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지지했습니다[한반도 통일국가는 군국주의나 국가사회주의 노선으로 전쟁에 의한 통일이 아닌 남북 주민이 선출한 남북의회에 의한 자유사회(민주화 사회) 평화통일이다  한반도 비핵화 원칙이 군국주의나 국가사회주의 정책 노선이 아니다]

러시아나 중국정부는 수정주의(실용주의) 노선이다. 수정주의(실용주의) 노선은 새로운 정세에 점진적이고 온건한 입장에서 대응하기 위하여 기존의 이론이나 학설을 수정하려는 경향이다

수정주의를 실용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볼셰비키 혁명 후 수정주의라는 용어는 공산주의자들이 확립된 견해로부터 벗어나는 어떤 종류의 이견들을 매도하는 데 쓰이게 되었다.

실용주의란 말은 이상주의나 세계를 불변의 것으로 파악하는 원칙보다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에 촛점을 두고 실용성을 중시하는 정치적 입장이다

世界潮流浩浩蕩蕩順之則昌, 逆之則亡.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북한정부의 안보능력은 남침을 할 수 없을 만큼 약한 국가이다

남침이나 일본 미사일 발사, 지역분쟁을 할때는 유도적 전술 오판이나 북한 내부 권력투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유엔안보리는 남침이나 일본 미사일 발사, 지역분쟁을 할 수 있는 세력에게 대북제재를 가하고 있다


2.북한정부의 경제능력은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북한정부의 경제능력은 기아와 평민층 식량난으로 외부로부터 식량원조국가로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1)외부의 식량 지원이 필요한 나라

유엔이 또다시 북한을 외부의 식량 지원이 필요한 나라로 분류했습니다. 스위스의 비정부기구는 북한을 인도적 위기국으로 꼽았습니다.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71분기 곡물 작황 식량 상황 보고서에서, 북한을 외부의 식량 지원이 필요한 세계 41개 나라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습니다.

보고서는 2018년 곡물 생산량이 예년 평균 수준에 미치지 못했던 전년도 보다 더 감소할 것으로 공식 추산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이는 지난 해 7월과 8월 사이의 높은 온도와 적은 강수량 때문이라며, 그 결과 대부분의 가구의 식량 소비율이 계속 경계선상에 있거나 열악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에서는 식량 불안정에 관한 우려가 계속 남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보고서는 지난 해 말을 기준으로 북한의 식량 수입 필요량이 641t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보다 앞서, 북한주재 유엔 상주조정관실은 6일 발표한 ‘2019년 북한 필요와 우선순위 보고서에서, 지난 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이 495t으로 전년도 545t에 비해 50t 감소했다고 밝혔습니다.

보고서는 북한에 만성적인 식량 불안정과 영양실조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며, 전체 인구의 43%인 약 1100만 명이 영양결핍 상태라고 말했습니다.

 타판 미슈라 상주조정관은 특히, 지난 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이 전년도에 비해 9% 감소하면서 1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점이 우려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로 인해 상당한 식량 부족이 초래됐다며, 적절한 자금 지원이 없을 경우 북한의 인도적 상황이 악화되고 영양실조와 질병이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한편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비정부기구인 ACAPS7일 북한을 인도주의 위기국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의 복합적인 인도적 위기는 정치 경제적 요인과 함께 자연 재해로 인해 촉발된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야욕이 국제 제재로 이어졌고, 이는 지원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입니다.

또한 북한은 폭우와 홍수, 가뭄 등에 주기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으며, 2018년에도 심각한 홍수를 경험했고, 8월에는 태풍 솔릭이 북한을 강타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북한  평민층 식량난과  영양부족(실조) 북한 아동들 모습[Famine grips North Korea]

A malnourished boy stands in an equally emaciated cornfield,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29, 2011. [북한 함경남도 옥수수 밭에 서 있는 영양부족(영양실조) 북한 아동모습(2011년 9월 29일)]

 

 

   A homeless woman prepares a few shriveled ears of corn for lunch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30, 2011(점심 밥)

 

  Students and volunteers dig a canal on October 1, 2011 in Haeju ,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학생과 주민 자원자들 동원 근로사업)

 

        A woman cooks at home on September 29. 2011, in Hwanghaenam-do, North Korea(옥수수 밥을 준비하는 북한 어머니 모습)

 

    A malnourished boy lies on a hospital bed in Haeju,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October 1, 2011.(영양실조로 병원에 누워 있는 소년 모습) 

 

 

                     A mother cares for her clinically malnourished child(영양실조로 누워 있는 아동을 간호하는 어머니 모습)

 

Malnourished infants lie on hospital beds in Haeju, capital of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October 1, 2011(함경남도 해주 병원 입원한 영양실조 북한 아동들 모습)

 

 A boy prepares the soil for crops on a collective farm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30, 2011(집단농장에서 농작물을 위해 흙을 준비하는 소년모습)

 

 

    Women work on a collective farm in Hwanghaenam-do, North Korea, on September 30, 2011(집단농장에서 일하는 북한 여성들 모습)

 

 

            Pak Su Dong, the boss of the collective farm in Hwanghaenam-do, North Korea(집단농장 책임자 박수동씨 모습)

 

 

           Jo Tae Kun, a health-care assistant in a small village in Hwanghaenam-do, North Korea(마을 영양사 조태곤씨 모습)

 

 

   Two North Korean orphans dress to impress a foreign delegation(두 명의 북한 고아들이 외국 파견단 방문용으로 좋은 옷을 입은 모습)


자료:중국정부

http://www.china.org.cn/photos/2011-10/11/content_23591611_6.htm



(2)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 좌익 파시즘 북한 인민군 경제

공식적은 북한 군은 120만명이다 북한의 나머지 군인들은 민간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이 민간 업무란 양돈, 어획, 광산, 공장 등에서 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임급으로 일을 시키는 것이다 [북한은 남녀 징병제국가로 중학교 졸업 후 남자는 10년간, 여자는 7년간 현역군인이나 다른 군복무형태  직장 등지에서 군복무를 해야 한다]

인민군은 농업, 공업과 군수산업 중공업, 공공기업체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일 거대한 생산집단이며, 동시에 소비집단이다 북한 핵무기 개발이나 미사일 개발 비용이 대부분 인민군 경제활동에서 충당하고 있다.


북한 경제는 국영자본체제 북한 인민군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남북 경협이나 외부 경협이 인민군  영향력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대북 투자는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주체연호 세습제 좌익군정 좌익 파시즘을 지지해야 한다 민간경제 대북투자는 실패 가능성이 높은 위험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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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북한 인민군 제549부대 양돈장(養豚場) 시찰하여 돼지 사육과 도축 그리고 돼지고기 제품 판매 현황등을 시찰했습니다


 

 

 

2013년 5월 21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북한 인민군 제621호 육종장(育種場)을 방문했습니다. 인민군 제621호 육종장(育種場)은 면적이 349만 평방미터로 인민군 가축 식량기지로 양등을 사육해오고 있습니다


일본 홋카이도 마쓰마에초 부근 해역에 위치한 무인도 마쓰마에고지마에서는 지난달 28일, 북한을 출항한 목조선이 정박해 10명의 선원 가운데 일부가 상륙했는데 경찰 등의 조사에 따르면 섬 건물에서 TV와 소형이륜차 등이 없어진 것으로 밝혀진 바 있습니다.

이들 10명의 선원 가운데 약 절반이 해상보안본부 등의 조사에서 이전에 조선인민군 소속이었다고 밝힌 사실이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 취재에서 밝혀졌습니다.

목조선에는 북한 인민군 제854군부대라고 쓰인 표식이 달려 있는데 무기 등은 없었고 북한에서는 군이 외화획득을 위해 수산업에 관여하고 있는 점으로 미뤄 군부대 소속 어선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과 해상보안본부는 선원이 과거 어떤 부대에 소속했는지도 포함해 계속해서 군부대과의 관련에 대해서도 조사하고 있습니다.


(3)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북한 제4공화국 헌법은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북한식 국영자본체제

북한 제4공화국 헌법 제24조 개인소유는 공민들의 개인적이며 소비적인 목적을 위한 소유이다. 개인소유는 로동에 의한 사회주의분배와 국가와 사회의 추가적혜택으로 이루어진다. 터밭경리를 비롯한 개인부업경리에서 나오는 생산물과 그밖의 합법적인 경리활동을 통하여 얻은 수입도 개인소유에 속한다. 국가는 개인소유를 보호하며 그에 대한 상속권을 법적으로 보장한다[북한 제4공화국 헌법 제24조]


1936년 스탈린 헌법 제11조 시민소유는 그 시민개인의 재산이며 물질적·정신적 만족을 위하여 사용된다. 시민소유에는 노동에 의하여 또는 법률에 위반되지 아니하는 범위내에서 취득된 소비용 또는 산업용의 모든 재산이 포함된다. 다만, 시민의 소유로서 인정되지 아니하는 취득물은 이에서 제외된다. 농업과 개인의 부업경영 기타 법률에 규정된 목적을 위하여 시민은 영대사용(永代使用) 상속의 대상으로서 토지를 전유하거나 사용할 권리가 있다. 시민재산의 상속권은 법률에 의하여 인정되고 보장된다.[1936년 스탈린 헌법 제11조]




북한 제1공화국 헌법 제6조 전 일본국가와 일본인의 소유토지 및 조선인 지주의 소유토지는 몰수한다.
소작제도는 영원히 폐지한다.

토지는 자기의 로력으로 경작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다.
토지소유의 최대한도는 5정보 또는 20정보로 한다.
토지소유의 최대한도는 지역 및 조건에 따라서 따로 법령으로 규정한다.
토지의 개인소유와 아울러 국가 및 협동단체도 토지를 소유할 수 있다.
국가 및 협동단체의 토지소유면적에는 제한이 없다.
국가는 로력농민의 리익을 특히 보호하며 경제적 정책이 허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방조한다.[1948년 북한 제1공화국 헌법 제6조]


북한은 인민경제 제1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1972년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수립이후 북한  경제는 민간경제(인민경제)에서 인민군이나 집단농장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경제로 전환돼 왔다

북한 경제는 스탈린헌법보다도 반민간경제(반민생경제) 국가이다

국영자본체제는 국가가 운영하는 자본주의(국영기업)를 의미한다

북한정부도 토지이외 모든 물건(주택이나 상가, 자동차등)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평양시내 아파트 매매를 허용하고 있다 토지는 국가나 협동농장 소유이다 북한 평양시민 중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람은 개인 소유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

 평양 시내  상류층과 평민층, 빈곤층등의 빈부격차도 심각하다

 북한 주민 계층은 상류층, 평민층, 빈곤층(식량난이나 영양실조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북한 상류층 30%이내이며 평민층 70%, 평민층 중 빈곤층 33%이내: 북한의 배고픈 사람들(식량난과 기아위기 주민들)1990년대  초반 420만명, 중반 700만명이었고  긴 식량 위기의 10 년 후, 2007 년까지 북한  전체 주민의 33 %, 780만명이 영양실조 상태이다]

  북한은 교육, 의료, 주거의 무상화를 실시하고 있다고 칭하고 있지만 북한 경제 빈곤화로 실업자나 빈곤층에게는 교육,의료, 주거등의 무상화가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은 상류층과 서민층(평민층)으로 구분 돼 있고 서민층(평민층) 중에는 식량위기 계층 빈곤층이 전체 주민 33%이다

 북한은 계획 경제를 실행하고 있지만 의식주(衣食住), 외출이나 쇼핑에는 (입장권·승차권 등의) , 상표권과 돈이 필요하다. 교육,의료,주거 무상화로 직원 급여가 아니라 생활비만 지급된다. 주택(주거)도 개인소유를 인정함으로 점차 사유화 돼 가고 있다

북한 빈곤층 생활 모습은 TV 방영 되지 않고 있다








                                                                   




                                                                 텃밭이나 개인 부업을 하는 북한 주민들 모습

 


3. 북한정부의 정치능력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노선 좌익파시즘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세습제 좌익군정으로 실패국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제1공화국 헌법 인민회의정부론 인민 민주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제2공화국 헌법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주체사상을 공식적으로 국가제도로 인정한 이후 의회 민주주의 정치와 주민자치가 사라지고 지역 군사위원회나 중앙 국방위원회에 의한 통치를 해오고 있다

이때부터 인민의회정부론(인민회의정부론) 노선 인민 전쟁론[의회에 의한 전쟁방식]에서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 전쟁론[군대에 의한 전쟁방식]으로 변경 되었다 


(1)당군이론과 선군정치 노선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 

현역군인이나 군() 경력이 없으면 원칙적 북한 노동당 당원이 될 수 없다

북한 노동당 당원은 군인이다[先軍정치와 국방위원회]

