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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정부의 한계 "국가자본주의(국영자본체제)와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 본문

대북정책

북한 김정은정부의 한계 "국가자본주의(국영자본체제)와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

CIA bear 허관(許灌) 2019. 10. 15. 19:58

북한 김정은정부의 한계는 "국가자본주의(국영자본체제)[경제]와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정치]"입니다

1.북한 경제-국가자본주의 체제(국영자본체제)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 국영자본체제)는 자본주의적 계획경제제도라고도 하며,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서의 국가주의적인 대량의 국유화 정책을 의미한다. 또한, 공산권 국가에서는 '공산주의 신경제정책'이라고도 하였는데, 토대는 소련의 레닌이 러시아 혁명 후 한때, 도입해 적용을 시험하였으며, 국가에서 자본을 얻기 위해 실시했던 사회적 경제 제도였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들에서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불가피한 경제적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필요시 사용했던 개념의 제도이지만, 군국주의나 공산주의 체제의 국가에서는 제국주의 국가와 사실상 마찬가지로 전시 상태에서의 과거 경제정책으로 한때 이해되기도 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소련에서는 '신경제정책'이라고 불렸으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수정공산주의'라고 불렸던 경제 정책이다.

(1)개요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는 제일 처음으로 1896년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라는 독일 사회주의자에 의해서 사용되었으며, 그 당시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의 당소유화 정책을 비판할 때 사용한 하나의 '멸칭'으로 쓰이기도 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국가자본주의적인 경제정책을 단행하여 큰 성장을 거둔 나라로는 대표적으로 독일 제국이 있다.[1] 이 정책의 통상적 명칭은 국가자본주의이지만 마르크스주의에서도 이 사상이 언급되었지만 그 사상적 내원은 프리드리히 리스트이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 정책을 '국가자본주의'라고 표기하지는 않았고 '사회주의를 위한 자연 경제'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어디까지 이러한 언급에서는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명목에서 이 경제정책이 유효하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급진적으로 국유화 자본주의를 의미하는 국가자본주의가 이러한 최초의 사상이 의미했던 '사회주의를 위한 자연 경제'와는 많이 대비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2] 또한 19세기에서 20세기를 걸쳐 사회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용어였다.[3] 그러나 소련 붕괴로 공산권 국가가 대량 붕괴한 이후 국가자본주의는 국가통제주의적 지배하에서 국가적 정책을 행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의 제도를 일컫는 용어 그 이하, 이상도 아니다.

 

a.국가사회주의와의 차이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는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처음 사용한 사람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이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국가사회주의와 국가자본주의를 비교하기 위함이었다. 빌헬름은 국가사회주의와 국가자본주의 이 둘의 관계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표현했는데 국가사회주의는 언뜻 국가자본주의와 반의어 같지만, 국가사회주의는 국가자본주의를 포용하는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사실상 이 두 용어의 뚜렷한 차이점은 없으며, 굳이 차이점을 말한다면, 국가사회주의의 국가자본주의적 국유화 목적은 대량의 국유화 정책으로 국가가 직접 노동자를 관리하여 혹독한 국가 상황을 이겨내기 위한 환경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는 단순히 국가사회주의가 실현하고자 했던 경제 정책일 뿐이었다.

 

b.국가자본주의의 또 다른 의미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에서 국가자본주의는 하나의 과도 정책이며,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대량의 국가 경제 계획을 실천한다는 뜻과 거의 다를 바 없다. 또한, 현재에서의 의미도 그와 같다. 그러나 공산주의계에서는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르지 않았고 신경제정책이라 불렸다. 오늘날 이 둘은 거의 같은 뜻이지만 현실 공산주의계에서는 국가자본주의와 신경제정책을 구분하기 시작했으며, 국가자본주의는 부정부패와 국가혼란 상황을 막기 위한 국가적 진작의 필요에서 사실상 성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의회주의자들과 클리프주의자들이나 좌파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을 비롯한 일부 좌파들은 소련 및 구 공산권 국가들의 신경제 정책이 사실 공산주의 본질에서 벗어났으며 자본주의로 우회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비판한다.

 

아나르코공산주의자인 엠마 골드만은 1935"러시아에는 공산주의가 없다(There Is No Communism in Russia)"라는 글을 통해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비판한다.

 

"공산주의는 인간 평등의 이상이다. 이것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모든 노예제와 억압의 원천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경제적 불평등이 사회적 불의를 초래하며, 도덕적, 지적 진보의 적이라고 말한다. 공산주의는 생산과 유통 수단의 공동 소유의 결과로 계급이 폐지된 사회를 목표한다. 이것은 무계급적이고 연대적인 연방을 통해서만 인간의 자유와 평화와 안녕을 달성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볼셰비키 공산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근본적인 아이디어를 고려해 보자. 이것은 중앙집권화된 권위주의적 형태를 가진다. 이것은 오로지 당의 강압과 폭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것은 자발적인 연합을 통한 공산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강제적인 당 공산주의이다……

공산주의의 첫 번째 요건은 토지와 생산 기계와 유통의 사회화이다. 사회화된 토지와 기계는 인민에게 속하여, 개인이나 집단들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사용한다. 러시아에서 토지와 기계는 사회화되지 않았고 당소유가 되었다…… 무언가가 개인이나 단체에 속하지 않을 때 이것은 사회화되거나 국유화된 것이다. 만약 그것이 당소유가 되었다면, 이는 당에 속한 것이며, 당이 그것을 통제하여 당의 소망과 견해에 따라 처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화되었을 때는, 모든 개인이 이에 자유로이 접근하여 누구로부터의 간섭없이 사용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토지와 생산과 유통의 사회화도 국유화도 없다. 모든 것이 당소유가 되었으며, 당에게 속한다. 이는 미국의 우체국이나 독일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의 철도의 상황과 정확히 동일하다. 그것에는 공산주의에 관한 것이 없다......

존재하는 모든 자원은 당의 소유가 되었고, 대외 무역은 절대적 독점 상태다. 모든 출판업계는 당에 속하며, 당은 모든 책과 간행물의 유일한 출판자이다. 간단히 말해서, 고대에 모든 것이 왕의 재산이었던 것처럼, 온 나라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은 당의 재산인 것이다......

그러한 조건은 아마도 국가자본주의라 불릴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이떤 면에서든 공산주의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다...... 이제 분명히 하자 소비에트 러시아는 정치적으로는 절대적인 독재국이며, 경제적으로는 국가자본주의의 추잡한 형태에 불과하다."

 

아나키스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 계급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구 공산권 국가에선 이를 소유한 공산당(국가 권력을 장악한)에게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위치는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구 공산권 국가의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대변인이 아니라 "새로운 계급"(지배계급)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서 이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체제로 인정하지 않는다.

 

좌파공산주의자인 오토 륄레(Otto Rühle)는 그의 "파시즘에 대한 투쟁은 볼셰비즘에 대한 투쟁과 함께 시작된다(The Struggle Against Fascism Begins with the Struggle Against Bolshevism, 1939)"라는 글을 통해 러시아(소련)는 파시스트 국가 체제의 모범이 되었으며, 이들의 경제 체제는 근본적으로 소비에트가 아니라, 국가 자본주의라고 비판한다.

"레닌의 저작에 묘사된 볼셰비즘의 형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면, 다음의 요점들이 볼셰비즘의 특징으로 인식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 볼셰비즘은 민족주의적 독트린이다. 볼셰비즘은 그 근원과 본질에서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했으며, 나중에서야 국제적 범위의 이론과 실천으로서 일반적 독트린으로 승격되었다. 이 민족주의적 특징은 억압된 민족의 민족적 독립을 위한 투쟁에 대한 입장에서도 빛을 발한다.

 

2. 볼셰비즘은 권위주의적인 체계이다. 볼셰비즘의 사회 피라미드의 꼭대기는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지점이다. 권위는 모든 권력을 지닌 전능한 자에게서 실현된다. 이 지도자 신화에서 부르주아 인격의 이상은 그것의 최상의 승리를 기리게 된다.

 

3. 조직적으로 볼셰비즘은 고도로 중앙집권적이다. 중앙위원회는 모든 발의, 리더십, 지시, 명령의 권한이 있다. 부르주아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직의 주요한 구성원들은 부르주아지의 역할을 한다. 노동자의 유일한 역할은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4. 볼셰비즘은 군사적인 무력 통치를 표현한다. 정치 권력을 향한 독점적인 관심은 전통적인 부르주아적 의미에서의 지배 형태와 다르지 않다. 제대로 된 볼셰비키의 조직 안에서 조차 구성원들의 자기 결정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군대는 위대한 모범으로서 당에게 봉사한다.

 

5. 볼셰비즘은 독재적이다. 야만적인 무력과 공포적인 조치들로서 이들은 모든 비볼셰비키적 제도와 의견을 탄압할 것을 지시한다. 이들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관료의 독재나 일인 독재를 의미할 뿐이다.

 

6. 볼셰비즘은 기계적인 방법론이다. 이것은 사회질서의 이상향으로서 기술적으로 순응이 보장되며 자동적으로 그 체계가 조정되는 가장 효율적인 전체주의를 지향한다. 중앙집권적으로 계획된 경제는 의도적으로 기술 조직적 문제를 사회 경제적 질문과 혼동하게 한다.

 

7. 볼셰비즘의 사회구조는 부르주아적 성격을 지닌다. 이것은 임금노동을 폐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가 노동의 산물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취하는 것을 부정한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부르주아 사회질서의 계급구조를 유지한다. 자본주의는 영속된다.

 

8. 볼셰비즘은 오직 부르주아 혁명의 틀 안에서만 혁명적인 요소이다. 소비에트를 실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와 그 경제의 구조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이것은 소비에트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를 수립한다.

