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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역사상 초유의 일'... 죄수와 간수의 동반 탈북 사건 본문
BBC 코리아와 만난 북한 보안부 소속 간수 전광진(왼쪽) 씨와 죄수였던 김지선씨
"잡히면 죽겠다고 결심했어요. (약) 먹고 찔러서 죽자고. 그렇게 결심하니 무서운 게 없더라고요."
지난 7월 북한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있었다. 두만강 바로 밑, 한반도 최북단인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죄수와 간수가 함께 탈북한 것이다. '공화국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죄수는 브로커 출신의 39세 여성 김지선씨(가명). 간수는 제대를 1년 앞둔 26세 북한 군인 전광진씨.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인민보안부(경찰서) 내 구류장(구치소)이었다.
사상으로 무장돼 있는 북한 간수가 어떻게 죄수와 탈북을 감행했을까. 게다가 전씨는 북한 군복을 입은 채 총까지 들고 보안부를 빠져나왔다고 한다.
이에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체포조까지 보내며 격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6월 30일 판문점에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불과 몇달 전 북한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왜 있었던 걸까. BBC 코리아는 최근 모처에서 두 사람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약 5시간 동안 진행됐다.
전씨는 "북한 백성들은 눈이 있어도 못 보는 소경 같고 귀가 있어도 못 듣는 귀머거리 같고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벙어리 같다"고 했다.
김씨도 "돌아보면 우리는 작은 감옥에서 살았다"고 했다. 전씨는 실명 공개에 동의했지만, 김씨는 익명을 요청한 관계로 가명으로 소개한다.
지난 5월, 죄수와 간수로 처음 만나
전씨는 17세 되던 해인 2010년, 여느 북한 남성처럼 입대했다. 전씨가 배치됐던 곳은 온성군 보안부, 경찰 조직이었다.
지난해 5월 이곳으로 다시 복귀하기까지 다양한 임무에 동원됐다. 김일성 동상도 지켰고, 가축을 먹일 풀판도 조성했고, 수력발전소도 건설했고, 원산갈마해안관광지구의 아파트 미장 공사도 맡았다.
그는 "북한에서는 군대에 10년 있으면 세 군데의 대학교를 졸업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며 웃었다.
전씨는 온성군 보안부로 돌아온 후 계호원(간수)으로 근무하며 지선씨를 만났다.
"누나는 비법적 국제통신(불법으로 다른 나라와 전화하는 것)으로 잡혀 들어왔어요. 한국 지인의 연락을 받아 북한에 돈 전해주는 일을 했지요. 북한에서는 (다른 나라와) 한 통화만 해도 반국가 범죄입니다."
BBC 코리아와 인터뷰 중인 지선씨
전씨는 지선씨의 옷차림만 보고도 그가 '송금 브로커'였음을 알았다고 한다. "비법 전화하는 사람들은 다 옷 잘 입고 깨끗해요. 척 보면 (비법 전화하는 사람인 게) 표가 나요."
지선씨 역시 이런 불법 활동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다고 했다. "먹고 입고 쓰는 게 보통 사람보다 괜찮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과 상대해서 그런지 머리 수준도 깨었다고 봐야지요."
탈북 브로커, '벌이는 무한정'
지선씨는 초범이 아니었다. 2000년대부터 북한 주민의 탈북을 돕는 이른바 '비법 월경 브로커'로 일을 했다가, 같이 일하던 군대의 밀고로 2012년 잡혀 교화소(교도소)에서 5년을 복역했다.
"저희 마을과 주변 마을에서 탈북한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에게 자기 가족을 데려와 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아서 그 일을 하게 됐어요." 지선씨의 고향은 온성이다. 국경 지역에서는 탈북자도 많고, 그 때문에 브로커도 많다.
지선씨는 자기 밑에 다섯 명을 두고 일했고, 국경경비대와 협력했다. 그는 "군대를 모르면 그런 일(탈북 브로커)을 못 한다"며 "군대가 길을 안내해줘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함경북도 북쪽 끝 온성
"하기에 따라서 벌이는 무한정이었어요." 지선씨는 한 사람의 탈북을 도우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군대에 돈을 주고도 1만~1만5000위안(약 166만~250만 원)을 벌었다고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146만원에 불과하다. 브로커의 벌이는 일정치 않지만, 많게는 한 달에 4~6건을 진행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지 주민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셈이다.