북한은 14세가 되는 해 징병대상자로 등록된 후, 16세 때 징병검사를 받는다. 이듬해 17세에 정식으로 입대한다. 복무기간은 남성 보병부대 10년 특수부대 13, 여성 보병부대 5년 특수부대 7. 복무 중 의무적으로 경제활동에 투입되므로, 북한 인민군은 농업, 공업과 공공기업체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일 거대한 생산집단이며, 동시에 소비집단이다. 전역 후 계급에 상관없이 60세까지 예비역으로 복무한다. 2000년대 들어 병무행정이 원활히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 대학입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가거나 예술가, 운동 선수, 징병검사를 통한 심신 상태나 자질 문제가 있는 사람은 징병되지 않는다. 징병되지 않는다고 다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와 운동선수는 장교에 준한 대우를 받는 반면 심신 또는 자질에 문제가 있어서 징병되지 않은 사람은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평생 차별을 당한다

북한 무상교육 중학교 졸업생 중 30%이내 학생들이 개인의 능력과 유상교육기관 대학에 진학한다


통상 군부에 해당되는 선거구나 대의원 수는 상세히 공개되지 않는다. 다만 발표된 선거결과로 군부 관련 선거구와 당연직으로 선출되는 중요 인물들의 인적사항 등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총정치국과 총참모부, 인민무력성의 주요 직책을 포함하여 군종 별 사령부와 군단급에서 당연직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고찰하면 제13기의 경우 대략 80여 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번 제14기에서는 이보다 20여 명이 적은 60 여개의 선거구에서 군부 대의원이 배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대의원은 대부분이 현역군인이나 퇴역군인이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개최 모습



                      411일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45차회의가 열렸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2) 김일성 김정일 가계 세습제 유일사상과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 김정일주의자가 돼야 국가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주의 주체사상(주체연호)과 김정일주의 선군정치를 지지해야 정치범이 아니다

북한정부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가계 세습제 유일사상 이외는 모든 세력이 적이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를 버려야 종파분자가 되지 않는다 김일성 주체사상과 김정일 선군정치 유일사상으로 무장하라

-국제적 반미투쟁가와 연대를 하라 그래야 반미전선을 구축할 수 있다 중국정부 내 친미인사를 제거하라 일본정부나 한국정부 내부 반미인사를 포섭하라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후보 자격은 다음과 같다

"선거에 참여할 정당과 개인은 선거연합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 가입하며 해당 선거연합은 모든 지역구에서 후보를 단일화한다"

후보를 내는 곳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뿐이기에 모든 지역구에서 단독 후보가 출마하게 되고 홍보나 선전 활동 등 선거 유세도 없다. 투표용지에 적힌 후보자를 지지할 경우에 기표소에 들리지 않아도 된다고 보장하였으니 기표소에 들리는 것 자체가 해당 후보자를 반대한다는 표시가 되는 '공개투표'가 된다. 선거가 끝나면 다 같이 모여서 춤을 추는데, 개표가 끝난 뒤가 아니고 투표가 끝난 뒤에 한다는 점도 선거에서 반대 의견을 내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통일전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선로동당 (여당) ·

조선사회민주당 ·

천도교청우당

해외 김일성 김정일 가계 세습제 유일사상 단체[조총련등]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은 북한의 정치 단체이다. 흔히 조국전선으로 약칭한다.

1.개요

19496월에 평양에서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북한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통합하여 창립되었다. 북한 노동당을 포함하여 북한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단체이다.

 

단체의 목적은 북한 노동당의 정책, 특히 남북통일 문제에 대한 정책을 지지하며 옹호, 관철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남한에 대한 대남 활동을 펼치는 것이 주요 기능이었지만, 현재는 정당 및 사회단체의 연합체로서 총선거 후보자를 배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배경

민전의 통합은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의 합당으로 조선로동당이 탄생한 것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미군정 시기인 19462월에 박헌영과 여운형, 허헌 등이 만든 단체이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소군정 영역에서 김일성과 김두봉, 최용건 등이 주축이 되어 구성되어 있었다. 모두 사회주의 계열의 여러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해 창립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불법 단체로 규정되었다. 이에 1949625일부터 평양에서 회의가 열려 두 단체는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으로 통합했다.

 

3.기능

북한에서는 이 단체를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노농동맹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모든 애국적 민주주의 역량을 묶어 세운 강력한 정치적 조직체"로 규정한다. 북한 노동당의 통일전선 전술의 전위를 맡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내의 북한 노동당 지지 세력을 단합시켜 북한 노동당과 연계 활동을 펼치는 것이 목적이었다.

 

주요 활동은 대한민국에 대한 성명과 담화, 기자회견 등을 통해 여러 제의와 선전 활동을 펼치는 것이었다. 한국 전쟁 전의 대표적인 제의로는 19505월의 총선거 실시 제의가 있다. 남북한의 통일된 입법기관을 설립하기 위한 총선거를 함께 실시하자는 내용이었다.

 

최고 기구는 중앙위원회이며 산하에 하부조직과 단체를 두고 있다. 북한 노동당 비서를 지낸 김용순과, 여운형의 딸 여원구, 남한 출신인 류미영 등이 공동 의장을 역임한 바 있다.

 

1961년 창설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과 유사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현재는 각 정당과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총선거 후보자를 배출하는 연합체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북한 선거에는 후보자가 한명밖에 입후보하지 않는다.

 

일본 조총련이나 남한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한국민족민전선 서울대표부] 그리고 해외 친북세력 김일성 김정일주의(주체사상이나 선군사상) 단체들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통일전선] 하부조직으로 활동하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북한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은 북한 김정은정부 친위대이며 자금줄(돈줄)이다

특히 해외 단체 북한정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북한정부 인적자원단체이며 자금줄(돈줄)이다

남한에서는 북한 김일성정부가 박헌영과 남로당을 체제전복 범죄행위와 미국의 간첩으로 처형된 이후 남한에서 친북세력이 와해 되었고 박정희정부 때 남한 최초의 김일성노선 통일혁명당을 조직했고 1972년도 주체사상 선포와 함께 남한, 조총련 해외단체에 대의원을 선출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구축해왔다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노동당이 크게 패배하고 인민민주주의 노선 인민회의정부론 인민공화국을 포기하고 자국 사회주의 국가 주체사상과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2122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사회주의 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여 북한 제2공화국을 선포했다


(3)자유화 민주화운동 세력 탈북민

-김정은 독재 정권 종식할 때 진정한 평화통일-

                                                                         ▲북한 민주화위원회 허광일 위원장

제16회 북한자유주간 3일째인 4월 30일 오후 2시(현지시간) 워싱턴 D.C. 헤리티지재단에서 '북한 인권과 안보 위협 사이의 정책 격차 좁히기'를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발표자로 나선 허광일 위원장(북한민주화위원회), 김흥광 대표(NK지식인연대), 김성민 대표(자유북한방송)의 발표 내용을 아래 요약했다


허광일 위원장

북한민주화위원회는 황장엽 선생이 북한 민주화와 해방을 위해 운영해 온 탈북자 조직이다. 해마다 워싱턴과 서울을 오가며 진행되는 북한자유주간은 17년 전 황장엽 선생을 미국에 초청해 강연을 했던 수잔 솔티 여사가 그 때를 기점으로 매년 해오고 있는 국제적인 행사다. 북한 2,300만 주민들의 자유를 위해 앞장서서 투쟁해 온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여러분들도 다 알다시피 인권이라는 것은 천부적인 권리로 인권탄압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2,300만 북한 주민들은 오랜 세월동안 인권을 유린당한 채 노예와 같이 살아왔다. 고난의 행군 때에는 350만의 무고한 주민들이 굶어 죽었다. 당시 350만 아사의 대참사와 같은 사건에 대해 우리 탈북자들은 이를 살인 독재자 김정일에 의한 인위적인 대학살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때문에 북핵 문제를 비롯한 북한 문제 해결에서 중심은 부득불 북한 인권 문제가 중점에 설 수 밖에 없다.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해야 북한의 3대 세습 문제도 종식시키고 한반도의 통일도 기약할 수 있다.

북핵은 3대 세습 마지막 독재자 김정은의 생존 수단으로 북한 정권의 운명과 직결돼 있고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북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인권유린과 독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여서 북한과 같은 독재 체제에서의 인권 문제는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한 주민은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몰랐고 착취 계급이 피착취 계급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북한 주민들의 이 같은 인식은 그들을 정신적 불구로 만들려는 북한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과 함께 시작된 북한 장마당은 북한식 변화의 민감한 촉진제 역할을 해 왔다.

장마당을 통해 외부정보가 자연스럽게 유입될 수 있었고 이는 북한사회를 꾸준히 변화시켜 왔다. 그 결과 장마당을 시시때때로 단속하는데 대한 주민들의 반발은 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는 북한의 보편적인 생활로 자리 잡았다.

최근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현재 한류를 비롯한 외부 정보에 대한 처벌은 강화되지만 정보 확산 속도를 따라 가지 못하기 때문에 김정은 정권의 운명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북한은 탈북자들에 대한 전방위적인 압박과 협박을 가하고 있다.

저와 같은 경우만 해도 북한은 십 여년 전부터 저의 북한 행적을 면밀히 알아보고 저에게 북한 보위부 소속의 고위급이 직접 저희 딸을 내세워서 전화를 해서 북한으로 유인하기 위해 갖은 모략을 다 꾸며왔다.

심지어 이들은 북한에 있는 제 가족들의 동영상을 저에게 보내주면서 다시 북한으로 온다면 특별 대우를 해주겠다는 제안도 해왔다.

결론적으로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통일은 김정은 독재 정권이 종식할 때 이뤄진다. 특히 김정은 정권의 종식은 북한 인권 문제가 중점적으로 거론될 때 이뤄질 수 있다. 북한 체제가 무너지고 자유 대한 세력이 힘을 얻게 될 때 든든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평안이 찾아올 것이다.

 


                                                                  ▲김흥광 대표가 발표하고 있다


김흥광 대표

북한은 고도로 폐쇄된 사회다. 그 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고발도 세계가 알 수 없다.

구체적인 액션도 그것을 취했을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알아야 접근할 수 있는데 피드백을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구체적인 정책을 수정하거나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 정부는 북핵 문제의 첫 단추를 잘 못 끼웠다. 그 악마를 보통 사람과 친구로 만났다. 김정은의 거만성이 지금 매우 높은데 매우 나쁜 신호다.

탈북자들은 10여 년 동안 북한 붕괴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저희들이 가지고 있는 3가지 생각이 있다.

1. 핵으로 무장한 북한과 핵무기를 어떤 협상이나 보상으로 둘을 갈라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적합한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권을 붕괴시키면 핵도 없어진다. 북한이 민주화 되면 핵무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된다. 북한 정권에서 핵무기를 떼어내기 위한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인권에 관한 것이다.

북한과 협상을 할 때, 정치범 수용소를 해체하라거나 이동의 자유, 해외 여행의 자유를 보장하게 하라고 하면 북한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비핵화와 장거리 미사일까지 무력화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2. 북한 내부로 외부 정보를 강물처럼 흘려 보내야 한다. 미 국무부와 많은 북한 단체를 통해서 북한에 들여보낸 많은 정보들이 오늘날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동력으로 작용했다.

혁명이 일어나려면 사회에 크게 3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첫째는 속삭이는 사회다. 그리고 거기서 더 깨어나서 통하는 사회처럼 대 놓고 소통하는 사회가 두번째 단계다. 그리고 마지막은 행동하는 사회로 들어서게 된다.

 

북한자유주간 대표단 가운데 다양한 시대별로 온 사람들이 있는데 의식이 다르다. 북한에서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현 주소는 웅성거리는 사회로 진입했고 공개적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이제는 행동하는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비핵화 문제 해결 방안이나 21세기 히틀러가 될 수 있는 김정은에 대한 대안은 탈북자라고 생각한다. 호랑이는 호랑이로 친다는 말이 있다.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한 많은 보고서는 탈북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탈북자들은 북한의 현재 인권 상황 가운데 행동하는 사회로 이끌기 위해서는 북한에 인터넷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대담한 시도와 기술적 대안을 가지고 있다.

북한에 있는 각급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졸업한 탈북자들이 60명이 넘어서지만 북한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한 사람은 없다. 정보를 함께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북한에 다양한 풀뿌리 조직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시장 조직, 사회 조직, 군사 조직까지 만들어야 하며 이런 활동을 위한 후원도 필요하다.

 


                                                                               ▲김성민 대표가 발표하고 있다


김성민 대표

한국 현지시간 새벽 315분이면 만조를 통해서 물풍선을 보내고 있다. 페트병에 쌀을 담아서 보내는 것도 있는데 새벽 만조 때 이뤄지는 것은 김정일 김정은의 왜곡된 영상과 함께 쌀과 약재, 성경을 담아 보내는 것이다.