 

9. 볼셰비즘은 결국 소비에트 사회로 이어지는 다리가 아니다. 소비에트가 없다면, 사람과 사물의 급진적이고 총체적인 혁명이 없다면, 이것은 자본주의적 인간 자기소외의 폐지라는 가장 근본적인 소비에트의 요구를 실현 시킬 수 없다. 이것은 새로운 사회를 향한 첫걸음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의 마지막 단계를 표현할 뿐이다"

 

이 아홉개의 요점들은 볼셰비즘과 소비에트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을 나타낸다. 이것은 볼셰비키 운동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필요한 모든 명확성을 통해 입증하며, 이것의 파시즘과의 밀접한 관계를 지적한다. 민족주의, 권위주의, 중앙집권주의, 지배자의 개인숭배, 무력 통치, 공포 정치, 기계적 접근 그리고 사회화를 실현할 수 없는 무능, 이러한 파시즘의 본질적인 요소들은 볼셰비즘 안에 이미 존재했으며 여전히 그렇다. 파시즘은 단지 볼셰비즘의 복제품일 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이중 하나에 대한 투쟁은 반드시 또 다른 하나에 대한 투쟁과 함께 시작 되어야 한다. 

 

(2)중국식 공산주의

여러 학자들은 덩샤오핑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가 국가자본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특히 정치경제학자 이안 브레머는 중화인민공화국은 개혁 개방 이후 경제적 자본주의나 노동자의 편의를 도모하는 소비에트의 길을 걸은 것이 아니며, 빈부격차를 없애려는 것도 아닌, 나라 주도로 우호적 국가와 협력 하에 시장을 주도하는 경제 정책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국가적 자본주의를 실시한 것 같다고 주장한다.

 

   

(3)국영자본체제 북한

1인당 GDP(국민소득) 583달러(2012년도)로 채무불이행 국영자본체제 북한

a.국영자본체제는 국가가 운영하는 자본주의(국영기업)를 의미한다

북한정부도 토지이외 모든 물건(주택이나 상가, 자동차등)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평양시내 아파트 매매를 허용하고 있다 토지는 국가나 협동농장 소유이다 북한 평양시민 중 경제적으로 풍요한 사람은 개인 소유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으며 중국인이나 외국인 투자가들도 상가나 고급 아파트등을 소유하고 있는 분도 많다 북한이 개혁 개방화 될 수록 임대 아파트보다는  개인 소유 아파트가 늘어날 것으로 본다

 

평양 시내  상류층과 평민층, 빈곤층등의 빈부격차도 심각하다

 

북한 주민 계층은 상류층, 평민층, 빈곤층(식량난이나 영양실조 계층)으로 구분할 수 있다[북한 상류층 30%이내이며 평민층 70%, 평민층 중 빈곤층 33%이내: 북한의 배고픈 사람들(식량난과 기아위기 주민들)1990년대  초반 420만명, 중반 700만명이었고  긴 식량 위기의 10 년 후, 2007 년까지 북한  전체 주민의 33 %, 780만명이 영양실조 상태이다]

 

북한은 교육, 의료, 주거의 무상화를 실시하고 있다고 칭하고 있지만 북한 경제 빈곤화로 실업자나 빈곤층에게는 교육,의료, 주거등의 무상화가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북한 주민은 상류층과 서민층(평민층)으로 구분 돼 있고 서민층(평민층) 중에는 식량위기 계층 빈곤층이 전체 주민 33%이다

 북한은 계획 경제를 실행하고 있지만 의식주(衣食住), 외출이나 쇼핑에는 (입장권·승차권 등의) , 상표권과 돈이 필요하다. 교육,의료,주거 무상화로 직원 급여가 아니라 생활비만 지급된다. 주택(주거)도 개인소유를 인정함으로 점차 사유화 돼 가고 있다

 

b.북한 남녀징병제 국가로 남자 10년간, 여자 7년간 군 복무

공식적은 북한 군은 120만명이다. 실질적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는 수는 한국과 비교했을 때 절반 이상인 70만명이 많다. 북한의 나머지 군인들은 민간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이 민간 업무란 양돈, 어획, 광산, 공장 등에서 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임급으로 일을 시키는 것이다

북한 무상교육 중학교 졸업생 중 30%이내 학생들이 개인의 능력과 유상교육기관 대학에 진학한다

중국은 직업군인 지원 모병제이지만 북한은 남녀 징병제국가로 중학교 졸업 후 남자는 10년간, 여자는 7년간 현역군인이나 다른 군복무형태  직장 등지에서 군복무를 해야 한다

 

통계에 따르면, 2012 북한 인민군 병사의 수는 120만 명으로 이 중 여성 군인은 15% 17만명에 달했다. 북한의 인구는 약 2400만명으로 1000명에 7명이 여성 군인인민군 군인 100명에 15명이 여성 군인 ​​셈이다

북한정부는 북한 아동들의 영양부족으로 인민군 입대 신체 조건을 "138cm이상, 몸무게 43Kg 이상"으로 실행하고 있다

 

14세때 징병명부 등록, 15세때 신체검사, 16세부터 인민군 입대를 하고 있다

 

 

병역 근무 자리 비리가 북한 군부내 가장 큰 비리로 알려지고 있다 

매관행위는 인민군을  감시하는 총정치국 정치 지도원이라는 유리한 자리에는 5 ~ 2 만 달러 (50 ~ 200 만 원), 지방 관리는 약 5 천 중국 위엔화 (8 만원)에 직위를 사고 파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식통은 "공직에 붙으면 뇌물을 받을 처지에 놓이게 1주일에 의거을 회수 할 수 있다고 된다"고 말했다

현역군인이나 군() 경력이 없으면 원칙적 북한 노동당 당원이 될 수 없다

북한 노동당 당원은 군인이다[先軍정치와 국방위원회]

 

북한은 14세가 되는 해 징병대상자로 등록된 후, 16세 때 징병검사를 받는다. 이듬해 17세에 정식으로 입대한다. 복무기간은 남성 보병부대 10년 특수부대 13, 여성 보병부대 5년 특수부대 7. 복무 중 의무적으로 경제활동에 투입되므로, 북한 인민군은 농업, 공업과 공공기업체 기능도 겸하고 있다. 이들은 제일 거대한 생산집단이며, 동시에 소비집단이다. 전역 후 계급에 상관없이 60세까지 예비역으로 복무한다. 2000년대 들어 병무행정이 원활히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 대학입시를 통해 대학에 들어가거나 예술가, 운동 선수, 징병검사를 통한 심신 상태나 자질 문제가 있는 사람은 징병되지 않는다. 징병되지 않는다고 다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와 운동선수는 장교에 준한 대우를 받는 반면 심신 또는 자질에 문제가 있어서 징병되지 않은 사람은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평생 차별을 당한다

통상 군부에 해당되는 선거구나 대의원 수는 상세히 공개되지 않는다. 다만 발표된 선거결과로 군부 관련 선거구와 당연직으로 선출되는 중요 인물들의 인적사항 등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총정치국과 총참모부, 인민무력성의 주요 직책을 포함하여 군종 별 사령부와 군단급에서 당연직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고찰하면 제13기의 경우 대략 80여 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번 제14기에서는 이보다 20여 명이 적은 60 여개의 선거구에서 군부 대의원이 배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c.3공화국 헌법과 자영업

"개인소유는 공민들의 개인적이며 소비적인 목적을 위한 소유이다. 개인소유는 로동에 의한 사회주의분배와 국가와 사회의 추가적혜택으로 이루어진다. 터밭경리를 비롯한 개인부업경리에서 나오는 생산물과 그밖의 합법적인 경리활동을 통하여 얻은 수입도 개인소유에 속한다. 국가는 개인소유를 보호하며 그에 대한 상속권을 법적으로 보장한다[북한 제3공화국 헌법 제24조]"

북한정부도 토지이외 모든 물건(주택이나 상가, 자동차등) 개인 소유를 인정하고 있으며 평양시내 아파트 매매를 허용하고 있다 토지는 국가나 협동농장 소유이다

북한에 자영업이 늘고 있다. 1990년대 장마당 상인으로 출발한 자영업자들이 숙박업, 개인 버스, 사금융업, 아파트 매매 등으로 활동을 넓히면서 북한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북한에 돈주로 불리는 신흥자본가 그룹이 생겨나고 있다고 영국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다.

이 통신은 지난 1029일 평양발 기사에서, “돈의 주인이라는 의미의 돈주가 외화를 써가며 비공식 경제를 이끌고 있다고 전했다.

돈주1990년대 후반 발생한 고난의 행군의 산물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당시 배급이 중단되고 국영상점이 문을 닫자 주민들은 너도나도 장마당으로 나와 장사를 했는데 이를 통해 돈을 번 사람들이 바로 돈주라는 것이다.

"써비차는 개인이 하는 운송, 버스, 택시 이런 건데, 사람도 싣고 짐도 싣고, 경제난 이후 개인들이 먹고 살려고 만든 건데, 이것 없이는 이동을 못해요.”