"교화소에서 나와서는 다시는 안 한다 결심했어요. 살자고 하는 건데, 또 걸리면 총살감이라. 하지만 교화소에 있는 동안 남편이 두 딸을 데리고 재혼을 했어요. 부모님 댁에 임시로 거주하면서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또 하게 됐습니다."
지선씨는 그렇게 탈북 브로커와 송금 브로커로 두 차례 수감됐다.
앞이 보이지 않았던 두 사람
"미칠 것 같고 자살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지난 7월 초, 지선씨는 4년 3개월 형을 받아 큰 절망에 빠져있었다. 지선씨는 7월 21일 지방선거 이후 함경북도 회령의 전거리 교화소에 호송될 예정이었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이곳에는 약 3000명이 수감돼 있다. 영양 실조와 강제 노동, 인권 유린 등으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이때 전씨가 지선씨에게 제안을 했다. "누나를 돕고 싶어요. (보안부에 있다가 교화소에 가면) 죽을 수도 있으니 살아나는 길은 여기서 빠져나가는 길 뿐이에요."
전씨는 다른 수감자들이 듣지 못할 때는 지선씨를 '누나'라고 불렀다.
온성 인민보위부의 구류장. 두만강에서 1km가 채 안되는 거리다
앞이 보이지 않기는 제대를 불과 1년 앞둔 전씨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경찰이 되고 싶었는데, 우리 집이 힘들고 토대(출신)가 걸려서 안 된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고요. 발전(출세)하려고 해도 이래저래 안될 거 같았어요. 친척이 있는 곳에 가야 되겠다 생각했어요."
전씨는 한국에 친척이 있다. 전씨 아버지와 할머니는 이산가족 화상상봉을 한 적도 있다. 그가 BBC 코리아에 보여준 사진 뒤에는 한국 친척들의 이름과 주소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전씨는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품어왔고 브로커가 필요했다. 마침 그때 지선씨를 만난 것이다.
구류장을 탈출해 두만강까지 건너는 것은 전씨가 책임을 지고, 중국에서 한국까지는 지선씨가 책임을 지면 되겠다 싶었다
전씨가 북한에서 갖고 나온 남측 친척 사진. 사진을 보기 전까지 지선씨는 전씨가 스파이라고 의심했다
밀고로 두 차례나 체포됐던 지선씨는 전씨가 스파이가 아닐까 의심했다고 했다.
"내 심장이 뛰더란 말입니다. 죄인이 호송 중 탈출한 적은 있지만, 구류장에서 죄인과 간수가 같이 탈출한 것은 공화국 역사에 없단 말입니다. 간수 자체를 (사상으로) 무장된 사람을 넣기 때문에 죄수를 특별히 돌봐주는 건 있어도 이처럼 사상이 바뀌어서 탈출하는 일은 없단 말입니다."
전씨가 친척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야 지선씨는 전씨를 믿기 시작했다.
지선씨는 군 복무 도중에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해 제대 후 같이 탈북하자고 했다. 하지만 전씨는 지선씨가 다른 교화소로 호송된 후에는 탈출이 더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무조건 가자"고 했다.
공화국 역사에 없는 탈출 사건
지난 7월 12일 늦은 밤. 전씨는 새벽 3시~5시 근무였다. 전씨는 자정 근무자에게 "내가 5시까지 근무를 설 테니 들어가서 자라"며 "교대를 들여보내지 마라"고 했다.
전씨는 전날 미리 배낭을 싸놓았다. 먹을 음식, 갈아입을 옷, 독약, 칼 등을 담았다. "잡히면 죽겠다 결심했어요. (약) 먹고 찔러서 죽자고. 그렇게 결심하니 무서운 게 없더라고요."