현장에서 보신 분들이 많겠지만 물 흐름을 따라서 김정은 머리가 이어지고 있는데 정말 장관이다. 이것이 탈북자들의 힘일 수 있다. 북한이 남쪽에서부터 이상한 물건이 떠내려오면 간첩물자라고 생각하고 총으로 쏜다. 그런데 김정은 사진이 있는 풍선 때문에 이 물자를 쏘지 못한다.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을 먼저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지금 보여드린 것처럼 페트병, 아이스박스, 김일성 머리 풍선, 대북전단, 제가 하는 대북 라디오, 최정훈 사령관이 하는 USB. 이런 모든 대북 정보 유입사업들을 누가 할 것인가.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주 적은 사람들이 할 뿐 대부분 탈북자들이 하고 있다. 그 많은 정보유입을 탈북자들이 해 왔고 할 것이다.

첨단기기들이 북한에 들어오면 북한 당국은 그 물건에 대해 '남조선 괴리놈들 꾀임에 빠진다'면서 SD카드 구멍을 폐쇄하거나 갖은 방법으로 정보 유입을 막는다. 그러나 우리 탈북자들은 그 때마다 새롭게 테크놀로지를 개발해서 그 장벽을 뚫고 있다. 마치 북한이 모든 철의 장벽을 치고 있다면 우리는 '뚫는다' 하고 들어가고 있다. 북한의 인권 문제는 북핵 문제와 결부돼 있다.

김정은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말하는데 이는 기만전선에 전 세계를 빠뜨리는 것이다. 이 북핵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미국을 겨냥한 전술무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핵을 이용한 북한의 대미 전략은 첫째는 체제 안전보장이며 둘째는 대북제재 해제이다. 미군이 철수하고 적화통일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북핵을 포기 않을 것인데 그동안 김정은은 북핵폐기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라는 언어전술로 미국을 기만해 왔다.

핵포기를 전제로 한 빅딜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정이 여기에 있다. 이 자료들은 우리가 북한과 직접 전화통화를 해서 카카오톡이나 USB로 받은 자료이다. 여기 오신 단체장들이 다 수고해서 얻은 정보들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정보 부서나 국방부는 가질 생각을 안 한다. 작년부터 차곡차곡 모은 자료인데 이것을 해리티지재단에 기증하려 한다. 이 같은 핵문제를 포함한 북한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 인신매매, 가짜 달러, 가짜 화폐, 마약, 납치, 국군포로, 정치범수용소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제일 손쉬운 것은 인권 문제 아니겠는가. 아킬레스건이다. 꾸준히 제기하면 되는데 유감스럽게 미국이나 한국 정상이 김정은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 인권 문제 제기는 탈북자 입장에서는 매우 긴박한 문제이다. 김정은이 북핵만 포기하면 체제도 인정해주고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반대한다. 인권 문제가 제기돼야 한다.

최근에 온 탈북자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면 100명 중 90명이 한국 드라마를 봤다고 한다. 재미있으니까 봤다고 했다. 북한은 오직 당에 충성하는 관계로만 사람들을 만나니 재미가 없다. 사랑도 통제돼 있다. 그런데 한국의 드라마는 사랑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런데 탈북자들이 한국 드라마에 대해 자랑하려고 세트장에서 찍은 것이 아니냐고 한다. 한국 드라마는 정형적으로 만든다는 학습효과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탈북자들이 하는 대북 정보 유입 사업은 기존 북한 주민들의 학습 효과를 깨는 효과를 가져다 준다. 자유를 한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권유하면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북한자유주간의 주제는 '탈북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한 걸음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자금이 필요하다. 탈북자들이 이런 일에 도움이 필요하구나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달라.

 nydaily@gmail.com

 

-북한 이탈 주민(탈북민)의 규모는 1950년부터 1989년까지 누계 607명이었다. 또한 1993년까지 누계 641명이었으나 1994년부터 그 수가 꾸준히 증가하여 2000년에는 누계 1,405명이었고, 2017년에는 누계가 31,340명이나 되면서 마침내 북한이탈주민들이 30,000명의 시대를 맞이했다.

-탈북민 여성의 입국비율은 1989년 이전에는 7%에 불과하였으나, 199735%, 200042% 등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이다가, 2002년을 기점으로 남성비율을 넘어섰음.

[남녀 징병제 때문에 젊은 여성들의 탈북민 많음] 

-남과 북은 단일 민족이면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과 주체사상, 선군정치 주체연호 세습제 좌익군정 좌익 파시즘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존속해오고 있습니다

북한이 본래 인민회의정부 제1공화국 정부가 될 때 남북은 의회연합으로 통일국가가 가능합니다

남한으로  탈북민이 많을수록 남북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통일 이후 북한 경제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중국 선양 주재 일본 총영사관 철문 안 쪽에서 두 명의 중국 공안원들에 의해 영사관 바깥쪽으로 끌려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어린-당시 생후 2년 4개월이었다- 김한미 양의 모습은 TV화면을 통해 전 세계 방영됐고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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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4월 20일 오후 황장엽과 김덕홍, 서울 도착 모습

41세 북한 농민이 남한 비무장지대 국경  철조망으로 넘어 1996년 7월 24일 남한으로 망영한 박철호(朴哲浩),  "북한에 너무 배고파." 남한으로 도망 왔다고.

 

 

 

 

 

 

                                1996년 5월 23일 북한 이철수 대위 미그(Mig)-19 전투기로 수원 공군 비행기장 도착


                           남북한 기술적으로 전쟁 중인  비무장지대 귀순자의 전화기(사진)

한국정부나 미국정부는 대북정책에서 북한 특권층이나 상류층 입장보다는 북한 평민층 입장을 존중해야 군국주의 국가사회주의 노선 주체사상과 선군정치 주체연호 좌익파시즘 세습제 좌익군정을 청산하고 평민층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개혁개방세력으로 수평적 권력교체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달픈 북한 서민(평민)들은 지금 무엇을 원할까 무기도 아닌 (개인의 생존권 衣食住)입니다

북한 김정은정부는 내전을 북한내부 지역 전쟁이나 북한 주민들의 반김정은세력 무장투쟁이 아닌  남북전쟁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989년 혁명과 국영자본체제 붕괴[동유럽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모습, 독일 재통일의 시초이자 1989년 혁명의 대표적인 사례다



1989년 혁명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 초까지 발생한 혁명의 물결의 일부로 동유럽과 기타 지역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게 된 결과를 낳았다. 이 혁명은 국가들의 가을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1848년 혁명을 언급할 때 때때로 사용되는 국가들의 봄이라는 용어에 초점을 둔 것이다.

 

1989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붕괴되면서 전체적인 혁명의 사건들이 발생했다. 이는 헝가리 인민공화국, 동독,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도 혁명이 발생했다. 이러한 혁명의 전개 과정 중 거의 대부분의 사건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시민 저항운동의 광범위한 사용으로, 일당제의 지속에 대해 대중적인 반대여론을 형성하고, 변화의 요구를 거세게 주장하는데 기여했다. 루마니아는 동구권 국가 중 공산정권이 폭력적으로 붕괴된 유일한 국가였으며, 루마니아와 몇몇 다른 국가들의 정권은 대중에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은 중국에서 주요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했지만, 시위 동안 용기 있는 저항들의 모습은 전세계의 다른 지역에 또다른 시위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날인 64, 폴란드의 연대자유노조는 부분자유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어 1989년 여름 평화로운 정권 이양에 성공했다. 헝가리는 물리적인 철의 장막을 걷어내어 동독의 난민들이 헝가리로 이주하게 되었고, 이는 동독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는 라이프치히를 비롯한 동독 내 여러 도시의 대규모 시위와 베를린 장벽 철거의 계기가 되었고, 1990년 독일 재통일의 상징적 길잡이 역할을 했다.

 

1991년 말 소련의 해체로 조지아,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몰도바,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11개국이 그 해 동안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발트 3국은 독립을 인정받았다. 나머지 소련의 영토는 199112월 러시아로 재탄생되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산주의가 폐지되었다. 1992년 유고슬라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슬로베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국명을 고쳤고, 이 국가 역시 2006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분리되었다. 2008년 세르비아는 다시 세르비아와 코소보로 분리되었지만, 코소보는 현재 미승인 국가로 남은 상태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당 통치를 폐지한지 3년 후인 1992년 해체되어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도 이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에티오피아 인민민주주의공화국, 남예멘, 몽골 인민공화국이 1990년대 후반까지 공산주의를 폐지했다. 공산주의의 폐지로 냉전도 종결되었다.

 

시장경제의 다양한 형식을 채택한 이후, 구 동구권 및 공산주의 국가들은 초기에 삶의 질이 일반적으로 쇠퇴했다. 정치적 개혁도 동반되어 공산당이 일당체제를 유지하는 국가는 중국, 쿠바, 라오스, 베트남이다. 북한의 경우 헌법 개정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가 아님을 밝혔지만 사실상 이들의 통치 체계는 스탈린주의에 가깝다. 서구의 많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조직은 사회민주주의의 원칙을 견지하며 기본 이념을 바꾸었다. 이탈리아와 산마리노의 공산당은 타격을 입었고, 마니 풀리테는 1990년대 초 이탈리아 전체를 휩쓸었다. 그러나 분홍색 물결은 1999년 베네수엘라에서 시작된 이래 1990년대 말 남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고, 2000년대 초까지 이 지역을 휩쓸었다. 유럽의 정치 구조도 크게 개편되어 동구권 국가 다수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유럽 연합에 가입해 더욱 강한 경제 및 사회적 통합을 이룩했다.

   

1. 혁명 전조

1980년 말 발트 3국과 캅카스 산맥의 국민들은 모스크바의 정부에 자치를 요구했고,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의 몇몇 지역과 정당에서 통제권을 잃고 있었다. 198811월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자치를 선언했고, 이는 소비에트 연방 내의 다른 공화국들의 자치 선언에도 영향을 미쳤다.

 

19864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1989년 혁명의 주된 원인 또는 부분적인 원인이 될 정도로 소비에트 연방 내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낳았다. 정치적으로 재앙적인 결과가 나온 또다른 이유는 소련의 새로운 정책인 글라스노스트가 채택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경제적인 피해는 추산하기 어렵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따르면 소련은 180억 루블을 오염 및 정화에 사용했고, 결정적으로 이것이 소련의 파산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2. 개요

혁명의 역사적인 순간은 1989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혁명은 헝가리 인민공화국, 동독,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등 다른 동유럽 국가들로 퍼졌다. 이러한 혁명의 공통점은 시위가 거대한 봉기로 이어졌고, 일당 정치의 지속에 대한 민중의 반대와 변화의 압력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혁명 중 루마니아만이 유일하게 유럽 동구권에서 공산 정권이 폭력에 의해 몰락한 국가였다. 루마니아 정권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민중에 폭력이 가해진 사건이 여럿 있었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변화를 유도하지는 못했지만, 세계 곳곳의 다른 민중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같은 날인 64, 폴란드의 부분적 자유 선거에서 폴란드 자유 노조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1989년 여름 폴란드의 공산 정권은 평화적으로 몰락했다. 헝가리는 철의 장벽을 해제하여 동독 주민들이 헝가리로 이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는 결국 동독 지역의 불안정화를 야기했다. 이는 라이프치히와 같은 대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것의 한 원인이 되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에 따라 1990년 독일의 재통일이 이뤄지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 말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가 이루어짐에 따라 14개국이 독립했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조지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990년과 1991년 사이에 독립을 선포했고, 나머지 영토는 신생 공화국인 러시아 연방에게 199112월 넘어갔다. 1990년부터 1992년 사이에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도 공산주의를 폐지했다. 1992년 유고슬라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슬로베니아,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으로 분리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국명을 변경했다. 이후 2006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분리되었고, 2008년 세르비아는 다시 코소보와 세르비아로 분열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89년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로 1992년 평화롭게 분리되었다. 기타 사회주의 국가에게도 혁명은 영향을 미쳤다.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주의공화국, 남예멘이 공산주의를 버렸고, 몽골 인민 공화국에서는 혁명이 발생해 공산주의의 일당 체제가 붕괴되었다. 소련과 사회주의의 붕괴는 냉전의 공식적인 종식을 알렸다.

 

다양한 형태의 시장 경제를 채택하는 동안 생필품의 가격이 일반적인 수준으로 낮춰졌다. 정치적 개혁은 여러 지역에서 다양화되었지만, 중국, 쿠바, 라오스, 베트남, 북한은 전세계에서 일당 체제를 유지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서구의 수많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단체가 그들의 이념을 사회 민주주의로 변경하였다. 이탈리아와 산마리노의 공산당은 이탈리아 정치 개혁으로 1990년 위기를 맞이했다. 유럽의 정치도 상당히 바뀌었는데, 과거의 동구권 국가들이 북대서양 조약 기구, 유럽 연합 등에 가입하여 유럽 대륙 간의 경제적, 사회적 통합이 강화되었다.

 

   

3. 동구권 외부의 세계

19862월 필리핀에서는 독재 정권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피플 파워 혁명을 통해 몰아내고 새로운 대통령으로 코리 아퀴노를 선출했다. 1989년 혁명의 도미노 효과로 세계 각국의 다른 정권들도 영향을 받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헤이트 정권과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은 1990년대부터 서구의 자금 및 정치적 지원이 미약해지자 서서히 약화되었으며, 대한민국, 수리남, 중화민국, 니카라과, 인도네시아, 가나, 북예멘, 남예멘을 비롯한 여러 정부에서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1991년 인도 정부는 사회주의 노선을 버리고 신자유주의를 채택했다.