이밖에 숙박업자, 노래방 업자, 비디오 촬영업자, 매대 분양업자도 생겨난다

d.북한 부채 140억달러

미 재무부에 따르면 북한은 현재 30여개국에 140억달러의 빚을 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별 부채 규모는 1위 중국( 698000만달러), 2위 러시아(101000만달러), 3위 일본(3억달러), 4위 스웨덴 (33000만달러), 5위 이란(3억달러)과 독일(3억달러), 6위 프랑스(28000만달러), 7위 태국 (26000만달러), 8위 오스트리아(21000만달러), 9위 시리아(14000만달러), 10위 스위스 (1억달러), 11위 대만(8600만달러) , 12위 이라크 (5000만달러) 등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인민회의정부 인민민주주의를 포기하고 1970년대 국가사회주의, 군국주의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으로 인민경제 파탄 일인 장기집권과 가족주의 권력 세습제 좌익군사독재정부를 수립했다

 

또한 1980년대에는 국채를 대량 발행하고 외국에 엄청난 빚을 졌는데 이 때문에 북한의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북한은 이 부채를 갚을 티끌만큼의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통일이 되면 남한이 이 부채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군사 및 경제 원조 등으로 북한 전체 부채 절반 수준 698000만달러이다


e.북한 영화는 우리식 사회주의 김일성노선으로 군대 방식으로 관리 운영하고 있으며 남한 사람이나 서양사람은 적국으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는 정치 선전물로 입장료는 무료이다

북한 영화는 예술성이 없고 권력의 시녀이다

북한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떤 영화도 당국의 허가가 필요하며 정치 선전에 적합하여야 한다.

북한 영화의 촬영은 군의 관리 방법으로 운영하고 있다. 출연자가 하는 말과 시간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

 -위로부터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즉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을 핵심으로 하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동유럽과 소련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체제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수십 년 만에 서방 국가들을 따라잡은 급속한 공업화와 고도의 경제성장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리고 그렇게 잘나가던 경제가 왜 장기 침체에 빠졌다가 붕괴했는지를 모두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2. 북한 정치-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국가건설사상과 업적이 구현된 주체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시다.[주체연호]

-북한 김정은정부는  북한 제1공화국(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제2공화국(사회주의 공화국)부터 새로운 국가로 정립해오고 있다.  북한 김정은정부의 가장 큰 결점이 북한 제1공화국이다 . 북한 제1공화국이 발굴되어 방송이나 언론화 될 때 김일성의 우상화, 신격화는 사라질 것으로 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주체적인 국가건설사상과 국가건설업적을 법화한 김일성-김정일헌법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를 국가건설과 활동의 유일한 지도적지침으로 삼는다.[김일성 김정일 헌법과 김일성 김정일 유일사상]

-주체연호 세습제 1인 종신직 좌익군정 사회주의 국가는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보다는 군정이다

북한헌법.hwp

(1)주체연호 태양절(김일성 생일)

주체연호 태양절(김일성 생일)은 북한 1912415일 김일성 생일이 개국한 날로 국경일이다[주체연호]

북한은 그 실무조치로 중앙인민위원회의 주체연호 사용규정을 채택(1997.8.)하였으며, 같은 해 정권수립일(9.9)부터 모든 문서, 출판, 보도물, 우표 등에서 이 연호를 서력(西曆)과 함께 사용하고 있다.

 

주체연호 사용규정에 따르면, 김일성의 출생연도인 ‘1912을 원년(元年)으로 하는 주체연호와 함께 서기(西紀)도 괄호안에 넣어 병기하되, 필요에 따라서는 연도만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면서, ‘주체1이전 연도는 종전대로 표기하고 있다. 특히 북한주민들은 서신거래와 언어생활을 비롯한 일상생활에서의 연도표기와 표현에서 주체연호와 연도만을 사용해야 한다.

 

이에 따라 각종 출판물과 문서, 건축물 등 사적이든 공적이든 간에 연호와 연도를 표시할 때 원칙적으로 주체연호에 의거해야 하며, 사용상 편의를 위해 서기는 주체92(2003) 등과 같이 주체연호 뒤에 괄호를 넣어 사용하고 있다.

-주체원년(1912), 주체2(1913), 주체104(201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사상과 령도를 구현한 주체의 사회주의조국이다

위대한 김일성동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이시며 사회주의조선의 시조이시다[북한 헌법서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앞으로도 조선반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기 위하여 주변국들과 국제 사회와의 긴밀한 연계와 대화를 적극화해 나갈 것이다. 주체107(2018)512일 평양"

북한의 정치체제는 주체사상과 '독재주의'에 근거하는 일인 일당 체제이다. 스스로는 '공산주의'라고 한다.

그러나 국가의 지도이념인 주체사상과 국제공산주의 운동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다. 한 예로 민족주의를 강력하게 표방하는 점은 공산주의의 국제성과 자체모순된다. 사실상 권력을 부계로 세습하는 상황이어서 북한이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김씨 왕조', '공산왕조', '봉건주의' 왕국이라고 비난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정당을 비롯한 계급이 소멸하도록 되어 있는데, 북한에서는 계급이 소멸되기는 커녕 오히려 지배계급이 세습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김일성,김정일, 김정은 세습제 좌익군정이 북한 노동당과 군을 장악하고 있고, 북한 노동당 이외의 정당도 여러 가지가 있긴 하지만 노동당이 곧 국가라는 관점이 지배한다


(2)북한정부 통치자(실권자-군 통수권자 북한 인민군 총사령관)

-소비에트 연방(소련) 국가원수 스탈린(임시정부) 1945815-194899

-김일성 내각수상 겸 인민군 총사령관(전시 군사위원회 위원장) 194899-19721227

-김일성 국가수반 및 무력의 최고 사령관 국방위원회 위원장 19721227일-199478

김일성은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은 국가수반 겸 전반적 무력의 최고 사령관 국방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중앙위원회 수위를 겸직했다

-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임시) 199478-199895[유훈통치기간 국가주석대행]

199112, 김정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취임과 인민군 장악[19901, 반미청년회는 한국민족민주전선 서울대표부로 개편]

김정일은 198010월 북한 노동당 제6차대회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이후 주체사상을 정립하여 자주노선을 확립하고 친미 친서방 노선 소련 고르빈 개혁 자유화 개방화정책과 중국 등소평의 실용주의 개혁개방화 정책을 견제하고 비판할 수 있는 반미노선 스탈린 모택동 사상  NLPDR(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 노선을 추구했다[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하여-주체사상 확립]

1984518일 김정일 직접 쓴 논설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1984) 발표했다

이후 북한 노동당 조직담당 비서, 1990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거쳐 199112월 북한 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넘겨받는다. 그 뒤 19924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다. 그는 대원수에 취임하지 않은 대신 다른 원수들과의 구별을 위해 다른 원수들은 북한 인민군 원수라 하고 공화국 원수라는 계급을 별도로 신설하여 자칭하였다. 19934월 국가주석과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겸임조항을 정령에서 삭제하면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되었다.

군권과 함께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한 김정일은 이어 북한 노동당의 당권도 장악하였다.

김정일은 김영삼정부 등장 이전에 북한 군과 당을 장악했다

-김정일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장 199895-20111217[주석제 폐지]

-김정은 노동당중앙군사부위원장(임시) 20111217-2012412[유훈통치기간 국가수반대행]

-김정은 인민군 총사령관 겸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국무위원회 위원장) 2012412--현직

 

*동독정부

 -실권자: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 당수(중앙위원회 서기장)

-명목상 국가원수:대통령(국가평의회 의장)[사회주의 통일당 당수(중앙위원회 서기장) 겸직]

-정부수반: 각료평의회 의장(총리)

-입법부 수반: 인민의회 의장

-군부수반: 국방평의회 의장[사회주의 통일당 당수(중앙위원회 서기장) 겸직]



*사회주의 국가 헌법[국영자본체제(國營資本體制)]

1991년 소련 해체와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사회주의 국가) 몰락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제체제(노농동맹 인민민주주의 독재체제) 사회주의는 급격히 몰락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나온지 102주년이 되는 2019년 현재는 레닌의 논지(마스-레닌주의)를 명목적으로나마 유지하는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 중국, 베트남 그리고 쿠바 등 4 개국에 불과하다.

-소비에트국가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사명을 완수함으로써 전인민의 국가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노동자계급이 영도하고 노농연맹을 기초로 하는 인민민주 전제정치( 인민민주주의독재)의 사회주의국가이다.

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hwp

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hwp

베트남 헌법.hwp



1989년 혁명과 국영자본체제 붕괴[동유럽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모습, 독일 재통일의 시초이자 1989년 혁명의 대표적인 사례다



1989년 혁명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 초까지 발생한 혁명의 물결의 일부로 동유럽과 기타 지역의 공산정권을 붕괴시키게 된 결과를 낳았다. 이 혁명은 국가들의 가을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1848년 혁명을 언급할 때 때때로 사용되는 국가들의 봄이라는 용어에 초점을 둔 것이다.

 

1989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붕괴되면서 전체적인 혁명의 사건들이 발생했다. 이는 헝가리 인민공화국, 동독,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도 혁명이 발생했다. 이러한 혁명의 전개 과정 중 거의 대부분의 사건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시민 저항운동의 광범위한 사용으로, 일당제의 지속에 대해 대중적인 반대여론을 형성하고, 변화의 요구를 거세게 주장하는데 기여했다. 루마니아는 동구권 국가 중 공산정권이 폭력적으로 붕괴된 유일한 국가였으며, 루마니아와 몇몇 다른 국가들의 정권은 대중에 폭력을 가하기도 했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은 중국에서 주요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했지만, 시위 동안 용기 있는 저항들의 모습은 전세계의 다른 지역에 또다른 시위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날인 64, 폴란드의 연대자유노조는 부분자유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어 1989년 여름 평화로운 정권 이양에 성공했다. 헝가리는 물리적인 철의 장막을 걷어내어 동독의 난민들이 헝가리로 이주하게 되었고, 이는 동독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는 라이프치히를 비롯한 동독 내 여러 도시의 대규모 시위와 베를린 장벽 철거의 계기가 되었고, 1990년 독일 재통일의 상징적 길잡이 역할을 했다.