전씨는 국경경비대에게 잡히면 자살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총과, 칼 그리고 독약을 준비했다
전씨는 지선씨를 깨워 미리 생각해뒀던 길로 빠져나왔다. 수감자들이 햇볕을 쬐는 일광욕장을 지나 예심과 사무실을 통과했고, 보안소 청사 뒷문으로 나와 담장을 넘었다.
지선씨는 총을 갖고 가는 전씨를 말렸다. 그러나 전씨는 총을 고집했다. "국경경비대 맞닥뜨리면 쏴죽이고 뛰게 되면 뛰고 못 뛰면 자총(총으로 자살하는 것)이라도 하리라. 나부터 잡히면 아무래도 죽여야 할 테니. 그래서 총을 갖고 나왔거든요."
담장을 넘은 후 두만강까지는 1km가 채 안 되는 거리였다. "어디로 갈까 생각했는데 무조건 보안소 담장에서 제일 가까운 데로 가자, 오늘 밤을 넘기면 잡혀 죽는다 생각했어요."
전씨는 철조망을 끊을 펜치도 챙겼다. 하지만 다행히 둘은 철조망 밑 작은 구멍을 찾아 철조망을 넘었고 곧 두만강에 입수했다.
강은 생각보다 깊어 금세 키를 넘었다. 옷이 들어있는 배낭은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전씨는 수영을 할 줄 알았지만, 지선씨는 할 줄 몰랐다.
전씨가 가지고 온 총
전씨는 한 손에는 총을 들고 한 손으로는 지선씨를 끌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계속 물을 먹고 가라앉았다. 지선씨는 다시 돌아가자고 했다.
"야, 우리 돌아가면 죽어. 죽어도 가다가 죽어야지." 전씨는 포기하려는 지선씨에게 소리쳤다. 그런데 사실 전씨도 속으로는 '내가 여기서 이렇게 맥없이 죽고 마는가'하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 순간 발이 땅에 닿았다. 중국 측 철조망에 이르렀을 땐 새벽 5시였다. 지선씨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막 심장이 멎고 숨이 막히고,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게 꿈 같고..."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두만강까지는 전씨가, 중국 땅부터는 지선씨가 책임지기로 했기 때문이다. 둘은 사흘간 숨어지냈고 한 조선족에게서 겨우 휴대전화를 빌려 브로커에게 도움을 청했다.
전씨가 현지 브로커에게 들은 바로는 북한에서 비상이 걸렸고, 북한은 중국에 체포조를 보내 중국 공안과 함께 체포 작전을 폈다. 전씨는 문제가 될 수 있는 권총을 모종의 경로를 통해 중국 공안에 전달했다.
'조선 사람들 삶은 어떻게 책임질 건가'
전씨는 '북한의 최고 지명수배자가 됐는데 어떤가'라는 질문에 덤덤하게 대답했다. "별다르게 생각되지 않아요. 북한에서 죽이러 와도 저는 떨지 않을 겁니다."
처음으로 북한 밖으로 나온 심정을 물었다. "(북한에서는) 자유 통제가 심하고, 모든 사람이 생활총화(자기반성)를 해야 해요. 여기서는 그런 것도 안 하고,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좋더라고요."
전씨는 '북한에서 죽이러 와도 저는 떨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지선씨 역시 "돌아보면 우리는 작은 감옥에서 산 것 같다"며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평양도 한 번 못 가봤다"고 했다.
취재진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전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조선 사람들 삶은 어떻게 책임질 건가"라고 말한 뒤, 그는 잠시 침묵했다. "백성들 세금 부담 없애고 개방 좀 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지선씨도 "가고 싶은 곳 가고, 하고 싶은 것 하는 게 개방인데, 우리는 그렇게 절대 할 수 없다"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될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살인보다도 엄하게 다스리는 '불순녹화물'
실제 북한에서는 '불순녹화물'에 대한 형벌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고 한다. 북한 당국이 최근 일반범죄 형벌은 줄인 반면, 불순녹화물로 불리는 한국, 미국, 일본 등의 영화, 드라마, 음악을 감상하는 건 더 강하게 처벌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씨는 "사람을 죽여도 3~4년 형인데 적국 영화 한 개, 드라마 한 개만 봐도 7~8년 형을 받는다"며 "북한 구류장 수감자의 50%, 많게는 80%는 마약을 했거나 불순녹화물을 봐서 들어온다"고 말했다.