 

4. 배경

(1)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침공하고 점령했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이후 독일은 폴란드를 병합했지만, 이후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을 침공했다. 소련은 이후 미국과 더불어 연합국에 가담하여 독일군과 맞서 싸웠고, 폴란드와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오스트리아 등으로 진격하며 독일군을 압박했다. 1945429, 소련군은 나치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에 입성했고 194558일 나치 독일이 소련에 항복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나치 독일이 반공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에 동유럽 곳곳에서 나치 독일은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고, 이 결과 반나치 저항 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후 테헤란 회담과 얄타 회담에서 연합국은 중부 및 동부 유럽에서 소련의 지위를 인정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은 미국에 맞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부터 스탈린은 중국 내 공산당을 지원하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데 기여했고, 1950년 한국 전쟁에서 북한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소련은 아프리카 및 중동 지역에 개입해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아랍 국가들을 지원하고 앙골라 내전과 모잠비크 내전, 에티오피아 내전 등에 개입했다. 아시아 지역에서도 베트남과 라오스, 캄푸치아 민주 전선을 지지하고 미국과 동맹을 맺은 파키스탄을 견제하기 위해 이란 및 인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동유럽을 비롯한 각국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반대 운동이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소련에 무력으로 점령당한 발트 3국은 1956년까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글 작전을 비롯한 각종 게릴라 전쟁을 수행했다. 동독에서도 스탈린의 죽음 이후 지나치게 전개되었던 스탈린화에 반대해 동독 노동자들이 1953616일부터 파업 시위를 벌였지만 소련군과 동독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같은 해 체코슬로바키아의 플젠에서도 공산당의 화폐 개혁 및 정치에 반대하여 봉기가 일어났다. 더 큰 규모의 봉기가 1956년부터 발생했다. 19563월 조지아의 트빌리시에서는 탈스탈린화에 힘입어 학생들과 국민들은 소비에트 정부의 변화와 조지아의 독립을 요구했다. 사태는 6일 만에 진정되었지만 조지아 정부와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566월 폴란드 포즈난에서 시민 봉기가 일어나 정부의 정책 변화를 촉구했고 같은 해 10월 폴란드 당국은 국민들에게 사회주의의 새로운 길을 약속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은 소련의 동유럽 정책에 위기를 가져왔다. 새로 집권한 임레 너지는 공산주의 채택 이후 헝가리의 경제 악화 및 스탈린의 죽음으로 소련 중심의 정책에서 탈피하고자 했고, 미국의 지지로 봉기를 일으켰다. 헝가리에서는 범국민적인 반소 운동이 제기되었고, 병사들과 무장한 시민들이 헝가리 정부에 맞섰다. 그러나 소련군의 개입으로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헝가리 혁명 이후 소련에 대한 반대 운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1960년 중후반부터 다시 반소 운동이 재개되었다. 아르메니아에서 1965년 아르메니아 집단학살에 대한 신원 복구 및 서아르메니아 합병을 소련 측에 요구했지만 이것이 묵살되자 봉기가 일어난 것이었다. 이후 소련 정부는 이를 일부 수용해 치체르나카베르드를 건립했다. 더 큰 규모의 반소 운동은 1968년 프라하에서 발생했다. 이것이 프라하의 봄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정부의 민주화 및 탈스탈린화를 요구했지만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의 침공으로 민주화 운동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반소 운동은 이후 폴란드, 소련 등지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이후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소련의 중앙집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2)폴란드 자유 노조 수립

1980년대 폴란드에서 노동자 조합이 독립적인 노조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는 19809월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자유노조의 설립으로 이어졌으며 이 노조는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81년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수장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연대자유노조를 약화시키고 폴란드에 계엄령을 선포해 노조를 탄압했다. 노동조합의 모든 인원들이 투옥되었지만 공산주의 역사상 노동 조합이 국가의 기능을 반영하지 않고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했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3)고르바초프의 등장

몇몇 동구권 국가들의 개혁적 정책이 무산되었지만, 1950년대부터 제한적으로 정치 및 경제면에서 개혁이 시작되었다. 뒤이어 1985년 집권한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부분적 개혁에서 전반적인 개혁을 생각하고 있었고, 조금 더 거대한 자유화를 향한 동향을 나타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의 젊은 지식인들인 아파라트치크 계층이 고르바초프의 주도 하에 브레즈네프 침체기 동안 일어났던 여러 문제들을 되돌리기 위해 기능적 개혁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심각한 경제적 후퇴에 직면했고, 이를 되돌리기 위해 서구권의 기술과 신용이 필요했다. 소련을 유지하는 군대의 비용은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기에 소련의 위성국들에게 맡겨졌다.

 

주요 개혁의 첫 신호는 1986년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추진하고, 페레스트로이카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등장했다. 글라스노스트는 개방을, 페레스트로이카는 경제 구조의 재편을 의미한다. 1989년 봄이 되면서 소련은 언론의 자유화를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다당제 후보제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소련인민대표대회를 개최했다. 글라스노스트가 개방과 정치적 비판을 지지했지만.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입장과 궤를 같이 하여 허용된 것이었기에 여전히 제한은 많았다. 동구권의 다른 국가들은 여전히 비밀 경찰과 정치적 압력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모스크바 정부의 가장 큰 장애물은 서방 국가들을 철의 장막으로부터 차단하면서도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이었다. 소련의 군사적 개입이 중앙 유럽이나 동유럽 일대에서 시작될 것처럼 보였지만 모스크바 정부가 국가의 개편을 위해 서방 국가의 경제적 지지를 얻는 것은 어려워보였다. 고르바초프는 중앙 유럽 및 동유럽의 위성국가 정부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따라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헝가리와 폴란드의 개혁주의자들은 동에서 서로 확산되는 자유화의 물결에 의해 지나치게 고무되었고, 다른 동유럽 국가들은 회의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개혁의 혐오감을 주장했다. 과거 경험 상 소련의 개혁은 통제가 가능했지만 기타 국가에서 변화에 대한 압력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이러한 정권은 소련의 군대와 그들의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소련식 권위주의를 통해 정권을 유지시켰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실패로 끝날 것처럼 보였는데, 그 이유는 정통 공산주의자들인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불가리아의 토도르 지프코프, 체코슬로바키아의 구스타우 후사크, 그리고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정권을 유지하며 변화에 대한 요구를 묵살했기 때문이다.[28] 이는 동독의 중앙위원회 중 한 사람이 "만약 당신의 이웃이 새로운 벽지를 붙일 때, 당신도 그렇게 할 필요는 없죠."라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5.공산국가의 변화

(1)중화인민공화국: 톈안먼 시위

 

베이징대 학생들은 '민주살롱(Democracy Salon)'이라는 동아리를 조직하고 중국민주의 앞날에 대해 열렬한 토론을 벌리곤 했다. 6.4민주운동의 주역 왕단(王丹)이 이날 모임에서 발언하고 있다

 

                                                                                   Students carry a memorial banner to Hu Yaobang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 서거 

 

 

 

 

 

 

 

 

 

 

 

 

 

 

                                                    Students on Tiananmen Square 23 years ago were dispersed with tanks and bullets

 

                         Twenty-three years after the massacre at Tiananmen Square, Chinese authorities continue to suppress the memory of it

 1982년부터 집권한 중국의 새 지도자 덩샤오핑은 1984년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발달시켜 지역 시장주의를 도입하였지만, 정치적 변화는 정지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중국 학생들의 첫 시위가 198612월 헤페이에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해외 유학의 기회 제공 및 캠퍼스 내에서의 선거, 그리고 서구 팝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접근 허용을 요구했다. 그들의 시위는 정치적 분위기가 완화되고 개혁의 국면이 지연될 시기를 이용한 것이었다. 의장이자 덩샤오핑의 피보호자, 그리고 개혁지지자였던 후야오방은 시위에 대한 책임으로 중국 공산당에서 19871월 사임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톈안먼 시위는 1989415일 후야오방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후의 국장 당시 10만 명의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그것을 지켜보기 위해 모였다. 그러나 대강당에서 어떠한 지도자들도 나오지 않았다. 운동은 7주 동안 지속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시위 중 315일 중국을 방문할 당시, 많은 해외 언론 기자들이 베이징에 있었고, 그들은 시위자들의 생생한 모습을 담으며 유럽에서 있었던 자유의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소련보다 먼저 급진적 경제 개혁을 시작한 중국의 지도자들과 그리고 공산당의 국무위원인 자오지양은 정치적 개혁을 추구하겠다고 밝혔으며 색깔 혁명처럼 무질서를 유발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은 시도하지 않았다. 198964일 전차가 톈안먼 광장에 진입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베이징에서 시위에 대한 군사적 진압은 많은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사상자는 여러 통계치에 따라 달랐기에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2)폴란드






                                                  폴란드를 방문한 부시 대통령과 회담을 하는 레흐 바웬사 폴란드 대통령

19884월과 5, 폴란드에서는 전국적으로 파업이 벌어졌다. 이후 두 번째 파업이 815일부터 시작되었다. 8월의 며칠 동안 17개의 광산이 파업에 들어갔고, 이후 822일부터는 그단스크 정박항의 노동자들을 비롯한 각지의 정박항 노동자들도 파업을 시작했다. 이는 1980년대 초 불법이었던 연대자유노조에 대해 노동자들이 다시 합법 노조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한 것이 발단이었다. 1988831일 연대자유노조의 지도자 레흐 바웬사는 공산주의 당국의 초청으로 바르샤바로 가서 그들과 회담을 했다. 1989118일 제10차 폴란드 연합노동당에서 울프리히 자루젤스키 의장은 합법화를 위해 연대자유노조와의 공식적인 협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이 좌절될 경우, 모든 당 지도부가 사퇴할 것을 압력받았을 때 달성될 수 있었다. 198926일 공식적인 회담이 바르샤바 대회의실에서 시작되었고 44, 역사적인 폴란드 원탁회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서 연대자유노조는 합법성을 인정받았고, 198964일까지 폴란드 자유 의회 선거에 대해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연대자유노조는 폴란드의 모든 선거에 압승을 거두었고, 이들은 대통령 직을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1989, 공산당의 두 동맹체였던 폴란드 연합인민당과 폴란드 민주당은 폴란드 연합노동당과의 동맹을 깨뜨리고 연대자유노조에 대한 지지를 선포했다. 폴란드의 마지막 공산당 총리였던, 체스와프 키슈차크는 비 공산당 계열이 행정부를 편성할 수 있도록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노조자유연대가 정부를 만들 유일한 정치적 집단이 되자, 노조자유연대에서 총리가 나올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1989819, 반공주의 편집자이자 노조자유연대의 지지자인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가 폴란드의 총리로 임명되었고, 1968년의 프라하의 예처럼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개입해야 한다는 요청에도 소련은 어떠한 반대 의사도 나타내지 않았다. 1989824일 폴란드의 의회는 40년 동안 이어진 일당제를 폐지시켰다. 의회에서 마조비에츠키는 378표의 찬성과 4표의 반대, 그리고 41표의 불참으로 총리 직을 인정받았다. 1989913, 새로운 비공산당계 정부가 의회의 승인을 받았고, 이는 유럽 동구권 역사상 처음으로 수립된 민주정부였다. 19891117, 체카의 설립자이자 공산주의 탄압의 상징이었던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동상이 바르샤바 은행 광장에서 철거되었다. 19891229일 폴란드는 국가의 명칭을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 폴란드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공산주의 단체인 폴란드 연합노동당은 1990129일 해산한 후 사회민주주의 단체로 개편되었다.

 

1990년 야루젤스키가 폴란드 대통령에서 사임하고 대통령직은 1990년 대선에 승리한 레흐 바웬사에게 넘어갔다. 바웬사의 대통령 취임은 19901221일로, 이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식적인 종식과 현대의 폴란드의 시작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19911027일 폴란드 의회 선거는 1945년 이후 처음으로 전면 자유제로 실시되었다. 이것은 폴란드의 공산주의 체제가 서구식 민주주의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소련군은 단계적으로 철수를 시작했지만 1991년 러시아 연방 수립 이후에도 러시아군은 주둔해 있었고 마지막 러시아 군대는 1993918일 폴란드에서 철수했다

 

(3)

헝가리

 

                                            In the 1980s, Hungary still had raw memories of Russian tanks putting down the 1956 revolution

 

Hungary's role in the 1989 revolutions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는 달리 헝가리는 1980년대 지속적으로 경제적 개혁을 추구해 성과를 얻었고, 제한적이었지만 정치적 자유를 허용했다. 그러나 주요 개혁은 1988523일 공산당 총서기가 카다르 야노시에서 그로츠 카를로시로 바뀐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19881124, 네메트 미클로시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이후 1989112일 의회는 "민주주의 패키지"를 채택했다. 민주주의 패키지에는 무역 다원주의,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헌법의 적극적 개정, 새로운 선거 제도 등을 포함되었다. 1989129, 헝가리 공산당이 30년 동안 주장했던 역사의 공식적인 관점과는 모순되게 중앙위원회 의장 포츠게이 임레는 헝가리의 1956년 반란이 반혁명을 위한 외국 사주의 시도보다는 인민 봉기임을 선언했다. 대규모 시위가 315일 국경일에 발생해 공산당 정권과 비공산당 정치 세력의 협상을 요구했다. 헝가리 원탁회의가 422일 시작되어 918일 협상은 성공리에 종결되었다. 회담에서는 공산당을 비롯해 새로 등장한 피데스,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동맹, 헝가리 민주주의 포럼, 헝가리 인민당, 헝가리 기독교 민주주의 인민당 등이 초청되었다. 이 회담에서는 헝가리의 미래 정치적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대표적인 예로 소욤 라슬로, 안탈 요제프, 오르반 빅토르 등이 있었다.