 

1991년 말 소련의 해체로 조지아, 우크라이나,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몰도바,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11개국이 그 해 동안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발트 3국은 독립을 인정받았다. 나머지 소련의 영토는 199112월 러시아로 재탄생되었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산주의가 폐지되었다. 1992년 유고슬라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슬로베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국명을 고쳤고, 이 국가 역시 2006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분리되었다. 2008년 세르비아는 다시 세르비아와 코소보로 분리되었지만, 코소보는 현재 미승인 국가로 남은 상태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당 통치를 폐지한지 3년 후인 1992년 해체되어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도 이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에티오피아 인민민주주의공화국, 남예멘, 몽골 인민공화국이 1990년대 후반까지 공산주의를 폐지했다. 공산주의의 폐지로 냉전도 종결되었다.

 

시장경제의 다양한 형식을 채택한 이후, 구 동구권 및 공산주의 국가들은 초기에 삶의 질이 일반적으로 쇠퇴했다. 정치적 개혁도 동반되어 공산당이 일당체제를 유지하는 국가는 중국, 쿠바, 라오스, 베트남이다. 북한의 경우 헌법 개정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가 아님을 밝혔지만 사실상 이들의 통치 체계는 스탈린주의에 가깝다. 서구의 많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조직은 사회민주주의의 원칙을 견지하며 기본 이념을 바꾸었다. 이탈리아와 산마리노의 공산당은 타격을 입었고, 마니 풀리테는 1990년대 초 이탈리아 전체를 휩쓸었다. 그러나 분홍색 물결은 1999년 베네수엘라에서 시작된 이래 1990년대 말 남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고, 2000년대 초까지 이 지역을 휩쓸었다. 유럽의 정치 구조도 크게 개편되어 동구권 국가 다수가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유럽 연합에 가입해 더욱 강한 경제 및 사회적 통합을 이룩했다.

   

1. 혁명 전조

1980년 말 발트 3국과 캅카스 산맥의 국민들은 모스크바의 정부에 자치를 요구했고,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의 몇몇 지역과 정당에서 통제권을 잃고 있었다. 198811월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자치를 선언했고, 이는 소비에트 연방 내의 다른 공화국들의 자치 선언에도 영향을 미쳤다.

 

19864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1989년 혁명의 주된 원인 또는 부분적인 원인이 될 정도로 소비에트 연방 내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낳았다. 정치적으로 재앙적인 결과가 나온 또다른 이유는 소련의 새로운 정책인 글라스노스트가 채택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경제적인 피해는 추산하기 어렵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따르면 소련은 180억 루블을 오염 및 정화에 사용했고, 결정적으로 이것이 소련의 파산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2. 개요

혁명의 역사적인 순간은 1989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혁명은 헝가리 인민공화국, 동독,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등 다른 동유럽 국가들로 퍼졌다. 이러한 혁명의 공통점은 시위가 거대한 봉기로 이어졌고, 일당 정치의 지속에 대한 민중의 반대와 변화의 압력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혁명 중 루마니아만이 유일하게 유럽 동구권에서 공산 정권이 폭력에 의해 몰락한 국가였다. 루마니아 정권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민중에 폭력이 가해진 사건이 여럿 있었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변화를 유도하지는 못했지만, 세계 곳곳의 다른 민중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같은 날인 64, 폴란드의 부분적 자유 선거에서 폴란드 자유 노조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1989년 여름 폴란드의 공산 정권은 평화적으로 몰락했다. 헝가리는 철의 장벽을 해제하여 동독 주민들이 헝가리로 이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는 결국 동독 지역의 불안정화를 야기했다. 이는 라이프치히와 같은 대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 것의 한 원인이 되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짐에 따라 1990년 독일의 재통일이 이뤄지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 말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가 이루어짐에 따라 14개국이 독립했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벨라루스, 조지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990년과 1991년 사이에 독립을 선포했고, 나머지 영토는 신생 공화국인 러시아 연방에게 199112월 넘어갔다. 1990년부터 1992년 사이에 알바니아와 유고슬라비아도 공산주의를 폐지했다. 1992년 유고슬라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슬로베니아,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으로 분리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국명을 변경했다. 이후 2006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 분리되었고, 2008년 세르비아는 다시 코소보와 세르비아로 분열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89년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로 1992년 평화롭게 분리되었다. 기타 사회주의 국가에게도 혁명은 영향을 미쳤다.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주의공화국, 남예멘이 공산주의를 버렸고, 몽골 인민 공화국에서는 혁명이 발생해 공산주의의 일당 체제가 붕괴되었다. 소련과 사회주의의 붕괴는 냉전의 공식적인 종식을 알렸다.

 

다양한 형태의 시장 경제를 채택하는 동안 생필품의 가격이 일반적인 수준으로 낮춰졌다. 정치적 개혁은 여러 지역에서 다양화되었지만, 중국, 쿠바, 라오스, 베트남, 북한은 전세계에서 일당 체제를 유지한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다. 서구의 수많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단체가 그들의 이념을 사회 민주주의로 변경하였다. 이탈리아와 산마리노의 공산당은 이탈리아 정치 개혁으로 1990년 위기를 맞이했다. 유럽의 정치도 상당히 바뀌었는데, 과거의 동구권 국가들이 북대서양 조약 기구, 유럽 연합 등에 가입하여 유럽 대륙 간의 경제적, 사회적 통합이 강화되었다.

 

   

3. 동구권 외부의 세계

19862월 필리핀에서는 독재 정권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피플 파워 혁명을 통해 몰아내고 새로운 대통령으로 코리 아퀴노를 선출했다. 1989년 혁명의 도미노 효과로 세계 각국의 다른 정권들도 영향을 받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헤이트 정권과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은 1990년대부터 서구의 자금 및 정치적 지원이 미약해지자 서서히 약화되었으며, 대한민국, 수리남, 중화민국, 니카라과, 인도네시아, 가나, 북예멘, 남예멘을 비롯한 여러 정부에서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1991년 인도 정부는 사회주의 노선을 버리고 신자유주의를 채택했다.

 

4. 배경

(1)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동유럽의 여러 국가들을 침공하고 점령했다.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이후 독일은 폴란드를 병합했지만, 이후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을 침공했다. 소련은 이후 미국과 더불어 연합국에 가담하여 독일군과 맞서 싸웠고, 폴란드와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오스트리아 등으로 진격하며 독일군을 압박했다. 1945429, 소련군은 나치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에 입성했고 194558일 나치 독일이 소련에 항복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나치 독일이 반공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에 동유럽 곳곳에서 나치 독일은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고, 이 결과 반나치 저항 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후 테헤란 회담과 얄타 회담에서 연합국은 중부 및 동부 유럽에서 소련의 지위를 인정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은 미국에 맞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부터 스탈린은 중국 내 공산당을 지원하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데 기여했고, 1950년 한국 전쟁에서 북한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소련은 아프리카 및 중동 지역에 개입해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아랍 국가들을 지원하고 앙골라 내전과 모잠비크 내전, 에티오피아 내전 등에 개입했다. 아시아 지역에서도 베트남과 라오스, 캄푸치아 민주 전선을 지지하고 미국과 동맹을 맺은 파키스탄을 견제하기 위해 이란 및 인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동유럽을 비롯한 각국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반대 운동이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소련에 무력으로 점령당한 발트 3국은 1956년까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정글 작전을 비롯한 각종 게릴라 전쟁을 수행했다. 동독에서도 스탈린의 죽음 이후 지나치게 전개되었던 스탈린화에 반대해 동독 노동자들이 1953616일부터 파업 시위를 벌였지만 소련군과 동독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같은 해 체코슬로바키아의 플젠에서도 공산당의 화폐 개혁 및 정치에 반대하여 봉기가 일어났다. 더 큰 규모의 봉기가 1956년부터 발생했다. 19563월 조지아의 트빌리시에서는 탈스탈린화에 힘입어 학생들과 국민들은 소비에트 정부의 변화와 조지아의 독립을 요구했다. 사태는 6일 만에 진정되었지만 조지아 정부와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566월 폴란드 포즈난에서 시민 봉기가 일어나 정부의 정책 변화를 촉구했고 같은 해 10월 폴란드 당국은 국민들에게 사회주의의 새로운 길을 약속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은 소련의 동유럽 정책에 위기를 가져왔다. 새로 집권한 임레 너지는 공산주의 채택 이후 헝가리의 경제 악화 및 스탈린의 죽음으로 소련 중심의 정책에서 탈피하고자 했고, 미국의 지지로 봉기를 일으켰다. 헝가리에서는 범국민적인 반소 운동이 제기되었고, 병사들과 무장한 시민들이 헝가리 정부에 맞섰다. 그러나 소련군의 개입으로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헝가리 혁명 이후 소련에 대한 반대 운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1960년 중후반부터 다시 반소 운동이 재개되었다. 아르메니아에서 1965년 아르메니아 집단학살에 대한 신원 복구 및 서아르메니아 합병을 소련 측에 요구했지만 이것이 묵살되자 봉기가 일어난 것이었다. 이후 소련 정부는 이를 일부 수용해 치체르나카베르드를 건립했다. 더 큰 규모의 반소 운동은 1968년 프라하에서 발생했다. 이것이 프라하의 봄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은 정부의 민주화 및 탈스탈린화를 요구했지만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의 침공으로 민주화 운동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반소 운동은 이후 폴란드, 소련 등지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이후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소련의 중앙집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2)폴란드 자유 노조 수립

1980년대 폴란드에서 노동자 조합이 독립적인 노조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는 19809월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자유노조의 설립으로 이어졌으며 이 노조는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81년 폴란드 인민 공화국의 수장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연대자유노조를 약화시키고 폴란드에 계엄령을 선포해 노조를 탄압했다. 노동조합의 모든 인원들이 투옥되었지만 공산주의 역사상 노동 조합이 국가의 기능을 반영하지 않고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했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3)고르바초프의 등장

몇몇 동구권 국가들의 개혁적 정책이 무산되었지만, 1950년대부터 제한적으로 정치 및 경제면에서 개혁이 시작되었다. 뒤이어 1985년 집권한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부분적 개혁에서 전반적인 개혁을 생각하고 있었고, 조금 더 거대한 자유화를 향한 동향을 나타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의 젊은 지식인들인 아파라트치크 계층이 고르바초프의 주도 하에 브레즈네프 침체기 동안 일어났던 여러 문제들을 되돌리기 위해 기능적 개혁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심각한 경제적 후퇴에 직면했고, 이를 되돌리기 위해 서구권의 기술과 신용이 필요했다. 소련을 유지하는 군대의 비용은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갔기에 소련의 위성국들에게 맡겨졌다.