역설적인 것은 불순녹화물 때문에 잡힌 죄수를 관리하던 전씨도 미국 영화를 봤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 '격술영화'를 좋아한다"며 "영화를 보면서 외부 세계, 특히 자본주의가 자신들이 들은 내용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북한에서는 북한 주민이 다른 나라와 전화를 하는 것은 '비법 국제통신'을 한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사람들이 자기만 알고 실업자가 많아 굶어 죽는다고 배웠는데, 일본 드라마 '장미가 없는 꽃집'을 보고는 그렇지 않아 내가 교육받은 것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불순녹화물과 달리 비법 전화는 군대에 뇌물을 줘서 형량을 줄일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 형벌은 더 강해지는 추세다. 송금 브로커일로 다시 잡혔지만 예상치 못하게 긴 형기를 받아 놀랐다는 게 지선씨의 말이다.
"저도 법을 아니까 많이 줘도 2년이겠다 생각했는데, 4년 3개월을 받았습니다. (비법) 손전화를 해서 4년 내리는 거는 엄청 많은 겁니다. 전에는 경하게 다스리고 교화소는 안 보냈어요. 그런데 점점 많아지고 손전화로 나라가 무질서해지고 사람들 머리가 마비되고 사상이 변질되니까요."
전씨는 "다 체제 유지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지선씨는 "사회주의를 지켜야 하니까"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비교적 밝은 모습이었던 전씨는 인터뷰 후반에 부모님에 대한 질문에 답하다가 '고향의 봄'을 부르며 눈물을 훔쳤다
'이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두 사람에게도 가슴 한 켠에 아리는 부분이 있다. 바로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이다.
전씨는 특히 아버지에 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전했다. "아버지가 충신은 되지 못해도, 역적은 되지 말라고 했는데. 죄스럽죠. 부모도 버리고 혼자 나왔으니까."
"북한에서 날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왕 도망친 거 남들보다 발전해서 통일돼서 떳떳하게 잘 돼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요. 부디 만날 때까지 신심을 잃지 말고 굳세게 살라는 소리밖에는 할 게 없어요."
아버지 얘기를 하다가 전씨는 갑자기 '고향의 봄'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선씨도 취재진도 침묵했다. 전씨는 "나는 우리 아버지랑 언제쯤 잘 살아보나"라고 나즈막하게 말했다. 그 누구도 답할 수 없었다.
취재진이 만난 당시 전씨는 영어 공부를 꽤 열심히 하고 있었다. 전씨의 영어 공부 노트 일부
전씨는 미국행, 지선씨는 한국행을 결정했다. 전씨는 미국의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는 꿈을 갖고 있다. 지선씨는 한국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지선씨도 "저 혼자 살자고 온 게 양심에 꺼린다"고 말했다.
"이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못 먹더라도 같이 살고 싶었는데. (한국에서) 열심히 살며 벌어서 가족들 잘살게 도우리라 생각합니다. 비법 손전화 아무리 통제해도 (송금) 그런 것은 막지 못합니다."
북한인권정보센터 조사에 따르면 탈북자 10명 중 6명이 북한에 송금한 경험이 있고, 응답자 중 68%가 앞으로도 계속 송금할 것이라고 답했다.
제3국으로 향하는 전씨. 현재 기약없이 미국행을 기다리고 있다
전씨와 지선씨의 구출을 도운 한국의 갈렙선교회에 따르면 지선씨는 한국에 들어왔고, 전씨는 제3국에서 미국행을 기다리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정책으로 미국이 과연 언제 전씨를 받아들일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미 국무부 난민 입국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9년 미국에 입국한 탈북 난민은 단 한 명도 없다. 탈북민들이 난민 자격으로 미국에 정착하기 시작한 2006년 이후 미국에 입국한 탈북 난민이 한 명도 없는 것은 지난해가 처음이라고 VOA는 보도한 바 있다.
갈렙선교회 김성은 목사는 "광진이가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면서도 "광진이는 기다릴 겁니다"라고 전했다.[BBC 뉴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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