   

                                                       Taking down Hungary's border fence was to have far-reaching consequences 

198952일 철의 장막의 실질적인 첫 해제가 헝가리 인민공화국이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펜스를 철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수 만명의 시민들이 여름부터 가을까지 불법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을 넘어 서방 국가들로 이주하면서 두 정부의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98911, 공산당은 옛 총리인 너지 임레를 사면하였다. 이는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혁명의 책임으로 짧은 재판 이후 그를 불법적으로 처형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1989616일 너지 임레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부다페스트의 광장에서 국장을 받았다

 

1989918일의 원탁 회의의 내용은 6가지 법 조항에 반영되었다. 이는 헝가리 헌법의 전반적 개정, 헝가리 입헌 의회의 설립, 정당의 기능과 통제, 선거에서의 다당제 도입, 국가 원수와 의회의 분립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거 제도 또한 협정의 내용에 포함되었다. 절반 이상의 당원들은 비례제로, 나머지 절반은 다수결로 선출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권한도 약화시키기로 결정되었지만, 누가 대통령에 선출되어야 할 지와 언제 선거를 치를 지는 합의되지 않았다. 1989107, 공산당은 스스로 대규모의 의회를 재소집해 헝가리 사회주의 정당을 설립했다. 19891016일부터 20일까지 의회에서 다당제 선거와 직접선거를 채택했고, 1990324일 헝가리에서 첫 민주적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후 헝가리는 인민공화국에서 헝가리 공화국으로 변경되었고, 정부는 인간의 존엄성 및 민권을 보장하고 삼권 분립의 실현을 위해 법적 제도를 마련했다.[54] 헝가리를 점령했던 소련군도 1991619일 헝가리에서 철수했다.

 

(4)동독






                                                         베를린 장벽 중 브란덴부르크 문 구간에서 찍은 사진. 19891110

198952,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철거하기 시작하자, 철의 장막 일대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동독 주민들은 이 구멍을 통해 서방 국가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19899월 말에는 3만 명 이상의 동독 주민이 서방 국가로 도주했고, 이후 동독 정부는 헝가리 여행을 금지했다. 이러한 조치에 동독 주민들은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동독 주민들 수천 명은 중부 유럽과 동유럽 수도에 산재한 서독의 행정 기관을 통해 서쪽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특히 헝가리 대사관과 프라하 대사관의 독일의 정치적 개혁을 기다리는 수천 명의 독일인들이 8월부터 11월까지 대사관에서 캠프를 치고 대기했다. 독일 민주공화국 정부는 103일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폐쇄했고, 이로 인해 동독은 이웃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말았다. 도주의 마지막 기회가 차단되자 더 많은 동독 주민들이 114일 라이프치히에서 발생한 동독 월요 시위에 참여했다.



 

102일 라이프치히의 동독 월요 시위는 1만 명의 시위자들이 참여해 성공리에 끝났다. 그러나 동독의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이자 동독 총리인 에리히 호네커는 동독 군대에 시위자들의 사살을 명령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대규모 경찰과 군대, 동독 국가보안부, 그리고 노동 전투군을 주둔시켰고, 109일에는 톈안먼 광장 식의 학살이 계획되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했다.

 

1989106일부터 7일까지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독일 민주 공화국 수립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동독을 방문했다. 그는 동독 지도자들에게 개혁의 수용을 요구했다. 그는 독일어로 "Wer zu spät kommt, den bestraft das Leben" (너무 늦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는 유명한 속담을 인용했다. 그러나 호네커는 내부 개혁에 반대하였고, 그의 정권은 소련 출판물을 체제 전복용이라 판단하고 판매를 금지했다. 공산주의자들의 대량 학살이 유언비어로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1097만 명의 시민이 라이프치히에 모여 시위를 했다. 이들은 정부 당국에 발포를 금지했다. 1016일에는 12만 명의 시민이 라이프치히에 모여 시위했다.

 

에리히 호네커는 소련군이 동독으로 진입하고,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지지로 공산 정부를 복귀시키고 시민들의 시위를 탄압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1990년 이것은 실행하기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다. 소련 정부의 시나트라 독트린에 의해 소련은 동구권에서의 영향력을 종식시키겠다고 선언했고, 동독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서 소련은 중립을 유지했다. 계속되는 시민들의 봉기 및 시위로 동독 공산당은 1018일 호네커를 축출하고 그를 대신해 에곤 크렌츠를 서기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시위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1023일 월요일에 라이프치히의 시위 참가자는 30만 명이 되었다. 11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개방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모든 동독 주민들의 서독 이주를 아무런 제재 없이 허락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지역 내의 철의 장막을 113일 철거하기 시작했다. 114일 동독 정부는 베를린 시위를 재가하기로 결정했고, 베를린 시민들은 최대 규모의 시위에서 자유를 요구하며 수도를 퍼위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한 피난민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기에 동독 정부는 1989119일 시민들에게 서독으로 직접 여행하는 것을 허용했다. 귄터 샤보브스키가 TV 회담에서 정부의 계획 중인 변화는 지연 없이 즉각적으로 실현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서베를린으로 이동할 수 있게 요구해달라며 국경으로 집결하는 원인이 되었다. 국경 보위대는 무력을 사용하지 못한 채 주민들을 서베를린으로 이주시켰다. 이후 베를린 장벽이 시민들에 의해 붕괴되었다.

 

1113일 동독 총리 빌리 슈토프와의 그의 내각은 전격 사임했다. 새로운 정부는 더욱 온건한 공산주의자인 한스 모드로프의 주도 하에 개혁을 진행했다. 121일 동독 인민의회는 독일 민주공화국의 체제에서 공산당의 주요 역할을 제거했다. 123일 크렌츠는 공산당 서기장에서 사임했고, 3일 후 국가 수반 직에서도 사퇴했다. 127일 공산당과 다른 정당 사이에 원탁 회의가 개최되었고, 19891216일 동독에서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해체된후 독일 민주사회당으로 개편했다.

 

1990115일 동독 국가보안부의 수장은 시위자들로 붐볐다. 모드로프는 1990318일 자유 선거가 이루어질 때까지 사실 상의 동독 지도자가 되었다. 이는 1933년 이래 처음으로 동독 지역에서 이루어진 자유 선거였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패배했고, 동독 기독교 민주연합의 로타르 더 메치에어가 199044일 총리가 되어 서독과의 통일 절차에 속력을 내었다. 동독과 서독은 1990103일 재통일되었다. 옛 동독 지역에 주둔하던 러시아군은 199491일 완전 철수했다.

 

(5)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의 시위, 198911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은 지역 공산주의 정부 타도 혁명 중 비폭력 혁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891117일 금요일, 프라하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의경이 진압했다. 여기서 사상자가 발생했는 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이 사건으로 19891119일부터 12월 말까지 범국민적인 시위가 연속으로 발생하였다. 1120, 평화 시위자 20만 명이 프라하에 집결했고, 다음 날에는 50만 명이 집결했다. 5일 후 레트나 광장에는 80만 명의 시위자들이 집결했다. 1124, 미클로시 자케시를 포함한 공산당의 모든 지도자들이 사임했다. 1127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서 2시간 동안의 파업이 성공리에 끝났다.



 

다른 공산 정부의 붕괴 이후 거리 시위가 증가했고, 이에 호응해 1128일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일당제를 종식하고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했다. 서독과 오스트리아에 있던 국경이 12월 초에 철거되었다. 1210일 구스타프 후자크 대통령이 1948년 이후 처음으로 비공산 정부의 수반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사임했다.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1228일 연방 의회의 대변인으로 선출되었도 19891229일 바츨라프 하벨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0년 체코슬로바키아는 1946년 이후 첫 민주 선거를 진행했고, 1991627일 마지막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철수했다.

 

(6)불가리아

198910월부터 11월까지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는 시위자들이 정치적 개혁 및 생태학적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이 시위는 탄압되었지만, 19891110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지 3일 후, 불가리아의 오랜 독재자인 토도르 지프코프가 위원회에 의해 축출되었다. 비교적 온건한 공산주의자이자 이전 외교부 장관이었던 페타르 믈라데노프가 그의 권력을 승계받았다. 소련은 지프코프가 고르바초프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지도부의 변화에 명백히 지지했다. 새로운 정부는 자유 연설과 집회에 가해진 제제를 즉각적으로 완화했고, 이는 1117일의 대규모 집회로 이어진다. 이후 불가리아에는 반공 단체도 드장하기 시작했다. 이들 대다수는 127일 불가리아 민주주의 연합에 참여했다.[59] 불가리아 민주주의 연합은 지프코프의 축출에 만족하지 않고 추가적인 민주적 개혁과 불가리아 공산당의 일당제 종식을 요구했다.

 

믈라데노프는 19891211일 공산당의 일당제 종식 및 다음 해의 다당제 선거를 선언했다. 19902월 불가리아 행정부는 공산당의 독점적 역할에 대한 헌법 조항을 삭제했다. 1990년 폴란드식 원탁 회의가 개최되기로 결정했고, 19906월 자유 선거가 예정되었다. 199013일부터 514일까지 원탁 회의가 진행되어 민주주의로의 전환이라는 합의가 도출되었다. 19904월 불가리아 공산당은 불가리아 사회주의당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렸다. 1931년 이후 최초의 민주 선거가 19906월 이루어져 사회주의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7)루마니아





































                                                                                   1989년 12월 루마니아 자유화 민주화 혁명군 모습(사진)




현재 전해지는 영상에는 사형 판결 직후 차우셰스쿠 부부를 결박하는 장면과 건물 벽을 배경으로 하여 사격이 끝나가는 때, 그리고 사형된 두 사람의 모습과 사망을 확인하고 후처리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찍혀있다. 정작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은 당시 사용 중인 비디오 카메라의 전원이 끊어지는 바람에 촬영되지 못했다.

당시 처형 순간을 보도한 영상. 차우셰스쿠의 나이는 71세였고 엘레나의 나이는 73세였다.[사진]


1987년 브라초프 반란에서 살아남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의 지도자로 198911월 재선출되어 5년간 집권할 수 있게되었다. 이 무렵 다른 유럽 지역을 휩쓰는 반공 봉기를 보고 그는 이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차우셰스쿠가 이란으로 국빈 방문을 준비하는 동안 그의 비서는 헝가리 개혁교회 목사인 토케스 라츨로 목사를 1216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라츨로는 포위되었지만 곧 봉기가 곳곳에서 시작되었다. 티미쇼아라가 1216일 첫 봉기를 시작했고 이는 5일 간 지속되었다. 이란에서 돌아온 이후 차우셰스쿠는 1221일 부쿠레슈티에 있는 루마니아 공산당 본부에서 그의 지지자들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충격적으로 시민들은 야유를 퍼부으며 그를 조롱했다. 이는 루마니아 시민들이 그에게 오랫동안 실망했음을 보여주는 예였다.

 

봉기가 확산되자 보안군은 차우셰스쿠의 명령에 따라 시위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그러나 1222일 아침 루마니아군은 편을 갑자기 바꾸었다. 이는 국방부 장관 바실 밀레아가 반역자로 누명을 쓴 이후 자살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는 것 때문이었다. 밀레아 장관이 사실상 사살되었다고 판단한 군은 혁명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군 전차는 중앙위원회 건물을 향해 진격했다. 시위자들은 중앙위원회 문을 열고 차우셰스쿠 부부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들은 건물에 대기 중인 헬리콥터를 타고 도주하였다. 다른 지역의 공산당과는 달리 루마니아 공산당은 바로 해체되었고, 현재까지도 루마니아에는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차우셰스쿠의 도주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만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1225, 루마니아 텔레비전에서는 차우셰스쿠의 처형식을 공격했다. 이후 이온 일레스쿠가 이끄는 국가민주주의 전선 의회가 정권을 이양받아 19904월 자유 선거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들은 1990520일 선거를 미루었다.