 

주요 개혁의 첫 신호는 1986년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추진하고, 페레스트로이카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등장했다. 글라스노스트는 개방을, 페레스트로이카는 경제 구조의 재편을 의미한다. 1989년 봄이 되면서 소련은 언론의 자유화를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다당제 후보제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소련인민대표대회를 개최했다. 글라스노스트가 개방과 정치적 비판을 지지했지만.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입장과 궤를 같이 하여 허용된 것이었기에 여전히 제한은 많았다. 동구권의 다른 국가들은 여전히 비밀 경찰과 정치적 압력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모스크바 정부의 가장 큰 장애물은 서방 국가들을 철의 장막으로부터 차단하면서도 정치적, 경제적 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이었다. 소련의 군사적 개입이 중앙 유럽이나 동유럽 일대에서 시작될 것처럼 보였지만 모스크바 정부가 국가의 개편을 위해 서방 국가의 경제적 지지를 얻는 것은 어려워보였다. 고르바초프는 중앙 유럽 및 동유럽의 위성국가 정부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따라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헝가리와 폴란드의 개혁주의자들은 동에서 서로 확산되는 자유화의 물결에 의해 지나치게 고무되었고, 다른 동유럽 국가들은 회의적인 시각을 유지하며 개혁의 혐오감을 주장했다. 과거 경험 상 소련의 개혁은 통제가 가능했지만 기타 국가에서 변화에 대한 압력은 통제가 불가능했다. 이러한 정권은 소련의 군대와 그들의 지지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소련식 권위주의를 통해 정권을 유지시켰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실패로 끝날 것처럼 보였는데, 그 이유는 정통 공산주의자들인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 불가리아의 토도르 지프코프, 체코슬로바키아의 구스타우 후사크, 그리고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정권을 유지하며 변화에 대한 요구를 묵살했기 때문이다.[28] 이는 동독의 중앙위원회 중 한 사람이 "만약 당신의 이웃이 새로운 벽지를 붙일 때, 당신도 그렇게 할 필요는 없죠."라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5.공산국가의 변화

(1)중화인민공화국: 톈안먼 시위

 

베이징대 학생들은 '민주살롱(Democracy Salon)'이라는 동아리를 조직하고 중국민주의 앞날에 대해 열렬한 토론을 벌리곤 했다. 6.4민주운동의 주역 왕단(王丹)이 이날 모임에서 발언하고 있다

 

                                                                                   Students carry a memorial banner to Hu Yaobang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 서거 

 

 

 

 

 

 

 

 

 

 

 

 

 

 

                                                    Students on Tiananmen Square 23 years ago were dispersed with tanks and bullets

 

                         Twenty-three years after the massacre at Tiananmen Square, Chinese authorities continue to suppress the memory of it

 1982년부터 집권한 중국의 새 지도자 덩샤오핑은 1984년 중국 특색 사회주의라는 개념을 발달시켜 지역 시장주의를 도입하였지만, 정치적 변화는 정지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중국 학생들의 첫 시위가 198612월 헤페이에서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해외 유학의 기회 제공 및 캠퍼스 내에서의 선거, 그리고 서구 팝 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접근 허용을 요구했다. 그들의 시위는 정치적 분위기가 완화되고 개혁의 국면이 지연될 시기를 이용한 것이었다. 의장이자 덩샤오핑의 피보호자, 그리고 개혁지지자였던 후야오방은 시위에 대한 책임으로 중국 공산당에서 19871월 사임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톈안먼 시위는 1989415일 후야오방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후의 국장 당시 10만 명의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서 그것을 지켜보기 위해 모였다. 그러나 대강당에서 어떠한 지도자들도 나오지 않았다. 운동은 7주 동안 지속되었다. 고르바초프가 시위 중 315일 중국을 방문할 당시, 많은 해외 언론 기자들이 베이징에 있었고, 그들은 시위자들의 생생한 모습을 담으며 유럽에서 있었던 자유의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소련보다 먼저 급진적 경제 개혁을 시작한 중국의 지도자들과 그리고 공산당의 국무위원인 자오지양은 정치적 개혁을 추구하겠다고 밝혔으며 색깔 혁명처럼 무질서를 유발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은 시도하지 않았다. 198964일 전차가 톈안먼 광장에 진입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베이징에서 시위에 대한 군사적 진압은 많은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사상자는 여러 통계치에 따라 달랐기에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2)폴란드






                                                  폴란드를 방문한 부시 대통령과 회담을 하는 레흐 바웬사 폴란드 대통령

19884월과 5, 폴란드에서는 전국적으로 파업이 벌어졌다. 이후 두 번째 파업이 815일부터 시작되었다. 8월의 며칠 동안 17개의 광산이 파업에 들어갔고, 이후 822일부터는 그단스크 정박항의 노동자들을 비롯한 각지의 정박항 노동자들도 파업을 시작했다. 이는 1980년대 초 불법이었던 연대자유노조에 대해 노동자들이 다시 합법 노조임을 인정하라고 요구한 것이 발단이었다. 1988831일 연대자유노조의 지도자 레흐 바웬사는 공산주의 당국의 초청으로 바르샤바로 가서 그들과 회담을 했다. 1989118일 제10차 폴란드 연합노동당에서 울프리히 자루젤스키 의장은 합법화를 위해 연대자유노조와의 공식적인 협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이 좌절될 경우, 모든 당 지도부가 사퇴할 것을 압력받았을 때 달성될 수 있었다. 198926일 공식적인 회담이 바르샤바 대회의실에서 시작되었고 44, 역사적인 폴란드 원탁회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서 연대자유노조는 합법성을 인정받았고, 198964일까지 폴란드 자유 의회 선거에 대해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연대자유노조는 폴란드의 모든 선거에 압승을 거두었고, 이들은 대통령 직을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1989, 공산당의 두 동맹체였던 폴란드 연합인민당과 폴란드 민주당은 폴란드 연합노동당과의 동맹을 깨뜨리고 연대자유노조에 대한 지지를 선포했다. 폴란드의 마지막 공산당 총리였던, 체스와프 키슈차크는 비 공산당 계열이 행정부를 편성할 수 있도록 사임하겠다고 밝혔다. 노조자유연대가 정부를 만들 유일한 정치적 집단이 되자, 노조자유연대에서 총리가 나올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1989819, 반공주의 편집자이자 노조자유연대의 지지자인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가 폴란드의 총리로 임명되었고, 1968년의 프라하의 예처럼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개입해야 한다는 요청에도 소련은 어떠한 반대 의사도 나타내지 않았다. 1989824일 폴란드의 의회는 40년 동안 이어진 일당제를 폐지시켰다. 의회에서 마조비에츠키는 378표의 찬성과 4표의 반대, 그리고 41표의 불참으로 총리 직을 인정받았다. 1989913, 새로운 비공산당계 정부가 의회의 승인을 받았고, 이는 유럽 동구권 역사상 처음으로 수립된 민주정부였다. 19891117, 체카의 설립자이자 공산주의 탄압의 상징이었던 펠릭스 제르진스키의 동상이 바르샤바 은행 광장에서 철거되었다. 19891229일 폴란드는 국가의 명칭을 폴란드 인민공화국에서 폴란드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공산주의 단체인 폴란드 연합노동당은 1990129일 해산한 후 사회민주주의 단체로 개편되었다.

 

1990년 야루젤스키가 폴란드 대통령에서 사임하고 대통령직은 1990년 대선에 승리한 레흐 바웬사에게 넘어갔다. 바웬사의 대통령 취임은 19901221일로, 이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식적인 종식과 현대의 폴란드의 시작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19911027일 폴란드 의회 선거는 1945년 이후 처음으로 전면 자유제로 실시되었다. 이것은 폴란드의 공산주의 체제가 서구식 민주주의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소련군은 단계적으로 철수를 시작했지만 1991년 러시아 연방 수립 이후에도 러시아군은 주둔해 있었고 마지막 러시아 군대는 1993918일 폴란드에서 철수했다

 

(3)

헝가리

 

                                            In the 1980s, Hungary still had raw memories of Russian tanks putting down the 1956 revolution

 

Hungary's role in the 1989 revolutions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는 달리 헝가리는 1980년대 지속적으로 경제적 개혁을 추구해 성과를 얻었고, 제한적이었지만 정치적 자유를 허용했다. 그러나 주요 개혁은 1988523일 공산당 총서기가 카다르 야노시에서 그로츠 카를로시로 바뀐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19881124, 네메트 미클로시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이후 1989112일 의회는 "민주주의 패키지"를 채택했다. 민주주의 패키지에는 무역 다원주의,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헌법의 적극적 개정, 새로운 선거 제도 등을 포함되었다. 1989129, 헝가리 공산당이 30년 동안 주장했던 역사의 공식적인 관점과는 모순되게 중앙위원회 의장 포츠게이 임레는 헝가리의 1956년 반란이 반혁명을 위한 외국 사주의 시도보다는 인민 봉기임을 선언했다. 대규모 시위가 315일 국경일에 발생해 공산당 정권과 비공산당 정치 세력의 협상을 요구했다. 헝가리 원탁회의가 422일 시작되어 918일 협상은 성공리에 종결되었다. 회담에서는 공산당을 비롯해 새로 등장한 피데스,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동맹, 헝가리 민주주의 포럼, 헝가리 인민당, 헝가리 기독교 민주주의 인민당 등이 초청되었다. 이 회담에서는 헝가리의 미래 정치적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대표적인 예로 소욤 라슬로, 안탈 요제프, 오르반 빅토르 등이 있었다.

   

                                                       Taking down Hungary's border fence was to have far-reaching consequences 

198952일 철의 장막의 실질적인 첫 해제가 헝가리 인민공화국이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펜스를 철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수 만명의 시민들이 여름부터 가을까지 불법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을 넘어 서방 국가들로 이주하면서 두 정부의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98911, 공산당은 옛 총리인 너지 임레를 사면하였다. 이는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혁명의 책임으로 짧은 재판 이후 그를 불법적으로 처형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1989616일 너지 임레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부다페스트의 광장에서 국장을 받았다

 

1989918일의 원탁 회의의 내용은 6가지 법 조항에 반영되었다. 이는 헝가리 헌법의 전반적 개정, 헝가리 입헌 의회의 설립, 정당의 기능과 통제, 선거에서의 다당제 도입, 국가 원수와 의회의 분립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거 제도 또한 협정의 내용에 포함되었다. 절반 이상의 당원들은 비례제로, 나머지 절반은 다수결로 선출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권한도 약화시키기로 결정되었지만, 누가 대통령에 선출되어야 할 지와 언제 선거를 치를 지는 합의되지 않았다. 1989107, 공산당은 스스로 대규모의 의회를 재소집해 헝가리 사회주의 정당을 설립했다. 19891016일부터 20일까지 의회에서 다당제 선거와 직접선거를 채택했고, 1990324일 헝가리에서 첫 민주적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후 헝가리는 인민공화국에서 헝가리 공화국으로 변경되었고, 정부는 인간의 존엄성 및 민권을 보장하고 삼권 분립의 실현을 위해 법적 제도를 마련했다.[54] 헝가리를 점령했던 소련군도 1991619일 헝가리에서 철수했다.

 

(4)동독






                                                         베를린 장벽 중 브란덴부르크 문 구간에서 찍은 사진. 19891110

198952,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철거하기 시작하자, 철의 장막 일대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동독 주민들은 이 구멍을 통해 서방 국가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19899월 말에는 3만 명 이상의 동독 주민이 서방 국가로 도주했고, 이후 동독 정부는 헝가리 여행을 금지했다. 이러한 조치에 동독 주민들은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동독 주민들 수천 명은 중부 유럽과 동유럽 수도에 산재한 서독의 행정 기관을 통해 서쪽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특히 헝가리 대사관과 프라하 대사관의 독일의 정치적 개혁을 기다리는 수천 명의 독일인들이 8월부터 11월까지 대사관에서 캠프를 치고 대기했다. 독일 민주공화국 정부는 103일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폐쇄했고, 이로 인해 동독은 이웃 국가들로부터 고립되고 말았다. 도주의 마지막 기회가 차단되자 더 많은 동독 주민들이 114일 라이프치히에서 발생한 동독 월요 시위에 참여했다.



 

102일 라이프치히의 동독 월요 시위는 1만 명의 시위자들이 참여해 성공리에 끝났다. 그러나 동독의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이자 동독 총리인 에리히 호네커는 동독 군대에 시위자들의 사살을 명령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대규모 경찰과 군대, 동독 국가보안부, 그리고 노동 전투군을 주둔시켰고, 109일에는 톈안먼 광장 식의 학살이 계획되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했다.

 

1989106일부터 7일까지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독일 민주 공화국 수립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동독을 방문했다. 그는 동독 지도자들에게 개혁의 수용을 요구했다. 그는 독일어로 "Wer zu spät kommt, den bestraft das Leben" (너무 늦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는 유명한 속담을 인용했다. 그러나 호네커는 내부 개혁에 반대하였고, 그의 정권은 소련 출판물을 체제 전복용이라 판단하고 판매를 금지했다. 공산주의자들의 대량 학살이 유언비어로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1097만 명의 시민이 라이프치히에 모여 시위를 했다. 이들은 정부 당국에 발포를 금지했다. 1016일에는 12만 명의 시민이 라이프치히에 모여 시위했다.

 

에리히 호네커는 소련군이 동독으로 진입하고,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지지로 공산 정부를 복귀시키고 시민들의 시위를 탄압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1990년 이것은 실행하기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다. 소련 정부의 시나트라 독트린에 의해 소련은 동구권에서의 영향력을 종식시키겠다고 선언했고, 동독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서 소련은 중립을 유지했다. 계속되는 시민들의 봉기 및 시위로 동독 공산당은 1018일 호네커를 축출하고 그를 대신해 에곤 크렌츠를 서기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시위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1023일 월요일에 라이프치히의 시위 참가자는 30만 명이 되었다. 11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개방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모든 동독 주민들의 서독 이주를 아무런 제재 없이 허락했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지역 내의 철의 장막을 113일 철거하기 시작했다. 114일 동독 정부는 베를린 시위를 재가하기로 결정했고, 베를린 시민들은 최대 규모의 시위에서 자유를 요구하며 수도를 퍼위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한 피난민의 흐름을 막을 수 없었기에 동독 정부는 1989119일 시민들에게 서독으로 직접 여행하는 것을 허용했다. 귄터 샤보브스키가 TV 회담에서 정부의 계획 중인 변화는 지연 없이 즉각적으로 실현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서베를린으로 이동할 수 있게 요구해달라며 국경으로 집결하는 원인이 되었다. 국경 보위대는 무력을 사용하지 못한 채 주민들을 서베를린으로 이주시켰다. 이후 베를린 장벽이 시민들에 의해 붕괴되었다.

 

1113일 동독 총리 빌리 슈토프와의 그의 내각은 전격 사임했다. 새로운 정부는 더욱 온건한 공산주의자인 한스 모드로프의 주도 하에 개혁을 진행했다. 121일 동독 인민의회는 독일 민주공화국의 체제에서 공산당의 주요 역할을 제거했다. 123일 크렌츠는 공산당 서기장에서 사임했고, 3일 후 국가 수반 직에서도 사퇴했다. 127일 공산당과 다른 정당 사이에 원탁 회의가 개최되었고, 19891216일 동독에서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해체된후 독일 민주사회당으로 개편했다.

 

1990115일 동독 국가보안부의 수장은 시위자들로 붐볐다. 모드로프는 1990318일 자유 선거가 이루어질 때까지 사실 상의 동독 지도자가 되었다. 이는 1933년 이래 처음으로 동독 지역에서 이루어진 자유 선거였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패배했고, 동독 기독교 민주연합의 로타르 더 메치에어가 199044일 총리가 되어 서독과의 통일 절차에 속력을 내었다. 동독과 서독은 1990103일 재통일되었다. 옛 동독 지역에 주둔하던 러시아군은 199491일 완전 철수했다.

 

(5)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의 시위, 198911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은 지역 공산주의 정부 타도 혁명 중 비폭력 혁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891117일 금요일, 프라하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평화 시위를 의경이 진압했다. 여기서 사상자가 발생했는 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이 사건으로 19891119일부터 12월 말까지 범국민적인 시위가 연속으로 발생하였다. 1120, 평화 시위자 20만 명이 프라하에 집결했고, 다음 날에는 50만 명이 집결했다. 5일 후 레트나 광장에는 80만 명의 시위자들이 집결했다. 1124, 미클로시 자케시를 포함한 공산당의 모든 지도자들이 사임했다. 1127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서 2시간 동안의 파업이 성공리에 끝났다.



 

다른 공산 정부의 붕괴 이후 거리 시위가 증가했고, 이에 호응해 1128일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일당제를 종식하고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선언했다. 서독과 오스트리아에 있던 국경이 12월 초에 철거되었다. 1210일 구스타프 후자크 대통령이 1948년 이후 처음으로 비공산 정부의 수반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사임했다.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1228일 연방 의회의 대변인으로 선출되었도 19891229일 바츨라프 하벨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0년 체코슬로바키아는 1946년 이후 첫 민주 선거를 진행했고, 1991627일 마지막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철수했다.

 

(6)불가리아

198910월부터 11월까지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는 시위자들이 정치적 개혁 및 생태학적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이 시위는 탄압되었지만, 19891110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지 3일 후, 불가리아의 오랜 독재자인 토도르 지프코프가 위원회에 의해 축출되었다. 비교적 온건한 공산주의자이자 이전 외교부 장관이었던 페타르 믈라데노프가 그의 권력을 승계받았다. 소련은 지프코프가 고르바초프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지도부의 변화에 명백히 지지했다. 새로운 정부는 자유 연설과 집회에 가해진 제제를 즉각적으로 완화했고, 이는 1117일의 대규모 집회로 이어진다. 이후 불가리아에는 반공 단체도 드장하기 시작했다. 이들 대다수는 127일 불가리아 민주주의 연합에 참여했다.[59] 불가리아 민주주의 연합은 지프코프의 축출에 만족하지 않고 추가적인 민주적 개혁과 불가리아 공산당의 일당제 종식을 요구했다.