 

(8)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해체와 내전 그리고 각 민족 자치정부 독자국가 수립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회원국은 아니었지만 요지프 브로즈 티토의 주도 하에 티토주의에 입각한 정치를 폈다. 이것은 티토가 형제애와 통일이라는 구호 아래 유지할 수 있는 다민족 국가의 개념과 부합했다. 그러나 1970년부터 1971년까지 일어난 크로아티아의 봄 이후 민족 간의 긴장이 증대되었다. 크로아티아는 이 때 더 많은 자치를 중앙 정부에 요구했지만 이는 묵살되었다. 1974년 헌법이 변화되고 1974년 유고슬라비아 헌법이 연방 정부의 권력을 자치 공화국과 주들에게 어느 정도 이양했다 1980년 티토의 죽음으로 민족 간 분쟁은 다시 격화되었고, 1981년 알바니아계 주민이 다수였던 코소보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84년 이래로 점진적인 자유화 정책을 추구해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모델을 따라하려고 했다. 이는 슬로베니아 공산당 연맹과 중앙 정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으로부터 긴장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 말 수많은 시민 사회 집단이 민주화를 진척시켰고, 문화적 다양성을 위한 공간을 확장하고자 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시민 사회 집단과 공산 정권 사이에 충돌이 빈번이 발생했고, 이 중 대표적인 예가 슬로베니아의 봄이었다. 1989년 초 몇몇 반공 정당이 기능을 수행하여 슬로베니아 공산주의자의 영향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19901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연맹은 헌법 내 정당 사의 분쟁을 막기 위해 소집되었다. 수에서 밀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공산당은 1990123일 당 연맹에서 탕퇴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종식을 가져왔다. 양당은 다당제 자유 선거를 실시하고자 했다. 199048일 민주주의 및 반유고슬라비아 정당 DEMOS 동맹이 슬로베니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990424일에는 프라뇨 투지만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크로아티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마케도니아에서 이뤄진 199011월 선거에서 공산당과 민족주의 정당이 비슷한 표를 확보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지도부는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할 준비를 마쳤고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로그 혁명을 통해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19901223일 슬로베니아 독립 선거에서 88.5%의 주민들이 독립에 찬성했다. 199152, 크로아티아 독립 선거에서도 93.24%의 주민이 독립에 찬성했다.

 

(9)알바니아



1991220 알바니아의 수도인 티라나에서 스탈린주의자인 노동당 총서기이며 알바니아인민공화국 건국자 엔베르 호자의 동상을 무너뜨리는 시위대 모습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의 지도자인 엔베르 호자는 40여년 간 알바니아를 통치하고 1985411일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라미즈 알리아가 정권을 서서히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9년 쉬코르다에서 첫 봉기가 시작되었고, 이는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에 알리 정부는 자유화를 허용해 1990년부터 해외 여행의 자유를 제공하는 등 각종 조치를 취했으며, 헬싱키 협정에 참여해 알바니아 내 인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65] 이러한 조치로 1923년 이래 최초로 알바니아의 자유 선거였던 19913,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집권했지만, 파업과 시민들의 반발로, 비공산당 계열을 포함한 내각이 열리게 되었다. 이후 1992년 알바니아는 완전히 공산주의에서 벗어나 민주적 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6. 몰타 회담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조지 H. W. 부시가 몰타 자유항에 정박한 소련 순양함 막심 고르키에서 회동하고 있다. 이 회담은 냉전 종식의 주요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와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몰타에서 1989122일부터 123일까지 회담을 가졌다. 이 때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며칠이 안 된 때였다. 몇몇 언론은[66] 몰타 회담을 얄타 회담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이 회담을 언급했다. 얄타 회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럽에 대해 영국의 윈스턴 처칠,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논의한 것이다.



 

7.소련의 해체



소련군부는 소련공산당 보수파(교조주의) 입장보다 개혁파(수정주의) 입장을 지지했다[소련군인들이 시민혁명을 지지했다]











199171,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이 프라하에서 회담을 가진 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같은 달, 고르바초프와 부시는 미국-소련 간의 전략적 협력을 다짐하였다. 실제로 1990년부터 발발한 걸프 전쟁 당시 미국 주도의 다국적 연합군에 소련은 지지를 보냈고, 이라크에 대한 국제 연합의 제재에서 소련은 미국과 함께 찬성에 투표했다.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역에서 소련이 단계적으로 철수하자 1989년에 일어났던 혁명의 여파가 소련 전체에 반향을 일으켰다. 자치 국가 내부의 동요가 리투아니아에서 시작되었고, 발트 3국 전체와 아르메니아가 독립을 선포하는 것에 이른다. 그러나 소련 중앙 정부는 독립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군사 행동 및 경제 제재를 통해 독립 선포 국가들을 위협했다. 19911, 소련군이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진입하면서 분리운동을 탄압하려고 했지만, 소련군은 이후 철수했다. 이 외에도 조지아나 아제르바이잔 같은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들은 중앙집권적 통치에 맞선 약속들을 제시하라는 요구와 더불어 급속한 민심 이탈이 발생했다.


 

글라스노스트는 다국적 국가였던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 공화국들 내부에서 오랫동안 압력을 받던 민족주의적 요소들을 분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은 소련의 경제가 급속히 악화됨에 따라 더욱 가속되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경제를 증진시키지 못함으로써 실패했고, 구식 소련의 계획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에 구성 공화국들은 자신들만의 경제 체계를 구축하고 소련 중심의 헌법을 지역 중심적 헌법으로 변경했다. 1990년 공산당은 70여년 간의 일당체제를 포기하는데 합의했다. 이는 소련 최고 위원회가 소련 헌법 조항에서 독재적 권위를 보장하는 내용을 폐지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공산당이 언론을 장악하는 것에 실패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는 소련의 과거 역사적 세부사항이 공개되는 것에 영향을 미쳤고, 시민들과 자치 공화국의 지도자들은 구체제를 불신하며 더욱 많은 자치 또는 실질적인 독립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소비에트 연방 내부의 회의에서 소련을 존속시키되, 조금 더 느슨한 형태의 연합으로 구성하자는 방침이 나오자 소련의 강경파들은 부통령인 겐나디 야나예프를 중심으로 19918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쿠데타에 맞서 더 많은 군대를 보내 이들의 노력을 붕괴시켰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복권되었지만, 그의 귄위는 실추했다.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이후 공산당 서기장에서 사임했고, 소련 최고위원회는 당을 해산시킨 후 모든 공산주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199196, 소련 정부는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8월 쿠데타 이후 수많은 구성 공화국들이 독립을 주장했다. 이 무렵 새로 들어선 러시아 정부가 소비에트 정부의 권력을 하나씩 승계함에 따라 소련 정부는 쓸모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1991121,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투표에서 찬성파가 압승을 거두면서 소련의 연방 제도가 위기를 맞았다. 이는 소련의 통일적 요소를 유지하려는 현실적인 움직임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1128일 옐친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지도자들을 만나 벨라베자 조약에 서명하면서 소련의 존재성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를 불법이라고 주장했으나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19911221, 소련을 구성하고 있던 12개의 국가 중 조지아를 제외한 11개국이 알마-알타 협정을 체결하여 소련의 해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후, 독립국가연합이라는 자발적인 협의체로 이를 대체하기로 했다. 고르바초프는 1225일 소련 대통령 직을 사임했고 1226일 소비에트 최고위원회는 벨라베자 조약을 합법이라 인정한 후 스스로 해산했다. 1991년 말 러시아로 이양되지 않은 몇몇 소련의 기구들이 해체되었고,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1993, 소련을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체제 위기로 확산되었지만, 러시아 정부가 이를 해결하고 지역 내 잔재한 소비에트 기구들을 완전히 해체함으로써 러시아는 완전한 민주 국가로 들어서게 되었다.

 

(1)발트 3


                                       발트의 길은 발트 3국에서 시작된 혁명으로 200만 명의 사람들이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한 사건이었다

발트 3국은 정치의 민주적 개혁을 실행하고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한 첫 국가였다. 이러한 독립의 과정을 노래 혁명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포함한다. 이는 에스토니아의 민족주의자이자 예술가인 하인츠 발크가 1988610부터 11일까지 탈린 노래 축전에서 벌어진 대규모 야간 시위에 대해 기사를 쓴 것에서 시작되었다. 에스토니아는 19881116일 자치를 주장했고, 리투아니아는 1989518, 라트비아는 1989728일 자치를 주장했다. 리투아니아가 1990311일 독립을 선언했고, 19일 후인 330일에는 에스토니아가 독립으로의 변환기에 들어섰다고 선언했다. 라트비아는 199054일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 선언은 소련이 거부하면서 마찰이 빚어졌다. 1991년 초 라트비아에서 바리케이드 사건이라 불리는 공산주의 세력의 탄압 운동, 그리고 리투아니아의 1월 사건 등이 대표적 예였다. 그러나 8월 쿠데타 이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완전 독립을 주장했고, 더 이상 통합되지 못한 소련군은 199196일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2)카프카스 지역

                                                                 198949일 트비리시 학살의 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조지아와 북캅카스 지역은 민족 갈등과 분리주의 운동으로 오랫동안 신음했다. 198949일 소련군은 트비리시의 시위자들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198911월 조지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21년 러시아의 침공과 지속되는 대량학살식 점령을 공식적으로 비난했다. 1991년부터 약 1년간 민주주의 활동가였던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가 대통령으로 복무했다. 그는 조지아의 독립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러시아는 조지아의 독립 주장 국가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아를 지지하였고, 러시아는 제1차 체첸 전쟁에서 조지아가 체첸 반군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조지아를 비난했다. 이후 쿠데타로 공산주의자인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대통령으로 집권했지만 2003년 장미 혁명으로 그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아르메니아에서는 독립 투쟁이 폭력을 동반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서로 맞섰다. 아르메니아는 이후 군사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아르메니아에서 이루어진 선거는 논란이 되어 정부의 부패가 드러나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의 독립은 19911221일 이루어졌지만 이후에도 호르자반의 부패는 이어졌고, 세르지 사르키샨이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아르메니아의 군대의 발전에 기여했고, 아르메니아에 민주주의적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친서구적 성향을 지닌 아제르바이잔 인민당의 엘치베이가 첫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엘치베이가 아제르바이잔 원유 생산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고 터키 및 유럽에 더욱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러시아와 이란이 지원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는 축출되었다.[70] 무탈리보프가 권력의 핵심인물로 떠올랐으나 그는 부패,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패배, 그리고 정치 구조의 미완성으로 축출되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다음 대통령으로 집권해 2003년 아들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견고한 동맹국으로 남은 아르메니아와는 달리 2008년 조지아 전쟁 이후 아들 일함 알리예프는 터키와 서유럽 국가들, 그리고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며 러시아와의 유대는 약화시키고 있다

 

(3)체첸


                                                                                                  199412월 체첸 그로즈니에서 기도 중인 여성들


                                                                                         1차 체첸 전쟁[19941211~ 1996831]

체첸의 조하르 두다예프 장군은 발트 3국의 방식을 차용해 반공주의 정당을 결집시켜 체첸의 민주화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이후 체첸 공화국은 공산당이 선출하는 대통령제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199111월 체첸 대선에서 조하르 두다예프는 압승을 거두어 체첸 대통령이 되었고, 그는 같은 해 체첸-잉구샤 지역을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독립을 주장했다. 잉구샤 공화국은 체첸과 결별하기를 원했고,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은 이를 허용했다. 그러나 체첸이 원유 사업에서 러시아를 배제시키려고 하자 보리스 옐친은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쿠데타를 지원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에 러시아는 체첸을 침공해 제1차 체첸 전쟁을 일으켜 199412월 체첸을 포위하려고 했으나, 체첸군은 무기와 병력 몇에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산악 지역에서의 게릴라전과 뛰어난 습격전을 통해 러시아군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결국 1996년 보리스 옐친 정부는 체첸과의 휴전협정에 들어가 1997년 러시아-체첸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군의 피해는 공식적으로 5,732명이지만 다른 총계치는 3,500명에서 7,500명에 이르고 가장 높은 수치는 14,000명에 이른다

 

8. 기타 세계의 변화

(1)아프리카

아프리카 지역에 남아있던 공산국가들에는 앙골라, 모잠비크 등이 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1990년부터 1991년 사이에 민주화를 실현했지만, 앙골라와 소말리아, 모잠비크 지역에서는 내전이 발발했다. 앙골라의 경우 1991년 비세세 협정을 통해 다당제 선거 도입을 약속했지만[ 1992년 선거에 불복해 2002년까지 내전이 지속되었다. 모잠비크의 경우에도 1992년 로마 평화 협정을 체결해 공산주의와 비공산당 계열의 연립 정부 수립을 합의했다.

 

(2)오세아니아

오세아니아의 바누아투는 소련, 리비아를 비롯하여 사회주의 국가들과 친한 친사회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었던 월터 리니의 통치를 받았으나, 1991년에 물러나면서 월터 리니의 독재가 종식되었다.