 

믈라데노프는 19891211일 공산당의 일당제 종식 및 다음 해의 다당제 선거를 선언했다. 19902월 불가리아 행정부는 공산당의 독점적 역할에 대한 헌법 조항을 삭제했다. 1990년 폴란드식 원탁 회의가 개최되기로 결정했고, 19906월 자유 선거가 예정되었다. 199013일부터 514일까지 원탁 회의가 진행되어 민주주의로의 전환이라는 합의가 도출되었다. 19904월 불가리아 공산당은 불가리아 사회주의당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버렸다. 1931년 이후 최초의 민주 선거가 19906월 이루어져 사회주의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7)루마니아





































                                                                                   1989년 12월 루마니아 자유화 민주화 혁명군 모습(사진)




현재 전해지는 영상에는 사형 판결 직후 차우셰스쿠 부부를 결박하는 장면과 건물 벽을 배경으로 하여 사격이 끝나가는 때, 그리고 사형된 두 사람의 모습과 사망을 확인하고 후처리를 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찍혀있다. 정작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은 당시 사용 중인 비디오 카메라의 전원이 끊어지는 바람에 촬영되지 못했다.

당시 처형 순간을 보도한 영상. 차우셰스쿠의 나이는 71세였고 엘레나의 나이는 73세였다.[사진]


1987년 브라초프 반란에서 살아남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공산당의 지도자로 198911월 재선출되어 5년간 집권할 수 있게되었다. 이 무렵 다른 유럽 지역을 휩쓰는 반공 봉기를 보고 그는 이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차우셰스쿠가 이란으로 국빈 방문을 준비하는 동안 그의 비서는 헝가리 개혁교회 목사인 토케스 라츨로 목사를 1216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라츨로는 포위되었지만 곧 봉기가 곳곳에서 시작되었다. 티미쇼아라가 1216일 첫 봉기를 시작했고 이는 5일 간 지속되었다. 이란에서 돌아온 이후 차우셰스쿠는 1221일 부쿠레슈티에 있는 루마니아 공산당 본부에서 그의 지지자들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충격적으로 시민들은 야유를 퍼부으며 그를 조롱했다. 이는 루마니아 시민들이 그에게 오랫동안 실망했음을 보여주는 예였다.

 

봉기가 확산되자 보안군은 차우셰스쿠의 명령에 따라 시위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그러나 1222일 아침 루마니아군은 편을 갑자기 바꾸었다. 이는 국방부 장관 바실 밀레아가 반역자로 누명을 쓴 이후 자살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는 것 때문이었다. 밀레아 장관이 사실상 사살되었다고 판단한 군은 혁명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군 전차는 중앙위원회 건물을 향해 진격했다. 시위자들은 중앙위원회 문을 열고 차우셰스쿠 부부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들은 건물에 대기 중인 헬리콥터를 타고 도주하였다. 다른 지역의 공산당과는 달리 루마니아 공산당은 바로 해체되었고, 현재까지도 루마니아에는 공산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차우셰스쿠의 도주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만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했다. 1225, 루마니아 텔레비전에서는 차우셰스쿠의 처형식을 공격했다. 이후 이온 일레스쿠가 이끄는 국가민주주의 전선 의회가 정권을 이양받아 19904월 자유 선거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들은 1990520일 선거를 미루었다.

 

(8)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해체와 내전 그리고 각 민족 자치정부 독자국가 수립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회원국은 아니었지만 요지프 브로즈 티토의 주도 하에 티토주의에 입각한 정치를 폈다. 이것은 티토가 형제애와 통일이라는 구호 아래 유지할 수 있는 다민족 국가의 개념과 부합했다. 그러나 1970년부터 1971년까지 일어난 크로아티아의 봄 이후 민족 간의 긴장이 증대되었다. 크로아티아는 이 때 더 많은 자치를 중앙 정부에 요구했지만 이는 묵살되었다. 1974년 헌법이 변화되고 1974년 유고슬라비아 헌법이 연방 정부의 권력을 자치 공화국과 주들에게 어느 정도 이양했다 1980년 티토의 죽음으로 민족 간 분쟁은 다시 격화되었고, 1981년 알바니아계 주민이 다수였던 코소보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84년 이래로 점진적인 자유화 정책을 추구해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모델을 따라하려고 했다. 이는 슬로베니아 공산당 연맹과 중앙 정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으로부터 긴장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 말 수많은 시민 사회 집단이 민주화를 진척시켰고, 문화적 다양성을 위한 공간을 확장하고자 했다.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시민 사회 집단과 공산 정권 사이에 충돌이 빈번이 발생했고, 이 중 대표적인 예가 슬로베니아의 봄이었다. 1989년 초 몇몇 반공 정당이 기능을 수행하여 슬로베니아 공산주의자의 영향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19901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연맹은 헌법 내 정당 사의 분쟁을 막기 위해 소집되었다. 수에서 밀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공산당은 1990123일 당 연맹에서 탕퇴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종식을 가져왔다. 양당은 다당제 자유 선거를 실시하고자 했다. 199048일 민주주의 및 반유고슬라비아 정당 DEMOS 동맹이 슬로베니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990424일에는 프라뇨 투지만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크로아티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마케도니아에서 이뤄진 199011월 선거에서 공산당과 민족주의 정당이 비슷한 표를 확보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지도부는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할 준비를 마쳤고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로그 혁명을 통해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 19901223일 슬로베니아 독립 선거에서 88.5%의 주민들이 독립에 찬성했다. 199152, 크로아티아 독립 선거에서도 93.24%의 주민이 독립에 찬성했다.

 

(9)알바니아



1991220 알바니아의 수도인 티라나에서 스탈린주의자인 노동당 총서기이며 알바니아인민공화국 건국자 엔베르 호자의 동상을 무너뜨리는 시위대 모습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의 지도자인 엔베르 호자는 40여년 간 알바니아를 통치하고 1985411일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라미즈 알리아가 정권을 서서히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89년 쉬코르다에서 첫 봉기가 시작되었고, 이는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에 알리 정부는 자유화를 허용해 1990년부터 해외 여행의 자유를 제공하는 등 각종 조치를 취했으며, 헬싱키 협정에 참여해 알바니아 내 인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65] 이러한 조치로 1923년 이래 최초로 알바니아의 자유 선거였던 19913,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집권했지만, 파업과 시민들의 반발로, 비공산당 계열을 포함한 내각이 열리게 되었다. 이후 1992년 알바니아는 완전히 공산주의에서 벗어나 민주적 제도의 기틀을 마련했다.

 

6. 몰타 회담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조지 H. W. 부시가 몰타 자유항에 정박한 소련 순양함 막심 고르키에서 회동하고 있다. 이 회담은 냉전 종식의 주요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와 소련의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몰타에서 1989122일부터 123일까지 회담을 가졌다. 이 때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며칠이 안 된 때였다. 몇몇 언론은[66] 몰타 회담을 얄타 회담 이후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이 회담을 언급했다. 얄타 회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럽에 대해 영국의 윈스턴 처칠,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논의한 것이다.



 

7.소련의 해체



소련군부는 소련공산당 보수파(교조주의) 입장보다 개혁파(수정주의) 입장을 지지했다[소련군인들이 시민혁명을 지지했다]











199171,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이 프라하에서 회담을 가진 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같은 달, 고르바초프와 부시는 미국-소련 간의 전략적 협력을 다짐하였다. 실제로 1990년부터 발발한 걸프 전쟁 당시 미국 주도의 다국적 연합군에 소련은 지지를 보냈고, 이라크에 대한 국제 연합의 제재에서 소련은 미국과 함께 찬성에 투표했다.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역에서 소련이 단계적으로 철수하자 1989년에 일어났던 혁명의 여파가 소련 전체에 반향을 일으켰다. 자치 국가 내부의 동요가 리투아니아에서 시작되었고, 발트 3국 전체와 아르메니아가 독립을 선포하는 것에 이른다. 그러나 소련 중앙 정부는 독립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군사 행동 및 경제 제재를 통해 독립 선포 국가들을 위협했다. 19911, 소련군이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진입하면서 분리운동을 탄압하려고 했지만, 소련군은 이후 철수했다. 이 외에도 조지아나 아제르바이잔 같은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들은 중앙집권적 통치에 맞선 약속들을 제시하라는 요구와 더불어 급속한 민심 이탈이 발생했다.


 

글라스노스트는 다국적 국가였던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 공화국들 내부에서 오랫동안 압력을 받던 민족주의적 요소들을 분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민족주의 운동은 소련의 경제가 급속히 악화됨에 따라 더욱 가속되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경제를 증진시키지 못함으로써 실패했고, 구식 소련의 계획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에 구성 공화국들은 자신들만의 경제 체계를 구축하고 소련 중심의 헌법을 지역 중심적 헌법으로 변경했다. 1990년 공산당은 70여년 간의 일당체제를 포기하는데 합의했다. 이는 소련 최고 위원회가 소련 헌법 조항에서 독재적 권위를 보장하는 내용을 폐지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공산당이 언론을 장악하는 것에 실패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는 소련의 과거 역사적 세부사항이 공개되는 것에 영향을 미쳤고, 시민들과 자치 공화국의 지도자들은 구체제를 불신하며 더욱 많은 자치 또는 실질적인 독립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소비에트 연방 내부의 회의에서 소련을 존속시키되, 조금 더 느슨한 형태의 연합으로 구성하자는 방침이 나오자 소련의 강경파들은 부통령인 겐나디 야나예프를 중심으로 19918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쿠데타에 맞서 더 많은 군대를 보내 이들의 노력을 붕괴시켰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복권되었지만, 그의 귄위는 실추했다.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이후 공산당 서기장에서 사임했고, 소련 최고위원회는 당을 해산시킨 후 모든 공산주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199196, 소련 정부는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8월 쿠데타 이후 수많은 구성 공화국들이 독립을 주장했다. 이 무렵 새로 들어선 러시아 정부가 소비에트 정부의 권력을 하나씩 승계함에 따라 소련 정부는 쓸모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1991121,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투표에서 찬성파가 압승을 거두면서 소련의 연방 제도가 위기를 맞았다. 이는 소련의 통일적 요소를 유지하려는 현실적인 움직임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1128일 옐친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지도자들을 만나 벨라베자 조약에 서명하면서 소련의 존재성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를 불법이라고 주장했으나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19911221, 소련을 구성하고 있던 12개의 국가 중 조지아를 제외한 11개국이 알마-알타 협정을 체결하여 소련의 해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후, 독립국가연합이라는 자발적인 협의체로 이를 대체하기로 했다. 고르바초프는 1225일 소련 대통령 직을 사임했고 1226일 소비에트 최고위원회는 벨라베자 조약을 합법이라 인정한 후 스스로 해산했다. 1991년 말 러시아로 이양되지 않은 몇몇 소련의 기구들이 해체되었고,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1993, 소련을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체제 위기로 확산되었지만, 러시아 정부가 이를 해결하고 지역 내 잔재한 소비에트 기구들을 완전히 해체함으로써 러시아는 완전한 민주 국가로 들어서게 되었다.