1989년 혁명과 국영자본체제 붕괴[동유럽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자본주의 반대 공산주의!! 민주주의 반대 독재주의(전체주의)!!

날짜:

198964- 19911226

지역:

유럽 및 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

원인: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 체제), 권위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부정부패, 소련의 군사 점령, 경제 붕괴, 집단살해, 철의 장막, 종교 박해, 권력 남용, 강제노동, 숙청, 가난, 테러 등

목적:

경제적 자유와 민영자본체제, 유럽 통합, 자유 선거, 자본주의, 언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권, 노동권, 민주주의 등

 

종류:

시위 등 다양함

 

결과:

동구권의 몰락 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평화적 정권 교체.

냉전의 종결

독일의 재통일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유혈 혁명이 됨

소련의 해체

소련의 초강대국 지위 몰락

1991년 인도 국민 회의가 신자유주의를 채택

러시아 연방이 탄생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

유고슬라비아 해체 및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중국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1989년 톈안먼 사건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해산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회의론 대두

유럽 통합의 진전

성별 선택 낙태로 동유럽의 성비 변화

동구권에 인터넷이 확산됨

동구권에서 소비자 운동이 대두함

예멘의 통일

발트 3국의 재독립

몽골, 아프가니스탄, 베냉, 예멘, 모잠비크, 앙골라, 콩고 공화국, 소말리아에서 공산주의 붕괴

북한의 고난의 행군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 종결

미국의 문화가 동구권 국가에 전파됨

NATOEU에 동구권 국가 가입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의 시장 경제 도입

미국이 전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발돋움

신세계 질서

소비에트 전후 충돌의 첫 발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종결

   

 

 

                                                           Red stars are removed as communism relinquishes its grip in central Europe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a.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b.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聯邦共和國).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미합중국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미합중국은 공화당 출신 링컨정부의 노예폐지와 민주정부 수립 이래 민주공화국(민주국가) 형태 연방국가이다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신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본래 공화당은 미국식 자본주의(실용주의)와 공화 연방제를 우선시 했고 민주당은 미국식 민주주의(, 자치정부와 의회정치)를 우선시 했다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공산주의 반대는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 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이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링컨의 민주국가 수립)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생존권=사회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에서는 개인의 생존권을 우선시 하는 중도 진보성향인 민주당과 개인의 자유권을 우선시 하는 중도 보수 성향인 공화당 등 두 정당이 선거정치의 중심을 이룬다.

각 정당은 폭 넓은 유권자층의 지지와 정치적으로 광범위한 이해관계자들을 모색하므로 양 정당은 일반적으로 중도적인 정책을 표방한다. 양 정당의 유권자층은 비교적 독립적인 유권자층으로 서로 중복된다.[미국 민주당은 민주국가 입장에서 자유민주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로 공존하고 있으며 미국 공화당은 민주공화제 연방국가 입장에서 자본주의자(실용주의자), 애국주의자와 자유민주주의자(서민 민주주의자)로 종존하고 있다]

 

오늘날 중도 진보냐 종도 보수냐는 정책개발에 달려 있다

 

평민층 지지하는 성향 정책은 진보이며 중산층 지지하는 성향 정책은 보수이다

 

 

1. 미국의 공화당

공화당(共和黨, Republican Party)은 민주당과 함께 미국의 양대 정당 중 하나이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정치만평가 토머스 네스트가 자신의 정치만평에서 민주당을 당나귀로, 공화당을 코끼리로 표현한 이래 코끼리가 당의 상징이 되었다.

 

1950년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이래 1994년까지 40여년 동안 미국 의회에서 소수당으로 있었다. 1994년 중간 선거에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켰는데 이를 깅그리치 혁명이라고 부른다. 뉴트 깅그리치가 이끌었던 공화당은 40년 만에 미국 의회의 다수를 장악하는 전대미문의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2006년에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게 다시 역전되었다. 2010년에 치러진 중간 선거에서 티파티 운동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민주당을 누르고 미국 하원 제1정당이 되었다.

 

(1) 공화당의 노선

보수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우파 정당이다. 따라서 수년 동안 공화당원들은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을 강력히 반대해왔으나 결국 찬성을 표명한 이후에는 다소 덜 보수적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연방 상원의원이 이끈 보수주의 개혁 운동 이후 더욱 강경하고 보수적인 성격을 갖게 되고 미국 민주당과의 정치적 대립이 더욱 격화 되었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티파티 운동이 공화당 하원선거 경선에 대거 참여하면서 더욱 보수적으로 이동하였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은 연방 정부의 축소, 사회 보수주의, 친 재벌 정책 등의 강경적 보수 노선을 이어가고 있다.

공화의 이념 주류는 보수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사회보수주의이고 비주류는 중도주의, 재정보수주의, 자유지상주의, 우익대중주의, 신보수주의, 고보수주의 등이다

정치성향은 중도우파에서 우익이다[중도 보수에서 보수이다]

 

(2) 공화당의 역사

공화당의 전신은 현재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토머스 제퍼슨이 이끈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친()앤드루 잭슨파와 반()앤드루 잭슨파로 분열되었다. 이후에 1828,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반잭슨파는 연방주의자, 남부 민주공화당원, 보수주의자들을 결집하여 휘그당을 창당하였다. 휘그당은 민주당과 양대 정당으로 거듭났으나, 밀러드 필모어 이후 대통령 당선자를 배출해내지 못했다. 공화당은 1854년 캔자스 네브래스카 법이 입법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노예제 찬성론자와 노예제 반대론자들 간의 타협으로 여겨지던 1820년 미주리 타협과 1850년 타협이 무효화 되어버림으로써 일어난 정치적 파국과, 이것이 일으킨 민주당과 휘그당의 분열로 창당된 반노예제를 기치로 건 정당이었다. 이런 정당이 2세기를 거치면서 보수 가치를 내건 정당으로 발달한 데에는 1896년부터 1932년까지 진행되었던 미국의 진보운동의 영향이 컸다. 이 진보운동 기간동안 공화당은 보수 정당으로 거듭났고, 민주당은 진보(리버럴)정당으로 노선이 옮겨 갔다. 이후 대공황이 오고, 뉴딜정책을 기점으로 다소 진보주의으로 옮겨갔으나 1960년대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연방 상원의원이 이끈 보수주의 개혁 운동을 겪으면서 다시 강경적 보수주의로 이동하였다.

 

공화당은 1854320일 휘그당과 자유토지당이 통합하여 창당한 정당이다

 

a.자유토지당(Free Soil Party)1848년에서 1852년 사이에 존속했던 미국의 정당이다. 마틴 밴 뷰런 전() 미국 대통령의 주도로 창당되었으며, 주로 뉴욕 일대에서 세력의 기반을 형성했다. 휘그당과 민주당의 옛 노예제 반대론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자유토지당의 주요 정책은 서부 개척지에 대한 노예제 확산의 반대였으며, 노예로부터 해방된 자유민들이 자유롭게 토지를 영유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노예제보다 더 나은 방법이라 주장하였다. 자유토지당은 1854년에 공화당으로 흡수되었다

-노예제 반대

-서민 민주주의

 

b.휘그당(Whig Party)1833년에서 1860년까지 존재했던 미국의 정당이다. 앤드루 잭슨의 정책에 반대하여 조직되었다. 왕정에 반대하는 영국 휘그당과 정치적으로 유사하다. 이 정당은 노예제와 노예제도를 둘러싼 남북의 날카로운 정치적 대립의 와중에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다가 결국 해산되었다. 미국 역사에서 1833~54년에 활동한 주요 정당이다

국가 발전 계획을 지지했지만, 점점 높아지는 지역 감정의 물결 속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휘그당이 정식으로 결성된 것은 1834년이었다.

 

존 퀸시 애덤스의 국민공화당은 1828, 18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잔당(미국 민주당)의 잭슨에게 참패를 당하여 큰 타격을 입었다(이 두 파는 민주공화당의 분열로 생겼음). 그러나 잭슨이 제2미국은행과 싸우고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연방법거부에 정면으로 대항하자 반대파들이 결집할 기회가 생겼다. 헨리 클레이는 재정에 대해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및 남부 주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을 모아 여전히 보호관세나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국내 개량사업의 추진 같은 국민 공화당의 정책이 타당하다고 믿는 사람들과 제휴시켰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휘그당에는 1830년대 중엽에 사라진 반()프리메이슨당 출신의 반프리메이슨 운동가들도 합류했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을 '앤드루 왕'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독재적인 행정에 반대하여 느슨한 제휴관계를 맺고 있던 집단들이 휘그당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휘그당이라는 이름은 왕의 특권에 반대하는 영국 정당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러나 휘그당은 오로지 잭슨과 그의 정책에 대한 공통된 혐오(그리고 나중에는 공직에 대한 갈망)만으로 뭉친 휘그당은 결정적인 선거 공약을 하나도 개발하지 못했다. 1836년에 휘그당은 각각 동부와 남부 및 서부를 대표하는 3(대니얼 웹스터, L. 화이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의 대통령 후보를 내세워 각 지역에 호소하는 한편, 표를 분산시켜 하원에서 결선 투표를 하려는 전략을 세웠지만 실패했다.

 

1840년에는 지역적인 접근 방식을 버리고 전쟁 영웅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해리슨은 '통나무집' 이미지를 앞세운 유세에서 지지자들의 지속적인 선거 운동을 바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1840년에 휘그당은 백악관과 의회를 장악한 뒤 미국의 가장 유력한 정당이 될 준비를 갖추고 헨리 클레이의 국가주의적 계획안을 법제화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해리슨은 취임한 지 한 달도 채 지나기 전에 죽었고, 그의 후임자인 부통령 존 타일러는 미국은행 재설립을 비롯한 휘그당의 주요입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존 타일러는 당을 탈당하였다.

 

1844년에 휘그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클레이는 국민들에게 퍼져 있던 팽창주의의 인기를 과소평가하고 텍사스 병합에 반대했기 때문에 선거에서 제임스 포크에게 패배했다. 1840년대말에 이르자 '양심적인'(노예제에 반대하는) 휘그당원과 '면화'(노예제에 찬성하는) 휘그당원이라는 파벌이 나타나면서 휘그당의 결속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색인 : 면화 휘그당원). 1848년에 휘그당은 다시 전쟁영웅인 재커리 테일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노예제에 대한 남북 갈등에서 헨리 클레이가 제안하고 밀러드 필모어(1850년에 테일러가 죽자 부통령으로 대통령직을 승계)가 서명하여 입법화된 '1850년의 타협'은 양심적인 휘그당원들을 당에서 완전히 소외시켰다.

 

휘그당은 다시 전직 장군에게 관심을 돌려 1852년에 윈필드 스콧 장군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북부와 남부가 노예문제를 둘러싸고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기 때문에 '미국 헌법과 연방에 대한 변함없는 애착'이라는 휘그당의 슬로건은 더이상 전국적인 호소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남부의 많은 휘그당원들은 주권(州權)을 주장하는 민주당(주권 민주당)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으며, 스콧이 얻은 선거인은 고작 42명뿐이었다. 1854년까지 대다수의 북부 휘그당원들은 새로 결성된 미국 공화당에 합류했다. 당이 존속하는 동안 휘그당을 계속 지지한 지역은 남부의 주 가운데 연방 탈퇴보다는 타협을 택한 경계주들뿐이었고, 휘그당을 계속 지지한 계층은 지역 갈등에서 어느 한쪽을 편들기를 거부한 보수주의자들뿐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휘그당원들은 대부분 1850년대 후반에 국수주의적인 노우 낫씽당(不知黨)에 들어갔고, 1860년에 정당들이 남북으로 분열 된 뒤에는 입헌연방당을 지원했다.

-경제적 민족주의

-사회보수주의

-보호 무역

-산업화

 

2. 미국의 민주당

민주당(民主黨, Democratic Party)은 공화당과 함께 미국의 양대 정당이다. 2009121일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행정부)의 지도 아래 상원에서 최소 58, 하원 257석으로 입법부에서 다수당(2007년 당시 기준)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주지사도 28곳으로 모두 과반 이상을 점하고 있었으나, 2010년 중간 선거에서 여당 사상 최악으로 참패하여 주지사는 20, 상원 의석은 53, 하원 의석은 193명으로 줄었다. 2019년 현재 상원 의석은 45(원내에서는 무소속 2명과의 연합으로 47) 하원 의석은 235석이며 당의 상징은 당나귀이다.

(1) 민주당의 노선

평균적으로 중도좌익적 사회자유주의 입장을 취하는 정당이다.

미국 민주당은 빅텐트 정당이기 때문에 중도우파 성향의 온건 보수 정치인부터 사회주의 좌익 성향인 정치인들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지만, 주류는 주로 사회자유주의(리버럴)이다.

수 십 년 동안 민주당원들은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을 찬성해왔으며, 공화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주의적·민주주의적으로 여겨진다. 뉴딜정책 이후 공화당 내에서도 진보적인 인사가 증가하여 양당의 이념적 차이가 줄었다. 그러나 1960년대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연방 상원의원이 이끈 보수주의 개혁 운동으로 공화당이 강경한 보수주의로 성향이 바뀌면서 미국 공화당과의 정치적 대립이 더욱 격화 되었다. 일례로 빌 클린턴은 재벌들의 세금을 인상했고, 로널드 레이건은 재벌들의 세금을 인하했다. 유권자들에 대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양당 간에 뚜렷한 차이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50%로 의견이 양분된 반면 2004년에는 양당의 정책이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한 비율이 76%가 되어 1972년의 46%에 비해 크게 늘었다. 1930년대 이후로 민주당은 연방 정부의 확대, 사회자유주의, 친 서민 정책 등의 유연한 진보주의 노선을 이어갔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미국 친기업 성향이나 친기득권 성향을 많이 보여서 많은 미국 백인 노동자 계층을 중심으로 중산층에게 불만이 쌓였다는 논란이 짙었다. 동성애, 임신 중절 찬성 등, 보수주의적인 공화당에 비해 상당히 진보주의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민주당의 이념 주류는 현대자유주의, 사회자유주의이고 비주류는 중도주의, 보수주의, 좌익대중주의, 진보주의,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이다

정치성향은 중도 좌우파에서 좌익이다[중도 보수,진보에서 진보이다]

분파

사회자유주의 분파

다수 분파이다. 대부분의 당원들은 민주당 주류의 사회자유주의적 철학을 따른다.

진보주의 분파

대표적인 인물로 엘리자베스 워런, 키스 엘리슨, 데니스 쿠시니치가 있다.

보수주의 분파

조 맨친, 지미 카터와 존 F. 케네디가 있다. 오늘날 청견민주에 의해 표현된다.

중도주의 분파

보통은 신민주연합에 의해 대표된다. 대표적인 인물로 빌 클린턴, 전 위원장 데비 와셔만 슐츠가 있다.

민주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분파

규모가 크지 않고 극소수파에 속했으나, 2016년 대선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가 잠시 활동하며 지지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2) 민주당의 역사

미국이 건국하는 무렵인 1790년대에 반연방파 토머스 제퍼슨이 창당한 공화주의자당(Republican Party)이 당의 전신이다. 당명은 점차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으로 바뀌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던 제퍼슨 공화파는 친 앤드루 잭슨파와 반 앤드루 잭슨파로 분열되었다. 이후 1828년 대통령에 당선된 앤드루 잭슨 이후, 반 잭슨파는 민주공화당을 대거 탈당하여 과거 연방주의당 지지자, 민주공화당내 보수주의자, 반잭슨파를 결집해 지금의 공화당의 전신인 휘그당을 창당하였고, 친잭슨파는 당에 잔류해 당명을 지금의 당명으로 바꾸었다.

 

1801년부터 집권했으며 남북전쟁 발발 직전인 1860, 북부 민주당원을 중심으로 한 북부 민주당과, 남부 민주당원을 중심으로 한 남부 민주당으로 분열되었다. 전체적으로 민주당이 분열되어서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반노예주의를 표방한 공화당 소속 연방하원의원인 에이브러햄 링컨에 패배하였다. 이후 내전이 일어나자 당은 내홍을 겪으며, 이후 공화당에 비해 약세를 보인다. 그러나 대공황을 계기로 20년간 민주당이 연속 집권하였다.

 

1932년 대공황 와중에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을 통해 공황을 극복코자 했고, 강력한 복지정책을 시행하였다. 그 결과로 1920-1950년대에는 미국내 소득 격차가 크게 줄었다. 부유층의 소득이 감소하고, 중산층의 실질 소득이 증가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은 이러한 변화는 정치적인 변화에 큰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뉴딜정책이후 부유층의 세금은 급증하였고, 소득세 상한은 1950년대 중반에 91퍼센트에 달했다. 기업 이익에 대한 평균 연방세는 1929년에는 14퍼센트였으나, 1955년에는 45퍼센트에 달했다. 상속세 상한은 77퍼센트에 달했다. 1929년에 국부의 20퍼센트를 소유했던 상위 0.1퍼센트는 1950년대에는 10퍼센트 정도를 소유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공화당에 진보적인 정치인이 늘어나 대화합이 가능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노동력의 부족으로 임금이 상승하였고, 높은 임금은 전후에도 지속되었다. 민주당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전후호황으로 미국의 경제는 발전하였다. 1960년대가 되자 미국에서는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연방 상원의원이 이끈 보수주의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그가 주도한 보수주의 개혁 운동은 도시 소요사태를 이용해 진보주의자들을 논리로 공격하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인종차별을 옹호하였으며 공화당 내의 진보적인 인사를 축출하였다. 그 결과 공화당은 매우 강경하고 보수적으로 되고, 민주당과 공화당은 더욱 대립이 격화되었다.

 

대공황 이후 민주당은 대개 의회의 다수당이었다. 민주당은 1994년 이래 의회에서 소수당이 되었으나, 2006년 중간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상원과 하원에서 공화당을 제치고 모두 다수당이 되었으나 2008,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집권 이후 실시된 중간선거에서 집권당으로서 사상 최대의 패배를 당하면서 하원 다수당 지위를 공화당에게 넘겨주게 되고 상원 다수당 지위를 가까스로 유지하게 된다.

 

(3)미국 공화당과 미국 민주당 노선

세계 국가들 중에서 가장 민주화. 자유화. 개방화된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사회와 세계각국 정당 구조를 연구하다가 보면 미국 공화당과 미국 민주당 노선이 일반적으로 일치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a.미국 공화당 노선---자본주의 혁명론(반공산주의)

(a)자본주의 3대월칙--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등

모든 개인에게 사유재산 인정

모든 개인에게 영리추구(이윤추구) 부여

모든 개인에게 자유시장경쟁원리(자유경쟁) 부여

(b)사회적 시장경제주의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원칙으로 하고 그기에 사회적 정의 통제적인 경제제도를 가미하는 형태이며 궁극적으로 자유무역, 자유시장원칙이다

(c)농지소작제도나 노예제 그리고 신분제 금지--자유주의 지향

(d).소비자의 보호

(e)노동자 농민 그리고 약한 자 여성. 아동. 노인등 국가적 보호--생존권 중시

민주적 제도를 일시 보류하더라도 경제적 평등과 빈곤에서 해방..

신분제와 노예제도 철폐와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후 고도의 소비사회로 지향

 

b.미국 민주당 노선---민주주의 혁명론(반전체주의 반독재주의)

(a)민주적 기본질서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그때 그때의 다수의 의사와 자유.평등에 의한 국민의 자기결정을 토대로 법치국가적 통치질서이다

전체주의나 국가사회주의. 독재정부 그리고 강제노역제등을 부정한다

(b)법치주의와 사법부 독립

(c)국민주권주의---대한민국 주권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있다

(d)복수정당제도 및 의회민주제 보장

(e)기본권 보장주의

(f)국제평화주의

(g)주정부와 지방자치제 실시

 

c.미국 공화당 노선과 미국 민주당 노선 주요 정책

(a)미국 공화당 노선 주요 정책

.노예제나 귀족신분제도 폐지---모든 인간에게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등 부여

.공산주의 공동생산 공동분배 제도 철폐와 자유.평등.행복추구권등 자유무역주의 표방

모든 인간에게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등 부여

()소비자의 보호나 권리보장

()국가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계획경제 철폐

국가나 어떠한 제3자 힘 있는자도 개인의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등을 침해할 수 없다

()연좌제 폐지--만민(萬民)은 평등하다

()재산권 보장--재산권 행사의 의무(재산권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한다)

()주거, 직업선택의 자유 보장

.봉건주의 토지신분제도 폐지나 철폐운동

모든 인간들에게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 보장.

()농지소작제도 금지

()지주제도 폐지

.연방제나 연합정부 구성 지지-->유엔이나 세계단일공화국 수립 지지

.일부다체제도 폐지나 철폐--모든 여성에게도 사유재산.영리추구.자유경쟁등 부여

.자유. 평등. 행복추구권 --자유권과 행복추구권 보장주의자

.기본이념--자유주의

--보수적 온건주의자나 보수주의자--

 

(b)미국 민주당 노선 주요 정책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그때 그때의 다수의사와 자유 평등에 의한 국민의 자기 결정의 토대로 하는 법치주의..

.반전체주의--저항권 인정

,반독재주의--저항권 인정

.주와 지방자치제 실시요구

.복수정당제 요구

.사회권이나 생존권 보장주의자

.언론출판의 자유 보장

.기본사상---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연합)

--진보적 온건주의자나 진보주의자--

 

d.미국 공화당과 미국 민주당 위대한 대통령들

(a)미국 공화당 대통령

.미국 초대 조오지 와신톤 전대통령---미합중국은 위대한 것이다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대영제국으 밑에 있다가 독립된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다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대통령이며 미합중국에서의 국부로 영원한 자본주의 독립 혁명의 선구자이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하여금 크신 열매을 맺게 할 지어다 그리하여 우리정부는 인권을 보호하는 성벽이 되게 될 지어다>

 

.아브라함 링컨 전대통령--자유의 전사여! 영광있으라!

미국의 남북전쟁 <케 티스버크>전투에서 전몰한 장병 위령제를 맞아 1863117일 당시의 북군 통솔자요 대통령인 <링컨> 전대통령은 일장의 연설을 하였는데 내용이 간결하지만 의미심장 하다하여 오늘날 크게 친송받고 있다

<오늘의 전란은 정의와 공도를 내용으로 하는 자유국가가 압제와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이를 영원히 지속할 수 있는냐에 대해서 처참한 철화의 시련을 받고 있습니다.. 중략.. 위기에 빠진 자유정치, 인민의 정치는 그들의 숭고한 순국에 의하여 이루어 질 것입니다>

 

.부시(Bush)대통령----자유의 작전

아프가니스탄 주민과 이라크 주민들에게 압제와 전제정치를 청산하고 자유가 있는 국가를 부여할 것입니다

 

(b)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랭크린 D 루우즈벨트 전대통령---네가지 자유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한지 1년만에 당시 미국대통령이였던 후랭크린 D 루우즈벨트님은 194116일 미국 제77회 의회에 출석하여 이번 전쟁은 단연코 민주주의 쪽의 승리로 돌아오게 하지않으면 안된다고 갈파 하였는데 그 연설은 그 뒤 <네가지의 자유>로 불리워지고 있다.

<자유라는 것은 첫째로 전세계에 걸친 언론의 자유 둘째 종교의 자유 셋째 결핍(缺乏)의 자유로부터의 자유 즉 모든 국가에 대해서 그 국민의 건전한 평화생활을 보장하는 각국간으 경제적 양해 (빈곤에서 해방과 국가나 유엔등이 생존적 경제적의 보장자유) 넷째 공포로부터의 자유 즉 세계 어느 곳에서나 한 나라가 그 이웃나라에 대해서 실제로 침략하지 못하도록 완전한 군비축소의 자유>

.F 케네디 전대통령---인류의 자유를 위하여

1961년 미국 민주당 출신의 케네디님이 공화당의 닉슨님을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마사추세스주 부르크린 출생 하바드 대학교, 노틀담 대학교를 졸업하고 법학박사의 학위를 받았다

1947년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1953년에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제2차대전 중 해군에 종군하여 명예전상장을 받았다

저서에는 용감산 사람들과 평화의 전략등이 있다

<인류의 자유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도 압제 전제정치도 아닙니다 보수인 양식과 우리 행동의 최후 역사와 더불어 우리들은 신의 축복과 가호가 있기를 바라지만 그 지구상에서의 신의 섭리는 진실로 우리들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짐을 자인하고 우리들이 자랑하는 이 땅을 이끌고 앞으로 전진합시다>

 

.클린턴전대통령---작은 행정부와 인류 평화의 자유..

 

e.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공통적인 주요정책

(a)행복추구권

.생명권

.신체훼손금지권

.인격권

.휴식권

.수면권

.애정권--결혼의 자유를 국가가 보장(주택이나 직업등 국가가 장기적으로 알선 보장)

.스포츠권--3S(섹스. 스포츠. 스크린등 자유부여)

개인 누구나 섹스나 스포츠, 스크린등을 향유할 수 있다

.건강권

 

(b)인간의 존엄성 보장

.집단추방 집단학살 금지

.고문제도 페지

.노예제도 폐지--자본주의 입장을 사유재산 영리추구 자유경쟁등은 공화당 입장 흑인해방운동이라면 인권적 입장에서는 민주주의 입장이다

.인신매매, 인간실험 금지

.마약 복용이나 강제노동 금지

.잔인하고 가혹한 형벌이나 화학적 물리적 무기 사용 금지

.인간을 최저한 생존까지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빠뜨리는 것도 금지---인간에게 최소한 의식주 해결을 국가가 보장(영양실조나 기아등 유엔이나 국가적 구호활동 부여)

.사형제도 폐지와 범죄없는 세상으로 천명

고통이 없는 상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할 수 있는 권리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