 

(1)발트 3


                                       발트의 길은 발트 3국에서 시작된 혁명으로 200만 명의 사람들이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한 사건이었다

발트 3국은 정치의 민주적 개혁을 실행하고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한 첫 국가였다. 이러한 독립의 과정을 노래 혁명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는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포함한다. 이는 에스토니아의 민족주의자이자 예술가인 하인츠 발크가 1988610부터 11일까지 탈린 노래 축전에서 벌어진 대규모 야간 시위에 대해 기사를 쓴 것에서 시작되었다. 에스토니아는 19881116일 자치를 주장했고, 리투아니아는 1989518, 라트비아는 1989728일 자치를 주장했다. 리투아니아가 1990311일 독립을 선언했고, 19일 후인 330일에는 에스토니아가 독립으로의 변환기에 들어섰다고 선언했다. 라트비아는 199054일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 선언은 소련이 거부하면서 마찰이 빚어졌다. 1991년 초 라트비아에서 바리케이드 사건이라 불리는 공산주의 세력의 탄압 운동, 그리고 리투아니아의 1월 사건 등이 대표적 예였다. 그러나 8월 쿠데타 이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완전 독립을 주장했고, 더 이상 통합되지 못한 소련군은 199196일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2)카프카스 지역

                                                                 198949일 트비리시 학살의 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조지아와 북캅카스 지역은 민족 갈등과 분리주의 운동으로 오랫동안 신음했다. 198949일 소련군은 트비리시의 시위자들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198911월 조지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21년 러시아의 침공과 지속되는 대량학살식 점령을 공식적으로 비난했다. 1991년부터 약 1년간 민주주의 활동가였던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가 대통령으로 복무했다. 그는 조지아의 독립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러시아는 조지아의 독립 주장 국가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아를 지지하였고, 러시아는 제1차 체첸 전쟁에서 조지아가 체첸 반군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조지아를 비난했다. 이후 쿠데타로 공산주의자인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대통령으로 집권했지만 2003년 장미 혁명으로 그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아르메니아에서는 독립 투쟁이 폭력을 동반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서로 맞섰다. 아르메니아는 이후 군사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아르메니아에서 이루어진 선거는 논란이 되어 정부의 부패가 드러나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의 독립은 19911221일 이루어졌지만 이후에도 호르자반의 부패는 이어졌고, 세르지 사르키샨이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아르메니아의 군대의 발전에 기여했고, 아르메니아에 민주주의적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친서구적 성향을 지닌 아제르바이잔 인민당의 엘치베이가 첫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엘치베이가 아제르바이잔 원유 생산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고 터키 및 유럽에 더욱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러시아와 이란이 지원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는 축출되었다.[70] 무탈리보프가 권력의 핵심인물로 떠올랐으나 그는 부패, 아르메니아와의 전쟁 패배, 그리고 정치 구조의 미완성으로 축출되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다음 대통령으로 집권해 2003년 아들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견고한 동맹국으로 남은 아르메니아와는 달리 2008년 조지아 전쟁 이후 아들 일함 알리예프는 터키와 서유럽 국가들, 그리고 미국과의 유대를 강화하며 러시아와의 유대는 약화시키고 있다

 

(3)체첸


                                                                                                  199412월 체첸 그로즈니에서 기도 중인 여성들


                                                                                         1차 체첸 전쟁[19941211~ 1996831]

체첸의 조하르 두다예프 장군은 발트 3국의 방식을 차용해 반공주의 정당을 결집시켜 체첸의 민주화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이후 체첸 공화국은 공산당이 선출하는 대통령제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199111월 체첸 대선에서 조하르 두다예프는 압승을 거두어 체첸 대통령이 되었고, 그는 같은 해 체첸-잉구샤 지역을 이치케리야 체첸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독립을 주장했다. 잉구샤 공화국은 체첸과 결별하기를 원했고, 조하르 두다예프 대통령은 이를 허용했다. 그러나 체첸이 원유 사업에서 러시아를 배제시키려고 하자 보리스 옐친은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쿠데타를 지원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에 러시아는 체첸을 침공해 제1차 체첸 전쟁을 일으켜 199412월 체첸을 포위하려고 했으나, 체첸군은 무기와 병력 몇에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산악 지역에서의 게릴라전과 뛰어난 습격전을 통해 러시아군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결국 1996년 보리스 옐친 정부는 체첸과의 휴전협정에 들어가 1997년 러시아-체첸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군의 피해는 공식적으로 5,732명이지만 다른 총계치는 3,500명에서 7,500명에 이르고 가장 높은 수치는 14,000명에 이른다

 

8. 기타 세계의 변화

(1)아프리카

아프리카 지역에 남아있던 공산국가들에는 앙골라, 모잠비크 등이 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1990년부터 1991년 사이에 민주화를 실현했지만, 앙골라와 소말리아, 모잠비크 지역에서는 내전이 발발했다. 앙골라의 경우 1991년 비세세 협정을 통해 다당제 선거 도입을 약속했지만[ 1992년 선거에 불복해 2002년까지 내전이 지속되었다. 모잠비크의 경우에도 1992년 로마 평화 협정을 체결해 공산주의와 비공산당 계열의 연립 정부 수립을 합의했다.

 

(2)오세아니아

오세아니아의 바누아투는 소련, 리비아를 비롯하여 사회주의 국가들과 친한 친사회주의 성향의 정치인이었던 월터 리니의 통치를 받았으나, 1991년에 물러나면서 월터 리니의 독재가 종식되었다.


1989년 혁명과 국영자본체제 붕괴[동유럽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날짜:

198964- 19911226

지역:

유럽 및 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

원인:

국영자본체제(국가자본주의 체제), 권위주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부정부패, 소련의 군사 점령, 경제 붕괴, 집단살해, 철의 장막, 종교 박해, 권력 남용, 강제노동, 숙청, 가난, 테러 등

목적:

경제적 자유와 민영자본체제, 유럽 통합, 자유 선거, 자본주의, 언론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인권, 노동권, 민주주의 등

 

종류:

시위 등 다양함

 

결과:

동구권의 몰락 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평화적 정권 교체.

냉전의 종결

독일의 재통일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이 유혈 혁명이 됨

소련의 해체

소련의 초강대국 지위 몰락

1991년 인도 국민 회의가 신자유주의를 채택

러시아 연방이 탄생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

유고슬라비아 해체 및 유고슬라비아 전쟁 발발

중국 민주화 운동의 유혈 진압, 1989년 톈안먼 사건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해산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회의론 대두

유럽 통합의 진전

성별 선택 낙태로 동유럽의 성비 변화

동구권에 인터넷이 확산됨

동구권에서 소비자 운동이 대두함

예멘의 통일

발트 3국의 재독립

몽골, 아프가니스탄, 베냉, 예멘, 모잠비크, 앙골라, 콩고 공화국, 소말리아에서 공산주의 붕괴

북한의 고난의 행군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 종결

미국의 문화가 동구권 국가에 전파됨

NATOEU에 동구권 국가 가입

중화인민공화국과 베트남의 시장 경제 도입

미국이 전세계적인 초강대국으로 발돋움

신세계 질서

소비에트 전후 충돌의 첫 발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종결

   

 

 

                                                           Red stars are removed as communism relinquishes its grip in central Europe 

 민주주의 반대는 공산주의가 아닌 독재주의(전체주의)고 자본주의 반대가 공산주의입니다. 자본주의민주주의 혁명 이후 자유주의(자유권)와 사회주의(사회권=생존권) 공존(존중) 자유사회(민주화 사회)입니다"

a.자본주의 3대 원칙[경제]은 사유재산, 이윤추구, 자유시장경쟁 등이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3대 원칙을 부정함으로 자영업(자작농)을 할 수 없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국가사회주의(자국 사회주의) 국영자본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b.민주주의 3대 원칙[정치]은 인민의(民有,Of the people), 인민에 의한(民治,By the people), 인민을 위한(民享,For the people) 민주정부(民主政府,Democratic Government)이다

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立憲君主國, 聯邦共和國).

국가사회주의(군국주의)와 투쟁한 2차대전 이후 공화국 대통령, 국가주석이나 입헌군주국 수상의 임기제한이 돼야 권력분리과 국민주권, 기본권보장, 법치주의, 사법부의 독립, 복수정당과 의회정치, 국제평화주의 등을 보장할 수 있었다.

[미합중국 수정 제22조(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
*이 수정조항은 1947년 3월 24일에 발의되어 1951년 2월 27일에 비준됨
제1절 누구라고 2회 이상 대통령직에 선출될 수 없으며 누구라도 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임기 중 2년이상 대통령직에 있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한 자는 1회 이상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없다
다만, 본 조가 효력을 발생하개 될 때에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자가 잔여임기 중 대통령직에 있거나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는 것을 방해하지 아니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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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 노선 중화인민공화국 등소평 헌법과 공산당 령도 중화인민공화국 습근평 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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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헌법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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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헌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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